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유럽 산업화와 노동계급 서평들

안병직 외,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 까치 1997
 
 
<책 소개>

이 책은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러시아 등 유럽 5개국의 산업화 과정을 비교하고,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을 고찰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19세기 노동운동이 공장 프롤레타리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종래의 전통적인 해석을 넘어서서, 산업화의 전진적 과정, 수공업 부문의 중요성, 수공업 노동자들의 헤게모니와 문화 등을 강조한다. 이것은 1970년대 노동사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책 차례>

서론

1장 영국 산업사회의 성립과 노동계급 (이영석)
2장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김현일)
3장 19세기 독일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형성 (안병직)
4장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선택 (안재흥)
5장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산업화와 혁명적 노동계급의 형성 (이채욱)
 


서평: 노동운동사에 대한 절충주의적 접근
 

                             김경일 (정신문화원, 사회학)
 
이 책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5개 나라에서 산업화와 노동계급이 형성되는 과정을 2년 여에 걸쳐서 연구한 공동 작업의 성과이다. 번역서를 제외한다면, 이 주제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5백쪽이 넘는 방대한 연구서를 발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책이 지니는 더 큰 의미는 공동 연구로서의 전범을 제시했다는 사실에 있다. 일관된 문제의식과 사례 연구들의 정합성, 그리고 개별 사례들 사이의 유기적 관련성 등에 대해 이 책은 매우 진지하고 통찰력 있는 시각들을 제시하고 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노동운동은 19세기 서구의 산업혁명 과정에서 출현한 근대적 공장노동자들 핵심으로 하는 단일 계급의 주도하에 전개되었다. 이에 따르면 노동운동의 역사는 부르주아 계급의 착취와 국가의 억압에 맞서 노동계급이 승리를 쟁취해 나가는 끊임없는 진보로 가득찬 이야기이다. 이러한 거대 서사가 서구 계몽주의의 q보편적이고 목적론적 역사 해석을 반영한다는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서 보듯이, 1960년대 이래 이러한 전통적 견해는 서구에서 발전된 새로운 노동사 연구들에 의해 반박되고 재해석되어 왔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 책은 전통적 견해들에 도전한다. 이에 따라 유럽 산업화 과정은 급격한 생산의 혁신과정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었으며, 근대적 부문에 못지 않게 전통적 부문이 함께 공생하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된다. 노동계급 또한 내부적으로 단일한 동질의 사회집단을 이루었다기보다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노동운동의 성립과 발전 역시 경제적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와 사회라는 변수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통적 해석들에 대한 일종의 신화파괴적인 이러한 주장들은 나아가서 노동사 연구에서 새로운 영역들로 확장된다.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전통적 부문이나 장인노동, 수공업 노동과 같은 전통적 요소들이 중시되고, 가족 관계나 생애 주기 또는 주거 환경 등과 관련하여 가족적 요소들이 강조되며, 새로운 소비생활과 놀이문화, 여가 및 노동자들의 집단적 자의식과 정체성(identity)이 부각되며 노동운동의 이념적 뿌리를 노동의 자율성이나 직업적 긍지와 자부심과 같은 전통적 도덕경제의 가치들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정주의 해석과 아울러 이 책은 아래에부터 위로의(from the bottom up) 시각을 제시한다.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관습을 일종의 범죄로 보거나 노동자 가정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식, 또는 노동자들의 음주 습관의 폐해에 대한 지적이나 주점이 공공의 풍속을 해치는 퇴페적 장소라는 인식 등은 이러한 시각에서 반박된다. 즉 그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르주아의 도덕관념과 규범을 이들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충주의적 접근은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현실에 보다 다가갈 수 있는 유연한 시각을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보다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예컨대 생활수준 논쟁을 들어보자. 유럽의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에 관한 문제는 특히 '산업혁명'이 전형적으로 진했되었던 영국을 중심으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어온 주제이다. 그런데 이 책의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낙관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즉 전반적으로 파악해서-임금과 물가의 평균치에 입각한 판단이 개별 노동자 가계의 현실을 간과하거나 왜곡할 우려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생활수준은 개선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노동자들(또는 대중)의 삶의 질에 대한 평가가 각각의 기준이나 입장에 따라 다룰 수 있듯이 여기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리 여부를 넘어선 해석과 의미 부여의 과정이 수반된다.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전후 부흥기의 긍정적 평가가 냉전 체제가 붕괴된 이후 비관적 전망으로 바뀌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에는 지구화와 정보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잠재해 있지는 않는 것일까.

덧붙이자면, 불가능한 요구일지도 모르겠지만, 비교사적 분석이 국가별 사례가 아닌 연구 영역 차원-예컨대 산업화 과정, 노동계급의 형성, 노동 문화, 노동조직 등과 같은-에서 이루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를 통하여 19세기 이래 서구 노동운동은 전통적 수공업자, 장인(영국, 프랑스, 독일), 또는 공장노동자(스웨덴, 러시아)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상반된 평가가 실은 노동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시기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는 노동의 도전에 국가와 지배세력이 전향적으로 대처했던 영국과 노동자들의 불만을 체제 나에서 흡수할 통로를 봉쇄함으로써 그것의 혁명적 폭발을 조장했던 러시아의 상반된 사례를 통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대한 유용한 시사를 끌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교수신문 114호, 1997.6.9)


서평: 유럽 노동사의 비교사적 연구-<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 서평, <<서양사론>> 54호 (1997)
 

                                         정현백 (성균관대, 서양사)
 

1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스웨덴 5개국의 산업화과정, 노동계급의 등장과 존재양태 그리고 노동계급의 조직화과정을 520쪽에 걸쳐 포괄적이면서도 밀도있게 서술한 책이다. 요즈음 해외에서 잘 알려진 서양사관련 서적들이 국내에 많이 번역되고 있어, 역사학도나 일반독자들이 서양사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현저히 늘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적들이 다루는 주제가 어느 한 국가나 시대에 국한되기가 일쑤여서, 중등교육과정의 세계사교육이 부실한 우리 현실에서는 몇몇 나라들의 상황을 비교하여 서술하는 서양사서적의 필요성을 통감하던 차였다.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은 바로 이런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책은 서론에서 밝힌 대로 약 2년 가까이 진행된 공동작업의 결과로 나온 만큼, 서술 자체가 대체로 일관성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다듬어서, 책 전체의 서술이 견실하게 잘 다져졌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오랜만에 서양사학계에서 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연구서가 나온 것 같다.

또한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에서는 지난 20여년동안 유럽사회에서 진행된 경제사 및 사회사연구의 성과를 폭넓게 소화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그래서인지 과거의 노동사서술이 조직사나 이념사위주로 서술되었다면, 이 책에서는 노동조합이나 사회주의 정당의 발전사보다는 19세기 노동자들의 노동과 생활세계 전반에 대한 분석, 즉 임금, 노동시간, 작업환경과 노동방식, 주거상태, 가족생활과 가족관계, 여가-와 문화활동 등에 더 많은 비중이 두어지고 있다.
 

2

이 책이 지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평자의 입장에서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책의 서문에서 편자 안병직교수는 "이 책은 이 개별국가들을 하나의 독립된 연구대상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 각각의 발전을 서로 비교한다는 비교사적 관점을 취한다. 비교사적 분석을 통해서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국가별 발전의 유형화에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서론에서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한 것과는 달리 본문에서 비교사적인 분석은 소략하다. 각각의 저자들은 자신이 취급하는 국가의 특성을 잘 정리하고 있으나, 본문의 어느 대목에서도 비교는 시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론에서 비교사적 고찰은 좀 더 심도있게 취급되었어야 하는데, 여기에서도 비교는 가볍게 자나치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은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각국의 노동계급 형성을 대비시켜 고찰하였다는 지적이 더 정확할 듯하다.(주1)

    이 책은 카츠넬슨의 '노동계급의 형성'의 서술방식과 상당히 유사하고, 이영석교수 자신도 본문에서 직접 카츠넬슨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카츠넬슨의 책보다도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에서의 비교는 더 소략하다. I. Katznelson and A.R. Solberg eds., Working Class Formation: Nineteenth-Century Patterns in Western Europe and the United Stat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6을 참조.
특히 유럽사에 대한 깊은 지식을 지니지 않은 독자들을 고려한다면, 이영석교수의 글에서는 '최초의 산업국가'인 영국이 지니는 특수성이 조금 자세히 설명되어야 했고, 또한 안병직교수의 글에서도 영국의 노동사에서 다룬 국가간섭의 성격과는 다른 독일 사회국가의 역할에 대한 좀 더 친절한 언급이 필요하였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에서는 왜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일반적인 노동자문화보다는 특별히 '탈기독교화'가 길게 서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추가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쟁점은 노동사에 대한 접근방식이나 관점이 다섯 편의 논문에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60년대말에서 80년대초까지 활발하였던 '신 노동사연구'는 공장노동자에 대한 이전의 강조에서 탈피하여, 그 촛점을 수련공에게로 옮겨갔다. 보다 많은 관심들이 前産業的인 생활방식과 집단심성 그리고 이것의 자본주의적 근대화와의 충돌에 두어졌다. 여기에서는 계급형성( Working Class Formation)의 모델이 노동사연구의 방향타였다. 그리고 여전히 생산관계와 생산수단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가족생활, 여가시간 그리고 지역적 단결과 의사소통구조들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고조되었다. 그러나 80년대말, 9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신노동사연구'의 패러다임도 방어적인 국면에 진입하였다. 경제적 토대의 우선성이라는 관점은 서서히 문화의 자율성에 대한 신념으로 교체되고 있고, 톰슨이 내세우던 인간경험에 대한 강조에도 의문이 제기되면서, 담론이나 언어를 통한 접근이 부상하고 있다. 이제 신노동사연구는 다시 '구노동사연구'가 되어가고 있다.(주2)

    Jurgen Kocka, Suggestions and Debates. New Trends in Labour Movement Historiography: A German Perspektive, International Review of Social History, 1997 (No.42), p.68 참조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에서는 상기한 논쟁들의 수용에 있어 저자에 따라 편차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영석교수는 이미 서두에서 수정론적 해석이나 언어적 접근경향에 대해 언급하고, 이런 문제의식을 일정정도 고려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의 전체적인 무게중심은 과거의 '신노동사연구'쪽에 가깝다. 안재홍교수의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선택'에서는 노동운동지도부가 선택한 상징적 용어와 함께 담론적 분석이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339면) 이에 비해 프랑스, 독일, 러시아를 다루는 글에서는 오히려 60년대말 이래 신노동사연구의 성과들을 차분히 정리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서론에서도 책임편자인 안병직교수는 "어떤 구조적 요인에 의해서 계급이라는 하나의 동질적인 사회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는가"라는 점에 이 책이 치중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깔끔히 정리된 문장들 이면에는 바로 이런 노동사연구의 방향전환과 관련된 기왕의 혼란들이 정리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 같다.

이런 문제의식하에서 이 책의 비교사적인 분석이 거둔 성과로 서론에서 지적되는 일곱가지 테제를 검토하는 것은 흥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첫째로, 산업화의 시점이나 진행속도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다루는 5개국은 상이한 발전과정을 보여주지만, "19세기말까지는 산업화를 통하여 이륙의 단계에 진입하거나 이를 완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산업화는 산업혁명, 즉 산업생산의 혁신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을 밟았다는 '점진론'의 입장을 채택하면서, 또한 본문 곳곳에서는 생산기술의 혁신보다는 생산조직상의 변화가 강조되고 있다. 둘째로 19세기의 산업노동력은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요소, 매뉴팩쳐나 광산, 수공업 그리고 선대제하의 분산된 가내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나뉘어 있었고, 영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서는 이 노동자들은 농촌과의 연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노동자내부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19세기를 통해서 이들의 계급형성은 크게 진전되었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내부적으로 집단적 동질성을 획득하여 갔다는 것이다. 넷째로, 19세기 동안 노동운동은 대중운동으로 성장해갔고, 이는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체로 숙련노동자층에 토대를 둔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지금까지의 여러 공통점과는 달리 노동운동의 정치적 혹은 이념적 성향은 국가별로 차이가 있었고, 국가별 노동운동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은 경제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혹은 사회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혁명 혹은 개혁등으로 표현되는 노동운동의 이념이나 성향은 노동자들의 의식발전의 정도에 달려 있다기 보다는 노동운동이 처한 상황에 따른 전략상의 차이로 이해할 것을 권고한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이념과 실제활동, 노동운동의 지도부와 일반노동자의 의식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부가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섯째, 19세기 유럽 노동자 정당이나 노조에서 드러나는 사회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의 분열이 지적되고 있다. 나아가서 노동자 정당과 노조와의 관계도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는 독일형, 그 반대유형인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을 절충하여 양자가 상호대등한 동반자로 서로를 인정하는 세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상기한 '유럽산업화와 노동계급'의 저자들이 자평하는 자신들의 성과에서 암시되듯이, 이책에서는 과거에 주로 진보적인 역사가들에 의해 제시되었던 노동운동에 대한 일반적 해석들을 누그려뜨리면서, 각 국가에 따른 노동자상태나 노동운동의 다양성이 강조되거나 저간의 논쟁성과들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동시에 전통적인 노동사가들사이에 합의를 보아왔던 노동계급의 진보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 책의 저자들은 노동계급의 형성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계급적 동질성을 표출하기는 하였으나, 그 의식은 혁명적이지 않았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52면) 또한 노동운동의 이념은 노동운동이 처한 상황에 따른 전략상의 차이로 이해되고 있다. 이 점이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평자가 생각하기에 독일, 프랑스, 러시아 노동운동 등에서 나타난 과격한 언어들과 혁명에 대한 열정은 그것이 지도자의 전유물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넓은 대중적인 기반을 지니고 있다. 또한 노동운동이 비교적 실용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던 영국에서도 노동자들의 의식이나 상징을 분석해보면 거의 종교적이라할 정도의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노동자들의 의식이 그리 혁명적이지 않았고, 그럼에도 그들은 지도자들의 혁명적인 사상을 '자기 것으로 하기(appropriation)'를 시도하였다는 점사이를 연결하는 어떤 설명틀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런 분석들은 정태적인 것이 되고 말기가 쉽다. 즉 노동자의 일상생활과 문화 그리고 의식과 가치체계를 서술할려는 시도가 이 책에서 돋보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런 문화나 의식이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였는가가 좀 더 세심하게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담론분석이나 언어적 접근을 시도하였다면, 이런 연결고리에 대한 해명은 쉽게 달성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3

프랑스, 독일 그리고 러시아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을 다룬 글들이 기존의 연구성과를 비교적 평이하게 서술하였다면, 흥미있으면서도 논란의 소지가 많은 것이 영국과 스웨덴의 경우이다. 영국의 경우에는 이미 앞에서 밝힌대로 글의 초두에서 "계급은 더 이상 중요한 개념이 아니며 계급간의 타협과 협조가 오히려 노동사의 지배적인 경향"이라는 수정론의 대두를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어준다. 뿐 만 아니라 산업혁명, 생활수준, 챠티즘, 노동귀족 등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들을 소개하는 것을 통해 영국 노동사 연구의 성과를 풍성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쟁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택하는 입장에 대한 전거제시가 군데군데에서 미흡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뿐 만 아니라 수정론적 해석에 대한 이영석교수의 입장도 모호하고, 또한 이와 관련하여 글의 초두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이 글의 말미에서는 실종되어버렸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100여 페이지의 지면에 저간의 영국노동사 연구성과를 조리있게 정리해준 좋은 글이라 생각된다.

안재홍교수의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선택'은 한국의 독자에게는 흥미를 끌 만한 글이다. 한국과 같은 규모가 작은 국가의 국민들에게는 어떻게 스웨덴과 같은 유럽의 주변부에 위치한 국가가 성공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걸으면서, 동시에 탁월한 사회복지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는 큰 관심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이 수행하였던 역할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안재홍교수의 글이 스웨덴노동계급과 노동운동의 역사를 잘 정리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 대한 우리의 (내지는 평자의) 정보부족으로 인하여 많은 의문이 남는다. 왜 스웨덴은 산업화이전에 저개발국가이기보다는 '개발의 가능성이 잠재된 국가'였는가? (364) 왜 기업복지제도가 일찍부터 정착하였고, 왜 가부장적 온정주의가 노사간의 공동체문화로 발전했는가?(370) 왜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수정주의 논쟁에 휩쓸린 여타 유럽국가와는 달리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389) 이런 많은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부분적으로 그리고 간헐적으로 글 곳곳에서 제시되지만, 평자에게는 전체적인 상이 머릿속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산업화이전의 역사적 배경이 어떠하였는지, 1870년대에 시작된 지각한 산업화는 이미 앞서간 국가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스웨덴 민족국가 형성과정은 어떠하였는자, 부르주아지의 역할은 있었는지 그리고 주변강대국들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어떻게 봉건세력과 부르주아지에 대처할 수 있었는지 등등이 해명되지 않는다면,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은 실현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한 안재홍교수의 글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담론분석을 노동운동사에 도입하는 문제이다. 이 글은 계급형성이 바로 노동운동의 향방을 결정짓는다고 보지 않는다.

"일련의 역사적 사건이 몰고오는 불확실성속에서(...) 노동운동의 지도부가 현실을 진단하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떠한 상징적 용어, 또는 노선을 선택하였는가에 따라 노동운동의 성격은 크게 달라진다. 하나의 용어가 상징하는 의미는 포괄적이다.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언술들이 이 용어를 중심으로 일관된 전체, 즉 담론을 형성하게 되며, 이에 따라서 권력의 연계가 구성된다. 물론 이러한 선택은 계급형성이라는 틀내에서 취하게 된다. 그러나 계급형성은 근본적적으로 노동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 내부의 변화라는 매개변수를 통해서 이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339면)

바로 이런 이론적 배경에서 안교수는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운동과 노동조합과의 대등한 제휴와 '발전'이라는 담론을 스웨덴 노동운동의 성격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한다. 특히 '발전'이라는 담론은 스웨덴과 같은 경제적 후진국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가 분열될 만한 소지를 제거해버렸다는 것이다. (403) 여기에서 의문이 남는 것은 과연 담론형성이 전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선택권내에 있는가이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행동공간은 이미 주어진 제 조건에 의해 애초부터 제한되었던 것은 아닌가. 물론 안교수도 계급형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객관적 조건의 규정성을 인정하는 듯 하지만, 그에게 담론은 훨씬 더 결정력있는 요소인 것 같다. 뿐 만 아니라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왜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런 담론을 구성하게 되었는가를 해명해야 하는데, 그에게서 담론구성은 당시의 복잡한 상황들이 초래한 '우연적인 整合'처럼 보인다. 담론분석을 역사연구에 도입하는 것을 배척할 필요는 없으나, 이런 접근의 설명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안병직교수의 '19세기 독일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형성'에서는 음주문화에 대한 분석은 장황한 반면, 여타 노동자문화나 여가문화에 대한 분석이 소략하다. 또한 여가문화에서 바로 파업, 노동조합운동 그리고 사회민주당과 같은 노동운동 양상의 서술에 진입하기 때문에, 이미 앞에서 언급한 노동자의 삶의 존재조건에서 집단행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 그외에도 또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은 사회보험제도가 노동자들의 사회적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프로레타리아트계급의 일원이라는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을 확대시켰다는 주장(314면)이다. 물론 독일제국은 사회보험제도에서 봉급생활자와 육체노동자를 차별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연대의식을 어느 정도 강화시켰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독일의 사회보험제도는 독일 노동운동이 혁명성을 상실하고, 체제내에 부정적으로 통합하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안교수의 주장은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

평자의 의무에 충실하려다보니 여러 세세한 논평을 곁들였지만,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은 동일한 문제의식하에서 5개국의 노동계급형성을 잘 대비시켜 분석한 좋은 책이다. 공동작업이 성공하기 어려운 풍토인 우리 학계에서 이런 시도는 여러모로 좋은 전범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여러 어려움을 노정하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을 시작으로 하여 앞으로 보다 본격적인 비교사적인 분석이 진척되기를 기대해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