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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 조희연

광주민중항쟁과 80년대 민주화운동
-87년 이전까지를 중심으로
조희연(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1. 머리말
광주민중항쟁은 한국전쟁 이후 80년까지의 '지배와 저항의 상호작용'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특별한' 사실들이 복합되어 있었던 사건이었다. 80년 광주에서는 '공공성'과 국민적 성격을 표방하던 국가권력이 야만적 학살을 자행했으며, '자유의 수호자'이자 '혈맹'으로 인식되었던 미국이 '기대된' 행동을 하기 보다는 학살 정권의 지지자가 되었고, 온순하기만 하고 독재정권에 '적응'하여 지내는 것처럼 보였던 민중들이 총을 들고 싸웠던 사건이었다. 80년대의 운동은 이처럼 광주 민주항쟁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적 진실'들을 '재해석'하듯이 끌어내어 80년대 운동의 자양분으로 삼았고 이 과정에서 70년대까지의 운동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혁명지향적' 운동으로 변화되어간다.
한국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볼 때, 광주민중항쟁은 60·70년대 운동과 80년대 운동을 질적으로 구별지우는 '비약'의 계기였다. 80년대 운동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체험적 인식·소급적 성찰을 통하여 혁명지향적 운동으로 변화되어갔다. 이 글은 광주민중항쟁이 80년대 민중적·혁명적 운동으로의 질적 비약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였는가를 다음과 같은 작업을 통해 밝히고 자 한다. 특별히 80년대 초반부터 87년 6월 항쟁까지에 이르는 비합법적 논쟁 및 합법적인 운동문건 분석을 통하여, 어떻게 광주민중항쟁이 운동의 혁명적 전환의 계기가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광주민중항쟁은 그 사건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엄청난 '잠재적 진실'을 통해 80년대 운동이 혁명지향적 운동으로 발전되어 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 진실규명과 학살자 처벌 등 그 자체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투쟁의 구성적 내용이기도 하였다. 이른바 광주문제는 그 자체가 전 사회운동이 투쟁을 통해서 그 해결을 '쟁취'하여야 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광주문제가 공론화되고 해결되어 가는 과정은 바로 80년대 사회운동이 자기발전을 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광주문제가 어떻게 쟁점화되어가는 지를 검토하게 된다. 그를 통해 80년대 운동이 어떻게 변화되어가는 가를 분석하게 된다.
2절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유산을 투쟁대상인식과 투쟁주체 인식의 급진화라는 견지에서 분석하게 되며, 3절에서는 80년대 비합법적 논쟁 속에서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유산이 어떻게 재해석되면서 80년대의 혁명지향적 운동의 지적·의식적 기초들이 명확화되어가는 가를 분석하게 된다. 3절은 일종의 '광주의 의미를 둘러싼 쟁투'를 다룬다고 하면, 4절에서는 광주문제 자체를 둘러싼 쟁투를 다루게 되는데, 이는 광주문제가 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핵심적 구성내용이 되어가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다. .
80년 5.17부터 6.27까지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광주사태, 광주항쟁,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용어들이 사용된다. 이 글에서는 광주항쟁을 통해 80년대 운동이 '민중주체의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 변화되었음을 중시하는 견지에서 광주민중항쟁이라는 개념을 주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80년 광주에서의 양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구속자 석방, 학살자 처벌, 희생자 보상, 관련자 명예회복 및 배상, 기념사업 등 일련의 정치적·사회적 쟁점이 사회운동권과 정치권의 중요한 쟁점으로 존재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사항들을 포괄적으로 '광주문제'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2. 광주민중항쟁의 지적·의식적 충격
60년대 이후 한국민주화운동을 분석할 때, 그 이념적·정치적 성격의 발전과정을 필자는 60년대=소시민적 민주화운동, 70년대='민중주의'적 민주화운동, 80년대=민중적·혁명적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60·70년대 운동으로부터의 80년대 운동으로의 질적 비약의 지점에 바로 광주민중항쟁이 존재하고 있다. 총괄적으로 필자는 60·70년대의 '자유주의적'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의 전환이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나타나게 되었었다고 생각한다. 즉 "80년대 전반 --- 특히 80년대에서 84년까지 ---은 70년대의 사회운동이 80년대의 변혁운동으로서 자기 정립을 해가는 과도기적 시기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80년의 정치적 좌절과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자성적 평가 속에서 70년대의 운동수준을 뛰어넘는 새로운 운동의 주체적 조건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이 --- 비공식적 수준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분단과 6·25전쟁을 통해 단절을 겪었던 한국의 사회운동은 바로 이 시기에 60년대의 소시민적 민주화운동 단계, 70년대의 민중주의(populism)적 운동 단계를 뛰어넘어 한국사회의 총체적 변혁을 전망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혁명적 민중운동으로 변신할 수 있는 조건을 예비하게 된다."
)조희연, 1989a, "80년대 사회운동과 사회구성체논쟁", 박현채·조희연 편, {한국사회구성체논쟁} 1권, 죽산(폐업 후 한울에서 발행).
사회운동의 이러한 질적 비약은 물론 구조적으로 근거지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60년대 이후의 종속적 자본주의화로 인한 사회경제적 모순과 계급 갈등의 현재화(懸在化)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질적 비약의 주체적 조건은 무엇보다도 80년의 정치적 좌절과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소급적 반성 위에서 확보되는 것으로 보인다. 70년대까지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바로 그 한계가 80년 봄의 패배'에 총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라는 고민에서부터 80년대 운동의 비약과 '거듭남'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표현은 80년대 운동가들에게 광주가 무엇이었는가를 웅변하여 주고 있다. "아직도 초연이 가시지 않은 광주 영령들의 제단 앞에서 우리는 선언한다. 군부의 폭력 앞에 무수한 민주시민들이 쓰러져 간 80년 5월 광주에서부터 이 땅의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또 그때 흘린 피로 다져진 이 땅의 민주화운동에 살아있는 우리가 새 깃발을 드높힐 것임을, 휴전선에 있는 군대를 빼돌려 반독재 민주화를 외치는 동족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고 대검을 휘둘러 무수한 생명을 참혹하게 앗아간 독재정권은 반드시 민족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광주시민의 절박한 기대를 져버리고 군사정권의 민중학살 행위를 방조하고 승인했던 미 행정부의 정책적 과오를 우리 민족은 결코 잊지 않을 것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전두환 군부독재타도'를 외치혀 맨몸으로 민주주의 방패가 되었던 광주민중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우리는 80년 5월의 불꽃 속에서 투혼을 안고 태어난 광주의 아들 딸들이어야 한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아, 5월 이여! 광주여!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 1984.5.19,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51.8 광주 민주화운동 자료총서} 2권, 411-414쪽.
이른바 광주사태의 핵심적인 본질은 무장군인들에 의한 양민학살과 그러한 학살에서의 한미공조, 그리고 그에 대한 민중들의 무장자위투쟁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은 신군부집권세력의 쿠데타에 대응하는 민중들의 자발적 저항이었고 신군부집권세력은 이 저항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였고, 민중들은 다시 이에 대응하여 '무장'투쟁
)'시민전쟁'이라는 개념은 이를 잘 부각시키고 있다. 안병욱, 1999, "5.18, 민족사적 인식을 넘어 세계사의 지평으로", 학술단체협의회 편, 1999, "5.18은 끝났는가", 푸른 숲.
을 전개하였던 사건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남한사회의 운동이 갖는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의 한계지점과 극복지점 및 발전전망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80년대 운동은 이러한 한계지점을 성찰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현실화시켜가게 되는 것이다.
광주가 제기한 새로운 인식들>
"왜 광주민중항쟁이 실패하였는가""광주민중항쟁에 표현된 70년대 운동의 한계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심각하게 제기되면서, 사회운동의 주체, 인식적 기초, 대상, 동력, 방법 등에 대한 반성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반성은 크게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부분의 서술은 다음을 참조. 조희연, 1989, 앞의 글, 15쪽.
첫째, 70년대까지의 사회운동이 소시민적 운동관, 포퓰리즘적 운동관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변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갖지 못했다고 하는 반성이다. 예컨대 억압적 국가권력에 대한 양심적 비판이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 있었을 뿐, 정치권력의 획득이나 경제체제 자체의 변혁에 대한 전망과 의지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체제변혁적 투쟁으로 전화시킬 목적의식적 전위가 또한 부재했다는 반성이다. 광주민중항쟁이 대중들의 혁명적 진출과 변혁역량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고 할 때, 문제는 대중을 지도할 전위의 형성과 그러한 전위와 대중의 굳건한 결합 여부인데, 이점에서의 역량부족이 사회운동의 근본한계라는 것이다. 셋째, 80년 봄의 패배는 노동계급 등 주력군의 미성장에 그 근본원인이 있으므로 기층민중, 특히 노동계급의 성장과 그 정치적 진출을 가속화하는데 집중적인 역량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반성이다. 즉 70년대까지의 사회운동이 주로 학생, 지식인, 일부 선진적인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계급운동이 되지 못하였으며, 주력군이 미성장한 상태에서의 방어전적 성격 이상을 띨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70년대 사회운동의 추진 동력'이 갖는 계급적 한계를 가리킨다. 넷째, 군부독재체제를 지원하는 외세에 대항하는 반외세자주화'역량이 결여되었다는 반성이다. 특히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비호 때문에 70년대 사회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미국에 대한 소시민적 환상'이 깨어짐으로써, 광주사태는 민족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을 극복 할 수 있는 대중의식과 주체적인 역량을 확보해내는 것이 80년대 사회운동의 핵심적 과제로 인식되었다. 다섯째, 투쟁의 대상과 관련하여, 60,70년대의 사회운동은 자유주의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기집권이나 독재 등의 용어로 정의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지배권력의 폭력성과 억압성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사항이 운동의 총체적 성격에 대한 것으로 '소시민적 운동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의 전환'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면, 두 번째 사항은 '혁명적 전위주의'의 당위성을 지적하고 있다. 다음 세 번째의 반성은 민중주의 혹은 민중주체주의 인식을 지적하고 있으며, 넷째는 반미주의로의 지향, 다섯째는 반파쇼운동으로의 지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광주를 '경험'하면서 그리고 광주를 '돌아보면서'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 '거듭'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의 전환에는 한편에서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내포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내포된다.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관련하여, 전두환 독재정권을 파쇼적 국가권력으로 인식하게 되며, 나아가 그것이 대미종속적인 권력으로 인식하게 된다. 다음으로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전환과 관련하여, 노동자계급 등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이 나타나게 되며, 이와 동시에 혁명적 전위주의 인식도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바, 즉 첫째 국가권력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 둘째는 미국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 셋째 운동의 실천주체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노동운동, 민중주의, 현장노선 등)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80년대 운동이 60·70년대 운동과 결정적으로 다른 측면은 그것이 단순한 반정부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반'파쇼' 혁명운동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반파쇼주의), 반외세 자주화운동, 특별히 반미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점(반미주의), 중산층, 학생, 지식인운동에서 노동자계급 등 민중이 중심이 되는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점('민중'주체주의)을 들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80년대 운동이 바로 이러한 질적 비약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래서 이 3가지 측면을 80년대 초중반 비합법적인 운동논쟁 및 문건 분석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구체화되어가는 운동의 전환을 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광주민중항쟁 이전 반독재민주화운동
측면
광주민중항쟁 이후 반독재민주화운동
'자유주의'적 운동
총체적 성격
혁명적 민주주의운동
장기집권 군부독재
투쟁대상의 재인식
독점자본의 이해를 밀착되어 있는, 파쇼적 억압기구(반파쇼운동)
미국=민주화운동에 우호적인 '혈맹'
광주학살을 방조한,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미국(반미주의)
지식인, 학생,양심적 정치인 등 범(汎)재야 중심 운동
투쟁주체의 재인식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민중(민중주체주의)
비합법적 전위조직을 제외하고서는 문제의식 부재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지도하는 전위세력 필요(혁명적 전위주의)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 국가권력의 폭력성과 종속성>
먼저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 혹은 대적(大敵) 인식의 급진화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주지하다시피 광주민중항쟁에서는 신군부세력의 지시에 의하여 안보의 파수꾼인 '국군'이 양민을 무차별하게 학살하였던 사건이었다. 이것은 국가의 야만적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국가권력의 폭력적 본질이 양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 속에서 투명하게 드러났고, 이는 그에 대응하는 운동의 혁명적 인식을 강화시켜 주었다.
정치학적으로 볼 때, 국가의 본질은 '일정한 영토적 공간(territoriality)에서의 폭력의 합법적 독점체(monopoly of violence)'이다
)Jessop, B., 1990, State Theory: Putting Capitalist States in their Place, Pennsylvania: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참조.
. 이 점은 근대국가라는 영토적 경계 내에서 일체의 무장력이 중앙집중적 국가에 의해 독점됨으로써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 폭력적 본질은 역설적으로 쉽게 노정되지 않는다. "권력은 총칼에서 나오지만 권력이 총칼을 사용할 때 가장 약해진다". 부마항쟁은 그 투쟁을 통해 집권군부세력의 내적 균열을 통해 80년의 불완전한 민주공간을 열었는데, 그 제한된 민주공간을 부정하면서 '유신적' 질서를 재구축하고자 하는 신군부세력에 대해 전면적인 투쟁을 선언했던 광주민중들에 대해 신군부세력은 전면적인 학살로 대응하였다. 역설적으로 이 학살은 국가의 폭력적 본질을 투명하게 만들고 그래서 80년대 민주질서를 향한 저항을 심화시켰고, 80년대 저항의 정신적·지적·도덕적 원천으로 작용하게 된다.
필자는 한국전쟁 이후의 분단상황에 의해 조성된 독특한 남한의 정치사회적 조건을 '반공규율사회'로 표현한다. 반공규율사회란 "내전이라는 독특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반공이데올로기가 일종의 가상적인 국민적 합의로 내재화된 동질적인 '극우공동체'"
)조희연, 1998, {한국의 국가·민주주의·정치변동}, 당대, 63쪽.
라고 할 수 있다. 반공규율사회란 반공이라는 명분 하에 저항운동이 통제되고 규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저항운동의 규율은 '무장'저항의 통제와 규율도 포함된다. 이처럼 저항운동이 통제되기 때문에 국가권력은 용이하게 지배를 재생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의 저항운동은 세계 최대의 전투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비무장'평화'운동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점은 반공규율사회적 상황은 저항운동이 규율되고 그 결과 국가권력의 재생산을 용이하게 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만드는 데서 더나아가
)조희연, 1998, 앞의 책, 2장 참조.
, 국가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인식을 규율하는 효과까지 지니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80년대 광주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 속에서 국가권력은 사실 지속적으로 폭력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남한의 국가권력은 국가테러리즘과 폭력을 기초로 출현한 국가였다. 50년대 좌익잔류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이승만정권의 탄압은 가히 '백색테러리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60년대 이후에도 개별적 국가폭력(박정희 시기 동안의 숱한 위수령과 군대동원)은 지속되었다
)반공규율사회적 조건 속에서 저항폭력의 규율과 동시에 국가폭력의 규율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반공규율사회적 조건은 한편으로는 저항폭력도 규율하였지마는 다른 한편에서는 전면적인 국가폭력도 규율하였다는 것이다.
. 물론 그것은 양민에 대한 집단학살의 형태로 폭력적이지는 않았지만, 60년대 이후 군부정권 하에서 국가권력은 지속적으로 폭력적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국가폭력성에 대한 인식이 반공규율사회적 조건으로 규율되고 국가의 폭력성에 대한 인식이 투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군대는 안보를 위한 '파수꾼'으로서의 이미지를 지속시킬 수 있었다
)반공은 국가권력의 계급성과 폭력성을 잠재화하면서 국가권력의 공공적 성격, 민족적 성격, 국민적 성격을 표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개발독재는 바로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전사회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성장을 지원할 정도로 '계급적'이었지만, 탈계급적이고 국민적 실체로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 그 결과 70년대까지 국가권력의 계급성과 폭력성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낮은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으로 인하여 이러한 조건은 변화하게 된다. 국가권력의 야만적이고 적나라한 폭력성은 국가권력의 본질을 투명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후 군부독재정권은 어떤 점에서는 '자연스럽게' 학생들에 의해 '적(敵)'으로 규정된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 1980, 12.11.
. 이것은 70년대까지의 도덕적이고 양심범적인 정부비판운동에서 혁명적 운동으로 발전하여야 한다는 각성을 동반하게 된다. 정부는 새롭게 파쇼정권으로 재정의된다. 여기서 반파쇼투쟁이 중요하게 부각되게 된다. 파쇼적 인식은 지배의 계급적 본질에 대한 인식을 가속화시키게 된다. 여기서 계급적 본질은 지배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의미하고, 여기서 80년대 중반 이후 사회운동의 사회주의적 지향도 바로 여기서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폭압의 주체가 되는 국가의 폭력적 본질이 '백일하에' 노정됨으로써, 재민주화는 지배적 시대정신이 되고 그에 대항하는 민주화투쟁이 '성전(聖戰)'이 되는 정신적 전환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희연, 2000, "'저항의 시대정신화', 반유신투쟁과 광주민중항쟁":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논평", 5.18 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새로운 천년을 열며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 200. 5.15, 전남대 국제회의동, 39쪽..
두 번째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와 관련하여서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국가권력의 종속성 혹은 '식민지성'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이 80년대 혁명적 인식으로의 전환에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국가 및 지배권력의 종속성에 대한 인식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동안 자립적인 것으로 비쳐지고 있었던 남한의 지배권력이라는 것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하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사실 반공규율사회적 조건은 국가권력에 대한 폭력성에 대한 인식을 규율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국가권력과 미국과의 관계, 즉 국가권력의 종속성 문제에 대한 인식을 규율하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친미'적 인식이 남한에 강력하게 존재하게 된 데는 전후 냉전체제에 남한의 자발적 통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먼저 베트남과 달리 미국이 남한에서 '해방자'로 인식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 남한의 자력으로 독립을 획득할 가능성이 없었고 연합군에 의한 일본의 패퇴로 인하여 '시혜적'으로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남한에서 미국은 '해방자'로 인식되는 측면이 강하였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남한과 대만 같은 경우 내전과정에서 각각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해방 이후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남한의 경우 한국전쟁 초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역이 북한군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데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UN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공산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은 특별히 남한의 지배세력의 주요한 구성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극우보수세력에게는 미국을 해방자로 부각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조희연, 1999b, "경제성장과 정치변동-'반공규율사회'와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의 형성, 균열, 위기 및 재편의 과정", {성공회대학논총} 제13호, 27쪽.
이런 역사적 요인으로 인하여 남한에서 미국은 해방자, 혈맹,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자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가지면서 존재할 수 있었고, 80년 이전까지 이것은 하나의 가상적인 합의 같은 것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초기 광주민중항쟁 당시 미 항공모함의 도래에 대해서, 광주의 군중이 환호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미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공유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2척이 부산에 정박하여 전두환 일파의 더 이상의 무모한 만행을 견제하고 있으며"라는 표현이 광주시민결의문에 나타나는 것을 보아도 당시의 시각을 알 수 있다. 광주시민일동, "광주시민여러분께:23-26일까지의 시민결의", 1980.5.25,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앞의 책, 62쪽.
. 이런 속에서 반미는 성역의 주제였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에서의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반미무풍지대'였던 남한에서 반미문제가 제기되는 중요한 계기를 부여하였다. 이제 남한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싸움만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미국에 대한 투쟁이 없이는 민주화가 달성될 수 없다고 하는 인식이 확산되게 되었다. 이제 '꼭두각시'인 군부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남한의 저항운동은 그 배후에 있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 민중주체주의와 혁명적 전위주의>
다음으로 광주민중항쟁은 위와 같이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를 동반함과 동시에,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를 동반하였다. 즉 광주민중항쟁은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새로운 투쟁적 민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이전까지 군부독재에 대항하여 싸우는 학생이나 지식인 등에 대하여 적극적인 참여를 보이지 않던 민중들이 '무장' 투쟁하는 새로운 민중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지식인 및 학생들의 인식의 전환을 촉발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5.17 계엄 확대 이후 서울의 봄을 주도하던 '서울의 학생운동'이 퇴조하고 난 그 자리에 전투적인 민중의 상을 보여준 사건이 광주민중항쟁이었던 것이다. "5월은 민중이 바로 민주화운동의 주체라는 사실을 피로써 증거한 투쟁의 달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앞의 글, 411쪽.
라는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러한 새로운 민중의 모습은 두가지 측면에서 지적·운동적 파급을 미치게 된다. 첫째는 운동 혹은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민중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민중주체주의'적 사고를 명확하게 만들어 주었다. 둘째는 대중들의 전투성을 자연발생적 상태에서 목적의식적인 혁명으로 선도하는 혁명적 전위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민중주체주의적 사고의 맹아는 70년대 이미 생겨나고 있었다. 70년대 후반 민중 개념의 확산에 이어, 학문적으로도 민중사회학, 민중신학 등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하는 인식이 나타나고 있었다
)조희연·김동춘, 1990, "80년대 비판적 사회이론의 전개와 '민족·민중사회학", 한국사회학회 편, {한국사회의 비판적 인식: 80년대 한국사회의 분석}, 나남, 24쪽.
. 물론 70년대의 민중주체주의는 '민중주의'(populism)적 성향을 강하게 띄고 있었으며, 혁명적 민중관(民衆觀)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80년대의 민중은 계급적으로 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계급인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적 민중주체주의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인식된다.
광주항쟁은 70년대까지의 운동이 의연히 재야지식인 중심의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각인시켜 주었고, 결국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중심의 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합의되는 계기를 부여하였다. 즉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하여, 70년대 까지의 소시민적이고 민중주의적 운동이 노동자 중심, 민중 주체의 운동으로 발전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70년대 후반에 학생운동의 소수파로 존재하고 있던 현장론이 강화되어 학생운동 선진그룹들의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실행에 옮겨져 이른바 '존재이전' 혹은 '하방'이 나타나는 것도 이것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중주체주의적 사고의 강화는 전체변혁운동 속에서 각 부분운동 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80년 이전까지의 운동이 학생운동의 선도적인 정치투쟁에 힘입어 전선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면, 80년 이후에는 노동운동 등 민중운동이 중심적 운동이며 이것의 강화가 여타 운동의 투쟁전략 선택에 중요한 고려사항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생겨나게 되었다. 70년대 운동과 80년대 운동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후자에서는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이 운동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이 강화되지 않고서는 독재정권을 전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80년대 초반의 비합법적 논쟁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학생운동이 바로 이러한 민중운동의 강화와 어떻게 연관되어야 하는 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80년대 초반 학생운동 논쟁에서는 바로 민중운동의 강화에 학생운동의 역할이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논쟁의 핵심적인 쟁점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민중주체주의는 혁명적 전위주의와 함께 진행되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광주항쟁은 민중들에 의한 '무장'투쟁으로까지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자연발생성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을 목적의식적인 투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전위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이 혁명적 전위는 물론 민중에서부터 형성되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공감하면서도 80년대 학생운동은 스스로가 '전위형성의 중요한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정치사상적으로 무장하고 철의 규율을 가지며 대중운동에 대한 지도능력을 갖는 전위의 형성은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차적인 과제라는 인식을 활동가들이 공유해가게 되었다. 80년대 초반 레닌의 전위당론
)80년대 초중반 레닌저작 붐은 이를 반영한다. 당시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레닌의 전위당론에 대한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조희연, 1993, {한국사회운동과 조직}, 한울, 36-57쪽.
이 급속도로 유입되고 CA(제헌의회 그룹)
)CA의 노선과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강신철 외, 1988, {80년대 학생운동사}, 형성사, 270-296쪽. 그 공소내용에 대해서는 세계편집부 편, 1986, {공안사건기록: 1964-1986}, 세계 참조.
와 같이 스스로 정치사상적 전위임을 자임하고 조직화를 한 경우도 이러한 지적 맥락에서 나오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저항의 '시대정신화'와 광주>
이처럼 투쟁대상과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은 70년대 말-80년대 초의 운동가들이나 대중들의 의식에서 볼 때는 분명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 인식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활동가들에게 급속하게 확산되어 나갔다. 이처럼 급진적 인식의 급속한 확산은 광주학살을 통하여 통치세력의 도덕적 기반이 완전히 붕괴하게 됨으로써 저항이 시대정신이자 '유행'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60년대 근대화가 시대정신이었다면 민주화가 시대정신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사회는 해방과 동시에 통일된 진보적 민족통일국가를 이룩하지 못하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극우보수적인 분단반공질서로 고착화되게 된다. 4.19혁명은 바로 이 분단질서의 민주화를 위한 혁명이었고 이는 불완전한 민주질서를 낳았다. 4.19혁명이 민주질서를 낳는 민중들의 혁명적 행동이었다면, 5.16쿠데타는 이를 부정하는 반민주적 질서를 향한 보수적 군부세력들의 반혁명적 행동이었다. 41.9혁명 후 한국사회는 바로 이처럼 민주질서를 향한 민중들과 그와 반대로 반민주질서를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의 갈등과 길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바로 4.19혁명을 통해서 불완전하게 실현된 민주질서(그것을 담지하는 세력)와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실현된 반민주적 질서(그것을 담지하는 세력) 간의 이 갈등과 길항의 역사는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
60,70년대 박정희체제와 그에 대응하는 광주민중항쟁은 바로 이러한 한국현대사의 근본갈등의 기조 속에 존재하는 역사적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반민주질서가 재생산되는 형태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반민주질서의 질적 내용이 변화하고 민주와 반민주의 상호관계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4.19혁명 이전의 반민주적 질서로서의 이승만정권과 4.19혁명 이후의 반민주질서로서의 박정희 정권 간의 관계에서 보면, 연속과 변화를 동시에 보이고 있다. 연속이라는 점에서 보면, 5.16 이후 혁신세력에 대한 전면적 탄압에서 보여지듯이 '반공주의'에 의해 반민주질서를 유지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변화라는 점에서 보면, 박정희정권은 '근대화프로젝트'(절대빈곤으로부터의 탈피, 경제개발계획의 추진 등)를 통해 '전향적'인 이데올로기 동원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논평자는 박정희정권을 '국가주의적인 발전동원체제'
)조희연, 1998a, 앞의 책, 1장 2절.
로 표현한다. 즉 국가주도적인 발전(성장)을 향한 총동원체제라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60년대 내내 거대한 저항을 받았으면서도, '체제적 위기'에 직면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박정희체제는 70년대초를 거치면서 '체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요인은 경제적 위기, 정치사회적 위기, 동북아의 탈냉전화 기류에 기인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위기 등이 복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위기에 대응하는 박정희정권의 '전략적' 선택양식은 '체제의 부분적인 개방화'와 체제의 한단계 높은 '전체주의화'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70년대 초반의 위기와 그에 기반을 둔 저항에 위협받은 박정권은 여기서, 한단계 높은 군부정권의 전체주의적 강화를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박정권의 전체주의적 강화는 그에 대항하는 저항을 점차 강화시켜갔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점에서서 70년대는 민주질서와 반민주질서의 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60년대와 다른 거대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에는 근대화프로젝트를 통하여, 또한 안보논리의 이데롤로기적 효과에 의하여 '반민주질서의 유지논리'가 '민주질서를 향한 저항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었다면, 70년대에는 바로 그러한 상호관계의 역전이 일어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에는 바로 근대화프로젝트의 동원력이 약화되고 오히려 근대화의 구조적 모순이 전면화되면서 '재민주화'의 프로젝트와 그것을 향한 저항은 보다 강화되어갔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70년대 반유신저항은 80년대와 달리 '저항의 시대정신화'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80년대로 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60년대 사람들은 쉽게 박정희 정권의 선전에 따라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냐'고 말하였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사람이 밥만 먹고 사냐''자유가 빵 보다 귀하다'고 말하게 되었으며, 모두의 가슴 속에 '민주주의를 향한 타는 목마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때로 박정희의 헤어스타일을 흉내내는 부류가 있어도, 우리 사회의 깊은 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 쟁취한 것인데, 감히 누가 이를 거역할 것인가"하는 깊은 성찰이 무게를 가지고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신체제가 반민주질서의 '체제적 위기'에 대응하여 반민주질서를 '전체주의'적 억압을 통해서 유지재생산하려고 했던 체제라고 한다면, 유신 하의 저항운동은 이러한 전체주의적 억압에 대항하면서 저항의 전국화, 저항의 시대정신화에 접근하여 갔던 것으로 보여진다. 80년 광주항쟁과 그 이전의 79년 부마항쟁(이들 중간에는 80년 봄이 있다)은 바로 이러한 저항발전의 최정점에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80년 광주민중항쟁과 79년 부마항쟁은 유신체제 하에서 성장하여 온 저항의 총괄이자 그 정점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적할 점은, 부마항쟁과 광주가 똑같이 반유신투쟁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 부마항쟁이 80년 봄의 '불완전한' 민주공간을 열었던 반면에, 광주민중항쟁은 80년대의 '찬란한 투쟁의 시기', 독재타도를 향하여 '혁명적' 진군(進軍)이 전개되었던 시기를 직접적으로 예비하게 된다. 광주민중항쟁은 70년대와 달리 민주질서를 향한 저항이 반민주질서의 유지논리를 압도하면서 저항이 시대정신이 되었던 시기로 가는 '비약'의 계기이자 출구였고, 80년대 '재민주화'(4.19에 의해 정립되었으나 5.16에 의해서 부정된 민주질서의 회복)가 지배적 시대정신이 되는 도덕적 기초를 만든 사건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이전의 반유신투쟁과 이후 8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과 함께--은 민주질서를 향한 '희생의 축적'을 통하여, 민주주의적 가치와 민주주의 제도를 부정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데 따르는 '반역(叛逆)의 도덕적, 정치적 부담'을 크게 만들었다. 해방후 우리에게 있어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식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반유신투쟁을 통해 흘린 피와 희생,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치룬 피와 희생, 80년대를 통해 흘린 희생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역사적 과정이 없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사치스런 것으로 치부되기 쉽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던져지게 된다???. 반유신투쟁과 광주민중항쟁, 나아가 80년대의 민주투쟁은 바로 민주주의의 역사적 무게를 만들어낸 사건들이었고, '민주질서의 파괴'가 동반하는 도덕적, 정치적 '비용'과 후과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만든 사건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 이를 통해 70년대까지 학생들 및 지식인, 선진적 민중 중심의 저항운동은 이제 국민적인 저항운동으로 전화되어간다.
이런 점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유신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의 연속적 정점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 80년대 저항의 시대정신화를 가능케 한 '비약'의 계기였다고 규정할 수 있다. 반유신투쟁이 '저항의 시대정신화'를 예비하였다면, 광주민중항쟁은 그것으로 '비약'하는 결정적 계기였다는 것이다.
3. 80년대 전반기 비합법논쟁과 광주의 혁명적 유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80년대 운동이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 자기인식을 하게 되는 과정을 80년대 전반기 비합법논쟁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절에서는 광주민중항쟁에 담겨진 '혁명적 진실'들이 어떻게 쟁점화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서의 자기인식이 심화되어가는 지를 살펴보게 된다.
70년대까지의 '자유주의'적인 운동인식은 80년대 초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소급적 성찰을 통해 혁명적 민주주의운동 인식으로 전환되어가게 된다. 80년대 초반은 전두환 정권의 초기 폭압적 정책이 실시되고 있었고 혁명적 논의 자체가 공개적인 차원에서 전개될 수 없었기 때문에, 80년대 초반 다양한 비합법적 운동논쟁을 통해서 구체화되어가게 된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광주민중항쟁의 운동사적 의미가 재해석되면서 80년대 운동발전의 정신적·지적 자산이 되어간다.
무림-학림논쟁>
광주민중항쟁이 신군부세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된 후,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초기 공세적인 폭력적 사회통제정책이 실시되면서 운동은 침잠기에 들어가게 된다. 광주민중항쟁을 성찰하면서 80년대적인 혁명적 인식이 구체화되는 과정은 80년대 초반 다양한 비합법적 논쟁을 통해서 추적할 수 있다. 최초의 비합법적인 운동논쟁은 무림-학림논쟁(이른바 무학논쟁)이었다. 무림이나 학림이라는 용어는 경찰의 수사과정에서 붙여져 이름이다. 무림사건은 80년 12월 11일 서울대의 시위 때 뿌려진 '반제반파쇼투쟁선언'이라는 유인물이 배포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공안당국이 학생운동 핵심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행한 사건이었다. 학림 사건은 이태복 씨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약칭 전민학련 및 전민노련 사건을 말한다. 이 논쟁은 "80년 하반기부터 81년 시기까지 서울대 학생운동 내부에서 80년 상반기투쟁을 주도했던 그룹과 이에 비판을 가하면 등장했던 그룹 사이에 주로 80년 2학기 학생운동의 투쟁방침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서 비롯되어 그 범위가 전대학적으로 확산되고 내용이 학생운동 전반의 위치와 역할 향후 변혁운동의 전망과 그를 실현할 조직형태를 둘러싼 문제로까지 심화되어 전개된 일련의 논쟁을 일컫는다"
)강신철 외, 1988, 앞의 책, 24쪽.
무림-학림 논쟁은 80년 봄의 투쟁 및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평가를 쟁점으로 하면서 학생운동의 향후과제와 지향을 둘러싼 논쟁으로 전개되었는데, 여기서 80년의 패배의 원인, 광주항쟁의 교훈, 학생운동의 당면과제 등의 쟁점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패배의 근본원인이 주체역량의 취약성이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학생운동의 당면과제는 무엇인가라는 것이 논쟁의 출발문제의식이었다. 여기서 더나아가 주체역량의 강화를 위한 방법론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무림진영과 학림진영으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이 논쟁에서 '투쟁지양론'이라고 불리우는 무림진영은 기존의 학생운동의 '소모성' 시위가 '적'들의 필요없는 공격을 유발하고 역량을 불필요하게 소진시킬 수 있으므로, 시위 중심의 학생운동을 자제하고, 학생운동 역량이 체계적으로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으로 이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민중주체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이 강화되는 것이 선차적인 과제이므로, 학생운동은 자체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기 보다는 이러한 과제 중심으로 투쟁이나 활동이 배치되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알려지기로는, 80년 12월 11일 서울대 시위는 '내적 준비를 위해 시위를 자제하자'는 취지로 학림진영의 시위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자 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공안당국에 의해 적발되고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면서 무림진영의 지도그룹이 대거 구속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반해 학림진영은 '직접투쟁론'이라고 불리웠는데, 무림진영에 대해 일종의 '투쟁포기론'으로 비판하면서, 무림진영이 투쟁을 하려는 학생들을 오히려 방해하고 투쟁을 가로막다가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유인물을 배포함으로써 학생운동의 방향전환이나 조직보존은 고사하고 역으로 공안당국의 침탈을 자초했다고 비판하면서, 반대의 입장에서의 학생투쟁을 가속화하고자 하였다. 학림은 80년 5월 실패의 원인이 조직의 결여에 있다고 보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조직화 및 그 통일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학생운동은 전면적 투쟁을 통해 이러한 정치적 공간을 확장하여야 한다. "학림진영은 자연발생적 고립분산적 운동을 지양한다는 목적 하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조직적 통일(민학련과 민노련)을 시도하여 80년 5월 이후 침체되었던 학생운동의 활성화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일송정 편집부, 1988, {학생운동논쟁사}, 일송정, 34쪽.
"고 평가된다. 학림진영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침체에 빠져있는 전체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 상대적으로 복원력이 크고 조직화되어 있으며 한국현대사를 통해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왔던 '문제제기집단'으로서의 학생운동이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서 '문제해결집단'으로서의 기층민중운동(특히 노동운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강신철 외, 1988, 앞의 책, 25쪽.
. 학생운동이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서 여타의 운동이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야 하며, 이를 통해 학생대중조직의 발전도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받는 개인적 탄압 속에서 오히려 운동가로서 단련되며, 운동에 대한 자기헌신적 소명의식이 더욱 굳어질 수 있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이 초기의 무림, 학림 논쟁에서 인식의 혁명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국가 및 지배권력에 대한 인식이 질적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이 당시 공안당국에 의해 학생운동의 '좌경화'로 매도되고 검거선풍의 단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70년대 학생운동의 문건과 달리 이 선언은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라는 표현과 같이 이전과는 구별되는 '혁명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적(大敵) 인식은 70년대까지의 학생운동의 정부인식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인식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70년대 까지의 학생운동은 박정권의 장기집권과 억압을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권을 '적'과 같은 대적(大敵) 개념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학생운동에서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이 급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광주민중항쟁에서 보여진 집단학살 때문에 지배권력의 폭력성과 억압성이 투명하게 드러나게 되고 그 반사인식으로서 80년대 운동이 지배권력에 대한 보다 철저한 혁명적 인식을 가져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70년대까지의 국가 및 지배권력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80년대의 인식은 권력의 본질적 성격, 특별히 그 폭력성과 반민중성에 대한 인식이 철저화되어가게 된다.
새로운 혁명적 인식 속에서, 정부는 이제 '파쇼'정권이라는 식으로 규정된다. 파쇼라는 말은 '파시즘(Fascism)'이라는 말의 대중적인 선전선동용어인데, 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반공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운동의 순수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60,70년대 운동에서 기독교 운동 등 종교운동이 운동의 중요한 구성부분을 이룬다는 점(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편, 1982,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 민중사), 종교운동이 학생운동이나 민중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지원하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외피'의 구실을 한다는 점, 많은 운동가들이 교회에 '이중멤버쉽'적인 지위를 가지면서 활동하였다는 점 등은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 운동은 대단히 절제된 용어로 사용되게 되고 '자유주의적' 개념들로 표현된다
)물론 60년대의 통일혁명당이나 70년대의 남민전과 같은 당시의 비합법적 혁명전위조직에서는 그러한 혁명적 인식이 혁명적 개념과 용어로서 표현된다(조희연, 1993 참조). 그러나 그것은 조직원에게만 '유통'되는 문건이다. 그러나 80년대의 학생운동의 '비합법' 문건들은 전두환 정권 하에서 합법성을 부여받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비합법일 뿐이지, 학내 선진 학생운동가들, 심지어 일반 학생들에게까지도 '유통'되는 문건이라는 점에서 60,70년대와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 파쇼적 인식은 단순히 국가권력의 폭력성 문제를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이 (독점)자본의 계급적 도구라는 인식, 나아가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국가권력을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의 발전에 광주민중항쟁이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광주항쟁은 70년대까지의 운동이 80년대의 운동으로 발전해가는 정신적·지적 원천이 되게 된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에서 직접적으로 광주민중항쟁을 언급한 부분을 보면 "70년대의 학생운동은 우리의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학생들의 전체역량을 효과적으로 발휘하지 못했으며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천적으로 극복하지 못해 민중과도 유리되었다. 또 민중의 피의 선언인 광주항쟁 마저 이를 주도할 세력 즉 조직된 민중역량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표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광주민중항쟁의 운동사적 의미를 대적 인식의 철저화와 투쟁대상 인식의 급진화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무림-학림 논쟁에서는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와 함께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혁명의 주체가 지식인이나 다양한 재야세력에서부터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이라고 하는 인식이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민중주체주의에 대한 강조는 특별히 무림 진영에서 각별하게 나타난다. 다음의 문건은 그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우리의 궁극적 과제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이며 이것은 노동자·농민 등 근로대중과 진보적인 지식인 세력이 스스로 조직화되어 이땅에서 파쇼지배체제를 축출하고 민족통일을 성취하는 위대한 민중투쟁의 승리만으로 가능하다. 이를 위한 70년대 학생운동은 우리의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학생들의 전체역량을 효과적으로 발휘하지 못하했으며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천적으로 극복하지 못해 민중과도 유리되었다. 또 민중의 피의 선언인 광주항쟁 마저 이를 주도할 세력 즉 조직된 민중역량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들 대중의 적인 파쇼집단을 섬멸할 수 있는 주체는 아직 근로대중의 조직화, 세력화가 되지 않는 마당에서 학생들이 민중전체투쟁의 주도체로서 자기 변신을 통해 이룩하여야 하는 것이 역사적 요구이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 1980.12.11.
".
이러한 논지에서 무림은 학생운동이 시위 중심의 운동으로부터 민중운동의 강화를 위한 중심에 놓는 방향으로 투쟁방향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시위만능의 투쟁관은 타기되어야 한다. 시위는 그것을 포함한 모든 전술적 요소의 전체적 고려하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비로서 학생운동은 적들에 대한 탄력적인 전체적 응전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학생운동 세력의 민중운동에로의 수렴과정이 보다 집단화되고 체계화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광범한 반파쇼 민중연합이 이념적·조직적으로 성숙될 것이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 1980.12.11.
학생운동의 선도적 투쟁역할을 강조하는 학림진영에서조차도,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의 중심성과 지도성을 부정하지 않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역시 70년대의 투쟁주체인식과는 질적으로 발전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학림진영은 운동의 지도권 문제와 관련하여 "학생운동이 과도하게 첨예화되어 있고, 교회는 기회주의적 속성이 농후하며 청년운동은 미약하므로 노동운동이 운동의 지도부가 되고 학생운동이 보조집단, 문제제기집단이 된다"
)일송정 편집부, 1988, 앞의 책,33쪽.
고 말하고 있다. 학림진영에 따르면, 학생운동은 "계속되는 그 고유의 정치투쟁을 통해 민중항쟁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민중운동의 선도체이지 주도체는 아니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을 강조하는 학림진영에서도, 학생운동은 민중운동의 주도체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동시에 무림-학림 논쟁 속에서는 이러한 민중주체주의의 이면에서 동시에 혁명적 전위주의적 사고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0년대에 초반 운동가들을 지배하였던 하나의 사고는 80년 봄의 패배와 광주민중항쟁의 실패가 대중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을 지도할 '혁명적 전위세력'과 그 조직의 부재에서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80년대의 운동이 목적의식적인 혁명운동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전위적 인자와 세력들이 배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80년대 첫 비합법적 혁명논쟁인 무림-학림 논쟁에서도 이 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무림문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민중의 피의 선언인 광주항쟁 마저 이를 주도할 세력 즉 조직된 민중역량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 1980.12.11.
. 따라서 혁명적 전위가 형성되지 않고는 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
그런데 혁명적 전위가 형성되는 경로, 그 속에서의 학생운동의 지위와 관련하여서는 상이한 입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즉 무림 진영 같은 경우는 학생운동이 산발적 투쟁의 한 요소가 아니라, 전체투쟁의 주도체로서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학생운동이 보다 적극적으로 '존재이전'을 통해 혁명운동의 전위형성을 가속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학림진영 역시 80년 5월의 실패의 원인이 조직의 결여에 있다고 보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조직화 및 그 통일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학생운동은 전면적 투쟁을 통해 이러한 정치적 공간을 확장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학림진영은 보다 적극적으로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지도할--낮은 수준의--전위적 조직을 구성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민학련과 민노련에 대해서는 세계편집부(1986) 참조
, 실제 민학련이나 민노련 같은 조직을 통해 운동에 대한 주도적인 개입을 시도하였다.
야비-전망 논쟁>
무림-학림 논쟁에 이어 전개된 야비-전망 논쟁은 80년대 초반 학생운동 내부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논쟁으로서, 대적 인식의 급진화, 투쟁 주체 인식의 급진화, 외세인식의 급진화라는 광주민중항쟁의 운동사적 교훈이 보다 구체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야비-전망 논쟁은 82년 상반기 팜플렛 형식의 소책자를 통해서 전개되었던 논쟁이며 이전 무림-학림 논쟁이 보다 심화된 논쟁이었다. 야비는 '야학비판'이라는 제목의 팜플렛과 그 노선을, 전망은 '학생운동의 전망'(이하 '전망'이라고 한다)이라는 제목의 팜플렛과 그 노선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80년 말 무림 사건 및 91년 학림사건으로 인해, 학생운동의 지도적 역량들이 대거 구속된 상태였는데, 학생운동의 역할 및 민중운동에 대한 관점 등을 둘러싸고 직접투쟁론, 투쟁지양론,학생운동포기론,준비론 등의 다양한 입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야학비판'은 과거 무림의 입장의 연속선 상에 있으며 투쟁지양론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학생운동의 전망은 학림의 입장의 연속선 상에 있으며 직접투쟁론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학림의 맥을 잇고, 투쟁성을 강조하는 입장인데 반하여, 후자는 무림의 맥을 잇고 대중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야학비판'의 논리를 정리하여 본다면, "현 운동단계는 혁명적 전위세력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므로 각 운동은 '상대적 독립성'을 갖고 단계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학생운동은 일상투쟁(학내, 문화, 대중 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노동운동은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야 하고 야학운동은 정치사상교육으로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매개해야 한다". 민중운동에 대해서는 "아직 역량의 미성숙 상황으로 대중 확보에 운동을 집중시킬 단계이지만 학생운동은 전체운동의 정치투쟁을 주도해왔던 '주도체'로서 전위형성의 요구와 정치투쟁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지도노선, 즉 투쟁노선과 조직노선을 확립해야 한다"
)'야학비판', 일송정 편집부, 1988, {학생운동논쟁사}, 일송정에 재수록.
고 말하고 있다. '야학비판'은 학생운동이 무조건적으로 정치투쟁 중심으로 전개됨으로써 역량을 소진시키는 데 반대하고, 오히려 학생운동은 민중운동의 지원역할과 전위형성을 매개적 역할을 중심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야학비판'은 학생운동이 직접적인 민중운동 지원 투쟁 보다는, 전위형성을 위한 하나의 독자적인 통로로서 일상투쟁을 통한 대중확보를 통하여 전위전위세력을 형성해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생시위는 학생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무기이고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시위에 학생운동의 궁극적 목표를 두는 것은 잘못이다". 학생시위가 민중운동의 지원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는 부차적인 것이고 직접적인 지원은 민중과의 결합을 강화시켜 가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인식 속에서 '야학비판'은 '존재의 이전' 즉 노동운동으로의 투신을 학생운동의 본질적인 일부로 포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가 그 존재를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은 공상일 수 있지만 학생이 학생이라는 존재를 벗어나는 것은 아직 현재화되지는 않았지만 곧 현재화되는 객관적인 미래이다. 학생존재의 이러한 성격은 학생들이 그 존재의 이전 즉 미래의 존재를 예정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것을 의미하여 그것은 학생운동 자체도 이전준비를 본질로서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위의 형성이라는 정책적 입장에서도 이 '존재의 이전'문제는 중시되어야 한다"
)'야학비판'.
'라고 말하고 있다.
전망은 이에 반해 학림의 입장을 계승하면서 직접투쟁론의 입장에서 전위 정치세력 형성을 위한 민중노선의 확립문제, 정치시위문제 등의 쟁점에 대하여 다른 주장을 하였다. 전망은 "진정한 민중노선이란 상황에 대처해 끊없이 적을 폭로하고 민중항쟁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80년 5월 투쟁을 통해 한국의 변혁운동의 가능성을 검증받았다. 즉 학생시위 선봉-민중합세-민중봉기-연속적 도시봉기. 따라서 현대 유일한 투쟁가능집단인 학생세력은 민중을 대변하여 투쟁의 선봉을 담당하여 전민중적 투쟁의 발판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합세 봉기화하고 이것이 다른 도시에 퍼져 나간다. 이렇듯 현 운동단계에서 학생운동은 민중운동의 선도체로서의 정치투쟁을 요구받고 있고 아울러 학생운동가들의 배출을 통해 전체운동의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런데 민중으로의 침투, 결합을 학생운동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상정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는 학생운동이 범위를 과도하게 확대하는 대신 그 고유의 정치투쟁을 외면하는 것이다"
13)'학생운동의 전망], 일송정 편집부 1988, 앞의 책에 재수록.
. 전망은 학생운동이 적극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군부파쇼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야 하며 정치투쟁을 통해 여타의 운동이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운동으로의 이전이 학생운동의 고유한 과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치적 시위와 관련하여, 가두시위야말로 학생운동의 최고의 투쟁형태라고 보았다. 정치투쟁의 궁극적인 장소는 가두이며 여기에 서 학생운동은 민중을 직접적으로 선전선동하고 그를 통해 전민중적 봉기의 기반을 확대할 수 있다. 그래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가두시위의 시기, 형태, 슬로건 등 다양한 전술이 개발하는 것이다. 정치투쟁 일변도라는 식으로 학생운동의 투쟁을 비판하는 것은 학생운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의 소치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은 부단한 대적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함으로써 민중들의 독재정권으로부터의 이탈을 가속화시켜 왔으며, 여타운동의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도 맡아왔다는 것이다. 나아가 학생운동은 어떤 점에서 정치투쟁의 과정에서 받는 탄압 속에서, 아니 오히려 그것을 기반으로 더욱 성장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생운동은 현장으로의 이전을 준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두 정치투쟁을 통해 혁명적 전위로 성장하여 가며, 학생들의 쁘띠부르주아지적 계급속성을 극복해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야학비판'과 전망의 논쟁 역시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형성된 혁명적 인식의 단초들이 학생운동의 투쟁노선을 둘러싸고 직간접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럼 앞서 제시한 바와 같이,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주어진 새로운 혁명적 인식의 단서들이 야비-전망 논쟁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보기로 하자.
야비-전망 논쟁 단계에서는 국가 및 지배권력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라는 점에서 진일보한 인식이 보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학비판'의 서술 속에서 이 점과 관련하여 특징적인 점은, 운동진영 내부에서 5.17과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외교론'이 소멸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는 대목이다. 5.17과 광주사태는 사회운동권 내에서의 온건한 노선, 비혁명적 노선의 주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5.17과 광주민중항쟁은 운동권 내부에 다음과 같은 현상을 가져왔다고 '야학비판'은 말한다. '야학비판'에 따를 때, 5.17과 광주사태는 사회운동권 내에서의 온건한 노선, 비혁명적 노선의 주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제국주의에 대한 보다 명료한 입장이 확인되어졌다. 적어도 진보적 학생운동에서 '외교론'의 침투는 저지되었다"
)야학비판.
. 여기서 외교론은 한국의 민주화를 함에 있어 서방세계에 대한 호소와 그들의 압력에 의한 민주화를 사고하는 경향을 의미하며, 야학비판은 일제시대에도 3.1운동 이후 항일 운동노선이 '무장투쟁론'외교론''준비론' 등으로 분화되었듯이, 60,70년대 민주화운동 진영내부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존재하였는데, 광주항쟁 이후에도 미국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이러한 외교론적 경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외교론은 투쟁 대상에 대한 자유주의적 인식을 전제하고 있으며 대적 인식의 불철저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와 관련하여, 학생운동의 전망은 80년 5월 투쟁과 관련하여 학생운동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적의 정체와 본질이 구체적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이는 적이 누구인가? 폭력기구로서의 적의 성격이라는 문제를 추상적으로 알고 있을 지라도 구체적으로 우리 머리 속에 와닿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쯤 보여줬으면 물러서겠지""미국이 전두환 정도는 처리해주겠지" 등의 아전인수격의 안이한 생각들만 하고 있었다. 이는 5.17 쿠데타와 광주대학살에서 여지없이 깨지게 된다
)일송정 편집부, 1988, 앞의 책, 300쪽.
". 국가나 정권에 대한 사회운동의 인식은 그것의 장기적 집권의 문제나 독재적 탄압의 문제 등 '현상'적인 문제들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전망에서는 폭력기구로서의 국가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정부는 혁명적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되게 된다.
다음으로 지배의 종속성에 대한 인식이 '전망'에서는 보다 구체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한 독재정권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인식이, 광주학살에 대한 경험 속에서 움트게 되었다. 광주항쟁 당시, 미 7함대가 한반도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문이 알려졌을 때, 광주시민들은 미국의 전두환 독재세력을 응징할 것으로 생각하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묵인 하의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학살은 미국에 대한 보다 '구조적' 인식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생각된다. 전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 보수권력의 정체가 폭로되었다. 미국 보수권력은 해방 후 그 정체를 감추고 이 땅에 친미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광주민중봉기라는 치열한 전면전에서 그 반민족, 반민중적인 성격은 더 이상 감출 여지 없이 폭로된 것이다. 미국 보수권력은 미국 작전지휘권 하에 있는 일부 한국군을 광주시위 군준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전두환 일당의 요청에 동의, 광주학살극에 명백히 참여함으로써 광주 대학살극의 공범자로서 스스로를 규정짓게 되었다
)'학생운동의 전망'.
".
이제 '꼭두각시'인 군부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그 배후에 있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게 된다. '야학비판'에서도 "제국주의에 대한 보다 명료한 입장이 확인되어졌다. 적어도 진보적 학생운동에서 '외교론'의 침부는 저지되었다. 그러나 그 진영은 아직도 강력하다"라고 적고 있다. '야학비판'이나 전망 문건이 학생운동의 과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반미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으나, 70년대와 다른 철저한 반미적 인식, 독재정권과 미국의 유착에 대한 급진적 인식이 당연하게 내재화되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꼭두각시'인 군부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그 배후에 있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게 된다.
다음으로 야비-전망 논쟁 속에서는 민중주체주의적 입장은 하나의 '상식'에 가까운 것으로 논의되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중주의 노선의 강화를 가져왔다. 이 민중주의 노선은 다양한 함의를 갖는데 그것은 민중지원투쟁의 강조,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축소론, 사회운동에서의 민중주체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야비-전망 논쟁은 민중운동의 발전, 민중의 혁명주체로의 발전에서 학생운동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된 논쟁이었다. '야학비판'은 무림의 인식을 계승하여 학생운동이 학생운동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하지 말고 민중운동으로의 투신을 통해 민중이 혁명의 주체로 발전되어 나오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존재이전'을 통해 혁명적 전위가 형성되는 일 구성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하였다. 학림 역시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을 강조하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학생운동의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민중운동이 발전되어 나오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해야 하며, 스스로의 선도적 투쟁 속에서 혁명적 전위가 구성되어 나와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의 평가와 관련하여, 전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중의 잠재력이 증명되었다. 우리는 저들을 과대평가하고 민중의 현실적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패배주의에 빠져있음을 깊이 반성하여야 한다. 학생시위에 대한 정권의 잔인한 만행에 그토록 열렬히 일어서는, 그리하여 저들의 무참한 난사에 즉각 무장하여 결국 포악한 무리를 일주일이나 내쫓아 광주를 지켰던 그 민중의 역동적인 잠재력은 우리 투쟁의 승리를 약속하는 횃불이다"
)'학생운동의 전망'.
. 전망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발생적 봉기의 한계가 드러났다. 실로 광주민중봉기는 30만 시민의 열렬한 투쟁으로 최정예 군대인 공수부대를 격퇴한 민중의 잠정적 승리를 의미했다. 그러나 공수대가 퇴각한 바로 그 시각부터 민중의 폭발적 에네르기는 서서히, 그리고 급속히 무너져갔다. 왜 그랬는가? 조직에 의한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직에 이해 준비되고 동원되고 지도되어야 한다. 조직은 운동에 있어 양적 확대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역랴에 통일성, 기동성 지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학생운동의 전망'.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80년대 초반의 흐름 속에서는 이러한 민중주의적 노선의 '혁명적 전위주의'적 입장과 함께 부각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중주체성을 정착시키는 계기였지만 동시에 전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는 점도 아울러 제시되어야 한다. 광주민중항쟁은 어떻게 자연발생적 투쟁이 목적의식적인 투쟁으로 발전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 계기였다. 어떤 점에서 80년대 초반의 맥락 속에서 '과잉전위주의'적 경향이 촉발되기도 하였다고 하는 평가도 있으나, 70년대와는 다른 고민을 갖게 만든 사건이 광주민중항쟁이었다
)80년대 초반에 당시 남민전 지도부가 감옥에서, 남민전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광주항쟁의 경과를 달라졌을 것이라고 탄식했다는 말이 회자되었던 것에서도 나타난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중들에 의한 '무장'투쟁으로까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자연발생성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대중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을 목적의식적인 투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전위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동반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학생운동 중심의 운동 파악에서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 중심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나타났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운동을 지도하는 전위세력의 형성을 강조하는 입장도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야비-전망 논쟁 속에서는 민중운동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동시에 운동을 지도할 혁명적 전위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하는 점이 강조되었다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전망이 제기하는 흥미로운 쟁점은 왜 광주민중항쟁은 실패하였는가. 운동노선적 측면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어떤 운동의 경로를 보여주고 있는가라는 점에 대해서 다음을 보자. "80년의 경험에서 우리는 학생시위-시민합세-민중봉기-연속적 도시봉기라는 한국변혁운동의 고유한 발전모뎅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이 패배로 끝난 것은 이것이 타지역으로 확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생운동은 선도적 정치투쟁>으로 사회대중에게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물론 문제해결집단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일 수밖에 없다. 학생운동은 타부분이 가지고 있지 못한 투쟁역량>으로 전체운동을 선도하는 선도체>인 것이다"('학생운동의 전망'). 전망의 경우, 광주민중항쟁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혁명의 현실적 형태는 도시민중봉기 형태가 될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조희연, "80년대 학생운동과 학생운동론의 전개", 사회비평 창간호. 1988).
80년대 초반의 전반적인 인식은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이끌 혁명적 전위세력의 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공유하고 있는데, '야학비판'은 혁명적 전위세력이 기층민중으로의 '존재 이전'을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전망은 학생운동의 정치투쟁 자체를 통해서 형성되어가야 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전위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다음과 같은 '야학비판'의 내용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 현재 변혁운동의 단계는 올바른 지도노선을 가진 전위조직 역량의 형성이 절실히 필요로 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여타부분은 이런 과제를 담당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하므로 상대적으로 앞서 있는 학생운동이 전위형성의 모태가 되어야만 한다"
)'야학비판'.
전망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발생적 봉기의 한계가 드러났다. 실로 광주민중봉기는 30만 시민의 열렬한 투쟁으로 최정예 군대인 공수부대를 격퇴한 민중의 잠정적 승리를 의미했다. 그러나 공수대가 퇴각한 바로 그 시각부터 민중의 폭발적 에네르기는 서서히, 그리고 급속히 무너져갔다. 왜 그랬는가? 조직에 의한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직에 이해 준비되고 동원되고 지도되어야 한다. 조직은 운동에 있어 양적 확대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역량에 통일성, 기동성 지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학생운동의 전망'.
이렇듯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혁명적 투쟁으로 통일화하는 전위세력과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80년대 초반 일련의 비합법적 논쟁을 통해 학생운동의 선도적 그룹의 인식이 급속하게 혁명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실적인 전위조직을 형성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80년대 초반은 대단히 조심스럽고 유보적인 자세가 지배하고 있었다. "81년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전국민주학생연맹>사건 이후 전위조직의 형성시도나 그에 관한 논의조차 금기시되어졌고, 셀(cell)>론이 맹위를 떨치면서 노동현장으로 대거 이전했던 현장활동가들은 소그룹>의 형태만을 유지하면서 노동계급과의 존재적 동일성>에 일차적 비중을 두는 경제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장활동 속에 대부분 침잠하게 된다"
)(일송정? 강신철?)
조희연, 비평.
80년대 초반의 무림-학림논쟁, 야비-전망 논쟁은 선진학생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논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지향적 논쟁이 진행되는 것과 함께, 전두환정권에 대항하는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이 발전되어 가면서, 이러한 비합법적 논쟁의 핵심적인 내용들은 점차 학생운동의 대중적 운동 및 사회운동 내에서도 확산되어가게 된다. 85년 2.12 총선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연) 내부에서 이루어진 CNP논쟁
)이에 대해서는 조광, "민주변혁(CNP)논쟁에 대하여", 박현채·조희연 편, 1989a, 앞의 책, 180-189쪽 참조.
은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부각된 혁명적 인식이 이제 일반 활동가들로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 학생운동 출신의 선진적 청년활동가의 조직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내에는 여러 세대의 활동가들이 모인 관계로 그 이념적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러한 이념적 차이--이것은 변혁의 계급적 전망과도 관련된다--를 명확히 하면서 변혁적 사회인식의 내용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처음 2·12총선 참여논쟁의 연속선상에서 변혁운동의 주체세력을 누구로 설정할 것이며, 중산층이나 야당정치인과는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 하는 문제에서 시발되었으나, 이 논쟁은 변혁운동의 주체세력에 대한 평가에서 나아가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사회의 변혁운동단계는 무엇이며, 무엇을 대립물로 하는가 라는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변혁운동의 대립물과 단계를 과학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모순론'이 도입되고, 사회구성체 분석이 변혁이론의 중심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 당시 논쟁에서는 시민민주혁명론(CDR: civi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혁명론(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혁명론(PDR: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으로 입장이 대별되었다. 이것들은 당시 민청련 내부에 존재하는 운동론적·실천적 경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상의 서술에 대해서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민주화의 길} 제15호, 39-40쪽 참조.
시민민주혁명론은 민청련의 선배그룹들의 경향성을 의미하였는데, 70년대부터 이어지는 국민운동적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전두환 독재정권과 미국의 전반적인 제3세계 정책과는 괴리가 있다는 점을 중시한다. 70년대 말 이후 제3세계는 우익군사독재정권을 지원하던 정책에서 민주화를 추동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따라서 전두환 독재정권과 미국 사이에는 상대적 갈등이 존재하게 된다. 외세의 문제는 현단계에서는 중요하지 않으며, 현단계의 중요한 과제는 군사독재 타도와 민주정부 수립이 된다고 파악하였다. 시민민주혁명론의 입장에서는 엄밀한 계급적 분석방법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는 정치적으로 각성된 지식인, 학생, 재야민주인사, 양심적 정치인 등 중간계층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반면에 민중민주혁명론은 당시 노동운동권 및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학생운동 그룹들의 전반적인 인식의 경향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보다 계급주의적 입장에서 한국사회구성과 변혁을 사고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이해된다. 이 입장에 따르면 한국사회에 외세문제가 현존하고 있으나 그것 조차도 계급모순의 관점에서 바로보지 않으면 않된다. 한국사회의 국가권력은 독점자본가계급의 지배도구라는 것이 지배적 측면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당연히 변혁운동의 주체도 노동자계급 등 기층민중이라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기층민중과 중간층의 계급적 입장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여야 하며, 학생운동은 이러한 기층민중운동의 강화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여야 한다.
당시 민청연 내부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덩던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민주혁명론은 시민민주혁명론을 우경적 입장으로, 민중민주혁명론을 좌경적 입장으로 파악하면서, 민족적 과제와 민주적 과제를 통일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 입장에서는 미국과의 모순을 중시하면서, 이러한 반외세의 과제는 군사정권에 의해 억압받는 집단 뿐만 아니라 보다 폭넓은 계급계층들이 변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민족민주운동의 주체는 노동자계급 등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학생, 양심적 지식인, 종교인 등 양심적이고 민족적인 중간계층도 차여하는 폭넓은 연합전선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과정에서 CDR(civil democratic revolution)론은 소시민적 사회관, 낭만적 운동관에 기초하고 있는것으로 비판받았으며,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론과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론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과제를 해결해야하는 변혁, 노동계급을 주체세력으로 하는 변혁의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었고, 이 점은 그 후 변혁론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일단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ND와 PD의 상호관계에 대한 통일된 인식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소시민적 운동관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점이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다는 점이다. 즉 80년대 전반기를 거치면서 사회운동권, 특별히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는 한국사회의 변혁의 전망에 대한 소시민적 (혹은 쁘띠부르조아적) 인식이 광범위하게 비판되고 극복되었다. 예컨대 민주화를 전망할 때 민주화의 체제적 내용은 배제하면서 억압적인 군부통치의 부분적 이완이나 완화를 추구하는 소시민적 민주화관에 대한 비판이 널리 공유되었다
)조희연, 1989a, 앞의 글, 18쪽.
당시 학생운동 출신의 중견 재야활동가이 많았던 민청년 내부에서 민족민족'혁명'론이나 민중민주'혁명'론이 논쟁의 중심축으로 설정되는 것만으로도 80년대 초반 구체화되어온 혁명적 인식이 사회운동 내부에서 확산·정착되어 가고 있으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민청연의 중심멤버들이 대체로 70년대 학생운동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80년대적 인식이 이전 시기의 활동가들 사이에 확산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CNP논쟁에서 광주민중항쟁이 부여한 3가지 차원에서의 인식의 급진화에 있어 훨씬 진일보한 논의들이 제기됨을 알 수 있다. 먼저 변혁대상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변혁대상의 성격과 관련하여 CNP논쟁에서는 투쟁대상권력의 성격에 대하여 이전에 비해 진일보한 인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민족민주혁명론의 경우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보듯이 독재권력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독점자본을 물적 토대로 하는 제국주의와 연계된 세력으로 보고 있으며, "당면과제를 독점자본 및 그 유지세력인 합법화된 폭력으로서의 군부독재타도에 두고 그후 기층민중이 되는 민중권력을 수립한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지배권력의 본질로서의 폭력성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민중민주혁명론의 경우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을 제국주의 및 독점자본에 기반을 둔 군부파쇼세력과 한국민중간의 모순"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사실 독재권력, 군부권력 등은 지배권력의 일정 측면, 특별히 국민이 의사에 반하는 집권의 장기성이나 국민들에 대한 지나친 억압정책 등을 부각시키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민족민주혁명론이나 민중민주혁명론의 경우 군부정권을 개념적으로 '파쇼'로 파악하는 것은 물론 그 내포적 의미로서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에 기반을 둔 계급적이고 반민족적인 실체로서 인식하게 된다.
이미 투쟁의 대상이 단순히 장기집권을 하는 군부정권일 뿐만 아니라 독점자본의 지배도구이며 외세에 의해 조정되고 있는 도구이며 지배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폭력으로 무장된 실체로서 인식되고 있다. 민족민주혁명론의 경우 전두환 독재정권이 외세종속적인 정권이며 파쇼적 권력이라는 점을, 민중민주혁명론의 경우 제국주의 뿐만 아니라 독저자본에 의해 종속된 실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즉 한국사회는 그 자본주의적인 경제적 기초에서 볼 때 독점자본이 지배블럭의 기본적인 구성원이며, 여기에 독점자본의 계급적 이해를 폭력적으로 관철하는 파시즘적 국가권력과 이러한 파시즘-독점자본의 유착체제를 비호하는 외세가 지배블럭의 주요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독점자본과 파시즘적 국가권력과 외세로 구성되는 지배블럭이 변혁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인식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다음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는 것과 함께, 저항주체에 대한 인식, 특별히 민중주체주의적인 인식이 강화되어가게 된다. 물론 시민민주혁명론의 경우에는 60·70년대 초반 학생운동 선배그룹들의 경향성인데 이 입장은 기층민중운동 중심의 사고에 있어서는 불철저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민족민주혁명론과 민중민주혁명론의 경우는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에 있어서 확고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민족민주혁명론의 경우 민족적 모순과 군사파쇼적 모순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민중이라고 보고 있다. 민족민주혁명론의 경우 중간층 세력이나 소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자들도 제휴세력이라고 보고 있기는 하지만, 노동자·농민·빈민이 변혁의 주도세력이고 진보적 청년학생이 선도세력이라고 하는 식으로 인식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알 수 있다. 민중민주혁명론의 경우 중간계층의 기회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여 농민, 빈민 등 기층민중이 제국주의와 파쇼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심주체라는 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CNP논쟁에서의 민족민주혁명론은 그후 85년 경 삼민혁명론에 이르기까지 비록 명시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학생운동의 기본적인 지향으로 존재하게 된다. CNP논쟁이 이루어지던 85년을 경과하면서,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은 계급론적 인식과 결합하면서 더욱 명확화되어갔다. 즉 사회운동의 계급적 기초에 대한 인식이 한국사회의 계급구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확산되었다. 그 결과 변혁의 계급적 전망(脫자본주의적인 변혁)이 명확해졌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노동운동의 주도성, 나아가 지도성이 강조되었다. 1960년대 이후 종속적 자본주의화의 과정은 ---종속성으로 인한 여러 파행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자본주의적 재편의 과정이며 이에 따라 사회 전성원의 프롤레타리아화가 진척되고 그 결과 한국사회 계급구성에서 노동계급이 압도적 다수가 되었으며 노자간의 계급모순이 기본모순으로 정착되었다는 점이 공감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사회운동은 노동계급을 주력군으로 하는 계급해방운동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 또한 널리 공감되었다. 이러한 계급해방운동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주도성(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을 가지며, 노동운동이 제반 사회운동 속에서 중심적이며 주도적인 위치를 갖는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1985년은 특히 노동운동의 고양기였던 만큼, 또한 최초의 연대투쟁의 모범이기도 했던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던 해였던 만큼, 위와 같은 점이 더욱더 증폭되어 강조되었다.
사회운동 내에서 CNP논쟁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학생운동 내에서는 삼민혁명론의 형태로 80년대적인 혁명적 인식이 종합되어 나타나게 된다.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제기된 혁명적 인식의 제요소들은 85년 경 삼민혁명론에서 종합화된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주어진 혁명적 인식들은 사회운동진영, 특별히 학생운동 선진인자들 내부에서는 이제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가게 된다. 이것은 학생운동에서 민족·민주·민중혁명이라는 삼민혁명론이 지배적 화두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혁명적 인식의 발전에는 80년대 초반의 엄혹했던 상황에서 83년말부터 유화국면이 실시되면서, 운동은 급속히 회복되고 대중적 투쟁으로 발전되어가는 운동 자체의 발전이 있었다. 학생운동 선진인자들 내부에서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의 기본적 지향성으로서의 민족, 민주, 민중이념(소위 '삼민' 이념)이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공통인식이 되고 대중적으로도 확산되어가게 된다
)유화국면이 전개되기 시작한 83년 후반부터 소위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이 터지는 85년 상반기까지 수도권의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학생운동의 방향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는데, 이를 통칭하여 깃발-반깃발(Flag-Anti Flag)논쟁 혹은 MT-MC논쟁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명칭은 기왕의 학생운동의 지도체와 노선에 대한 문제제기그룹이 '깃발'이라는 팜플렛을 발행한데서 연유한다. 이 논쟁은 기본적으로 무림-학림 논쟁에 연속성을 갖고 있는데, CNP논쟁에서 NL과 PD논쟁으로의 과도기에 핵심적인 학생운동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은 학생운동의 방침을 둘러싼 전술논쟁의 성격의 지니고 있고 '정치노선'적인 입장에서의 대립 지점들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85년 학생운동에 있어서의 큰 특징 중의 하나가 그 이념의 대중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삼민' 혹은 '민중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함축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유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명시적으로 극복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학생운동 내부에서 개념적으로 명시화된 것은 {삼민}이라는 소책자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신철 외, 1988, 앞의 책, 94-95쪽.
. '삼민' 혹은 '민중민주주의'가 학생운동 내부적으로는 이미 정리되고 공유되는 바였지만 이러한 이념성이 대중(학내·학외) 앞에 공개적으로 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85년부터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학생운동이 이념성은 학내대중에게는 대중조직 속에서의 학습·토론, 대자보와 '자유언론' 등의 매체를 통한 선전사업, 그리고 각종 대중집회 문화활동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삼민혁명에서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우리의 운동은 이 민중민주주의의 민족혁명을 목표로 하는 민중민주주의 민족혁명운동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왜 민중민주주의의 혁명인가? 혁명의 주체가 민중이며, 혁명이 건설한 새 사회의 정치체계는 부르조아가 지배하는 부르조아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중이 지배하는 민중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왜 민족혁명인가? 반제·반매판독점자본혁명이기 때문이며 혁명이 건설할 새 경제체제는 민족혁명 경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중민주주의 민족혁명의 개념은 지난 10년간 우리가 '민중이 역사의 주체다''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사회가 건설되어야 한다'라는 말들로서 그 내용을 표현해온 개념이다"
)'민중민주주의 민족혁명운동의 기본개념을 정립하자', 강신철, 1988, 앞의 책, 94쪽에서 재인용..
. 삼민혁명론은 파쇼체제의 성격을 반민족, 반민주, 반민중(당시에는 三反으로 말했다. 파쇼체제는 삼반체제가 된다)으로 규정하였고, 그에 대응하여 민족운동, 민주운동, 민중운동이 안티테제로 설정되었다.
이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족·민주·민중혁명은 80년대 혁명적 인식의 제측면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족민주혁명은 지배권력의 종속성과 파쇼적 억압성을 전제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운동의 성격을 정식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항하는 운동의 성격은 반민족, 반민주혁명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지배권력의 성격을 정식화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민중혁명은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반민족, 반민주적 지배권력에 대항하는 혁명의 주체가 바로 민중이고 그래서 민중주체주의적인 혁명이 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의 심화과정은 동시에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확산·심화시켜나가는 과정이었다. 삼민이념이 대중화되어가는 바로 그 시점에 광주민중항쟁의 성격에 대한 대대적인 대중적 선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85년경에는 이에 관한 명확한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평가된다. "이전 시기에는 주로 유인물이나 대자보 혹은 입에서 입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언급되어왔던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서울대를 포함한 서울의 몇 개 주요대학의 학생회 산하 학술부역량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광주민중항쟁의 재조명}이란 책자 및 토론회가 그 대표적인 성과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장구한 민족해방투쟁의 역사 속에서 올바르게 위치지워지고 그 의의와 교훈이 체계적으로 대중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강신철 외, 1988, 앞의 책, 95쪽.
". 이러한 노력을 포함하여 85년 이후로는 '삼민'이라고 통칭되는 이념이 학생대중들 속으로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했으며,이는 반합법투쟁위원회명칭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85년 하반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와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라는 명칭을 보면, 바로 삼민혁명의 심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NL과 CA논쟁
)박현채·조희연은 CNP논쟁을 '1단계 사회구성체논쟁'으로, NL과 CA논쟁을 ''2단계 사회구성체논쟁'으로 정리하였다. 1단계 논쟁에는 학계에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주변부자본주의론 간의 논쟁도 포함한다. 1단계 논쟁은 맑스주의적 방법론'의 확립이라는 문제의식 하에 전개되었다고 하면, 2단계 논쟁은 민족해방론'의 대두에 의해 계기지어지면서 제국주의의 지배' 혹은 제국주의의 지배와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 문제를 핵심쟁점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현채·조희연, 1989a, 앞의 책 참조.
에서는 지배권력의 성격에 대하여 보다 예각적인 입장을 보이게 된다. 삼민투의 경우 지배권력의 성격에 대한 병렬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NL과 CA단계에서는 NL은 지배권력의 종속성에 대하여, CA는 지배권력의 계급적 억압성에 대하여 보다 예각화된 입장을 드러내게 된다. NL은 NLPDR(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의 약자로서 민족모순을 중심으로 남한의 사회구성과 변혁을 사고하는 입장이며, CA는 Constituency Assembly(제헌의회)의 약자로서 맑스-레닌주의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입장인데 개헌을 통한 지배체제의 재편 보다는 제헌의 관점에서 지배체제를 혁명적으로 타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사민혁명론은 광주민중항쟁과 80년의 패배의 경험 속에서 길어올려진 혁명적 인식의 요소들이 종합된 것이라고 한다면, 삼민혁명론 이후는 그러한 혁명적 인식의 요소 중 지배적인 측면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보다 예각화된 혁명적이론을 둘러싼 논쟁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즉 85년 이후 NL과 CA의 경우 삼민혁명론에서 병렬적으로 제기된 혁명적 인식의 여러 요소 중 무엇이 지배적인 것인가를 중심으로 정파적 대립이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해방론은 지배권력의 성격 중 지배적인 성격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해서 종속성을 지배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보다 근본주의적 방식으로 정식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민중민주론은 지배권력의 성격 중 지배권력의 파쇼적 억압성에서 더나아가 맑스-레닌주의적 입장을 전제로 하면서, 지배권력이 독점자본의 계급적 도구로서의 성격을 보다 강조하게 된다.
그러한 분화의 구체적인 과정을 본다면, 86년 경부터 자민투가 서울대에서 발족하고 반제직투反帝直鬪), 반전반핵투쟁을 중심으로 각 대학으로 확산되어가면서 이른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은 확산되어가게 된다. 자민련은 기관지 '해방선언'을 통해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조국통일'의 3대투쟁을 선언하고 한국사회의 변혁의 논리로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을 주장하게 된다. 기왕의 MT계열은 NDR론을 기본골간으로 계승하면서 반제반파쇼투쟁을 선언하는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를 조직하고 기관지로서 '민족민주선언'을 발행하였다. 이로써 학생운동은 86년 상반기 이후 '자민투'와 '민민투' 조직으로 양분되었으며 '해방선언' 및 '민족민주선언'이라는 기관지를 통해 본격적인 논쟁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일송정 편집부, 1989, 앞의 책, 120-121쪽.
. 이 입장은 사회구성체론적 입장으로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갖고 현실투쟁 상으로는 반제직접투쟁론'이라는 이름을 85년말 경 출현하였다. 이 입장은 80년 초의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고 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 농성사건'을 획기적인 반미투쟁의 시발로 평가하면서, 그 투쟁의 성과를 IMF총회 저지투쟁을 매개로 확산시키고자 하였으며, 수입시장 개방요구에 드러나는 미국의 침략적 본질을 철저한 반미투쟁으로써 폭로·선전하고자 하였다.
이 입장이 처음 반제직접투쟁론으로 등장한 시기는 개헌국면이었다. 당시는 정치적 관심의 초점으로 부상된 개헌문제에 대하여 학생운동, 나아가 전체운동이 어떠한 입장과 전술을 수립할 것인가 하는 점이 핵심적인 쟁점이 되고 있었다. 과연 당시의 상황이 개헌국면인가 아닌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개헌 국면으로 규정한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이며, 또한 운동권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는가, 즉 개헌투쟁에 참여해야 하는가 아닌가, 참여한다면 어떤 목적하에서 어떤 슬로건을 내걸고 어떤 투쟁원칙하에서 참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반제직투론이 등장하던 시기에 학생운동의 대세는 전학련'의 입장으로 대표되는 파쇼헌법철폐투쟁론'으로 수렴되고있었다. 이에 대해 반제직투론'은, 개헌은 외세의 식민지 파쇼체제의 안정화 음모'이므로 반파쇼투쟁'을 그 본질적 투쟁인 반미자주화투쟁으로, 즉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자인 미국에 대한 직접적 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입장은 85년 겨울을 거치면서 제3세계 변혁론 일반, 동구에서의 인민민주주의 혁명론', 한국 좌익운동사, 북한의 통일론과 혁명론 등에 대한 폭넓은 연구의 바탕 위에서, 서구의 일반 변혁이론과 구별되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론'으로 재정립되게 된다.
이 입장은 86년초 반전반핵' 팀스피리트 반대' 양키 용병교육 반대' 등의 투쟁을 계기로 반외세자주화'를 전면에 내걸면서 학생운동의 주류로 자리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초기의 투쟁방식은 좌편향'적인 것이라고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86년의 여러 정치적 경험 --5.3인천사태, 건대사건 등---을 통해 그러한 편향이 극복되면서 대중노선'에 기초한 투쟁방식이 그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87년의 직선제개헌'이라는 슬로건 역시 이런 맥락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에 따르면, 기존의 운동은 반파쇼민주화'의 지평에 머물렀으며 그것을 반외세자주화' 조국통일'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였다. 정작 이 3대 투쟁에서는 반외세자주화가 중심축을 이루는 것이며, 민주화와 통일(혹은 통일촉진운동)은 자주화를 위한 실천공간의 확대에 기여하는 것으로 위치지어져야 한다고 본다.
자민투와 당시 NL의 논리를 보자. "한국사회는 식민지성과 반(반)봉건성을 띈 자본주의사회구성체로서, 경제적 토대로서의 예속자본주의와 국가로서의 신식민파시즘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한국의 신식민지 Fascism은 미제국주의와 예속자본가, 지주의 한국민중 지배의 도구로서 다은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미제국주의의 지원없이는 하루도 지탱될 수 없는 괴뢰정권'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 괴뢰정권은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의 폭력적 진압과 사회주의 공격을 위한 양키 지휘하의 미군 4만, 식민지용병으로서의 국군 70만, 민중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키는 '수다스런 오두막'으로서의 국회, 신식밈ㄴ지파쇼지배의 충실한 주구로서의 반동관료의 행정조직, 민중탄압의 첨병인 경찰조직, 신식민지 파쇼지배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잡아가두는 감옥 등"이 괴뢰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조직적 기반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사회는 "미제와 미제의 앞잡이(예속자본가, 지주, 반동관료, 괴뢰정권)에 의해 파쇼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사회"로 파악된다.
자민투에 대립하여, 민민투는 "한국의 사회구성은 자본주의의 역사성 속에서 신식민지예속독점자본주의 단계이며, 이에 기반한 미국의 대소전진기지로서 예속군부파쇼를 국가권력으로 한다. 이는 우리 운동의 성격을 극명히 하는 바, 반제반군부파쇼 민족민주연립정부수립을 목표로 한다""우리 투쟁의 기본침로는 미국의 대소전진기지로서, 신식민지예속독점자본의 상부구축으로서, 미제국주의와 예속파시즘의 유착고리로서 '매판 정치군부처단'을 투쟁의 집중적 매개로서 정립하고, 이를 위해서 대중의 상식을 뛰어넘는 정치폭로의 전국적 조직화를 수행하여, 민족민주전선의 실천적 토대를 구축한다. 또한 군부파쇼와 기회주의적 야권의 정치적 갈등을 예각화하면서 대중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전술적 매개로서 활용하며, 여권의 기회주의성을 폭로,고립시켜 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 )'민족민주전선' 창간호, 일송정 편집부, 1989, 앞의 책, 123쪽에서 재인용.
NL 및 자민투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정형화된 혁명적 인식의 여러 차원 중 지배의 종속성과 식민지성을 한국사회 성격의 제1의적 측면으로 설정하고 혁명의 성격을 바로 그 문제와 대결하는 반제반미혁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당위성에 대한 역사적, 사실적 근거는 광주민중항쟁에서의 미국의 개입이었다.
이 입장은 기존의 사회운동과 그 인적 기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몇가지 중요한 문제제기를 하게 된다
)이상은 다음을 참조. 조희연, 1989a, 앞의 글,26-29쪽.
. 첫째, 한국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은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적 지배'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점이다. 한국사회의 식민지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한국사회 구조분석 및 사회운동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변혁은 그러한 식민지성의 극복을 주요과제로 하는 민족해방혁명'(NLR)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사회의 분석에서 남한사회만을 독자적인 단위로 놓고 사회구성체적 분석을 하는 것은 분단이데올로기를 용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따라서 한반도전체적' 민족전체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른바 반국적 시각'이 아니라 일국적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한사회는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미해방된 지역이며 북한사회는 그 지배로부터 벗어난 민주기지'이므로, 남한사회의 변혁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북한사회의 변혁역량에 대한 적절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한사회 내부로 보면 6·25 이후 단절을 경험하고 새롭게 성장한 변혁운동이 과거의 전통과 연속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셋째, 2차대전 후 한국사회에 대한 외세의 지배과정은 군사적 점령과 전쟁을 통해 민족역량을 무력으로 소멸시키고 일방적으로 토착국가권력을 구축시켰는데 이는 정치적 병합에 가까운 것으로서, 토착국가권력은 자율적인 것이기보다는 외세에 전면적·총체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괴뢰'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의 과제는 연속적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반(半)봉건적 성격에 대한 강조이다. 이 반봉건성이야말로 한국사회에 대한 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지배'가 가져온 반동적 결과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발달했다고 해도 민족분열이 고정화되고 통일민족의 형성이 저지되며, 자립적 민족경제의 기반이 축소·파괴되고 예속성만 심화된다면, 반봉건의 청산'을 운위할 수 없다 는 것이다.
다섯째, 제국주의적 지배로부터의 북한사회의 해방' 및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철학적·사상적 기초가 된 바 있는 주체사상' 혹은 주체철학'을 조직적·사상적 통일성'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기본원칙을 제국주의단계의 식민지종속형 사회의 변혁과정에 창조적으로 적용한---더 나아가 맑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극복한---사상이라는 것이다.
여섯째, 기왕의 2단계 혁명론---당면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이 근본변혁'으로 성장·전화한다---을 부정하면서, 식민지종속형 사회에서의 변혁은 노동계급에 의해 영도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광범한 제계급·계층에 반제애국통일전선으로 결집되고 이에 의해 민주변혁과 나아가 근본변혁이 수행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혁의 길에서는 반제통일전선 내에서 어느 계급이 헤게모니를 갖느냐에 의해 변혁의 성격이 결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반제통일전선의 건설·확대와 그 내부에서의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획득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입장에서는 자주적 민주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민주변혁의 달성은 부르조아혁명의 틀 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등 민중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적 성격을 갖게 되며, 본질상 그것은 이미 근본변혁의 1단계, 혹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1단계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NLPDR이라는 변혁론을 수용하는 입장들의 기본적인 사회이론적 토대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후 반봉건론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이 입장에서 식민지자본주의론'
) 그 원형적 입장에 대해서는 '만만세' 참조. 서울지검 공안부 편, 1990, {좌경이론의 실제, 100-113쪽; 박현채·조희연,,1989a, 1989, 앞의 책, 366-373쪽에 재수록.
이라는 또다른 분화된 입장도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내적으로는 그 사회이론적 규정에서 분화를 겪으면서 그 입장을 더 정밀화해가는데, 나중에는 식민지반(半)자본주의론'
) 식민지반봉건론'은 그 반봉건론'에 대한 비판과 내부에서의 식민지자본주의론'적 경향의 대두에 대응하여 식민지 반(半)자본주의론'으로 개념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개념전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가지 평가가 존재한다. ① 그러한 개념전환은 사회경제적 분석의 내용변화를 전혀 수반하지 않고 있으므로 무의미하다. ② 그간 NL론에서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적극적 분석이 부재한 상태였는데 식민지반자본주의로의 개념전환은 그러한 분석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진일보한 시도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에 대해서는 박현채·조희연 편(1989a) 제6부 1장 2절; 한국사회 성격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열사람 편집부 편, 1989, {민족해방운동의 사상과 이론}, 열사람 참조.
이라는 입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적 입장이 정립되어가는 것에 대응하여, 그 반대의 입장에 선 부류들은 이른바 민족민주혁명론'(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NDR)이라는 변혁론을 근거로 하면서 전술적으로는 제헌의회(Constituent Assembly, CA) 소집론으로 정형화되어간다. 이 제헌의회론은 출발 당시 사회구성체에 대한 논의를 현학적이고 비실천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당면 정치적 상황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나타내는 전술적 결의'를 통일시키는 일에 모든 힘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에 이 그룹은 사회구성체론을 도입하여 한국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게 된다.
이 입장 내부에도 다양한 편차가 있어 일률적으로 정식화하기는 어려우나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적인 주장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식반론의 식민지 규정에 대립하여 신식민지'라는 규정을 수용하고 있다. NL의 식민지 규정은 후진사회에서 전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직접지배에서 간접지배로의 전환을 적절히 해명하지 못하며, 또한 자본주의 발전에 의해서 제국주의의 토착동맹세력이 전환(지주계급에서 독점자본가계급으로)한다는 사실도 간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후진국 민족해방운동의 고양, 사회주의권의 확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에 대응하여 이전의 지배와 착취방식을 포기하고 간접지배와 자본주의적 수탈양식을 매개로 한 새로운 지배를 시행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 입장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 토착국가권력의 전면적 예속성을 강조하는 데 반하여 토착국가권력의 완전한 자율성을 강조하지는 않으나, 토착국가권력의 독자적인 (자본주의적) 물적 토대가 존재하며 따라서 토착국가권력의 지배적 성격은 외세에의 예속'에서 보다는 독점자본가계급의 계급적 지배도구'라는 점에서 주어진다고 본다.
한편 변혁의 과정에 대해서 CA는 소비에트적인 이행의 길'을 변혁의 일반적 과정으로 수용하면서 연속 2단계론'적 혁명모델을 상정한다.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정식화되는 한국의 사회구조는 한편으로 근본적 변혁을 위한 물질적 전제를 광범위하게 창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본적 변혁을 제약하는 물질적·정치적 조건도 창출한다. 즉 낮은 생산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과 투쟁력의 발전이 지체되며, 정치적 자유가 박탈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와 조직화가 심각하게 장애를 받게 된다. 당면 민주변혁은 이 두 가지 제약조건을 타파함으로써 근본변혁으로 성장·전화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력발전에 대한 질곡을 제거함으로써 근본변혁의 물질적 전제를 확보하고, 정치적 자유의 획득을 통해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기 위한 계급투쟁이 전면화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때 반제반파쇼민주화'를 지향하는 당면 민주변혁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전면적으로 개화시킨다는 점에서 부르조아혁명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CA의 NDR적 입장에서는 부르조아적 혁명으로서의 당면 민주변혁이 근본변혁을 위한 물질적·정치적 조건을 창출하면서 근본혁으로 성장·전화해가는 것이 된다. 이러한 CA적인 혁명모델을 NL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의 일반적 형태, 즉 혁명적 국가권력의 소비에뜨적인 형태'에만 집착하는 것으로서 제국주의 지배하에 있는 사회의 변혁과정의 특수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두 입장의 대립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논쟁의 출현이 NL의 대두에 의해 계기지어졌기 때문에, 제국주의 지배'의 문제를 전면화시킨 NL적 시각이 던진 운동사적·이론사적 파장을 먼저 분석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먼저 운동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85년 학생운동권 내의 MT는 과학적 운동론의 정립을 표방하면서 계급해방'을 지향하는 혁명'의 전망을 강조하고 나왔으며, 이것이 광범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85년의 운동과 이론적 작업을 규정하는 사회인식의 기본적 내용으로 정착하였다. NL의 대두는 바로 이처럼 85년의 인식지평에서 확인된 계급해방의 문제를 민족해방'의 전망에서 재조명할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NL의 대두에 의해, (남한) 사회 변혁을 단순히 계급해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넘어서서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이 통일된 새로운 사회변혁의 유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한국사회운동을 인식하는 것은 한 사회의 계급해방의 과정을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좀더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한편 이론사적으로 본다면, NL론의 대두는 한국사회를 단순히 계급모순만이 심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사회 일반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서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착종되어 있는 식민지종속형사회 (제국주의 지배를 받는 사회)로 바라볼 수 있게 됨으로써, 제국주의적 규정성과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의 통일적 파악'이라고 하는 새로운 이론적 과제에 착안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85년의 인식지평에서는 한국사회의 계급해방적 변혁에 복무하는 이론적 도구로서의 맑스주의'적 (혹은 ML주의적)원칙과 방법론의 정립이 이론적 중심과제가 되었다고 한다면, NL의 대두로 계기지어진 86년의 인식지평에서는 위와 같은 현실파악에 대응하여 식민지종속형'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이 중심과제가 된다. 이 과제는 식민지종속형 자본주의화의 길을 경험하는 사회가 선발자본주의사회나 혹은 후발자본주의사회 등 제국주의적 자본주의화의 길을 겪는 사회와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의 해명과 연관되어 있다. NL은 자본주의 일반의 분석논리만으로 한국사회를 분석하려는 경향들을 비판하면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계급모순의 프리즘에 의해서만 분석될 수 없는, 선진자본주의사회와 질적 차별성을 갖는 사회로서의 한국사회가 갖는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85년의 인식지평에서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과 그에 따른 계급모순의 심화를 적극적으로 파악했다고 한다면, NL의 대두에 의해 전화된 논쟁지평에서는 바로 그러한 자본주의적 발전에 제국주의적 규정성 속에서 갖게 되는 특수성 그리고 그러한 계급모순이 민족모순과 결합됨으로써 갖게 되는 발현의 특수성을 더 적극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그러나 사회구성체 및 변혁론 차원에서의 이러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의 삼민혁명론적 입장이 NL적 입장으로 단순화·예각화되는 과정에서 북한의 남한혁명론 및 남한 사회구성체 인식에 있어서의 일정한 퇴행이 나타나게 된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미제국주의의 지배로 인하여 남한사회의 문제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남한자본주의발전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식민지반봉건사회론'과 같은 규정을 도식적으로 적용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이 규정은 일제하 혹은 해방공간에서의 남한사회 성격이라고 한다면, 60년대 이후 '식민지종속형' 자본주의발전--그것이 '식민지종속형'이라고 하더라도--이 가져온 남한 지배구조의 변화를 분석에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나아가 변혁론의 입장에서도 남한지배계급의 물적 토대와 정치적 자율성--그것이 제한적이라고 하더라도--을 '극소주의'적으로 인식하는 한계를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NL 대 CA의 대립을 당시의 개헌국면에서의 투쟁방침의 차이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민족해방론과 민중민주주주의론은 정립 이후에는 당면 개헌투쟁에 대한 방침을 둘러싸고 가장 핵심적으로 대립하였다. 사회구성체론적이나 변혁론적 입장의 차이는 바로 그러한 당면 투쟁방침의 차이를 근거지우는 구조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변혁적 입장을 둘러싼 입장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이었다고 하면, 이제 일정하게 정립을 완료한 상태에서 대중을 상대로 한 투쟁의 방침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투쟁방침과 관련하여, 86년 이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중요한 변화는 개헌투쟁국면 속에서 민족해방론이 대중노선을 표방하면서 직선제 개헌을 부각시키면서 혁명적 전위조직 건설의 문제의식 보다는 대중적 투쟁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게 된다는 것이다.
85년 2.12총선에서 신민당이 승리하면서, 개헌문제는 중요한 현안이 된다. 당시 학생운동을 비롯한 저항운동진영은 85년 하반기부터 97년 까지의 시기가 개헌을 위한 투쟁국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85년 하반기와 86년 상반기에 개헌투쟁을 둘러싼 입장은 개헌투쟁무용론, 직선제개헌론, 민주제개헌투쟁론,삼민헌법 쟁취론, 파쇼헌법철폐투쟁론 등으로 나뉘어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의 개헌투쟁은 그것을 목적의식적인 혁명투쟁의 관점에서 어떻게 위치지우고 이용할 것인가하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여기에 86년을 지나면서, 민족해방론의 입장은 개헌투쟁이 기본적으로는 미제국주의에 의한 파쇼체제의 재편시도라고 바라보면서, 미국은 기본적으로 파쇼체제의 변형을 목표하고 있지만, 민중적 압력을 통해 미제국주의가 파쇼체제를 민주적인 방향으로 재편하도록 강제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미제국주의와 파쇼세력 간에는 일정한 긴장과 갈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직선제는 군사독재정권을 통해 남한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국민의 손에 의한 권력창출의 기회를 부여하게 됨으로써, 미국 자신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군사독재의 재집권을 어렵게 함으로써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직선제는 미국의 식민지지배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혁명적 슬로건이다""직선제는 가시적 전선으로써 대중투쟁이 고양되어가는 과정에서 노골화되는 미국의 군부정권 지원의 실체를 폭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광범위한 대중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고 반민자주화의 섬광을 조직하여 반미자주화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시켜 나갈 수 있다"
)일송정 편집부, 1989, 앞의 책, 134쪽.
라고 인식하였다.
반면에 민민투 쪽에서는 당시 상황을 '개헌국면'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류라고 판단하고, 개헌투쟁을 곧바로 반미투쟁으로 hf고 가려는 것을 반대하면서, 당면 헌법을 매개로 한 혁명적 정치투쟁으로의 발전이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하면서, 제헌의회 소집을 통한 민중헌법 쟁취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민민투는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등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신민당의 개헌 현판식을 대중들의 혁명적 권리투쟁과 진정한 민중적 권력의지를 부상시키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개헌국면을 보수주의자들의 개량적 지배체제 재편의 계기로 방치하고 않고 이것을 혁명적 계기로 이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86년 4월 29일 연세대에서 '전국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학생연합'(민민학련)이 결성되면서 발표한 성명서에 따르면, "혁명적 민중은 '개헌'이 아니라 '제헌'을 요구한다--제헌의회 소집은 반동적 군사정권에 대한 민중의 혁명적 투쟁의 선언이며 미국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주화 선언이며, 국회 등을 매개로 한 자유부르조아들의 추잡한 타협과 개량적 음모에 대한 폭로이다"
'혁명운동의 기수를 제헌의회 소집으로'.
라고 규정하였다.
자민투가 직선제 개헌을 개헌투쟁의 슬로건으로 정식화하게 되면서, 80년 이후 혁명화의 방향으로 급진화되어오던 학생운동은 대중성이란 이름으로 분명한 방향 선회를 하게 된다. 이러한 방향 선회는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의 투쟁에 중요한 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첫째는 당면 투쟁에서 '자유부르주아'(liberal bourgeoisie)적인 야당 정치인들과의 결합을 초래함으로써 이전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대중성을 부여하게 된다. 이전과는 달리 개헌투쟁은 대중적인 투쟁으로 전개될 수 있게 되며, 이것은 87년 6월 항쟁이라는 정점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자민투가 직선제 개헌론으로 선회하게 되면서, 87년 6월 항쟁에서의 국민적인 직선제 개헌 투쟁이 가능하게 된다. 민족해방론의 대중노선은 제도정당들의 입장과 결합되면서 직선제 개헌 투쟁이라고 하는 국민적 투쟁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80년대 반독재투쟁의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이와는 반대의 측면인데, 이것은 운동의 '개량화'를 동반하게 된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보수정치인들의 정치투쟁과 혁명진영의 개헌투쟁이 혼합됨으로써 제도권 정당들이 '개량'적인 방향으로 직선제 투쟁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대중들이 6.29 선언이라는 기만적 선언에 만족하면서 주저앉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된다. 87년 6월의 대립축이 6월 항쟁과 6.29 선언이라고 할 때,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6.29선언이라고 하는 '위로부터의' '개량'정책에 의해 수습되게 되는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6월 민주항쟁의 '이중성'이다
)87년 6월 항쟁의 이중성(원인으로 본 이중성, 결과로서의 이중성)이다. 6월 항쟁은 군부정권을 퇴진시킴으로써 민주적 공간을 확장하였다는 점에서 진일보하였으나, 6월 항쟁을 통해 '위로부터의 보수적 민주화'가 지배적인 것이 됨으로써 근본적인 민주화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6월 항쟁의 성격이라는 점에서 보면, 80년대 변혁적 논의와 실천의 맥락에서 보면, 지나치게 우경적인 투쟁으로 경도되었다. 그래서 제도정치세력과 군부세력 간의 타협의 가능성을 부여했으며, 6.29선언으로 중단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조희연, 1999a, "'종합적 시민운동'의 구조적 성격과 그 변화의 전망에 대하여", {당대비평} 겨울호.
또하나 중요한 점은 NL 대 CA의 새로운 대립구도 속에서 이전의 '원칙적인' 민중주체주의와 혁명적 전위주의는 보다 현실적인 노선으로 구체화되게 된다. 즉 NL이 이전의 민중주체주의를 현실적인 노선으로, 즉 대중주의 노선으로 정립시켜가게 된다면, CA는 이전의 혁명적 전위주의를 보다 현실적인 노선, 즉 전위조직 건설노선으로 실현시켜가게 된다.
어떤 점에서 민족해방론의 대중노선 표방 속에서, 그 이전까지 혁명적 전위주의의 흐름에 일정한 반전이 나타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배태된 혁명적 인식, 즉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주체성이 광범하게 존재하고 그 자연발생성에 혁명적 목적의식성을 보장하는 혁명적 전위의 부재로 혁명이 유실(流失)되고 있다고 하는 인식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민족해방론이 제기되면서, 그러한 혁명적 전위주의에 대립되는 대중노선이 보다 강조되어 왔다.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주어졌던 민중주체주의는 현실적인 대중주의노선으로 나타나게 된다. 앞서의 민중주체주의는 원칙적으로 입장으로서 혁명적 전위주의라는 목표와 결합된 채로 전개된 것이었고 한다면, 민족해방론에서의 민중주체주의는 일종의 대중주의 노선으로 경도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민족해방론의 입장 변화와 달리, CA는 혁명적 전위주의의 입장을 보다 '현실적인' 입장으로 실현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즉 이전의 민중주체주의와 혁명적 전위주의가 '원칙적'인 입장이었던 데 반하여, 이제는 보다 현실적인 시도로 나타나게 된다. CA그룹은 '사회민주주의적 관점에 투철한 전위'가 현실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레닌의 혁명론을 따르는 제헌의회 입장에서는 철의 규율을 갖고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사회민주주의적 혁명투쟁으로 지도하는 직업적 혁명가로서의 전위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스스로 이를 조직적으로 자임하였다. 이전까지 민중주체주의와 혁명적 전위주의는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되지는 않았으나, NL과 CA가 당면 개헌투쟁국면에서 대립하게 되면서, 한쪽은 혁명적 전위주의를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대중주의적 방향으로 더욱 선회해가게 된다고 생각된다. 어떤 점에서 상호침투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 내부에서 민족해방론이 대세를 점해가면서, '개량화된' 대중노선이 보다 중심화되어가고, 반대로 CA의 전위주의적 입장은 제헌의회 그룹 내의 소수입장으로 존재하게 되며, 대중성을 제약된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평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NL과 CA의 논쟁 이전의 논쟁은 '광주'를 자양분으로 하여 70년대적인 자유주의적 인식을 뛰어넘어 혁명적 인식을 '획득'되는 과정의 논쟁이었다. 그러나 NL과 CA논쟁 부터는 그러한 혁명적 인식이 일정하게 '획득'된 상태에서 그러한 혁명적 인식들이 보다 체계화된 혁명이론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 선진적인 학생운동진영이나 사회운동, 노동운동 진영 내부에서는 운동이 혁명지향적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문제는 그러한 혁명이 어떤 혁명이고 어떤 혁명운동이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전의 논쟁에서는 광주의 경험과 교훈을 성찰하면서 혁명성을 발전시키려는 방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후의 논쟁에서는 그 논리 전개에서 일정하게 '광주'로부터 자립화한 측면이 존재한다. 혁명적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추동력은 바로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주어졌지만, 이제 혁명적 인식은 자립하여 자기전개를 하게 되는 것이다.
NL과 CA논쟁에서는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의 급진화와 투쟁주체인식에 있어서의 급진화 양면 모두에서 '획기적인' 인식의 심화가 나타나게 된다. 먼저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와 관련하여, 지배의 폭력성(파쇼적 성격)과 계급성 나아가 지배의 종속성에 대한 인식은 분명하게 전제되고 있다. NL은 지배의 종속성은 지배의 식민지성이라는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CA는 지배의 계급성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NL의 경우에 있어서도, 지배의 폭력성과 계급성이 고려되고 있으며, 그것은 매판독점자본가계급 등이 남한의 식민지권력을 운영하는 한 주체로서 참여한다는 인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CA의 경우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남한국가는 남한독점자본가계급의 지배도구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의 지배도구라고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투쟁대상에 대한 혁명적 인식은 공유되어 가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투쟁주체인식의 급진화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앞서의 논쟁에서 드러났던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민중의 구성에 있어서 이견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나, 양자 모두 노동자계급이 중심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노동자와 농민, 빈민 등이 민중의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있으며, 학생집단은 선도적인 정치투쟁에 있어서, 혁명적 전위 형성에 있어서의 적극적인 역할 등으로 '주요역량'의 지위를 갖는 것으로 공히 파악되고 있다
)NL과 CA의 계급분석 및 혁명세력 구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조희연, 1989b, "현단계 사회구성체논쟁의 구도와 쟁점에 관한 연구", 박현채·조희연 편, {한국사회구성체논쟁} 2권, 죽산(폐업 후 한울에서 발행).
. 투쟁주체라는 점에서 NL과 CA가 갖는 것은 중간층의 혁명운동에서의 지위, 민족모순에 대항하는 중소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잠재력의 문제 등 민중의 상층범위에 있어 이견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에서는 더욱 심화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4. 80년대 '광주문제'의 운동화과정
)광주를 둘러싼 쟁투(爭鬪)는 필자는 '광주의 의미를 둘러싼 쟁투', '광주문제 자체를 둘러싼 쟁투', '광주문제의 해결을 둘러싼 쟁투'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80년대 전반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의미의 재해석과 계승을 둘러싼 쟁투를 광주의 의미를 둘러싼 쟁투라고 한다면, 광주문제 자체를 정치사회적 쟁점으로 만들기 위한 저항진영과 그것을 은폐하고 호도하기 위한 독재정권의 쟁투를 '광주문제 자체를 둘러싼 쟁투'라고 할 수 있다. 87년 이후는 광주를 배경을 한 신민당 및 평민당 등의 주요야당으로의 부상, 광주문제의 국민화를 위한 사회운동의 투쟁으로 인하여 어떤 형태로든 광주문제의 정치적 해결이 모색되지 않으면 않되는 국면으로 되어간다. 87년 12월 대선에서 비록 군부세력이 재집권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87년 6월 항쟁의 규정성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광주문제의 해결이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이후의 시기는 광주문제의 해결'을 둘러싼 쟁투의 과정이 된다. 그런 점에서 '광주문제 해결을 둘러싼 쟁투'의 시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해결을 둘러싼 쟁투의 과정에는, 광주문제의 타협적 해결을 지향하는 흐름과 광주문제의 비타협적 해결을 둘러싼 흐름, 이 양자의 긴장과 갈등이 지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96년??? 전두환의 구속은 타협적 해결의 방향으로 가던 흐름이 '아래로부터의' 비타협적 해결요구투쟁에 의해 반전된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앞 절에서는 사상이론투쟁의 견지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적 유산이 어떻게 80년대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의 혁명화를 위한 지적, 정신적 기초로 수용되는가를 살펴보았다. 이 절에서는 광주민중항쟁 자체가 규명되고 해결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으로서 어떻게 쟁점화되고 투쟁해 가는 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앞 절에서의 분석이 주로 광주의 정신적 유산이 어떻게 80년대 혁명적 인식의 자양분으로 전화되어가는 가를 살펴본다고 하면, 이 절에서는 광주민중항쟁에서의 국가권력의 폭압성, 양민학살, 학살자 처벌 등의 문제가 어떻게 쟁점화·운동화되어가는 가를 사회운동 슬로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의 분석이 주로 비합법적인 문건이나 운동에 초점을 두었다고 하면, 이 절은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문건과 운동에 초점을 두게 된다.
80년대의 전과정을 통하여 광주민중항쟁의 올바른 자리매김, 진상규명, 광주학살 처벌 등은 80년대 운동의 핵심적인 이슈이자 직접적인 요구사항이었으며 반독재민주화투쟁의 구성적 내용이었다. 특별히 80년대 운동에서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은 80년대 운동의 존재기반이자, 정신적 기반이었고, 운동의 직접적인 요구사항이었다.
'광주문제'가 쟁점화되는 과정은 크게 세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83년 말 유화국면까지의 시기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에는 한편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의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구속자 석방, 진상규명 등을 중심으로 운동이 전개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광주문제가 선도적으로 제기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둘째의 시기는 유화국면 이후 85년 2.12총선까지의 시기인데, 유화국면의 시행으로 합법적·반합법적 공간이 확대되면서, 광주 진상규명과 구속자 석방, 학살자 처벌 등이 피해자 중심의 운동에서 사회운동 전반의 공개적인 이슈로 제기되기 시작하며 광주문제가 사회운동의 핵심적 구호와 이슈로 정착되어 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세 번째 시기는 85년 2.12총선 이후 87년 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운동정치'로부터 '제도정치'로 이동한
)조희연, 1989a,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당대, 11-19쪽.
야당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이를 쟁점화하면서 광주문제가 재야이슈이자 원내이슈로 전개되는 단계이다.
첫 번째 시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 시기에서의 광주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여러 차원에서 다른 성격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광주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광주 및 전남지역에서는 폭넓은 공감대를 갖는 운동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전국적인 차원에서는 그것이 공개적인 투쟁이슈로 부각되지는 못하고 있었고 학생운동 등 선도적 투쟁에서만 저항의 이슈가 되고 있었다. 공개적 차원에서는 단지 피해자 중심의 운동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먼저 광주 및 전남지역에서는 피해자가 2,000여명에 이르는 대사건이었고, 광주 및 전남지역에서는 사건의 본질이 너무도 명확한 상태였기 때문에, 넓은 공감대 위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공감대 속에서 광주의 학생운동은 서울의 학생운동과 같이 급진화되어가고 있었다. 전남대 9.29 학내 사태에 살포된 유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적과 아의 계급적 모순이 폭발적으로 격화 5.18광주민중봉기의 혁명적 좌절을 겪고 이제 우리는 한반도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으로서 제국주의적 파쇼의 반동적 일체화를 통탄의 아픔으로 경험하면서""4.19 이후 민중역량의 집결된 표현으로서 광주민중봉기는 적들과의 혈투를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적의 기득권을 재편하는 매판 파시스트 체제의 구축을 허용하고 축적된 민중역량의 분열과 와해, 이념적 혼란 및 당면 투쟁목표였던 민주적 제조건을 획득하지 못하였으나"5.18 투쟁을 통해서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첫째 전략부재의 무계획적 싸움--둘째--민중의 혁명적 요구와 투쟁내용의 급진적 수용에 실패--세째--민주적 제도적 조정과 전술적 응전력의 확보 및 고립분산된 모든 운동세력의 통일과 역량이 결핍--마지막으로 학생운동은--단순한 전체투쟁의 기폭제 역할로 끝나버렸다. --광주민봉은 해방이후--축적되어온 역량의 최고형태의 표현임과 동시에 교회운동, 인권운동, 학생운동체들의 결정적 자기한계를 나타낸 투쟁이었다. 5월 싸움은 싸움의 질적 전환을 요구하였고, 어떠한 세력이 주도하여 어떠한 내적 준비와 어떻게 하면 적을 효과적으로 타격을 가할 것인가를 보여준 싸움이었다."(전남대 "9.29 사태 유인물 내용 분석 및 해설", 1981.10,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앞의 책, 235-240쪽). "싸움은 이제 단순한 현상유지와 현상개량의 보완적 싸움이 아니라 보수적 파쇼체제와 진보적 혁명세력 간에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 싸움이었다"(241쪽). 이 유인물은 70년대의 운동과 80년대의 운동의 질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70년대와는 다른 혁명적 운동으로의 발전을 광주항쟁을 요구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 전남도민 5월 시국선언은 "5월 의거 기념일에 태극기를 게양합시다. 5월 의거 기간에는 검은 상장(깃)을 차고 오락을 삼갑시다. 5월 18일 정오 일제히 묵념하고 추모기념집회를 가집시다"
)"전남도민 5월 시국 선언문", 1981.5,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앞의 책, 220쪽.
라고 주장하고 있다. 81년 8.15 특사에 즈음한 윤공희 대주교는 강론에서 "국민적 화해와 화합을 추구하는 견지에서, 광주사태 관계 구속자들을 모두 석방하는 방향으로, 계속적인 과감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윤공희, "국민적 화해와 화합을 위한 제언: 1981.8.17 특사 조치에 즈음한 월요미사 강론",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51.8 광주 민주화운동 자료총서} 2권, 224-225쪽.
그러나 초기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 때문에 또한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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