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작업장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 -신병현

연구논문/『현장에서 미래를』37(1998/10)
작업장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
* [편집자 주] 이 글은 본연구소 제32차 콜로키움 발표문을 지면관계상 대폭 요약정리한 것이다. 원문은 연구소통신방(나우누리 → GO LABOR → 10번 →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 올려져 있다.
- H중공업 노동자와 활동가들에 대한 사례 연구 -
연구논문
작업장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
신 병 현
연구위원/홍익대 경영학 부교수
1. 노동과정론과 정체성 연구
근대 세계에서의 인간 소외와 노동의 문제는 사람들의 삶에서 핵심적인 의미의 원천으로 자리해 왔음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회과학에서는 노동이라는 통념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범주화를 추구해 왔다. 대부분의 사회과학도들의 논의 역시 맑스를 따라 건축가적 이미지를 통하여 인간 노동의 중요성과 창조성을 묘사해 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 Paul Du Gay, Consumption and Identity at Work, (London: Sage,1996), pp.11
그리고 산업사회학이나 근대 조직에 관한 연구들 속에서 노동(일), 임노동은 인간 생명성
) 황기돈, 「생동성의 경제학」, 『산업노동연구』, 제2권 2호, 55~67쪽
또는 안정적이고 일관된 자기 정체성의 핵심적인 원천으로 자리해 왔다. 노동이 임금을 받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해온 중요성은 또한 근대 세계의 중요한 사회적 프로젝트로서 소외 없는 세계에로의 다양한 지향들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 분화와 통합의 문제틀 속에서, 그리고 국가 권력을 비롯한 각종 조직화된 사회 기구들에 있어서(나아가 가족 관계나 인간 관계들을 포함하는 타자와 그들의 행동과 통제에 대한 관심들 속에서는 언제나) 사회 공학적 관리 기술의 대상으로 늘 관심의 초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 Nikolas Rose, "Identity, Genealogy, History" in Stuart Hall & Paul Du Gay eds.(1996), Questions of Cultural Identity, London: Sage, pp.128-150 여기서 그가 말하는 기술은 "다소 의식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일종의 실천적 합리성에 따라 구조화된 어떤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기술은 인간에 대한 특정한 전제들과 인간을 위한 목표들에 의해 프로그램적 수준에서 지지되는 것들로서, 지식들, 도구들, 사람들, 판단 체계, 건물과 공간들의 잡종적 총합(hybrid assemblages)인데, 여기에는 훈육적 기술과 사목적 기술이 포함된다. 학교, 감옥, 수용소는 푸코가 훈육적 기술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들이다.
따라서 산업화와 연관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주요한 산업사회학의 노동과정 연구들이나 경영담론에서는 노동윤리와 노동의 가치가 한결같이 강조되었고,
) C.Perrow, Complex Organizations: A Critical Essay, (N.Y.: Random House, 1979), R.Bendix, Work and Authority in Industry, (N.Y.:John Wily & Sons, 1956), N.Rose, Governing the Soul: the Shaping of the Private Self, (London: Routledge,1989).
노동과 관련된 주체의 생산이나 정체성의 형성이나 변형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 이에 대해서는 Rose Nikolas(1989), Governing the Soul: the Shaping of the Private Self, London: Routledge.
전통적으로 노동자 주체성 및 정체성에 관한 논의들은 맑스주의자들의 경우에는 객관적 소외 논의로, 베버나 뒤르케미안의 경우는 정반대로 무력감이나 도구주의적 가치 지향성에 대한 관심과 같이 주관적인 소외 현상에 대한 논의로 표출되었으나, 양자는 결국 객관적 소외 구조와 의식 혹은 가치 지향성의 탈구 논의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 Paul Du Gay, 윗책, pp.9-27
노동자 의식과 집합 행동에 관심을 둔 대부분의 맑스주의적 계급 연구나 노동과정 연구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객관적 소외로서 노동의 결과물로부터의 소외 현상을 강조하면서 유적 존재(species-being)로서 노동자들의 인식 부재를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도식은 구체적인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과는 유리될 수밖에 없는, 초월적 존재의 인식 능력과 같은 계급 의식이라는 관념에 더하여, 주체들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구조적 모순으로 추상화, 일반화시키는 엘리트주의 및 환원주의적 경향을 띠어 왔다.
) 우리는 이러한 추상화의 위험성 즉, 사고 수준에서의 과학적 추상의 현실화, 자립화가 야기하는 사회 관계의 엘리트주의적 조직과 운영의 문제점을 도덕적 주체의 조형과 관리기술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조직 맥락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20세기말에 이르러서는 그 모순의 폭발을 가히 야만적인 강도와 거대한 규모로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같은 자아에 대한 사회 통제 기술에 관한 관심은 조직 심리학을 비롯한 경영담론들에서 그리고 노동 소외에 관한 비판적 관심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제 중의 하나다.
이러한 모습은 베버주의자나 뒤르케미안의 산업사회학적 전통 속에서도 정반대의 방향에서 출발할지언정 객관적 소외현상을 전제하고 분석을 출발하고 결과로서의 소비영역의 문제점들과 노동자들의 가치지향성의 원인과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동일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왔다.
) Paul Du Gay, 위의 책.
이러한 객관적 소외현상에 대한 관심의 과잉은 사실상 근대 세계의 주요한 특징이었으며, 노동과 관련된 사회과학의 연구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요한 경향들을 산출하였다. 그것은 바로 (그것이 절대적 구분이든 분석적 구분이건 간에) 생산과 소비의 구분, 公과 私의 구분, 일과 여가 혹은 노동과 비노동(work/non-work)의 구분,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구분 도식의 일반화 현상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이분적 구분 도식은 그동안 많은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에 의해 비판되어 온 도식, 이데올로기적 통념들이다. 그러나 노동연구나 작업장 문화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쟁점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외의 근원이 노동자들의 가치지향성이나 태도 등과 같이 의식속에 있기 때문에 '직무충실화 프로그램'과 같은 기법들로 노동자들의 소외를 줄일 수 있다고 보는 산업사회학 및 산업심리학적 설명들에 정면적으로 반대되는 연구를 통해서, 노동과정의 분업이 야기하는 객관적 계급구조의 변동과 계급의식의 문제를 사고한 대표적인 연구는 브레이버만(H. Braverman)의 『노동과 독점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뷰러웨이 등의 비판처럼 소외의 주관적 측면을 배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의식과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들어갈 수 없는 한계를 보였다.
) Thompson, Paul & David McHugh(1995) Work Organizationss: A Critical Introduction, 2ed., London: Macmillan,(1988), "Crawling the Wreckage: The Labour Process and the Politics of Production" in Knights, D. & H.Willmott (eds.) Labour Process Theory, London: Macmillan, pp.95-124
뷰러웨이는 노동자들의 주관적 경험을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통해 조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의 재생산 기제로서, 잉여창출의 은폐와 착취의 불명료화를 야기하는 다양한 기제들을 포함한 작업장 체제(factory regime)와 노동자들의 작업장 게임규칙에의 자발적 연루 메카니즘들을 밝히고자 하였다.
) M.Burawoy(1979), Manufacturing Consent, Chicago:Univ. of Chicago. (1985), The Politics of Production, London: Verso.
그의 생산 시점(site)에서의 '동의의 생산'에 관한 논의는 노동자들의 특정한 정체성이 작업장에서의 노동 관행속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창출됨을 잘 보여 주고 있지만, 작업장에서의 동의의 생산이 어떻게 해서 작업장 외부의 사회적 맥락, 즉 노동자 개인적인 조직외적 경험들이나 성, 연령, 인종 등과 같은 사회적 속성들과는 독립적일 수 있는지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우선 '생산', '노동'이라는 범주에 지나친 존재론적 우선성을 부여하는 것이 문제시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맑시스트들이 그래왔듯이 뷰러웨이도 맑스를 따라서 노동이 인간을 유적 존재로 형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활동으로 봄으로써, 종족성, 성, 연령 등의 사회적 존재 양식들이 모두 노동에 의해 매개되거나 결정된다고 간주하는 본질주의(essentialism)에 빠지게 된다.
) 이러한 비판은 Paul Du Gay, 윗책, pp. 17-18을 참조할 것
창조적인 노동이나 그것을 보상하고자 하는 행위에의 참여함(예컨대, 작업장에서의 게임)으로서 인간 본질(essence)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것이 오직 노동뿐이라는 가정은 방법론적 편의주의라는 비판 뿐 아니라, 기존의 구조화된 남성주의, 인종주의 등에 대한 지배적 권력 관계의 존재론적 지형을 그대로 인정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런 가운데 이루어지는 주체성 및 정체성 연구와 그에 따른 실천은 자연스럽게 지배질서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과정에 연루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또한 생산에 대한 강조의 과잉은 앞서 지적되었듯이, 가족과 같은 '사적' 영역이나 소비 및 여가 영역과는 대조적으로 '공적인' 임노동 영역만을 인간 존재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산출해 왔다. 이에 따라서 노동과정의 분석은 자연스럽게 가시적인 통제 기제를 강조함으로써 지나치게 수동적인 노동자의 이미지를 산출하거나(브레이버만이나 일부 푸코주의적 경향들), 정반대로 작업장 내부의 행동들을 외부의 정치과정으로 환원시킴으로써(대표적으로 산업사회학의 가치지향성 연구들이나 개인사나 가치 및 태도를 강조하는 조직심리학 및 경영담론들에서 나타나는 경향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속에서 하나의 노동력으로 어떻게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키는 경향을 띤다.
사실상 기존의 노동과정 연구들에서는 기업의 관리적 통제하의 작업장내 노동자들이 구체적 노동과정 속에서 체험하는 사회·문화적 관계들(lived relations)에 관한 연구나 가족 및 친지 등 직장 외적 사회 관계가 노동과정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연구는 많지 않았다.
) 특히 한국에서는 그러한 연구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의 경우에는 대표적으로 뷰러웨이(Michael Burawoy)와 영국의 CCCS 초기 연구를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M.Burawoy, Manufacturing Consent와 The Politics of Production 그리고 John Clarke, Chas Critcher and Richard Johnson (eds.),(1979), Working-Class Culture: Studies in history and theory, London: Hutchinson & CCCS을 참조할 것.
전통적으로 산업노동 관련 담론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생산과 소비, 공과 사, 일과 여가를 대립 관계로 설정해 놓고, 이 사이의 탈구 또는 비조응 현상을 허위의식의 극복을 통한 의식화(각성이)나 규범적 통합(가치 혹은 도덕적 지향성, 태도의 변화)의 사회적 기획으로 봉합하려는 시도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주체성이나 정체성과 관련된 논의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뷰러웨이의 경우도 분석적 관점을 생산에 제한함에 따라서 작업자들의 체험된 관계와 사회적 관계들이 노동자들의 정체성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분석에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게 된다.
) 이러한 문제는 분석 결과의 실천적 함의와 관련해서도 구조결정론적 기계론에 다시 함몰될 위험을 초래한다.
2. 분석틀의 탐색
최근의 신자유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자본 합리화는 생산의 합리화 뿐 아니라 소비 및 일상생활의 전 영역에 이르기까지 상품·화폐 회로로 통합시키면서 새로운 '소비자 문화'의 재창출을 꾀하고 있는 것 같다.
) Don Slater, Consumer Culture & Modernity,(Cambridge: Polity, 1997), pp.9-16
영국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경향들은 노동자들의 삶의 형태 전반에 많은 변화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고, 기존 문화형식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문화형식들의 등장을 초래할 수는 있다.
) 영국의 경우, 전후 급속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나타난 전통적 노동자 문화형식의 해체와 지속의 역동성에 관한 논의는, Paul Corrigan & Simon Frith(1976), "The Politics of Youth Culture" in Stuart Hall & Tony Jefferson(eds.), Resistance Through Rituals: Youth subcultures in post-war Britain, London: Hutchinson & CCCS.
우리사회의 대기업 노동자들이 겪어 온 지난 20여년의 경험은 '조국근대화의 역군', '산업전사'로서 '00가족'으로서 가족구성원들의 생계와 학업유지를 위한 '희생자'로서 다양하게 경영담론 및 정치담론들에 의한 상징적 의미부여로 점철된 과정이었다. 이와 같은 추상적인 구호와 담론의 홍수속에서 자신을 보아 온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87년 이후의 노동운동의 비약적인 발전 경험은 기존 농촌사회의 가족 및 연줄 중심적이며 가부장제적인 사회 규범에 의해 강하게 규제되어 왔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정체성 형성과 문화형식의 발전에 중요한 준거로 작용하였을 것이고 전통으로부터 '탈규제되고' 산업화 가치에 의해 '재구성되고 있는' '노동자 문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대기업 노동자들의 비교적 장기간의 근속 경험과 가족의 구성에 따른 가장으로서의 독립적 생활은 친인척과의 기존의 관계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가정 형성을 가져 오고 회사와 가정과의 관계의 밀도가 한층 증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노동자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 맺는 주요한 사회적 관계들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의미있는 사회적 타자로 작용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사회적 정체성의 형성과 변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적으로 노동자들이 귀속적으로든 성취를 통한 것이든 참여하게 되는 '공동체적' 관계들을 회사와 가족, 그리고 노조와 보다 추상적 관계속에서 참여하는 민족 및 국가 공동체를 분석적 초점으로 설정하였다.
국가경쟁력이나 생산성 증대를 강조하는 주요 정치 및 경영담론 그리고 면접과정과 주요 노동조합의 생활 실태 조사 자료들은 90년대 이후의 호황기 국면에서의 주요 변화로서 임금인상과 소비성향의 증대가 지적되었고, 노동자들에 대한 소비생활 조사나 사기조사 자료들이 보여 주는 임금 불만족 그리고 노조 활동가들이 진단하고 있는 '노동자 도구주의와 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화 경향'에 직면해 있음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 『현대중공업 활동가 상태와 의식조사』, 97. 11, 현대중공업노동조합,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그렇다고 해서 우리사회의 대공장 노동자들이 과연 임금에만 도구적으로 관심을 갖고 '자율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행동 패턴을 보이며, 여가나 소비를 즐기는 '윤택한' 노동자상이나 소비자 문화에 어느 정도로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는 과거 87년 이후 10여년간 보여 온 집합적 노동자로서의 행동과 최근의 변화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로의 변화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또한 우리사회의 집합적 노동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맥락의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는 가의 문제와 관련된 질문이다. 과연 87년 이후로 나타났던 집합적 노동자의 위세 과시가 하나의 독특한 '노동자 문화형식'의 표현인지 아닌지, 그리고 이러한 문화형식이 기존의 것들과는 '단절된' 혹은 '탈규제된(de-regulated)' 문화적 표현인지? 그리고 최근의 '변화된' 노동자 행동 성향과 삶의 양식들을 이전의 것들과는 또 다른 전혀 새로운 문화 형식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80년대 중반 3저 호황과 자주적 노동조합의 설립 이후로 주요 대기업 그 중에서도 중화학 공업 종사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 수준은 크게 인상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담론이나 경영담론에서 강조해 왔듯이, 대기업 노동자들이 '윤택한(affluent)'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가?
) 포드주의적 축적하의 노동력 재생산구조의 변화 양상을 추적한 드문 연구 중에 한 연구로, 정건화(1994), 「한국의 자본축적과 소비양식의 변화」, 『경제와 사회』, 21호, 봄호, 20~44쪽을 들 수 있다. 비록 이 글에서 그는 87년 이후로 나타나는 생활수준의 향상과 소비양식의 고급화 경향을 말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전형적인 포드주의적 대량생산과 소비양식에서의 변화일 뿐이다.
자본의 이윤율이나 노동분배율에서의 괄목할 많한 패턴 변화가 있었는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 예컨대, 정명기(1996), 「포드주의적 임금결정방식에 관한 연구: H사의 사례를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권1호, 135~158쪽
주기적인 임금인상을 통한 경제적 궁핍의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탈피가 이루어 지고 이들이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지닌 소비자군화되었다고 할 때, 과연 이 노동자들의 소비패턴이나 생활패턴에서의 변화를 도구주의나 개인주의와 같은 행동 및 가치 지향성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서구의 청년층(18∼30세 후반)에게서 드러나는 중간층의 미국적 생활 스타일은 우리사회의 경우 극히 소수의 부유한 가정의 청소년층이나 '신 부르주아'라고 부르디외가 말한 연령이 많지 않은 자영의 전문직층에게서나 간혹 드러날 수 있는 예외적인 경향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백화점 세일시 몰리는 소비자들이 비교적 중간수준의 구매력을 지닌 소비층이라고 보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소비 패턴은 여전히 대량생산된 표준화된 상품의 구매에 치중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동자 생활 실태조사에서 드러나는 자동차나 가전제품 등 내구재의 구비가 노동자 생활 수준의 향상의 지표인양 거론되기도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포드주의 체계하의 표준화된 상품의 소비패턴일 뿐이다. 물론 연령 별 소비지출 패턴에서 약간의 차이는 드러나지만 이는 결혼을 통한 가정 형성 여부로 설명될 수 있는 생애 생계비 지출 패턴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단지 노동자들이 생산-소비의 순환적인 경제체계의 상품-화폐 관계속에서 월급여 액수나 임금인상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80년대 말 이후의 '상대적인' 소비패턴의 변화가 '풍요'속의 노동자상이나, 소비자 문화 패턴으로의 변화 혹은 도구주의적 경향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 Paul Du Gay, 윗책, pp.25-27
노동자 삶속에서 소비가 지닌 중요성은 포드주의하의 표준화된 대량생산 시스템의 기능에 수반되는 노동력 재생산 및 문화형식의 변화와 같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한편, 전통적 문화형식들의 지속과 변동에 관한 견해 차이들이 있다. 김동춘은, 한국의 노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연대지향성과 기업협력적 행동의 모순적 공존은 한국 노동자가 기업과 진정한 공동체성(?)을 느낄 수 없는 조건에 있으나 저항 행동 역시 차단당하고 있는 구조적 조건의 반영" 때문이라고 보고, '임금에만 관심을 갖는' '노동자 이기주의'나 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화' 경향을 '자기보존적 이기주의', '기회주의' 혹은 '실리주의'로 설명한다.
) 김동춘, 윗글, 115~116쪽
그는 노동자의 '실리주의적' 성향을 강력한 국가 억압아래 "무력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자연스런 행위양식"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의 견해에 따르자면, 노동자들의 실리주의는 언제나 있었던 것이고, 이에 대한 활동가들의 '서운함의 표현'은 자신의 활동에서의 무력감을 동료 조합원 노동자들에게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결국 그는 생산현장에서의 민주화나 시민적 권리의 확보를 위한 노동운동의 발전에 있어 민주화와 집합적 정치 의식의 제고와 법적 제도적 형식화를 위한 노력과 같은 노동자·노동운동의 각성이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이 된다.
이와는 약간 다른 견해를 보면, '노동자들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경제적 수준 향상'과 대기업 노동자들의 '생애주기의 변화', 투쟁 일변도의 노조활동 경험에서 온 '패배의식', 억압적 노무관리의 약화 및 개별화된 통제와 같은 '미세하고 부분적인 것'들에 대한 '중앙' 집중적 통제, 노조활동에 대한 불이익 대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게다가 현장 활동가들과 노동조합이 변화하는 자본의 통제 전략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것도 중요한 원인으로 본다.
) 현대중공업노동조합,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윗책, 120~123쪽
따라서 임금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나 실리주의적 행동 경향은 항상 이미 있었던 정치적 억압 때문이라고 보기 보다는, 자동차 등 기타 내구재 소비의 증가나 자녀교육 투자와 같이 생애주기 상의 변화로 인하여 겪는 금전적 압박과 회사의 변화된 통제, 그리고 노조 및 활동가들의 대응력 부재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노동통제(이에 덮붙이자면 자본의 운동 양식)와 노동자들의 행동 성향을 비롯환 삶의 양식에서의 변화가 초래되고 있으며, 변화하는 이러한 정세적 조건에 따른 노조 및 현장활동가의 변화가 무엇 보다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활동가 조직 문제나 교육 문제가 당면한 과제로 제기될 법하다.
우리의 질문에 비추어 볼 때, 위의 김동춘의 진단은 집합적 노동운동의 역사속에서 87년 이후로 나타난 집합적 노동자의 위세 과시와 노동자들의 삶의 양식은 하나의 독특한 '노동자 문화형식'의 표현이라고 보기 힘들며, 이러한 문화형식이 기존의 것들과는 '단절된/ 탈규제된' 문화의 표현형식도 아니라는 해석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의 견해에서 보면 최근의 변화된 노동자 행동 성향과 삶의 양식들을 이전의 것들과는 다른 문화형식의 표현으로 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된다.
다른 한편, 김동춘의 견해에 따르면 한국의 정치 경제적 주변성이 노동운동 자체를 주변화시키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노동영역이 지닌 주변부적 한계를 노동자 정당과 산별노조와 같은 법적, 제도적 형식들을 확립함으로써 극복해야 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이 경우,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범세계적 자본운동의 맥락속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주변부적 성격을 과연 일국적 시민운동속에서 어떻게 이론적, 실천적으로 용해시켜 극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단지 구호로만 남을 뿐인 '국제연대' 운운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 싶다. 이는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 운동 전체가 주변부성 혹은 제국주의적 지배질서에 대한 인식론적, 이론적 성찰이 부족했던 이유에 기인한다고 본다. 맑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달결하라'고 말했던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어느 누구도 인식론적, 이론적 문제로 현상황을 진단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 오히려, 복거일과 같은 자유주의 문필가에 의해 촉발된 외국어 논쟁으로 이 문제는 희화화될 수 있었을 뿐이다. 조선일보 1998년 7월에 실렸던 한영우(7.9), 이윤기(7.12), 최원식(7.20) 등의 논쟁을 참조할 것.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한국 노동운동에서 과연, 성, 인종, 지역주의, 종교 등과 같은 몰적 차별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있었는가? 김동춘의 문제제기는 비록 명시적이지는 않았지만, 탈신민성 (post-coloniality)문제는 매우 긴요하고 긴급한 이론적 문제제기인 듯 싶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견해는 다시금 노동조직의 법적, 제도적 형식화나 정당 문제로 퇴행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제영역들이 갖는 특수성을 '시민운동'으로 조급하게(?) 혼합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이끈다. 지난 97년 1월의 총파업시, 어떠한 새로운 성찰도 없는 가운데, 노동자의 '시민적' 분노를 도구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총파업을 철저하게 타락시켰던 점을 상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주변성 혹은 주변화 메커니즘과 과정에 대한 문제를 정반대 방향으로 즉 중심과 정체성을 설정하는, 즉 또 다른 외부를 창출할 개연성을 창출하는 전략을 택하는 것같다.
) 이러한 견해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억압적 지배구조하의 노동자들은 본질적으로 해방적인 잠재성과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역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즉자적 계급으로서), 그것들은 언제라도 정치, 경제적 위기의 조건만 형성되면 봉기적 속성이 폭발적으로 발현될 것'이라는 기계론적이며, 본질주의적인 전제다. 여기에 실패에 대한 희생양을 정치적으로 각성하지 못한 개인에서 찾는 지식인의 간지가 숨어 있지 않은가? 사회주의의 실패 경험은 단지 남의 이야기일 뿐인가? 파시즘의 맹아는 우리 주위에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두번째 진단은 대체로 현시기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노동자들의 변화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인 가운데, 현장에서의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특히 노동자 및 활동가들의 일상생활과 조직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을 다양한 길들에 개방적이다. 이 진단에서 특히 주목할 수 있는 점은 가족에 대한 암묵적인 강조이다. 가족은 전통적으로 산업사회학에서 강조되어 온 중요한 재생산 장치였다. 또한 신보수주의 담론에서 강조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가족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기존 질서의 위반이나 일탈을 새롭게 가두는데 효과적인 장치로서 복고적인 가족에 대한 기능에 초점이 두어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노동자의 경우 특히 활동가 그룹의 경우에, 가족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왔던 것 같다. 주택 문제로부터, 융자 문제, 자녀 교육 문제, 나아가 최근의 능력주의 인사제도와 잔업 문제에 이르기 까지 가족 부양의 부담자로서 노동자가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 같다. 87년을 거처서 90년대의 운동 경험은 부모와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결혼과 가족 형성을 통한 가장(부양자)로서의 역할과 지속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과거 70, 80년대에 '조국 근대화의 역군' 혹은 '산업전사'로 호명되었던 노동자 주체 형태와는 분명히 다른 노동자 주체 형태에 대한 확인 필요성과 활동가 조직 및 그들의 활동 방식과 내용에 대한 검토와 대안의 탐색이라는 과제를 제기한다.
본 연구에서는 설문조사 결과를 검토하여 작업장을 중심으로 맺게되는 사회적 관계선들에 초점을 두고 다음과 같은 분석요소들을 추출하였다.
) 본 연구에서는 연구자가 한노정연의 현장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이루어진 노동자 실태에 관한 기존의 설문조사 결과들을 검토함으로써 분석적 이슈를 추출하고, 이에 대한 추가적인 면접 및 라이프 스토리 방법에 의해 자료를 수집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의 주요 완성차 공장의 작업장 문화 및 노동자 정체성 형성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1995. 12~1996. 8월까지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병행하여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1996. 12~1997. 2월에 걸처 조선업체인 H중공업 울산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면접을 실시하고 1997. 6~8월에 걸쳐 활동가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추가 면접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연구소와 현중노조에서 발행한 위의 책의 면접자료도 추가적으로 이용하였다.
먼저 작업장 삶 측면으로서 노동자의 일과 관련된 관계와 노조 및 회사와의 관계로 나누었다. 다시 일과 관련된 관계로서 동료, 직책자-조장, 반장 및 직장, 관리층, 노조간부와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이들에게 쟁점이 되는 분석요소로 추출된 것이 권한의 문제, 작업과 기술의 의미, 교육과 작업사이의 관계, 노동시간과 임금 등의 요소들이었다. 직장밖의 삶 측면에서 형성되는 주요 사회적 관계들은 가족구성원, 친인척 및 친구, 이웃 등이며, 이와 관련된 분석적 요소들로서 가족 관계의 양과 성격, 친인척과의 관계 유지의 성격과 갈등, 친구 관계의 성격, 이웃과의 관계의 성격과 지역사회 활동 참여등이 회사 소속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의 여부, 정치 사회적 의식 수준 등이 고려되었다.
3. 노동자 정체성과 활동가 그룹의 문화적 특징
노동자들의 정체감은 가족, 친인척 및 친구, 회사 및 관리층, 노조활동가 및 동료, 국가 및 민족 등 작업장을 둘러싼 기본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표1> 참조).
사례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속에서 비교되고 부딪혀 갈등하고 변화하고 상황적인, 모순적으로 행동하는 육체 노동자인 나로서 스스로를 경험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세상 살아가는 요령을 나름대로 터득하고 자신의 희망을 하나씩 달성해 가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개별화된 종속적 주체로서 대기업 노동자이다. 동시에 집합적 노동자로서 우리사회의 민주화의 역사적 주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자부심이 있으나, 다소간의 비장함과 책임감을 갖는 노동운동가들과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를 지닌채 가족의 생계와 자신의 노후를 걱정하는 나. 그리고 친구나 가족 및 친척에게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고 중요한 삶의 터전이지만, 오직 상상속에서만 동일시될 수 있는 회사의 생산직으로서의 나. 한편으로는 존경스럽지만 자괴감의 원천이며, 최고 경영자의 '선한 의지'와는 별개로 권력을 휘두르는 경영진들과 대립하는 가운데 나름대로의 회사원으로서 자존심과 자긍심을 지닌 나. 이런한 점들을 통해 볼 때,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속에서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그 관계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며, 다양하고 파편화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되는 대기업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만의 문화적 차이를 가장 독특하게 보여 주는 집단은 현장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오랜 노동운동속에서 상호 학습과 경험의 공유가 있었고, 회사나 정부로 부터 주요한 감시 및 탄압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 집단과는 다른 문화적 이질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1> 작업장 사회관계와 노동자들의 정체성
주요 사회적관계들
관계의 이슈와 정체성 구성의 요소들
가족
- 회사생활에 대한 수치심과 비밀.
- 가정사 : 부모모시기, 형제부양하기, 자녀가 공부를 잘할 경우의 풍족한 교육 못시키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죄의식, 보상욕구.
직장 외부의 친인척이나 친구들
- 회사에 대한 자부심: 어엿한 대기업 직장인, 돈 잘쓰는 00.
회사 내에서의 화이트칼라나 경영층
- 많이 교육받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뛰어남, 존경스럽고 대단한 회장의 선한 의지와는 달리 과잉충성하는 경영진 및 중간관리층에 대한 이상화되고, 자기중심주의적인 비판: 자존심 고양, 주요 적대자 집단.
직책자
- 같은 노동자 이면서도 중간적 위치에서 고생하는 사람들, 일밖에 모르는 성실한 사람들, 요즘들어서는 리더쉽 교육 등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고 같이 얘기가 통하기도 하는 사람들.
노조활동가
- 노동자를 위해 희생적으로 노동운동하는 사람들,
- 말잘하는 사람들, 하지만 일부는 농땡이, 감정적이거나 회사에 역이용되는 사람들, 자존심 상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기피대상자들, 노조의 많은 돈을 쓸데 없는데 많이 쓰거나 쓸 수 있는 사람들
- 익명성만 보장되면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
- 없어져서는 안되는 마지막 호소처로서 노조
동료
- 나이많은 동료의 무능력함에 대한 경멸
- 고령자 및 농땡이 동료와 동일한 임금에 대한 불공정성 지각과 애처로운 느낌의 공존
- 나이적은 젊고 빠릿빠릿한 동료들에 대한 의존과 부러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직장 및 인생의 선배, 부.
회사
- 상상속만의 동일시 대상
- 자부심과 수치심의 원천,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되는 직장.
국가와 민족의 일원
- 산업전사, 근대화의 기수 - 상상적 허구적 동일시
- 정치에 대한 많은 관심
우선, 노동자와 활동가의 관계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의 감성적 측면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감성적 측면은 특히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의 물질적 측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노동자들의 연령 증대 및 회사의 주택보조정책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대부분의 고령 노동자들은 주택 마련할 수 있었으며, 30대 후반에 접어드는 노동자들의 상당 부분이 융자를 통해 주택을 마련하였고 많은 노동자들이 잔업 등을 통해 융자금을 갚는데 힘겨워하고 있었다. 또한 자가용을 통한 이동 거리의 증대와 사적인 공간(피난처?)의 확보 가능성도 증대시킨다. 가족만의 오붓한 휴일, 여가의 동경, 개인적 쾌락의 추구, 노래방 문화 등은 대중문화와 자율적 공간 확보가능성 증대와 관련해서 과거와는 다른 강도로 정서적 욕구가 충족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전통적 문화형식과는 다른 문화형식들이 서서히 등장해 감에 따라 개인주의적 행동 경향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활동가 집단의 경우는 이러한 경향과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인다. 이들은 잔업 근무를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훨씬 적은 임금으로 생활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일주일에 한 두 차례 활동사항을 점검하고 조정하는 정례적인 모임에 참여하며 조합원들의 고충을 상담하거나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의 일상생활이 '시간', '술', '돈', '건강'과의 '전쟁'으로 묘사되듯이, 활동가들의 하루 하루 삶은 그야말로 '숨가뿐 삶'이다.
) 현대중공업노조,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윗책, 99~110쪽
여가나 각종 문화생활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들과의 오붓한 시간을 갖기 조차 어렵다. 따라서 많은 경우에 이들은 활동가 및 그들의 가족끼리의 유대를 꾀하는 경향이 크다. 그뿐 아니라 이들의 사회적 교류 및 관계망은 일반 노동자들의 그것 보다 '훨씬 넓고 언어 구사'나 가족에 대한 생각 및 자녀 교육에 대한 생각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 윗 책.
하지만, '전쟁'과 같은 '숨 가뿐' 삶속에서 주위의 다른 노동자들의 삶과 직장에서, 가정에서 비교되면서, 그리고 일상적 상호작용속에서 겪어 알게 된 일반 노동자들의 태도와 반응에 실망하면서, 더욱 중요하게는 자신이 속한 조직속에서의 갈등으로 인하여, 활동가들의 몸과 마음은 지치고 마는 측면도 드러난다.
둘째, 이념적 공세, 강압적 통제와 억압적 노사관계 관리에 따라 80년대 말의 노동운동의 비장함과 도덕적 의무감의 풍토는 아직까지는 남아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활동가 집단과 일반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중적인 효과를 갖는 것 같다. 그 하나는, 일반 노동자들은 대의에 따르는 노동운동은 그로부터 사회적, 문화적 자원(예, 권위)을 얻는 사람들(활동가)의 몫이라고 보는 경향을 낳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노동자 일상생활의 많은 비공식적이고 개별적인 기존의 사회적 공간들을 황폐화시켜 갔다. 그로 인해 예컨대 경제적 합리성(?)을 표방하는 노동조합주의적 전통이 서서히 자리 잡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면접과정에서 드러나듯이 경찰인 동생과의 활동가의 가족내 이념 갈등이나 작업장내 동료들 사이 사적인 동호회의 파괴,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 소원화 등은 작업장 및 개별적 삶의 세계를 이념적으로 구획함으로써 조직내 권력 무기력감과 같은 소외를 노조에서도 동일하게 경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가족, 친구, 자녀와의 갈등에 관해서는 윗책, 100~107쪽을 참조할 것.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응은 노조의 대회사 투쟁에 집단주의적 동조하에 적극적인 참여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단지 도덕적 의무감에 터한 '죄의식을 지닌' 많은 노동자들을 산출하였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셋째, 노동운동의 이념적 자원의 고갈, 대안적 세계에 대한 비젼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80년대 노동운동이 대학출신의 현장활동가들의 활약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 질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이는 주요 활동가들에게 일차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지만, 일반 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엄청난 정치적 격변을 경험하면서 혼란스러워진 이데올로기적 상태에 대한 회의가 탈정치화로 빠지게 하여 현세주의적 생활방식에 집착토록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소비 일상생활 영역에 대한 상품-화폐 관계의 심화 현상 역시 피상적으로나마 신자유주의 정치 담론에 친화성을 보이도록 하는 것 같다.
이러한 모습은 노동운동의 이념, 조직 운영 원리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생활 세계에 까지 뿌리내려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 형식들을 창출해 가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고 오직, 활동가 집단 내적으로 공유된 사명감과 경험과 그에 대한 상징적 의미들의 침전된다. 노동운동이 다소 추상적인 구호로만 남거나 조직적 활동 방식의 기계적 성격과 활동가들의 조급성 등이 노동자들의 구체적이고 풍부한 삶의 영역에서의 노동자적 창의성 개발 가능성을 스스로 구속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생활 여건의 변화와 회사의 통제 시도라는 조건의 탓으로 쉽게 자신의 불참("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원인으로 돌릴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운동의 대안적 비젼이 제시되지 못한 가운데 진행되어 온 노동자 정치 세력화 논의 역시 구체적이지 못하였고, 조합원 대중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주요 상급 단체 노조활동가들에 의해 거의 일방적으로 추진되어 온 정당 건설 활동은 철저하게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역시 못 믿을 사람들이 하는 것").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자는 관망자적 평가 태도가 일반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많은 활동가나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이 다물 교육, 국가 경쟁력 담론 등 민족주의, 애국주의적 노동운동 담론을 자연스럽게 동일시하는 견해들에 대해 개탄해 하며 노동자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크다. 회사의 노사관계 통제 전략이나 감독직 및 노조활동가들의 다물 교육과 외국 시찰 경험 그리고 고충 처리 방식의 일선화(노조의 배제) 등은 노조나 활동가들의 작업장 영향력의 현격한 약화 추세와 어느 정도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활동가들의 반응은 "희생의 자세", "무지한(미운)대중관"으로 나타나고 있다.
) 1996년 12월~1997년 1월의 H중공업 교육위원 간담회 자료.
노조에 대한 조합원들의 광범한 비판 의식이 형성되어 있는 점이나 동료 비난 등은 단지 회사의 관리적 통제 시도에 기인하는 것 뿐아니라, 노조의 관료적 활동 방식이나 활동가들이 보여 왔던 엘리트주의적 방식이나 분파주의적이며 도구주의적 노조 정치에서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조합원들의 행동 및 가치, 태도의 교육을 강조하는 활동가나 노조 간부의 경향은 노조 역시 경영층과 유사하게(동형적으로) 작업장 권력 체제의 구축과 권력의 작동에 요구되는 기술, 즉 노동자 주체 형성 및 정체성 변화에 대한 강한 관심을 보여 준다.
4. 결론에 대신하여
1) 공통적 특징들
사례 작업장 노동자나 활동가들 역시 작업장내 사회적 관계와 관련된 주요 이슈들에서 다른 작업장에서 확인한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사례 작업장의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육체노동으로 부터의 탈피 욕구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었으며, 가족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수행하는 일을 은폐하고자 하는 수치심이 비교적 적었다. 이 점은 사례 작업장 노동자들의 과거 파업투쟁의 경험에서부터 온 결과라고 볼 수 있으며, 노동과정의 위험성과 노동강도의 세기가 다른 점, 그리고 교육수준이 비교적 낮은 점등으로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권한 수용과 관련된 책임감, 불안 및 공포 의식, 거리감이나 소외 정도에서는 다른 작업장들과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작업장이나 공통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항으로는 (1) 일의 내용과 무관하게 육체 노동자들이 화이트칼라 노동자들과 비교될 때, 강한 남성적 이미지로 자신을 표상하려는 경향이 드러나며, (2) 일과 관련된 측면에서나 가족과 관련해서 책임감 혹은 성실성이 노동자들의 대인적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3) 나이가 많을수록 축적된 부나 세상사는 나름의 요령을 자존심 공양의 중요한 원천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4) 노조의 불가피성이 강조되는 동시에 회사와의 상상적 동일시가 (혹은 양가 감정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 등이다.
2) 활동가 집단과 문화적 권위
사례 작업장의 노동자들에게 과거 노동자 투쟁의 상징성은 불균등하게 각인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현재의 노동조합과 명성이 있게 한 귀중한 투쟁 경험으로 의미 부여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동료들 사이의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야기시킨 사건으로 받아들여 지기도 한다. 활동가들이 강조하듯이, 집회시나 활동가들에 대한 반응에서 드러나는 경향을 통해 추론해 보건대, 생활주기의 변화와 경제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일반 노동자들의 감성적 차원에서의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며, 이에 따른 감수성에서의 변화 역시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활동가들의 일상 생활은 일반 조합원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일상적인 감성의 맥락은 우리가 체험한 것들에 색조나 음색 혹은 결을 부여하고, 이에 따라 우리의 감수성에 영향을 미치며, 이데올로기의 효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 이에 대해서는 Grossberg L.(1992),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 Popular conservativism and postmodern culture, New York: Routkedge.
이렇게 본다면, 활동가들의 문화적 형성을 지배하는 감수성은 대중문화와 사회의 지배적 질서에 동화되어 가는 일반 노동자들의 그것과는 점점 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데올로기적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활동가들의 실천이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과거와는 다른 접점을 형성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반 노동자들에게 활동가들의 희생은 더 이상 희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들의 할 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문화적 자산의 인정) 스스로 거리를 두는 것이다. 활동가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일반 노동자들이 삶에서 감성적으로 마음을 쏟는 중요성의 순위가 활동가들의 그것과 너무 크게 차이가 나게 된 점이 아닐까? 과거 엘리트적인 활동가들의 실천들이 계속해서 분절해 들어갔던 노동자들의 삶의 흐름은 '기표의 흘러 넘침'으로 인하여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단지 자본주의적 지배질서하에 전개되는 '과정들' 뿐이 아닌가?
) 크리스테바(J.Kristeva)는 현대 자본주의는 더이상 도덕적 가치나 사회적 규범에 의존하지 않고, 자본 자체의 운동 '과정을 통한 과정의 재생산'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비록 제3세계의 경우는 여전히 강제적 법이나 규범,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로 특징지워지는 서구 자본주의의 경우는 더이상 그러한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 주체형태들에 대한 유혹으로서, 연루의 과정을 통해서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노동력을,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J.Kristeva,(1984),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 (N.Y.:Columbia Univ. Press), pp.16
3) 활동가 집단의 위상적 관계
사례 작업장의 활동가 집단은 그들의 독특한 문화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실천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놀랍고도 주목할 만한 점은 활동에 대한 그들의 강렬한 투심(投心. investment)이다. 비록 엘리트적 문화의 코드에 의해 분절되고 각인되었을지언정, 그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자신들의 프로젝트와 가능성을 상상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자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이데올로기적 투쟁속에 특별하게 감성적 효과를 각인하고자 노력하게 되며, 그 투쟁의 효과들이 형성하는 장속에서 활동가로서의 감수성을 공유하고, 다른 문화적 감수성들과 접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일상적 실천들 속에서, 그리고 주요한 사건들과 관련해서 형성된 문화적 감수성들이 침전된 장은 그 효과로서 활동가들에게 힘을 부여하고, 권위와 문화적 자산을 갖게 한다.
) Grossberg L.(1992), 윗책 그리고 신병현(1995), 「'현장'과 노동자 문화정치」, 『현장에서 미래를』,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2월, 5호.
이들에게 드러나는 엘리트주의적 특성, 남성적 의리와 권력 지향성 및 종속성 등은 변화된 조건하에서 이제는 활동에 투심하게 만드는 힘인 동시에 벽이 되어 버린 듯하다. 이들이 스스로 구성요소가 되어 형성한 조직의 층들은 이제 이들의 활동의 힘과 감성적 맥락을 가두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듯하다. '산별노동조합의 건설' 혹은 '조직의 보존'과 같은 구호들 속에서 은폐된 것은 현장활동가들 및 노동자들의 욕구를 집합적 형태로 분출시키고 발화하는데 장애로 작용하는 벽들이다.
) 현장활동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시기 주요한 장애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이고 집합적인 요구를 가로막는 민주노총에 반대해야 한다는 역설적 현실이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창립 3주년 심포지움 자료집을 참조할 것. 곽탁성(1998), 「노동운동의 계급적, 정치적 주체형성을 위하여-계급적 단결, 민주주의, 그리고 연대」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노동운동』,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47~182쪽
조직원리와 조직 작동 방식(운영원리)이 서사적이거나 메타 과학적이 되면, 그 조직은 위계화될 수밖에 없음을 기호학의 조직 원리가 보여 준다. 언어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보자면, 즉, 글쓰기로 표현하자면, 활동가들을 활동하게 만드는 힘은 규정할 수 없지만 사회적, 상징적, 육체적 제약을 각인하고 그것들에 의해 규제되는 물질적 육체적 흐름들인
) 쥴리아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를 기호적 코라(semiotic chora)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J.Kristeva,(1984),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 (N.Y.:Columbia Univ. Press), pp.25-33
반면, 노조운동사의 강조와 같은 희생을 강조하는 서사적(과거 지향적 이데올로기적 이야기체) 문체는 상징적 질서에의 포획이다. 긍정과 부정의 대립은 구분되어 변별적 대립 관계지만, 그 대립은 부정되어 동일화 된다. 서사구조는 가족 혹은 유사가족과 같은 구조에 의해 중층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무의식적 표상들로 에너지가 구속됨으로써, 일시적으로 제한적인 공간속에서(즉, 가족 혹은 써클이나 학연, 지연 등의 연줄조직과 같이 유사가족적인 공간속에서) 자유로운 에너지의 순환이 형성되고 반복된다. 이 글쓰기 즉, 실천은 엄격한 언어적 구조에 따르는 규범성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의 가족은 실제 가족인 동시에 유사 가족적 집단이다. 이 속에서 말하는 것은 주체의 공간상의 위치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 나는 활동가다!
메타 언어적 특성은 부정을 긍정에 종속시켜 상위 차원이 지닌 긍정성속에 그것들을 봉합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언제나 새로운 대상, 그러나 접근 불가능한 대상이 설정될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위계사회의 구조이다. 성층화한(stratified) 거대 조직들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구조이다.
이와 같은 글쓰기 실천은 발화 주체의 위상적 관계를 보여주는 의미화 실천에 관한 기호학적 분류이다.
) J.Ktisteva,윗책, pp.90-106
지금까지의 발화하는 주체로서 활동가들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이 타자와의 관계 즉, 의미 작용과 관련해서 갖게 위상적 관계는 어떠한가? 조직과 활동방식, 가족주의 혹은 유사­가족주의, 그리고 인간됨의 기준을 가르는 기술이 문제인 것 같다.
4) 유사­가족주의와 종속된 주체
일반 노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활동가들도 육체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과거에는 다소 거리를 두었던 가족주의적 구조속으로 급속하게 재 포획되고 있는 듯하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농촌에서의 빈곤과 도시 주변부 계층으로서 중산층적 안식처로서 가족의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거나, 가족으로부터 단신 이탈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희망으로서만 존재해 왔던 가족의 재구성이 이제 현실화되었다. "오로지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는 꿈만을 위해서 실연당한 설움을 (극복하여) 잊으려고 미친 듯이 일하여 반장이 되었다"라는 어느 노동자의 한스런 언급에서 보여지듯이, 그리고 이제는 마누라가 억척스럽게 해서 피자 집을 차렸고 제법 장사도 되기 때문에 "구태여 감독자들 눈치볼 필요가 없다"는 어느 전직 소위원의 언급이나, "그동안 모은 돈으로 땅을 마련했고, 융자받아 집을 지어 가게라도 마련하려 한다"는 쉬고 있는 활동가의 언급들에서 가족이라는 안식처가 부각된다.
공과 사의 도식적 분리 하에, 가족은 피난처로서 표상화되고 있다. 동시에 부양자로서의 의무로 표현되는 가족 구조 속의 위치 설정은 활동가 주체의 발화를 정언적으로 규정짓는 것 같다. 술부는 문법에 정확히 따른다. 가족사의 서사적 구현 속에서 자신의 위치는 가장으로 변하였지만, 여전히 가족 삼각형에 갇혀 있다. 이 삼각형은 집단으로 회사로, 조직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듯하다. 이들의 쉬고 싶다는 표현은 '노동자 권력'으로 부터, 조직으로부터, 동료와 회사로부터의 소외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의식화된 활동가의 경우는 과학과 사상성으로 위계화하는 담론을 산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곧 위계적 그물망속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방식이 아닐까? 조직 속에서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지식-육체노동의 분리라는 모순은 이론과 실천 속에서 언제나 이미 현실화되었고 또한 현실화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면 도구로서 '조직'을 운영하는 '기술'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푸코를 따르자면, 그것은 규제적 자아(regulatory self) 이상으로 기능하는 자아를 기획하는 인간으로 인간들을 종속화 하는 사회적 기술이다. 그것은 인간을 통치하고 인간 행위를 바라는 방향으로 조성하기 위한 수단, 기법, 공간, 판단 체계 그리고 프로그램들의 총화이다.
) N.Rose, 윗책, pp.128-150
푸코나 들뢰즈 갸타리 등의 기술 개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특정 부류의 사람으로 경험하는 바로 그것이 (즉, 자유를 추구하고, 억압에서 벗어나려 하며, 개인적 권력을 추구하고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동물로서 경험하는 것), 일련의 인간 기술들(human technologies)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 푸코, 들뢰즈와 갸타리의 기술 개념에 대해서는 Deleuze G.(1988), Fouacult, Trs. G.Hand, Minneapolis: Univ. of Minnesota Press. 들뢰즈와 갸타리(1994), 『앙티외디푸스』, 민음사, 부록, 그리고 미셜푸코, 이희원(역), 『자기의 테크놀로지』, 31~86쪽을 참조할 것.
그 기술들은 인간 존재의 제 양상들(modes of being human)을 그것들의 대상으로 취한다.
) 그러한 총체의 공간적 형태에 관해서 이진경, 『근대적 시ㆍ 공간의 형성』, 1997을 참조할 것.
'신중하고 절제적인 삶을 사는 책임있는 아버지', 경영자들이 지닌 권위의 불가침성과 보상의 기대에 터한 '노동자들의 유순함'과 '성실한 노동자'와 같은 이상(ideal)들은 어떤 지식 체계와 윤리적 가치에 의해 지탱되고 있을까? 푸코나 들뢰즈 등에 의하면, 인간됨에 관한 이상과 모델들은 다양한 실천들에서 그리고 인간 행위에 관한 특수한 문제들과 해결책들과의 관계속에서 접합된다는 것이다.
특정한 개인 모델을 윤리적 이상으로 제시하려는 신경영기법들의 프로그램적 시도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경영관리자나 활동가 및 노조 간부들의 합리성의 신화 및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감수성의 특징이나 스타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신병현, 윗책.
한/노/정/연
#ANCHO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