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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과 유럽사민주의

 '제3의 길'과 유럽사민주의의 변천:

독일사민당, 영국노동당, 프랑스사회당, 이탈리아좌파민주당의 비교

 

정병기

2003.04.25 국제정치학회 춘계학술대회, 2003.05.24 맑스코뮤날레 발표논문

맑스코뮤날레 조직위원회 편. 2003. 『Marx Communnale: 지구화 시대 맑스의 현재성』, 제2권. 문화과학사. pp. 50-69 수록l

 

차  례 

1. 서론

2. 현대적 국민정당화와 '제3의 길'

1) 노동자 계급정당의 창당과 이념 및 목적

2) 현대적 국민정당으로의 변천

3. '제3의 길'의 이념과 정책

4. 결론

  

1. 서론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는 언제나 양 극단이 존재했던 것처럼 '제3의 길'을 둘러싼 논쟁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따라서 지구화 시대로 표현되는 오늘날의 세계질서에서도 또 다른 '제3의 길' 논쟁이 일어난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제3의 길' 논쟁도 시대와 체제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 시대적 배경과 체제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과 내용을 달리해 왔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 등장 이후, 과거의 제3의 길 논쟁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또는 맑스주의)간 '체제(system)' 대안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논쟁은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의 '최소국가'와 '복지국가'간 '국가 개입 대안'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1)

물론 각 국이 취하는 '제3의 길'의 구체적인 주장과 내용이 동일하지는 않다. 영국과 독일의 '제3의 길'이 기든스(A. Giddens)의 논리에 입각하여 중간층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치의 한 지류로 빠져들어 간 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길은 현대의 '전통 사민주의'(복지국가와 케인즈주의) 노선에 중간층 강조 전략을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차이는 프랑스 사회당이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을 비판하며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대응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2)

'제3의 길'에 대한 평가도 상이하다. 퍼거(W. A. Perger)가 현재의 '제3의 길'을 '공산당 선언 이후 정치적 이념 시장에서 일어난 최대의 성공적 거사'로 칭송한3) 것과는 달리, 독일 사민당을 비판한 초이너(B. Zeuner)는 '노동운동의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해 간 길'4)이라고 혹평하였다.

이 글은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사민주의 정당들5)의 강령상 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위와 같은 역사적 변천을 추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계급정당으로서의 창당 당시로부터 최근의 '제3의 길'을 선택하기까지 네 정당들의 이념과 정책 및 변화를 몇 가지 주요 기점으로 나누어 정리하여 그 계기와 내용을 비교 분석하면서 최종적으로 '제3의 길'의 본질적 내용을 천착하고 비판할 것이다.

사민주의 정당들은 계급정당으로부터 출발하여 맑스주의 및 자본주의비판과 오랫동안 관련되어 왔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 일반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네 정당들의 비교 분석은 맑스주의 및 자본주의비판과의 관련성 속에서 계급정당의 국민정당6)화 과정에 맞추어 그 내용을 밝히고, 또 국민정당화 이후의 과정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책에 대한 고찰은 지면 관계상 일반적 경향에 한정해 비교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혀 둔다.7)

  

2. 현대적 국민정당화와 '제3의 길'

 4개국 좌파정당들의 변화과정을 단계별로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고 이를 다시 그림으로 표시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창당이념과 노선변화 과정

 

독일 사민당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이탈리아 좌파민주당

창당 과정

·1875, 사회주의노동자당(SAP): 라쌀의 전독일노동자연맹(ADAV)과 맑스주의적 사민주의노동자당(SDAP)이 통합

·1891, 사민당으로 개명

·1900, 노동대표위원회: 영국노총(TUC) 주도에 독립노동당, 사회민주동맹, 페이비언 협회가 참여

·1906, 노동당으로 개명

·1905, '인터내셔널 프랑스지회(SFIO): 맑스·블랑키즘적 사회당(PSdF)과 개혁주의적 사회당(PSF)이 통합

·1969∼74, 사회당으로 개명 후 사회주의자들 통합

·1921, 이탈리아공산당(PCI): 맑스의 혁명적 사회주의

·곧 그람시의 '진지전' 개념 수용

창당 이념과

목적

라쌀주의(국가사회주의)와 맑스주의(혁명적 사회주의)의 절충(사회주의적 목표와 의회주의적 실천)

노동조합의 이익을 국회에서 대변

개혁적 사회주의와 블랑키즘 및 맑스주의의 병존

혁명적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그람시의 진지전 전략 수용

주요

노선변화

과정

① 1891, 에어푸르트 강령으로 맑스주의 강화

② 1890년대∼1차대전(수정주의 논쟁), 맑스주의 포기와 라쌀주의 복귀; 공산주의자 분리

③ 1959, 고데스베르크 강령으로 '친근로자적' 국민정당화

① 1918, 생산·분배·교환수단의 사회화와 산업민주주의(당헌 4조)

② 1950년대, 수정주의(산업민주주의 포기)와 케인즈주의로 국민정당화

③ 1970년대 후반, 케인즈주의까지 포기하는 신자유주의적 경향 노정

① 1920, 혁명적 사회주의자 분리로 개혁주의적 사회주의로 잔존

② 1969∼74, 급진공화파들까지 통합하여 당내 정파 재편, 1970년대는 좌파와 중도파가 주류

③ 1978, 공산당과 결별, 우파세력 강화, 좌파도 우선회

① 1944, 톨리아티의 살레르모 대중정당화 선언

② 1956, 이탈리아식 사회주의 선언(스탈린 노선 비판 시작)

③ 1977∼79, '역사적 타협'으로 '유로코뮤니즘' 본격화

최종 노선 변화와 '제3의 길'

·1989, 베를린 강령으로 현대화 노선 강화

·1998, '신중도' 노선 등장, 녹색당과 연정구성

·1999, 블레어-쉬뢰더 성명으로 현대적 경제정당화

·1994, 블레어의 '신노동당' 노선 등장

·1995, 당헌4조 폐지, 현대적 경제정당화

·1997, 노동당 집권

·1991, 전통 사회주의 이념 포기하고 다원주의화(국민정당화)

·1997, '쇄신좌파' 노선 등장, 공산당 및 녹색당과 연정구성

·1991, 1차 당명개정(PDS)으로 공산주의와 결별

·1996, 중도정당들과 연정구성

·1998, 2차 당명개정(DS)으로 유럽사회주의 (유럽사민주의)공식화

 1) 노동자 계급정당의 창당과 이념 및 목적

 네 나라중 사민주의 계급정당이 가장 먼저 등장한 국가는 독일이다. 라쌀주의적 전독일노동자연맹(ADAV)과 맑스주의적 사민주의노동자당(SDAP)이 합당하여 사회주의노동자당(SAP)이 창당된 것이 1875년이었다. 그후 1891년 에어푸르트(Erfurt) 전당대회를 통해 독일 사민주의 정당은 오늘날의 이름인 사민당(SPD)으로 개명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사민주의 정당이 창당된 것은 독일보다 약 25∼30년 뒤늦은 1900년과 1905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사민주의 정당들도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현재의 당명을 갖게 되었다. 영국 노동당과 사민당은 창당한 지 6년 혹은 16년 뒤에 개명을 했지만, 프랑스 사회당은 오랜 통합과 분열의 역사를 거쳐 창당 후 64년이 지난 1969년에야 오늘날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공산당은 당시 사회당으로부터 분리해 나온 그람시(A. Gramsci) 등에 의해 1921년에 설립되어 일정한 노선변화를 겪은 후 1991년에 좌파민주당(PDS)으로 개명하여 점차 사민주의화되어 왔다.8)

창당 당시의 이념과 목적도 창당 배경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났다. 영국 노동당이 노동조합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과 달리, 독일 사민당과 프랑스 사회당은 노조운동과는 별개로 독자적 노동자정치운동의 성과물로 탄생하였다. 물론 독일 사민당과 프랑스 사회당도 노동자계급정당이라는 속성에 따라 창당 이후 노조와의 관계가 긴밀해졌음은 당연하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당명과 같이 맑스의 혁명적 사회주의(또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창당된 후, 그람시의 전략적 발전에 따른 진지전을 도입하게 되었다. 노조와 정당의 관계에 있어서는 진지전에 의한 그람시적 설정이 양자의 변증법적 관계에 가장 충실한 형태라 할 수 있지만, 이후에는 점차 공산당의 지도를 강조하게 되면서 당에 대한 노조의 종속성이 생겨나기도 했다.9)

영국 노동당은 영국노총 TUC에 의해 '노동조합이 대표하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의회에서 대변'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당되었다. 노동당의 창당에는 물론 기존 노동자계급정당인 독립노동당과 맑스주의적 사회민주동맹10), 그리고 사회주의적 지식인들의 모임인 페이비언 협회도 참여했다. 그러나 노동당내 조직구조와 의사결정구조에는 최근의 변화가 있기까지 단체당원제와 블록투표제에 의해 노조의 권한이 강력하게 보장되어 왔다.

프랑스 사회당과 독일 사민당의 창당에는 노조의 영향력이 작용하지 못한 반면, 이탈리아 공산당을 제외하면 맑스주의자들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컸다. 특히 독일 사민당에서 맑스주의자들의 역할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라쌀주의자들과 대등한 것이었다. 때문에 창당 이념은 맑스주의적 이념과 라쌀주의적 실천의 절충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면밀히 관찰하면, 강력적 이념에 있어서도 맑스주의적 혁명성이 제대로 표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프랑스 사회당의 모태가 되는 사회주의 정당이 출현하게 된 것은 시기적으로 영국 노동당 창당과 비슷하지만, 출현 방식으로는 독일 사민당과 유사하게 기존 두 정당이 통합하는 형태였다. 혁명적 세력으로 분류되는 맑스주의자 쥘 게드(J. Guesde)와 블랑키스트 바이양(E. Vaillant)이 이끌던 '프랑스의 사회주의당(PSdF)'과, 라쌀주의와 유사하게 공화국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는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자인 조레스(J. Jaurès)가 이끌던 '프랑스 사회주의당(PSF)'이 통합하여 탄생한 '인터내셔널 프랑스지회(SFIO)'가 그것이다. 그러나  PSdF 내에 두 계파가 존재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프랑스 사회당은 세 입장의 절충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현대적 국민정당으로의 변천

 네 정당 모두 전반적인 우경화 현상을 보여 왔다. 그러나 창당한 지 약 20년이 지난 후 이탈리아를 제외한 세 나라의 좌파진영에서는 공통적으로 좌파들의 강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각 국의 특수한 정치경제적 배경과 창당이념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회 진출을 통한 정치적 수단에 의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킨다는 목표에 머물렀던 영국 노동당의 1차 노선 변화는 1918년 전당대회에서 당헌 4조의 채택에 의해 이루어졌다. 생산·분배·교환 수단의 사회화와 기업경영에서의 산업민주주의를 당의 강령적 목표로 삼게 된 것이다. 이후 사회화의 현실적 형태인 '국유화'가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복지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노동당의 최종적인 강령 목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급진적 노선 변화는 당시 영국 인민들의 의식변화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노동당은 약 5년 후인 1923년 191석을 얻어 자유당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기도 했으며, 1929년에는 악화되는 경제 위기 속에서 제1당이 되는 데 성공했다.

노동당의 2차 주요 노선변화는 세 차례 총선에서 패배한 1950년대였다. 영국 자본주의의 황금기인 이 시기에는 케인즈식의 재정금융정책으로 소득증대와 완전고용 및 소득재분배를 이룩할 수 있다는 신념이 노동당의 지도부와 이론가들 사이에 팽배했었다. 그래서 독일 수정주의가 독일 자본의 번영기에 등장했던 것과 같이, 국유화나 계획화 및 산업민주주의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수정주의와, 노동당은 더 이상 노동조합의 정당이 아니라 국민의 정당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이 시기에 크게 대두했다.

세 번째 주요 노선변화는 케인즈주의적 신념까지 포기하는 1970년대 후반의 변화이다.  1973년 야당 시절의 노동당은 국민기업청(NEB) 설립을 통한 국유화를 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정책 강령11)을 발표하는 등 일시적 좌선회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 캘러한(J. Callaghan) 노동당정부는 IMF 구제금융을 전후해 임금 억제와 재정지출 삭감 등을 실시함으로써 처음으로 신자유주의적 경향으로 전환하였다.12)

노동당의 최종 노선변화는 1994년 블레어 당수의 취임으로 시작된 '신노동당' 노선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신노동당 노선은 블레어가 '유일한 제3의 길(The Third Way)'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대체로 보수당 정부의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계급정치'가 아닌 '국민정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신노동당 노선은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전통사민주의 노선을 완전히 탈피하였다.13) 1970년대 후반의 신자유주의 경향 시작이 IMF 구제금융에 따른 외부적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면, 1990년대 신노동당 노선의 신자유주의는 집권을 위한 자발적 선택이었다. 1995년 당헌 4조의 폐지는 이러한 노선변화에 따른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영국 노동당의 현대적 국민정당화는 독일 사민당과 같은 '현대적 경제정당화'에 다름 아니었다.

라쌀주의와 맑스주의의 동거로 시작된 독일 사민당의 1차 노선변화는 1891년 에어푸르트(Erfurt) 강령에서 나타났다. 독일 사민당은 창당 시기가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보다 20여년 앞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1차 노선변화도 그만큼 빨랐다. 1차 노선변화의 시기는 사회주의자탄압법이 실패로 드러나고 경제침체에 따른 노동자 생활의 악화를 배경으로 맑스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화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에어푸르트 강령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대안과 혁명적 노동자운동이라는 투쟁목표를 제시하면서 노동자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지를 명확히 제기하였다. 물론 이 강령도 실천 강령에서는 라쌀주의를 그대로 답습했고,14) 이념 부분에서도 변형된 맑스주의15)로 현상했다는 지적이 있다.16) 그렇지만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고타(Gotha) 강령에 비해서는 분명 좌선회의 모습을 띤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곧 이어 시작되어 1차대전까지 이어지는 수정주의 논쟁을 계기로 독일 사민당은 의회주의적 계급정당의 길을 노정하게 된다. 수정주의 논쟁 이후의 사민당은 라쌀주의가 담보하고 있던 온건한 혁명성조차 상실해 간 것이다.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탈당하게 되는 계기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유럽 대륙의 혁명 열기가 사민당 내에서는 수정주의를 강화시킨 반면, 사회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을 강화하여 사민당과 결별하고 독자적 정당을 꾸리는 방향으로 작용한 것이다.17)

한편 1950년대 영국 노동당의 국민정당화 시작과 대비되는 독일 사민당의 변화는 같은 시기인 1959년 고데스베르크(Godesberg) 강령에서 나타났다. 이 강령에서 선언되고 1960년대 중후반 연정참가로 완성된 국민정당 노선은 근본적으로 계급관을 포기한 것으로서 자본주의 질서의 유지를 목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질서를 수용하는 한도에서나마 당시에는 아직 사민당이 '친근로자'18)적 이념과 정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 사민당이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의 속성조차 포기한 것은 1989년 베를린 강령과 1999년 블레어-쉬뢰더 성명을 통해서였다. 당의 사회적 기반을 중간층으로 이동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이념과 정책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중도'와 '제3의 길'로 수용되는 '현대적 국민정당'은 영국 '신노동당' 노선과 마찬가지로 국가 경제의 국제경쟁력을 강조하는 '민족적 경쟁정당'이자 시장 원리를 신봉하는 '현대적 경제정당'을 일컫는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의 1차 노선변화는 영국 노동당과 같은 시기인 1차대전을 전후하여 일어났으며, 당시의 혁명적 열기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공산당의 분리 창당으로 작용하였다. 1920년 투르(Tours) 전당대회를 통해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분리해 나가고, 개혁적 세력만이 블룸(L. Blum)을 중심으로 SFIO에 남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조레스와 블룸의 노선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좌파로부터는 공산주의 세력과 구별짓고 우파로부터는 공화주의 세력과 구별짓게 되었다. 특히 조레스적 관점에서 본다면, 프랑스 사회당의 목적은 무계급사회가 아닌 국민적 합의에 기반한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1920년 이후의 프랑스 사회당은 계급정당의 정체성을 갖지 않았거나 매우 약하게 띠었다고 할 수 있다.19)

프랑스 사회당의 2차 노선변화는 1920년대의 분열과 오랜 정체 기간을 거쳐 사회주의가 프랑스 정치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는 1970년대에 일어났다. 1969년 알포르빌(Alfortville) 전당대회를 통해 기존의 SFIO가 사회당으로 탈바꿈한 것이 그 전조였다. 이 사회당은 1971년 에피네(Epinay) 전당대회를 거쳐 1974년에는 다양한 사회주의 정당들을 통합하고 중도파를 이끄는 미테랑(F. Mitterrand)을 중심으로 커다란 성격 변화를 겪게 되었다. 새로운 통합 사회당의 정파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테랑의 중도파 외에, 좌파로는 슈벤느망(J. P. Chevènement)을 중심으로 한 맑스주의 연구집단 CERES(Centre d'études, de recherches et d'éducations socialistes)가 있었고, 우파로는 제3공화국 급진공화당(Parti Radical) 세력을 이끌던 로카르(M. Rocard)의 급진공화파가 있었다.20)

일부 평자들이 에피네 전당대회를 사회주의에 대한 급진주의의 승리로 평가할 정도로, 급진공화파의 합류는 1920년 이래 사회당 노선의 중대한 변화를 의미했다.21) 대외적으로도 사회당은 공산주의와 급진공화주의 사이에서 후자에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사회당내 세력관계의 변화는 물론 세 정파간 연합의 결과였다. 그러나 당권을 장악한 미테랑은 사회주의자이기 이전에 공화주의자였으며, 당은 그에게 권력의 장악과 행사를 위한 도구였다. '인간의 권리에 기반한 사회주의'를 강조하는 미테랑 계파의 중심된 가치는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결합, 특권의 해소 등이었다.22)

이러한 변화는 사회당이 공산당에 비해 낮은 지지율을 얻은 1978년 선거를 계기로 나타나는 3차 노선변경에 직접 반영되었다. 좌파진영 대변에 위기를 느끼게 된 사회당 내에서는 공산당과 연대를 주도했던 좌파인 CERES 그룹이 약화되고 우파인 로카르 계파가 강화되었다. 로카르는 공산당과의 공동강령이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이며 중앙집중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반자코뱅적이고, 지방분권적, 자주관리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경제정책적으로는 긴축정책, 인플레이션 억제, 유럽과 세계에 대한 개방화를 주장하였다.23)

그러나 사회주의 개념의 수정은 우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슈벤느망도 1984년 '현대 공화국(République moderne)'이라는 새로운 정치집단을 만들고 CERES 그룹 명칭을 '사회주의와 공화국(Socialisme et République)'으로 변경하였다. 이어 1987년 릴(Lille) 전당대회에서의 슈벤느망의 주장에서 나타났듯이, 이들에게도 이제는 사회주의가 먼 미래의 일로 치부되고 현재적·현실적으로는 공화국만이 쟁점이 된다는 것이다.24) 좌우를 막론한 당내 정파들의 전반적 우경화는 1991년 이후의 최종적 노선변화를 예고했다.

1991년 임시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당 기획안은 10년 동안을 주도했던 기존 원칙과의 단절을 명확히 했다.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도덕과 방법'이라는 텍스트의 한 절에서 사회주의는 하나의 '도덕' 또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정의되었다. 곧, 하나의 제시된 길로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유, 평등, 사회적 정의, 연대, 관용, 책임 등 다양한 가치들을 배제하지 않는 다원주의성을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국 노동당이 1995년 이후 '현대적 경제정당화'의 의미에서 현대적 국민정당화의 길을 완성했고, 독일 사민당도 블레어-쉬뢰더 성명을 계기로 영국 노동당의 뒤를 밟아간 것과 달리, 프랑스 사회당은 국민정당화의 시기는 빨랐지만 최종적인 노선변화에 있어서도 '친근로자성'을 유지하는 국민정당 노선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의 주요 노선변화도 크게 네 차례로 나타난다. 1차 노선변화는 1944년 톨리아티(P. Togliatti)가 귀국한 후 살레르모(Salermo)에서 대중정당(massparty)화를 선언하면서 정치전략과 사회전략을 구분한 것이 계기였다. 곧, 사회전략 면에서는 반독점과 산업노동자에 핵심을 두지만, 정치전략 면에서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반파시즘 투쟁을 중심으로 여러 진보정당들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정치전략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계급정당 노선을 고수하되 당의 구조와 전술을 개방하려는 노력이었다.

2차 노선변화는 영국 노동당과 유사한 시기인 1956년 이탈리아 공산당 8차 전당대회에서 시작되었다. 2차 노선변화 역시 톨리아티의 주도로 시작된 것이었는데, 주요 내용은 탈스탈린화를 통해 "사회주의로의 이탈리아식 길(via italiana al socialismo)" 노선을 정립한 것이다. 2차 노선변화는 1차 노선변화와 달리 유로코뮤니즘의 초석이 되는 한편, 1980년대에까지 이르는 장기적 변화의 계기로 직접 작용하기도 하였다.

3차 노선변화는 '유로코뮤니즘'의 본격화로 알려진 1970년대 말 베를링게르(E. Berlinguer)당수의 '역사적 타협(compromesso historico)'이다. 중산층과 중도세력과의 동맹을 목표로 하는 '역사적 타협' 전략은 1977∼79년간 의회다수 참가의 형태로 정권에 참여하게 된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공산당이 의회내 정부불신임 투표를 포기하는 댓가로 기민당 정부의 긴축정책에 공산당의 사회개혁 정책을 수용한다는 정책연립의 형태였다. 이 전략은 유로코뮤니즘의 일환으로서 "소비에트 사회주의와 자유방임 자본주의간 제3의 길"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유로코뮤니즘의 '제3의 길'은 사민주의적 길과는 달리 아직 맑스주의와 레닌주의 및 그람시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않았다.25)

'역사적 타협'에 대해 이탈리아 노조들도 양보노선으로 선회하여 공산·사회계 정파노조인 노동총동맹(CGIL)이 제안한 EUR노선(로마의 회담장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으로 일컬어지는 전략을 통해 정부의 긴축정책을 수용하고 임금인상투쟁을 자제하는 대신 공산당과 개혁세력의 개혁정책을 기대하고 지원했다.26)

그러나 이 '역사적 타협' 전략은 기민당 당수 모로(A. Moro)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기민당 우파에 의한 권력장악으로 인해 지속될 수 없었고, 그에 따라 공산당내 지도부도 약화되었다.27) 이러한 지도부 약화는 1987년의 선거실패와 소련·동구의 변화라는 악재를 만나 개혁파들의 더욱 강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여성해방에 대한 관심 증대, 환경정책 중시, 선거제도를 처음으로 이슈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과 친밀한 관계 강화 등, 두 차례의 당명개정을 통해 최근 '제3의 길'로의 노선변화로 이어지는 일정한 강령변화가 이루어졌다.28)

1989년 18차 전당대회에서는 '민주주의'와 '강력한 개혁주의(reformismo forte)'를 전략목표로 설정하고 본격적인 당명개정 논의를 시작했으며, 1991년에는 '커다란 현대적 개혁정당'으로 자기위상을 정리하고 '좌파들의 민주주의 정당(PDS: Partito Democratico della Sinistra)'이라는 색깔 없는 당명을 선택했다.29) 1차 당명개정은 아직 사민주의화의 완성은 아니지만,사민주의화의 길로 연결되는 탈공산주의화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탈공산주의화의 길도 국민정당화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며, 이러한 국민정당화의 과정은 '좌파민주주의자(DS)'로의 2차 개명과 중도 포용 노선의 강화로 이어진 선거전략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30) 그러나 독일 사민당이나 영국 노동당과 달리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을 벗어나지는 않았으며, 프랑스 사회당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전통적' 사민주의 노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위 그림 참조).

  

3. '제3의 길'의 이념과 정책

 '급진중도'로 표상되는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은 복지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전략으로서, 사회민주주의가 취해야 할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당은 '권리는 반드시 책임을 수반한다'는 의미에서 '포지티브 복지' 또는 '새로운 혼합경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당 차원의 '제3의 길'을 의미하는 '신노동당' 이념은 1995년 개정된 당헌 4조에 잘 나타난다. 즉, 노동당은 '민주적 사회주의당'으로서, "권력과 부의 기회가 소수의 손에 있지 않고 다수의 손에 있"으며, "권리를 향유하면서도 의무를 수행하고", "연대와 관용과 존경의 정신으로 자유롭게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31) 이 때 '신노동당'이 규정하는 사회적 정의는 시민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가리키되, 경제적 효율성을 저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평등이란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 각자가 자기의 잠재력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그러나 실질적 기회, 시민적 책임,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노동당'의 강조는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초극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특수한' 정치철학을 형성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만약 경기가 나빠져 실업률이 상승한다면, 조세나 재정적자의 증가를 반대하는 '제3의 길' 노선은 힘을 잃고, 결국 전통적인 유럽사민주의 정책(국유화나 재정적자 증가에 의한 경기부양책)이나 신자유주의 정책(건전 재정의 유지로 실업을 증가시키는 정책)으로 휩쓸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결국 신노동당의 '제3의 길'은 매우 애매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평등'에 대해 '제3의 길'은 기회의 평등이나 개인의 책임을 중시함으로써, 결과로 나타나는 불평등을 사실상 인정한다. '지구화'에 대해서도 불가역적 과정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야기하는 온갖 폐해를 시정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지구화와 타협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신중도'로 불리는 독일 사민당의 '제3의 길'은 1989년 베를린 강령에서 시작되어 1999년 블레어-쉬뢰더 성명으로 완성된다. 우선 베를린 강령은 '사회적 정의'를 "재산과 소득 및 권력의 분배에서 더 많은 평등을 요구"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32) 그러나 이 강령에서 언급되는 '사회적 정의'도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목표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추상적 규범으로만 제시된 것이다. 따라서 영국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그 '정의'가 요구하는 '더 많은 평등'도 엄격히 결과적 평등의 개념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기회와 출발의 평등으로 전환될 여지가 있다.

1960년대 말 집권기에 평화정당의 성격을 획득한 이후 경제적 분배와 평등을 넘어 탈물질주의적 가치들로 무장한 현대 사회의 새로운 문제점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측면에서 이 강령은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강령의 문제점은 경제적 사안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치들에 있어서조차 경쟁 및 시장의 개념과 타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통일 이후 1990년대에는 이러한 정의 개념에 대한 언급조차 줄어들다가 1998년 연방의회선거 당시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33) 추상적 규범으로 제시된 '민주적 사회주의'가 정책적 실천으로 이어지면서 일정한 모순을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블레어-쉬뢰더 성명은 베를린 강령과 현실 정부정책간의 괴리를 후자에 맞추는 방향으로 해소한 것으로서 '현대적 경제정당'화로의 노선변화를 완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른바 '현대적 사민주의자들'은 '제3의 길'로 포장된 '신중도'를 "21세기를 위한 현대적 통치"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그 실질적 내용은 경제적 지구화를 옹호하고, 재정안정과 조세부담경감이라는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반면,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라인 자본주의(rheinischer Kapitalismus)'와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으로부터 사민당을 단절시키고자 하는 것이다.34)

독일 사민당과 적녹연정의 '제3의 길'은 명백히 고전적 분배정책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곧 분배의 결과가 아니라, 부 자체의 증가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도 증가한다는 이른바 '엘리베이트 효과'를 강조한다는 것이다.35) 그 전략은 성장과 경쟁력이 될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경제력과 시장의 역할에 의지하고 그 강화와 확장을 위해 또 다른 형태의 물신화된 "권력환상(Machtillusion)"36)으로 현상한다.

한편 조스팽 사회당 정권에 의한 복지국가의 개혁은 상당부분 1984년 이래 사회당이 추진해 온 복지국가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회당내 다수 중도계열을 형성하고 있는 미테랑 계열의 조스팽은 사회당의 좌우 편향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중간적인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회당 자체가 이미 상당부분 우경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중도의 길 역시 우경화된 중도임에는 틀림없다.

프랑스 사회당이 표방하는 '쇄신좌파'는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당내 우파들이 주장해온 공화주의 강조를 좇아간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당의 정체성은 사회주의적 조치를 통해 유지되기보다는 '공화주의적 연대'를 통해 재형성되고 있었고, 조스팽 정부의 정책에서도 그 점은 지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과 독일의 '제3의 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전통적 사회주의의 맥락을 덜 벗어났다는 평가도 가능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공화주의'라는 프랑스식 개혁 사회주의의 가치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지개 연정의 구체적인 정책도 공산당의 연정참여라는 요소를 차치하면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의 수렴이라는 보다 넓은 범주의 일반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곧 부유층에 대한 세금 증가를 비롯한 소득 불평등 감소 정책이 전통적 좌파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음이 인정되지만, 기업의 사회적 부담금을 낮추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연장선상에 놓인 조치들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탈리아 좌파민주당이 주장하는 '유럽사회주의'는 1차 당명개정 당시 민주집중제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고(실질적으로는 이미 베를링게르 사후 1984년에 포기했다), 자본주의 극복을 언급하지 않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제는 사회전략적으로도 산업노동자가 사회구조상 중심이 아니라는 입장으로 전환하였으며, 공정하고 효율적인 공공행정과 깨끗한 환경으로 대표되는 'better services'라는 특별 이슈로 '시민'에게 다가가고자 한다.37)

유럽 사민주의 진영에 가장 늦게 합류하여 아직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의 영역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이탈리아 좌파민주당도 이제는 수권정당의 이미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좌파민주당이 진단하는 이탈리아의 위기는 '도덕적, 사회적, 제도적 위기'로서 '지배계급의 혁신과 민주체제의 재구축'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좌파민주당이 원하는 수권정당의 이미지는 이러한 위기를 '좌파의 막강한 힘과 현 정부에 대한 신뢰할 만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개혁정당'이다.38)

그렇지만 이탈리아 중도-좌파 정부의 정책적 내용은 유럽통화동맹 가입을 위한 긴축재정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색채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하원에서의 절대다수 의석 확보 실패로 인해 재건공산당의 지지를 받아야 했던 집권연립(월계수동맹 l'Ulivo)은 재건공산당이 제시한 주35시간제 도입, 남부빈곤문제 해결, 적극적 실업해소정책을 유럽통화동맹 가입 후에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2년후 유럽통화동맹 가입에 성공한 후에도 재건공산당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에 따라 1차 월계수동맹 내각은 붕괴되었다. 뿐만 아니라 연정 지지를 두고 재건공산당이 분열함으로써 새로운 연정 수립에 성공한 2, 3차 월계수동맹 내각도 적극적 사회경제 정책의 실시에는 소극적이었다.

  

4. 결론

 독일 사민당,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과 이탈리아 좌파민주당은 모두 창당 당시에는 노동자계급정당이라는 정체성을 가졌었다. 그러나 노조가 자신의 정치적 대변을 위해 만든 정당인 영국 노동당은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노동자계급의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확보하고 향상시킨다는 의미에 한정된 계급정당이었다. 독일의 사민당도 처음부터 혁명적 사회주의와 구별되는 국가사회주의적 전통을 가졌다는 점에서 영국 노동당과 유사하다. 프랑스 사회당에서도 공화주의적 성격을 띤 개혁주의적 사회주의파가 창당 때부터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공산당의 분리 건설 이후에는 주도 세력이 되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탈계급적인 '국민정당화'의 가능성을 배태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공산당으로 출발한 이탈리아 좌파민주당은 그람시적 전략의 변화 개연성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혁명적 계급정당의 원칙에 충실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신노동당'의 '제3의 길'은 자본의 세계화 흐름에 대해 현상타파적이 아니라 현상추수적이라는 점에서 보수당의 신자유주의를 계승하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독일 사민당의 '신중도'도 계급정당과 국민정당 사이에서 선택된 '제3의 길'이었던 친근로자적 국민정당을 넘어 부르조아적 국민정당과의 또다른 '제3의 길'인 '현대적 경제정당화'를 선택함으로써 역시 우파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이어받았다. 특히 블레어-쉬뢰더 공동성명 이후 두 정당의 차이점은 더욱 줄어들어, 대미관계 등 대외정책상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그와 달리 프랑스 사회당은 공산당과의 끊임없는 경쟁으로 인해 국민정당화의 길은 빨랐지만, 최종적 노선변화에서도 '현대적 경제정당'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으며 아직도 상대적으로 친근로자성과 공산당과의 연대가능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탈리아 좌파민주당도 '좌파'의 이미지를 고수하면서 현대 사민주의의 전통적 정책을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중도-)좌파 정부가 실행하는 정책들도 신자유주의적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이 '제3의 길'은 여러 측면에서 나라와 시기별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한편, 영국과 독일, 프랑스와 이탈리아라는 두 국가집단별로 상이하게 현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동시성의 측면에서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이념의 수준이나 획기적 정책의 고안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기존의 좌파적 정체성을 상실해 간 길이라는 일반성을 띠었다. 현대 사민주의의 전통적 케인즈주의 정책 외에는 세계화 시기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대안 마련에 실패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정책을 답습해 간 결과이다. 따라서 '제3의 길'은 사민주의라는 '현대적 국민정당'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정치이며, 현대 정당정치 지형에서 좌우 개념은 '친근로자적' 국민정당과 부르주아적 국민정당의 경쟁지형으로 현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제3의 길'로 포장된 유럽 사민주의의 최근 노선도 신자유주의 시기에 합리화의 수혜자들과 사회적 신흥계층들과 같은 새로운 "지구화 계급(globale Klasse)"39)을 위한 것으로서, '아래로부터 위로의 재분배'를 통해 사각지대나 사회저변층들을 더욱 벼랑으로 몰고 가는 신자유주의 기획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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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주>

1) Gerhard Hirscher and Roland Sturm, ed., Die Strategie des 'Dritten Weges': Legitimation und Praxis sozialdemokratischer Regierungspolitik (München: Olzog, 2001), p. 9 참조.

2) Frankfurter Rundschau, 1999. 10. 28.

3) Die Zeit, 1999. 9. 16.

4) Bodo Zeuner, "Der Bruch der Sozialdemokraten mit der Arbeiterbewegung: Die Konsequenzen für die Gewerkschaften," in Klaus Dörre, Leo Panitch and Bodo Zeuner, et al., Die Strategie der 'Neuen Mitte': Verabschiedet sich die moderne Sozialdemokratie als Reformpartei? (Hamburg: VSA, 1999), p. 131.

5) 물론 이탈리아 좌파민주당의 경우는 공산당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세 국가의 사민주의 정당들과 사뭇 역사를 달리한다. 그러나 이탈리아 좌파민주당도 1991년 이후 사민주의를 표방하는 만큼 사민주의 정당들과의 비교가능성이 충분하며, 특히 '제3의 길'과 관련된 논의에서는 더 이상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6) 일반적으로 '국민정당(Volkspartei)'은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계급정당의 대당 개념으로서,  ① 당원과 지지자의 사회구조적 성격이 사회 전체의 계층구조와 상당할 정도로 일치하고, ② 수평적·수직적 당조직구조에서 사회의 이해관계 다원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이해관계의 균형과 갈등의 해소가 민주적으로 규정되고 운영되며, ③ 당의 정책은 국민 일반의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당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정당들이 각계 각층의 지지 획득을 위해 주장하는 내용일 뿐, 현실적으로는 ① 계급 화해와 국민 통합에 기여하는 한편, ② 당내부적으로 당원구조를 은폐하고 당외부적으로 사회적 기반(지지자)구조를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고 비판된다. Alf Mintzel, Die Volkspartei: Typus und Wirklichkeit. Ein Lehrbuch (Opladen: Westdeutscher Verlag, 1984), p. 24 참조. 이 글에서는 '국민정당'을 강령적·조직적 측면에서 탈계급적인 정당을 지칭하는 개념에 한정하여 사용한다. 한편 당조직이 대중에게 개방되어 가입서를 제출하고 일정한 당비를 내는 당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정당을 지칭하는 '대중정당(massparty)'은 '간부정당'의 대당으로서, 국민정당과는 구분의 차원을 달리하는 개념이다. Maurice Duverger, Political Parties (London: Methuen & Co., Ltd., 1978) 참조.

7) 영국과 프랑스에 관한 많은 부분은 김수행, 안삼환, 홍태영과 함께 수행한 연구의 결과인 근간 단행본『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 영국,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서울대 출판사)와 정병기, 「신자유주의와 '제3의 길': 영국, 독일, 프랑스의 비교」, 『현장에서 미래를』, 제83호, 2003년 1월 참조.

8) 여기에서 영국의 사민당과 이탈리아의 사회당 및 사민당은 논외로 한다.

9) 정병기, 「독일과 이탈리아의 노조-좌파정당 관계 비교: 독일 사민당(SPD)과 노총(DGB), 이탈리아 좌파민주당(DS)과 노동총동맹(CGIL)」,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편), 『현장과 이론 3』, 콜로키움 발표 논문집, 도서출판 현장에서 미래를, 2001,

10) 맑스주의자 하인드만이 1881년 결성한 '민주연합(Democratic Federation)'이 1884년 개명한 조직으로, 이후 '영국공산당(Communist Party of the Great Britain)'으로 성장했다. Malcolm Pearce and Geoffrey Stewart, British Political History 1867∼2001: Democracy and Decline (London: Routledge, 2002). p. 240.

11) 고세훈, 『영국노동당사: 한 노동운동의 정치화 이야기』, 나남, 1999. 366∼384쪽 참조.

12) 김수행, 「영국 노동당 100년의 역사」, 『다리』, 2000년 여름과 Geoffrey Foote, The Labour Party's Political Thought, 3rd edition (London: Macmillan, 1997). 참조.

13) Eric Hobsbawm, Ken Gill, Tony benn, et al., The Forward March of Labour Halted? (London: NLB, 1981) 참조.

14) 박호성, 『노동운동과 민족운동』, 역사비평사, 1994, 63∼64쪽; Hermann Oncken, Lassalle: Eine politische Bibliographie (Stuttgart und Berlin: Deutsche Verlagsanstalt, 1923), p. 526.

15) Carlo Schmid, Europa und die Macht des Geites, Bd. 2 (Berlin, München und Wien: Scherz, 1973), p. 280.

16) 맑스주의적 정당으로 건설된 사민주의노동자당 강령에서부터 이미 라쌀주의의 영향은 근본적으로 나타났으며, 현대 사민당에 이르기까지 라쌀주의의 의미는 실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강령적인 면에서도 결코 포기되지 않고 있다. 독일 사민주의 정치의 변화는 맑스주의의 전통에서 혁명적 성격을 수정해 온 결과가 아니라, 라쌀의 전통에 맑스주의를 이론적으로 접목하려던 과정이 실패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병기, 「라쌀의 국가관과 독일사민당에 대한 라쌀주의의 영향과 의미」, 『한국정치학회보』, 제36집, 2002년 여름 참조.

17) 이와 반대로 영국에서는 노동당 내의 좌파 세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8) '근로자'라는 표현은 일제의 잔재이자 군사정권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탈각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용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서 '일자리수요자(Arbeitnehmer)'가 있다. 다른 대안이 없는 한, 여기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용어로서 '근로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19) Alain Bergounioux and Bernard Manin, Le régime social-démocrate (Paris: Puf, 1989) 참조.

20) 통합 이후에도 사회당은 일정한 기간 동안 개혁적 사회주의 노선이 주류를 형성했지만, CERES 그룹의 주도 아래 유로코뮤니즘적 공산당--1976년 프랑스 공산당도 22차 전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폐기하였다(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와 독재』, 최인락 역, 연구사, 1988 참조)--과 연합하여 '공동강령'을 채택하기도 했다(Fernando Claudin, Eurocommunism and socialism (London: NLB, 1978), pp. 65∼67).

21) Hugues Portelli, "L'intérgration du Parti socialiste à la Ve République," in Olivier Duhamel and Jean-Luc Parodi, ed., La Constitution de la Ve République (Paris: Presses de la FNSP, 1988).

22) Alain Bergounioux and Gérard Grunberg, Le long remords du pouvoir. Le Parti socialiste français 1905∼1992 (Paris: Fayard, 1992), p. 259.

23) Michel Rocard, Parler vrai (Paris: Seuil, 1979), p. 117이하.

24) 물론 공화국과 사회주의의 연관성과 관련된 슈벤느망의 주장도 공화국의 확대를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는 조레스 이래 지속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25) Erhard Brütting, ed., Italien-Lexikon (Berlin: ESV, 1997); Santiago Carrillo, 'Eurokommunismus' und der Staat (Hamburg and Berlin: VSA, 1977) 참조.

26) 정병기 (2001), 앞의 글, 55∼77쪽 참조.

27) 그에 따라 1984년부터 베를링게르(E. Berlinguer)의 뒤를 이은 나타(A. Natta) 당수 시절에는 지도부의 약화로 인해 세 파간 다수책임제가 등장하였다. 당시 공산당의 주요 세 정파는 중도파 베를링게르계(berlingueriani), 좌파 잉그라오계(ingaiani), 당개혁파 나폴리타노계(napolitaniani)였다(Gianfranco Pasquino, "Programmatic Renewal, and Much More: From the PCI to the PDS," West European Politics, vol. 16 (1993), p. 158).

28) Ibid., pp. 167∼170.

29) 20차 전당대회에서 당권파이자 개혁파인 오케토(A. Occhetto)/나폴리타노(G. Napolitano)계가 발안한 당명개정안에 대해(67.4% 찬성) 네오그람시언인 잉그라오계(ingraiani)와 스탈린주의자들인 코수타계(cossuttiani)가 반대하였다(26.6% 반대). 그러나 당명개정이 확정되자 잉그라오계는 잔류했으나 코수타계는 외곽의 좌파들과 결합하여 재건공산당(공산주의재건당 RC)을 창당하였다. 잉그라오계도 잉그라오(P. Ingrao)가 은퇴한 후에는 대부분 재건공산당으로 이적하였다(Piero Ignazi, Dal Pci al Pds (Bologna: Il Mulino, 1992), p. 133)

30) 1차 개명은 탈당한 정통 공산주의자들이 다른 좌익 소수파들과 연합하여 재건공산당(RC)을 창당함으로써 기존 노선과의 단절이 뚜렷했던 것과 달리, 2차 개명은 중도-좌파 정권(월계수 연맹) 출범후 부총리로서 좌파민주당내 월계수파를 이끌던 벨트로니(W. Veltroni)와 당수로서 다수파 지도자인 달레마(M. D'Alema) 사이의 노선 논쟁과 주도권 다툼의 결과일 뿐, 노선의 변화나 '정당'으로서의 조직변화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벨트로니가 월계수연맹을 미국의 민주당과 같은 느슨한 형태의 통합된 정당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반면, 달레마는 월계수연맹과 무관하게 좌파민주당을 중북부 유럽 좌파들의 특성들을 소화하며 중도적 좌파들까지 포함하는 범좌파 연합체로 재조직할 것을 구상했었다. 그러나 달레마의 보다 궁극적 목적은 강령노선의 변화보다, 월계수연맹이 정부를 이끌어 가는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강력한 수권 주체를 세우고, 더 나아가 국내와 전유럽 좌파 진영에서 입지를 높여나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2차개명에서 '당'의 생략은 실질적 의미를 갖지 못하므로 DS도 '좌파민주당'으로 번역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2차개명과 관련된 논쟁과 정파간 갈등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Partito Democratico della Sinistra, Cristiano sociali, Comunisti unitari, Repubblicani per la sinistra democratica and Socialisti laburisti, eds., Un nuovo Partito della Sinistra: Documenti e materiali (Roma: Salemi Pro. Edit., 1997); Rinaldo Vignati, "Il leader e il partito. Il Pds dopo il II congresso," in Luciano Bardi and Martin Rhodes, eds. Politica in Italia: I fatti dell'anno e le interpretazioni, edizione 98 (Bologna: Il Mulino, 1998); Valdo Spini, La rosa e l'Ulivo: Per il nuovo partito del socialismo europeo in Italia (Milano: Baldini and Castoldi, 1998).

31) Pearce and Stewart, op. cit., p. 569.

32) Vorstand der SPD, ed., Grundsatzprogramm der Sozialdemokratischen Partei Deutschlands (Bonn, 1999).

33) Uwe Jun, "Die Transformation der Sozialdemokratie: Der Dritte Weg, New Labour und die SPD," Zeitschrift für Politikwissenschaft, vol. 10 (2000), Nr. 4, p. 1518.

34) Birgit Mahnkopf, "Formel 1 der neuen Sozialdemokratie: Gerechtigkeit durch Ungleichheit. Zur Neuinterpretation der sozialen Frage im globalen Kapitalismus," Prokla: Zeitschrift für kritische Sozialwissenschaft, vol. 30 (2000), Nr. 4, pp. 489∼491.

35) Klaus Dörre, "Die SPD in der Zerreißprobe: Auf dem 'Dritten Weg'," in Dörre, Panitch and Zeuner, et. al., op. cit., p. 10.

36) Wolf-Dieter Narr, "Gegenwart und Zukunft einer Illusion: Rotgrün und die Möglichkeiten gegenwärtiger Politik," Zeitschrift für kritische Sozialwissenschaft, vol. 29 (1999), Nr. 3, p. 374.

37) Pasquino, op. cit., pp. 171∼172; Giuseppe Mammanella, "Il partito Comunista Italiano," in Gianfranco Pasquino. La politica italiana: Dizionario critico 1945∼1995 (Roma and Bari: Laterza, 1995), pp. 287∼309.

38) Spini, op. cit. 참조.

39) Joachim Bischoff and Richard Detje, "Widersprüche der 'Neuen Mitte': Strategie zur Bändigung des Kapitalismus?," in Dörre, Panitch and Zeuner, et. al., op. cit., pp. 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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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의 노동관

노동 거부와 자기가치화

-노동에 대한 자율주의의 관점 정립을 위한 몇 가지 생각-

문제설정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지구적 투쟁의 다양성,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서의 편차들
로스엔젤레스: 흑인, 유색인 노동자들-시위, 약탈과 방화
사빠띠스따: 원주민 농민들 --봉기
프랑스: 실업자,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 시위
한국: 조직된 대중 노동자--파업
인도네시아: 학생, 시민 --시위, 약탈과 방화

1.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견해

1.1.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과 그 한계
1.1.1.인간의 삶에서 생산 활동을 특권화, 여가까지 재생산으로 환원,

"인간은 의식, 종교, 또는 그가 무언가를 의욕한다는 점에 의해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들 자신과 동물을 구별짓기 시작한 것은 ...그들의 생존수단을 생산하면서부터였다."(청년사,42)

1.1.2.생산의 노동으로의 환원--헤겔에 의해 정의된 노동 개념의 계승--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의 연속성(독일 이데올로기)

위의 정의에는 동물로부터의 인간의 구별, 혹은 인간(정신)의 현상학이라는 헤겔적 문제의식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1.1.3.삶의 노동으로의 환원에 의한 소외보다 노동의 소외를 문제로 설정, 임금 노동, 노동 일반이 아니라 노동의 특정 형태에 대한 비판.(경철수고)

"노동 대상의 소외 속에는 단지 노동 활동 자체 속에서의 소외, 외화가 요약되어 있을 뿐이다.---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다.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즉 강제 노동이다."(박종철, 1, 75-6)

1.1.4.생산수단, 특히 노동 수단의 발전을 역사의 진보와 동일시함. 자동장치 노동수단automaton의 형성을 코뮤니즘의 물적 전제조건으로 간주(그룬트리세)--노동자계급에 의한 생산수단 통제를 혁명의 핵심 과제로 설정하는 것은 이 논리의 연장.

1.1.5.코뮤니즘을 '노동이 삶의 제일차적 욕구로 되는 사회'(고타강령 비판)로 정의하는 것은 자동장치에 의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임금 노동, 강제된 노동에서 벗어날 때 과연 노동이 삶의 제일차적 욕구로 될 것인가? 그것은 삶의 다양성 속에 해소되어 삶의 욕구의 비특권적 일부로 되는 것이 아닌가?

1.1.6.강제로서의 노동과 욕구로서의 노동 사이에서: 노동에 대한 부정적 정의(벗어나야할 것, 기계화되어야 할 것, 강제로서의 노동)와 긍정적 정의(욕구로서의 노동) 사이에서 갈등

1.1.7.마르크스의 변증법은 노동 규정에 있어서는 프루동적 색채를 띤다. 노동의 악한 측면을 버리고 선한 측면을 취하라. 노동의 강제성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노동하게 하라. 그는 노동 자체를 거부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으며 노동을 인간의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활동으로 전화시킬 조건과 방법을 연구한다. 러시아 미르 공동체를 이행의 동력으로 인식하게 되는 말년의 시기는 그의 혁명 이론에서는 하나의 '창조적 예외'를 구성한다.

2. 엥겔스, 제2인터내셔널, 스딸린주의의 노동 개념

2.1.엥겔스

노동을 인류의 류적 본질로 사고. 자본주의적 노동과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의 노동을 구별치 않음. 그리고 자연을 인간에 의한 지배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노동을 자연 지배의 과정으로 봄.

"노동과 더불어 시작된 자연에 대한 지배는 새로운 진보가 있을 때마다 인간의 시야를 확장시켰다. ....노동으로부터 그리고 노동을 가지고 언어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이 유일하게 정당한 것..."(원숭이의 인간화에서 노동이 한 역할, 박종철, 5, 382)

2.2.고타강령

1875년 5월 23일에서 27일까지 고타에서 열린 라쌀레파와 아이제나흐파의 통합대회에서 제안된 독일노동자당 강령 제1조: "노동은 모든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현 사회에서 노동 수단은 자본가계급의 독점물이다...그에 따른 노동자 계급의 예속은 모든 형태의 빈곤과 노예상태의 원인이다"(프롤레타리아 당 강령, 68)

<마르크스의 고타강령 비판>

고타강령에 격분한 마르크스는 '비판'에서 격렬한 어조로 강령을 비판한다: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도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의 원천이다. (그리고 물질적 부는 바로 이 사용가치로 이루어진다.) 노동 자체는 자연력의 하나인 인간 노동력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노동이 그것에 속하는 대상과 도구와 더불어 수행된다는 점을 고려하는 한 문구는 옳다. 사회주의적 강령은 이러한 조건들을 묵살하는 부르주아적 말투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모든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의 첫 번째 원천인 자연에 대해 처음부터 그 소유자로서 관계를 맺는 한에서만, 즉 자연을 인간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한에서만 인간의 노동은 사용가치의 원천이 되며 따라서 부의 원천도 된다. 부르주아들이 노동에 초자연적인 창조력을 부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거름, 저작선, 232)[마르크스는 여기서 '물질적 부, 사용가치, 노동' 전체를 특정의 역사적 조건[인간이 자연에 소유자로서 관계를 맺는 역사적 조건]을 중심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엥겔스에게서 인류의 유적 본질로 확정된 자연 지배력으로서의 노동은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해되며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된다. 더 깊이 생각해 볼 것.]

2.3.에어푸르트 강령,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1891년 7월 독일 사회민주당 강령 초안은, 쟁점을 회피하면서 제1조를 노동수단의 소유문제, 특히 그것의 독점 문제에서 출발시킨다. "노동자가 노동수단으로부터 분리되고 그것을 사회 성원 중의 일부가 독점하게 됨으로써 사회는 노동계급과 유산계급의 두 계급으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계급투쟁을 분배의 문제로 사고하게 한다.

그리고 경제의 객관적 과정들에 대한 숭배에 빠지는 이후의 사회민주주의. 이른바 노동 숭배의 경제주의의 대두.

2.4.레닌의 노동개념

테일러주의에 대한 긍정. 자동화, 전력화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2.5.USSR 헌법 초안

"USSR의 새로운 헌법 초안의 주요한 기초는 그 주요한 기둥이 이미 성취되고 실현된 것들인 사회주의 원칙이다: 토지, 임야, 공장, 작업소, 그리고 그 밖의 생산 도구 및 수단의 사회주의적 소유; 착취 및 착취 계급들의 폐지; 대다수의 빈곤 및 소수의 사치의 폐지; 실업의 폐지; '노동하지 않는 자는 또한 먹을 수도 없다'는 정식에 따라 모든 능력있는 시민들의 의무적이고 명예로운 의무로서의 노동; 노동할 권리 즉 모든 시민들이 고용을 보장받을 권리; 쉬고 여가를 즐길 권리; 교욱의 권리 등등."(스탈린 선집, 2, 101) 마르크스는 노동을 모든 부의 원천으로 정의하는 고타강령의 논리적 결론은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추론한다:"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므로 사회 속의 그 어느 누구도 노동 생산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부를 얻을 수가 없다. 따라서 스스로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노동에 의해 사는 것이며 그의 문화 또한 남의 노동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고타강령은 마르크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변경없이 통과되었었다.

2.6.반스딸린주의적 급진 좌익의 노동 개념: 노동자 통제

스딸린주의나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급진적 좌익들 역시 '노동'의 역사적 특이성보다는 그것의 역사적 보편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노동의 특권화. 많은 역사적 노동자평의회들 역시 노동의 계획적 조직화의 기구로 전화된다. "생산 과정에 대한 노동자 통제에의 명령하달자의 의존과 임금 노동에 기반을 둔 그들의 평의회주의적 프로그램을 확인함에 있어서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는 자신들이 어느 정도로 평의회주의적 관점에 매달려 있는지를 보여주었는데,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그것의 구체적 연구들 중의 일부는 그 관점을 멀리, 말하자면 숙련 기술 노동자의 관점으로부터 멀리 이동시켜야만 했다. 전후 호황을 파국적 종말로 가져가게 되었던 관점과 투쟁들은 대중 노동자의 관점과 투쟁들이었다. 숙련 노동자의 급진적 관점이, 그/녀가 생산 과정 전체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자본주의적 기생충이 불필요하게 되는 노동자 통제의 개념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테일러화된 대중 노동자의 투쟁은 소외된 노동 과정 전체의 거부, 즉 노동 거부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다."(아우프헤벤, 쇠락의 이론)

3.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획기성

3.1.노동 거부론의 맹아: '일하지 말라'

이런 맥락에 비추어 볼 때, 프랑스 68혁명 당시 '일하지 말라'(상황주의자들)라는 구호의 등장은 획기적이다. "경제는 세계를 변혁하지만 그것은 오직 경제의 세계로의 변혁일 뿐이다."(스펙타클, 30) 이 말을 '노동은 세계를 변혁하지만 그것은 오직 노동의 세계로의 변혁일 뿐이다'라고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호는 아직은 직관적이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시간에 집착하는데 이 시간은 순환적 시간에서 해방된 최초의 시간이다.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비로소 일은 역사적 조건들을 변형시키는 노동이 된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을 가치로 여긴 최초의 지배계급이다. 부르주아지는...노동의 진보를 자신의 진보로 삼았다.(스펙타클, 119)" "이 비활동은 결코 생산활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않다. 비활동은 생산활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산의 필수품들과 결과물들에 대한 어색하면서도 감탄섞인 굴복이다"(스펙타클, 22) ""현재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즉 여가의 증대는 노동 내에서 이루어지는 해방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같은 노동이 창조하는 세계로부터의 해방도 아니다. 노동 속에서 상실된 활동이 노동의 결과에 대한 굴복 속에서 회복될 수는 없다."(스펙타클, 22) 노동 내에서 이루어지는 해방, 그것은 무엇일까? 드보르는 노동자평의회 속에서 노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해방을 찾는다. 그것은 대중 노동자들이 이룬 노동 거부의 성과를 다시 숙련 노동자들의 노동관 속에 포섭시키는 것은 아닌가? 일하지 말라는 소외된 노동에서 벗어나자는 마르크스의 생각의 단순한 계승이다.

*전 상황주의자 Bob Black: 만국의 노동자여 휴식하라.

3.2.이딸리아 자율운동과 노동 거부

"1970년대 동안에, 자율주의자들은 노동 거부에 관한 가장 발전된 이론화를 생산했다. 또 그들은 자본주의의 위기 및 프롤레타리아 주체성의 역동적 이론을 위하여 파국주의적 위기 이론에 대한 비판을 생산했다. 자율주의자들은 '사장들의 위기는 노동자들의 승리이다'라는 슬로건에서 예증된 계급 투쟁적 위기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그들을, 생산 관계에 의한 생산력의 질곡으로 초래된 자본의 쇠락에 의해 야기된 일반적 위기를 가지고서 자본의 내적 모순이라는 측면에서 위기를 설명하는 위기에 대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설명과 날카롭게 충돌하게 했다. 자본이 생산력을 속박한다는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이지만, 노동자계급이 강한 때에 그 계급은 자본주의적 의미로 이해된 생산력을 속박한다는 점을 망각한다. 노동자계급은 생산력의 발전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필요에 대립될 때에는 생산력의 발전을 속박한다.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항의 의미는 만인을 위한 노동이라는 사회주의적 꿈 속에서 망각되어서는 안된다. 네그리가 표현했듯이, "생산력의 해방: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가장 총체적인 형식 속에서 폐지에 이르는, 부정에 이르는 과정의 동력으로서이다. 노동-으로부터의-해방으로부터 노동을-넘어-가는 형식으로의 전환은 코뮤니즘의 정의(定義)의 중심, 핵심을 이룬다.""위기가 진척됨에 다라, 새로운 조류가 스스로를 연루시켰었고 구 좌파주의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노동 거부는 통화주의와 노동의 대규모 재부과의 맹습을 받고 비틀거렸다."(Aufheben, 쇠락의 이론)

4.노동 거부를 둘러싼 아우또노미아 내부의 논쟁

4.1.스펙트럼

(좌파)노동 일반의 거부와 노동의 삶으로의 통합(볼로냐, 호보, 클리나멘 지, 맛시모)
(중도파)소외된 노동의 거부(네그리와 하트)
(우파)노동 거부를 노동 시간 단축으로 양적으로만 이해(고르)

4.2.하트와 네그리의 노동 거부관

"작업(work; lavoro)의 거부는 결코 노동(labour; laboro) 그 자체의 거부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생산성, 창조성, 혹은 창의성(inventiveness)에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특수한 관계의 거부였다"(Hardt 1993: 114).... '노동 그 자체'라는 것이 계급 지배의 형식 속에서 추상 노동으로서가 아니라면 과연 실제로 존재했는가. 사회주의적 감수성의 일종에 근거를 둔 것

4.3.{클리나멘}지의 견해

밀라노에 근거를 둔 저널인 {클리나멘}의 편집자들은 '노동 일반'에 대한 비판이 아닌 임금 노동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계속 거부했다(Klinamen 1992: 56). 데 안제리스에 의해 취해진 태도 역시 비슷하며 그리고 그것의 언어 사용에서 거의 동일하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해방 일반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De Angelis 1994: 35)."

4.4.재연된 논쟁에서 호보의 입장

복권 사무실에 근무하던 나이든 여성 피고용인의 운명에 관한 논쟁: 복직인가 편안한 삶인가 그녀는 이른바 새로운 기계들을 작동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해고되었다. 이 일화에 대한 토론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빠도바 ECN의 호보(Hobo)가 끼여들어 '모든 사람이 노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덜 일하자'는 노선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 여성이 복직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싶지 않으며 오히려 그녀가 편안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싶다'(Hobo 1995).

4.5.고르의 양적 관점

노동 시간 단축

4.6.클리버의 종합

노동 거부는 노동의 창조성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의 종말이 산 노동의 특권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은 삶의 다양한 욕구들 중의 하나로 자리잡을 것이다. 이렇게 변형된 창의적 활동성을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노동은 자본주의적 상품 세계에서 의미를 갖는 추상, 광범위한 구체적 활동성(동사들)의 추상이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에 대한 양적 관점에 머물면서 그 질적 변형의 시야를 놓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마르크스주의 범주들, 자본의 위기, 오늘날 사회적 주체성의 구성])

5.노동거부와 자기가치화

5.1.네그리의 생각

네그리는 노동거부를 대중 노동자의 전략으로 이해하면서 사회적 노동자로의 계급 재구성의 결과 노동 거부보다 자기가치화가 주된 전략으로 대두된다고 본다.

그 논거: 오늘날의 노동이 비물질적 노동으로 전화됨으로써 가치가 노동 시간에 의해 측정될 수 없게 된다. 가치 법칙이 위기에 처하고 죽는다.

비물질적 노동 ---대중의 지성---사이보그---자기가치화

이런 관점에서 네그리는 오늘날 가장 생산적인 부문인 사회적 노동자가 혁명의 새로운 주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사회적 노동자 개념은 많은 빈 공간을 남기고 있다. 네그리의 생각 속에서도 그것은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네그리는 한 때 사회적 노동자를 학생과 정보기술 부문 및 행정 부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즉 사회적 노동자를 노동자의 특정한 계층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사회적 노동자의 헤게모니는 그 양적 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적 구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네그리와 아꾸아띠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사회적 노동자를 노동자의 특정한 계층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오늘날 노동자 구성의 질적 특징으로 정의하게 된다.

5.2.네그리에 대한 자율주의자 내부의 비판들

5.2.1.볼로냐의 네그리 비판

계급투쟁의 중심 지대로서의 직접적 생산의 영역에 대한 네그리의 포기가 '재앙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뿐이라는 볼로냐의 생각에 동의를 표하면서, 로마 분파는 그러한 차이는 더 깊은 방법의 차이를 깔고 있다고 믿었다.

5.2.2.스티브 라이트의 네그리 비판

만약 60년대 말에 네그리가 당시의 다른 노동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이한 노동자계급 층들의 특유성을 대중 노동자의 층들로 포섭하는 위험을 무릅썼다면, 70년대 후반의 그의 작업은 계급에 대한 이 부분적으로 구체적인 이해마저도 일반적(generic) 프롤레타리아트 속으로 용해시킬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완전히 자율적인 동기들'을 가진 상이한 주체들의 혼합물로서, 사회화된 노동자의 개념은 제한된 발견적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이제 유통과정의 모든 계기를 가치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는 공장-사회 관계를 둘러싼 노동자주의의 오랜 긴장을 날랜 이론적 책략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계급 형상의 묘사, 상당한 주의와 시간을 요하는 하나의 프로젝트는 경향을 현실로 와해시킴으로써 간단히 성취되었다.

네그리가 위기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개념규정들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동안에, 그 자신의 틀은 같은 정도로 파국론적으로 되었다. '권력의 균형은 역전되었다'라고 2만부나 팔린 1977년의 한 팜플렛에서 그는 썼다: "노동자계급, 그 계급의 사보타지는 더 강한 권력이며 무엇보다도 합리성과 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다. 이제부터 투쟁에 의해 생산된 이 역설을 망각하는 것은 이론에서조차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지배의 형식이 자기자신을 더욱 완전하게 하면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 텅비게 된다; 노동자계급의 거부가 더욱 성장할수록, 그것은 합리성과 기치로 더욱 충만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수이다."

5.2.3.G. Caffentzis의 네그리 비판

네그리는 '가치법칙이 완전히 부패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혹은 '가치법칙은 죽어가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시골 지역에서의 '뉴 엔클로져는 산업에서의 자동화 과정의 상승을 수반하며, 켬퓨터는 땀공장을 필요로 하고, 사이보그의 존재는 노예를 조건을 삼는다. 고기술 영역에서의 새로운 노동자의 성장을 자기가치화와 연결지은 것은 옳지만 그것은 산 노동의 자기가치화가 아니라 죽은 노동, 즉 자본의 자기가치화이다. 자본의 자기가치화는 지구적 프롤레타리아의 퇴락을 전제로 한다. 지구적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네그리의 망각은 계급의 가장 생산적인 요소들로부터 혁명적 주체를 종합해 내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공리의 하나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혁명과 생산의 방법론적 동일시는 역사 속에서 거듭 오류로 확인되었다. 1994년에 발간된 디오니소스의 노동이 그해에 발발한 사빠띠스따 봉기를 혁명적 투쟁으로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은 네그리가 산업 노동자 중심의 레닌주의를 계승하고 있다는 증거이다.'([노동의 종말인가 노예제의 르네상스인가? -리프킨과 네그리 비판])

6.삶과 자기가치화

삶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다양성의 시공간이다.
노동은 삶의 창조적 활동성의 부르주아적 포착형태이다.
노동은 가치화의 법칙에 종속된다.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가치화의 파괴, 가치법칙의 폐지, 삶의 노동시간 및 노동으로의 환원의 거부를 지향한다.
자기가치화는 거부를 통해 확보된 시공간을 채워나갈 수 있는 하나의 안내선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치화의 단순한 역전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다시 가치법칙의 덫에 걸릴 수 있다.

자기가치화는 가치화, 가치법칙과의 투쟁없이, 달리 말해 노동 거부 없이는 자기위안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치법칙의 종언이라는 테제는 위험하며 지구적 노동 현실에 대한 그룻된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가치법칙의 위기가 하나의 경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직 현실인 것은 아니다. 자본은 가치법칙을 부과할 길을 부단히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보화 역시 그 모색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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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슈타인과 사민주의 연구 경향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 연구경향을 중심으로

목 차


1.머리말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1)독일사회민주주의 역사적 발전과정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


4.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한국의 연구경향


5. 맺음말


* 영문초록(Abstract)


* 참고문헌.


1. 머리말



최근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통해 급속도로 해체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19세기 중엽 이후 출현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인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상황 속에서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온 흐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요구하고 있다. 전자는 최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나타나고 있으며, 후자는 서구 자본주의 진영 속에서 새롭게 발전한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관심 집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91년 이후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소개가 활발하게 소개되어왔다. 이에 비해 사회민주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경향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 발전해 왔는가를 검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위해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개념,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과 한국에서의 연구 경향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보다 깊이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개념



1)독일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기에 앞서 독일사회민주주의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고, 현재 사회민주주의를 어떻게 규정해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크게 3 단계의 시기를 거쳐 발전해 왔다.


첫번째 단계는 1890년대 중반에 베른쉬타인이 제기하여 일어난 수정주의 논쟁 시기이다. 베른쉬타인은 1896년의 독일사회민주당 슈투트가르트 대회에 제출했던 의견서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전면적 수정을 제기탖다. 베른슈타인은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에 따른 궁핍화 법칙, 자본주의 멸망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 등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들 둘러싸고 지지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들 사이에서 논쟁이 진행되었다.


두번째 단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나타났던 경제민주주의의 구상을 둘러싼 시기이다. F. Naphtali가 경제민주주의 구상을 창안하였는 데, 이것은 공적 개입에 의한 경제의 민주화와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전제하는 자주관리형태의 경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1925년 독일노동자 총연맹 브레슬라우대회에서 제창되어, 1928년의 함부르크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세번째 단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시장경제론의 전환을 둘러싼 논쟁 시기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면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공정한 사회질서의 건설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보호하고 장려하려 한다. 사회화론을 부정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1951년에 창립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의 '민주적 사회주의의 목표와 임무'라는 제목의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1959년의 [고데스베르크강령] 등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2) 사회민주주의 개념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 상황이 변화되어옴에 따라 그 안에 다양한 내용을 담아왔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의 사회민주주의와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 개념은 크게 다르다. 19세기 후반에 사회민주주의는 곧 맑스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전통 위에서 현대적 상황의 변화를 담은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의 독일사회민주주의의 개념을 토마스 마이어(T. Meyer)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이어는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요한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첫째, 사회주의는 윤리적 필연성이며, 사회주의는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정도에서만, 그리고 그 실천 형태로서만 존재할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는 건설적 사회개혁과 그것에 의해 가능해지는 노동자의 경험 및 지식의 증가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건설된다. 그것은 모든 영역에로의 민주주의의 점진적 확장이다. 세째,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사회화란 반드시 국유화나 전면적인 몰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생산수단에 대한 개별적 소유권을 다양한 사회적 이해의 담지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한 사회화란 반드시 시장의 철폐를 의미하지 도 않는다. 네째, 민주주의 국가는 사회 전체를 위하여 기능할 수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며, 그것 자체가 사회주의의 일부이다. 다섯째, 사회주의적 원리의 의미에서, 사회구조는 폭력적, 혁명적 반란에 의해서 건설적으로 개조될 수 없다. 사회주의적 사회 관계의 창조적 건설은, 민주주의 속에서만 점진적으로, 또한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된다.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 동향


  그럼 독일사회민주의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사회민주주의는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베른쉬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의 검토는 베른슈타인 당대의 수정주의논쟁에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의 기본적인 틀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19세기 후반 수정주의논쟁의 제공자인 베른슈타인의 기본 입장부터 시작해보기로 하겠다. 베른쉬타인은 자신의 수정주의적 입장을 1896-1898년 사이에 걸쳐 {신시대(Die Neue Zeit)}지에 기고한 [사회주의의 제문제]라는 연재기사에서 명확히 하였다. 이것은 보다 보충되어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과 사회민주당의 임무}로 출판되었다. 베른쉬타인은 이 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맑스주의를 새로운 상황에 맞게 '수정'하려 했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엥겔스의 사회주의의 이론적 전제와 독일사회민주당의 실천 사이에 하나의 모순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제 진부하고 공상적으로 된 이론을 검토하여 당의 실천 정책들과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단점으로 지나친 추상성과 이 추상성으로 인한 이론편향적 경향들을 지적하였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론과 현실분석 중 맞지 않는 것으로 붕괴론을, 즉,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체제가 그 속성상 머지않아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항상적으로 기대하는 견해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 붕괴론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내재한 본질적인 오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면서, 그 본질적 오류로 헤겔주의류의 변증법적인 선험적 연역론과 유물론적인 역사관, 운명론 및 결정론 등을 들었다. 베른쉬타인은 또한 사회의 양극화이론, 즉 점증하는 빈곤화와 중간층의 프롤레타리아트화 이론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경제적 위기의 점진적인 심화와 그에 따르는 혁명적 긴장의 고조에 대한 개념들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러한 테제들이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현실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일의 진행이 맑스가 희망하고 예견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는 생산의 집중도 없었고, 대규모기업에 의한 소규모기업의 소멸도 없었다. 상업과 산업에서도 집중은 매우 느리게 발생했고, 농업에서 소규모 생산단위의 소멸 역시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중간층이 프롤레타리아화 하지도 않았으며,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향상됨으로써 계급투쟁은 강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되었으며, 따라서 사회의 양극화 현상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이 수정주의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자, 일련의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바이레른 사회주의자이며 가장 열렬한 베른쉬타인 옹호자가 된 폴마르(Georg von Vollmar), 제국의회 의원과 바이마르 때 국회의장을 역임한 농업이론가 다비드(David), 1차 세계대전 발발 때 적극적인 활동을 자원한 이상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인 프랑크(Ludwig Frank), 윤리적 사회주의자인 아이스너(Kurt Eisner), 가치이론과 사회주의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경제학자인 콘라드 슈미트, 그리고 독자적으로 베른쉬타인과 유사한 논점에 도달한 캄프마이어(Paul Kampmeyer) 등이 그들이다. 수정주의적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월간 사회주의(Sozialistische Manlatshefte)}를 통해 자신들의 집장을 피력하였다. 비록 다양한 논제에 걸친 논문, 평론, 단상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폭력에 대한 반대, 윤리의 강조, 개량적 활동과 협동조합에 대한 찬양, 여성해방, 노조활동의 고무, 교육환경의 증진 등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러한 연합전선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와 비슷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던 개혁주의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을 지지하게 되면서, 수정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었다. 수정주의는 맑스주의에 대한 지적 비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윤리적인 사회민주적 세계관을 구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개량주의와 구별된다. 개량주의적 입장을 지니고 수정주의 진영에 합류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레기엔(Legien), 라이파르트(Leipart), 팀(Tim), 움브라이트(Umbreit), 엘름( von Elm) 등과 같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조합정책 수준에 머물렀다. 두 번째 부류는 에버트(Friedrich Ebert)같은 당직자들이다. 그들은노동조직의 성장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보았고, 정책간의 타협을 중요시하였다. 세 번째 부류는 가장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 입장을 보였던 쉬펠(Schppell), 칼베르(Calwer), 힐데브란트(Hildebrand) 등과 같은 보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선택적 관세에 대한 지지로부터 시작해서 세계대전 중의 가장 극단적인 사회제국주의로 완결된다. 이러한 입장들은 베른쉬타인의 기본 입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베른쉬타인은 사회제국주의와 명백히 다른 입장에 서있다. 수정주의와 개혁주의를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는 지지도 받았지만, 동시에 많은 비판도 받았다. 카우츠키와 로자 룩젬부르크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공격하는 데 가장 선두에 섰다. 이중에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이 가장 대표적인 비판으로 뽑히고 있고, 이후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로자 룩젬부르크의 견해에 많이 의존하게 된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제문제]시리즈에 주목하다가 {전제}가 출판되자 수정주의의 전 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그녀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에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사회개혁과 혁명을 사회민주주의 사상 내에 밀접하게 결합되어있는 것으로, 그리고 개혁을 수단으로 혁명을 목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녀는 이에 비해 수정주의는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회혁명 - 사회민주당의 목적인 - 을 폐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면서 비판하였다. 궁극목표는 바로 사회민주주의의 심장이므로, 그러한 목표를 폐기하려는 시도는 이미 전술적 수정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 모두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포기했으며 관념론으로 복귀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의 자본주의체제 분석이 그의 관념론의 지주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평가절하하면서 그것을 "적응성", "지속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자본주의의 적응성에 대한 베른쉬타인의 주장은 한낱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전례없이 명확해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했던 신용의 증가와 국제화는 실제로는 전유방법과 생산방법을 더욱 단절시키고, 소유관계와 생산관계를 더욱 괴리시킴으로써 오히려 자본주의의 몰락을 재촉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카르텔과 트러스트와 관련해서도 베른쉬타인을 비판하였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바와 같은 자본주의의 안정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그러한 현상 들은 극소수의 수중에 부가 집중되는 자본주의의 최종국면의 징후로 보았다. 그녀는 더욱이 공황이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베른쉬타인의 주장을 유치한 오류로 비판하였다. 1890년대의 상대적 번영이 장차 도래할 자본주의 대격동의 그림자를 가릴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번영은 생산과 교환간의 최후의 모순을 위한 전제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출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부분적이고 국지적인 공황이 무제적한적인 세계공황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수정주의의 기초를 검토한 룩젬부르크가 제출한 결론은 수정주의는 사회주의적 이론이 아니라 절충주의 철학을 지닌 부르주아 개량운동이라는 것이었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전술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수정주의자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적 활동, 사회개혁, 그리고 현대국가의 정치적 민주화라는 세 가지 동력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고자 한다. 룩젬부르크는 이러한 세가지 전술 모두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첫째, 노동조합은 맑스의 임금법칙을 파괴할 수 없다. 노조는 착취를 폐지할 수 없으며, 노동조합 세력이 무한히 확대될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낙관론은 근거가 없다. 노조는 그들이 ?하는 대로 생산계획에 영향을 행사할 수 없다. 노동자는 생산의 규모뿐만 아니라 기술적 방법에도 관여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은 수정주의자들이 산정했던 바의 공격적인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두번째, 사회개량은 장기적인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역시 한게가 있다.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양립될 수 있는 한에서는 개량을 허용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더 이상 개량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룩젬부르크는 사회개량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러한 착취에 질서와 규칙을 제공할 뿐이다."라고 보았다. 세번째, 수정주의자들은 민주화의 성숙에 의존하고 있는 데, 그러한 민주화과정은 식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국가 내에서,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허용되며, 지배계급들이 위협당할 때는 언제든지 폐기된다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 다음처럼 결론을 내렸다. 수정주의의 철학적 기초는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에 다름아니며, 그 전술은 사회주의적 승리를 잉태할 수 없으며, 그러한 승리는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인 권력장악으로서만 쟁취될 수 있다. 베른쉬타인의 전술은 결코 현존 체제 내에서의 사소한 개량이상을 끌어낼 수 없기때문에 수정주의자들의 목표는 급진파의 궁극목표와 현격하게 다르다. 그리고 수정주의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사회민주당은 수정주의가 없으면 그 지위가 한층 더 상승할 수 있다.


베른슈타인과 베른슈타인의 지지자들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이러한 비판은 형성중에 있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약점을 통렬하게 공격함으로써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세계대공황의 발발과 나찌즘의 대두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수정주의에 대한 룩젬부르그의 비판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결국 룩젬부르크의 입장은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사회주의 이론으로 간주하면서 부르주아 급진주의의 한 분파로 파악하려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릭케(Dieter Fricke), 라쉬짜(Annelies Laschiza), 라드뽅(Gunter Radczun), 그리고 테뵉(Manfred Tetzel)등이 이어 받어 발전시겼다.


1950년대초 이전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연구대상으로 선호되지도 못하였다. 그 결과 심지어 베른슈타인이이라는 커다란 명성에도 불구하고, 베른슈타인의 원저작들이 전집형태로 정리되지도 못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는 1950년대 초 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다가, 1970년대에서야 비로소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서 이 과정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하나의 독창적인 새로운 포괄적 체계로 파악하고자 한 대표적 학자로 피터 게이를 들 수 있다. 게이는 19세기 후반에 수정주의는 시대적 상황의 반영으로서 불가피한 것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 베른슈타인의 공적이라고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만약 베른쉬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기의 전환기에 독일의 정치.경제적 조건은 개량주의적 이론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정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은 진기한 이론이라고 깜짝 놀란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상황의 이론적 인정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수정주의가 즉각적인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이론이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주고 아울러 맑스주의가 그랬던 것 처럼 논리적인 체계로 모든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경쟁적인 개념구조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터 게이는 베른슈타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었던베른슈타인에 대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을 재비판하였다. 피터 게이는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해 다음의 네 가지 점에서 비판을 가하였다.


첫째,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폐기'를 너무 멀리까지 끌고가 버렸다. 사실 맑스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주의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녀는 투쟁 자체를 문제시하는 쉬펠(Schipell)과 베른쉬타인의 이론 비판을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차이를 충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두번째,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그녀의 이론적 주장은 프롤레타리아가 실제로 자신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가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 베른쉬타인의 이론구조가 그 취약성으로 곤란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현실감각은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그의 수정주의는 노동자들에게까지 파급된 번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세번째, 로자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은 독일은 물론이고 여타 국가에 대해서도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경직된 혁명적 사고 패턴은 영국노동계급의 평화적인 권력획득을 부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기득권 계급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담보를 과소평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리하여 베른슈타인이 독일적 상황에 대해 오판했던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녀는 영국적 상황을 오판했던 것이다. 네째, 혁명적 전술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옹호는 대책없는 모순들을 잉태한다. 그녀는 특정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염두에 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블랑키주의적 쿠데타는 노동계급에게 심각한 불행을 안겨주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장악 시기, 혁명의 형태 등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베른슈타인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녀의 사상 속에서도 혁명이라는 난제와 개혁이라는 난제 간의 딜레마는 결코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한 피터 게이의 이러한 반비판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이외에 그노이스(Gneuss)도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당 내에 존재하는 개혁주의적 입장의 체계화의 산물로 긍정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다가 1970년대 들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유로코뮤니즘과 유럽사회주의가 대두된 1970년대에 바우어(O. BGauer) 르네상스와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사회민주주의 연구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 바우어 르네상스는 유로코뮤니즘의 대두에 따른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의 재평가와 관련이 있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는 1969년 이후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권과 관련이 있다. 베른쉬타인 연구는 1970년대 초 이전까지는 매우 적었으나, 197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활성화되었다. 1977년에 베른쉬타인을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가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이것을 입증해준다. 이 대회 의장을 맡았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의 하나인 토마스 마이어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20세기의 전환기에 가장 올바른 입장으로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사회중의의 원리와 실천 간의 괴리가 점점 커지는 상황속에서 수정주의가 사회주의 노동자운동의 내부로부터 대두되었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의 모순을, 이론적 기반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의 실제적 발전과의 현실적 관련에 기반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수정주의는 결코 반 마르크스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건설적인 개량작업을 방해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요소들을 비판하고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이어는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단순히 수동적 입장에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역사적 시대상황에 적응하기위해 고안된 진일보한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으로 평가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새로운 평가들을 미 출판된 초고와 편지들을 통해서 뒷받침하는 작업들과 정통적 입장에서 계속 비판하는 시각들이 서로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다.



4.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 연구 동향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여러가지 요인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후 공간 시기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압도되어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1950 년대에는 조봉암의 진보당을 통해 사민주의적 입장이 잠시 현실화되다가 '진보당 사건'으로 좌초되었다. 5.16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 마저도 부인되는 열악한 현실 상황에서 사민주의는 현실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연구되기 어려웠다. 다만 이 시기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에 참여하기 위한 일환으로 관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형식적으로 존재했었을 뿐이다.


한국에서 사민주의를 하나의 현실적 대안으로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 시기는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한국사회가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사회라는 인식이 확대되었고 , 이에 따라 한국에서 서구 자본주의국가와 같은 '개량'의 가능성이 존재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가능성 논의는 1980년대 후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한국에서 수입되는 과정 속에서 , 그리고 90년대 초 현존사회주의가 해체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본격화되었다.


현실 영역에서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과 영향이 적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사회민주주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동안 김윤환, 안병직 등이 열악한 현실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이후 사민주의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전문적으로 이루저어지기 시작했다. 나라 별로는 스웨덴, 영국, 독일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 중에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엽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다. 대표적 연구자들로 박호성, 강신준, 강철구, 최영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사민당일반에 대한 개설적 연구이거나 한 특정부분에 관한 부분적 연구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사민당에 대한 한국에서의 연구는 아직 초보 단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사민주의 초기의 핵심적 문제의 하나인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의 형성과정과 쟁점 들을 둘러싼 논의들은 거의 소개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5.맺음말



이상으로 독일과 한국에서의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았다. 독일에서는 1970년대 후반 이후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통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한국에서는 1990년 대 초 이후에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동안 기회주의, 개량주의, 그리고 독창적인 내용이 없는 절충의 산물이라는 기존의 견해들이 비판적으로 검토되었다. 동시에 독일사회민주주의의 원조가 되는 베른쉬타인을 하나의 독창성있는 포괄적인 체계로 파악하려는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한국에서도 1990년대 초 이후의 급변하는 세계적 상황 속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지니는 장점들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여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는 이제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확인되었다. 앞으로 보다 많은 심도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이러한 부분이 채워진다면 20세기 사회사상사를 한국의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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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슈타인]

Eduard Bernstein



                

0. 들어가며


1989년 동유럽과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민주적 통제의 부재, 경직된 경제체제와 자율적 참여로부터 단절된 정치체제 등의 문제점을 핵심적 모순으로 하여 붕괴되었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프란시스 후꾸야마는 ꡐ역사는 끝났다ꡑ며 시장경제의 영원한 승리를 선언했고, 90년대는 개방, 탈규제화, 단일 시장화의 시대로 되면서 전세계는 신자유주의의 세상이 되었다. 소련의 국가주도의 사회주의가 경직성과 그에 따르는 현실적 어려움, 페레스트로이카 등의 외부적 충격으로 붕괴되었다면, 그와 더불어 사회주의적 이상을 지닌 또 다른 한 축인 사회민주주의는 어떠한가.

80년대 정세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유럽 좌파정당의 실각과 미국과 유럽, 그리고 영국에서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경우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의 변혁이 가능하리라는 이념 자체의 문제와 궁극 목적과 수단과의 딜레마, 또한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자기 정체성의 동요 등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득표기반의 확대와 연립정부에의 참여가 가져온 제약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의 탈과격화와 자기정체성의 동요를 가져온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민당들이 민영화 등 시장경제적 요소를 과감히 도입하고 복지수당 삭감을 비롯한 긴축정책을 표명하며 좌파정당에서 탈피해 사실상 중도정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토론과 득표활동, 의회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권력장악이라는 목적과 민주적 방법을 통한다는 원칙 사이에 딜레마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헤롤드 라스키는 ꡒ자본제적 민주주의는 투표라는 돌발적 행위를 통해 유권자가 섣부르게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결정하는 것까지 용납하진 않을 것ꡓ Herold Laski, 1935, 'Democracy in crisis',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두 경로가 이와 같이 모두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과연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질서는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세계 곳곳에서 폭력적 방식에 의한 세계화가 진행되고 자유시장제도에 의한 여러 가지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과제물에서 체제대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이론을 최초로 이념적 정식화한 베른슈타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로부터 현재 나타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이념적 근원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것이다.



1. 생애


베를린 시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은 1850년 1월 6일 베를린 중하층계급 거주지에서, 배관공이었다가 후에 철도 기관사가 된 쟈코프 베른슈타인(Jakob Bernstein)의 일곱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베른슈타인은 명석한 학생이었지만 김나지움을 졸업하지는 못하고, 열 여섯 되는 나이에 베를린 은행의 수습사원이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 두게 된다. 그 후로 공식 교육 없이 혼자 공부하는데, 그것이 대학출신 지식인들로 이뤄진 사회주의 운동권 내에서 이론가로 활동하는데 큰 걸림돌은 되지 않았다. 1869년 말 수습사원을 마치고 다른 은행에서 행원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1878년 독일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1870년대 초, 그와 몇몇의 동료들은 ꡐ유토피아ꡑ라는 이름의 소그룹 토론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사회주의 이론을 얕은 수준에서나마 접한 베른슈타인은 당시 라살레주의자들과 치열하게 다투고 있던 아이제나허에 입당했다. 1872년 2월의 일이다.

베른슈타인이 사회민주당원으로 첫발을 내딛던 1870년대 초반 독일 사회주의는 라살레주의자와 아이제나허로 분열되어 소모적인 싸움을 하던 시기였다. 이는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 탄압정책 1871년 이후 물가상승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개되자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발의하고 노동자조직과 좌파 출판물에 체계적이고 전횡적인 탄압을 가했다. Franz Mehring, Geschichte der deutschen sozialdemokratie, Ⅳ, pp.39-48.

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어려움에 처하게 했는데, 그 결과 1874년 선거에서 라살레주의자와 아이제나허 모두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 베른슈타인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중연설 활동으로 당 지도부 내에서 교제범위를 넓혀 나갔고 베벨과도 친교를 갖게 된다. 이론적인 차이를 넘어 서로에 대해 저열한 인신공격까지 퍼부었던 두 분파는 1874년 제국의회 선거결과를 두고 통합을 고려하게 된다. 마침내 1875년 2월 14일과 15일에 걸쳐 고타(Gotha)에서 최종적으로 당대회가 열리고 5월 22일에서 27일에 걸쳐 통합당대회를 개최하고 고타강령을 채택함으로써 통합된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이 출범했다. 엥겔스는 고타강령 초안을 보고 맑스주의 원리가 위태롭게 된다는 견지에서 통합에 반대하는 편지를 베벨에게 보냈고 마르크스는 브라케에 보낸 ꡐ고타강령 비판ꡑ에서 ꡐ이 강령은 훌륭하기는커녕 라살레주의에 대한 신앙을 떨쳐내지도 못했다ꡑ고 논평했다.

후에 베른슈타인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이론적 수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대체로 당시의 아이제나허들은 맑스의 이론이 지닌 역사적, 사회적 기본이념의 깊은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사회주의관은 이론적으로 맑스보다는 라살레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그들이 라살레가 요구하고 제안했던 어떤 것들을 거부하긴 했지만, 이들은 라살레의 사상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주장, 즉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사회주의 운동 시기에서 유래하는 주장들을 토대로 하여 자신들의 사회주의 이론을 수립했다. 그러므로 고타 강령은 맑스가 말했던 종류의 라살레주의자들의 승리가 아니라, 아이제나허들이 가지고 있던 불충분한 이론적 통찰의 결과였다. Bernstein, Sozialdemokratische Lehrjahre, pp.45-46



신당은 비스마르크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1877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베를린, 함부르크등 도심지에서 우세를 보이며 9%의 득표율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 동안에 베른슈타인은 은행원으로 계속 일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877년 선거에서도 자기 몫을 다했다. 그러나 1878년 빌헬름 1세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을 구실로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시작했고, 마침내 1878년 9월 19일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입법되었다. 1878년 11월, 베를린에 준계엄이 포고되고 78명의 사회민주당 당원이 수도에서 추방되었다.


쥬리히 시대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발효되기 직전, 스위스에 있던 부유한 청년 사회주의자 회흐베르크로부터 비서직을 제의 받고 1878년 10월 12일 베를린을 떠나 스위스의 루가노로 이주했다. 회흐베르크는 엥겔스의 조소의 대상이 될 만큼 별 볼일 없는 공상가였는데, 그런 그의 일면은 사회주의가 인텔리겐차를 변화시킴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는 그의 발상에서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그러한 발상에 신랄한 비난을 퍼부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법화된 당은 좀 더 적극적으로 선전활동에 나설 필요를 느꼈는데, 이러한 필요에서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쥬리히에 파견된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주목하고, 쥬리히에서 중앙당신문을 창간할 것을 제안했다. 베른슈타인은 1879년 쥬리히에서 ꡐ사회민주주의자ꡑ가 창간될 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881년 1월 편집장으로 임명되면서 편집자로서의 경력을 쌓는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베른슈타인의 일시적 외국체류를 망명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쥬리히는 런던과 더불어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중심지여서 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과 사회민주주의 활동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불법화된 상황에서 외국에서 비밀당대회를 개최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활동을 벌인다.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은 당 동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ꡐ사회민주주의자ꡑ를 후에 엥겔스가 언급한 대로 ꡐ당 역사상 최고의 신문ꡑ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또, 사회주의자 탄압법 기간 중 처음으로 진행된 1881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12명의 의원을 진출시키며 승리를 거두고, 이에 자극 받은 비스마르크는 국가의 입법에 의한 노동자의 복지향상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1883년 의료보험 입법, 1884년 사고보험법, 1889 노후보험법을 입법한다. 모든 방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1884년 선거에서도 승리한 사회민주당은 그러나 곧 당내 좌우파간 분열이 노골화된다. 분열은 독일의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식민지 팽창에 대한 입장에서 불거져 나왔는데, 다수파는 식민지 확장이 독일노동자들의 고용기회를 창출한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선로 건조에 찬성했고, 베벨을 포함한 소수파는 모든 선로개척에 반대했다. 베른슈타인의 ꡐ사회민주주의자ꡑ또한 소수파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러한 분열양상은 나중에 사회민주당을 심각한 분열에 빠뜨릴 제국주의의 문제가 처음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저널리스트로서 성공을 거두고 있던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은 1886년 결혼을 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1887년 의회선거에서 다시 한번 10%의 득표율을 보이며 승리한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베를린에 있는 스위스 대사에게 압력을 가하고, 곧 있을 독일-스위스간 무역협정 개정에서 스위스 측에 양보를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쥬리히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베른슈타인은 런던에서 ꡐ사회민주주의자ꡑ를 계속 발행하기 위해 1888년 5월 12일 스위스를 떠났다.


런던 시대

베른슈타인은 런던에 체류하는 기간, 마르크스주의에 최초의 체계적, 이론적 수정을 가하면서 국제적 인사가 되었으며, 17세기 영국 내전에 대한 뛰어난 역사저작을 간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런던에 체류한 기간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으로 보기도 한다. 런던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비스마르크는 실각하고,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1890년 폐지되기에 이른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더 이상 해외에서 당 기관지를 발행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여전히 수배자였던 베른슈타인은 런던에 머물면서 ꡐ전진ꡑ의 런던 통신원과 카우츠키가 발행하던 이론지인 ꡐ신세대ꡑ의 정규 기고자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주요조항이 폐지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몇 가지 결과를 낳았다. 그 중 하나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탄압기를 거치면서 득표수를 3배 이상 증가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민주당이 의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정당으로 된 것이다. 새로워진 합법정당은 1890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20% 득표수를 보이며 경의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점차로 개량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개량화의 움직임을 감지한 베벨은 1891년 에어푸르트 당대회에서 기존의 라살레주의적 요소들을 일소하는 새로운 당 강령을 채택하게 한다. 에어푸르트 강령의 이론부분은 카우츠키가, 전술부분은 베른슈타인이 책임집필했으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견지해 불과 몇 년 후 시작될 수정주의 공세에 저항해 스스로를 지탱할 기반이 되었다.

1890년대는 베른슈타인이 그의 수정주의 이론을 만들어낸 중요한 시기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유언 집행인으로 지목될 만큼 엥겔스의 신임을 받았던 그가 베른슈타인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는 최초의 논문을 엥겔스의 사망 1년 후인 1896년에 낸 것으로 보아 엥겔스와의 관계 때문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이탈이 늦어졌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피터 게이, ꡐ민주사회주의의 딜레마ꡑ 한울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게 되는 계기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영국의 개량주의적 분위기를 들 수 있는데, 베른슈타인은 자기 조국과는 달리 공장법이 제정되어 있고 경찰이 파업을 파괴하지 않는 영국의 상황을 보면서 평화적으로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1890년대 유럽은 근현대사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시기였고, 영국의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또한 페이비언들의 점진적인 방법이 그가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에 그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의 기술에서 수정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나던 시점에 그의 고민을 들여 볼 수 있다.


저의 이러한 ꡐ털갈이ꡑ는 바로 장구한 이론적 진전의 결과이며, 이러한 전환이 특정주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자체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기까지 오랜 고민이 있었습니다. 2년 전까지 저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가르침을 적용함으로써 그것을 실천적 현실에 끼워맞추고자 했습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이론을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것은 우둔한 짓입니다.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타당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분별해 내는 것입니다. Bernstein to Bebel, 1898. 10.20., Bernstein Archives


ꡐ마르크스의 이론이 타당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ꡑ을 분별하고자 했던 베른슈타인의 사고의 전환은 1896년에서 1898년까지 ꡐ신세대ꡑ지에 게재된 ꡐ사회주의의 제문제ꡑ라는 논문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사회주의에서 헤겔주의의 문제, 헤겔주의 대신에 윤리적 측면을 강조할 것, 프롤레타리아 궁핍화 테제, 자본주의 붕괴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때의 논조는 비교적 조심스러웠으나, 그의 논문이 사회주의의 궁극 목적을 무시하고 있다는 영국의 사회주의자 벨포트-백스의 지적에 대해 ꡐ나는 사회주의의 궁극목적에 관심이 없다. 다만 내게 의미있는 것은 단지 운동 자체이다.ꡑ라고 대답함으로써 폭풍 같은 논쟁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격렬하게 진행되는 논쟁 속에서 카우츠키와 베벨에게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라는 요구를 받고 1899년 3월에 ꡐ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ꡑ라는 책을 내게 된다. 후에 이 책은 수정주의의 경전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베벨과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의 ꡐ수정ꡑ을 격렬히 비판하고, 스스로 당을 떠나주기를 요구했으나 끝내 그를 제명하지는 않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결국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원으로 남은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 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이 현안이 되어 있던 1901년 1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귀국한 베른슈타인은 1902년 3월 선거에 출마해 의회로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1912년 외교정책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는 의회에서 별로 주목받는 인사가 아니었다. 계속된 수정주의 논쟁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당내 급진파들은 베른슈타인의 제명을 요구했으나, 토론 끝에 급진파는 제지당하고 또한 수정주의자도 견책을 받는 등 결론은 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행동은 수정주의식으로 하고 동시에 수정주의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급진파와 가까워지게 된다. 이는 베른슈타인이 대부분의 동료 수정주의자들과 달리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베른슈타인은 황제가 주장하는 ꡐ영국의 위협ꡑ이라는 것은 조작된 것이고 독일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군비증강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동맹이라고 주장, 외교정책 논쟁에서 뛰어난 발자취를 남긴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일어난 1914년, 그는 전시공채 발행에 대한 태도에서 판단착오를 일으킨다. 베른슈타인은 사라예보 암살사건과 프랑스 사회주의자인 조레스 피살사건의 배후를 러시아로 보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개전 초기의 유유부단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는 전쟁에 대한 반대의사를 나타내고, 전시공채 발행 투표에서 기권하는 등 동료 수정주의자들과 관계가 소원해지게 된다. 한참을 망설이면서까지 당이 분열되기를 원치 않았던 베른슈타인은 그러나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제 2인터네셔널을 붕괴시키고 온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고 간 정권을 지지한 독일 사회민주당과 1916년 3월24일 결별하게 된다.

말년의 베른슈타인은 점차로 고립되어 갔다. 당으로 복귀했으나 당 지도부와의 접촉도 단절되고 1920년에 의회에 다시 들어갔지만 주된 활동은 집필활동과 후대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말년에 정치적으로 무력해진 그는 히틀러 집권 6개월 전인 1932년 12월 18일 눈을 감았다.



2. 사상


수정주의 등장의 배경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변화된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공식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실천과 대비되는 개량주의적 실천의 이론적 기반으로 자리잡게 된 사상체계라고 규정할 수 있다. 송 병헌, 1999, p90-91, 당대

또한 그에게서 파생된 사회민주주의는 ꡒ사회주의를 목표로서 주장하고 그러한 사회주의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이상적 정치과정으로서 의회민주주의를 고수하는 운동을 가르킨다ꡓ Wilde, L. 1994, Modern european socialism. Aldershot: Dartmouth publishing company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를 ꡐ수정ꡑ하게된 계기를 베른슈타인 개인의 성향과 그가 망명생활을 하던 영국의 개량적 분위기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으로 수정하겠다고 나서기 이전부터 이미 독일 사회민주당의 활동은 개량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베른슈타인은 수정주의를 들고나서자마자 많은 수의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남부 독일지역 당원들의 경우, 1890년대 초반의 농업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선거인의 다수가 소농이기 때문에 소농에 대한 지원방침을 강령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개량적인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정주의의 등장배경을 좀 더 구조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베른슈타인이 수정주의적 사고를 하게 되는 1800년대 후반에는 자본주의가 성숙되면서 마르크스의 시대와는 다른 양상이 벌어진다. 그것은 사회보험에 포괄되는 인원의 증가, 신 중간계층의 등장, 노동자층의 생활수준의 향상 등이었는데 이러한 현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적 붕괴론에 대해 의심을 갖게 했다. 이런 측면에서 수정주의를 1890년대의 경제적 호황기의 이론적 반영이라고 하는 평가도 있다. Steinberg, 1976, Sozialismus und deutsche Sozialdemokratie. s. 37

또한 정치적으로는 비스마르크의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의회 내에서 세력을 성장해 나간 상황에서 전술적으로 의회활동에 점차 더욱 치중하게 되는 경향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1890년대이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국가로의 통합가능성에 공감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개량적 조류의 확산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뿐만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 라살레주의, 페이비언주의도 베른슈타인에게 영향을 준 조류들이다. 거기에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의 일부 부분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인용하고 재해석,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다.


부르조아지 및 정부는 노동자당의 비합법적 활동보다는 합법적 활동을, 반란의 모든 결과보다는 각 선거의 결과들을 훨씬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또한 투쟁의 조건들이 본질적으로 변화하였다. 1848년까지 모든 곳에서 최종적인 승패를 결정하였던 구식의 폭동이나 바리케이트를 친 시가전은 상당한 정도 쓸모가 없게 되었다.

                                            -엥겔스, 1895, ꡐ프랑스 계급투쟁ꡑ에 붙인 서문.


결론적으로 베른슈타인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과, 실재하는 의회내에서 벌이는 개량적 활동과의 괴리를 없애기 위해 경직된 이론에 수정을 가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정주의의 이론적 전개

에어푸르트 강령의 예상과는 달리 19세기 말 자본주의는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하고 있었다. 1893년에서 1902년 독일의 산업생산률은 45% 증가했는데 이는 186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이와 같은 상황과 더불어 선거에서의 계속되는 승리를 보며, 붕괴론적 전망을 기본으로 한 에어푸르트 강령의 사회혁명론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의회 민주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달성 할 것이라는 개량주의적 전술의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전략은 합법적 틀 안에서 다양한 계층들을 노동자와 사민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되었고, 또한 이론은 변화된 현실에 맞추어 ꡐ수정ꡑ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변화된 현실이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경제의 집중과정을 통해 소기업이 몰락하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생, 유산자와 무산자의 차이가 확대되어 마침내 붕괴한다는 것인데, 베른슈타인이 보기에 현실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기업의 집중화가 일어나긴 했으나, 소기업이 몰락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광범한 중간계급과 새로운 소기업의 등장으로 붕괴론적 예견과 어긋나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ꡒ더 이상 붕괴론적 사회관은 현재의 발전하는 사회에 전혀 맞지 않는다ꡓ E.Bernstein, 1908, 'Zum Reformismus'. Sozialistische Monatshefte, ?,3, S. 1402

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현실의 상황에 대해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붕괴론을 부정한 베른슈타인은 계층변화의 양상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갖게 된다. 그것은 카우츠키식의, 혹은 더 나아가 마르크스-엥겔스의 계급관점에서 이탈하는 것인데, 결정적으로 정통이론의 계급 양극화론과 프롤레타리아트 궁핍화론을 부정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보기에는 계급의 양극화론은 현실을 무시한 극도로 단순한 관점이며, 현실의 상황은 오히려 자본주의 집중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의 숫자가 늘어나며, 궁핍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체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베른슈타인은 자본가와 고소득자를 거의 등치시키고 있다. ꡒ현실에서 자본가의 수는 경제기업의 강력한 집중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 증가해 왔다. 따라서 프로이센에서는 50만 마르크 이상의 재산 소유자 수가, 소득통계가 최초로 이루어진 1895년부터 1914년까지 50%이상 증가했으며, 최상위 소득계층은 더욱더 강력하게 늘어났다.ꡓ Bernstein, 1923, 'Die nachsten moglichen Verwirk- lichungen Sozialismus' Der Sozialismus einst und jetzt. S. 129

이렇게 자본가의 개념을 확장시키다 보니, 시민계급의 내용을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외한 사회의 상당수 구성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게 되었고, 계급투쟁론에서도 ꡐ계급투쟁과 타협은 결코 절대적 대립물이 아니다. 이것들은 운동의 형태들이며 운동만이 영원한 것이다ꡑ Bernstein, 1901, 'Classenkampf und Compromise' S.162

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만약 현실에서 중간계층이 소멸하지도 않고 오히려 증가한다면 노동자-자본가 계급대립이 첨예화되어 전통적 의미의 산업노동자들의 숫적 증가에 의한 정권장악이라는 에어푸르트 강령에서의 사회주의 전망의 타당성에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베른슈타인에게는 노동자는 아직 사회주의를 달성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인구의 작은 부분이며, 단일한 이해와 요구를 지닌 그러한 덩어리도 아니었다. 이런 발상에서 베른슈타인의 현실 개량적인 전략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사회주의 달성의 대안적인 전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확대였다. ꡒ민주주의는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다. 곧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획득하는 수단이며,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형태이다.ꡓ Bernstein, 1977, 'Die Vo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 Berlin: J.W.H. Dietz S. 134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속에서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공장법의 제정을 두고 보통선거권의 획득에 의해 노동자 권리의 현실적 성장이 가능해졌으며, 좋은 공장법에는 공장 전체를 국유화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회주의가 들어있다고 언급했다. 베른슈타인이 이처럼 중요하게 여겼고 사회주의 실현의 방도라고 본 개량은 과연 어떤 개념인지는 다음 언급에 나와 있다.


바로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작은 활동이다. 현대 노동운동의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센세이셔널한 전투가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씩 더 강인해지는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다가오는 지위이다. Bernstein, 1901, 'Zusammenbruchstheorie und Colonialpolotik: Nachtrag' Zur Geschichte und Theorie des Socialismus: Gesammelte Abhandlungen. S. 246, 247



또한 그는 사회주의의 달성이 자본주의의 위기와 그에 따른 긴박한 붕괴상황이 아닌 작은 규모의 현실적 진전에서 반드시 올 수 있다며 개량 가능성에 대해 낙관주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념은 동시에 사회에 대한 진화론적 신념이 수반된 것이다.

또한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수정주의적 전망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윤리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붕괴론을 부정한 그는 사적 소유권이 보장된 상태에서의 일종의 혼합된 사회주의 개념을 내세웠고,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에서처럼 필연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ꡐ윤리적 요소ꡑ에 의지한 것이다. 그는 정의에 대한 관념이나 윤리적 이상이 사회주의를 이끌어 내는 추동력이며 지속적인 대중행동을 위해서는 ꡐ도덕적 충동ꡑ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사회주의 개념규정은 정치, 사회조직에 대한 규정보다는 사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의 형태로 보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회주의를 ꡐ윤리적 사회주의ꡑ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회주의 규정은 자유주의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듯이 사회주의 달성에서 시민사회에서 독립적인 집단간의 연대성이 그토록 중요하며, 개인의 권리, 동등한 자유와 특권의 폐지 등 윤리적 이상이 사회주의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자유주의와 이념적으로 무척 유사한 것이 된다.


수정주의 비판

베른슈타인이 상정한 수정주의적 사회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의사결정 과정을 통한 입법으로 소유권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이뤄내는 체제이다. 자본주의적 발전과 더불어 ꡐ사회적 연대ꡑ로써 점진적으로 그러한 이상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는 진화론적 신념을 담은 것이다. 그러한 그의 수정주의가 지니고 있는 한계지점은 무엇인가.

먼저 진화론적 관점에서 비롯된 개량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를 들 수 있다. 그는 기존 질서 안에서 개량적인 활동이 ꡐ누적ꡑ되어 가는 것에 대해 과대평가했다. 또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질적 단절점을 무시함으로써 사회주의라는 목적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관점은 생산 및 소유 관계에 따르는 계급모순을 무시한 것으로, 역사를 경제적 진보와 더불어 발전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진화론적 관념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또, 그의 진화론적 관점은 식민주의에 대한 긍정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발달된 선진 공업국가에서 의회주의를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후진지역에서의 사회주의 성립의 가능성이나, 제3세계 식민지국가의 민족해방운동의 진보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베른슈타인에게 식민주의는 선진국의 제도와 산업을 식민국가에 이전시킴으로써 식민지에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발상이다. 한국의 경우에서는 6,70년대 파시즘적 성장을 옹호하는 경제사가들이 역사발전에 있어서 질적 차이를 무시하고 양적 성장을 중심으로, 일제 식민지 시기를 성장의 시기, 근대화의 시기, 6,70년대의 경제성장의 밑바탕이 되는 시기로 규정하면서 긍정적이며 진보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른슈타인의 사상과 부르조아적 자유주의와의 친화성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베른슈타인의 계급관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는 자본가를 생산수단 소유의 관점이 아닌 화폐의 소유여부에서 바라보아, 시민계급과 자본가를 결정적으로 혼동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는 중산계층의 계급적 지위와 역할, 성격을 정확히 규정하지 않고, 신 중간계층의 진보성에 대해 근거없이 낙관함으로써 노동자-자본가간의 원천적 모순을 간과했다. 게다가 그는 노동계급에 대한 이상화된 관념- 부르조아지, 성숙한 노동자, 중간계급간의 사회적 연대라는-을 지녔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실 예로, 그가 사망한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나찌가 집권했는데, 이는 신 중간계급의 진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체를 확인하기 힘든 것이며 얼마나 유동적인 것인지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상의 추상성과 모호함, 그리고 ꡐ윤리적 사회주의ꡑ라는 개념은 독일 사민당의 체제 안주적인 실천을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결국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 구상은, 자본주의 내에서의 사회주의의 점진적 성장이라는 낙관론적 신념에 포박되어 개혁을 진전시키기 위한 현실정치적 고려와 계급정치적 고려를 결여한 ꡐ진화론적 개량주의ꡑ로 귀결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송 병헌, 1999,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 당대, p243




3. 나오며


지금까지 베른슈타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수정주의적 사상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서유럽 사민당의 사상적 좌표가 되어 왔고, 현재는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자기 정체성 상실과, 목표와 수단간의 딜레마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개량주의적 경향은 비단 서유럽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그것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 지면상의 한계와 본인의 역량의 한계로 학생운동권에 한해, 베른슈타인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으로 이 과제를 마치고자 한다.

한국의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먼저 제3세계 국가로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변화를 추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제3세계 국가들이 변혁운동에서 승리하는 과정은 주로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통일전선체와 주로 외세와 결탁된 소수의 지배세력간의 싸움에서 강력한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한 반외세 진영이 대다수 민중의 지지를 근거로 지배세력을 정치적으로 왜소하게 만들고, 전민봉기를 통한 것이었다. 물론 2000년대 한국의 상황을 베트남이나, 대장정 당시의 중국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나,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서유럽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동유럽과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운동권 사이에서는 ꡐ의회환상ꡑ이 일정정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른바 민족해방계열이나, 21세기 진보학생연합 계열, 민주민주계열을 상관하지 않고 나타나는 경향이다. 한국사회를 절차적 민주주의가 보장되어 있고 외부로부터의 영향에도 비교적 독립적인 시민사회로 보는 관점에서 섣부르게 의회주의로 이행한 것인데 이에는 논란의 여지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 구체적 사례를 한 두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97년 대통령 선거, 그리고 2000년대.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우리 국민들의 변화된,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소중한 바램대로 싸워야만 합니다. 국민들의 바램대로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해 민중들이 믿을 수 있는 민주적 정권을 세우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염원과 같이 진정한 국민들의 편,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국민의 대안으로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정치세력화를 해야 합니다. 97년 대통령 선거,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독자후보를 추대하여 선거에 임하고 여기에서 얻은 성과와 신뢰를 바탕으로 민족민주운동의 정당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당을 중심으로 투쟁하며 2000년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집권을 향해 뛰어야 합니다.

내년 대선 투쟁. 전국연합과 민주노총이 공동추대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독자후보와 함께 합시다. 우리의 후보와 함께, 국민들과 함께 자주 민주 통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선전합시다. 그리고 모든 진보진영이 철통같이 단결해 투쟁해서 8%이상을 득표합시다. 이렇게 투쟁하면 내년 대선은 우리 민족민주운동진영 정치세력화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입니다. 1996, 40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자료집 ꡐ민중과 함께 승리하는 한총련ꡑ 김경수, 박상진 선거운동본부, p41 


이들은 민족해방계열 내에서 ꡐ사람사랑계열ꡑ이라고 불리는 소수의견을 내놓았던 사람들로, 92년 대선 까지는 비판적 지지론을 폈으나, 96년 4.11 총선에서는 민족민주운동이 ꡐ국민정당ꡑ건설로 일대 도약을 이뤄낼 것이라고 주장하며, 지역별로 ꡐ진보적ꡑ인 후보들에 대한 지원사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97년 대선에서는 국민승리21 지원사업을 하며 민족해방주류의 입장과 차이를 보였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96년 4.11총선은 정치세력화의 발판이며, 97년 대선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민족민주운동권이 정치세력화 했음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2000년대에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는 단계론적 구상을 보였다.


...하지만 총파업투쟁 이후 초기 사회세력화에 성공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진보정치세력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민중들의 요구들을 반영하지 못하는 보수정치의 균열은 이제 더 이상 봉합되지 않는다. 97년 대선, 98년 지자체, 그리고 2000년 총선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 건설을 향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막힘 없이 흘러갈 것이다. 지역으로부터의 풀뿌리 정치세력화, 중앙정치구도의 보수/진보구도로의 개편은 국민승리21의 진군과 함께 가속화될 것이다. 1997, 41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자료집 ꡐPower of one 세상을 바꾸는 힘ꡑ 박종화, 감동완 선거운동본부, p21


위의 글은 41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서 ꡐ21세기 진보학생연합ꡑ이 펼친 주장의 일부이다. 이들은 90년대 들어 학생운동권에 나타나기 시작한 수정주의적 경향의 대표적인 세력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특히 ꡐPower of one', 즉 개인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다분히 개인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구호를 들고 나왔으며, 올해에는 ꡐ충동ꡑ이라는 구호를 들고 선거에 출마해, 베른슈타인의 ꡐ개인의 도덕적 충동이 사회변혁의 추동력ꡑ이라는 말과 연관됨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또한 사회적 모순을 보수, 진보의 대립으로 보고 그러한 형태로 전선을 재편하는 것이 한국사회 진보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민중당의 실패에서 보듯 -또한 김문수, 이재오, 이부영의 최근 행보로 볼 때- 한국사회에서 보수, 진보의 구도라는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또한 한국사회가 서유럽과 다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 또한 대선에서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지원 사업을 벌여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들이 지지하는, 혹은 지지했던 국민승리21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러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국민승리21의 성격을 함부로 규정해 버렸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이 글에서 국민승리21의 성격을 말할 때 풍부한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는 최초로 총파업을 호소하는 대선후보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현실의 선거운동 과정에서 과연 그랬는가는 구체적 정책, 선거운동 방식, 내걸었던 구호 -사민주의적 정책, 전철역에서 유럽좌파의 상징인 장미꽃을 나눠주고, TV토론회나 선거 팜플렛에서 지나치게 표를 의식하는 점, ꡐ일어나라 코리아!ꡑ라는 구호- 를 미뤄 봤을 때 의문의 여지가 많으며, 오히려 대중추수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지난 대선을 평가하면서 92년 백기완 후보의 득표와 97년 권영길 후보의 득표수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지만 백기완 후보는 주로 도시 인텔리 계층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고르게 득표를 보인 반면, 권영길 후보는 울산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노동자층이 두터운 지역에서 선전했다는 점을 들어 노동자들의 계급정치적 의식의 확대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자의적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울산지역의 높은 득표수가 과연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울산지역의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ꡐ민주노총 위원장ꡑ인 권영길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장 노조, 혹은 민주노총과 진보정당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되는데, 마지막으로 한가지 에피소드를 지적하며 끝마치고자 한다. 이것은 과연 진보정당의 행보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정말로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97년 초 정국을 강타했던 총파업이 시일을 끌면서 민주노총 상층에 부담을 주게 된다. 나중에 국민승리21을 구성하게 되는 일부 민주노총 상층은 그러한 상황에서 이른바 ꡐ수요일파업ꡑ이라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지침을 내리게되는데, 물론 결과는 처참하게 끝났다. 이러한 지침은 아무리 봐도 한국의 산업현장에서 파업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희생을 요구하며 어떤 성과를 남기며 준비과정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타산한 것이라기 보다는 한국사회에서, 그것도 노동악법이 날치기 통과된 상황에서 파업은 어떤 의미였을까. 파업은 노동자의 요구를 내세우는 가장 강경한 수단이고 힘의 균형에서 한번 밀려나기 시작하면 작년 4.19 지하철 파업에서 보았듯이 노조에 상당한 피해를 가져오는 방법이며 그것을 대중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는 아무리 강력한 노조가 있는 사업장이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파업의 장기화에서 비롯된 자신들의 이른바 ꡐ국민여론ꡑ에 대한 부담과 계속 파업을 조직화 할 것을 요구하는 일부 현장의 요구사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결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사민주의의 딜레마와 관련해서 한번 음미했으면 하는 일화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문헌

송 병헌. (1999)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 당대

피터 게이, 김 용권 옮김 (1994) 「민주사회주의의 딜레마」한울

보 구스타프손, 홍 성방 옮김 (1996)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사회주의」 새남

강 경성 (1992) 「베른슈타인의 맑스주의 수정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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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슬리 리뷰]남한: 정치 투쟁 상황

외국 학자가 본 '남한 정치 투쟁 상황'

아메리카 좌파 경제학자인 마틴 하트-랜즈버그가 지난 8월15일 먼슬리리뷰에서 운영하는 사이트 엠아르진(MR Zine)에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비교적 길지 않은 글을 썼는데, 이 글의 후속편으로 '남한: 정치 투쟁 상황'이라는 글을 얼마전에 다시 엠아르진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이 글은 우리로서는 지극히 평이한 수준의 글입니다. 하지만 외국 학자의 우리 상황 이해가 어느 수준인지 판단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읽어볼만 할 겁니다. 또 혹시라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측면이 담겨 있을 지도 모릅니다. 길지 않기에 번역해봤습니다.

동북아시아에 대한 글을 주로 쓰는 하트-랜즈버그는 우리에게 비교적 알려진 인물입니다. 3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한국 100년의 역사를 아메리카의 개입과 관련지어서 정리한 책인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당대, 2000) 폴 버캣과 함께 쓴 논문을 모아놓은 <일본경제 들여다보기> (미토, 2005), 역시 버캣과 함께 쓴 것으로 중국의 경제체제가 사실상 자본주의라고 비판한 책인 <중국과 사회주의> (한울, 2005)가 국내에 출판된 책들입니다. 하트-랜즈버그는 얼마전에는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 번역문 보기 --


남한: 정치 투쟁 상황

(South Korea: The State of Political Struggle)

저자: 마틴 하트-랜즈버그(Martin Hart-Landsberg)

출처: 먼슬리리뷰진 2005년 9월5일 (원문 mrzine.monthlyreview.org/hartlandsberg150905.html)

외환 위기 이후 남한 경제의 경로는 일하는 이들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리고 남한 노동운동과 좌파운동은 진행중인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편을 격퇴하기 위한 아주 힘든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운동이 직면한 도전 몇가지를 논할 것이다. 이는 전세계 노동자와 활동가들도 점점 더 이와 비슷한 도전에 직면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의 투쟁에 대해 알고, 그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집단적 지혜를 연마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점은 특히 남한의 경우가 더 그런데, 지당한 것이지만 남한 운동은 용기와 전투성으로 아주 유명하기 때문이다.

투쟁의 지형(Terrain of Struggle)

남한의 외환 위기 이후(1997-98년) 경제 구조 개편은 외국인 투자 및 수출에 대한 의존도를 아주 높였다. 남한 재벌들이 경제 위기로 약화된 정도인 데 반해, 중소기업은 최대 시련을 겪었다. 예를 들어 많은 재벌들은 외국 기업들과 연합을 형성했고 이는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게 해줬다. 남한 국내외 경제 지도자들이 최우선 순위로 삼은 것 한가지가 노동 운동 약화이다. 그들은 “노동시장 개혁”이 없다면 투자와 생산을 중국으로 옮겨가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경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친 노동계 인사로 여겨졌음에도, 이런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예를 들면, 정부는 기업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걸 더 자유롭게 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경제 위기 이전의 42%에서 현재 54%로 급격하게 늘었다. 그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53%에 불과하다. 아주 실제적인 자본 이탈 위협과 함께 이런 조처들은 거대 제조업체들이 노동 비용을 줄이고 이윤을 높일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기업의 이윤이 새로운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성장률은 낮은 수준에 머물고 이는 정부로 하여금 기업에 더 양보하도록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미 저임금과 불평등 및 빈곤 확대, 불안 심화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은 어두운 미래를 직면하고 있다.

민주노동조합총연맹(KCTU)

한국의 주도적인 노조 총연맹인 민주노총은 (더 보수적인 노총이 하나 더 있다) 노동자의 이익을 지키려 애쓰고 있다. 민주노총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을 촉구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사용 확대를 위한 새로운 법률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고, 날로 늘어나는 이주 노동자의 노조설립 권리와 그들에 대한 보호를 지지하며, 공공부문 노조의 완전한 권한 쟁취를 위해서 싸웠다. 최근에는 노동부 관련 모든 자문 위원회에서 탈퇴했다. 불행하게도 이런 노력은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뒀다. 그리고 최근 노조 가입률이 11%까지 떨어지면서 정치적 비중도 줄고 있다. 노조 활동가들이 다음 단계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와중에 그들이 직면한 주요 쟁점이 두가지 있다. 민주노총 내부 조직 문제와 정치적 지향 문제다.

구조적 쟁점들:

노조 조합원들은 노동자들의 더 넓은 관심사로부터 날로 고립되고 있다. 이렇게 되는 주된 이유는 남한 노조가 기업별 노조라는 점이다. 그리고 노조조직률은 기업의 규모와 연관되어 있다. 노동자 1000명 이상의 거대 사업장들은 노조가 있는 전체 기업의 2.7%를 차지하는 반면, 이들 기업 노동자들이 전체 노조 조합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1.2%에 달한다. 그래서 민주노총 조합원 대다수는 거대 제조업체 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에 비해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향유한다.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지위에 있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점점 더 적대적이 되어가는 노동 환경에 직면해 있다. 대기업들은 공격적으로 인력을 줄이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하청을 통해 인력 감축을 달성하고 있다. 임금과 각종 혜택의 감축도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 소속 노조들은 이런 행위에 저항하려 시도할 뿐 아니라 노동현장 내 권한 강화도 꾀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 노조는 투자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최근 이 노조는 성과급 분배에 발언권을 요구하면서 압박 수단으로 경고 파업을 선언했다. 기아차 노조는 이사회 참여와 인사위원회 노사 동수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한 투쟁들이긴 해도, 이들 노조가 개입하고 있는 쟁점들은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생존에 관련된 쟁점들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들이다.

기업별 노조체제는 중소기업 노조 조직률을 높이려는 민주노총의 노력도 저해한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활발한 조직화 활동 또는 노조 활동을 유지할 인적, 재정적 자원이 없다. 민주노총 자체도 이들을 도울 여력이 없다. 노총은 자원이 제한되어 있고 대기업 노조들은 자신들 소속 조합원의 이익과 직결되지 않는 활동을 위해 노조기금을 공유하기를 꺼린다.

이런 상황이 민주노총 내부에서 조직 개편의 필요성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촉발했다. 많은 활동가들은 민주노총을 강화해 노총 차원의 노동교육 프로그램과 함께 조직화 활동을 후원하고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또 이 단계에 적합한 체제로서 산별 노조 구성을 요구한다. 다른 활동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 구조가 가장 민주적이고 노동자들의 필요와 이익에 가장 잘 반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쟁은 어떻게 하면 노동계급 대표성과 활동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포함한 노조 형식과 목표에 대한 중대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정치적 쟁점들:

다른 쟁점 하나는 반자본주의 운동 형성에 대한 민주노총의 자세다.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비판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남한 경제의 급진적 구조 개편 운동을 전개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많은 면에서 이 점은 1990년대 초 노동 활동가들이 좌파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노조의 권한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두기로 한 결정의 결과다. 이 결정은, 좌파에 대한 정부의 무자비한 공격과 소련의 붕괴, 북한과 미국의 핵 문제를 둘러싼 긴장 고조라는 상황에 대응해서 내려졌다. 1995년 마침내 민주노총이 출범했다.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은 3년 뒤인 1998년이지만 말이다. 경제가 확대되는 동안엔,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생활조건과 노동조건 개선 압력을 넣을 수 있었고 이는 꽤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경제 위기 이후 정부와 기업에서 노조가 경제 회생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조합원 문제에만 집중한 정책이 역효과를 낳았다.

많은 노동 활동가와 정치 활동가들은 민주노총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려 했으면 폭넓은 좌파 정치세력과 관계를 복원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이 좌파 정당의 창출을 지원하길 원한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은, 이런 시도는 시기상조이고 자원과 활동을 노동운동에서 다른쪽으로 돌림으로써 민주노총 자체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하튼, 상당수의 활동가들은 민중승리21을 구성해 1997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고 이듬해 지방선거에 여러 후보를 출마시킴으로써 일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대한 민주노총 지도부의 지원은 제한적이었고 득표도 많지 않았다. 2000년 민주노총의 더 큰 지원을 받는 가운데 더 많은 활동가 집단이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10석을 확보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은 상당한 승리를 얻었다. 이 승리는 또 다른 문제들을 제기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적절한 관계는 무엇이며,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정책 일반, 특히 노동 정책에 대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민주노동당(DLP)

민주노동당은 자신들의 목표를 “민중이 완전히 참여하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진보적인 정치적 힘”을 갖추고 확장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공약은 “사회주의의 원칙과 이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가운데 “국가 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걸 추구한다고 선언한다.

선거에서 이 당이 거둔 성공의 상당 부분은 유권자가 후보와 정당에 각각 투표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얼마전 선거제도를 개혁한 덕분이다. 국회의 경우, 299석 가운데 243석은 지역구에서 직접 투표로 결정되고 46석은 정당명부제에 의한 투표 결과로 배정한다. 민주노동당은 정당명부제 투표에서 13% 이상을 득표함으로써 8석을 확보했고 지역구에서는 2석을 얻었다. 두 주요 정당의 득표 차이가 적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의석수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 이후 15-20%의 지지율을 확보하면서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이제 국회내 논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 새로 확보한 의회 내 대표권이 중요하긴 해도 활동가들은 여전히 민주노동당이 새로 확보한 영향력을 가장 잘 활용하는 문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입법 발의와 개혁 관련 협상에 개입하는 걸 피하고 대중 운동의 목소리가 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진보적인 의제를 촉진할 수 있을 때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유주의 성향 집권당과 함께 일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컨대 민주노동당은 무상 교육과 보편적 의료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정부의 경제 정책을 한목소리로 비판하지만, 상당수는 노 대통령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대북한 정책 결정을 지지한다.

민주노동당의 미래와 관련된 쟁점들:

민주노동당은 선거를 중요하게 보고 선거에서 힘을 강화하려고 시도해야 하나, 아니면 선거를 국회내 교두보를 유지하면서 정치 관련 논쟁을 날카롭게 하는 도구로 활용해야 하나? 현재 이 당은 당비를 납부하는 회원이 6만명이다. 구성으로 보면 45%는 산업 노동자들이고 35%는 사무직 노동자들이며 20%는 학생과 (소규모 농민 대표자들을 포함한) 기타 세력이다. 당은 내년까지 당원을 10만명 이상으로 확대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을 당원으로 확보하는 데 민주노총에 의존해야 하는가, 아니면 독자적인 접근 통로를 구축해야 하나? 특정 사회 계층에서 당원을 확충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나?

국회내 지위 덕분에 민주노동당은 정책 연구소를 지원할 국고 보조를 받고 있다. 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는 현재 전임 연구원 6명을 두고 있다. 연구소의 책임은 당이 “한국 사회의 진보에 기여할 사회, 정치, 경제 대안 모델을 제시하는” 걸 돕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사회 질서로 이행하는 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관련된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현재 이 연구소는 (브라질에서 시행된 것과 같은) 주민참여 예산제도와 (아메리카에서 찾을 수 있는 것같은) 생활임금 조례 같은 대안적 사회 실험을 조사하고 있다. 이런 조사활동이 건설적인 정치 공약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반면 변화에 대한 개량주의적 시각을 강화할 위험도 있다.

위에서 주목한 과제와 문제들에 대한 단순한 답은 없다. 사실 이것들이 서로 얽혀있는 문제들이라는 특성은, 이 문제에 답하려 시도할 때는 전반적인 전략적 관점의 안내를 받아야 하되 이 전략적 관점은 대중적 투쟁에 계속 중요하게 참여하는 걸 통해서 형성하고 바꿔가야 한다는 걸 상기시킨다. 기대하건대, 한국의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유용한 지침을 제시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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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하트-랜즈버그는 오레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루이스 앤드 클라크 칼리지 경제학과 교수다. 그의 저서로는 (개발을 향한 질주 -남한내 경제 변화와 정치 투쟁) (한국어판: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 도서출판 당대, 2000)가 있다. 공저로는 (폴 버킷과 함께 쓴) (한국어판: 중국과 사회주의, 한울, 2005)가 있다. (이밖에 하트-랜즈버그가 폴 버킷과 함께 쓴 논문 세편을 번역한 <일본경제 들여다보기> (미토, 2005)도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다.)

번역: 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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