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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노동계급의 입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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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가운데 치러지게 되었다.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의 목적은 중동의 석유를 장악하여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작년 3월 19일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전쟁에서 미군은 거의 1천명이 사망했으며 대부분이 민간인인 이라크인 사망자는 만 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 정인수> |
얼마 전 조선, 중앙, 동아 같은 자본가언론은 프랑스의 주35시간 노동제가 가장 대담한 개혁 중 하나였으나 가장 어리석은 조치가 되고 말았다는, 영국의 대표적인 자본가언론인 ≪파이낸셜 타임스≫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5년 전 10%에 육박하는 만성적인 실업난을 해소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했으나 실업률이 전혀 감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경제성장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언론은 프랑스 자본가정부가 주 35시간인 근로시간을 48시간까지 연장할 수 있는 법안을 하원에 상정해 통과시킨 것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더 나아가 지난 20년 동안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조 가입자수가 급감(영국이 50%에서 30%로 떨어지고, 프랑스는 10% 이하로 하락하고, 독일은 35%에서 20% 정도로 추락)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나날이 급증하며, 아예 ‘노조’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부드러운 음악을 연상시키는 ‘베르디’나 ‘아미커스’(친구)와 같은 온순한 이름을 쓰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고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본가언론은 서유럽 노동운동이 세계화 시대의 첨예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거의 낡은 전투적 노동운동의 옷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데 우리나라 노동운동 또한 세계적 흐름을 읽고 그에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은근히 종용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프랑스 주 35시간제는 실패작인가? 프랑스 노동자들이 주 35시간제 폐기에 맞서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는 모습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의 노동자들은 주35시간제를 둘러싼 프랑스의 계급투쟁 및 유럽 노동자운동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며, 어디로 전진해야 하는가?
자본가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2000년 당시 사회당 정부는 ‘노동시간을 10% 줄이면 추가 비용 없이 약 7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마르틴 오브리 노동부 장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법안이 발효됐지만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았고, 노동시간 감축으로 인건비만 올린 셈이 돼 경기 침체를 부추겼다.” “실업률도 도입 당시 10%에서 올해 초 9.9%로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만약 일자리를 늘리고,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정책이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실패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상적 수치에만 몰두하는 극히 기계적인 사고일 뿐이다. 본질을 파악하려면 문제를 더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 보아야 한다.
만약 10명이 하루 10시간씩 노동을 하고 있던 상태에서 노동시간을 5시간으로 낮출 경우 기존의 생산량을 계속 뽑아내려면 20명을 고용하면 된다. 그 경우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란 정책은 성공한 셈이다. 실업자들은 일자리를 얻어서 좋고, 그 전까지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었던 취업 노동자들은 노동의 고통을 덜 수 있어서 좋다. 노동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멋진 정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이런 멋진 정책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절대 아니다. 노동자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그들의 힘이 커지고, 회사가 어려워지거나 불황과 공황을 맞았을 때 해고하기가 어렵고, 노동시간을 줄인 만큼 임금을 삭감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그걸 절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남한에서 자본가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해왔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노동자들의 압력이 거세 어쩔 수 없이 ‘노동시간 단축’을 받아들여야 할 경우 자본가들은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자본가들은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다른 지역, 다른 나라로 공장을 이전시킬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하는 대신 노동강도를 높이든지 아니면 기술 혁신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길을 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동시간은 단축’됐지만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이 경우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정책은 단순히 실패작이라고 볼 수 있는가?
여기서 문제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정책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탄 낸 자본가들에게 있다. 만약 노동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면 ‘잘못된’ 정책을 채택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책에 대한 자본가들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부족했던 데에 있을 뿐이다. 노동자들에게 힘만 충분히 있었다면 ‘정리해고나 실업을 유발하는 일방적인 공장이전이나 노동강도 증대’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며, 공장이전이나 기술혁신이 필요할 경우에도 그것이 노동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그대로 유지하고, 오히려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은 실패작’이라는 자본가들의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지적 파산자, 백치들의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99년 기준으로 주당 50시간이나 된다. 98년 기준으로 보면 연간 2612시간으로 OECD 29개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하루 2~4시간 잔업은 기본이고, 휴일 특근까지 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기 때문에 주당 노동시간이 70시간이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평균 주당 50시간 일하는 한국의 노동자들은 과로 때문에 ‘40대 사망률이 세계 최고’에 이를 수밖에 없으며, 온갖 산재로 몸이 성한 군데가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이런 노동자들에게 주 35시간제는 ‘꿈의 노동시간제’라고 할 수 있다. 주5일, 하루 7시간만 일하고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얼마나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정치, 사회, 문화예술, 국제 등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가 그대로 존속하는 한 주 35시간제가 된다 해도 노동자들이 임금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 50시간 일하던 상태와 비교한다면 삶의 질이 훨씬 더 나아질 것은 틀림없다.
주35시간 노동제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이렇게 해서 획득된 여유 시간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사상을 학습하고 노동해방의 길에 대해 토론하면서 자신을 굳건한 주체로 단련시키고 조직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가령 50시간에서 35시간으로 단축된다면, 나머지 15시간으로 노동자들은 엄청난 전진을 이룩할 수 있다. 매주 3시간 정도의 학습시간, 3시간 정도의 토론시간, 3시간 정도의 조직화와 연대의 시간을 갖고 나머지 6시간은 휴식에 투입하더라도, 노동운동은 엄청난 전진을 이룩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맑스는 노동시간 단축투쟁은 노동자계급 해방의 물질적 기초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물론 조건은 있다. 노동운동이 이렇게 획득한 시간들을 자본주의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노동해방적 관점에서 이 시간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면서 전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 시간들을 퇴폐나 향락, 자본주의적 소비, 가족주의적 협소함 속으로 해소시켜버린다면 노동해방을 향한 적극적 의미는 거의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것은 노동시간 단축을 노동해방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노동해방운동의 적극적 대응이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상의 점들을 고려할 때, 프랑스 노동자들이 피어린 투쟁을 통해 쟁취해낸 ‘주35시간 노동제’는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나아갈 길을 뚜렷하게 보여준 위대한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프랑스 노동자계급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살고, 노동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수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프랑스 자본가정부가 주35시간제를 폐기하려는 것에 대해 ‘소중한 보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심정으로 완강하게 투쟁해 왔다.
그런데 자본가계급에게는 이 제도가 ‘악마’ 같을 수밖에 없다. 전 세계 자본가계급은 자국의 노동자계급이 프랑스 노동자계급을 본받을까봐 두려워했다. 이들은 틀림없이 프랑스 자본가계급에게 계속 압력을 넣었을 것이다. 프랑스 자본가계급 또한 주35시간 노동제가 그들의 이윤을 삭감하고, 그들의 힘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끊임없이 불만을 터뜨렸다.
그래서 그들은 인건비가 프랑스의 1/10 정도에 지나지 않는 동유럽으로 공장을 이전시키고, 노동강도를 증대시키고 기술혁신의 성과를 인력감축의 수단으로 둔갑시키는 길로 나아갔다. 그에 따라 노동시간이 ‘주35시간’으로 줄어들었지만 ‘7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기지도 않았고, 실업률도 10%에서 거의 줄지 않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노동자에게 있는가 자본가에게 있는가? 당연히 자본가에게 있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이로운 주35시간제를 폐기하려는 것이 그들이 원래 심성이 ‘나쁜 놈’이기 때문이라고 단순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도 처자식에겐 ‘좋은 아빠’, ‘멋진 남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별 자본가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 질서 자체는 이들로 하여금 노동자에 대한 강력한 착취에 나서도록 몰아붙인다. 자본가들의 가정, 기업, 부, 지위의 안정성은 노동자 착취로부터 획득되는 것이며, 이 안정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착취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자본가들로 하여금 노동자들을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모는, 피도 눈물도 없는 ‘나쁜 놈’이 되지 않을 수 없게 강력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가 촉진되면서 기업 간, 정부 간 경쟁은 더욱 격화됐다. 기업들은 피 말리는 시장쟁탈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건비 절감에 목을 매고 있다. 각 나라는 자국을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하고, 법정 노동시간을 늘리며, 각종 혜택을 주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프랑스 자본가들 또한 이렇게 격화되는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낮은 인건비, 더 고분고분한 노동자들을 찾아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려 한다. 프랑스 자본가들이 동남아 지역으로 공장을 이전시키려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한국 자본가들이 한국 노동자 평균 임금의 1/10도 안 되는 값싼(중국 6~12만원, 북한 7~10만원) 노동력을 찾아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듯이 프랑스 자본가들도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프랑스 자본가정부가 노동시간을 주35시간에서 주48시간까지 늘리려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만약 노동자계급의 반발이 거의 없다면 프랑스 자본가정부는 노동시간을 60, 70시간으로까지 늘리고, 임금을 지금의 70%, 60%까지, 아니 20~30%까지 로도 낮추려 할 것이다. 한마디로 자본과 정부의 이윤욕에는 끝이 없는 것이다.
만약 기업들이 ‘온정적 태도’로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 상대적으로 짧은 노동시간, 강한 노조를 감수한다면 어떤 일이 기다리겠는가? 그것은 약육강식의 경제적 정글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부가 反기업정책을 강하게 펼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있는 기업들은 모두 해외로 빠져나가고 새롭게 들어오는 기업은 전혀 없어서 자본주의 국가경제가 무너져버릴 것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공장이전을 모색할 수밖에 없으며, 자본가정부는 공장이전을 막고, 자본가들의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해 노동시간 연장, 임금 동결 및 삭감, 노조 무력화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과 정부가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이다. 그들에게 다른 것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가서 고기를 얻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을 뿐이다.
나날이 격화되는 경쟁, 강화된 착취가 본질적 특징인 자본주의 사회를 인정한 상태에서라면 노동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경쟁에서 자기 회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고분고분 협조하는 것이다. 유럽의 대다수 노동조합들은 지금 그런 길을 가고 있다. 베르디, 아미커스(친구)라는 부드러운 이름을 쓰는 것은 노조가 자본가들에게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온순한’ 애완견 같은 태도를 취해 주인의 시혜를 받아 노예로서 계속 살아남겠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일자리가 최우선이기 때문에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복지를 양보하겠다. 임금삭감, 연장근로도 OK'라고 하는 것도 모두 그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한 아무리 전투적인 노조라도 빠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 운명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엔 살아남는 길이 아니라 더 빠르게 죽는 길이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 모든 회사의 노동자들이 고분고분 자본가들에게 복종할 경우, 격화되는 경쟁, 강화된 착취의 송곳이 노동자들의 몸을 사정없이 찔러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더욱 강하게 외쳐야 한다. 대안은 오직 노동해방에 있을 뿐이라고.
우리는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주35시간 노동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은 프랑스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겨냥한 공장이전 위협에 적극 투쟁하지 못하고, 노동강도 강화를 저지하며, 기술 발전의 성과를 노동자 자신의 것으로 쟁취하기 위한 더 적극적인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노동해방으로 상승시키기 위한 변혁적인 과업에 적극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본과 정권에 맞선 투쟁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노동자들,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온 온순한 노동자들은 자본가계급의 공격을 받고도 투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생존권이 눈앞에서 강탈당하는 것을 본 많은 노동자들이 단결과 투쟁의 길에 나서기도 한다. 특히 투쟁의 전통이 있고, 노동자의식이 살아있는 곳에서는 자본의 공격이 거셀수록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투쟁이 더욱 강하게 일어난다.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랑스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이번 주35시간제 폐기에 맞서 완강하게 투쟁했다. 2월 5~6일 주말에 프랑스 노동자들 50만 명이 ‘법정 근로시간을 주35시간에서 최대 48시간으로 늘리고’, ‘시간외 초과근무 제한도 연간 180시간에서 220시간으로 완화’하는 법안에 대해 격렬한 거리시위로 저항했다. 파리에서만 9만 명이 모일 정도로 열기는 상당했다.
이런 투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1995년 ‘뜨거운 겨울’을 기점으로 지난 10년 간 계속돼 온 공공서비스를 둘러싼 투쟁의 일부다. 1995년 당시 쥐페 자본가정부는 연금을 개악하려는 도발을 감행했다가 3주간에 걸친 거센 파업과 시위의 물결에 밀려 결국 개악안을 철회해야 했다. 그 뒤 프랑스 노동자들은 굴곡을 그리면서도 계속 투쟁을 전개해왔다. 대표적으로 2003년에 프랑스 자본가정부가 공격범위를 좁혀 교사들의 연금을 깎으려 하자 전체 교사의 절반 이상이 파업에 참가할 정도로 대규모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올해 1월에도 프랑스 전역에서 정리해고, 임금 삭감 등에 반대하는 행동 주간의 일환으로 우체국, 철도, 학교, 병원, 공무원 노동자 30만 명 정도가 투쟁을 전개했다.
한국의 자본가언론은 대단히 선정적으로 프랑스와 유럽노동운동에 대해 쓰고 있다. “문패 내리는 서구 강성노조”, “힘 빠진 서유럽 노동조합”, “유럽노조 강성은 옛말” 같은 선정적인 문구로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본가언론이 주장하려는 바는 ‘강성노조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므로 한국 노동운동도 전투성을 완전히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날로 첨예해지는 세계경쟁이 서유럽 노조운동을 강하게 압박하는 것은 사실이며, 많은 서유럽 노조들이 그 압력에 굴복해 더 후퇴하고 있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런 서유럽 노동운동이 일방적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유럽 노동운동은 양극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자본주의의 경쟁압력에 굴종하는 노동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 압력을 정면으로 거스르고자 하는 노동자들 또한 있다.
굴종하는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연장, 임금삭감안을 받아들이는 동안,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굴종하는 노동자들이 노조 이름을 포기하고 ‘친구’(아미커스)와 같은 온순한 이름으로 변신하는 동안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자’, ‘노동조합’이란 당당한 노동자의 이름을 쟁취하고 굳건히 사수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한국의 특수고용직 노동자들, 공무원 노동자들을 보라).
노동운동이 패기를 잃었을 때 젊은 노동자들은 거기에 참여하지 않기에 그 노동운동은 더욱 하락하게 된다. 반면 노동운동이 패기와 활력을 갖고 있을 때 젊은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희망을 찾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굴종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경쟁에 길들여지고 있는 동안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연장, 정리해고, 임금삭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프랑스의 한 우체국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들은 우편 업무를 기업식으로 바꾸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체국만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이윤만이 중요시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다.” 다른 한 교사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윤을 위해 돈을 쓸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필요를 위해 돈을 쓸 것인가이다.” 또 다른 한 간호사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라파랭[프랑스 총리]은 ‘거리 투쟁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왜 안 되는가? 우리는 다수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라파랭은 사장과 은행가들을 위한 정치를 원한다. 우리는 그것을 반대한다.”
물론 프랑스에서 파업과 시위를 이끌고 있는 노총들에는 관료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이 관료들은 자본과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거대하고 강력한 연대파업을 작고 고립분산적인 단사별 파업으로, 파업을 시위로, 시위를 평화적인 캠페인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아직 비록 힘은 충분하지 않지만 이러한 관료들의 파업파괴에 맞서면서 현장에서부터 노동자대중의 투쟁을 성실하게 일구어내고, 조각난 단사 투쟁을 동아줄로 튼튼히 묶어내며, 투쟁의 요구를 확대하는 노동해방 투사들이 있다. 더불어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노동자투쟁을 자본주의 자체에 맞선 투쟁으로 발전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노동해방 투사들이 있다. 프랑스 노동운동의 미래는 결국 이 노동해방 투사들이 얼마나 올바른 정책과 헌신적 노력으로 지금의 투쟁을 이끌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
전 세계 자본가계급은 “프랑스 주 35시간 노동제는 실패작”이라고 선언하며 전 세계 노동운동을 미친 듯이 공격해대고 있다. 이에 맞서 전 세계 노동자계급은 “프랑스 주35시간 노동제는 위대한 성공이었다. 우리는 이제 이 계급투쟁의 성과물을 온몸으로 사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주 35시간제를 폐기하고 노동자를 지옥으로 떨어뜨리려는 자본가계급을 쓸어버리고 노동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더 거대한 해일이 되어 휘몰아쳐가야 한다.”고 화답하고 이를 행동으로 입증해야 한다. 가라, 자본가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
'이론동인' 창립 선언문 |
이론 제1호 |
이론 |
진보진영이 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적으로 신보수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로 표상되는 지배 세력의 공세 앞에서 진보진영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지난 수년간 격변해온 국내외의 실천적, 이론적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의 진보적 이론진영도 커다란 동요와 혼란을 겪고 있다. 실천진영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진보적 이론과 실천 속에서 부쩍 강화되고 있는 청산주의적 경향이 그 위기의 심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이 맞고 있는 위기가 다른 곳에서와 똑같은 양상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위기의 보편성과 현실성을 냉정히 인정해야 한다. |
동북아 노동연대의 필요성 | |||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 네트워크는 복잡하고 다차원적이다. 이 네트워크 속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정보이며, 그 다음이 돈이고 물건과 서비스와 공장들이다. 정보와 돈과 물건과 서비스와 공장들을 수시로 갈아 내우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네트워크의 중추 신경은 ‘글로벌 기업’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시간과 공간은 글로벌 기업들이 열어가는 네트워크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어가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네트워크의 이동 속도이다. 정보와, 돈, 물건, 서비스, 공장, 그리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점점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이제 움직이지 않는 것은 국민국가라는 정치적 공간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들이 세계적 생산 공장과 설비를 건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3년 정도면 충분하다. 이들보다 몸집이 훨씬 작은 중소기업의 공장과 설비를 이전하는 데에는 1년이면 족하며, 금융기관들이 사무실을 이동하는 데에는 1개월로 모든 작업이 마무리될 수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가장 이동 속도가 느린 것은 사람이다. 이른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인적 자원의 풀로부터 떨어진 사람들일수록 그들의 이동 속도는 늦어진다. 바로 이 속도의 차이가 글로벌 네트워크를 주도하는 기업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물자와 정보, 자금과 공장은 수시로 이전 가능하지만, 노동력은 같은 속도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동의 지역간 격차가 발생한다. 이러한 격차는 자본간 경쟁을 노동간 경쟁으로 전환시키는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 시장과 노동시장을 찾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의 존엄성과 고용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은 손쉽게 국경을 사이에 둔 노동자들 간의 피를 말리는 경쟁으로 탈바꿈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 노동-자본 ‘불균형’의 표본 오늘날의 동북아시아 지역은 이동하기 힘든 노동력과 이동이 자유로운 자본의 불균형이 만들어내는 고용과 삶의 위기를 보여주는 표본실이다. 버블 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한 일본에서는 지난 10여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기업들이 일본을 떠났으며, 이제 그 바톤을 한국이 이어받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본격적인 수교와 경제교류가 시작된 이후 진행된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 더욱 큰 탄력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동북아 지역에서 벌어지는 경제 구조의 엄청난 변화는 이 지역의 노동자들 모두에게 전례 없는 도전이 되고 있다. 동북아 지역의 급속한 경제 통합으로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고용 위기와 오늘날 중국 의 노동현장에서 자행되는 저임금과 노동착취의 현실은 글로벌 자본주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동일한 현상의 서로 다른 표현형들이다. 동북아 경제의 새로운 재편성은 한국사회의 고용문제, 노사관계, 경제 체제를 조만간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로 전환시킬 것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새로운 경제와 고용 환경에 대한 노동의 대응이다. 연대의 시야 넓혀야 할 때 동북아 지역에서 노동이 처한 위기를 감안할 때 ‘동북아 노동 연대’의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로 볼 수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지역에 고정되어 그들만의 시각에 머물러 있는 노동 조직들이 최소한 동북아 지역에서 새로운 유대 관계를 확장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노동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 지역의 노동자들은 끝없는 상호 경쟁의 기제로부터 헤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여년 동안 한국을 둘러 싼 동북아 지역에서는 경제적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전개됐다.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이처럼 빨리 될 것으로 전망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우리나라의 공장들은 한 해에 수 백 개씩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동북아 지역의 새로운 경제 지리 구조 변화에 대한 노동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취약한 편이다. 동북아 지역의 노동자들이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서로를 잡아먹는 최악의 경쟁체제에 끌려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확장된 사회적 연대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
박준식 한림대 교수, 사회학 jsp@hallym.ac.kr |
■ COREA국호는 회복되어야 한다
21세기코리아연구소 연구위원 정형기, 2003.10.25
* 아래는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에 기고한 글이다.
*출처: http://www.21corea.org/corea/corea_01.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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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의해 국호가 강제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다양한 증거로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국호 회복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앙일보의 박철희는 KOREA는 이미 국제적으로 정착된 국호라면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까지 국호를 바꾸어야 하겠느냐고 주장했다. 국호회복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일본에 대한 자격지심이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보수논객들의 공통된 논리에 의하면 대부분 세계가 영어 공용화가 된 상황에서 영어식 표기인 KOREA를 쓰는 것은 당연하다거나, 국호변경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이들이 토론마당에서 흔히 내세우는 시기상조론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COREA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게 사실이긴 사실인가보다.
이들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첫째, 영어공용화시대이기 때문에 영어식 표기인 KOREA를 써야한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논리적 모순이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우리말을 외국어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전자법이나 전사법에 따라 써야 된다고 한다.
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말의 발음을 그대로 로마자로 옮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말 표기에 쓰이는 글자, 즉 한글의 철자를 로마자로 적는 것이다. 전자를 전사법이라고 하고, 후자를 전자법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신라, 종로’라는 단어를 로마자로 적을 때, 전사법에 따라 발음을 로마자로 옮기면 ‘Silla, Jong-no’로 옮겨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전자법에 따라 철자를 로마자로 옮기면 ‘Sinra, Jong-ro’로 옮겨진다.
그러나 전자법에 의해 표기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글자가 있어야 하고, 또 맞추어 적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COREA가 사용되기 시작한 1250년대는 우리민족이 한자를 사용했던 시대로 훈민정음이 창제되기까지는 아직도 200여 년이 더 남아있던 때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도 한글은 ‘언문’으로 불리며 여전히 홀시되어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선 후에야 비로소 대중화되었다. 우리나라의 존재가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1250년대에는 우리민족의 글자가 있지도 않았고 따라서 전자법에 의거해서 표기할 수가 없었다. 특히 19세기 말엽까지 세계적으로도 전자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방법이 널리 유포되지 않았던 시대이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여 볼 때 우리의 국호에 전자법을 적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우리나라 국호표기는 그 어떤 규범적인 성격을 띤 특수한 문자나 부호에 의한 표기가 아니라 라틴문자에 의한 표기이기 때문에 전사법을 적용하는 것도 옳지 않다.
한 나라의 국호가 전사법이나 전자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경험에 의거해 어원을 밝히는 역사어원론에 근거해서 표기되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CANADA(캐나다), COLOMBIA(콜롬비아), CAMEROON(카메룬), 콩고(CONGO), 코스타리카(COSTA RICA), 캄보디아(CAMBODIA), 키프로스(CYPRUS) 등 우리말의 ‘ㅋ’에 해당하는 나라들의 국호의 첫소리가 모두 ‘C’로 쓰인 것인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국호 표기를 영어식 표기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국호표기가 역사적으로 일단 형성, 고착되면 그 표기를 계속 대를 이어 전승하여 쓰는 것이 옳은 것이다. 국호표기는 일단 형성, 고착되면 그것이 전례에 따라 그대로 계속 쓰여 내려오면서 그 나라의 상징으로 된다. 바로 COREA가 우리나라 국호의 상징으로 된 것이다.
둘째, 국호를 변경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주장은 분단체제를 유지하려는 논리의 연장에 있다. 국호회복운동은 과거 우리의 국호가 COREA였던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동시에, 반세기의 분단시대가 종결되고 코리아반도가 재통일될 때 사용할 우리의 국호로 COREA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국제대회에서 사용할 코리아반도기에 COREA국호를 표기하자는 남북간의 합의도 나오는 것이다.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이후 코리아반도의 재통일은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다. 코리아반도가 재통일된다는 것은 지구상에 새로운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국가가 등장하여 새로운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비용이 드는 문제가 아니다. 혹여 비용이 든다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민족이 치러야 할 비용이며, 또 통일된 마당에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치를 수 있는 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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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를 회복하는 운동은 우선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는 운동이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국호를 되찾아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운동이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자주적이지 못한 오늘의 시점에서 이 운동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대낮에 여중생을 장갑차로 깔아 죽여도 가해자 미군을 처벌할 수 없어 장갑차라도 구속시키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코리아반도 이남의 현실에서 미국으로부터 자주권을 되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인천을 통해 진주한 맥아더 군대는 그들의 포고령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코리아반도 이남에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총독부 건물에 걸려있던 일장기를 내리고 그 자리에 성조기를 올리면서 시작된 코리아반도 이남의 예속체제는 현재까지 수많은 억울한 죽음을 낳아왔다. COREA국호회복운동은 변혁운동세력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세력까지 포함하여 대중적으로 광범위하게 민족자주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국호왜곡 과정에 개입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이 운동은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는 운동을 더욱 고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국호를 회복하는 운동은 또한 사회의 민주화를 이룩하는 운동이다. 나날이 높아가는 국민들의 민주적 요구를 가로막고 있는 수구세력들은 일제시대 친일파의 후예들이며 해방 이후 현재까지 친미사대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세력들이다. 그들은 지난 월드컵 때 ‘붉은악마’가 입은 응원복을 두고 색깔론을 폈던 사람들이고, ‘FORZA COREA’라는 구호에 알레르기를 일으킨 사람들이다. 이들은 COREA국호되찾기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KOREA국호고수론을 펴고 있다.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방해하는 이 세력들을 반대하고 자주적 민주정부를 구성하는 데에서 국호회복운동은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국호를 되찾는 운동은 또한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운동이다. COREA국호가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고려시대였다. 앞으로 재통일될 날에 새로운 국호를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려’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국호가 될 것이다.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후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민족자주, 민족화해의 운동이 적극 전개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제기된 COREA국호되찾기운동은 그 자체가 6.15공동선언실천이며 조국통일운동이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낮은 차원의 조국통일운동이자 통일국호를 제정하는 궁극적인 조국통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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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의해 강제로 왜곡되고 고착화된 우리 국호를 COREA로 바로잡는 것은 재통일을 눈앞에 내다보는 오늘의 시점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초미의 과제가 되었다. 부정의 부정을 거쳐 다시 되찾을 COREA는 일제 강점 이전의 COREA면서도 그렇지 않다. 다시 되찾을 COREA는 더 이상 외세로부터 수탈당하는 나라가 아니며, 지배자의 탄압에 숨죽이는 나라가 아니며, 갈라져 서로에게 총을 겨루는 나라가 아니다. 다시 되찾을 COREA는 외세나 매국노에 의해 만들어지는 국호가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뜻을 모아 만들어지는 우리의 국호이다. 다시 되찾을 COREA는 코리아민족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새로운 시대의 국호이다.
KOREA는 예속과 독재와 분단의 상징이다. 자주와 민주와 통일의 시대를 살아갈 우리들에게 KOREA라는 옷은 유행에 한참 뒤떨어진 낡은 옷이다. COREA를 우리의 옷에 새기고, 얼굴에 새기고, 머리와 가슴에 새겨 넣자. 새 시대에 걸맞는 우리의 국호, 그것은 ‘COREA’이다.(21세기코리아연구소 연구위원 정형기, 2003. 10. 25)
盧, "日, 침략과 가해의 과거를 영광으로 생각"
독일신문과 인터뷰, "일본과 함께 산다는 것은 세계의 불행"
2005-04-08 오전 10:00:42
노무현 대통령은 독도 영유권 문제 등 한일간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의 태도는 인류사회가 함께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와 맞지 않는다"며 "침략과 가해의 과거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전 세계에 큰 불행"이라고 일본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독일 방문을 앞두고 가진 독일의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과의 인터뷰에서 한일간 '외교분쟁'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인들은 과거의 침략전쟁을 왜곡 미화하고 정당화하려 한다는 것"이라며 이같은 입장을 밝혔다고 이 신문이 8일 인터넷판을 통해 보도했다.
"일본 과거 침략전쟁 정당화, 과거 사과 백지화 시키는 행동"
노 대통령은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관련, "이 문제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아주 민감한 이유는 일본이 젊은 세대들에게 역사를 미화시키는 잘못된 교육할 경우 미래에 대한 평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한일간 과거사 문제가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일본이 몇 차례 사과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은 최근 이런 사과를 백지화시키는 행동을 보였다"며 "사과라는 것은 사과한 취지에 저촉하는 새로운 행위를 하지 않아야 계속해서 유효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또 "우리도 과거사 문제를 자꾸 거론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계속 과거사에 얽매이고 싶지 않으며 자꾸 과거를 말하고 싶지도 않다. 결코 기분 좋은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이 현재와 같은 태도를 계속 보인다면 한국 국민은 유사한 사건이 반복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와 불안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일본의 태도는 인류사회가 함께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와 맞지 않다"며 "침략과 가해를 과거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전 세계에 큰 불행"이라고 강도높게 일본을 성토했다.
"독도 편입이 바로 전쟁행위.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韓.中에 모욕행위"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선 노 대통령은 "독도는 침략전쟁으로 빼앗아 간 땅으로 그것을 우리는 1950년대 초에 돌려 받을 수 있었는데, 일본이 결국 침략전쟁의 결과물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 한국 국민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점유에 관한 것, 독도에 대한 실효 지배권을 행사한 것에 대해 우리는 수많은 증거가 있다"며 "그러나 점유에 관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이 독도를 편입했던 과정이 바로 전쟁 행위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나는 독일과 프랑스가 이룩한 화해, 나아가 철강 석탄 공동체에서 유럽 공동체를 거쳐 유럽연합(EU)으로 서서히 발전을 이룩한 것을 관심과 경탄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면서 "독일이 어떻게든 과거를 스스로 극복하고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이런 과정에서 생겨나는 국내에서의 긴장을 극복해 나가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역량이라고 생각한다"고 독일의 과거사 반성을 높게 평가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우리나라를 포함해 중국, 일본 즉 동북아에서는 아직까지 그런 희망의 징조가 없다"며 다시 한번 일본을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한국은 물론 중국에게도 "대단한 모욕"을 가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고 이 신문이 밝혔다.
"북핵문제, 미국에 새로운 양보 요구하는 건 무리"
한편 북핵 문제에 대해 노 대통령은 "지금 시점에서 미국측에 새로운 양보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좀 무리"라며 "우선 북한이 협상 테이블로 복귀해야 한다"며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촉구했다.
노 대통령은 "우리는 미국측에 북한의 정권 교체를 의도하거나 핵무기를 포기하는 이상의 요구를 제기하는 발언을 하지 말도록 요구했다"며 "미국은 그 사이에 몇가지 감정적인 표현들을 보이기도 했지만 북한에 대해 어떤 공격적인 행위를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에 대해 "대단히 전략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에 대해 노 대통령은 "현 상태에서 회담을 특별히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지금 시점에서 북한이 이런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노 대통령은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회담을 제의해올 경우 언제 어디서든지 그와 만날 용의가 있다"면서 "남북대화의 주제는 전부 북한 핵 문제로 집중될 수밖에 없고 한국은 결국 미국측과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입장을 갖기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정된 평화구조가 무엇보다 중요"
노 대통령은 독일 통일에 대해 "축복받은 일"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독일과 같은 방식의 통일은 그대로 반복될 수는 없는 것"이라며 한반도 통일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노 대통령은 "우리는 경제적 통합을 이룩해 나갈 수 있는 한국 경제의 역량을 고려해야 할 것이며 이런 통합의 결과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할 것"이라면서 "남북간의 불균형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사회적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역량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한 이후에 한반도에서의 조속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어떤 일괄적 정책도 제시하지 않았으며 조속한 통일을 실현하고 싶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는데, 통일을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통일을 자주 말할수록 통일은 더욱 어려워진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어 "한국 통일정책에서 첫 단계는 남북한 연합으로 EU에서의 국가간의 관계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아직은 이런 시기가 오지 않았다. 나는 안정된 평화 구조가 어떤 관념적인 통일 계획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인터뷰/임종석의원 “햇볕정책 계승 아직 모델이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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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작성일: 2004-07-22 | ||
북한문제 안정보장이 필요하다 386의원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임종석의원. 16대에 이어 17대에도 무난히 국회에 입성한 그의 정치적 관심사는 무엇일까. 임의원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위 위원이다. 우선은 그의 정치적 관심사가 남북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탄핵정국 이후 국민적 관심사에서 한층 초라해져 가기만 하는 열린우리당의 386의원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 내부의 갈등이나 정책혼선 등 신중치 못한 행동 등이 복합적으로 누적된 것이다. 탄핵국면에 비하면 이후는 상당히 이완되어 있어 긴장감이 떨어졌다. 서민 살림살이는 더 어려워지고 챙겨야 할 민생문제 등 개혁과제가 많은 데 당이 신속하게 정비에 나서지 못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면치 못한 열린우리당의 패배 원인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용을 보면 열린우리당의 총체적인 문제점을 짚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는“정리”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사용했다. 그러면서도“잘 될 것”이라는 말로 당의 미래를 시사했다. 이 시대의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국가권력과 시장경제의 현재 틀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해, 그의 진보의 개념은 기존의 이념적 토대에 기반을 둔 진보의 개념을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진보정당이냐는 질문에는“좌파이념에 기반을 둔 민주노동당이 있는 한 진보정당이 아니다”라고 답해 그이 진보관을 명확하게 들여다보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의 관심사는 남북문제였다. “안전보장만 해결된다면 김위원장은 개혁 개방을 해나갈 의지가 확실한 사람이라고 본다.” 김정일국방위원장에 대한 그의 시각은 북한을“파트너”로 인식하는 그의 남북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에서의 햇볕정책을 계승한 참여정부가 아직 계승정책의 모델을 제시하지 못했다며 이 부분에 대한 정책계발을 강조했다. 이어 현재 진행중인 남북국회회담이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통한 남북교류촉진법의 개정과 냉전적 제도와 시스템을 개혁할 호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라크파병문제 역시 자신의 기본 태도와 변함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라크에서의 UN의 역할에 따라 파병문제를 유연성 있게 대처할 의중임을 비쳤다. 그렇다면 그의 이념적 포지션은 어디에 놓여 있을까. “생각 안 해봤다. 자신의 이념적 포지션은 스스로가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규정해 주는 거라고 본다.” |
인터뷰/데일리서프라이즈 서영석 전문기자-“지방대 중심의 새로운 글쓰기 주류 발굴할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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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작성일: 2004-09-22 | ||
"시대상황이 바뀌면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웹진 서프라이즈의 서영석 전대표는 최근 데일리서프라이즈의 창간과 관련해 자신의 입장변화를 이렇게 말했다. 웹진 서프라이즈와의 관계청산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2002년 대선 당시“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므로써 내 역할이 끝났고 생각했는데, 의회의원들의 주체라는 문제가 남아있어 목숨이 연장된 것”뿐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따라서“새로운 대통령 새로운 국회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 끝났기 때문에”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웹진 서프라이즈 대표로서의 서영석이 아니라 데일리서프라이즈의 전문기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섰다는 얘기다. 아울러 그는 웹진 서프라이즈와 데일리서프라이즈의 역할 분담만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서 웹진서프라이즈의 필진을 데일리서프라이즈로 영입하지도 않았다. 웹진서프라이즈의 영역과 역할은 그대로 놔두고 데일리서프라이즈는 새로운 글쓰기의 논객 즉 지방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글쓰기 주류를 만들어 낸다는 계획을 실천하고 있다. 물론 서영석씨로서는 웹진서프라이즈의 논객들이“굉장히 좋은 분들이 많고 아깝”고 또“개인적으로는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않”다. 그러나 데일리서프라이즈가 등장함으로써 서프라이즈의 영향력이 쇠퇴하지 않을까는 우려 때문에 역할분담만은 분명하게 지키고 데일리서프라이즈는“새롭게 모든 영역을 만들어 간다”는 원칙을 세웠다. 또 조선일보를 타겟으로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에 대해서도 그는 단호하다. 오히려 조선일보에 대한 호의적인 부분이 있다는 점도 숨기지 않는다. “나는 조선일보가 갖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이“안티조선이라는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회운동”이고 데일리서프라이즈는 언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언론으로서의 데일리서프라이즈는“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큰 목적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조선일보) 조직을 죽여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또“그럴 이유”도“없다”. 함께 그는 데일리서프라이즈의 오프라인으로의 확대계획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서영석씨는 자신의 이념적 포지션에 대해서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어느정도 자유경쟁을 보장하고 개인 능력의 격차를 인정하고 그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는 사회적 시스템이 보장해 주고 정도”가 그가 생각하는 사회변화의 정도다. 따라서 자신 같은 사람이“보수주의자라고 할 때 우리 사회는 바뀐 것이라고”본다고 말했다. 나아가“노무현정권은 중도우파인 보수주의정권이며, 보수주의자라는 이유로 나쁘다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지난 8월9일 데일리서프라이즈에서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데일리서프라이즈, 오프라인 계획 있다 서프라이즈에서의 입장정리가 끝났는데 그간 서프라이즈의 역할에 대해 자평해 달라. “시대상황이 바뀌면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므로써 내 역할이 끝났고 생각했는데, 의회의원들의 주체라는 문제가 남아있어 목숨이 연장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대통령 새로운 국회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 끝났기 때문에 내 역할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계기가 없었는데 이번 일이 계기가 되서 정리를 하게 된 것이다. 서프라이즈는 앞으로 영구불멸하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나아갈 것이고 그런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그러나 서프라이즈 속에서의 내 역할은 이제 이미 정리가 됐다. 나는 새로운 역할을 찾아 나아가야 한다. 과거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서프라이즈는 내가 없어도 새로운 개혁적인 담론들이 만들어지고 그런 것들이 전파될 것이고, 계속 지금도 성장하고 있잖은가.” 하지만 서전대표가 서프라이즈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을 것도 같다. “그게 서프라이즈 초창기 같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별 상관없다고 본다.”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웹진 서프라이즈의 논객들이 옮겨오지 않는가? “기본적으로 데일리서프라이즈는 웹진서프라이즈의 논객을 쓰지 않는다. 굉장히 좋은 분들이 많고 아깝다. 또 개인적으로는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은데 안 쓰는 이유는 행여 데일리서프라이즈가 등장함으로써 서프라이즈의 영향력이 쇠퇴하지 않을까는 우려가 있다. 그래서 역할분담을 시키는 것이다. 그 부분은 우리가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프라이즈의 것이고 우리는 새롭게 모든 영역을 만들어 갈 것이다.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고 있고 이미 글쓰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는 새로운 글쓰기를 하는 사람을 발굴하는 것이 목적이다. 지금 서프라이즈는 자발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데일리서프라이즈는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숨어있는 새로운 글쓰기를 하는 사람을 발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흔히 글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 말고 전혀 새로운 사람들을 발굴 등용할 것이다. 서프라이즈에서 글쓰는 사람을 데려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필진들의 이동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닌가. “인위적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인위적으로 막는다는 것이 어폐가 있지만, 어쨌든 서프라이즈의 논객들은 구조화 되어 있다. 그 자체가 움직이게 놔두는 것뿐이다. 우리는 칼럼리스트라는 현 글쟁이들이 주류를 배제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하는 새로운 주류를 만들어낼 것이다. 제도권에서 현재 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아닌 지방대중심으로 한 글을 쓸만한 사람을 소개도 받고 접촉을 하고 있다. 우리는 사설이 없다. 사설을 쓸만한 사람이 없어서이다. 그렇다고 우리 형편에 논설위원을 초빙해서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시론과 칼럼 위주로 해나갈 것이다. 기획하고 있는 게 4가지다. 첫째는 14명을 선정해 7명씩 나눠서 매주 1편씩 쓰게 하면 매주 2편의 칼럼이 나온다. 시론은 300명 정도의 투어를 구성해 시론을 쓰게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정치전문이라고 하는 데 그건 아니고 데일리서프라이즈의 케치프라이즈가 중소기업을 살리자이다. 중소기업을 살릴 수 있는 방안들이 많이 논의되고 있는데, 중소기업 CEO들이 직접 글을 통해 자신들의 얘기를 하게 할 것이다. 한 60명에서 120명 정도의 CEO들을 구성해 두 달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씩 이들의 중소기업을 살릴 수 있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 할 생각이다. 그들이 중소기업의 활성화에 대한 대안까지 제시할 수 있는 CEO칼럼이 될 것이다.” 데일리서프라이즈가 오프라인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 “오프라인 계획을 가지고 있다.” 데일리서프라이즈는 언론개혁 차원이다 웹진 서프라이즈에서 데일리서프라이즈에 필진들으로 참여하겠다는 사람이 있나?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없고, 인터뷰전문기자 지승호씨는 같이 일할 것이다. 1주일에 한 번 정도이며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정치기자들이 중심으로 국회를 바탕으로 취재를 해나가겠다고 했는데. “모든 사회문제 해결책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들이다. 이들이 이런 역할을 하고 우리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들이 취재의 바탕이다.” 기자 출신이고 잔뼈가 언론에서 굳었다. 진정한 언론이란 뭐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기본적으로 언론개혁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데일서프라이즈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지식층을 만드는 것도 언론개혁과 같은 맥락이다. 중소기업을 살리자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을 살릴 수 있는 여러 방안이 많이 있지만 중소기업을 실제 운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정책결정자들이 정책에 반영하고 실천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언론개혁을 해야한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언론개혁의 주체자들은 언론사 혹은 언론인들인데 그것이 여러 가지 제약조건 때문에 고쳐지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일을 함으로써 스스로 고쳐지는 모습을 보이고 이것이 독자들에게 와닿고 인기를 얻고 영향력을 가짐으로써 다른 언론사들을 계인하자는 솔선의 목적이 있다. 언론사의 가장 큰문제점은 언론 자체가 권력화 되어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권력화 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언론계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권력이라고 본다. 왜 권력이냐 하면, 언론은 여론을 주도하고 있고 이 카테고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격조건이 제한이 되어 있다. 언론고시라는 게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일단 들어가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고 지금 언론계는, 100% 그렇지는 않지만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외대 성균관대 등 5-6개 대학을 제외하면 들어가기가 힘들다. 이런 카테고리 속에서 들어가는 데 있어 기득권이 형성되어 있고 기득권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고, 들어가고 나서는 취재도 잘 안하고 하는 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그런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지 않은 제 3,4의 대학출신을 많이 포용해서 훈련을 시키고 열심히 취재하는 언론 내부의 개혁을 해보자는 목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언론사 간에 꺼렸던 언론사 이야기 기자들의 이야기도 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역의 침범 즉 사생활침해로 인한 명예훼손이라든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는가? “법률자문단을 구성할 것이다. 5-6명 정도의 언론 관련 변호사를 구성해서 자문을 받아 나갈 것이다. 특히 언론과 관련한 기사는 대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문을 받을 것이며 그것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할 것이다. 나는 소송에 관해 전문가다. 전체 5,60 건의 소송을 당해봤는데 단 한 건도 패소하지 않았다.” 기자의 자질은 뭐라고 보나? 기자는 다른 직업과 다른데, 국민들도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기자들의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라든가, 취재의 성실성 등 기본적 기자로서의 정도가 있지 않겠나? “글쎄, 기술적인 문제의 자질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신문에 나오는 기사가 100%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오산이다. 기사는 검증 시스템을 거치게 된다. 기자가 쓴 기사는 데스크의 손이 거쳐지기 때문에 기자가 쓴 것이 그대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 기자들 같은 경우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글쓰기에 문제는 있을 수는 있겠지만 훈련을 하고 있고 데스크진이 구성되면 별 문제는 없다고 본다. 오늘날의 기자는 생활인으로서의 위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직업인으로 직장인으로서의 기자의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다고 보는데 다만 기자의 글이 사회적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볼 때, 우리 사회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주도하는 데 기여하자는 공동의 목적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런 공공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기사를 생산하는 것이지 특별히 누구와 무슨 원한관계에 있어 기사를 쓰는 것이다. 조선일보 같은 경우 못할 짓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응보를 받을 언론사이지만 우리가 꼭 그걸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일보도 언론사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룰 뿐이다. 다만 조선일보가 사회적 영향력이 크고 사회적 해악이 크기 보다 좀더 다른 언론사 때문에 많이 다룬다는 차이점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일보를 유독 타겟으로 생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죽이기 위해 데일리서프라이즈 있는 것 아니다 그러나 조선일보와의 이념적 대립각은 있지 않겠는가? “나는 조선일보가 갖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장점보다 단점이 많기 때문에 장점이 상대적으로 가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객관적 입장에서 조선일보를 바라보고 있다. 안티조선이라는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회운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큰 목적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 조직을 죽여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우리로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 조선일보는 스스로 무너진다든가 시민운동으로 인해 타격을 받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조선일보를 죽이기 위해 등장한 것은 아니다.” 아직 사이트 오픈 전이지만, 취재가 진행됐을 텐데, 특종이랄 기사는 있나? “그건 우리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말 할 수는 없고, 뭐 너무 어렵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 번 나온 것을 보고 기대를 하고 기대를 접고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유난을 떨지도 않을 것이고 처음에 굉장히 많은 기대를 한 사람들에게는 실망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야 좋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루 이틀에 평가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하루 이틀의 평가를 위해 특별한 것을 준비하고 있지는 않는다.” 기자들은 온라인 출신인가 오프라인 출신인가? “오프라인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전문기자로서 일하고 싶다 웹진 서프라이즈하면 노빠라고 부르는데, 이런 대중적 이미지가 데일리 서프라이즈에도 그대로 인식되어지지 않을까 하는데. “서프라이즈는 정론이다. 대중의 인식이 잘못된 것이다. 개혁을 하자 그랬는데 그 개혁의 주체가 노무현대통령이어서 그것을 지지한다고 노빠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문제다. 80%이상은 노빠와 관련이 없다. 그건 기사가 말해 줄 것이다. 내가 스스로 노빠다 아니다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우리가 하루 이틀 하고 말 것도 아니고 장기적으로 할 것인데.” 데일리서프라이즈에서 서대표의 역할은 무엇인가? 경영자도 영입을 하고 편집국장도 영입한다고 하는데 구태여 서대표가 중책을 맡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나? “구태여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그럴 필요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나는 책임있는 역할을 맡는 것이 싫고 지겹다. 또 한다고 생각하니까 캄캄했다. 나는 기자로서의 역할을 더 하고 싶다. 전문기자로서 더 활동을 하고 싶은 뿐이지 나는 남의 얘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다.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다만 이 계획을 진행하면서 마지막으로 기자로서 일을 더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언론개혁이라든가, 친일문제라든가 이런 기획시리즈를 계획하고 있는데 이런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부분은 능력있는 편집국장에게 맡기고 나는 세부적인 부분을 맡아 심도있게 일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없어도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빨리 만들어놓고 앞으로 평생 놀고먹을 것이다. 내 소원이 평생 놀고 먹는 것이다. 그걸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총선 이후 개혁추진을 어떻게 보는가? “열린우리당에 대해서는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지금 노무현대통령이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열린우리당이 하는 일도 그렇고 우리 사회의 수십 년의 틀을 바꾸는 일이다. 어쩌면 이일은 끝까지 가야하고 다음 정권까지 가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단기간에 표가 나고 평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방향과 수순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를 봐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긍정적이다. 어떤 일을 목적으로 갈 때는 여러 과정을 거치는데 돌아가기고 하고 곧바로 가기도 한다. 앞서간다고 좋아할 필요도 없고 돌아간다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곳으로 가고 있는 가이다. 어떤 한 가지 일을 놓고 판단을 하는 것은 숲은 안보고 나무만 보는 것과 같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이 시대의 진보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글쎄, 진짜 어려운 질문인데.” 나도 몰라서 묻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대통령의 표현이 딱 맞다고 본다. 우리사회가 어떤 방향으로든지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이 틀을 바꿔서 가자는 사람과 반대로 아니다 그대로 가도 된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둘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꾸고 나가자는 사람이 진보이고 그냥 가자는 사람이 보수라고 본다. 그러나 이념적으로 보면 굉장히 다르다. 이념적인 측면에서 보면 바꾸고 나가자는 사람도 보수일 수 있다. 나도 보수주의자이다. 왜 보수냐. 우리 사회의 주류를 바꾸자는 데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틀을 완전히 뜯어고치자는 입장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처럼 분배의 시스템을 모두 바꾸자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정도 자유경쟁을 보장하고 개인 능력의 격차를 인정하고 그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는 사회적 시스템이 보장해 주고 하는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이정도면 건전한 보수주의자 입장이다. 좌파의 시각으로 보면 보수주의가 맞지만 보수주의자라는 이유로 나쁘다라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노무현정권도 보수주의 정권이다. 역시 노무현정권도 보수주의인데 보수주의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욕을 먹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 노무현 정부는 중도우파정권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도 중도우파다. 자칭 우파 입장에서는 좌파고 자칭 좌파입장에서 보면 우파이다. 한나라당은 절대 보수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수구이다. 나 같은 사람이 보수주의자라고 할 때 우리 사회는 바뀐 것이라고 본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보는가? “명백하게 진보하고 있다. 역사가 진보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됐겠나. 느리지만 꾸준히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수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개인적 화두는 무엇인가? “아무 생각없이 놀면서 살자는 목적을 향해 지금까지 일하면서 살아왔다. 무위도식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고 산다. 무위도식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아이러니 속에서 살아왔다.” 무슨 선문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다. 진짜 그렇다. 나는 책임감 같은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지금부터 내 생의 최대 목표는 빨리 손을 털고 약간의 돈을 가지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사는 여건을 만드는 데 노력할 것이다. 나는 남의 시선은 전혀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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