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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과 계급 사이

계급과 계급 사이: 『제철공장에서의 삶』에 나타난 노동과 종교와 예술
양 석 원
레베카 하딩 데이비스(Rebecca Harding Davis)의 중편소설인 『제철공장에서의 삶』(Life in the Iron-Mills)은 19세기 미국문학사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남북전쟁이 발발할 무렵인 1861년 4월에 권위 있는 『애틀랜틱 먼쓸리』(Atlantic Monthly)에 발표된 이 소설은 미국역사에서 남북전쟁이 갖는 획기적인 이정표로서의 의미를 미국문학사에서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제철공장에서의 삶』은 주로 남북전쟁 이후 1870년과 세기말 사이에 발달했던 미국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문학을 10년이나 앞당겨 보여주었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 예를 들어 콜럼비아 대학에서 출판된 『미국소설사』(The Columbia History of the American Novel)에서 로버트 슐먼(Robert Shulman)은 데이비스를 "선구적 사실주의자"로 지목하면서, 『제철공장에서의 삶』이 미국의 삶을 한 세대 앞당겨 탐구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셰런 해리스(Sharon Harris)는 이 작품을 명백히 자연주의적인 작품이라고 선언한다. (Shulman 172-73, Harris, Rebecca 28, "Rebecca" 5) 슐먼의 발언은 국역본 『미국소설사』 191쪽에서 찾을 수 있음.
이 소설의 선구성이 평자들의 관심이 될 정도로 이 작품은 시대를 앞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결코 시대를 초월한 문학은 아니다. 데이비스의 작품은 그녀가 살았던 미국사회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집요한 관심의 산물이었다. 놀랍게도 데이비스의 유년시절에 그녀의 문학적 상상력을 가장 크게 자극했던 작가는 미국 로맨스 문학의 대표자인 호손(Nathaniel Hawthorne)이었고, 월터 헤스포드(Walter Hesford)는 호손이 데이비스의 "문학적 스승"이며 데이비스는 호손의 로맨스의 문학적 성과를 공유하고 확장시켰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Hesford 76, 70). 하지만 주목할 것은 "내가 매일 같이 보았던 일상적인 사람들과 사물들도 기사나 순례자들만큼 [책의] 마법적인 세계에 속한 신비로움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데이비스가 회상하듯이 그녀가 호손에게서 받은 문학적 영감은 일상적인 사물의 매력이었다(Hesford 71, Olsen, 71). 사실과 상상의 중간지대라는 호손의 로맨스에 대한 정의를 상기한다면 호손이 데이비스에게 미쳤던 영향은 로맨스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지만, 데이비스의 회상은 그녀의 관심이 일상적인 것으로 향해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실제로 사실주의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것과 사실에 대한 관심은 시기적으로 남북전쟁 후의 산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데이비드 쉬(David Shi)가 지적하듯이, 남북전쟁 이전의 가정소설에 나타나는 일상적 삶의 경험에 대한 세부묘사나 노예설화에서 노예들이 겪었던 실제 삶에 대한 묘사와 관심이 사실주의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185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경제공황, 노예제와 영토확장에 따른 지역간의 갈등, 그리고 과학적 발전 등은 초절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세계관으로부터의 일탈을 가속화시키고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 남북전쟁이전의 사실주의의 발달에 관해서는 Shi, 3-41쪽을 참조할 것.
데이비스가 사실주의 문학을 시대를 앞당겨 실현시키고 있었지만, 그런 문학을 형성하게 했던 사회, 역사적인 조건은 이미 성숙해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데이비스 문학의 배경의 특수성은 산업자본주의의 발달이다. 특히 그녀가 살았던 버지니아주의 휠링(Wheeling)은 제철산업의 중심지로서 급속히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리고 1860년대에 미국인구의 1/8이 외국인일 정도로, 급부상하는 산업자본주의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유럽으로부터의 이민노동자가 빠른 속도로 유입되고 있었다.
) 데이비스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는 티치(Cecelia Tichi)의 글을 참조할 것.
그 결과 노동계급의 존재는 가시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대두되게 되었으며 자연히 일상적 삶의 일부가 되었다. 데이비스가 주목한 일상적 현실이란 이런 노동자의 대두로 인해 빚어진 중산층과 노동자간의 계급적 차이였다. 그리고 데이비스 문학의 성과는 이 계급적 차이를 예리한 시각으로 포착하여 재현했으며, 동시에 이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구했다는 데 있다. 본 논문은 바로 이런 데이비스의 문학적 성과가 『제철공장에서의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데 있다.
부유한 사업가의 딸로 태어나 당시에 여성에게 허용된 교육을 받았지만 여전히 중산층 가정이라는 문화적 공간적 제약에 속박되어 있었던 데이비스에게 가정 밖의 현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Olsen 83). 그러나 데이비스는 후에 회고담에서 "유랑여행"(vagabond tramps)이라고 불렀던, 휠링의 거리를 걷는 도보여행을 통해 중산층 가정 너머에 있는 이민노동자의 현실을 접할 수 있었다(Tichi 6). 이 도보여행을 통해 관찰된 이민 노동자의 모습이 데이비스의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제철공장에서의 삶』에 등장하는 휴 울프(Hugh Wolfe)의 모습으로 탈바꿈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데이비스에게 있어서 관찰된 사실의 문학적 변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과정을 무엇보다도 어렵게 한 것은 중산층과 노동계급 사이의 경제적, 문화적, 공간적 장벽이었다. 미국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문학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게 될 노동계급의 문학적 재현의 문제는 재현의 주체인 중산층과 재현의 대상인 노동계급 사이의 불가피한 거리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윌리엄 딘 하우엘즈(William Dean Howells)의 『새로운 재산의 모험』(A Hazard of New Forutnes)이나, 제이콥 리스(Jacob Riis)의 『다른 반쪽은 어떻게 사는가』(How the Other Half Lives) 그리고 많은 자연주의 소설들은 계급적 타자의 재현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거리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 자연주의 소설에서의 이런 인식론의 문제에 대한 뛰어난 연구는 하워드(June Howard)의 책, 특히 4장 "Slumming in Determinism: Naturalism and the Spectator"를 참고할 것.
데이비스가 이 재현의 문제에 천착했다는 점은 작품 초반 화자의 진술에서 드러난다. 노동계급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는 문제는 결국 계급과 계급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데이비스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작품 초반부터 역설한다. 이 작품의 시작은 계급과 계급 사이의 공간적 거리가 와해될 만큼 중산층의 삶 역시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철공장에서의 삶』은 화자가 창문을 열어 제철공장 노동자의 끈끈한 숨결과 그들이 뿜어대는 담배연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장의 굴뚝에서 방출되는 연기로 인해 불투명하리만치 자욱한 공기를 느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탁한 공기와 연무는 창밖의 세계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화자가 살고 있는 중산층 가정 안의 깨진 천사상의 날개도 검은 연무로 뒤덮여 있다. 필립 하퍼(Philip Harper)가 지적하듯이, 공장의 숨막히는 공기가 중산층 화자에게 가하는 이런 압박은 산업자본주의의 기계문명이 중산층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을 침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Harper 223).
) 국역본은 『미국소설사』 243쪽.
감상주의 가정소설의 무대였던 중산층 가정은 더 이상 산업자본주의의 노동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화자가 느끼는 현실의 중압감은 중산층 가정 밖의 영역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중산층 가정의 밖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요소를 지닌다. 데이비스가 호손에게서 일상적인 것의 신비로움을 느낀 것처럼 화자의 창문 밖의 세계는 알 수 없고 파악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을 담고 있다. 화자는 비 사이로 창밖을 내다보면서 술 취한 아일랜드 이민 노동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건너편 상점의 모습을 "거의 보기 어렵다"고 진술한다(39). 이런 시각적 장애에 대한 화자의 토로는 창문의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산층 화자와 이민 노동자들 사이에 남아 있는 거리를 나타낸다. 화자는 방 뒤편의 창밖으로 강물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 "노예같이 매일 짐을 나르는 검둥이 같은 강물 표면위의 지치고 무감각한 표정"을 상상했었음을 술회하고, 다시 거리쪽의 창밖을 내다보며 제철공장으로 몰려가는 이민 노동자들의 "느린 흐름"을 목격한다(40). 흑인 노예 같은 강물과 이민 노동자들의 물결 사이의 비유는 남부의 노예제와 북부의 공장 노동제 사이의 비유이지만, 놀랍게도 이 비유는 노예제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산업노동에 대한 비관적 전망으로 귀결된다. 강물은 "저 너머에 향기로운 햇볕과, 부드럽고 푸른 사과나무 잎새로 우거진 그리고 장미의 붉은 빛으로 빛나는 오래된 정원, 공기, 들판, 산이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거리를 지나가는 웨일즈계 이민 노동자의 미래에는 "공기도, 푸른 들판도, 진기한 장미도 없다"(40). 노예제의 미래가 푸른 들판에 도달할 것을 기다리는 강물처럼 낙관적인 반면, 이민 노동자의 미래에는 전원적인 자연에 대한 전망이 부재하다는 점은 북부의 공장 노동제가 남부의 노예제보다 더욱 가혹하다는 비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실제로 남부 노예제와 북부 자유주의 경계지역에 살았던 데이비스는 북부의 산업노예제를 비판했던 남부의 노예제 옹호가들의 수사학에 많이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데이비스를 노예제 옹호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그녀는 북부의 임금노동자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남부의 노예문제만을 공격한 과격한 노예제 폐지론자들을 비판한 것으로 알려진다. 친노예제적 수사학과 데이비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헨우드(Henwood)의 글을 참고할 것. 노예같은 강물과 노동자의 물결의 비유가 친노예적 수사학과 갖는 유사성에 대해서는 Schoket 50, Pfaelzer Parlor 50쪽도 참고할 것, 이와는 달리 애이미 랭(Amy Lang)은 흑인 같은 강물이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주는 것은 흑인노예들이 궁극적으로 해방될 것이라는 북부 백인들의 전망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134).
흑인노예보다도 못한 이민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화자의 이야기가 사실적이 되려면 매우 큰 인식론적 장벽의 극복이 필요하다. 따라서 안개 낀 날 "한가로이 창틀을 두드리며 비속으로 밖을 내다보는" 중산층 화자가 과연 어떻게 이민 노동자의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당연히 제기된다(40). 화자는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을 과연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어떤 근거로 독자를 "나태하고 딜레탕트적인 방식으로 심리학을 연구하는" 자로, 혹은 "이기주의자 혹은 범신론자, 혹은 아르미니우스파교도"로 칭하며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뚜렷이 보지 못한다"고 질타하는 것일까?
) 화자의 성별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많은 비평가들의 논평이 있어왔다. 데이비스가 여성임을 감안해서 인지 다수의 평자들이 화자를 여성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팰져(Pfaelzer)는 화자가 가정에 구속된 중산층 여성으로서 자신이 이야기하는 노동자들의 삶에 공감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이 질타하는 독자와 같이 그들의 삶을 올바르게 해석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Parlor 26). 반면에 샤이버(Scheiber)는 화자를 여성으로 여기면서 화자의 여성적 입장이 그녀가 비판하는 중산층 남성독자와 달리 억압당한 여성을 포함한 사회의 주변화된 영역에 대한 지식을 갖고 공감하고 있음을 지적한다(116). 샤이버에 의하면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의 비밀에 대해 권위 있게 말하는 것도 이런 지식에 기초한다. 이와 달리 제인 로즈(Jane Rose)는 작품 속에 화자의 성별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노동계층의 주거지에 우연히 발을 들여 놓은 것으로 묘사되고 작품의 마지막에서 알 수 있듯이 밤에 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이런 행위들을 부가적인 설명 없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화자는 남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91). 윌리엄 셔(William Shurr)는 화자의 예술가적 특성과 그가 휴가 살던 집에 거주하며 휴의 조각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 성경인용의 공통성 등을 토대로 화자가 등장 인물 중 한 사람인 미첼(Mitchell)이라고 주장한다. 미첼이 이민 노동자의 삶에 공감하여 기독교 유토피아주의로 개종하고 휴가 살았던 집으로 이주한 화자라는 셔의 주장은 화자가 어렸을 때의 삶을 회상한다는 점을 간과한 오류임을 지적하며, 리처드 후드(Richard Hood)는 유년시절부터 노동자의 삶을 경험하고 이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화자는 데보라(Deborah)라고 주장한다(78-80). 필자는 화자를 작중 인물로 보기는 어려우며, 성별이 명시되지 않은 중산층 예술가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화자가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어왔지만, 중요한 것은 화자가 자신이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의 진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이 진실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화자는 독자에게 "당신의 역겨움을 감추고" 자신과 함께 내려와 연무가 가득한 노동현실을 직접 경험하라고 촉구한다. 이런 공간적 이동을 통해 화자는 자신이 들려줄 노동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갖는 "비밀"을 독자에게 "사실적인 것"으로 제시할 것을 약속한다(41). 그러나 화자가 알고 있는 비밀은 "말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화자는 그 "비밀을 감히 말로 옮기지 못한다"(41). 화자는 그 비밀을 노동자들이 대답하려 애쓰다 죽어간 "끔찍한 질문"이라고도 하며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이 이 질문을 던지지만 이 "끔찍하고 말 못하는 질문은 스스로의 답변"일 뿐 화자는 그 질문의 내용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다. 화자가 겪는 이런 표현의 어려움은 "나는 감히 내 의미를 더 이상 명확히 하지 못하며 단지 내 이야기를 말할뿐"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41). 그리고 화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연무처럼 검고 불투명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독자의 눈이 화자의 눈과 같이 "깊게 볼 수 있을 만큼 자유롭다"면 독자에게 그 이야기는 "반드시 도래할 낮의 약속"을 지닌 새벽과 같이 밝은 것이라고 말한다(41).
II
주인공 휴 울프(Hugh Wolfe)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화자가 전개하는 이런 복잡한 진술은 중산층 화자가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해야할 필요성과 그에 수반되는 재현의 어려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앞서 지적했던, 창밖의 노동자들의 모습을 명확히 바라보지 못하는 화자의 시각적 장애에 대한 언급은 궁극적으로 화자가 들려주고자 하는 휴의 삶의 재현이 쉽지 않다는 점을 나타낸다.
) 스토우 부인(Harriet Beecher Stowe)이 『탐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탐을 투명하고 쉽게 묘사하는 것과 데이비스가 『제철공장에서의 삶』에서 휴를 재현하는 데에서 겪는 어려움에 관한 비교에 대해서는 Lang 131-32쪽을 참조할 것.
말로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비밀과 질문은 화자가 들려주는 휴의 이야기로 대치된다. 즉 논리적 설명이 아닌 문학적 재현이 화자가 비밀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수단이다. 그리고 화자가 중산층 가정에서 독자와 함께 내려와 노동자의 삶을 보여주려는 이 이야기는 곧 계급과 계급 사이의 인식론적 거리를 메우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화자가 들려주는 휴와 데보라에 관한 이야기는 우선 계급간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주디스 페털리(Judith Fetterley)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작품이 던지는 일차적 질문은 계급적 차이의 문제이며, 화자는 이 차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제시한다(Fetterley 311).
우선 이 계급적 차이는 노동자를 동물에 비유하는 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휴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노동에 지치고 술에 취한 웨일즈 이민 노동자들은 "매맞은 사냥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휴의 저녁도시락을 갖고 제철공장에 찾아간 데보라의 모습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보이며, 공장을 방문한 공장소유주 일행의 대화를 경청하는 휴는 "말 못하고 가망 없는 동물"에 비유된다(42, 46, 52). 후에 자연주의 문학에서 절정에 달할 인간의 동물적 모습에 대한 인유는 궁극적으로 중산층의 시야에 나타난 산업노동자의 모습이다.
) 이 점에 관해서는 Howard의 책 특히 3장 "Casting Out the Outcast: Naturalism and the Brute"을 참고할 것.
주인공 휴 울프의 이름 자체도 동물적 상태로 전락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민 노동자들의 삶에는 중산층에게 허락된 가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요 등장인물인 휴 울프와 그의 아버지, 휴의 사촌인 데보라, 그리고 휴가 사랑하는 젊은 소녀 제이니(Janey)는 무려 6가구가 세들어 사는 두 칸짜리 방에 기거하며, 그나마 이 방들은 노동에 지친 이민 노동자가 노동력을 회복하기 위해 잠을 취하는 공간에 불과하다. 이민 노동자들의 삶은 19세기 중반에 감상주의 문화에 의해 사랑과 안식의 사적인 공간으로 예찬되었던 중산층 가정을 철저히 탈신비화한다. 휴와 그의 가족의 삶을 소개하면서 화자는 "그들의 삶은 그들 계급의 삶과 같이 개집같은 방에서 잠자고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리는 삶이라고 묘사한다(42).
노동자에게 가정생활이 허락되지 않고 주거공간이 개집의 역할에 불과한 이유는 끊임없는 노동 때문이다. 화자는 "공업도시의 거주자들조차도 노동자의 신체를 지배하고 매년 끊임없이 진행되는 체제의 거대한 기구"를 알지 못하며 "각 공장의 일꾼들은 군대의 보초처럼 규칙적으로 서로 교대하는 교대근무로 나누어져있다"고 말한다(45). 끊임없이 가동되는 공장의 톱니바퀴같이 거대한 산업자본주의의 도구로 전락한 노동자의 삶에 가정생활은 존재할 수 없다. 데보라가 노동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휴에게 음식을 전달하기 위해 제철공장으로 가는 모습은 중산층 가정뿐 아니라 여성을 가정의 천사로 찬양하던 "참된 여성의 숭배"에 대한 탈신비화요 비판이기도 하다(Pfaelzer, "Rebecca" 235).
) 가정성, 경건함, 순결, 순종성 등으로 정의된 참된 여성의 숭배에 대한 논의는 Welter의 글을 참조할 것.
노동자에게 가정은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처가 아니라 노동력의 재생을 위한 공간으로서 공장과 같이 산업자본주의의 한 부분일 뿐이다. 또한 데보라 역시 직물공장의 노동자라는 점은 노동계급에게 남성/노동 여성/가정이라는 역할 구분도 적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중산층과 달리 노동자의 삶의 무대는 가정이 아니라 공장이다. 천사와 같은 여성의 공간으로서의 중산층 가정이 천국에 비유될 수 있다면, 노동력 착취의 현장인 공장은 지옥과 같다. 데보라가 휴에게 저녁식사를 전달하기 위해 방문하는 제철공장의 모습은 불타오르는 지옥으로 묘사된다.
무시무시한 여러 형태의 불과 바람에 날리는 불길의 구덩이가 있었고, 모래사이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액체상태의 금속의 불길이 몸부림쳤으며 끓어오르는 불로 가득 찬 넓은 용광로 위로 유령 같은 사람들이 몸을 굽혀 이상하게 끓는 물체를 휘젓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로 붉은 빛 속에서 복수심에 찬 유령같이 보이는, 옷을 반쯤만 걸친 무리들이 번쩍이는 불덩이를 던지며 서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지옥의 거리 같았다. (45)
지옥의 유령으로 나타나는 노동자의 모습은 동물에 대한 비유만큼이나 계급간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가정과 공장이라는 공간적 거리만큼, 노동자의 외모는 중산층의 시각에서 낯선 타자로 보일 뿐이다.
공간과 외모의 차이뿐 아니라 언어의 사용도 계급간의 차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데보라와 동료 여성 노동자, 제이니, 그리고 휴 및 다른 남성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사투리는 화자나 공장방문객들이 사용하는 표준영어와 확연히 구분되며 이는 계급간의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나타낸다.
) 계급간의 언어적 차이에 대해서는 Doriani 197-98, Harris Rebecca 44쪽을 참조할 것.
계급간의 언어적 차이는 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공장 방문객의 등장에서 더욱 부각된다. 데보라가 제철공장으로 휴를 찾아간 토요일 밤 공장소유주인 커비(Kirby)와 그 동료들이 공장을 방문하고 이들이 공장을 떠나기까지 이들의 대화가 작품을 지배한다. 화자는 이에 앞서 어떻게 공장의 기계가 일요일 하루동안 잠시 베일로 가려졌다가 일요일 자정이 되자마자 "'고통 중에 있는 신'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어대는가"를 묘사하며 노동자의 절규가 기계의 소음에 의해서 은폐되고 동시에 표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45). 기계의 일부가 되어버린 노동자는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상실하고 이들의 고통은 기계의 소음으로 전치되어 나타난다.
) 후에 커비는 자신의 노동자들을 기계로 만들어야한다고 말하는데 (54), 이는 자본가에게 있어서 노동자가 기계의 일부로 인식됨을 보여준다. 신체의 기계로의 환원에 대해서는 Seltzer 132쪽을 참조할 것.
공장방문객들이 도착하자마자 기계의 소음사이로 목소리를 높여 고함치던 노동자들 사이에 갑작스런 침묵이 흐른다. 토요일 밤 노동자들이 기계가동을 멈추고 기계를 베일로 가리듯이 방문객들의 존재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베일로 덮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Harris, Rebecca 41).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자본가에 의해 억압되는 현실은 커비의 아버지가 과거에 유권자인 자신의 노동자 700명을 몇 마디 말로 설득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게 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언어에 있어서의 계급적 차이는 이들간의 의사소통의 단절로 나타난다. 공장노동자들은 방문객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며 이는 방문객들이 간혹 불어나 라틴어를 사용하는 등의 언어적 용례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자와 중산층 방문객들 사이에는 언어적 용례를 떠난 의사소통의 단절이 존재한다. "용광로 일꾼들에게 그리스어도 [방문객들의 대화만큼]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 만큼 이들 사이에는 언어적 문화적 장벽이 놓여있는 것이다(52).
커비 일행의 공장 방문은 두 계급 사이의 만남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들의 방문은 따라서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계급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들의 방문의 결과는 두 계급 사이의 단절을 확인시킬 뿐이다. 방문객들은 자신들이 목격하는 노동현실의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며 따라서 노동자들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이들 중 신문기자는 노동자들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감독관인 클락(Clarke)이 들려주는 공장의 사업계획에 대한 일정을 받아적기에 바쁘고, 나머지는 "단지 재미로" 공장을 견학한다(50). 그중 커비는 자신이 토요일에 임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노동자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하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낼 수 있다"고 말하며, 미국사회는 사다리와 같은 계층적 구조로서 누구든 이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다고 믿고 이 계층적 구조를 모든 사람이 동등한 평면적 구조보다 선호한다(56). 메이 박사(Dr. May)는 휴에게서 조각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 재능을 살리라고 권고하지만, 휴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자신은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노동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닿기를 기도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믿고 이런 스스로의 모습에 자족하는 메이 박사의 종교적 허위는 휴가 미첼의 지갑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19년 징역형이라는 과도한 처벌을 받게 된 것을 알았을 때 휴를 배은망덕한 치한으로 비난하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방문객들 가운데 노동자에게 가장 공감할 능력이 있는 인물은 커비의 인척인 미첼이다. 실제로 미첼과 휴 사이에는 일종의 본능적인 공감이 오간다. 그는 공장에서 발견한 여성 조각상의 작가가 휴인 것을 알아차리며, 휴 역시 미첼을 바라보며 그의 세련됨을 흠모한다. 그러나 미첼은 노동자의 현실을 인식하지만 노동자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즐기는 냉소주의자이다. 예컨대 그는 작업하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불빛이 밝을 때보다 희미한 불빛에 비친 노동자들의 모습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노동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그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런 미첼에게 휴가 제련과정에서 나온 쇠찌꺼기로 조각한 여성 조각상은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얗고 거대한 규모의, 어떤 과격한 경고의 손짓으로 팔을 내뻗고 땅에 웅크리고 있는" 이 조각상은 미첼을 깜짝 놀라게 하며, "굶주린 늑대의 얼굴과 같은" 표정을 지닌 근육질의 벌거벗은 이 조각상을 보며 미첼은 멀리 떨어져 침묵한다. "그 형상은 그를 이상하게도 감동시켰다"는 화자의 진술이 암시하듯이, 미첼은 이 조각상이 담고 있는 노동자의 고통과 절규를 인식하는 듯이 보인다(52-53). 메이 박사는 이 조각상이 여성노동자이며 노동계급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말하고 휴에게 이 조각상으로 무엇을 의미했는가라고 묻자 휴는 그 조각상이 배고프다고 말한다. 메이 박사가 그 조각상이 배고프다고 보이기에는 너무 강하다고 말하자 휴는 조각상의 배고픔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당신과 같이 살수 있게 만드는 무엇"인가에 대한 배고픔이라고 대답한다(54). 당신과 같은 삶에 대한 욕망이라는 휴의 발언은 분명 계급의 차이를 극복하고 노동자의 삶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 대화에서 미첼은 "역겨움의 표정"을 하며 메이 박사에게 못참겠다는 듯이 "당신은 눈이 멀었소? 저 여자의 얼굴을 보시오! 저 얼굴은 신에게 질문하며 '나도 알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소. 저런! 얼마나 배고픈 표정이오!"라고 외친다(54). 이런 발언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미첼은 조각상이 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순간적 인식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후의 미첼의 행동은 여전히 그가 노동자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연극을 구경하는 흥이난 관객의 태도"를 지니고 말하고, "아침에 보기 드문 모자이크 그림을 바라보듯" 휴를 바라보는데, 이는 그에게 휴가 단지 미적 대상에 불과함을 의미한다(55). 실제로 미첼의 성격은 "북극 공기만큼 차다"고 묘사되고 그의 자아는 "얼음"에 비유될 만큼 그는 따뜻한 동정심을 결여한 인물이다(55, 51).
) 이 얼음과 차가움에 대한 은유가 데이비스의 후기 작품에서 산업사회에서의 인간관계를 나타낸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Harris, Rebecca 46쪽을 참고할 것.
휴가 후에 도둑질의 죄목으로 재판받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휴를 법정에 서게 했을 만큼 휴에 대한 개인적인 연민보다는 자신의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에 더 집착하는 인물이다. "언젠가 그들의 쓰라린 필요로부터 그들 자신의 빛을 가져오는 자가 생겨날 것"이라는 그의 전망에서 알 수 있듯이, 미첼은 노동자의 문제를 계급적 차이를 만들어낸 사회전체의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계급 사회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인물인 것이다.
III
커비와 그 동료들의 공장방문은 자본과 노동, 중산층과 노동계급 간의 단절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 작품의 중요성은 계급분열의 현실을 그려내었다는 점뿐 아니라 이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탐구했다는 데에 있다. 이런 탐구는 우선 휴의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휴가 계급분열의 극복을 시도할 주인공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은 그가 공장 노동자의 신체적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암시된다. 그는 폐병을 앓아 나약해져서 남성의 원기를 상실하고 여성화된 인물이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동료 노동자들이 "몰리 울프"라고 부를 만큼 여성적인 그의 모습은 작가 데이비스의 투영된 모습일지도 모른다(Rose 195-96, Pfaelzer Parlor 36, "Rebecca" 237, Fetterley 313).
) 이와 반대로 휴가 좌절된 예술가로서의 작가의 모습의 투영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Harris, Rebecca 36쪽을 참고할 것.
여성적이고 나약하다는 점 이외에도 휴는 잠시나마 학교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다른 남성 노동자와 구별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쇠찌꺼기를 재료로 조각상을 만드는 예술가라는 점은 그가 노동을 넘어선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명료히 보여준다. 화자는 휴를 소개하면서 휴의 영혼 속에 "미에 대한 강렬한 갈증"이 있으며 "현재의 자신과 다른 . . . 무엇인가가 되고자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48). 배고픔을 표현하는 휴의 조각상은 따라서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휴의 욕망이 예술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냉소주의자인 미첼마저도 감동시켰던 휴의 조각상은 분명 노동자의 현실과 욕망을 전달할 수 있는 예술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 필자와는 달리 로즈(Rose)는 방문객들이 조각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조각상을 의사소통의 실패로 보고 있다(196).
그러나 계급분열의 극복에 대한 휴의 욕망은 방문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크게 바뀌게 된다. 우선 휴는 미첼에게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미와 진실에 정통한 이상적인 인간형을 발견한다(59).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미첼의 실제 모습이 얼음과 같이 차가운 냉소주의자라는 점에서 휴는 미첼에게 환상을 갖는 과오를 범한다. 더구나 해리스가 지적하듯이 휴의 비극은 미첼의 이기주의적인 미학적 가치관을 받아들인다는 데에 있다(46). 휴는 미첼의 이상화된 모습을 동경하게 되면서 "자신을 갑작스런 혐오감으로 바라보게" 되며 자신의 혐오스러움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자신이 입고 있던 검댕이 묻은 붉은 셔츠를 찢어버린다(59). 이는 곧 미첼이 휴를 대상화했듯이 휴 스스로도 자신을 혐오스런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조각상을 통해 노동자의 현실을 표현할 수 있었던 휴는 더 이상 노동 계급의 대변자가 되지 못한다. 그는 미첼과의 만남 이후 자신의 신분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광적인 고뇌 속에서" 자신의 동료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고자하는" 희망을 망각하게 된다(59).
미첼은 휴가 방문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계급분열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 돈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휴가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메이 박사가 자신은 돈이 없다고 대답하자 휴는 "수수께끼에 대한 추측된 대답을 반복하듯이" "돈인가요? 바로 그거죠, 돈인거죠?"라고 묻고, 미첼은 "그래 바로 돈일세. 자네는 세상의 모든 질병에 대한 치유책을 찾은 거야"라고 말한다(56-57). 물론 이 대화에서 돈의 중요성을 깨닫고 미첼의 지갑을 훔쳐 휴에게 건네는 것은 데보라이며, 휴는 처음에 훔친 돈을 돌려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데보라가 그것이 휴의 권리라고 권유하자 휴는 메이 박사가 권리라는 말을 사용했음을 상기하고 결국 그 돈을 자신의 권리로 받아들인다. 그는 "신은 . . .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 이 돈을 만들었어. 신은 가난한 자와 부자의 차이를 만들지 않았어"라고 말하며 훔친 돈을 자신의 것이라고 합리화한다(63). 휴의 발언에서도 나타나듯이 휴에게 돈은 부자와 가난한자의 차이 즉 계급분열을 없애는 수단의 의미를 지닌다. 그 돈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휴의 의식에 "이 세계와 다른 또 다른 세계"의 비젼이 떠오른다(63). 이 때 휴는 "이 미와 만족과 권리의 세계에서 사소한 법률, 공장주인과 공장일꾼의 내 것과 당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63). 돈을 손에 쥐는 순간 휴의 "내면에서는 권력에 대한 의식이 꿈틀거렸다"고 묘사되듯이 휴의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은 애초에 노동계급을 만들어 내었던 금권, 즉 자본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집착에 의해 유발된 것이다(63).
이 "소유에 대한 의식"은 휴가 자본가적 가치관에 물들게 된 것을 의미한다(63). 이제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믿는 휴는 거리를 헤매다 자신이 살던 지역에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방문하고, 빈민촌의 열악한 환경을 "새로운 혐오감"과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새롭고 막연한 두려움"으로 바라본다(64). 이 새로운 혐오와 두려움은 휴가 공장 방문객이 자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에 대해 느꼈을 것과 같은 차이와 거리를 자신의 동료 노동자들에게 느낄 만큼 이제 자신의 계급에서 멀어졌음을 말해준다. 휴가 도둑질의 죄명으로 19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유배된 생활을 하다가 자살하기까지도 자신의 환상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 해리스는 휴가 죽기까지 자본가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Rebecca 47, "Rebecca" 15.
휴가 죽기 전 감옥의 창살 밖으로 지나가는 흑인 혼혈여성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녀를 조각의 소재로 삼을 것을 상상하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노예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라는 점에서, 쇠찌꺼기로 만든 여성조각상을 만들었을 때와 같은 순수한 예술적 동기를 회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가 가로등을 점등하는 조 힐(Joe Hill)과 마지막 말을 나누기 위해 목청껏 그를 부르는 행위도 역시 자신의 계급의 일원과 최후의 공감을 나누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이점에 대한 간단한 논평으로는 Curnutt 156쪽을 참고할 것. 휴즈(Sheila Hughes)는 이 대목에서 휴가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다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130.
그러나 휴의 이런 시도는 그가 상실했던 노동계급과의 유대감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하며, 휴가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자신의 동료들과의 유대를 추구했다하더라도 이는 적극적 실천이라 보기 어렵다. 더구나 그의 자살은 노동계급의 연대감에 대한 궁극적인 회의와 신분상승에 대한 절망을 입증한다. 또한 그의 죽음에서 어떤 구원의 표시도 발견하기 어렵다.
) 휴의 죽음을 일종의 "자기선언"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후드(Hood)의 견해는 크게 설득력이 없다(82). 반대로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휴의 죽음에는 구원의 자취를 찾기 어렵다. 예를 들어 Pfaelzer Parlor 50, Doriani 207쪽을 참고할 것.
그리스도와 같이 양팔을 뻗은 휴의 시신에 빛이 비칠 때 이 빛이 "안식과 평화를 함께 가져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화자는 자문한다(71). 죽음의 순간 휴의 뇌리에는 동료 노동자, 제이니, 데보라 등의 모습이 스쳐가지만, 그는 이들과의 일말의 접촉도 없이 최후에 철저한 적요와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
IV
공장 방문객들이 보여준 노동계급에 대한 무책임과 무관심 그리고 휴의 절망과 자살은 계급분열의 문제에 대한 작가의 회의를 입증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결론은 "이것이 끝이란 말인가? 아 인생은 연약하고 헛되도다! 어떤 대답이나 보상의 희망이 있단 말인가?"라고 작품의 첫머리에 화자가 인용한 테니슨(Tennyson)의 시의 절망감을 완성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은 휴의 죽음 뒤에 데보라가 3년형을 마친 뒤 퀘이커교도로 개종해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뿐 아니라 열악하고 절망적인 노동현실에 대한 묘사로 점철된 작품의 곳곳에 역설적이게도 희망에 대한 암시가 깔려 있다. 예컨대 화자는 작품 초반에 독자에게 노동계급의 현실이 지니는 "비밀"과 "끔찍한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독자가 자신과 같이 깊은 안목을 지닌다면 자신이 들려줄 이야기에서 "확실히 도래할 날의 약속"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작품의 결말에서도 휴의 조각상이 "신이 새벽의 약속을 심어놓은" 동쪽을 가리키는 희망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41,74). 암울한 노동현실을 사실적이고 생경하게 묘사한 작품이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결론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모순적인 것으로 비판받기도 했고, 이를 유의미하게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 이 작품의 종교적 결말과 낭만주의적 경향에 대한 기존비판의 예는 Harris Rebecca 27-28쪽에 잘 요약되어 있다. 해리스는 퀘이커교도에 의한 데보라의 구원은 데이비스가 비판한 낭만적인 결론이며, 데이비스는 이런 낭만적 결론을 아이러니컬하게 제시하여 독자가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를 기대했다고 주장한다(Rebecca 29, "Rebecca" 19).
그러나 이 작품에 드러나는 희망적인 요소는 작품의 통일성을 훼손하는 것도, 아이러니컬하게 제시된 것도 아니다. 윌리엄 셔는 앞서 언급한 "확실히 도래할 날의 약속"에 대한 구절을 분석하면서 작품 초반에 화자가 언급한 "비밀"이 사실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밝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는 명백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Shurr 247).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낙관적 미래에 대한 약속의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만약 밝은 미래에 대한 약속의 근거가 작품 속에 주어져 있지 않다면 이런 약속은 추상적인 논리의 비약일 것이며 일부 평자들의 지적대로 작품의 결함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데이비스가 미래에 대한 확신의 근거를 논리적인 진술로서가 아니라 노동과 종교와 예술의 세 가지 차원에서 상상적 언어로 구체화시킨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노동의 차원을 살펴보자. 이 작품에서 노동은 산업자본주의가 노동계급에게 강요한 것으로서 노동자의 신체와 영혼을 착취하고 고갈시키며 궁극적으로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뿐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부터도 소외시키는 소외된 노동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휴와 데보라가 겪는 노동은 그들에게 인간적인 삶의 향유를 불가능하게 만들며, 그들을 산업자본주의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휴가 일하는 제철공장이 "지난 겨울 남부 버지니아 철도회사"를 위해 큰 주문을 맡았다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휴와 동료 노동자의 노동은 바로 이런 거대한 산업자본주의의 경제논리에 종속된 것이며 자본가의 부를 축적시켜주는 데 공헌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41). 실제로 데이비스가 그리는 노동현실은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한 실례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낮과 밤의 교대근무는 자본주의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이며, 자본주의 생산제에서는 노동자가 노동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한다는 마르크스의 지적은 데이비스가 그리는 제철공장 노동자의 삶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나 다름없다.
) 마르크스의 지적에 대해서는 Tucker 372-73, 409쪽을 참고할 것.
그러나 노동은 동시에 노동자의 결속을 가져온다. 자본주의적 공장제 생산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공간적으로 집약되게 되고, 서로 단결하여 노동조합을 만들며 이는 곧 자본가들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익히 알려진 주장은 노동현장이 곧 노동자들의 소외뿐 아니라 그들의 결속을 가져오는 변증법적 계기를 제공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 Tucker 481-82쪽을 참고할 것.
데이비스는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화된 노동운동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철공장에서의 삶』은 적어도 노동자 사이의 감정적 유대 혹은 공동체 의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데보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녀와 함께 공장일을 끝낸 여성 노동자들의 대화에서 우리는 그들이 작업속도가 늦은 동료의 일을 도와주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또한 비에 젖은 채 휴의 도시락을 갖고 제철공장을 찾아간 데보라의 모습을 보고 노동자 중 한 명이 가까이 와서 불을 쬐라고 권유한다. 이런 말과 행위는 노동자들 사이의 유대감의 표시로서 공장 방문객들이 보여주는 개인주의적 행동 양식과 다르다.
이런 노동계급의 감정적 유대를 가장 잘 구현하는 인물은 데보라이다. 해리스는 데보라가 독자를 휴와 같은 노동계급의 세계로 인도하는 중개자적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Rebecca" 8, Rebecca 32-33). 그러나 휴즈가 지적하듯이 데보라는 중간적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휴보다 더 노동계급을 잘 대변한다(Hughes 124-27).
) 휴즈는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데보라의 불구의 신체를 억압받은 자의 고통을 나타내는 따라서 신성을 드러내는 표식으로 읽고 있다.
데보라가 휴와 다른 점은 휴의 내면을 치밀하게 이해할 만큼 그와 감정적으로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휴가 데보라에게 보여주는 친절함은 "지하실에 가득찬 쥐들"에게나 보여줄 만한 것으로서 이는 데보라가 휴에게 비천한 동물적 대상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46). 반대로 데보라는 휴의 내면세계를 이해할 뿐 아니라 그를 위해서 희생적으로 행동한다. 그녀는 공장 일을 끝내고 집에 오자마자 휴에게 저녁식사를 주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제철공장에 가며, 공장 방문객들의 대화를 듣고 돈이 휴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미첼에게서 지갑을 훔쳐 휴에게 건넨다. 데보라는 휴에게 돈을 건네며 자신을 제이니와 함께 데려가 준다면 제이니와 휴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겠다고 말한다. 데보라가 미첼의 지갑을 훔치는 행위가 이 소설에서 "가장 저항적인 행위"라는 팰쳐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지만, 이런 행위는, 휴가 환상의 세계를 꿈꾸며 자신의 동료들을 혐오와 두려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동료 노동자에 대한 애정에 기인한 것임은 분명하다(Pfaelzer "Rebecca" 238). 데보라는 휴가 자살을 결심하는 순간에도 그의 내면을 읽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외치며, 휴가 죽은 후에도 퀘어커 교도에게 휴의 시신을 신선한 공기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데보라의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휴의 개인적 야망 혹은 환상과 대조를 이루고, 그녀가 동료 노동자와 감정적 유대를 이루며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휴가 개인적 야망에 눈멀어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결국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면 데보라는 동료 노동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계급적 정체성과 공동체적 연대감을 깨닫고 실천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명목상의 주인공은 휴이지만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중심은 데보라이다.
) 이 점에 대해서는 Curnutt 157, Pfaelzer Parlor 51쪽을 참고할 것.
데보라가 보여주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 의식은 퀘이커교도의 등장으로 인해 노동계급의 영역을 넘어선다. 퀘이커교도의 등장은 노동뿐 아니라 종교도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소설에서 기독교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작품 시작부터 화자의 방에 놓인, 날개가 연기로 뒤덮인 깨진 천사상의 모습은 산업자본주의의 병폐에 찌든 기독교의 무력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동시에 기독교는 노동계급과 거리가 먼 중산층의 이데올로기로 나타나며 따라서 노동계급의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고 암시된다. 작품 초반에 노동으로 탈진한 이민 노동자의 처참한 삶을 묘사하면서 화자는 "이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인가?"라고 물으며 많은 개혁가들이 "그리스도의 자비가 깃든 마음"을 지니고 노동자들에게 갔다가 "분노하고 마음이 굳어져 돌아왔다"고 말한다(42). 토요일 자정이 되어 일요일을 알리는 종소리가 제철공장에 울려 퍼질 때 이 종소리에 담긴 "숨겨진 메시지"는 노동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그들을 지나치며, "부활한 구세주를 알리는 엄숙한 음악"에 담긴 "잘못된 세상의 검은 비밀을 해결할 바탕음"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52).
중산층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기독교의 모습은 또한 공장 방문객들이 사용하는 많은 기독교적 언어와 인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공장소유주인 커비는 주님을 들먹거리며 주님이 노동자의 문제를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고 말한다. 미첼도 커비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다고 말할 때 이런 행위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아무런 죄가 없소"라고 말하는 빌라도의 무책임한 행동에 비유하는데, 미첼의 이런 성경인용도 냉소적인 발언으로서 진지성을 결여하고 있다(55). 메이 박사 역시 휴에게 신이 예술적 재능을 주었다고 말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는 노동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에 자족하는 자기기만에 빠져있다. 기독교의 이런 허위성은 휴가 데보라에게서 건네 받은 돈을 갖고 고민하다가 어느 교회에 들어가서 설교를 듣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교회 앞에서 서성거리는 휴는 "신과 천국에 대해서 들은 바가 너무 없어서" 마치 어린 아이가 "요정의 나라"에 대해 느끼는 것 같이 기독교의 세계를 낯선 것으로 느낀다(62). 그리고 기독교로부터의 소외감은 휴가 교회 안에서 설교를 들을 때 현실로 나타난다. "울프와 아주 다른 계급의 요구와 연민의 정에 부응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 건물 속에서 휴는 알지 못할 감동에 젖지만, "생명과 사랑과 보편적 인간"에 대한 기독교 개혁가의 설교는 "다른 문화의 계급에 맞춰져 있어 용광로 일꾼의 이해를 넘어서 지나치고, 그의 귀에 알지 못하는 언어로 된 즐거운 노래처럼" 들린다(64). 이는 공장 방문객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개혁가의 언어도 노동계급의 이해를 넘어선 타자의 언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예들은 기독교가 계급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적 행동을 결여한 중산층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퀘이커교도의 등장은 이런 기독교에 대한 정형을 역전시킨다. 휴의 시신을 보러온 커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가지만" 이들과 달리 한 퀘이커 여성은 끝까지 남아 시신을 지킨다(72). 데보라도 이 퀘이커 여성과 함께 끝까지 남아있다가 이 여성에게 휴의 시신을 신선한 공기가 부는 곳에 안치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데보라는 자신의 형기를 마치고 퀘이커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그들과 함께 내세에서 "이곳에서 그녀가 거부당한 사랑을 만날 어떤 잠재적인 희망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간다(73). 그러나 퀘이커 공동체는 단지 내세적 기독교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데보라가 내세에서 어떤 사랑을 기대하건 간에 그녀는 이미 퀘이커 공동체 내에서 "이 조용하고 평온한 사람들에 의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73). 이는 곧 퀘이커 교도의 신앙이 공허한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사회적 실천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당시의 퀘이커 교도가 노예제철폐운동 및 교도소 개혁을 주도한 행동주의자였다는 점은 그들의 종교가 실천에 기초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 퀘이커 교도들의 행동주의적 면모에 대해서는 Pfaelzer Parlor 52, Doriani 208쪽을 참고할 것.
더구나 퀘이커 공동체가 데보라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그들의 공동체 의식이 계급차이를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주며, 데보라가 퀘이커 교도가 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개종일 뿐 아니라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계급 사이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사건이기도 하다.
) 필자의 입장과 달리 휴즈는 퀘이커 여성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고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오로지 억압받은 자의 고통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구원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은 데보라와 다른 노동자의 고난의 삶이라고 말한다. Hughes 130-33.
퀘이커 교도가 휴와 데보라에게 행사하는 사랑의 행위는 기독교 언어를 사용하던 중산층 인물들의 무책임한 수동적 자세와 대조를 이루며 종교도 노동계급의 구원을 위한 사회적 실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제철공장에서의 삶』에서 노동과 종교와 더불어 계급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또 다른 근원으로 제시되는 것은 예술이다. 여기서 우리는 휴가 조각한 여성 노동자의 조각상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샤이버는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휴가 자신의 미적 감수성 때문에 데보라와 동일시하지 못하고, 쇠찌꺼기를 소재로 여성의 신체를 예술작품으로 변모시키는 휴의 예술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미학적인 행위로서 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더구나 휴의 조각상은 남성에 의한 여성신체의 식민지화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와 다를 바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샤이버에 따르면 휴의 조각상은 데보라의 신체를 모델로 한 것으로서 휴는 여성의 신체를 식민화시켜 자신의 내적 동경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휴의 조각상은 남성적 감수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Scheiber 106-09). 그러나 휴의 조각상은 남성에 의한 여성신체의 식민화의 산물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샤이버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주요 갈등의 축이 계급이 아니라 성별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휴의 여성조각상은 휴가 유일하게 데보라를 비롯한 여성노동자와의 동일시를 이루어냈기 때문에 가능하다. 휴가 사랑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제이니와 같이 가냘프고 연약한 여성의 모습이지만 조각상은 강하면서도 굶주림에 지친, 정의될 수 없는 욕망을 표현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조각상의 모습이 당대의 감상주의 문학에서 예찬되던 여성의 이미지와 결별한 것은 물론이다.
) 데이비스의 감상주의 전통과의 결별에 대해서는 Curnutt 157, Pfaelzer "Rebecca" 237, Parlor 43쪽, 그리고 Lang의 논문 전체를 참조할 것.
휴의 조각상이 노동으로 인해 강인해진 근육질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데보라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조각상이 표현하는 굶주림과 갈망은 휴에게서 사랑받지 못하는 데보라의 정신적 갈망과 일치한다. 휴의 비극은 자신이 창조한 여성 조각상과 조각상의 실제모델인 데보라의 관계를, 그리고 자신의 조각상이 담고 있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 데보라와 조각상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Scheiber 107쪽을, 조각상에 대한 휴의 무지에 대해서는 Harris Rebecca 37쪽을 참고할 것.
휴의 조각상은 물론 데보라 개인이 아니라 산업사회에서 고통받는 노동계급 전체의 애환과 욕망을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조각상의 재료가 쇠찌꺼기라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쇠찌꺼기(korl)는 철이 광맥으로부터 분리되는 제련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으로서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완전히 소화해내지 못하는 잉여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휴가 노동시간이 아닌 여가에 이런 제련과정의 잉여물을 가지고 조각한다는 것은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잉여로서의 노동자의 굶주림과 욕망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노동자는 자본주의사회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공장의 기계와 마찬가지로 자본제 생산양식의 일부로 작동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에 완전히 편입될 수 없는 잉여로서의 욕망을 지니게 된다.
) 이 잉여로서의 욕망을 라캉의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또 다른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상징계에서 불가피하게 생성되는 잉여로서의 실재계에 속하는 욕망에 대해서는 졸고 「욕망의 주체와 윤리적 행위-라깡과 지젝의 주체이론」을 참조할 것.
휴의 조각상은 이 잉여로서의 노동계급의 욕망에 대한 가장 극적인 예술적 표현이다.
이 작품의 최종적인 결론이 휴의 죽음이나 퀘이커교도로 개종한 데보라의 모습이 아니라 화자의 서재에서 팔을 뻗고 호소하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휴의 조각상의 모습으로 맺어진다는 점은 자본주의체제에서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잉여로서의 노동계급의 욕망에 대한 예술적 표현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 조각상은 화자가 작품 처음에 인용했던 "끔직한 질문"을 반복한다. "이것이 끝인가?"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없는가(nothing beyond)?" 화자는 앞서 이 질문은 그 자체가 답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화자의 이런 발언은 어떤 의미에서 옳은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이 보이는, 팔을 내뻗은 휴의 조각상 자체가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beyond"라는 말 자체가 불가피하게 생성되는 잉여로서의 욕망을 나타낸다. 그리고 『애틀랜틱 먼쓸리』의 편집장인 제임스 필즈(James Fields)가 이 소설의 제목을 바꿀 것을 제안했을 때 데이비스가 『제철공장에서의 삶』대신 제시한 제목이 "Korl Woman"과 "Beyond"였다는 점은 데이비스가 노동계급이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잉여욕망으로서의 조각상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 제목과 관련한 필즈와의 서신교환에 대해서는 Olsen 86쪽을 참조할 것.
휴의 조각상은 바로 노동계급의 잉여욕망을 표현한다는 데에 그 예술적 호소력이 있다. 이 작품의 결론이 조각상의 모습인 것도 데이비스가 휴의 죽음과 데보라의 개종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는 노동계급의 욕망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조각상이 신이 "새벽의 약속"을 심어 놓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낙관적인 결말은 이 해소되지 않은 노동자의 욕망이 언젠가는 해소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희망이 가능한 것은 노동계급의 연대감과 종교의 실천성과 더불어 예술이 노동계급의 현실과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호소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휴의 조각상처럼 데이비스의 소설은 해소되지 않은 계급의 문제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휴가 쇠찌꺼기로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데이비스도 산업사회의 찌꺼기인 노동계급을 예술의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휴의 조각상이 팔을 뻗고 호소하듯이 데이비스의 작품도 당시의 중산층 독자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독자에게 해소되지 않은 계급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점에서 데이비스의 작품은 계급과 계급 사이를 메우려는 예술적 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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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Two Classes: Labor, Religion, and Art in Life in the Iron-Mills
Abstract Seokwon Yang
Admittedly the first novelistic expression of American realism, Rebecca Harding Davis's Life in the Iron-Mills portrays the life of American working class in realistic terms. Davis's novella examines the gulf between the laborer and the middle class and explores the possible ways to bridge it.
The tragic story of Hugh Wolfe, a puddler in an iron mill and a sculptor, exemplifies the failed attempt of a worker to become a middle class artist. He accepts the money his cousin Deborah steals from a friend of the mill-owner and is prosecuted for the theft, and finally commits suicide in prison. Not only does he fail to cross the distance between classes, but he is also alienated from his own class since he idealizes a middle class gentleman and is coopted to his bourgeois values. Nor does he realize the true meaning of his statue which he makes out of korl, a leftover in the process of melting ores. The middle class characters who visit the factory lack the sympathy for the workers and the sincerity to understand them. Hugh's failure and the visitors' indifference to the other class throw the rift between classes in bold relief.
Davis, however, outlines three possible ways to overcome the social reality of the working class. First of all, Deborah's life serves as an alternative to Hugh's escapism and individualism. Unlike Hugh who espouses the bourgeois standard of beauty and shuns her deformity, she extends emotional and physical help to him, illustrating the solidarity between laborers. Secondly, a Quaker woman who saves Deborah by accommodating her into her community shows the potentiality of religion as a social practice. In contrast to Christian reformers and bourgeois visitors who advocate (but hypocritically fail to carry out) Christian charity, the Quaker community puts its religious faith into active practice. Finally, art shows the power of articulating the frustration and desire of the working class. Hugh's korl woman, the product of industrial waste, fleshes out the surplus desire of laborers with artistic appeal that reaches beyond the class boundary.
주제어: 사실주의(realism), 중산 계급(middle class), 노동 계급(working class), 노동(labor), 종교(religion), 예술(art), 자본주의(capitalism), 산업 사회(industrial society), 잉여욕망(surplus des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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