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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노동절 결의문

 

115주년 세계노동절기념대회 결의문


마침내, 닻은 올랐다.

  우리들의 투쟁으로 악법중의 악법으로 820만 노동자를 구렁텅이로 몰아 넣으려 하던 정권과 자본의 음모는 박살나고 말았다. 이제 저지투쟁을 넘어 비정규 노동자의 권리를 실질적 보호법안 쟁취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차별과 불안정 노동으로 고통받는 820만 비정규 노동자의 노동기본권과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새로운 투쟁, 공세적인 투쟁으로 전환하였다. 전조합원이 열성적으로 참가한 총파업 찬반투표와 광화문을 가득채운 10만 노동자대회, 11월과 4월 1일, 두차례의 당당한 총파업 등을 통해 사회쟁점화에 성공하였고, 그 힘에 의해 교섭투쟁이 치열하고 끈기있게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근거없는 낙관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수세적인 타협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강력한 총파업 투쟁과 공세적인 교섭투쟁을 병행해 나가며, 실질적인 권리보호 법안 쟁취를 위해 총매진해 나갈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갈갈이 찢어져 둘로 나눠져 있다. 극소수의 가진 자와 수천만의 가난한 자로 갈라져 있다. 돈이 없으면 치료조차 받지 못하여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돈이 없으면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사회는 둘로 나뉘고, 빈부격차는 우리 모두를 질식시키고 있다. 빈부격차를 해소하지 않고서 70만 노동자만의 삶이 나아질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극소수의 가진 자만을 살찌우는 세상을 거부한다. 우리가 낸 세금이 비리와 전쟁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을 거부하며, 민중을 위해 사용되도록 만들 것이다.

  비정규 권리보장과 무상의료 무상교육 쟁취, 그리고 정부가 추진중인 노사관계로드맵 저지와 노사관계의 민주적 개편이라는 당면한 3대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제115주년 세계노동절대회를 맞아 다음과 같이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정부의 비정규 노동법 개악법안이 사실상 폐기되었음을 선언하며, 비정규 확산과 차별을 막고 인권과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인 비정규 보호법안 쟁취를 위해, 지도부의 투쟁방침에 따라, 총파업을 포함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투쟁할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2005년 산별임단투를 통해 비정규 정규직화와 차별철폐, 연대임금 등의 요구를 반드시 쟁취하며 법정 최저임금 월 815,100원과 산별최저임금 쟁취투쟁을 강력히 전개할 것이다. 또한 820만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전조합원 비정규 기금 50억원 조성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발생한 심각한 빈부격차의 책임은 잘못된 정책을 추진해 온 정부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며, 그 해결방안으로써 무상의료 무상교육 쟁취를 위해 총력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쟁취, 무상의료 무상교육 실시, 노사관계로드맵 저지와 노사관계 법제도의 민주적 개편 등 3대 요구를 내걸고, 앞으로 365일 후가 되는 제116주년 세계노동절을 기점으로,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투쟁에 돌입할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2005년 5월 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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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사] "참세상은 해방을 위한 진실의 문을 열 것이다"

[창간사] '참세상'을 열며
"참세상은 해방을 위한 진실의 문을 열 것이다"
참세상 
바뀐 미래의 이름, 참세상

2005년 오월 초하루 메이데이 우리는 참세상을 연다. '참세상'은 우리가 지향하는 세상의 이름이자 이 세상을 앞당기려 만든 매체의 이름이다. 어떤 세상이 참세상인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착취, 자연의 인간에 의한 파괴가 사라진 세상, 우리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생산하고 활동할 수 있는 세상, 호혜와 연대를 기반으로 각자 마음껏 자신의 에너지를 펼치는 세상, 지배와 함께 허위도 사라진 아름다운 세상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이 참세상을 여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세상! 이것은 우리가 미래를 향해 쏘아 올리는 희망의 화살이다. 바뀐 우리 미래의 이름, 참세상! 이 작명으로 우리는 태어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염원을 담는다. 물론 이름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만들어지지는 않으리. 그래도 우리가 바뀐 미래를 원한다면 그 이름을 짓는 것은 필수적이다. 참세상! 이 이름으로 우리는 저만치 머뭇거리고 있는 참세상을 부른다.

참세상은 민중언론

참세상은 어떤 언론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지배의 위선을 배격하고 해방의 진실을 펼쳐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언로는 막혀 있다. 부당한 지배의 억지 논리와 거짓 증언들이 난무한다. 허위와 진실을 구분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어렵고 복잡해졌다. 그래도 거짓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직 진실 하나뿐, 참세상은 세상의 진실을 찾아 그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진실은 핍박받는 민중의 진실이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 민중은 착취와 차별과 억압의 짐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참세상은 해방을 갈구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참 언론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민중언론을 자임한다. 그동안 민중언론은 너무 수가 적었거나 미약하였다. 한국의 언로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보수언론이다. 이들은 민중을 착취하는 세력을 지지해야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만큼 당연히 민중 편이 아니다. 민중의 진실을 외면하기는 1980년대 말 이후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출범한 이른바 개혁적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지난 십 수년에 걸쳐 민중 수탈을 강화해온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의 거짓 발언을 조장했거나 방관해왔다.

최근 새로운 매체 환경 속에 등장한 인터넷 언론 또한 민중의 진실을 제대로 전하지는 못했다. 해방의 진실을 전달하려고 애쓴 흔적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그동안 커진 발언권에 비하면 너무 미약한 노력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런 언론 지형에 개입할 것이다. 우리는 진보와 변혁의 대의를 따르는 민중적 노선을 분명히 할 것이다. 참세상은 민중언론이다!

참세상은 민중해방의 지지자로서 민중운동의 발전에도 보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민중의 진보운동은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극복해야 할 문제 또한 적지 않다. 정치와 경제와 사회문화 곳곳에서 애써 거둔 진보적 성취들이 흩어져버리면서 민중운동은 여전히 보수세력의 지배 전선을 돌파하지 못한 모습이다. 민중의 힘은 분산되었고 민중운동 내부에는 상호 불신의 모습까지 눈에 띈다. 우리는 민중이 일사불란한 진형을 갖추어야 한다거나 서로 비판을 삼가야 한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보적 사회운동들이 서로간에 감시와 비판을 게을리 하지는 아니하되 포근한 연대의 마음을 품는 노력은 언제나 중요하다. 참세상은 어려운 처지에서 벌이는 민중의 노력들과 힘겹게 거운 성과들이 공명을 이루며 진보의 효과를 내도록, 연대의 성과가 만들어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동시에 참세상은 민중의 편이 아닌 쪽과는 분명한 차이의 선을 그을 것이다. 우리는 민중을 착취하고 차별하고 탄압하고 억압하는 모든 세력들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우리는 자본과 국가, 부르주아시민사회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다. 우리는 계급과 성과 인종·민족과 세대 등 사회적 분할 전선을 지배하는 세력들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고 이들 전선의 모든 진보적 투쟁과 함께 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오는 어떤 반민중적 침략과 압박과도 싸울 것이다.

민중을 믿으며 민중과 함께

민중언론의 기반은 민중이다. 우리가 할 일은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민중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민중의 다양한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민중에게는 말할 권리, 불평할 권리, 따질 권리, 요구할 권리, 싸울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이런 권리를 요구하며 쟁취하려 나선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살 권리, 기쁨을 누릴 권리, 행복해질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민중언론이다!

나아가 우리는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하려 한다. 우리 민중은 서로 가족이고 친구이고 동지이고 연인이다. 우리는 함께 가난하고 불쌍하고 억울하며 비천하다. 우리 민중의 일상은 슬픔과 회한과 분노, 정열과 기쁨과 흥취를 서로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감흥을 공유하며 민중의 관점과 판단으로 세상을 보고, 민중의 염원을 담아 세상을 바꾸고 싶다. 참세상은 따라서 수많은 민중적 감각과 예지, 능력들이 합쳐지는 마당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참세상을 꾸리기 위해 민중과 더불어 더 깊게 느끼고, 더 예리하게 보고, 더 정열적으로 말하고 실천할 것이다.

우리는 믿는다. 민중에게는 엄청난 역량이 있다. 참세상은 민중 아닌 누가 던져줄 선물이 아니다. 오직 우리 민중의 힘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충분히 있다. 민중에게는 꿈과 희망이 있고, 모든 좋은 것들을 생산할 삶의 에너지가 있으며, 호혜와 연대의 울타리가 있고, 기쁨을 함께 할 감성과 정열, 판단력과 예지가 있고, 이 모든 것들을 발휘할 문화적 힘이 있다. 우리는 또한 비판적 시각으로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희구,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아 오르는 새 세상에 대한 염원과 그것을 기획할 상상력이 있다. 민중은 능력 그 자체이다.

참세상은 이런 능력으로 해방을 위한 진실의 문을 열 것이다. 우리의 진실은 민중의 감성과 지성과 기질과 도의에서 그 힘이 나온다. 우리는 민중적 진실의 힘이 얼마나 큰지 입증할 것이다. 우리가 쓸 기사와 칼럼과 논설, 참세상을 탈 문자와 이미지와 소리는 따라서 모두 진실을 진실로 말할 것이다. 우리는 외면당해온 민중의 진실, 지하수가 되어 흐르는 이 진실의 생명수를 길러내 위선과 거짓으로 달뜬 지배자의 얼굴에 뿌릴 것이다.

다양한 민중을 다양하게 표현

진실의 힘, 그 원천은 순수함이다. 우리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한 것이 어린아이였음을 기억한다. 순수함이 아이로 하여금 검열과 침묵, 그리고 지배의 족쇄를 풀어 던지게 했다. 우리 민중도 진실의 차꼬를 풀어내는 천진난만한 아이이다. 그리고 민중은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아이처럼 다양한 능력이 있다. 진실을 말하는 방식도 창의적이며 다양하다. 참세상은 민중의 이런 능력으로 다양한 진실의 언어를 발굴할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준열하겠지만,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비통하게, 때로는 희화적으로 세상과 만나고 민중과 만나며, 지배자들을 바라볼 것이다. 참세상은 민중이 말하고 쓰는 능력을 스스로 기르는 교육장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민중이다. 우리는 곳곳에서 넘쳐난다. 우리는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청소년, 노인이다. 우리는 학생이고, 주부이고, 비정규직이고 페미니스트이고, 동성애자이다. 우리는 일자리와 땅, 집을 잃은 억울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하여 삶을 개선하고 싶은 소박한 시민이다가도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은 혁명가이다. 우리는 착취당하고 주변으로 내몰리고 억압받지만 동시에 저항하며 인간다운 삶을 꾸리고자 "이제 그만!"이라며 일어서는 모든 소수자들이다.

참세상의 우리도 이런 인간이다. 우리도 노동하고 생산하고 활동하며, 우리도 고뇌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 민중의 꿈과 에너지가 우리 안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 활활 타고 넘쳐나는 민중의 에너지로 우리는 오늘 참세상을 연다. 진실의 큰문을 열고 지배의 허위들을 벗겨내자. 민중의 생명력을 앗아가려는 모든 것들과 투쟁하자. 가서 우리가 잃은 것들을 되찾고 우리의 활력을 보여주자. 우리는 넘쳐난다. 그렇다, 우리는 민중이며 민중언론이다! 자랑스런 우리, 가자 나아가자, 참세상을 향하여!
보편과 상식의 좌파적 가치 실현, 민중언론의 길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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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 금속연맹 선거에 대하여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은 있는가?-김삼연
| 분류 : 현장소식 | | HIT : 20 | VOTE : 0 |
[현장소식]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은 있는가?
- 금속연맹 선거에 대하여 -

김삼연(전국노동자회 사무처장)

1.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정파

민주노조운동을 혁신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상당기간 쇠락을 거듭해온 민주노조운동이, 지난 십수년의 관성이 몸에 박힐대로 박힌 활동가들이, 더구나 그들이 여전히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임을 자처하는 현실에서 혁신을 논의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혁신이라는 표현자체가 관성화되었을 지경이다. 저마다의 입맛대로 혁신은 뒤틀려있다. 어쩌면 지금의 혁신은 이합집산의 다른 표현처럼 들린다.
민주노조운동이 쇠락한 원인은 정권의 탄압과 자본의 교묘한 길들이기에만 있지 않다. 민주노조 내부로부터 곪아온 노사담합과 ‘계파’혹은 ‘정파’로 표현되는 현장조직운동의 타락에도 적지 않은 원인이 있다.

기아차 취업비리 사건에 대해서도 많은 활동가들은 터질 것이 터진 것 아니냐는 조소를 보낸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덮을 것인가에 더 골몰하고 있다. 대공장 노조를 중심으로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것은 제스쳐를 넘어선 실천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실천을 선도하여야 하는 것이야말로 현장조직의 임무다. 임금인상투쟁 자체가 선도적 정치투쟁이었던 시대가 지나고, IMF이후 정리해고에 맞선 수세적 방어 투쟁으로 전환 된지 상당한 기간이 흐른 지금 상당수 현장조직들은 과거의 선도성은 사라지고 얼마 안 되는 자리다툼 정치에 조직의 이름을 내다 판지 오래다. 노조 권력을 둘러싼 이합집산만이 유일한 선도성인 현장조직들이 다수인 현실이다. 사측과 거래하는 어용조직들 뿐만 아니라 칼날같은 기풍과 원칙적인 현장 투쟁으로 기세를 떨쳤던 현장조직들도 점차 선거용 조직으로 변질되어 왔다.

2005년 연초부터 세상에 공개되기 시작한 민주노조운동의 치부는 서막에 불과했다. 기아차 취업비리 사건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파행은 민주주의와 변혁의 주체임을 자부했던 민주노조운동에 심각한 정치적, 도덕적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것은 치유되기는커녕 점점 더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내부 반성과 비판이 결여된 채 치부 덮기와 변명에 급급한 민주노조운동의 모습은 현장의 많은 활동가들과 조합원들을 우울하게 하고 있다. 더구나 비판의 칼을 빼어들고 과감한 내부 혁신의 수술을 단행하는 모습보다는 서로 눈치보기에 바쁜 게 현실이다. 헌신적인 현장의 활동가들과 조합원들을 매도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썩은 상처를 도려내고 새살을 돋게 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단사와 지역, 자기조직의 이해를 넘어서는 과감한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 조합원을 모욕하는 야합에 대한 분노

위에서 말한 것처럼 치부를 도려내고 새살을 돋게 하기 위한 내부 혁신투쟁에 전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을 분노하게 하는 사건이 금속연맹 선거에서 벌어졌다. 소위 민주노조운동에서 내노라하는 세 정파가 모여 단일 선본을 꾸린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동지적 비판과 자기 반성, 연대를 위한 새로운 실천의 모색 따위는 전혀 없었다.
세 정파가 힘을 합치면 금속연맹 선거는 해보나마나한 것이라고 소위 세 정파의 지도부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실 경선이 안 되었다면 이번 금속연맹 선거는 지난 두 차례 전투로 지칠대로 지친 세 정파가 휴전을 선언하고 서로의 땅을 지키자는 야합이 연맹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구세주로 둔갑하게 되었을 것이다. 지난 두 차례의 선거과정과 함께 이번 선거에서 펼친 정책이나 운동과정만 봐도 이번 야합이 얼마나 고육지책이었는지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선거기간 전은 물론 선거기간 중에도 주먹질하고 이간질하던 사람들이 하나의 선본으로 ‘야합’한 것을 ‘대단결’이라 억지 주장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조합원을 우롱하고 모욕하는 이러한 행태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세 정파의 야합에 대항한 박병규 선본의 조직력은 세 정파의 연합선본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선거를 준비하는 실무 주체역량도 미비하였다. 혹자가 박병규 선본이 대단한 선거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지 모르겠으나, 박병규 선본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장점은 오랜 기간 동안 현장 활동에 주력하면서 정파활동에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고 주장과 행동을 일치시켜온 후보들의 이력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현장성은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에게 신뢰를 얻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요즘처럼 이합집산의 정치가 난무하는 시대에 정치에 구애받지 않고 원칙적 활동과 동지적 애정을 몸소 보여주는 활동가들을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후보들이 득표에 영향력이 적은 것은 둘째 치고, 어떠한 정략적 이해관계도 없는 장기투쟁 사업장과 중소영세사업장을 직접 찾으며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려했던 활동자세는 현장의 조합원들과 활동가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어쨌든 조직력과 선거 실무력이 모두 부족한 상태에서 치른 선거에서 정책 공약을 중심으로 한 주장과 대의원 득표 모두에서 선전을 한 것은 박병규 선본이 가진 현장 활동의 원칙성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현장의 분노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선거는 야합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150대 197이라는 결과는 이변 그 자체다. 대의원들의 성향을 보더라도 이것은 놀랄만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명분이 없다하더라도 상당한 득표력을 가진 세 정파의 득표수는 놀라울 따름이다. 내부적으로 반대표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세 조직이 그동안 주장했던 바와 활동방식에 어긋나고, 당시 국면 또한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내적 근거를 전혀 갖출 수 없는 연합에 대한 반대하는 것은 상식을 갖춘 활동가라면 당연한 것이다. 더구나 추진 과정에서 내부적 민주주의 절차들이 봉쇄되고, 연합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묵살된다면 더욱 그러하다. 결국 연합이란 것이 권력을 나눠먹으려는 세력들과 사람들의 야합일 뿐인 선거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 후보를 지지하는 ‘표’로 동원된 현실에 각 정파의 활동가들 상당수가 ‘반대’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상당수 활동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합선본은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산너머 산이다. 연맹 운영의 원칙을 세우기보다 세 정파의 자리나누기가 우선 합의되어야 하고 모든 사안에 대해 각 정파의 이해를 먼저 고려해야하는 집행부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답답하다. 또 연맹의 지도적 권위가 실추된 상황에서 대산별이 가능할지, 각 지역별, 단사별 개별 행동이 오히려 확대되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3.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천하는 현실로

결과적으로 낙선했지만 잊고 있던 운동의 원칙과 정신을 일깨운 박병규 선본의 선전은 빛났다. 하지만 이번 금속연맹 선거가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하기엔 부족하다. 민주노조운동이 완전히 枯死(고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 정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그 선본 자체가 새로운 가능성이라 말할 수 없다. 선거를 계기로 모인 각 지역의 현장 활동가들이 앞으로 어떤 실천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선본에 모인 계기, 세 정파의 야합에 분노했던 계기, 민주노조운동과 현장조직운동이 혁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들을 포착하여 그 초심을 잃지 않고 활동할 방식과 결의를 모으는 실천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사와 지역의 이해에 따른 작은 차이를 넘어 전국적 시야와 전망 속에서 자기 활동을 결의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러한 과제를 실천적 활동으로 만들어 낼 때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은 현실이 될 것이다.

물론 전국노동자회도 이러한 처지에서 무관하지 않다. 전국노동자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당면한 실천 활동에 대한 자기 계획을 만들고, 그 계획 속에 활동을 결의하는 것이 선행되어야한다. 이번 선거 평가를 통해 얻은 교훈과 과제를 잊지 말고 현실에 투영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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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한-중-일 FTA 경제효과는?

  韓-中-日 FTA경제효과는?…
글쓴이  전국민중연대 등록일 2004-09-14 [20:51] 조회수 70
  200409130252.jpg [24Kb]  

韓-中-日 FTA경제효과는?…中의 절반, 日의 3분의1 예상 | 우리사회 2004/09/14 12:10  
  http://blog.naver.com/widerock1/120005891195 
 
한국 중국 일본 3국간에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될 경우 한국에 돌아가는 경제적 효과는 3국 가운데 가장 낮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농산물 교역의 경우 일본과의 교역에서 흑자가 소폭 늘어나지만 대(對)중국 적자가 큰 폭으로 증가해 전체적으로 농산물 교역에서 적자 규모는 종전의 두 배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됐다. 
산업연구원 유관영 박사는 13일 중국 베이징(北京) 캠핀스키호텔에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주최로 열린 ‘한중일 FTA 협동 연구’ 세미나에서 3국간 FTA가 체결되면 한국은 경제적 후생효과(경제적 이익)가 178억달러 증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유 박사는 반면 일본은 한국의 3.46배인 616억달러, 중국은 2.65배인 473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각각 집계됐다고 밝혔다. 
또 3국간 FTA 체결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효과는 한국이 연간 1.74%포인트로 중국(5.91%포인트)보다는 낮고 일본(0.61%포인트)보다는 높았다. 

3국간 FTA 대신 한국과 중국 양국이 FTA를 체결하면 한국은 GDP 성장률이 1.99%포인트 올라가 3국간 FTA보다 경제적 효과가 높았다. 한일 양국간 FTA 체결은 0.74%포인트 상승하는 효과에 그칠 것으로 분석됐다. 

농촌경제연구원 어명근 박사는 2002년 교역수지를 기준으로 할 때 3국간 FTA가 체결되면 한국이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는 농산물은 합쳐서 10억2990만달러 늘어나지만 양국으로부터의 수입은 23억8700만달러가 증가해 13억5710만달러의 무역적자가 추가로 발생할 것으로 내다봤다. 

3국간 FTA 체결시 양국과의 농산물 교역에서 발생한 적자규모가 2002년(10억8400만달러)의 두 배 이상인 24억4100만달러로 늘어나게 된다는 것. 
이는 일본과의 농산물 무역흑자가 추가로 5500만달러 늘어나는 데 비해 대중 적자가 추가로 14억1200만달러 발생하기 때문. 
  
전문가들은 “FTA 체결이 대세라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늦으면 낙오된다’는 조바심으로 협상에 서두르기보다는 냉철하고 차분하게 실리를 따져보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베이징=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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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 115주년 세계노동절 맞이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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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평] 115주년 세계노동절을 맞이하여

 글쓴이 : 대변인
 등록일 : 2005-05-01   11:00:20 조회수 조회 : 68    추천수 추천 : 0    반대수 반대 : 0    
   


[논평] 115주년 세계노동절을 맞이하여


오늘 세계 노동절에 우리는 또 한번 권리선언을 한다.

노동자의 권리이기 이전에 최소한의 인권의 문제인 비정규직 차별철폐라는 지극히 상식적이인 권리선언을 한다.

우리나라는 노동자를 멸시하고 차별하고 착취해서 빈부격차가 계속 심화되는 기형적 경제성장의 길을 걸어왔다. 820만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고도 전체 노동자를 비정규직화해야 경제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기형적 성장을 계속하겠다는 신자유주의 논리일 뿐이다.

정부와 자본이 비정규직양산법을 만들려하였으나 노동자들의 단결과 저항은 그 억지주장의 허구를 밝혀냈다.

비정규직 양산법은 이미 폐기되었으며 차별철폐 입법안이 시급함을 800만 노동자는 물론 전 국민이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차별에 고통받아온 모든 노동자의 이름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 기간제 사유제한, 파견제 폐지 원칙으로 ‘비정규직 차별철폐’ 입법을 반드시 이루어 낼 것이다. 2005년 노동절을 비정규직 차별철폐 권리 선언일로 기억할 것이다.

2005.5.1. 민주노동당 대변인 홍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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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도자료] 김혜경 대표 노동절 연대사

 글쓴이 : 대변인
 등록일 : 2005-05-01   12:33:54 조회수 조회 : 87    추천수 추천 : 0    반대수 반대 : 0    
   


5.1 노동절 연대사

[*15시 광화문 노동자대회에서 발표]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반갑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민주노동당 대표 김혜경입니다.

어제 430 보궐선거가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많은 관심과 격려로 민주노동당의 후보들을 지지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비록 국회의원을 추가하는 데 실패하였지만 민주노동당에 대한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망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옛말에 민심은 천심이라 했습니다.
2005년 5월, 대한민국의 민심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차별의 해소를 원하고 있습니다.
2005년 5월, 대한민국의 민심은 심화되어 있는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2005년 5월, 대한민국의 민심은 교육 걱정, 의료 걱정 없는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비정규직은 차별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같은 곳에서 일하면서도 비정규직이라는 멍에 때문에 수 많은 노동자들이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임금의 차별은 물론, 노동 3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건에서 100여년전 ‘8시간노동’을 주장하였던 노동자들의 절박함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얼마전, 국가인권위에서는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국가인권위의 의견이 나오자 정부와 여당, 재계는 일제히 인권위의 권고를 ‘월권’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인권의 잣대로 경제를 망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정부와 여당에게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이제 더 이상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상대로 우롱하지 마십시오.
“만약 정부와 여당이 1%도 안되는 자본을 위하여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짓 밟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경제는 살아날 수 있겠지만 들불처럼 일어날 노동자들의 투쟁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부와 여당, 재계는 인권위에서 권고한 기간제 노동의 사용사유 제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원칙 채택, 파견제의 포지티브 현행방식 유지와 서면계약, 사용자 책임강화, 파견노동자 노동 3권 강화등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해야 합니다.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권리보장법안을 쟁취할 수 있도록 국회내외에서 총력투쟁을 전개해 나가겠습니다.

동지여러분
4.15총선이 끝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4.15총선은 노동자, 농민, 서민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긴 선거였습니다. 가진자들의 목소리만 대변하던 국회에 바로 여러분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소중한 선거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민주노동당은 성과도 있었지만 많은 한계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비민주적인 국회운영으로 인해 민주노동당은 국회안에서 차별과 소외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절망하지 않고 여러분들과 함께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해 나가겠습니다.

얼마전, 작지만 소중한 의미있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아직 본회의 의결을 남겨두고 있지만 처음으로 민주노동당의 단병호의원이 발의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의 주요내용이 부분적이지만 단일안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우리 사회 빈곤 계층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하려먼 최저임금제를 개정해야 합니다. 최저임금제야말로 사회적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안입니다.

이번에 가장 절박하고 핵심적인 문제인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최저임금 저하금지와 원하청 연대책임 조항등을 신설하였습니다.
이번일을 계기로 빈부격차 해소와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동지여러분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동지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 문제입니다.
연두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도 양극화에 대해 언급하였지만 그 해결방안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병원비 때문에 자식에게 부담되기 싫어서 죽음을 택하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아이들 교육비라도 벌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파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이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인가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민주노동당은 5월중에 ‘무상의료, 무상교육 쟁취를 위한 운동본부’를 발족하고, 우선 노약자, 어린아이들부터 무상의료와 무상보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개선과 대국민적인 운동을 벌여나가겠습니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쟁취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고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첫 발걸음입니다.

동지여러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내고 차별이 없는 세상, 인간이 교육받을 권리, 치료받을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
여 동지들과 함께 열심히 투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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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얼마나 세기에...

* 늑대비님의 [누가 회장님의 혈압을 올렸나 - 하이에나] 에 관련된 글.

삼성이 얼마나 세기에…


삼성 이건희 회장이 고려대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러 갔다가 학생들의 반대 시위로 봉변을 당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제목을 보고 나는 고대 학생들이 십몇 년 전처럼 또 밀가루를 뿌리고 계란을 던졌나했다. 하지만 기사를 읽어보니 학생들의 시위는 비교적 점잖았던 것 같다. 계란은 고사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 때처럼 학교 진입을 막지조차 못했다. 아무튼 약식이긴 하지만 학위는 무사히 받았다고 하니 말이다.

기사를 읽고 나서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고대가 100주년 기념관을 짓는데 이 회장이 400억원을 쾌척했다. 고맙지 않은가? 그 고마움의 표시로 명예박사학위를 하나 주자고 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일 아닌가? 하지만 그것에 고대 학생들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상속문제와 기형적인 지배구조 문제도 문제려니와 21세기에조차 지나가던 개도 웃을 무노조주의를 고집하며 노조를 설립하려는 노동자를 탄압하는 것이 삼성이니 말이다. 아무튼 우여곡절이 있긴 했어도 이 회장은 명예박사학위를 받아 이름뿐이기 해도 명예를 챙겼고, 고대 당국은 돈을 챙겼고, 학생은 고대의 정신을 살렸으니 이럭저럭 모두 윈윈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아무 일도 아니군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총장 이하 고대 보직 교수들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했고, 고대 총장은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고대가 삼성에 납작 엎드린 것이다. 사과를 할 만큼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대가 지난 1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어떤 일에 대해서 이렇게 신속히 그리고 처절하게 용서를 구한 일이 있었던가? 설령 삼성이 이번 일로 고대 당국을 몹시 괘씸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대학이라는 제도는 그 성질상 어떤 다른 권력과 권위에 대해 굴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대학이 단지 비판적 지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해서만이 아니라 대학이 특정 기업 같은 것에 중요한 의존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사설을 통해 고대생들을 난타하는 것은 물론 연이어지는 기사가 전하는 인터넷의 분위기, 예컨대 누가 우리를 먹여 살리는데 학생들이 그렇게 방자하게 구는가, 이제 고대 출신은 삼성에서 이사 하기는 글렀다는 식의 글들을 보자 조금 느낌이 달라졌다. 방대한 사회경제적 힘을 가진 삼성에 척을 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고대 인맥 전체에 흐르고 그것이 고대 당국에 피드백되는 과정이 그려졌다. 이런 게 삼성의 힘일 수 있겠다 싶었다. 거기에 더해 청와대 경제수석까지 나서서 “기업가 정신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해야 한다”며 학생들을 꾸짖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자 청와대조차 삼성에 아첨해야 할 만큼 삼성의 힘이 강한 것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사태의 전개를 모두 보고나니 고대 당국의 행동이 진정 두려움에서 우러난 행위였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으로 징후적인 사건이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명문사학 고대가 두려워 할 존재라면 삼성은 우리 사회 성원 모두에게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통해 삼성은 모든 판돈을 챙겼다. 이 회장은 이번 사태를 “젊은 사람들의 열정으로 이해한다”는 소회를 밝힘으로써 한껏 자신의 인자함(?)을 과시했고, 삼성은 자신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를 아주 우아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의 위상을 사뿐히 끌어올렸다. 그러나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도 이번 일은 경고하는 바가 있거니와, 삼성의 비대한 권력과 막대한 생산력을 우리 사회의 민주적 통제 아래 두기가 극히 어려워진 것은 물론 자칫 우리 사회가 삼성의 통제 아래 들어갈 수 있다는 경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심화를 지향한다면 우리는 이제 삼성을 비판적 사유와 사회운동의 대상으로 삼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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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회장님의 혈압을 올렸나 - 하이에나

* 늑대비님의 [고대 동문회에 아부하는 좌파 - 인드라] 에 관련된 글.

누가 회장님의 혈압을 올렸나
하이에나새끼 gelila2@daum.net  [2005-05-04, 조회수 85, 추천수 4] 

메이데이 행사가 끝난 다음날, 삼성그룹 총수 이건희씨가 고려대에서 무려 '봉변' 을 당하셨다. 400 억이 넘는 돈을 기부한 댓가로 요란한 카메라 플래쉬와 함께 받을 예정이었던 명예 철학박사 학위가, 위아래도 몰라보고 앞뒤 생각도 없는 불순한 학생들의 과격행동 때문에 예정된 강당대신 측근 몇명만을 수행한채 쥐새끼처럼 숨어서 초라하게 수여된 것이다. 덕분에 고려대 당국은 물론이요, 임시국회 종료에 따라 기사거리가 없어 파리나 날리고 있던 각종 언론들은 연일 그 과격분자 학생들을 죽일놈으로 묘사하는데 여념이 없다.


대학당국과 정부관료와 언론이 한 목소리로 떠드는 그대로, 정말 큰 일이 난것이다. 이건희가 누구던가?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무려 글로벌 기업인 삼성의 총수다. 삼성이라하면 일제시대에도,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정권의 집권기에도 정권과의 유착관계를 유지하며 권력을 유지해왔던 초 일류 기업이다. 지금 일개 기업총수가 단지 돈주고 산 '명예'학위를 숨어서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지배계급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고려대 학생들에 대한 마녀사냥을 하는것을 봐도 알수 있듯이, 대한민국의 권력을 실제로 장악하고 움직이고 있는것은 자본의 힘이다. 그리고 삼성은 그 자본의 권력 중에서도 두목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는 기업이다. 이게 큰일이 아니고 뭐겠는가? 지금 관료들과 언론등 지배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소란함은 조폭세계에서 두목이 당했는데 쫄따구들이 가만있을수 없는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더구나 이 조폭들의 '나와바리' 는 남한사회 전체에 달하니, 조용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누가 감히 회장님의, 아니 오야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 위대한 대 삼성은 자본권력의 두목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이날 이때까지 앞만보고 달려온 기업이다. 노동조합 건설의 움직임이 보이면 회유와 협박, 감시는 기본이고 납치 감금도 서슴치 않았다. 99 년 삼성 SDI 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던 사람들 중 한명은 아직도 행방불명이다. 거기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던 사람은 법원에 고소했다. 최근에는 첨단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휴대폰을 불법 복제해서 위치추적을 통한 감시활동을 해왔다. 그 건은 비록 고려대에서 항의하던 학생들과 마찬가지의 '불순한 노동자' 에 의해 검찰까지 기소되는 아픔이 있기는 했지만, 조폭의 세계는 의리가 기본이라는것을 보여주듯이 권력의 단맛을 나눠먹는 사이인 검찰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무혐의 처분을 내려준바 있다. 언론에 드러난 이런 굵직굵직한 일들 외에도 일상적으로 노동탄압을 저질러온곳이 삼성이니 너무나 당연하게도 오야붕의 심기를 건드릴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다름아닌 대학생들이 오야붕의 혈압을 높인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특히 요즘같은 경제불황의 시기에는 대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진로, 취업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으며 취업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파견, 계약등의 이른바 '비정규직 노동자' 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이미 대다수의 학생들은 가족이나 친지중에 한명 이상의 비율로 고용불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며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거기에다가, 삼성같은 그룹에서 몇백억을 기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는데 매년마다 등록금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올라가고 있는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누가 이런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이런 사회가 유지된다면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보장받을수 있겠는가? 그날 대학생들이 인촌기념관 앞에서 했던 이야기는 바로 이건희와 같은 자들이 우리의 목줄을 죄고 있다는 정확하기 짝이 없는 지적이었다. 그런 조폭의 오야붕이 자기 스스로를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폭력을 행사하는것을 두고 대학당국에서는 잘했다면서 박사학위를 준다는데 가만 있을수 있단 말인가? 그런것은 '교양을 갖춘 지식인으로서' 있을수 없는 일이다. 조직 폭력배에 반대하지 않고 누구에게 반대한단 말인가?


고려대 총장을 비롯한 지배계급들은 삼성이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고, 한국사회의 패러다임을 업그레이드 했다면서 아부를 아끼지 않는다. 만약 정말 그런 이유라면 명예철학박사 학위는 회장님이 아니라 삼성그룹의 노동자들에게 수여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그들이 진정한 한국 졍제의 수호신이며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핵심 인물들인 까닭이다. 회장님의 그 학위증은 수 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 안에는 현실의, 또 미래의 고려대 학생들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중요한것은 회장님이 그 사건 때문에 혈압을 많이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 관리의 일환으로 나온 말도 다름 아닌 '젊은이들이 혈기가 왕성해서' 라는 말이 나온거 같다. 그렇지만 뭐 내가 굳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지배층들은 남의 혈기를 생각해주기 전에 회장님의 혈압부터 걱정해야 하는것은 잘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행여나 회장님 눈 밖에 날까 너도나도 앞다투어 마녀사냥에 나서고 있는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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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문회에 아부하는 좌파 - 인드라

* 늑대비님의 [[다함께]'이건희 저지 시위' 방어 특별호] 에 관련된 글.

3대 마피아 중 하나인 고려대에 아부하는 좌파
인드라 [2005-05-05, 조회수 50, 추천수 2] 

한국은 주지하다시피 인맥의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3대 마피아라는 호남 향우회, 해병 전우회, 고대 동문회를 건들여봐야 좋을 것이 없다. 고대 동문회가 어떤 동문회던가.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킨 위대한 전대협 주사파 동문회가 아니던가. 고대를 빛낸 백인의 대열에 사이비 진보 강만길이 명함을 내밀고, 철도청에서 왜 유전에 관여하느냐고 난리이지만 백인에 당당하게 철도청장이 자랑스런 고대인으로 선정되었으며, 이명박서울시장도 있으며, 그밖에 검찰총장, 관세청장 등등 관직은 물론이요, GS회장 등 재계와 정치권에 폭넓게 포진하고 있는 것이 고대 동문회일 것이다. 정세균과 홍준표가 빠진 것은 고려대 선정위원회의 조크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백인으로 선정된 멤버에서 빠진 이름들이 눈에 뜨인다. 수구 반동 근대주의자 최장집도 빠졌고, 민노당 노회찬, 천영세도 빠졌다. 심통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삼성 이건희의 불행은 고려대를 나오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고려대를 나오지 않은 이건희가 아무리 고려대 마피아의 눈치를 본다고 야구는 선동열, 축구는 차범근을 기용해도 고려대를 나오지 않은 이상 한국의 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삼성 이건희는 수구 반동 근대주의자 최장집과 안희정, 민노당 노회찬, 천영세 등이 고려대를 빛낸 백인으로 선정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사실 아무리 대기업이 세상을 주름잡는다고 할 지라도, 세계 경영 운운해도 권력의 말 한마디면 순식간에 해체되는 것이 한국의 사정이 아니겠는가. 그런 이유로 전경련 회장을 앞다투어 맡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권력에 밉보여서 좋을 것이 없다는 이유일 것이다.

호남 향우회를 겁대가리없이 공격하는 소위 진보좌파들도 고려대 앞에서는 꼼짝을 못한다. 해병 전우회를 거리낌없이 공격하는 소위 진보좌파연하는 이들도 고려대 앞에서는 꼼짝을 하지 못한다.

이건희여! 왜 끝까지 학위를 거부하지, 마음이 약해져서 학위를 받았느냐. 진보좌파의 탈을 쓰고 장사짓거리나 하는 애들인지 알면서도 당했다는 말이냐.

지난 노동자 대회 때 침묵하던 이들, 특히 좌파연하는 이들이 오늘따라 신나게 자기 발언을 하고 있구나. 그때 단상점거하던 이들은 고대생들이 아니어서 그랬다고.

아아. 니기미, 단상점거했던 노동자들이여! 다 필요없다. 노동해방세상 이루려면 우선 열심히 수능 공부해서 고려대부터 가자! 아무 대학이나 가면 안 된다.

포털사이트에 숱하게 걸린 쪽글들을 보면, 고려대 못간 놈들은 비판하지 말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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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T] 6.25:The Forgotten War - {1917} 제16호

* 늑대비님의 [[다함께] 해방 60주년 기획연재] 에 관련된 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에 끝난 6·25 전쟁은 3백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국토를 분단시켰다. 유엔의 깃발 하에 이 나라를 짓밟은 소위 "서구문명"의 선봉장 미국은 우리 민족에게 의도적으로 대규모 폭격 테러를 자행했다. 심지어 미국은 전쟁 과정에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핵공격을 감행할 계획까지 세운 바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이 끔찍한 학살행위는 폭로되지 않은 채 6·25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좋은 재료가 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이 전쟁의 성격과 진실을 다시 한번 논쟁의 도마 위에 올릴 필요가 있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반격을 가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은 미국의 냉전 전략이 실행에 옮겨진 첫 번째 주요한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운동이 분출하였다. 이탈리아, 그리이스, 독일 등에서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참혹한 결과로 인해 기존 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와 근로 인민이 투쟁으로 일어선 것이었다. 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패배로 지배질서가 붕괴했다. 이제 노동자와 농민이 각지에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여타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치열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 필리핀, 인도,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가열되었다. 이러한 폭발적 세계정세는 세력확대를 노리고 있던 소련의 스탈린 일당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세력을 국제적으로 확대하여 자신들의 특권, 정치권력 등을 더욱 공고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후 미국은 전후 제국주의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미국이 당면한 과제는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미 동구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1948년 혁명으로 중국대륙에서도 모택동을 위시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대처하여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을 "억제하고 후퇴시킬" 냉전 전략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실제에 있어서 전세계에서 터져나오는 사회혁명과 민족해방투쟁을 압살하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 자유주의자들과 자칭 좌익 정치세력들은 세계 곳곳에 유엔이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라크, 소말리아, 보스니아 등지에 대한 유엔의 개입을 인류문명을 위기에서 구하는 고귀한 노력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의 첫 번째 대규모 군사적 개입행위였던 6·25전쟁의 진짜 목적이 한반도에서 끓어오르던 사회혁명을 압살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6·25 전쟁은 1950년대 초 각국에 산재해 있던 소위 맑스주의 정치조직들의 성격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모택동의 군대가 장개석 세력을 대만으로 쫓아버리고 중국대륙에 사회혁명을 달성한 후 바로 뒤이어 이 전쟁이 발발했다. 따라서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전세계에 진군하는 공산주의 물결이 한반도를 뒤덮는 계기가 바로 6·25 전쟁이라고 많은 좌익조직들은 바라보았다. 6·25 전쟁의 기원을 연구한 대다수의 저술들은 누가 38선을 먼저 침해했느냐하는 재미없는 주제를 논의의 초점으로 잡고 있다. 대개의 서방 역사가들과 남북한 관변학자들은 이 주제를 가지고 지금껏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시안적 분석틀은 1945년 종전과 함께 전세계에 밀어닥친 그리고 한반도 전역을 뒤흔든 대대적인 사회혁명의 기운을 무시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진행된 한반도의 계급투쟁은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바로 이러한 전체적 상황이야말로 뒤이어 일어난 6·25 전쟁과 분단을 올바로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 신좌익(New Left) 역사가인 브루스 커밍즈(Bruce Cummings)는 한때 독재정권에 의해서 금서가 된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을 저술했다.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저술은 당시의 상황을 가장 철저하고 자세하게 분석한 결정적인 자료이다.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에 대항하여 미국이 주도한 냉전전략이 6·25 전쟁의 성격을 규정했다. 유엔의 깃발 아래 모인 제국주의 세력과 소련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은 중국이 개입하면서 이 전쟁은 공산주의 세력과 제국주의 세력의 시험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은 1945년 일본의 패망에 뒤이어 조성된 혁명적 격동에 의해서 갑자기 조성되었다. 일본 식민지통치 시기에 한반도에는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가 "불균등 결합 발전(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이라고 개념화한 현상이 철저하게 전개되었다. 즉 봉건적 토지소유가 온존하는 가운데 제국주의 공업화가 일본의 전쟁 목적을 위해 이식되었다. 이 결과 이 나라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식민지 통치를 담당한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 사업을 시행하여 양반이나 농민의 토지를 등록시켰다. 등록되지 않은 토지는 조선총독부의 재산이 되었다. 이 정책의 목적은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우리 인민으로부터 강탈하는 데에 있었다. 식민지 지배에 응하여 협력한 지배층은 토지를 계속 보유할 수 있었으나 많은 인민은 일본군에 끌려가거나 일본으로 이송되어 강제노역을 강요당했다.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인 기업은 130만명의 우리 동포를 고용하였으며 기타 수십만의 동포들이 일본이나 만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장악한 조선공산당은 파업이나 빨찌산 투쟁을 조직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조선총독부는 압제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을 "공산주의 세력의 전복활동"이라고 선전하면서 역으로 공산당의 대중적 신망을 더 올려주었다. 농민들은 터무니없이 높은 소작료가 철폐되기를 열망하였으며 일제와 친일파 세력을 저주하였다. 자본주의 공업화, 지주제도, 식민지통치는 얼키고 설키면서 이 땅의 인민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사회혁명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친일세력이었던 지배층은 인민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일본의 식민지 공업화로 노동계급이 성장해 있었다. 대중의 상당수는 공업 프롤레타리아로 변모했다. 그러나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양반들은 아직 자본가 계급으로 전화하지 못했다. 1945년 8월 9일 조선총독부는 정권을 여운형에게 넘겼다. 그는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로서 당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를 이미 조직하고 있었다. 이제 상황은 마치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과 유사하였다. 건준은 당시 자생적으로 전국에서 생겨난 노동자-농민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전국노동자평의회(전평) 의 깃발 아래 노동자들은 전국에서 공장을 장악했다. 전평은 공산당이 주도하고 있었으나 사회민주주의 경향도 그 내부에 존재하였다. 미군정 노동문제 고문관 스튜어트 미첨(Stuart Meecham)에 의하면 "대공장의 거의 전부"는 노동조합이 장악하고 있었다.(커밍즈,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인용) 전국농민노동조합평의회(전농) 은 지주계급의 토지를 몰수할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당시 투쟁의 수준은 이탈리아나 그리이스에서 전개되었던 투쟁들과 유사하였다. 승리한 제국주의 연합세력은 바로 이러한 폭발적 혁명 상황에 대면하였다. 얄타에서 이들은 조선이 10년에서 30년에 걸쳐 공동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한 바 있었다.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후 한반도에 군대를 진주시키자 미국은 소련군이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지말 것을 주장했다. 사실 38선은 당시 미국 전쟁성의 하급 관료였던 딘 러스크(Dean Rusk)가 미군 점령지역에 서울이 포함되도록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선에 불과했다. 스탈린은 전시에 미국과 맺었던 동맹관계를 훼손시킬 생각이 없었고 한반도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별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미국의 제안에 즉시 찬성하였으며 소련군은 곧 38선 북쪽으로 물러났다. 미국 대 인민운동 미국은 애초부터 인민운동과 임박한 사회혁명을 저지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미군의 태평양 지역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포고한 "일반명령 제1호" 는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우리 인민이 조선총독부 관리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1945년 9월 8일 하지 장군이 이끈 미군이 인천항에 들어오자 이들은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대표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준과 인민위원회는 예정대로 일주일 후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 장군의 정무 수석고문관 메럴 베닝호프(Merrell Benninghoff)는 9월 15일 이렇게 보고했다: "남한은 불꽃만 당기면 즉시 폭발할 화약고라고 할 수 있다. 일제 때 높은 지위에 오른 자들은 친일분자로 인정되어 일본인들만큼이나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모든 정치그룹들은 일본의 재산을 몰수하고 일본인을 몰아낸 후 곧바로 독립을 달성하려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 선동가들이 활동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그러나 베닝호프는 미국의 통치를 가능하게 할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에는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있으며 이들은 나이도 많고 교육도 많이 받았다. 비록 이들 중 많은 인사들이 일제에 협력했지만 이 오명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 (같은 글) 이러한 "민주주의자들"에게 미군정이 물질적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그는 제안했다. 한민당으로 결집된 이 인사들은 한국이 보호를 받아야할 단계에 있으며 소련보다는 미국의 보호를 받는 것이 더 낫다고 공언했다는 사실을 그는 긍정적으로 주목했다. 성년 생활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이승만 박사가 이들에게는 이상적인 지도자였다. 미국은 일본군에 복무하여 훈련된 군대를 정부군으로 조직하면서 가냘픈 이승만 정권을 도왔다. 이제 맥아더의 군정포고령에 의해 일제의 모든 법률들은 계속 효력을 가졌다. 1945년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인민위원회를 불법이라고 규정하였다. 하지 장군은 "친미주의자나 친일분자나 한국민에게는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S. Lone & McCormack, [1850년 이후의 한국](Korea Since 1850)} 식민지 통치의 연장에 대해 당연히 인민은 저항의 길을 택했다. 1946년 여름 미군정은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구속조치을 감행했으며 마침내 인민위원회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일제의 훈련을 받았으며 미국이 지원한 경찰에게 인민의 자생적인 저항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수천 명의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200여 명의 경찰이 이 과정에서 죽음을 당했다. [시카고 선 ](Chicago Sun)지의 마크 게인(Mark Gayn)은 이 투쟁을 "본격적인 혁명"으로 묘사했으며 "수백만은 아니지만 수십만의 인민대중"이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인민운동을 억압한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이 운동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스탈린은 "모든 반일 세력과 민주주의 정당들의 활동을 지원하라고 " 지시했다. 물론 이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1946년 2월 소련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했다. 이 기구는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 내의 인민위원회를 지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스탈린이 직접 선택한 청년 공산주의자 김일성이었다. 그는 중국공산당원과 소련군 대위로서 반일 독립운동에서 믿을만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주장한대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유일무이한 지도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스탈린에게 무조건 충성을 바침으로써 북한의 지도자가 된 것처럼 보인다.([신좌익평론 , New Left Review]에 실린 맥코맥의 논문을 보시오) 정권을 장악한 직후 그는 대중의 지지를 받던 그의 라이벌인 부르조아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체포하여 나중에 처형했다. 소련이 수립한 북한 체제는 소련과 아주 유사한 관료적 노동자국가였다. 노동계급이 직접 권력을 행사한 경우는 전혀 없었으나 관료적이고 상명하달식의 사회혁명이 달성되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법적 평등권이 선언되었다. 1946년 3월 6일 토지개혁령이 발효되어 모든 농토가 농민에게 분배되었으며 "애국적" 지주들만 보상을 받았다. 토지 분배는 지역인민위원회가 주도하였다. 1946년 10월 6일 공포된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결정 제 91호는 일본인이나 친일분자가 소유한 모든 산업을 국유화했다. 스탈린의 인민전선 노선에 따라 이 경우에도 소위 애국적 부르조아들을 이 결정에서 면제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계급협조 노선은 실패했다. 북한의 사업가들과 그 가족들은 거의 모두 남한으로 도망하여 이후 남한 우익 세력 내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1950년 오랫동안 한국문제 전문가였으며 하버드 대학교 교수였던 조오지 맥쿤(George McCune)은 이렇게 썼다: "북한 인민대중은 소련군정에게 우호적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혁명적 조치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남한에서대중은 소위 민주주의의 기본적 자유를 자신들이 누리고 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사회개혁 조치가 없었으며 민주주의적 잣대도 불공정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 (맥쿤, [오늘날의 한국, Korea Today]) 미군정이 민주주의의 잣대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일률적으로 적용할 경우 그 결과가 지극히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1946년 미국 정보기관의 보고서는 공정한 선거가 실시될 경우 좌익 세력이 완승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미군정은 민주주의의 잣대를 공정하게 적용시킬 수가 없었다. 이렇게 소련군정과 미군정이 차이를 보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차이는 스탈린이 트루먼이나 하지보다 인민에게 더 호의적인 것에 있지 않았다. 스탈린 체제가 트루먼의 미국과는 아주 다른 사회적 관계 위에 수립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주요 생산수단은 사회적 소유였다. 동구든 북한이든 점령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 소련은 자기 나라에 지배적인 사회관계들을 점령지에 이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 농민의 요구가 사회주의 소유의 틀을 통해서만 수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민대중의 지향과 소련군정의 정치적 목적 사이에는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스탈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자본주의 "동맹국"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전시의 동맹관계는 독일과 일본이 패망한 후에는 계속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양극화 현상은 한국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미국과 소련의 공동신탁통치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 강대국 사이의 회담이 1946년 봄 그리고 1947년 가을에 진행되었으나 모두 결렬되었다. 이후 연속된 회담에서 소련은 양국의 군대가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1946년의 대중 봉기를 겨우 진압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남한의 정세에 우려를 나타낸 미국은 일방적으로 회담 불참을 선언하였다. 미국의 전략은 한국문제를 자신이 주도하고 있던 유엔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회가 성립되어 한국이 서방의 입맛에 맞는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할 때까지 남한을 통치하게 되었다. 제주도 4·3 봉기 한국임시위원회의 통치는 남한 대중의 저항을 새로 불러 일으켰다. 스탈린주의를 추종한 남노당은 1948년 2월 7일에 3일간의 총파업을 개시했다. 곧이어 4월 한국임시위원회는 남한에서 단독으로 선거를 치룬다고 발표했다. 이에 반대하는 봉기가 제주도에서 일어나 일부 우익 인사들과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이에 미군정은 피의 억압을 감행했다. 미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아 미군정은 도민의 10 내지 20%에 해당하는 3만에서 6만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수만 명의 도민들은 일본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악지대로 이동한 게릴라들은 보급품도 공급받지 못한 채 수개월 동안 정규군과 싸웠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초토화 작전이 끝난 후 선거가 실시되었다. 남한 단독 선거는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우익 세력 그리고 정권을 제외한 모든 계급 계층의 저항을 받았다.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인 민족주의자 김구 역시 남한 단독선거가 국토의 분단을 가져올 것이라며 비난했다. 심지어 김구는 해주와 평양에서 북한 대표들과 회담을 가졌다. 결국 반대 진영은 선거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임시위원회는 선거를 통해 "남한 유권자들의 자유 의사가 온전하게 표현되었다"고 선언했다. 선거의 결과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유엔 총회는 곧 이 정권을 한국의 유일한 정부라고 인정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북한에는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결국 국토분단은 공식화되었다. 1948년 후반 남한에는 봉기들이 또 일어났다. 여수와 순천의 군인들이 제주도 게릴라 잔당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의 지원으로 겨우 위기에서 빠져 나온 이승만 정권에게 또 다른 위기가 닥친 것이었다. 여수에는 인민위원회가 다시 수립되었다. 제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군들은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1949년 미 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이승만은 경찰국가를 강화하는 일로 바빴다. 심지어 부정으로 얼룩진 1948년 국회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을 스파이로 몰아 체포하였다. 그리고 그의 라이벌 김구를 암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제 해가 지나감에 따라 남북간의 전쟁 가능성이 점점 커졌다. 이승만은 친북 공산주의 게릴라들을 진압하지 못했다. 한편 게릴라들은 북한 김일성 정권의 도움이 필요했다. 일 년 내내 국경선인 38선에서 전투가 빈발했다. 김일성은 남한을 침공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달라고 비밀리에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간청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결국 동의하였다. 남한 내에 공산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대단하여 북한이 침공할 경우 금방 남한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김일성과 남노당 지도자 박헌영이 이들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스탈린은 김일성의 침공이 제국주의 세력들을 골탕먹일 값싼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비밀리에 북한의 인민군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모택동은 대만으로 도망친 장개석의 국민당 잔당을 박멸하기 위해 대만 침공에 주된 관심을 쏟고 있었지만 어쨌든 김일성의 계획에 축복을 보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들은 소련, 중국, 북한의 공식 역사 기술에서는 부인되고 있다. 즉 북한이 가만히 있는데 이승만 정권이 도발을 자행하다가 결국 38선을 넘어 북한을 침략을 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공개된 소련의 비밀문서들은 김일성이 남침을 계획했으며 스탈린과 모택동은 이 모든 사항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곤차로프 이하 공저, [불안한 동맹자들: 스탈린, 모택동, 한국전쟁,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을 참고하시오) 사실 이승만도 확실히 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주 북침통일을 선언한 바 있었다. 1949년 10월 그는 3일만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미 소 양군의 철수 후 이승만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남한에 남아있던 미국 군사고문단의 우두머리 라버츠 장군은 이렇게 주장했다: "전투로 단련된 500여명의 미군 병사와 장교들이 치밀하고도 지혜롭게 미군 대신 전투를 수행할 10만 군대를 양성하는 방식을 미국 군사고문단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북한의 침략을 유도하고 있다. 북한군이 좋은 사격훈련감을 제공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 (커밍스, 핼리데이 공저 [한국전쟁 : 알려지지 않은 전쟁, Korea: The Unknown War]) 그러나 라버츠 장군의 자신감은 허황된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첫 몇주동안 북한의 인민군은 전력이 우세한 것으로 생각된 남한의 국방군을 쉽게 물리치고 승승장구 남쪽으로 진군했다. 징집된 노동자 농민의 아들들이 이승만의 자본주의 정권이나 그의 제국주의 후원 세력들을 위해 "총을 쏠 "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민군의 진격 앞에 국방군은 급속히 전의를 상실하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인민군의 총칼을 앞세우면서 북한의 기형화된 사회혁명의 성과들이 전진했다. 3개월 동안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한 인민군은 토지를 재분배하고 이승만 정권과 그 하수인들, 일본 기업과 기타 독점기업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남한의 인민대중은 "침략자" 인민군을 반기는 듯 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에 미국의 딘 장군은 그의 저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인민군에 대한 남한 인민의 태도는 열렬한 환영과 수동적인 인정의 중간인 것 같았다." --- (윌리엄 딘, [딘 장군의 이야기, General Dean's Story, 1954]) 미국 정부는 김일성의 적화통일을 보고만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50년 초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한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경우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 발언은 김일성을 기쁘게 했고 이승만의 화를 끝까지 돋구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아시아의 신식민지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단행했다. 1950년 4월 12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국무성에서 작성한 대외비 메모를 전달받았다. 이 메모는 전세계적으로 사회혁명의 확산을 막는 정책(containment)에서 이것을 저지하고 전복시키는 정책(rollback)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킴으로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자는 매파가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이들은 맥아더, 덜러스를 비롯한 극동 담당 군사 및 민간 고위 관리들의 명확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인민군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접한 지 몇 시간 만에 트루먼은 이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임시위원회는 6월 29일 성명을 통해 북한의 남침에 의해 전쟁이 발발했다고 규정하고 유엔의 개입을 촉구했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동의안이 즉시 통과되었다. 이때 소련은 중국의 회원국 가입을 거부한 유엔의 결정에 항의하여 불참했다. 유엔군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남아공 등 16개국에서 보낸 군대로 구성되었다. 과대망상증 환자 맥아더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전쟁이 9월로 접어들자 전선은 낙동강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승만의 군대가 곧 패배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연합군은 바다와 하늘을 장악하고 있었다. 9월 15일 맥아더는 인천항에서 대대적인 수륙양용작전을 구사했다. 이 작전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로부터 2주가 채 되지 않아 원정군은 인민군을 38선 북쪽으로 쫓아내었다. 애초에 유엔은 국경선의 신성함을 수호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제 유엔군은 38선의 신성함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맥아더와 트루먼은 공산주의 세력을 밀어부칠 절호의 기회가 바로 이때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유엔의 반혁명 테러 반혁명 테러는 언제나 사회혁명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잔인하다. 유엔군의 한반도 점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민의 지지 때문에 쉽게 남한 국방군을 제압했던 인민군과는 달리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은 한국민 전체를 적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지극히 인종주의적 언어로 우리 민족을 "흰 파자마를 걸친 버러지들"이라고 불렀다. 맥코맥이 인용한 일본 자료에 따르면 유엔군이 한국을 "해방시킨" 기간 동안 1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처형되었다. 이 대대적인 양민 학살은 월남전에서 미국 중앙정보국이 자행한 대대적인 암살작전의 효시가 되었다. 월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자들은 월등한 제공권과 제해권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파괴공작을 감행했다. 1950년 11월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할 때 맥아더는 그의 부관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에게 전선과 중국 국경 사이의 "모든 시설, 공장, 도시, 마을"을 공습하라고 명령했다. 르메이는 나중에 월남전에서 월남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기 위해" 대대적인 공습을 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악명을 떨친 자였다.(커밍스, 핼리데이 공저, 앞의 책) 미국의 무차별적이며 인종주의적인 공격은 전쟁의 성격에서 도출되었다. 즉 미국은 단순히 적대국을 철저히 파괴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두고 있지 않았다. 사회혁명을 괴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11월경에 제국주의자들은 별 저항이 없이 중국 국경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때 20만 명의 중국군과 15만 명의 인민군이 반격에 나서자 이들은 화가 끝까지 치밀어 고함을 질러대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전쟁에 개입하자 전세는 다시 제국주의자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유엔은 뻔뻔스럽게 중국의 "침략"을 비난했다. 트루먼은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고려 중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인종주의자들이 다시 원자폭탄으로 아시아 인민을 위협했다. 유엔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는 동안 이들은 게릴라 부대들에게 시달렸다. 그러자 맥아더는 제3차 세계대전의 개시를 공공연히 촉구하기 시작했다. 1951년 초 미국 중앙정보국은 중국 본토에 비밀리 공격을 시작했다. 한편 맥아더는 중국의 주요 도시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5년부터 이 때까지 아주 중요한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즉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것이었다. 트루먼은 소련이 원자폭탄을 미국에 투하할 능력이 없다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유럽 동맹국들은 걱정이 컸다. 영국의 수상 클리먼 애틀리는 워싱턴으로 날아가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보장하고 맥아더를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그가 아시아인들이 대량 학살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를 지지했었다. 그리고 당시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군은 좌익 반군들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만 소련의 폭격기가 런던 상공을 날아다닐 일이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트루먼은 애틀리의 우려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확실한 언질은 회피했다. 사실 1951년 4월 6일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원자폭탄 26기를 통제할 권한을 주는 문서에 서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5일 뒤 그는 이 명령을 철회하고 맥아더를 해임했다. 제국주의 동맹관계가 완전히 붕괴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로운과 맥코맥, 앞의 책에서) 그러나 맥아더의 해임이 미국의 "핵무기 선택"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53년 아이젠하워는 원자폭탄이 재래식 무기보다 "더 싸게 먹힌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었다. 소련의 핵무기가 아니었다면 미 제국주의자들은 또다시 아시아 도시들에 틀림없이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것이다. 사실 미 공군은 원자무기가 아닌 재래식 무기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전쟁 개입 첫 3개월 동안 780만 갤런의 네이팜탄이 사용되었다. 네이팜탄은 제네바 협정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미국은 국제 협정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이 결과 북한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3년에 걸쳐 우리는 북한의 도시는 물론이고 남한의 모든 도시들도 불태워 버렸다."고 르메이는 회고했다. 1951년 여름 지상전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유엔군은 주로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북한을 공격했다. 도시지역에 대해 계속 폭격을 가하면서 1953년 5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 공군은 북한의 농업을 파괴하고 인민들을 기아상태로 몰아 항복시키기 위해 관개 시설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휴전회담은 1951년 7월에 시작되었다. 어느 쪽도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했으나 전쟁은 회담 개시 후 2년 이 넘게 질질 끌었다. 전쟁포로 송환 문제가 핵심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선전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제국주의 세력은 "자발적 송환" 원칙을 우겼다. 즉 전쟁포로들이 어느 진영으로 갈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이 결정은 전혀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인민군 및 인민해방군 출신 전쟁포로들이 자본주의 쪽으로 넘어오도록 원하면서도 미 군부는 감언이설에 속지 않는 포로들에 대해서는 강경자세를 취했다. 맥아더의 후임자 리지웨이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빨갱이 포로들이 우리의 계획에 저항하거나 우리의 요구에 대해 지연술책을 쓸 경우에 이들을 총살시킬 결심이었다. 이 일을 확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살인무기들이 철저히 준비되어 있기를 나는 원했다." (커밍즈와 핼리데이, 앞의 책) 결국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우리 국토의 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 전쟁은 인구의 10%가 넘는 3백만 명을 죽였고 거의 백만 명의 중국군을 희생시켰다. 미군의 사망자는 33,500명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남한에서는 탄압의 광란이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의 반대파에 대한 "용공 재판"이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그를 제거할 생각까지 했다. "만반의 준비 작전(Operation Everready)"은 그를 없애기 위해 비밀리에 수립된 계획이었다. 북한에서는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생각된 분자들이 숙청을 통해 제거되었다. 박헌영도 이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남노당 지도자였던 그는 남침이 쉽게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해 김일성의 판단을 흐린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 죄목은 두 가지 점에서 괴상망칙했다. 우선 남침은 유엔군의 개입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 지장 없이 진행되었다. 둘째, 김일성 정권은 항상 남한에 의한 북침을 주장해왔다. 결국 박헌영의 처형은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늘상 일어나는 정치 라이벌에 대한 조작성 숙청의 일환이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이 수립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를 전후 41년이 넘도록 통치했다. 북한은 역사상 가장 기괴한 스탈린주의 독재체제에 속한다. 김일성 개인숭배는 유례가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그러나 국유화 조치에 의한 북한 사회의 변화는 인민에게 중요한 성과로 남아있다. 특히 여성의 권리, 의식주, 탁아시설, 의료와 교육 등에서 북한 인민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혜택들을 누려왔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 이후 동맹국 중국은 북한을 버렸으며 이 결과 북한의 경제는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으며 인민의 생활수준 역시 급속히 하락하고 있다. 그러나 인민의 복지를 도모한 북한 체제의 성과는 아직도 남아있으며 옹호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노동계급은 국토를 혁명적으로 통일시켜 전쟁이 남긴 국토통일의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즉 북한 노동계급이 정치혁명을 통해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키고 남한 노동계급은 자본가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는 사회혁명을 달성해야 한다. 6·25 전쟁에 대한 좌익 국제조직들의 반응 국제 노동계급 운동 조직들은 대체로 6·25 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의 서막으로 바라보면서 조직의 성격에 걸맞게 이 전쟁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각국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전쟁을 반대하고 북한 정권에 대해 연대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평화주의적 시각에 근거하여 냉전을 반대할 부르조아지의 진보적 분파와 동맹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북한 정권의 주장인 북침설을 강조하면서 선동의 중심을 "평화" 호소와 협상에 의한 전쟁 종결에 두었다. 영국 노동당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국 지배계급의 노선을 그대로 추종하면서 제국주의 세력의 전쟁 개입을 찬양했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들은 노동계급운동 내부에 존재하는 자본가 계급의 으뜸가는 하수인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미국 중앙정보국으로부터 돈을 받고 반공 마녀사냥을 솔선수범하여 열렬히 주도했다. 트로츠키주의 조직들만이 이 전쟁에 대해 혁명적 노선을 채택했다. 제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트로츠키는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degenerated workers' state)"로 규정했다. 이 체제의 사회적 기초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적대적이므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방어되어야 한다고 그는 보았다. 6·25 전쟁이 발발할 당시 트로츠키주의 제4인터내셔널 산하 조직들은 북한을 포함해서 전후 소련군의 점령으로 탄생한 국가들이 소련과 질적으로 유사한 체제라고 보았으며 이들을 "기형화된 노동자국가(deformed workers' state)"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올바른 분석의 결과 이들은 국제노동계급이 6·25 전쟁에서 제국주의 및 그 동맹 세력에 대항해서 북한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셸 파블로는 이 당시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자였다. 그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전쟁과 혁명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고는 크게 보아 한국전쟁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 노선은 철저히 수정주의적이었다. 즉 그는 트로츠키주의 중핵들이 사회민주주의 및 스탈린주의 대중정당으로 들어가고 트로츠키 혁명조직을 해소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의 청산주의는 역사발전을 지극히 조잡하게 객관주의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이 노선은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혁명적 능력을 과도하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혁명적 노선을 주창하였다. 1950년 9월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이론지 [제4인터내셔널, Fourth International]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식민지 대중 운동에 가담하여 소련 관료집단이 이 운동을 이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태도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주요한 조건은 토착 봉건-자본주의 계급 그리고 특히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해서 이 운동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이다." 당시 제4인터내셔널의 가장 강력한 지부였던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자 제임스 캐넌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올바른 입장을 견지했다. 이 글은 1950년 7월 31일자 당의 신문 [투사, The Militant]에 실렸다: "이 전쟁은 국토통일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 그 이상이다. 이것은 내전이다. 한국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등이 한국의 지주, 고리대금업자, 자본가, 경찰, 정치 하수인 등에 대항하는 전쟁이다. 빈곤에 찌들리고 착취받던 근로인민 대중이 지주와 매판자본가로 구성된 토착 기생집단과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소련 스탈린 일당의 소망이 어떻든 계급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북한 정권은 토지개혁령을 발표하고 국유화 조치를 시행했다. 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이러한 개혁조치들 그리고 좀더 나은 경제적 사회적 체제에 대한 약속이 농민과 노동자들을 북한 정권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새로운 삶에 대한 이 전망이야말로 굶주리고 있는 대중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했다. 이것은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토착 하수인들로부터 이들이 국토의 3분의 2를 빼앗게 만든 `비밀무기'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막강한 월스트리트(Wall Street) 금융자본의 군대와 폭격을 이들이 견디도록 만들었다" --- (제임스 캐넌, [선동가의 노트, Notebook of an Agitator]) 영국의 노동자 권력 그룹은 이 편지를 인용하며 캐넌이 제국주의 세력의 패배 노선을 채택하지 않았다는 어리석은 결론을 내렸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모든 글에서 제국주의 세력의 `패배'를 주창한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면 이것은 공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이런 노선을 주창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의 비판은 따라서 정당하다." ([연속혁명, Permanent Revolution], 1988년 봄호,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편지에서 캐넌은 "이승만 괴뢰정권에게 매수된 몇 안되는 하수인들을 제외하면 한국의 인민 모두는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싸움에서 정의는 한국 인민의 편에 있다. 아시아 전역의 식민지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미국 또는 유엔의 `해방'을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 이 논조는 명확하게 유엔/제국주의 세력의 패배를 주창했다. 어느 편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근본 문제에서 캐넌은 옳았다. 그러나 반공 마녀사냥이 맹위를 떨치던 당시 미국 내 좌익에 대한 지배계급의 압박은 지극히 견디기 힘들었다. 이 악화된 상황에 굴복하여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노쇠한 중핵들은 가끔 심각한 정치적 동요를 보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공식입장으로 널리 알려진 트루먼에게 보내는 캐넌의 공개서한은 평화주의적이며 심지어는 애국주의적 색채를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캐넌은 1950년 12월 4일자에 보낸 이 편지에서 이렇게 결론내렸다: "이 위대하고 선량한 미국 인민은 군국주의와 전쟁을 혐오한다. 이들은 평화와 자유를 사랑한다. 이들은 `지금 당장 전쟁을 중단하라!'는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심지어 그는 미국 독립전쟁의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전통"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들이 작성한 선전적 성격이 좀더 강한 글들은 제4인터내셔널의 다른 나라 지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정치적 혼란을 보이고 있음을 증명했다.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노동자 혁명의 무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들은 너무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파블로의 "새로운 세계 현실" 이론의 객관주의적 편향에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맑스주의 중핵들은 개량주의 사민당 및 공산당에 입당하여 이들 정치세력의 들러리를 서는 길밖에 없었다. 즉 사민주의 및 스탈린주의 대중정당들은 역사의 긴급한 필요에 의해 엉성하나마 혁명적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수정주의적 방법론이 사회주의노동자당에 침투한 예는 제이 스튜어트가 쓴 [한국의 내전](Civil War in Korea)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제4인터내셔널] 1950년 9-10월호에 실렸는데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해 통찰력이 있는 비판을 가한 후 노동계급 지도력 확립의 중요성을 말한 김일성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끝맺었다: "아시아 대륙의 혁명적 위력은 각국 지도자들로 하여금 수십 년간 존재했던 스탈린주의의 잘못된 노선을 걷어치우고 아무리 주저하고 혼란된 방식으로나마 10월 혁명의 위대한 전략적 개념들을 추구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객관적 상황만으로도 스탈린주의자들과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이 "혼동된" 트로츠키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경향은 유고슬라비아 티토주의 관료집단을 제4인터내셔널이 잠시나마 지지한 것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이 수정주의로 인해 결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이로부터 10년 후 쿠바의 카스트로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함으로써 트로츠키주의를 완전히 기각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운동을 제국주의 세력의 파괴공작에 맞서 군사적으로 방어하면서 동시에 이들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어떤 정치적 지지도 보내서는 안된다. 그런데 제4인터내셔널은 일관되게 이렇게 나오지는 못했다. 반면 트로츠키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경향들은 냉전의 압력 속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한국 혁명을 방어해야할 의무를 한사코 거부했다. "워싱턴도 아니고 모스크바도 아니다"고 외치며 "제3진영" 의 입장을 지지한 느슨한 국제 조직들은 "스탈린 전체주의"를 방어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 논쟁들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유포했다. 이러한 경향들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그러나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 경향은 아직도 살아남아 상당한 규모의 조직으로 성장했다. 1940년대 말 클리프는 제4인터내셔널 영국 지부 내부에 분파를 결성했다. 이 분파는 소련과 동구의 국가들 내부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체제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어쨌든 이 국가들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했다. 이 나라들이 생산수단을 축적하고 서방과 "군사적 경쟁"을 벌였으므로 자본주의 체제로 보아야 한다고 클리프는 주장했다. 이 이론은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생산수단과 사회적 관계인 자본을 근본적으로 혼동했다. 그리고 군사적 경쟁이 자본주의에 고유한 특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군사적 경쟁이란 체제의 성격과 무관한 모든 국가의 기능이다. 이 점은 너무도 자명하다. 예를 들어 레닌과 트로츠키가 정권을 장악했던 소련은 왜 "국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었는지를 클리프는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레닌과 트로츠키도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생산수단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특히 1918년에서 1921년 사이에 제국주의 군대와 그 동맹 세력에 대항해서 이들은 치열하게 군사적 경쟁을 벌였다. 소련이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는 클리프의 이론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이 이론은 부인할 수 없는 정치적 장점들을 지니고 있다. 냉전이 한창일 때 소련과 그 동맹국가들을 방어할 의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제국주의 모국에서 이 의무를 다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할 뿐만 아니라 전혀 대중성이 없었다. 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결국 영국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제명 당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북한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면서 조직의 규율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출당 조치된 후 이들은 노동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평론 ](Socialist Review)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이 잡지는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독립된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데 헌신할 "노동당의 조속한 집권"을 주창했다. 이들의 잡지 제2호는 트로츠키주의를 기각한 실론인의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남한 정부와 북한 정부가 모두 강대국의 허수아비 정권인 한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들 중 어느 쪽도 지지할 수 없다." --- 비. 카랄어싱엄, "한국의 전쟁", [사회주의 평론 ], 1951년 1월 제국주의 동맹국들의 한반도 침략, 대대적인 살인적 공습, 핵무기 사용 위협도 이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한국은 두 강대국 진영이 제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시험하고 있는 경기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전쟁에서 어느 쪽을 지지하는 것은 그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사회주의나 한국 인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 "한국: 이 `해방전쟁'을 끝내라!", [사회주의 평론 ], 1952년 11월 [사회주의 평론 ]은 한국 사회를 뒤흔든 해방공간 당시의 계급투쟁이나 북한 정부의 진보적인 조치들이 전혀 의의가 없는 것인양 이것들에 대해 논평하기를 거부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10년 후 미국은 월남에서 또 다시 대규모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자들은 월남을 자의적으로 분단하였고 이 상황을 고착시키려 했다. 또한 자신들의 인기없는 괴뢰정권이 선거에서 질 것을 우려하여 전국적 차원의 선거도 실시하지 않았다. 한국과 월남의 경우 모두 자본주의 체제인 남쪽에서 봉기가 발생하면서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전면전이 전개되었다. 두 경우 모두 대중적 토착 게릴라 운동을 기반으로 하면서 중국,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는 스탈린주의 정권이 북쪽에 존재했다. 그리고 미국과 그 하수인 동맹국가들이 연합하여 지지한 괴뢰정권이 남쪽에 있었다. 결국 화해할 수 없는 두 남북 체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 두 경우 다 자유를 옹호한다는 미명하에 제국주의자들은 우리 인민을 인간 이하의 "버러지"로 간주하면서 이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인종주의적 성격의 전쟁을 자행했다. 이 두 경우 모두 제국주의 군대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 "적으로 간주된" 인민에 대해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려는 목적을 가진 대대적인 무차별적 폭격 전략이 채택되었다. 두 경우 모두 전쟁은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죽음을 당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월남전은 스탈린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호지명의 군대가 월남의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를 패배시킨 후 곧이어 벌어졌다. 클리프의 [사회주의 평론 ]은 1952년 1 2월 합병호에서 한국에서 진행 중인 전쟁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월남전의 유사성을 지적한 글을 실었다. 그리고 전쟁 당사자 어느 쪽에 대한 지지도 거부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월남에서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월남 인민은 제국주의자들의 도구인 바오다이 정권과 스탈린의 하수인인 호치민 정권에게 똑같이 역겨움을 느끼고 있다." 이 잡지의 편집자는 편집자 난에서 이 글의 논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 독자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으로 불리우며 노동당을 탈당한 클리프주의자들은 월남연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자 호지명 정권의 승리를 주창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평론 ] 신판 1993년 10월호에 다시 실린 당시의 글에서 크리스 하먼은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으로 불리웠던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68년 초 3백 내지 4백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2천명의 시위대가 우리가 내건 깃발 뒤로 행진을 했다. 이 깃발에는 `민족해방전선에게 승리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시위대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면서 행진했다. 이것은 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 [사회주의 평론 ], 1993년 10월 그렇다면 왜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은 이렇게 전혀 다른 노선을 주창했는가? 전쟁의 성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노선이 변했다. 전쟁 당사자들의 계급적 성격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대중의 분위기였다. 1950년대 초 반공 히스테리가 절정에 달했을 때 클리프주의자들은 영국 노동당에 입당해서 그 속에 파묻혀 있었다. [사회주의자 명부](Socialist Register)지의 1984년 판에서 존 핼리데이는 전쟁 기간 동안 노동당 내각이 진행한 토론을 소개하고 있다: "앨런 위닝튼의 팜플렛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를 [노동자 일간지](Daily Worker)가 출판한 것에 대해 국가반역죄로 기소할 것인가가 토론의 주제였다. 이 팜플렛은 이승만 정권의 범죄행위들을 폭로했는데 어느 누구도 이 글의 진실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결국 [노동자 일간지]를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뿐인 것처럼 보인다. 즉 이 기관지의 편집자가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법에 따라 무조건 사형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 초 "제3진영" 은 좌익에 대한 지배계급의 광기어린 마녀사냥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수만 명의 급진적 학생운동이 존재했으며 해럴드 윌슨의 왼쪽에 있는 모든 정치 경향들은 월맹의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이 "제3진영" 노선을 고수했을 경우 이들은 급진적 대중들로부터 고립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클리프와 그의 동료들은 호치민과 민족해방전선의 깃발을 높이 치켜올렸다. 좋은 원칙이든 나쁜 원칙이든 조직 확대에 방해가 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정말이지 위대(胃大) 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제4인터내셔널의 전통은 이와 다르다. 제4인터내셔널 조직원들은 지배계급의 엄청난 압력 속에 그리고 혼란과 오류를 범하는 가운데에서도 트로츠키주의의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최소한 제국주의 세력에 반대하여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인 북한을 방어하는 용기를 보였다. [Korea: The Forgotten War] [1917] 제 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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