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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석의 서평

『영국 노동계급형성』 번역본을 보며
    <국민일보> 2000년 1월 24일자


                                                          이영석(광주대교수, 서양사)
 

에드워드 톰슨의 명저『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2차대전 이후 영국 역사학계에서 이룩한 가장 뛰어난 역사서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동양권에서는 지금껏 완역된 적이 없다. 이 책은 그 동시대적 어법과 표현 때문에 번역의 사각지대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번에 나종일 교수와 그의 제자들이 번역본을 내놓은 것은 우리 서양사학계에서도 '기념'할 만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내 기억으로는 이들이 번역 작업에 착수한 것이 1980년대 말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자그만치 십 여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역자들의 인내와 끈기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톰슨은 단지 대학이라는 제도권 안에 머물렀던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노동자 교육운동에 헌신한 교사로서, 그리고 좌파 계열 잡지의 편집인이자 반핵운동가로서 잘 알려진 톰슨의 생애는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잠시 워리크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재직했던 일은 그의 이력에서 보면 오히려 예외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톰슨이 1960년대 이래 젊은 세대의 역사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노동계급의 형성』때문이었다. 그는 이 한 권의 책으로 현대 역사학에 '아래로부터의 역사'라고 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 책은 다음 세대의 역사가들에게 끊임 없는 영감을 불어 넣어준 지적 원천이었다.

톰슨은 우리 서양사학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유신시대 이래 서양사 연구에 뛰어든 내 나이 또래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톰슨의 지적 세례를 받으며 자신의 학문세계를 넓혔다. 우리는 톰슨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노동계급의 형성』에 나타난 톰슨의 기본 시각은 이제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그는 노동계급의 역사에서 경제적 요인을 중시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요인들의 규정을 받으면서도 스스로를 변모시켜 나아간 하층민중의 경험과 문화, 그리고 그들의 주체적인 역량과 의지를 중시하였다. 톰슨은 계급을 생산관계의 맥락에서 구조나 범주로 취급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계급은 다수의 사건들을 사람의 경험과 의식을 통해 하나로 수렴하는 현상이다. 그것은 사회학적 구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역사적 현상인 것이다. 또한 계급은 상호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해의 동질성과 다른 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인식하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계급의 형성에 결정적인 것은 '경험'이다. 그러나 그 경험은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겪는 사람들의 전통과 문화와 주체적 행동을 통해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톰슨은 이러한 시각에서 산업혁명 초기 영국 노동자들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산업화에 따른 구조적 변화 이전에 근로민중이 가졌던 여러 전통과 문화를 밝히고, 이러한 전통 아래서 그들이 어떤 착취의 경험을 축적했으며, 또 그것에 주체적으로 저항해 나갔는가를 살핀다. 그는 이러한 테마를 장대한 서사로 형상화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톰슨의 책은 많은 사람들이 노동의 전진과 역사의 진보를 굳게 믿었던 저 1960년대의 낙관적인 시대 분위기를 반영함과 동시에 그 같은 분위기를 심화시킨 촉매제였다. 한 세대가 지난 후 이제 시대의 패러다임은 바뀌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노동계급의 전진을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계급의 해체를 이야기할 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톰슨의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불가사의한 매력을 던져준다. 노동계급의 승리를 전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톰슨이 '후대인들의 멸시'에서 구하려고 한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아직도 지금보다는 나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전시대 사람들의 분노와 고뇌와 호흡을 느낄 필요가 있는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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