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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뢰의 역사 다시 쓰자

[한-일 지식인 공동제언 ] ‘신뢰의 역사’ 다시 쓰자 ①
[한겨레 2005-04-08 19:42]

[한겨레]

일본 교과서 왜곡과 독도 문제로 한·일 간의 긴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일본 문부성의 교과서 검정결과 발표를 계기로 <한겨레>는 한·일 지식인들의 ‘미래 제언’을 앞으로 세차례에 걸쳐 긴급 연재한다. 한·일 갈등과 대립의 실체를 드러내고, 용서와 화해, 공존의 미래를 위한 주문과 제언을 두 나라 모두에게 전하려는 뜻이다. 글쓴이들의 아픈 지적은 때로는 자국 내부를, 때로는 상대 나라를 향할 것이다. 이들의 글이 ‘한·일 우정의 해’ 2005년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향한 매서운 회초리이자, 그 반대편에서 평화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든든한 지팡이가 되기를 기대한다.

‘전범 과거’ 반성이 화해 열쇠 한일관계는 지금 ‘일본문제’로 인해 파란의 길목에 들어서 있다. ‘일본문제’란 ‘대내적 극우화’와 ‘대외적 팽창화’라는 일본 특유의 정치외교 행태와 사고방식의 집합을 말한다. 역사왜곡, 영토분쟁, 야스쿠니 신사참배, 전범 쇼와 천황 생일의 국경일 제정, 평화헌법 개정추진, 장관과 지사의 연속 망언 등 최근의 행동조합은 ‘일본문제’의 집중 분출을 의미한다. 특히 한일관계는 ‘일본문제’의 최악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일본문제의 근원은 세계적 차원으로부터 발원한다. 오늘날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강화와 일본문제의 표출을 면밀히 연계하고 있다. 미일동맹강화는 일본문제의 행로를 결정짓는 중대 요인인 것이다. 둘째, 지역차원에서 일본문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발전과 군비경쟁, 세계화와 민족주의, ‘세계적’ 탈냉전과 ‘지역’냉전 심화 사이의 극심한 동아시아적 불균등 발전의 산물이다. 끝으로 한일관계 차원은 일본외교의 전형적 행태를 반영한다. 미일동맹 강화 뒤, 북핵문제 악화와 한미동맹의 균열을 계기로 한반도에 약간의 불안정이 깃들자 일본문제 관철의 한 정형을 만들려고 약한 고리를 집중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일본문제의 이런 표출구조는 동아시아와 한반도 평화에 심대한 불안요인으로 작용해왔다. 따라서 한국의 전략은 역사대응을 넘어 동아시아와 한반도 평화, 지역협력과 국익을 향한 단호하고도 사려 깊은 선택과 국제연대를 요구받고 있다.

‘일본문제’ 수준낮은 민주주의 반영 무엇보다 일본문제는 일본 민주주의의 낮은 수준의 반영이다. 일본은 시민저항을 통해 체제를 변혁한 민주혁명의 역사가 없었다. 세계대전을 초래한 천황제 및 군국주의 악행에 대한 전후의 자각적인 국가사회적 청산 역시 결여됐다. 요컨대 일본문제는 일본 민주주의의 저발전과 표리를 이룬다. 또한 양심적·비판적 담론은 섬처럼 고립돼 국가정책으로 반영될 수 없다. 일본 양심단체와 국제연대를 통해 높이 소리쳐도 정부를 변화시키기 어려운 이유는 이러한 이중사회구조와 직결돼있다.

따라서 민주주의 발전은 일본문제 해결의 제일 요건이 된다. 첫째는 일본문제의 핵심인 천황제 폐지에 달려있다. 특히 식민경험 국가와 인민들은 전쟁책임의 요체로서 천황처벌과 폐지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 둘째 평화헌법의 유지다. 전범국가 일본은 전쟁재발을 방지하는 국제조치로서, 독일처럼 분단되는 대신, 평화헌법을 수용했다. 따라서 헌법 9조는 국제적 부전(不戰)조약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일본은 국제사회 특히 전쟁당사국과 식민경험국들의 동의 없이는 개정할 수 없다. 셋째 야스쿠니 신사의 일급전범 위패를 타국에 설치될 동아시아 인권재판소나 전쟁박물관 같은 ‘지역 다자 인권·재판기구’로 옮겨야 한다. 일급전범의 관리를 일본이 맡아 정부대표가 공식 참배하는 것은 전쟁책임과 패전을 정면 부인하는 세계최악의 전후처리 사례다.

헌법개정, 식민경험국 동의해야 진실의 인정과 반성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악행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자기와 타자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향한 반성은 곧 ‘미래’를 향한 약속인 것이다. 특별히 과거의 전쟁과 식민통치에 대한 오늘의 옹호는 미래의 행동을 위한 정신적 예비준비일 수 있어 더 용납될 수 없다.

동아시아 인민들은 왜곡에 기초해 역사전쟁을 감행하는 일본에게 양심과 양보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문명국가의 최저 행동규범이라도 준수해달라는 것이다. 지속적인 사과와 참회, 독-불 및 독-폴란드 교과서 합의, 그리고 오데르 나이제 동쪽 영토의 포기를 통해 유럽인의 마음을 얻어 통일과 유럽통합, 유럽평화로 나아갔던 독일의 국량을 일본에게 기대할 수는 없다. 오늘의 일본에게 정녕 필요한 일은 미래의 후손들이 더 이상 선조들의 악행으로 인해 조롱받지 않도록 양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1등 경제와 3류 역사인식’, ‘1등 기술과 3류 도덕’ 국가라는 지금의 모습은 결국 아시아의 친구들을 떠나게 할 것이다. 아시아와 적대하고 구미로 달려가 전란으로 치달은 19~20세기의 탈아입구(脫亞入歐)가 아니라 아시아 및 구미와 두루 친한, 평화를 위한 21세기 입아입구(入亞入歐)의 지혜를 기대한다.

21세기 ‘입아입국’ 지혜 짜내야 독일의 바이체커 대통령은 종전 40주년을 맞아 1985년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현실을 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과거에 눈을 감은 일본은 현실은 물론 미래도 보지 못하고 있다. 진실의 인정은 화해의 최소 요건이 된다. 철학의 이론을 빌면 화해에는 ‘엷은 화해’와 ‘두터운 화해’ 두 가지가 존재한다. 전자는 혀끝에 기초한 화해라서 과거의 갈등은 언제든 재생된다. 후자는 내면의 반성에 바탕해 과거를 딛고 함께 미래로 갈 수 있게 해준다. 한일 우정의 해인 올해 우리는 일본에서 진실의 인정, 왜곡의 교정, 반성의 첫 걸음이 시작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면 한국과 아시아 인민들은 ‘두터운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먼저 달려갈 것이다.

박명림/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고립 자초하는 ‘주류 일본인’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이름)의 날’ 조례 제정을 계기로 한국에서 불붙은 반일운동은 최근의 양호한 한-일 관계를 단번에 역전시켰다. 이 문제는 결코 일시적 반일운동으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뿌리는 한국 쪽이 아니라 오로지 일본 쪽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옆에 있는 <대일본백과사전>(쇼가쿠칸 발행)의 ‘다케시마 문제’라는 항목을 간단히 인용한다. “한국에선 15세기 <동국여지승람> 이후 우산도라는 이름으로 무릉도(울릉도)와 함께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시켜 영토로 인식해 왔다. 일본에서도 에도 시대에 어민들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됐지만 자국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포츠담 선언에 바탕한 연합군의 지령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 정부는 당연히 영유권을 행사했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양보하지 않고 1965년 한-일 협정에서 미해결의 문제로 넘겼다.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일본인의 국제주의를 묻는 가장 엄중한 시금석이다.” 극히 ‘보통인’ 백과사전의 인용을 보더라도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령이라는 점이 당연하다. 지도상의 거리를 재봐도 한국의 울릉도 쪽이 가깝다.

한국 반일운동 원인은 일본 자신 시마네현은 왜 이번과 같은 일을 벌였을까? 이 글을 쓰는 것을 계기로 시마네현 지사에 질문서를 보냈다. 독도 문제 그 자체에 대해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주간 금요일> 4월1일호에 서울 주재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가 참으로 적절한 해설을 썼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나의 견해를 밝힐까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고음을 무시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라는 그의 글에는 “한국민은 이번 사태를, 100년 전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를 일본에 편입시킨 것이 식민지배의 단서가 됐다는 점의 연장선에서 보고 있다”고 한국 쪽이 항의한 내용이 나온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는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인 한국에 강한 우려를 안겨주고 있다. 헌법 개악 움직임, 자위대의 해외파병,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침략의 역사를 없애려는 교과서….

이런 경향에 대해 노 대통령은 이미 몇차례나 경고음을 보냈다. 지난 2월25일의 취임 2주년 연설에서 일본과 독일을 비교하고, 두 나라의 차이는 주변국의 신뢰의 차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나도 독일을 취재하고 르포기사를 쓴 적이 있지만, 2차대전 때 나치 독일이 저지른 침략에 대해 전후 독일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반성했는지 일본과 비교하면 참으로 ‘하늘과 땅’ 차이다. 친구인 독일 연구자의 표현에 따르면, 그래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점수를 매기면 독일은 100점 만점에 50점 정도라고 한다. 일본은 2~3점에 지나지 않는다.

일 전후반성 100점 만점에 2∼3점 이런 일본과 일본인은 어떤 존재인가? 에이(A)급 전범 용의자 기시 노부스케를 전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총리로 뽑았다. 지금 총리는 전후의 가장 우익인 고이즈미다. 수도 도쿄에는 “(일-한 병합은) 그들(조선인)의 총의”라는 폭언을 내뱉은 ‘망상적 자위사관에 빠진 저질 정치가’ 이시하라 신타로가 지사로 있다. 최대의 문제는 고이즈미와 이시하라 자체에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사람들을 뽑고 그대로 두는 낮은 수준의 ‘주류 일본인’에게 있다.

아오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요구되는 것은 눈앞의 사태 진정이나 개선책이 아니다. 의문시되는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모습이다. 숙원인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해 미국에 꼬리를 흔들어 지지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이웃나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안보리 상임국’ 웃음거리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일본인이라는 무지하면서도 거만한 민족이다. 물론 일본인 100%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며, 훌륭한 일본인도 있지만 주류 일본인은 늘 이렇다. 이런 주류가 과연 바뀔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소중한 이웃인 한국의 신뢰를 받을 때가 올 것인가. 이런 물음에 비관적인 두가지 요소를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일본 역사에는 혁명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메이지 유신 등은 물론 다르다. 혁명의 맹아나 좌절당한 봉기는 있었지만 폭력·비폭력을 불문하고 성공한 혁명은 없었다. 세계의 주요국 가운데 혁명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나라는 극히 드물다.


다음으로 최근 과학논문에 일본인 유전자에 관한 연구가 실렸는데, 약 70%가 ‘소극성’을 나타냈다. 일본인은 개인의 의지에 바탕한 행동변화는 어렵지만, 주위의 많은 사람이 행동하면 줄을 서는 ‘집단의존증’으로 쉽게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미국인 유전자의 소극성은 약 20%에 지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이 동북아에서 고립될 것”이라는 주한 일본대사관 관계자의 말은 고이즈미와 이시하라야말로 일본을 몰락시키는 장본인이란 얘기일 것이다.

혼다 가쓰이치/<주간 금요일> 편집위원(전 <아사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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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기원 -한국인 성격 중심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연구
-한국인의 성격적 심리적 특성을 중심으로


채 규 철
(성균관대학교)


I. 서 론

1. 문제의 제기

한국전쟁은 전후 국제정치사의 주요 강대국들이 거의 망라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종결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이 전쟁의 기원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오랫동안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라는 전혀 상반되는 학설상의 대립이 있어왔다. 이들의 대립은 주로 2가지의 쟁점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이 전쟁이 "남침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북침에 의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누가 이 전쟁을 주도했느냐"의 문제, 즉 이 전쟁이 "당시 조성되기 시작한 미 소 냉전체제의 모순에 의한 것이냐 혹은 한민족 내부의 갈등과 대립에 의해 발발한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물론 최근에 러시아와 중국정부에 의해 일부 자료가 공개됨으로써 사건의 윤곽은 상당한 정도로 밝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첫번째의 쟁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북한의 남침'으로 굳어져 있으며, 두번째의 쟁점에 대해서도 "김일성이 주도하고 스탈린의 후원에 의해 발발했다"는 방향으로 대체적인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의 실체가 완전히 규명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며,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두번째의 쟁점과 관련하여, "한국전쟁은 처음부터 김일성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서 그가 스탈린에게 남침 지원을 요구했으며 스탈린이 최종적으로 승낙함으로써 발발했다"는 학설을 대전제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 학설이 개전의 직접적인 동기까지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즉 김일성은 스탈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끈질기게 졸라서 남침의 허락과 지원보장의 약속을 받아내려고 했을까?
이러한 의문은 이승만에게도 적용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남한군은 38선상에서 북한군과 잦은 교전을 벌였고, 특히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할 무렵인 1949년 중반에는 북한군에 대해 대규모 선제공격을 계획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출범한 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신생독립국으로서 국내의 산적한 문제들을 방치하고 게다가 군사력도 현저히 열세였던 상황에서, 과연 이승만이 그와 같이 무모한 행동을 시도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존의 학설이 이러한 의문을 설명하지 못하는 ― 혹은 의도적으로 중요하게 다루려고 하지 않았던 ― 이유는 당시 미 소의 세계정책이 구현되는 과정에서 남 북한을 단지 객체적 대상으로만 고려하면서, 이승만과 김일성의 역할을 오직 강대국의 의사에 일방적으로 좌우되었던 종속변수로서만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상황논리로만 본다면, 당시 미국과 소련은 국내외적인 이유들로 인해 '전면전을 불사할 정도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기 어려운 입장에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대전 이후의 미국과 소련은 국내문제에 전념하기 위해서라도 국제문제에서는 현상의 급격한 변화를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특히 전쟁의 피해가 극심했던 소련의 경우에 더욱 절실한 것이긴 했지만, 미국 역시 의회의 군비삭감 압력으로 해외에서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수행하기가 곤란했다. 더구나 양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호 공멸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양국은 경쟁과 대립 속에서도 직접 충돌의 가능성이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극도로 신중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상호 협조하여 각각 남 북한을 강력히 통제하는 '냉전체제의 관리자이자 동반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한다면, 한국전쟁 개전의 동기에 관한 문제는 아무래도 해방 이후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적 요인들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2. 연구의 방법과 한계

이상과 같은 관점에 따라 본 논문은 '한국전쟁의 내정적 요인설'을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 주로 개전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되, 특히 '한국인의 성격적 심리적 특성'을 분석의 틀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성격적 심리적 특성의 연구에 관한 한, 확립된 연구방법론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뢰할 만한 선행연구도 부족한 실정이어서 현재로서는 유용한 분석의 틀을 활용하기가 어렵다. 이에 부득이 본 연구는 나름대로의 분석수단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서 본 연구는 우선 한국인의 2가지 속성 ― 성격적 및 심리적인 특성 ― 에 관한 틀을 구성하였다. 그 하나는 한국인의 분파주의적 대 속성과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비타협적 극단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의존적 성향과 불안의 심리에서 연유한 조급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의 틀을 가지고, 한국전쟁 직전 시기에 남 북한의 정치 사회적 및 군사적 상황들에 대한 이승만과 김일성의 인식체계, 특히 정책결정을 위한 심리구조들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같이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본 논문이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 본 논문에서 제시될 분석의 틀이 검증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 물론 이러한 분석틀은 완전한 검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것이지만 ― 연구를 수행하여 결론을 도출한다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한계 때문에 본 논문은 새로운 이론이나 학설을 탐구하기보다는 기존의 '내쟁적 요인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하나의 근거로서만 제시하되, 다만 내쟁의 원인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고 조망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오히려 본 논문의 더 큰 약점은 직접적인 증거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정황증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방법론상의 한계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측면이기는 하나, 자칫 논리의 비약이나 왜곡이라는 문제점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 이러한 문제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능한 한 다양한 문헌들을 활용하되 문헌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자료의 해석과 적용에 신중을 기하여 문제점을 최소화한다면, 실제 문제점은 그리 심각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II. 한국인의 성격적 심리적 특성

1. 분파주의적 대립과 비타협적 극단주의

분파성이란 특정한 이해관계를 동기로 하여 타집단 또는 타세력에 대하여 배타적 내지는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분파성은 일찍이 한국 정치문화의 주요한 특성 중의 하나로서 지적되고 있는데, 한국사회 내에 그와 같은 성향이 형성된 배경으로는 유교의 명분론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 갈등, 강한 공동체 의식의 반영으로서 내집단과 외집단 구성원 간의 경쟁적 대립, 관직의 수적 제한에서 비롯되는 배타적 출세주의, 가문을 중심으로 한 혈연적 가족주의, 지연 학연 인연을 강조하는 파벌양상, 그리고 정당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각종 정파의 분열과 대립 등을 들 수 있다.
한국 사학계의 원로학자인 이기백(李基白) 교수는 일본인 학자들의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도 한국 정치문화에서 차지하는 당파성과 그것의 형성과정을 잘 분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당파성은 조선사회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및 사회적 조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즉 조선은 중앙집권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귀족들은 모두 중앙에 진출하여 관리가 되는 것을 생애 최고의 목표로 간주했으며, 그들 간의 정치적 갈등은 곧 중앙의 정계를 무대로 한 권력대립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근대사회에 들어 이러한 대립은 이념이나 정강의 대립보다는 혈족관계나 사제관계로 연결되었고, 이로 인해 자손이나 제자에게 계승된 파벌 간의 대립은 결국 정의나 정책을 둘러싼 논쟁을 압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최재석(崔在錫) 교수 역시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으로서 친소구분의식을 들면서, 이렇게 친소를 구분하는 의식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파벌이나 붕당이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친소를 가리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현상이겠지만, 유독 한국인은 가족주의로부터 파생된 특이한 친소구별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인의 친소구분 의식의 요인으로서 7가지를 들면서 그 중 가장 큰 요인의 하나로 '효도'의 개념을 들고 있다. 즉 개인의 정당한 주장은 언제나 누구에 대해서도 자유로이 발표되고 용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한국사회에서는 효도의 원리로 말미암아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이익의 주장이나 대립을 합리적인 조정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생활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경험을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타인이나 타집단과 타협 또는 조정에의 길이 두절되는 것은 결국 친소에 근거하는 파벌을 조장하게 되며, 이와같이 형성되는 퍼스낼리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배타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설득이나 조정을 통해서는 반대자나 적대자와 상호 이해에 도달하기 곤란하다고 인식하며, 심지어 더 넓은 집단이나 사회의 발전과 조화에 대한 관심보다 자기의 적대자에 대한 복수와 파멸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때 효도 자체가 파벌형성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효도라는 명목하에 길들여진 자식의 퍼스낼리티가 파벌형성에 더 큰 영향을 준다. 다시 말해서 효도는 룰에 대한 충실성보다 인간에 대해서 충성하는 퍼스낼리티를 길러내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특유한 '의리'의 관념 또한 파벌형성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거의 모든 한국인이 각기 배타적인 '왕초-똘마니' 관계를 형성하여 왕초는 자기의 똘마니에 대한 보호의무만을 갖고 있으며, 똘마니는 자신의 왕초에 대하여 충성만을 이행한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이념이나 정당성 또는 다같이 동일한 인격과 자유를 가진 인간이라는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단지 자기 파벌 소속의 성원이나 두목의 이해관계만이 중요시되기 때문에 자기 집단 이외의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책임감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배타적으로 된다. 이런 이유로 종래 한국의 정치사에는 상호 인격의 존중이나 정책경쟁에 의한 페어플레이보다는 타인과 타정파에 대한 배척과 중상모략이 다반사로 발생했던 것이다.
타인과 타정파에 대한 배타성을 더욱 강화하는 요인이 바로 공동체로부터 개인의 미독립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자신의 소속집단과 일체감을 갖는 생활을 가장 이상적인 생활형태로 여겨왔으며, 그 결과 이들은 자기가 소속된 집단이나 집단의 리더가 자신의 신념과 배치되는 행위를 할지라도 감히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교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주의 문화의 소산으로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집단이 정치적 권위의 기반으로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만일 한 인간이 자신의 소속집단에 반대하여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그는 즉시 소속집단으로부터 심한 사회적 따돌림을 받고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단의 논리에 순응하여 협동의 덕목을 체득하도록 강요받으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공동체나 집단으로부터 개인의 미분화는 다른 한편으로 집단 이기주의(group egoism)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가장 배타적이며 비합리적인 집단 이기주의를 생활화하면서, 개인의 존엄과 자주성을 존중하는 생활원리인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이와같이 자기 집단만을 위하는 행동은 결국 대립과 파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대립은 있게 마련이며, 정치에 있어서 갈등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대립과 갈등의 결과로서 '사회집단의 결속이 더욱 강화 유지되느냐' 아니면 '약화 내지는 분해되고 마느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치는 대립과 갈등이 국민들의 의사나 국가의 안전과 발전의 필요에 의해 자제되고 또 해결되기보다는 오히려 극한적인 상황으로 치닫기 일쑤였던 것이다. 한국인의 이러한 특성은 정치적 갈등과 대립의 상황을 '제로섬(zero-sum) 게임'으로 인식하려는 성향에서 연유하며, 그것은 곧 비타협적 극단주의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비타협적 극단주의는 분쟁 당사자들이 서로 자신들의 입장만을 절대시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무시하면서 억압하려는 데서 나온다. 이러한 태도는 '나의 주장은 무조건 옳고 상대방의 주장은 그르다'는 흑백논리의 결과인 것이다. 모든 대립적 상황을 이처럼 정의와 불의의 대결 혹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시각에서만 본다면, 여기에서 타협의 여지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비타협적 극단주의는 특히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은 조선조 이래 오랜 전제왕권정치와 일제의 강압정치 같은 일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 속에서 타협에 의한 정치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조선조의 성리학에 의해 뒷받침된 배타성이 당쟁의 과열을 부채질하였고, 이후 한말의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동학운동파 간의 강경 대립, 그리고 친일파와 친청파, 친로파 간의 극단적인 경쟁과 갈등이 정치를 황폐케 하고 국론을 분열시켜 결국 일제의 합방을 재촉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심지어 일제 식민통치하에서조차 독립운동세력들 간에 벌어진 내분과 비협조는 국권의 자주적 회복에 지장을 주었으며, 해방을 맞은 후에도 4대 강대국들은 한국 국민들이 자주적인 독립정부를 세우고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신탁통치를 강요하려 했던 것이다.
민족 내부의 갈등과 대립은 결국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고,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관계의 역사는 이데올로기의 대결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국내 정치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어서 권위주의적인 군사정부와 민주화 세력 간의 대결은 한 세대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민주화 시대에 들어서도 여야 간의 극단적인 대립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으며, 각종 선거에서 지역 간의 대립의식은 오히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감이 있다. 민주정치를 타협에 의한 정치라고 볼 때 그동안 대립과 갈등 일변도의 정치구조도 바로 이와같이 타협에 익숙치 못한 한국인의 태생적 성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국인이 타협에 서투르며 그것이 또한 민주주의 발전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는 사실은 해방 직후 남한 지역에서 3년간의 군정통치를 맡았던 미국 당국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있다. 그들은 "타협적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하는 문제가 한국인들과 한국의 관리들에게는 그다지 절실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4천 년에 걸친 이 나라의 봉건적 유산이 불과 3년 동안에 일소될 수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이와같이 타협의 문화를 체득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한국사회가 전통적으로 농업을 위주로 하는 유학자 중심의 사회였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틔고 꽂을 피웠던' 고대 아테네나 영국이 모두 상업민족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협'이란 근본적으로 상인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농민이나 선비에게는 낯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천한 일이기 때문이다.

2. 의존성과 조급성: 불안의 심리

인류학자 오스굿(C. Osgood)은 일찍이 한국인의 성격을 '구강적(oral-saddistic)'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구강적 성격의 두드러진 특징은 '의존적'이라는 데 있으며, 이들은 성장하여 사회에 나가서도 항상 남이 도와줄 것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의존적인 성향으로 인해서 이들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부탁을 하게 되고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남이 자신의 가까이에 있어주어야 하며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은 자신이 돌보기에는 너무 공허해서 남에게 기대고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강적 성격의 한국인은 독립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서양인과 달리 의존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아기는 엄마에게, 엄마는 아빠에게, 아빠는 조상에게, 상민은 양반에게, 학생은 스승에게, 사원은 사장에게 일단 의존을 한다. 한국인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의존적 연쇄에 매어져 있으며, 그렇지 않고는 불안하기에 꾸준히 매일 의존적 쇠고리를 모색한다. 그리고 그 의존체에 자기의 개성이며 이해며 욕구며 책임이며 모든 주체를 의존하고 자신을 무화시킨다. 한국인이 자신의 소속집단과 일체감을 가지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의존적 성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강적 성격의 한국인은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수용적 성향(receptive orientation)'을 가져 자기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와야 한다고 믿으며, 따라서 외부의 권위에 의지하려 하고 지식이나 도움을 밖에서만 구하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인은 외래의 종교나 사상, 문물에 너그러워서 한국에 불교나 유교, 천주교나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마다 기성의 가치관과 별다른 저항이 없이 수용된다. 한국인들은 이질적인 사물을 꾸준히 기성의 사물에 절충하고 융합함으로써 배척하지 않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한국인들은 국내적으로는 분파주의적이고 비타협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외래문화에 대해서는 무한정의 포용성을 갖는 문화전통을 유지해 왔다.
구강적인 성격의 또 다른 특성으로서 심리적 불안감을 들 수 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불안감은 본능적 욕구와 그러한 욕구충족을 억압하는 사회 간의 갈등상황으로부터 나오거나 혹은 의존대상으로부터 격리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이처럼 불안을 겪으면 그는 조급해지고 긴장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 심리학자 윤태림(尹泰林) 교수는 특히 한국의 문화를 '불안의 문화'로서 규정한다. 그는 한국인의 의존성과 조급성의 근원인 '불안'은 한국의 특유한 역사적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의 歷史는 외세의 侵入과 內亂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역사를 누군가는 恥辱의 역사라고 했지만, 오히려 한국의 역사는 外勢와 官員들의 횡포 속에서 이루어진 不安과 위험 속에서 살아온 역사라는 것이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나라치고 고난이 없는 역사가 없었겠는가마는 유독 한국은 地政學的인 위치에서 볼 때 北에서 오는 거센 征服의 압력과 南으로 바다를 건너 밀려오는 野望을 꺾기에도 너무나 바빴고 한 때도 안심하고 살 날이 없었다. 北에서 오는 朝貢을 바치라는 강압과 壬辰倭亂이 저지른 무서운 破損에 한국인은 침략의 그림자가 항상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을 잊을 수 없었으며, 한국의 역사는 그저 한없이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될 괴로움이 떠날 날이 없었다. 희망을 저버리고 不安 속에서 한 가닥의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無意識 속에 움트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유교가 가르친 전제적인 가부장제의 가족제도에서 오는 억압, 역대의 왕조들을 통해서 내려오는 경제적 수탈, 특권계급의 정치적 압박, 영토의 분할에서 오는 전쟁에 대한 암운 등이 이중삼중으로 겹쳐 있는 것이 현재의 한국인을 감싸고 있는 불안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은 순환하면서 다른 불안을 자아내게 되고 대인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나아가서는 국제적인 불안을 조장하는 것이다.
한편 정신분석학자인 융(C. G. Jung)은 망각된 것과 억압된 것을 무의식의 영역으로 보고 그 무의식을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구분하면서 특히 의식에 떠오를 수 없는 무의식, 무의식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집단 무의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러한 "집단 무의식은 유전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한국인의 불안심리는 우리 조상들의 경험이나 의식구조가 우리에게 격세유전되어 결국 우리 민족이 공통적으로 갖는 집단심리로서 정형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들은 농경시대의 봉쇄적이고 타자 의존적이며 수동적인 사유, 외세와 내란과 전제정치가 물려준 의식구조를 아직도 일부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다사다난한 격동의 시기였던 20세기 전반기는 그렇지 않아도 구강적 성격의 한국인에게 불안심리가 더욱 강화되어 표출될 수 있는 시기였다. 특히 억압과 공포, 그리고 가난과 혼돈으로 암울하기만 했던 일제 강점기에 성장과정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낯선 타국에서 나라 잃은 식민지인으로서 온갖 차별과 모멸감을 직접 겪어야 했던 사람들 ― 예로서 이승만이나 김일성 ― 의 경우에 그들의 불안심리가 어떠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에서 억압과 공격성은 이미 뿌리깊이 내재되어 있던 병리현상이었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해방 직후의 남 북한에서 정치지도자로 등장했을 때 애초부터 그것은 권력의 남용이나 폭력의 형태로 표출될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헤어날 수 없을 정도의 강박관념에 매몰되어 현실을 갈등적 시각으로서 인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해방 직후 한반도의 정국을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세력과 나머지 비공산세력 간의 대결로 보았으며 중간파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김일성 역시 제국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조선의 혁명은 인민해방전쟁에 의해서라도 반드시 쟁취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구강적 성격에 있어서 불안의 심리는 의존심리와 표리의 관계에 있다. 특히 뛰어난 현실정치감각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의 권력을 강화하고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대국에 의존하거나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점에서 이승만과 김일성은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타고난 권력정치가로서 권력의 장악과 체제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미국의 힘을 필요로 하면서도, 기회를 포착하여 미국의 힘을 역이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김일성 역시 항상 '강한 자의 힘을 빌려 자신의 경쟁자를 제거하는 퍼스낼리티의 소유자'로서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III. 한국전쟁: 외세에 의존한 통일의 추구

1. 남북의 분파주의적 비타협적 대립

해방 이후 3년간의 미 소 군정이 종식되었지만 통일된 한민족의 국가는 수립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1948년 8월과 9월 남 북한 각각의 지역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기정사실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북한 쌍방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한반도 전역은 통일의 열기로 가득차 있었으며 분단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남 북한의 지도자들 역시 분단의 조속한 종식만이 민족의 유일한 활로라고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통일의 실현이라는 이상에만 집착했다.
남 북한은 서로 상대방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대화와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남한 당국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평양정권은 괴뢰정부인 만큼 협상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며, 특히 보수적인 반공주의자들은 좌익과의 협상이나 소련이 포함된 다변 협정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국익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북한측 역시 남한정부를 미제국주의자들이 한민족을 분열시키고 한반도에서 신식민주의를 획책하기 위한 정책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매국노 이승만체제는 단지 허울뿐인 꼭두각시 정권으로서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양측의 입장은 각각의 헌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남한측의 헌법은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규정하고 북한 지역을 반국가단체가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실지로 간주하여 이 실지의 회복을 바로 통일과 동일시했다. 북한의 당시 헌법 역시 서울을 '통일조선'의 수도로 규정하여 남조선을 해방하는 것이 곧 통일이라고 규정했다. 바꿔 말하면 남 북한은 서로 자기 쪽의 체제와 통치를 상대방에 확장한다는, 즉 상대방의 붕괴 내지는 소멸이라는 조건하에서만 통일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남 북한 양측은 각각 배타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서로의 방식에 의한 통일만을 고집했다. 그래서 정부수립 전까지만 해도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구성'을 주장했던 현실주의자 이승만조차도 대통령이 된 후에는 여러 차례나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표현했으며, 통일을 위해서는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북한 지역에 대한 주권을 회복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 역시 "공화국 정부는 전체 조선인민을 정부의 주위에 튼튼히 단결시켜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동원할 것이며,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라고 결연히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목표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일성 양자는 자신의 힘으로 그 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정책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유일한 대안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한반도를 해방시켜 주었으며 그들 각각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던" 미국과 소련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지만, 이 방법에도 물론 한계가 있었다. 남 북한은 독립한 후에도 여전히 미 소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통제되어 거의 예속된 상태에 있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이들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구성하는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아서 이승만과 김일성이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이들 강대국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어 보였던 것이다.
미국은 1905년 이래 한반도를 일본의 세력권 내지 병합권으로 인정한 바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그들의 대한반도 정책은 단지 대일전의 종전처리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제기된 것일 뿐이었다. 물론 이 무렵 유럽에서 동서냉전이 시작되고 중국대륙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급격히 강화되어 미국은 일본열도의 안전에 더욱 큰 중요성을 부여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한반도에 대해서는 종래의 소극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련 역시 북한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긴 했지만, 그들의 주요 관심은 여전히 유럽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았다. 군사적으로도 소련은 아직 미국에 비해 취약했기 때문에 한반도처럼 부차적인 지역에서의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다. 소련이 북한에 소비에트체제를 건설한 의도는 다만 극동지역에서 미국과 자유주의 진영의 도전을 차단할 수 있는 방파제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들 강대국들은 그동안 대전으로 인해 방치되었던 국내문제를 해결하는 데 국력을 기울여야 할 입장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전시체제를 평시체제로 전환하는 데 국력을 집중했으며, 소련 역시 전후복구와 경제력 재건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양국은 상대방을 자극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한반도에서도 자국의 군대를 주둔시켜 남 북한의 충돌 억지력을 보유함으로써 현상을 유지한다는 점에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황은 으레 변하게 마련이었다. 1948년 후반 이래 한반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즉 남 북한 정부의 수립과 소련군의 철군, 그리고 뒤이은 미군의 철수는 그러한 변화의 단초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건들을 계기로 한반도의 두 지도자는 정치적 자율성을 대폭 신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히 김일성보다는 이승만의 자율성이 훨씬 크게 신장되었는데, 그것은 미 소 양측의 철군이 북한보다는 남한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우선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의 차이와 철군 이후 통제방식의 차이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미 소 양국은 모두 한반도를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인식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소련에게 있어서 한반도는 자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자국의 안보와 직결되는 지역이었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는 일본의 방위를 위한 전초선 정도로서 단지 부차적인 이해관계만을 가질 뿐이었다. 또한 철군 이후 소련이 김일성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통제했던 데 반해 미국은 이승만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의 정치적 자율성이 김일성보다 더 신장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는 두 지도자의 개인적 인기와 국내 정치적 입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남한의 이승만은 항일투쟁경력과 대중적 인기라는 측면에서 거의 필적할 상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진 신생 대한민국의 국부였다. 반면에 북한에서 김일성의 지위는 아직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상당한 투쟁경력과 함께 공산주의 이론에도 밝은 박헌영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으며, 그의 지위 또한 대중적 지지와 자신의 실력에 의해 쟁취한 것이라기보다는 소련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북한에서는 비록 1948년 12월까지 소련 점령군이 철수하기는 했으나, 대소 의존도가 대단히 높았던 북한정권의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에는 전혀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당시의 여러 가지 자료들을 종합해 보더라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북한에 대한 소련의 통제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방면에서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승만은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지난날의 독립투사라는 이미지와 함께 능란한 대중조작 솜씨를 통하여, 그리고 남한 국민들의 통일 열망에 부응하여 국내적으로는 고도의 정치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미국에서의 오랜 유학생활과 독립운동경험을 통하여 뛰어난 현실정치적 감각을 체득하고 있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대미외교를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남한의 미약한 국력으로 인해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정책수단에 한계를 느끼고 있기는 했지만, 그 사실이 그의 정치적 목표, 즉 통일에의 의지마저 꺾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조국이 가진 국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수록 그가 미국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2. 외세에의 의존

1) 대소 의존과 대미 의존: 성공과 실패
북한의 역사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시기는 '대소 추종기'로서,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부문, 즉 국가건설 자체를 소련에 맡기다시피 했다. 특히 경제부문에서 북한은 소련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북한에 대한 해외의 경제원조는 오직 소련 한 나라로부터만 제공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북한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자는 누구도 소련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강한 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한국인의 의존심리는 이 무렵 북한 내부에서 벌어진 파벌 간의 경쟁관계와 그들의 대소 의존행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다. 각각 국내파 공산주의와 해외파 공산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박헌영과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박헌영은 1946년 1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5년 후에는 소련연방에 편입되기를 희망한다"라고까지 말했다. 심지어 김일성은 1949년 3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자리에서 스탈린에 대한 비밀충성서약을 통해서 "첫째,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며 지혜의 원천으로 인정한다. 둘째, 소련의 정치 경제 형태를 인간발전의 유일한 수단으로 인정한다. 셋째, 북한의 대외관계에 있어서 소련에게 독점적 지위를 인정하여 소련에 비우호적인 일체의 영향력을 배제시킨다"고 말할 정도였다.
북한에 대한 소련의 후원은 군사부문에서도 괄목할 만했다. 양국간의 군사협력관계는 1946년 9월 소련 군사고문단이 북한의 군대창설을 위해 간부 훈련단을 조직하고 군사교육을 실시한 것을 시발로, 47년 1월부터는 북한군에게 소련제 장비를 지급하고 기술훈련을 지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무렵부터 북한군은 소련의 군사원조를 받아 신형무기로 무장하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결과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48년 2월에 기존의 인민집단군을 조선인민군으로 개칭하여 정규군으로 창설을 선포하였다.
또한 공군은 47년 8월 소련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신의주 항공대 출신의 민간인 약 300여 명을 중심으로 비행대를 창설한 후 정규군 창설을 계기로 항공연대로 증편함으로써 정규 공군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해군은 46년 7월 수상보안대 사령부로 출범한 것을 정권수립과 함께 해군 총사령부로 하여 정규 해군으로 발전하였다. 소련의 이와 같은 북한군 증강계획은 1948년 12월 북한 지역에서 완전 철수가 발표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소련군은 북한 지역에서 철군하면서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군사장비를 고스란히 북한군에 이양해 주었는데, 이것은 미군이 남한 지역을 떠날 때 장비의 60%를 가지고 떠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한편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와 해방병단으로 출범한 남한군은 그동안 육군 5만, 해군 3천 명에 105척의 함정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하긴 했으나 병력에 비해 무기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데다 그나마 폐물이나 다름이 없는 구식 무기가 태반이었다. 또 군정 3년 동안 미국 군사고문관들이 남한군에게 실시한 병기사용법, 기초 도수훈련, 폭동진압법 등의 훈련은 군인보다는 오히려 경찰에 적합한 내용이었으며 그것조차도 경비대 총사령부 산하 전체 고문관의 숫자가 고작 4-10명에 불과하여 한 사람이 2개 연대를 담당해 온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정부수립을 맞게 된 남한은 자체 능력으로는 국방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새 정부로서는 병력을 증강하고 장비를 확충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했으나, 그것은 오로지 미국의 대규모 원조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군정체제가 종식되고 미군 철수가 논의됨에 따라서 점차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장차 미군의 철수가 불러올 수 있는 위기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미군이 한반도에 더이상 주둔할 명분이 없었다. 이미 47년 11월 14일의 UN 총회는 "남 북한 정부수립 이후 가급적 조속히,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점령군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도록" 결의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련이 계속 미 소 양군의 동시 철군을 촉구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미군의 철수에 앞서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은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48년 7월 5일 장문의 서한을 통해서 한 미 양국간의 군사적 안전보장과 상호 책임문제에 대해 그후에도 결코 움직이지 않았던 정책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 나는 美軍이 지금으로부터 90일 이내에 撤收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 철수문제에 관련된 한국의 立場을 말하자면, 미국은 군대를 철수하기 이전에 한국 國軍이 組織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保障해 주어야 합니다.…

이승만의 요구는 미국정부에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1948년 8월 24일 양국은 '한미 군사안전 잠정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협정에 따라 동년 11월까지 미군이 남한측에 이양한 무기는 전혀 충분치 않은 것이어서 이승만의 당초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소화기와 자동화기의 60-80% 정도만이 미제였을 뿐이고 나머지는 일제 당시의 구식 무기였으며, 더구나 박격포와 중기관총은 거의 양도해 주지도 않았다.
이승만은 주한미군의 철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군사원조를 받아내려고 했지만, 미국의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태도는 전후에 평시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국방예산을 삭감하고 해외주둔 병력을 감축하려는 국내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미 국무부가 주한 미 대사에게 "미국정부가 대한군사원조의 제공을 제한한 것은 한국을 돕기를 꺼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세계 각처에서 필요로 하는 군사원조가 미국의 공여 능력을 훨씬 초과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분히 납득시키라"고 지시했던 점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의 제공에 소극적이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미 연합 참모본부는 "장차 아시아 대륙에서의 주전장은 결코 한반도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심각한 병력부족을 감안할 때 4만 5천여 명에 이르는 주한미군을 보다 더 중요한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의 배후에는 다음의 4가지 고려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첫째,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으며, 둘째는 대소 방위전략으로서 제공권의 활용을 과신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로 원자탄의 독점이 장기화될 것으로 오판했으며, 마지막으로 남한의 사회불안에 대한 미국의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남한이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 휩싸일 것으로 보고 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면 주한미군의 처지가 곤란해질 것이므로 미리 철수시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남한의 방위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군사원조만을 제공하면서 빨리 한반도에서 발을 빼고자 했으며, 결국 남한은 미국으로부터 안전보장과 군사력 증강에 관한 아무런 명확한 약속도 받아내지 못한 채 자신의 운명을 오로지 미국의 선의에만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2) 대미 외교: 욕구의 좌절
남한정부는 물론 미국측에 철군을 연기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취임식을 즈음하여 돌연 태도를 바꾸어 철군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의 이와같이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미군이 비록 남한의 안전을 위해 계속 주둔한다고 해도 남한정부에 대해 여러모로 간섭하여 자신의 행동을 구속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의 정적인 중도파와 공산주의자들이 미군의 주둔으로 인한 독립과 주권의 침해를 문제삼아 그를 공격하게 되자, 그러한 비판의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서도 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두번째의 더욱 중요한 이유는 만약 미군이 철수하는 대가로 적극적인 군사원조를 제공받을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그토록 열망하는 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호기가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미국의 힘은 소련보다 우위에 있었으므로 최소한 소련이 북한에 제공한 원조만큼은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미군 철군을 조건으로 미국정부와 무기원조를 위한 교섭을 벌이고자 했다.
1949년 4월 이승만은 조병옥을 특사로 임명하여 한국 UN 사절단을 이끌고 도미케 한 뒤 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더불어 미국정부를 상대로 남한군의 군사력 증강을 위한 교섭을 시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미국측은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에 이승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적극적인 외교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1949년 5월 그는 대만의 장개석과 필리핀의 퀴리노와 함께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의 NATO와 비견될 만한 '태평양 군사동맹'을 만들고 미국을 이 기구에 끌어들이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미 의회와 행정부 등을 상대로 적극적인 로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태평양 군사동맹'에 가담할 경우 아시아에서 3명의 우파 독재자를 지원하여 그들을 군사적 모험으로 몰아넣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그러한 군사동맹에의 참가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하기는 했지만, 이승만을 매우 위험스런 존재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의 미국은 이승만이 남한 내에서 점점 구세주나 신과 같은 존재로 되고 있다고 보아 그의 정치적 야심에 대해서 매우 염려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은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거듭되는 과대망상적인 발언이 자국의 세계정책에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국을 끌어들여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독재자를 위해서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자신의 노력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즈음 북한이 소련의 군사적 지원 아래 급속히 전력을 증강시켜 나가고 있다고 확신한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미군의 주둔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철군 저지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가일층 적극화하였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를 통해서, 남한군이 자체 방어를 위해 충분한 능력을 갖출 때까지 철군을 연기해 줄 것을 호소했다. 또한 1949년 6월에는 군항인 진해를 극동지역의 미 해군기지로 사용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제의 역시 거부되자, 그는 다시 미국정부에 '상호 방위조약'의 체결을 요청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군사 경제 원조를 교섭하기도 했으나 미국측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그러는 사이에 동년 6월 말경 주한미군의 철수도 거의 완료단계에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미국이 남한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그것은 특히 이 무렵에 북한측에 의해 유포되어 꾸준히 나돌던 '북한군의 남침' 소문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사태의 긴박성을 예감한 그는 초조한 나머지 1949년 7월 수만 명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서울의 미 대사관 앞에서 "우리에게 무기를 달라"는 관제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차례나 북진통일을 주장하였고, 미국이 그러한 자신의 생각에 불응할 경우에는 남한군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감행하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승만의 행동이 이와같이 노골화될수록 그의 야심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 또한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1949년 중반까지 원조교섭과 로비활동, 외교공세를 통한 설득과 회유, 그리고 공갈과 협박 등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미국을 남한에 묶어두려는 이승만의 끈질긴 노력들은 미국으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조선 왕가의 후손으로 미국 명문대학의 박사 출신 엘리트이며 동시에 대한민국의 존경받는 국부이자 최고통치자로서, 자존심 강했던 그에게는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남 유달리 강인한 의지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그에게는 단지 외교의 실패라는 차원 이상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무렵의 이승만은 바로 자신의 유일무이한 의존대상인 어머니로부터 욕구를 충족받지 못하고 좌절한 '구강기의 갓난아이'였던 것이다.

3. 심리적 불안과 조급성

1) 전위된 공격
사회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욕구의 좌절은 흔히 분노의 감정을 유발하는 주요 원천이 된다고 한다. 이 분노의 감정은 공포감의 기능과 유사한 것으로서 그것은 특히 공격적 행위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분노의 대상에 대해 그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을 때, 즉 그 대상이 너무 강하거나 혹은 눈앞에 없거나 혹은 보복을 하기에는 너무 불안하고 억제되어 있을 경우에는 어떤 대치된 표적에 대한 공격행위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위된 공격'은 힘이 약하거나 없다고 인식되는 표적을 향해 표출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북한에 비해 현격한 군사적 열세와 주한미군의 철군으로 인해 심한 불안감에 휩싸인 이승만은 수차례나 거듭된 미국의 협력 거부에 의해 심지어 배신감마저 맛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와 같은 욕구의 좌절로 인해 생긴 공격감정을 미국에 대해 표출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는 분노를 적절히 대치시켜 표출할 수 있는 공격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대상은 물론 남한보다 힘이 약하거나 다루기 쉬운 상대여야 했다.
이승만은 남한 내의 남로당 게릴라와 북한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는 이들을 공격함으로써 공산세력과 고군분투하는 '반공 남한'의 위기를 미국에 인식시키고자 했으며, 그것을 통해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과 군사원조를 유도하자는 심산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공산세력들은 이승만에게는 '전위된 공격'의 제물이었으며, 동시에 미국의 원조를 낚기 위한 일종의 '미끼'였던 것이다.
<그림 1>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한 당국의 대게릴라 공세는 주한미군의 철수가 논의되기 시작할 즈음부터 점차 강화되다가, 1949년 중반경 미군철수가 완료단계에 이를 때에 절정에 달했다. 동시에 이러한 공격은 북한에 대해서도 38선에서의 '제한적' 공격으로 나타났다. 특히 1949년 6월 15일부터 주한미군의 본대가 철수를 시작하자 극도로 조급해진 이승만은 남한군의 병력을 38선 부근으로 재배치하고 북한에 대한 대규모 기습공격계획까지 세워두었다. 이처럼 군사력이 현저히 열세였던 남한이 북한에 대해 대규모 선제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던 사실과 함께 그 전후에 일어났던 38선상에서의 잦은 충돌은 우발적 사건이라기보다는 미국에게 더 많은 무기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행된, 즉 '잘 계산된' 이승만의 책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서는 우선, 당시의 북한은 주로 북한 지역에서 '혁명기지를 건설'하는 일에 몰두하여 무력충돌을 비교적 잘 통제하고 있었는 데 반해, 이승만 정부의 책임자들은 38선 분쟁에 관련된 국방경비대의 지휘관들을 통제하겠다는 의사나 행동을 거의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근거는 당시의 국경충돌 사태들이 남한 내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과 시기적으로 밀접히 관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건들은 주한미군의 철수,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의 결성, 장개석의 방문 등의 경우처럼 미묘한 시점에서 발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38선 분쟁이 이승만 정부에 의해 고의적으로 조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1949년 중반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모색하면서 군사비 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
<그림 1> 남한의 게릴라 활동에 대한 Far East Command 자료(1948-1950)

출처: John Merrill, op. cit., p. 138.

가려는 중이었다. 트루먼 행정부가 이와같이 정책선회를 모색하게 된 이유는 이 무렵 중국대륙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결정적으로 굳어졌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하면서 향후 공산세력의 팽창가능성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공산세력을 견제할 필요성이 한층 강화됨에 따라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도 인식의 변화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주한 미 대사 무쵸는 "남한군에게는 더 많은 군사장비가 필요하다"고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고하면서, 만약 미국이 남한에 추가원조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계속해서 남한 내의 테러와 혼란을 조성할 것이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한반도에서 소련의 지배권 확보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 역시 남한의 치안이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대한원조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은 1949년 10월에 서명된 '미 회계연도의 대외 군사원조' 총액 13억 1,401만 달러 중에서 1,020만 달러를 남한에 할당하여 주로 군대의 장비를 보충하기 위한 정비품과 부속품을 제공하는 데 쓰일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50년 1월 26일에는 남한의 군사력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미 상호 방위원조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미국은 적극적인 원조를 통하여 남한의 자위능력을 발전시킴으로써 북한 공산정권과 대등한 입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트루먼 행정부의 이러한 대한정책은 이제서야 남한을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봉쇄전략'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적절한 사례(test case)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남한의 안보환경이 극적으로 반전되자, 이승만도 이제는 더이상 38선상에서 북한군과의 충돌이나 남로당 게릴라들에 대한 공세와 같이 극단적이고 모험주의적인 행동을 벌일 필요성이 없어졌다. 따라서 <그림 1>에서 나타나듯이 1949년 10월 이래 이듬해 1월까지를 고비로 양측간의 무력충돌은 현저히 감소되었던 것이다.

2) 예방전쟁의 유혹
북한군의 전력은 1949년 여름 이후에 대대적으로 강화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2가지의 원천에 기인한 것이었다. 전력 증강의 첫째 요인은 소련의 군사적 지원이었다. 소련은 이미 북한지역에서 점령군을 철수시킨 직후부터 북한군의 현대화를 후원하였는데, 특히 1950년 봄에는 대량의 중무기를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청진으로 수송해 주었다. 그 결과 1949년부터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소련이 북한에 제공한 무기는 야크 전투기 100대, 폭격기 70대, 정찰기 10대, T-34형 탱크 100대, 그리고 중포 상당수에 이르렀다. 다른 하나의 요인은 중국으로부터 거의 5만 명에 달하는 한인 의용군이 귀환한 것이었다. 이 덕분에 북한은 1950년 6월까지 약 20만 명에 이를 정도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무렵에는 남한도 미국 군사사절단의 지도하에 급속히 군사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48년 말 6만 명 정도이던 남한의 병력은 전쟁이 발발할 즈음에는 약 10만 명으로 증강될 수 있었다. 남한은 공군력을 증강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미 군사사절단은 1949년 12월 31일의 하반기 보고서를 통해서 본국 정부에 F-51 전투기 50대, T-6 연습기 10대, C-47 수송기 2대 및 지원 장비용으로 22만 5,000달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와같이 급속한 추세로 증강되는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의 김일성에게도 위협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에 비해 여전히 우세했던 만큼 그러한 우려는 잠재적인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정열적인 무기구입 노력과 미국의 적극적인 원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한의 잠재적인 사회경제적 능력 ― 인구와 경제규모 등 ― 을 고려할 때 김일성으로서도 향후에 전개될 사태를 낙관만 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 대해 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남한 국민들이 이승만의 군사력 증강정책에 대해 투쟁할 것을 다음과 같이 선동했다.

남반부 인민들은 동족을 살해하는 싸움터에 청년들을 내몰기 위하여 실시하고 있는 이승만 반동 도배의 국군 강제징집을 반대하여 투쟁하며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서 살인무기를 사들이기 위하여 강제 공출과 가혹한 세납 수탈 및 군사기금 모집 등으로 인민의 고혈을 짜내고 있는 괴뢰 도당의 약탈을 반대하여 완강하게 투쟁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승만 정부에 대한 투쟁을 선동하는 김일성의 이 연설내용 이면에는 남한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상당한 우려가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우려에 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남한의 정세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판단에서도 잘 드러난다.

南韓은 5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던 국방경비대를 '國軍'으로 개칭한 후에 1949년 9월까지 8개 사단으로, 그리고 50년 6월까지는 15만 兵力으로 增强했다. 미 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정권은 파시스트적 테러와 야만적인 진압활동을 통해서 侵略 戰爭을 準備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1949년 7월부터 50년 1월의 7개월 동안에 1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북한에 대한 南韓의 武裝 浸透 사건은 1949년 1월부터 9월까지만 해도 도합 432건에 달했다. 남한 지역에는 戰爭의 暗雲이 드리워졌고 '北으로의 進擊'을 울리는 나팔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사실 이 무렵의 남 북한은 이미 군비경쟁상태에 돌입해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재 북한의 군사적 우세는 단지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었다. 더구나 남 북한 양측은 첨예한 갈등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특히 "북으로 진격하겠다"는 이승만의 반복되는 발언 등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김일성이 무엇엔가 쫓기는 심정이었으리라는 것, 다시 말해서 일말의 불안감에 젖어 있었을 것임은 틀림이 없었다. 1950년에 접어들어 김일성은 한반도의 상황은 이미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미국과 이승만의 북침은 시간문제일 뿐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점에 대해 훗날 그의 전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미 제국주의자들과 매국노 이승만 정권은 남한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새로운 긴장을 조성했으며, 그들의 괴뢰 병력을 38선을 따라 집중적으로 배치해 놓고 '북으로 진격'해 들어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동시에 북한 지역에 대한 그들의 무장침투는 더욱 자주 발생했는데, 특히 황해도의 벽성군 인근과 강원도의 여러 지역에서 극심했다. 우리의 조국은 극히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불안'을 예상되는 처벌에 대한 공포감으로서 정의한다. 그래서 중대한 위기상황 ― 예를 들면 매우 중요한 시험이나 수술에 직면해 있다든지 혹은 회사의 사장과 최종 담판을 앞두고 있는 ― 으로 불안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그 상황을 무한정 지연시키고 싶은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스런 상황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 간에 갈등을 겪게 된다. 만일 고통이 인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기다림으로 인한 긴장된 불안감이 예상되는 처벌의 고통보다 더 참기 어렵다면, 그는 초조한 기다림보다는 차라리 고통의 감수를 선택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만일 어떤 국가가 타국에 의한 위협으로 극도의 긴장과 불안 속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동시에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 국가는 선제공격에 의해 ― 심지어 공격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 기술적인 공격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은 전쟁 그 자체라기보다는 전쟁상황으로 인해 야기되는 두려움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인 행위자라면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서 그 위험대상을 공격하여 파괴함으로써 위험요인 자체를 제거하고자 할 것이다. 당시 남 북한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이런 것이었으며, 김일성으로서는 미국의 개입이 더이상 증대되어 남한이 북침능력을 갖게 되는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선제공격을 시도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던 것이다.
김일성이 남침을 결심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당내의 권력투쟁과 관련된 것으로서, 특히 권력서열 제2인자였던 박헌영과 남로당세력의 입지변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무렵 북한의 내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로당세력이 거의 모든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고 박헌영의 남로당은 권력핵심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앞의 <그림 1>에서 보는 것처럼 남로당 게릴라의 전력은 남한 군경에 의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인해 거의 괴멸상태에 빠졌고, 그 결과 1949년 9월 당시만 해도 약 3,500명 정도에 달했던 게릴라 병력은 1950년 4월 무렵에는 600명 이하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남로당 게릴라의 총 지휘자로서 세력기반을 남한에 두고 있던 박헌영은 장차 북한에서 자신과 남로당의 입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태가 급박하다고 여긴 박헌영은 하루빨리 남한 내에 있는 자신의 세력을 구원하고 동시에 북한에서 남로당의 입지를 만회하는 방법은 남한을 공산혁명화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박헌영은 그렇게 함으로써만 북로당과 당내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김일성에게 '전면 남침'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으로서도 강력한 경쟁자인 박헌영의 그와 같은 요구에 직면하게 되자,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민족해방 투사'임을 입증하고 나아가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김일성이 선제 남침공격을 시도해야 할 이유는 분명해졌다. 그러나 남침의 전제조건으로서 김일성에게는 마지막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스탈린으로부터 최종 허락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김일성은 이미 여러 번이나 소련 대사를 통하여 스탈린에게 남침의 지원을 요청한 바 있었지만, 스탈린은 그때마다 번번이 북한은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특히 미국이 개입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김일성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1949년 말 이래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 특히 스탈린이 우려하던 상황은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미 중국대륙의 내전은 공산주의자들의 완전한 승리로 종결되어 북한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양면 지원이 가능해졌다. 특히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남한을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더이상 미군의 참전 가능성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다. 더구나 소련의 원폭실험이 성공하면서 스탈린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더욱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스탈린도 이제는 김일성의 거듭되는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 북한주재 소련 대사를 통해서 김일성이 그토록 고대하던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달했다.
… 본인은 김일성 동무의 불만을 이해하지만 그가 착수하려고 하는 남조선에 대한 큰 과업은 철저한 준비를 요한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함. … 만약 그가 본인과 이 문제에 관하여 얘기하기를 원한다면 그를 접견하여 대화를 나눌 것임. 이러한 사실을 김일성에게 말하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본인이 그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할 것.

이와 같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그동안 김일성과 소련측 사이에 존재하던 '견해차이'는 완전히 해소될 수 있었다. 김일성으로서는 스탈린의 최종 허락과 지원약속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50년 전반기에 모스크바와 북경에서 개최된 일련의 비밀회담들은 다만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최종 점검을 하기 위한 리허설인 셈이었다.


IV. 결 론

한반도는 지정학적 요충에 위치해 있어서 주변 강대국들 한반도를 둘러싸고 빈번히 각축을 벌여왔다. 그것은 물론 우리에게도 위기였으며, 그 위기 때마다 우리는 생존방법의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다. 이 경우에 우리 스스로 강대국의 힘을 극복할 수 없다면, 그러한 위기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세력균형 속의 중립노선을 취하는 방법 아니면 지배적인 강대국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역사에서는 전자보다는 주로 후자의 방법만이 선호되었던 것 같다.
물론 외세의존을 반드시 부정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외세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례를 약소국 신라가 외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3국 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신라는 당의 세력을 끌어들여 3국을 통일했지만, 적극적인 민족융합정책을 통해서 혼연일체가 되어 당의 지배욕을 분쇄했던 것이다. 따라서 외세를 끌어들이는 경우에라도 그것이 자아의 무화와 단순한 사대의존이 아닌 민족적 주체성과 자주적 역량을 바탕으로 자기성찰을 통한 능동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식의 정책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이성적인 주체로서 외세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선용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남 북한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시의 남 북한은 민족주의적이고 정치현실적인 차원에서의 '타협전략'보다는 오로지 강대국에만 의존한 채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대립과 군사적 수단에 의한 '승부전략'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한은 "이데올로기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결국 정치적 합의를 통하여 분단상황을 극복한" 오스트리아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었어야만 했다. 즉 남 북한 상호간의 타협과 미 소 양국에 대한 끈질긴 설득, 그리고 4자간의 합의를 통해 전 한반도에서 민주적 선거를 치르고 나아가 평화적 통일을 실현했어야만 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했거나 현실적으로 곤란했다면, 차선책으로서 남 북한 간의 세력균형과 상호 불가침에 대한 합의를 통해서 적어도 현상이 더이상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미 소 양국에 대해 그것의 보장을 요구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선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키고, 그 다음에 상호간의 신뢰와 이해의 바탕 위에서 통일은 점진적인 방법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은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게 마련이지만, 그러기에는 특히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은 너무나 불안하고 조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 북한의 지도자들은 보다 신속한 ― 물론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 해결책을 선택하게 되었고, 심지어 자신들의 목표를 철저히 관철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강대국에 의존한 통일'을 추구했으며, 미 소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 서로간의 반목과 질시를 고의적으로 증대시키기까지 했다. 그 결과 그들은 미 소의 증대된 원조를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동시에 그동안 누적된 상호불신과 군비경쟁의 압력을 통해서 스스로 파국을 자초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 북한 지도자들의 정책은 수단의 합리성은 갖추었을지언정 목표의 합리성을 결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 북한의 군사력은 대등한 속도로 증강되지 않아 일시적인 군사력의 불균형이 초래되었는데, 이때 특히 군사력이 열세에 있음을 인식한 이승만은 변덕스럽고 일관성 없는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원조공약을 얻어내기 위해서 남한 내의 공산 게릴라들에 대한 소탕작전은 물론, 북한군에 대한 직접적인 공세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남 북한 상호간의 불안과 불신의 골은 점점 증폭되었고, 결국 그것은 '전면적인 충돌 외에는 해소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깊은 갈등의 씨앗을 배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군비경쟁이 극단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라도 양측이 타협의 방법으로써 ― 예를 들어 군축회담이나 불가침조약 등 ― 점진적으로 갈등의 완화를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외부적 통제장치의 역할을 통해서 ― 예로서 UN이나 중립국 감시단의 조정 완충 등 ― 상호의 대결은 효율적으로 억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을 구사한다면 군사력의 불균형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며, 평화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의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목표는 평화가 아니라 통일에 있었다. 근본적으로 '불안의 문화'를 이어받은 한국인들은 너무나도 조급하게 완전한 통일을 성취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열망이 곧 '통일 지상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남 북한의 지도자들은 앞다투어 '강대국에 의존'하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전쟁은 해방과 분단 이후에 형성된 남 북한의 분파주의적 갈등 대립의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한 결과로서 나타난 비극이었다. 이 시기 동안 남 북한의 지도자들은 모든 정치상황을 '제로섬(zero-sum)'의 시각으로만 인식하여 비타협적인 극단주의로 일관했으며, 그것은 곧 상생의 정치가 아닌 상극의 정치로 나타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잘못된 선택은 태고시대부터 한국인에게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뿌리깊이 내재되고 각인된 의존심리와 불안심리가, 냉엄한 생존경쟁의 무대에서 격세유전되어 표출된 데 기인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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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관련 서적

*별은잠들지 않는다 (신호상저) - 6.25 발발 후 제일먼저 우리의 땅을 밟았고 북한군의 공격에 용전분투하다 실종되어 3년간의 포로생활 끝에 판문점으로 귀환한 미 보병 제24사단장이었던 딘 장군의 실종 행로를 다룬 책.(저도 읽어 봤는데 딘 장군이 포로로 있다가 풀려났으나 후에 미국에선 인정받지 못한 장군이 되었고 딘장군이 있다고 인민군에게 고발한 사람은 후에 딘장군은 죽이지 말라고 했으나 사형당함.)(사실기록임)

*한국전쟁과미국의세균전(스티븐엔디콧,에드워드해거먼저)-반세기 만에 밝혀지는 미국의 반인도적 전쟁범죄 진상,일본군 731부대 출신 간부들과의 비밀거래와 일본 전범들의 세균전 개입,미군 조종사들의 세균전 자백과 송환 뒤의 철회

*한국전쟁의 기원(상,하) (부르스커밍스저)-참고로 이분은 부인도 한국여자이고 현재 시카고대 교수인데 엄청난 한국 근현대사의 대가임.

*한국전쟁비화(JOSEPH C GOULDEN 저)- 숨겨진 얘기가 많습니다. 재미있고요...

*어느졸병이겪은한국전쟁(이무호저) -
무호의《어느 졸병이 겪은 한국전쟁》은 ‘경험은 기록으로 남아야 문화를 이루고 역사로 남는다’ 뜻에서 벌이는 나라 안팎 한국인 기록문화상 회상기 갈래 당선작 가운데 하나이다. 지은이는 6.25가 터지기 일주일 전, 임진강을 넘어 남한에 안착한 다음 본의 아니게 ‘간첩’으로 내몰려 갖은 고초를 당하게 된다. 전장의 최전방에서 인민군, 의용군, 중공군, 친북부역자를 죽이는 등 졸병으로 겪을 수 있는 갖은 비참한 전투원의 고초를 겪다가 전쟁 첫 해 겨울, 그만 발이 동상에 걸려 수용소로 이송된 뒤에 발 절단 수술을 받는다. 그 뒤로 휴전할 때까지 여러 수용소와 병원을 전전하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을 경험한다.
전쟁은 한 가지 빛깔만 띠는 게 아니라 갖은 공간과 시간에 따라 여러 빛을 내뿜는다. 그는 ‘전쟁’이라는 구조 안에서 한 개인의 ‘선택’과 ‘판단’의 폭이 얼마나 좁은 것인지를, 그리고 그 좁은 선택지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도록 내모는 상황 자체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담담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의 증언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 지휘관이나 장교들이 겪은 그것들과는 성격이나 양상에서 전혀 다르다. 부대를 지휘하거나 명령하는 처지가 아니라, 그들의 명령을 받들고 목숨 걸고 싸워야 했던 말단 졸병의 시각에서 서술한 점이 특이하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회고록이 대체로 지휘관과 특정부대의 업적을 과대평가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이무호의 이 ‘참전’ 수기는 ‘전쟁’이라는 구조와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냉랭한 일화들에 더욱 충
실하려고 애쓴다. ‘전쟁의 속살’은 과연 어떤 빛깔일까? 이 책은 ‘졸병’의 시선을 통해서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시대정신 2000년 5,6월호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knu=04122971&query=%C7%D1%B1%B9%C0%FC%C0%EF+%B1%E2%BF%F8+%BC%BA%B0%DD&cpname=booktopia&menu=sview&encrt=0Mj9Wa9QAzMTGAzZNiZwZ3NpemU9#middle_tab

 

*해방전후사의 인식 6, 박명림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1899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http://www.bookoo.co.kr/section1/2005/4/19/review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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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과연]창립선언문

창립선언문


우리는 왜 '노동사회과학연구소'를 창립하는가


우리는 노동자계급운동의 정치적.이념적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노동사회과학연구소'를 창립한다. 헤겔이나 맑스.엥겔스 식으로 말하자면, 자유란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자연과 사회의 구조와 운동법칙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것들을 합목적적으로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고, 레닌 식으로 말하자면,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구체적 조건, 즉 한국사회의 정세 속에서 노동자계급운동의 발전을 위한 활동에 우리의 노력을 우선적으로 집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한국사회의 정세와 운동의 국제적 규정성.통일성.전체성을 놓치지 않고 국제적 시각을 견지할 것이며, 노동자계급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확대.강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에서 많은 활동가들 사이에 열렬한 학습의 요구가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학습이 기본적으로 서유럽/사민주의적 강단 맑스주의에 의해서, 그리고 현란하지만 극히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인 각양각색의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현실은 시급히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동의 질곡이다. 이러한 사상적 조류는 특히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된 이후 '진보'와 '변혁'의 가면을 쓰고 더욱 횡행하고 있으며, 그만큼 노동자계급운동의 사상적.이념적.정치적 혼란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우리는 사상.이론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운동의 측면에서도 단절과 부정.청산이 아니라 계승.발전이라는 관점에 설 것이며, 저들 모략적이고 몰역사적인 청산주의와 단호히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운동 내에 득세하고 있는 '진보정치'라는 이름의 사민주의.개량주의적 정치 조류와도, 그리고 무원칙한 '좌파 통합주의'와도 비타협적인 사상.이론적 투쟁을 벌여나갈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와 힘찬 단결을 소망하는 노동자 대중의 소박하지만 절실한 소망에 편승하여 세를 확대하고 있지만, 그 사상적 본질은 기껏해야 편의주의 혹은 실용주의일 뿐이며, 그러한 편의주의.실용주의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기약할 수 없음은 바늘 허리 매어 못 쓰는 것만큼이나 명백하다.

우리는 특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여 투쟁함에 있어 억압과 착취 그 자체를 폐지하는 대신에 신자유주의라는,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의 특정한 형태만을 지양하려는 일부 경향을 강력히 경계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한국의 노동자계급운동에는 여러 분열.대립이 존재하고 있고, 그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정치적.조직적 통일과 단결을 달성하는 것이 현 단계 우리 운동의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그 통일과 단결은 '대동단결'이나 '좌파 통합'의 구호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고, 오로지 그 분열과 대립의 원인인 여러 편향을 극복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올바른 정치노선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여러 편향 중에서도 우리는 특히 민족주의적 편향이 몰계급적 국가주의로 경도되어 가면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사실상 독점자본의 그것에 종속시켜가고 있는 경향에 주목한다. 우리는 또한 협소한 경제주의와 실리주의, 그리고 쌩디칼리즘도 경계한다. 이들 편향은 타협주의와 계급협조주의의 정서적 기초일 뿐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짓누르고 있는 한국사회의 제반 모순을 통일적.체계적으로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을 저해하고 있는 사상적 원인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운동은 그 사상.이론과 실천의 양면 모두에서 이들 편향을 극복하고, 한국사회의 제반 모순을 통일적.체계적으로 파악.대응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한국의 노동자계급운동이 올바른 정치적 방향으로 단결하여 발전할 수 있다고 믿으며, 노동자계급운동이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이론의 과학성에 엄격할 것이며, 구체적인 정세와 객관적인 조건에 기초한 노동자계급의 유물변증법적이고 사적유물론적인 역사.사회과학을 탐구하고 보급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책임있는 비판과 토론을 언제나 환영하며,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여러 개인.조직들과 개방적인 연대행동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향한 실천적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2005년 5월 1일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창립회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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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과연]제국주의와 교황

제목 [번역] 제국주의는 교황을 어떻게 이용하여 왔는가
글쓴이 그리스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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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는 교황을 어떻게 이용하여 왔는가
―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어있을 때에도


다이어더 그리스울드 (Deirdre Griswold)
번역: 우일신 | 노사과연 회원 |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배계급이 지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 앞에서 하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무제한적이고, 존경심에 넘치고, 심지어 아낌없는 영광을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에게 바치게 된 것은―어찌되었든 간에―아주 오래되어왔다.

현대 과학의 모든 업적이 막대한 노력을 들여서 집결되었고 그것은 공중에게 이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세계에 특별한, 심지어 초자연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확신시켜준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원칙 위에 세워진 나라라고 하는 미국이 앞장서고 있는데, 미국은 불과 24퍼센트의 국민이 스스로를 로마 카톨릭이라고 여긴다. 16세기 영국 국교회가 로마와의 관계를 끊은 영국이 그 뒤를 바짝 따른다.
모든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의 미디어는 몇 주 동안 교황의 건강, 그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바티칸 광장의 군중들, 장례 준비, 그리고 세계 사건들에 끼친 그의 영향력을 상세하게 회고하며 국제면과 국내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석 달 전 두 번째 대지진으로 인한 인도네시아에서 수천 명의 사망 또는 점령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계속되는 격렬한 전투들 같은 다른 세계적 사건들은 교황에 바쳐진 오대양 미디어의 관심에 비하면 형식적인 지면만을 받았다.


도그마에 맡겨진 과학


현대 과학의 모든 업적―교황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의학 처치, 그의 상태를 전 세계에 알려주는 위성,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에 의한 긴급 통신, 수백 수천 명의 애도객을 로마까지 육로 항공로 그리고 해로를 통해 동시에 이동시켜주는 교통수단―이 막대한 노력을 들여 집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공중에게 이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세계에게 특별한, 심지어 초자연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오늘날의 지배적 자본가 계급의 막대한 부가 현대 산업 성장에 기름을 붓는 과학과 기술에서의 혁명적 진보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이다(중세에 카톨릭과 투쟁하며 성장했던 과학이 지금 교황을 신비화하는 것에 봉사하는 것과 비교할 때 아이러니라는 뜻―역자). 그리고 중세기 동안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독점을 깼던 자본가계급과 그들에 의해 수행된 이데올로기 전투가 없이는 이것들(과학과 이에 근거한 자본가계급의 부―역자) 중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자연과학을 해방시킨 것은 교회의 도그마에 대한 계몽의 승리였다. 그리고 그 승리는 다음에는 세계를 완전히 바꾼 생산수단의 거대한 발전의 시기를 가능케 했다.
매우 오랜 동안 미국의 지배 계급은 자신을 WASP――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White Anglo-Saxon Protestant)――로 여겼고 대부분이 가난한 이민자로 미국에 도착한 카톨릭 교도와 유태인에 대해 생색내는, 심지어 모욕적인 태도를 취했다. 카톨릭 교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데는 거의 두 세기가 걸렸고 그러기 위해서 그는 특별히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힘 있는 가문의 자손이어야 했다(1961년부터 63년까지 재임한 존 F. 케네디를 가리킨다-역자). 백인 지상주의자 기관들은 종종 카톨릭과 유태인을 아프리카 아메리칸과 마찬가지로 타깃으로 삼았다.

폴란드와 교황


최근에는, 그러나,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의 임기 시작 이래로 미제국주의의 전략가들은 그의 카톨릭 브랜드를 그들의 지구적 야심을 추구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로 인식해왔다. 그들은 그의 평화 선언 그리고 사형에 대한 반대와 함께 할 수 있었다. 신교도이건 카톨릭이건 유태교도이건 혹은 무종교인이건 간에 제국주의자들로 하여금 그에게 애정을 갖도록 한 것은 그의 적극적인 반공주의와 “해방 신학”을 선동했던 카톨릭 교도들에 대한 배척이었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Karol Jozef Wojtyla)는 교황이 된 첫 번째 폴란드인 카톨릭 교도이다. 그는 폴란드가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위기로 치달았을 때 선출되었다.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설립된 반(半)공산주의 정부 아래 수년 동안의 국가 소유 산업 발전에도 불구하고 농업은 여전히 개인소유였고 뒷걸음치고 있었다. 사실상 노동자들은 농업의 비효율성에 보조금을 주는 셈이었지만 가난한 상태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국가와 당을 향했다. 교황이 된 후 여덟 달만에 바로 보이티와는 1979년 폴란드에 돌아와 수많은 군중 앞에서 설교했는데 이것은 체제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으로 보였다. 1년 후 미국은 그의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디모인(Des Moines), 시카고, 워싱턴 방문을 반(半)공식 휴일로 만들어 줌으로서 붉은 양탄자를 깔아 그를 맞이하였다. 어느 카톨릭 대표자들도 여태껏 그렇게 존경심에 가득한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폴란드에서 반혁명이 심화될수록 연대노조(자유노조 혹은 자유연대노조라고도 불리며, 그 지도자는, 잘 알려진, 바웬사이다―역자) 운동은 CIA와 긴밀히 연결된 지식인들에 의해서 노동자들에게 주입되었다. 그리고 CIA는 “자유노조의 발전을 위한 미국 협회(American Institute for Free Labor Development)”를 지부로 둔 AFL-CIO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nd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즉 미국 노동 총연맹 산업별 회의―역자)를 통해 공작을 수행하였다. 그것은 로널드 레이건, 󰡔월 스트리트 저널󰡕, 그리고 미국 자본 일반의 아낌없는 승인을 받은 유일한 “조합” 운동이었다. 보이티와는 이 발전 관계에서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오늘날 폴란드는 다시 한 번 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부분이 되었다. 사회주의적 집산화에 저항했던 많은 폴란드의 작은 농장들은 자본주의적 경쟁의 희생물로 전락하고 있다. 농민들의 저항과 도로 점거는 세계 언론의―또는 교회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넘어간다. 1999년 현재, 폴란드 인구의 4분의 1은 농업에 고용되어 있지만 국가 GDP의 6퍼센트만을 생산한다. 연대노조의 기반이던 조선소들은 문을 닫거나 서구의 주식회사에 팔려나갔다. 폴란드 이민자들―그들 중 일부는 성매매 업자에게 팔린 여성들이다―은 서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교회가 폴란드인에게 준 것은 그들의 고통을 위한 공적이고 감정적인 배출구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혁명이 필요하다.

중앙아메리카와 ‘해방 신학’


보이티와가 교황이 되었을 때, 중미에서는 미제국주의의 후원을 받는 토지 과두 정치의 압제를 깨고 광범위한 다수―주로 인디오 농부들과 노동자―의 소망과 필요에 부응하는 인민정부를 세우려는 강력한 운동이 진행 중이었다. 인민의 고통과 혁명적 변화에 대한 갈망은 특히 가난한 자와 함께 일했던 하급 성직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뿐만 아니라 종교적 표현을 찾았다. 니카라구아, 엘살바도르, 그리고 과테말라에서 “해방 신학” 주창자들은 카톨릭교회의 위계질서를 움직여 그들의 투쟁을 지원하려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대신에 계획적으로 바티칸에서 해방 신학자들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그는 그가 맑스주의라고 딱지 붙인 사회적 행동주의로부터 교회를 멀리하게 하는 주교들을 라틴 아메리카에 임명하였다. 행동주의자인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1989년 개봉된 영화 󰡔로메로󰡕에 의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역자)가 보이티와가 교황이 된 2년 후인 1980년 엘살바도르에서 우익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수녀조차도 군대에 의해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을 때 바티칸으로부터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또한 1963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교황 요한 23세의 주도로 발표된 것으로서 타종교와의 대화, 평신도의 역할 등 여러 진보적인 면을 담고 있다. 그 문헌은 국내에도 출판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역자)의 자유주의적 방침을 뒤엎고 교회를 더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전통으로 되돌리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일했다. 그의 가부장제 실행은 총체적이었다. 교회는 계속해서 남성이 지배했던 것은 물론이고 언제 아이를 가질 것인지 그리고 아이를 가질지의 여부에 대한 여성의 권리―레즈비언과 게이의 동성애 권리뿐만 아니라 피임과 낙태를 포함하는―와 같은 가부장제 가족에 대한 도전은 비난받아야 했다. 1997년 이백 오십만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카톨릭 교도는 여성 성직자와 결혼한 성직자를 인정하고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적대를 버려달라고 교황에게 청원하였다. 그러나 바티칸은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티와는 성직에 들어서기 전에 배우였고 청중을 매혹시키는데 그리고 카메라를 두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아는데 그의 기술을 잘 활용하였다, 심지어 그가 심각한 병중일 때도.
이 모든 것 그리고 자본주의 미디어에 아첨하는 것은, 그러나, 수백만의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인기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 칼 맑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부를 때 그가 진정으로 의미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본주의가 백만 가지로 삶을 참을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게 만들고 종교는 신비적 사후세계에서 일지언정 희망과 위안을 준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완전한 인용은 “종교는 억압받은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상태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이다(「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p. 2, 번역은 현재 글에 인용되어있는 영어에 따랐다―역자). 이 구절을 감정 없이 읽기는 힘들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삶의 야만성은 우리 모두를 향해 있지만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고 매 하루를 헤쳐 나가려 한다. 그것이 사후의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믿음이건, 알코올과 약물에 그의 슬픔을 빠뜨리건 또는 많은 것들이 결합되어서건 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좌절과 무감각을 받아넘기고 다른 것에 손을 뻗친다.
비록 교회의 위계가 물질적 안락에 있어서 부족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에 반대하는 요한 바오로의 설교가 진지한 것이었다고 가정하자.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앞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세계에서, 그것은 계급사회의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가난한 자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대신에 정신적 구원을 위해 일하는 것.
맑스는 물론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그것을 세운 노동자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사회적 관계―그리고 인간 가족의 사랑과 연대를―를 더 높고 더 평등한 단계 위에 재건축할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배고픔, 불의, 전쟁, 그리고 억압이 없을 때, 우리의 감정적이고 지적인 필요를 진정으로 충족시켜주는 것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제국주의 지배계급은 그들의 바로 그 본성에 의해 물질적 소유에 극단적인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공통의 동기를 발견했다. 냉소가들은 그(교황―역자)가 악마와 계약했다고까지 말할지도 모른다. (2005년 4월 6일, http://www.workers.org/2005/world/pope-0414/)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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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과연]일본 독점자본의 위기타개책

제목 일본 독점자본의 위기타개책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글쓴이 사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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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 이후 급진전한 자본의 글로벌화에 수반하여 일본의 지배계급은 ‘먹는가 아니면 먹히는가’라는 독점자본간의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끈질긴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쟁취된 인민의 제반 권리를 생활의 전 분야,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현장에서 뿌리째 빼앗아가며 일본사회의 반동적인 ‘구조개혁’을 빠르게 진행시키고 있다. 이러한 공격은 일견 제각각 진행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지배계급은 매스컴을 사용하여 체계적인 이데올로기 공격을 집요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인민의 의사를 분쇄하는 이데올로기 공격이 자리 잡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4인의 편집위원들이, ‘일본의 독점자본이 목표로 하는 기본방향을 어떻게 파악할 것이며,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해서 최근에 나타난 사례를 기반으로 토론했다. [[思想運動] 편집부]



일본사회에 만연한 조선 ‘경제제재론’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조선)의 핵무기개발문제와 ‘납치’사죄사건 이후, 일본에서 노골적으로 조선을 적대시하고 멸시하는 현상은 널리 알려진 바입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우월한 일본민족의 정신을 강조하며 그 민족정신을 주입시키려는 공작이 진행되어 왔던 것도 지금까지 보도되어 왔던 대로입니다. 이러한 조선문제가 현재 일본국가의 군국주의화, 헌법개헌 추진의 유력한 수단으로서 악용되어 온 것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또한 최근에는 조선에 대한 공격 ‘경제재재론’ 논의가 격화되고 있습니다만, 그 구실이 되는 이른바 ‘유골문제’부터 말씀해주십시오.



A: 작년 11월 8일 일본정부는 11월에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북일실무자회의’에서 건네받은 요코다메구미(横田めぐみ)의 유골이 ‘다른사람’(데이쿄대학 법의학부의 DNA감정)의 것이라고 공표하고, 인도적 지원물자의 동결, ‘경제제재 검토’를 표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은 외무부 대변인 담화 등을 통해 즉각 비판했으며, 1월 24일 조선중앙통신사는 인민보안성(일본의 경찰에 해당)과 법학전문가 등이 분석한 자료를 기반으로 "일본은 반조선 모략극의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제목의 비망록을 발표했습니다. 현재는 일본정부가 이 비망록에 대해 반론을 하고, 조선 측이 그에 대해서 재반론을 한 상태입니다. 우선 일본 측의 반론이란 것이 기껏 그 논거가, ‘감정결과’를 제출한 데이쿄대학이 "일본 최고수준의 연구기관"이며, 조선은 "(일본의) 감정 절차의 엄격함과 DNA 감정 기술수준에 관한 현실을 조금도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정도의 수준이고, 또한 “유골이 본인이 아니라고 말한 이상, 빨리 반환하라”는 조선 측의 주장에 대해 “우선 조선 측이야말로 일본과 국제사회가 납득할 만한 확실한 설명을 할 책임이 있다”는 정도인 것 같은데, 어느 쪽이나 모두 그 내용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점이 우선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정부의 반론의 내용도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조선 측의 답변도 매스컴은 정확하게 보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비망록에 나와 있는 조선 측의 견해를 전문(全文) 보도하고 있는 매스컴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보다 과학기술이 열등한 조선이 무슨 소리인가, 트집을 잡는 것일 뿐이다”라는 일본 정부 측의 주장이 활개를 치면서 통하고 있습니다. 감정은 3개 연구소에 의뢰 되었으나, 데이쿄대학에서만 감정결과란 것이 나왔고, 나머지 두 곳은 "분석할 수 없다"라고 판정했는데,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데이쿄대의 감정이 옳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과학경찰연구소 등 나머지 두 곳의 감정 내용은 신문에 나오지 않고 있지요.



B: 데이쿄대는 ‘에이즈 수혈제(輸血劑) 사건’으로 나쁜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처음부터 엉터리라고 나무라는 것은 잘못이고, 또 반대로 데이쿄대의 감정이 옳다고 단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입니다.



A: 유골문제라고 하면 [사회평론] 2005년 겨울호에 실린 류큐(琉球)대학의 다카지마(高嶋伸欣) 씨가 쓰고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것은 도쿄 메구로구(目黒区)의 유우텐사(祐天寺)에 안치되어 있다는, 구(舊)후생성이 위탁(1971년)한 ‘우키지마마루(浮島丸) 사건’의 희생자를 비롯, ‘구(舊)일본군’으로서 특공대와 남방전선에 보내진 남․북한 피해자의 유골문제로서, "조선반도 남부(현재의 한국)에 유족이 있는 부분만을 반환하고, 북조선의 유족에게는 반환하지 않은 사실이 판명되었다([아사히 신문], 2004년 11월 12일). 게다가 1960년 구후생성이 공화국['이북'을 가리킴: 역자]의 유족에게는 유골 인수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결정했던 것이나, 12월 12일에 예정되어 있던 (추도식과 심포지움 참석을 위한) 공화국으로부터의 2명의 유족의 일본방문이 동행자의 비자발급을 거부했기 때문에 중지되었음도 밝혀졌다. 이는 동행인에 대해 공안 쪽에서 이의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후의 조사에서 유골은 유우텐사에는 없고, 희생자를 야스쿠니 신사에 함께 모셔놓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일본정부는 이렇게 요코다 메구미 씨의 유골문제에는 대소동을 벌이면서도, 전쟁 전과 전쟁 중에 일본에 온, 그 많은 강제연행, 즉 "납치"되어온 재일조선인의 유골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책도 강구하지 않은 채 60년간이나 방치하고, 반환은커녕 사죄나 보상을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일본정부가 과거의 문제를 확실하게 매듭짓지 않고, 일관되게 조선을 적대시하고 있는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베신조(安部普三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정치인―역자])는 최근 문제가 된 NHK의 "여성국제전범법정"에 대한 자민당의 정치개입사건 때에, "조선의 대표자가 두 명이나 검사로 되어 있다. 공작활동을 하고 있다고 인정되고 있는 사람들을 재판하는 측에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라는 엉터리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베 식으로 말하면, "북에서 오는 놈은 모두 공작원이다"로 될 것입니다.






― 영국의 대표적 과학잡지 [네이쳐]의 영문 홈페이지 2월 3일호에도, 가짜유골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이상하다는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만...



A: 그 기사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을 리드하는 법의학전문가인 데이쿄대학 강사인 요시이(吉井富夫) 씨는, 자신이 넘겨받는 5명의 샘플에서 DNA를 간신히 추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몇 가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그가 DNA를 증폭시키는 PCR법(nested polymerase chain reaction)이라고 불리는 지극히 섬세한 방법을 이용했다고 하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PCR법에서는 보통 DNA를 한번만 증폭시키지만, 그는 이번에 DNA의 증폭을 두 번 실시했다. 또한, 그가 넘겨받은 샘플이 다른 연구실의 것보다 질이 좋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누구나 고유한 방법을 가지고" DNA 샘플을 취급한다고 하면서, "표준화된 방법은 없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화장된 표본(specimens)에 대해 법의학적 감정이 수행된 경우는 거의 없으며, 요시이 씨를 포함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1200도에서 소각된 유골에는 DNA가 남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나도 정말 놀랐다"고 요시이 씨는 말했다. 그러나 유골에 DNA가 잔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이 온도에서 소각된 시간이 짧은 경우뿐이다. "온도만으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고 신주(新州)대학의 법의학 전문가인 후쿠시마(福島弘文) 씨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요시이씨는 이전에 화장된 표본을 감정한 경험이 전혀 없으며, 또한 그는 자신이 수행한 감정이 단정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샘플이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유골은 무엇이나 빨아들이는 견고한 스폰지 같은 것이다. 만약, 유골에 그것을 취급한 누군가의 땀이나 기름이 스며들어 있다면, 아무리 설비가 좋아도 그것을 빼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중략)



일본의 관리들은 문제의 DNA를 재감정하고 싶다고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요시이 씨는, 다섯 개의 샘플 중에 가장 큰 1.5그램짜리 뼈조각은 감정할 때 사용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의견 차이를 해결할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총련 국제국 발행, [국제국 통신] 30호로부터)






― 조선의 비망록은, 조선에 보내진 ‘감정서’에는 분석자는 말할 것도 없고 입회인의 성명조차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유골을 넘겨받은 일본정부 대표단 단장인 야부나카(藪中三十二)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당시)은 이것을 요코다 메구미 씨의 부모에서 건네주기로 약속하고, 공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자필 문서를 작성하여 서명까지 했다고 합니다. 일본정부나 매스컴은 조선이 ‘불성실한 태도’로 트집을 잡고 있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와 반대지요. 과거에 정권이 얘기한 것만을 보도하고, 결국 침략전쟁의 선봉을 담당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나 자각이 매스컴에는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부 여당 내에도 조선 ‘제재’론 등 아베 등으로 대표되는 강경파와, 고이즈미(小泉)로 대표되는, 중국까지 염두에 두고 조선과의 경제적 관계에서 유연하게 대응하려는 파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동아시아 공동체론에서 볼 수 있는 독점의 목표



B: 그렇지요. 고이즈미는 일조(日朝)평양선언 때에 납치문제도 해결하고 다음 동아시아의 정책에 대한 기초를 다지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닌가요?



A: 지금 경제문제를 비롯하여 정치․군사적으로도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동아시아 공동체론’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독점 측은 그 공동체론의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C: 사쿠라이(櫻井よし子)는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것은 중국의 계략에 빠지는 것이라고 [SAPIO]에 썼습니다. 또 같은 호에 테라지마(寺島實郞) 씨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중요하다고 쓰고 있습니다. 고이즈미가 ’일조평양선언‘을 발표할 때 무대 뒤에서 연출을 떠맡았던 외무성의 다나카(田中均) 씨도 FTA를 추진해 동아시아에서 경제권을 창출해 가려는 파지요. 즉 자본주의적인 평화 안으로 조선도 끌어들이고 싶은 것이지요.



A: 테라지마는 이라크문제에서도 어느쪽인가 하면, 부시를 비판하여 매파와 대립했습니다.



C: 도쿄대 교수 강상중(姜尙中)도 외무성의 동아시아 자유무역권 구상에 한 역할을 담당하는 논객입니다. 그는 올해 5월 김대중 전(前)한국대통령을 일본에 초청하는 일을 맡고 있는 듯합니다. 김대중은 일본의 한류 붐을 만든 것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제 및 문화의 그러한 자본주의적 교류에 의해서 아시아에서 일본․한국․ASEAN, 그리고 중국을 포함한 경제그룹을 만들려는 목표를 가진 것 같습니다.



A: 지금의 매스컴은 ‘조선의 현 체제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2기 부시정권은 조선체제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폭정 전초기지’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생각이 기본적으로 매스컴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문화교류․경제교류 추진파라고 해도 이를 통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조선의 체제를 붕괴시키려고 할 뿐, 일본의 전쟁 책임을 포함해 조선정책의 역사적 오류를 인정하고, 인민이 선택한 사회주의로서 조선체제를 그 자체로서 지지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C: 제가 참가하고 있는 ‘일한민중연대전국네트워크’가 호소하는, 다양한 집회실행위원회의 기본적인 자세는, 조선정권에 대해서 여러 의견은 있지만 ‘그 나라의 운영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다’라는 데에 일치점이 있습니다. "경제제재"를 가하자고 하는 의견은 일본사회 전체를 우측으로 몰고 가는 것이라는 위기의식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견은 유감스럽게도 지금 일본사회에서는 소수입니다.



D: 일본의 독점자본이라고 해도 "경제제재"로 조선을 궁지로 모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법률이 시행되는 것과, 그것이 즉각 실시되는가 어떤가는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미국으로서도 이라크에 불이 붙어 있고 중남미에서의 혁명적 상황 등으로 동아시아에서 지금 곧바로 일을 벌일 상태는 아니지 않을까요?






― 그런데 다음 총리는 누가 좋을까 하는 여론조사에서 강경파인 아베가 22%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C: 아베 등을 내세우려는 자본은 역시 미쯔비시중공업 등의 군수산업파일까요?



D: 일본경단련(日本經團連)으로서도 ‘무기수출금지 3원칙’의 폐지 입장을 밝혔고, 그러한 목적에서 헌법을 개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A: 결국 강경노선이든 유연노선이든 어느 쪽이나 조선의 체제를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강경파인 아베의 언행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양쪽을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성천황제’ 문제를 보는 계급적 관점의 결여



― 국내문제로서는 개헌 저지투쟁이 초미의 과제입니다. 이 문제에서는 공산당 등이 9조에만 초점을 좁히는 운동방식에 대해서, 지금까지 [사상운동]은 “9조만이 적(敵)의 노림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비판해왔습니다.



D: 예를 들어 “여성천황제” 문제가 나오고 있는데, 이 문제라고 해서 경단련이 노리는 것과 따로따로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운동권에서도 젠더(gender)적인 관점에서, ‘여성천황제’는 여성의 진출이기 때문에 좋다고 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젠더적인 것의 사상적․이론적 한계가 있습니다. 적이 무엇을 총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얕음이 있는 것입니다.



B: 최근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에 "여성천황제를 포함한 검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기사가 나왔는데, 이것은 정말 심각합니다. 서기국장인 이치다(市田)는 [2월: 역자] 11일 국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부러 기자회견을 했지요) ‘여성천황제’에 관한 의견을 기자들이 묻자 “원래 (천황이) 남성이어야만 한다는 합리적인 근거는 없다. 여성천황이 옳다고 하는 방향으로 논의․검토가 이루어져도 자연스럽지 않은가”라고 답변했습니다.



C: 천황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발상입니다. 공산당이....



B: 그것은 헌법 제1조1)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기사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치다 씨는 '일본공산당의 강령은 천황 조항을 포함하여 헌법의 모든 조항을 지킨다고 하는 입장이다. 천황제에 관해서는, 한 개인이 세습적으로 국민 통합의 상징이 된다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 인간 평등의 정신과 양립하지 않는다'”라고.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면, 당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면,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국민의 합의에 의해 결정해야 할 것이다. 천황제와의 공존이 우리 당의 강령적 입장이다"라고 되어 버립니다. 인간의 평등에 반하는 이 제도의 폐지를 위한 부단한 호소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당의 강령적 입장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 상황에서의 다수파에 대한 추수(追隨)입니다. 변혁적인 당의 방기이자 그 변질인 것이지요.



A: 수의 논리네요. 득표를 위해서 그때그때 수가 많은 쪽으로 붙으려는 것입니다.



C: 맑스가 “그 나라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그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처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따르는 것밖에 되지 않지요.



B: 그렇네요. 일본의 천황제는 원래 불합리한 것으로서 인민주권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지요. 실로 이번의 “여성천황제” 문제에서 그것이 노정되고 있습니다. 그곳을 왜 찌르지 않는 것일까요? 본래 헌법 제1조에 상징천황제가 남겨진 것은 미국이 그것을 패전 후의 일본의 점령통치를 위해 이용했기 때문인데, 일본의 반동지배계급이 그와 결합하여, ‘국민의 총의에 의해’ 등등 말도 안 되는 것을 삽입했습니다. 이러한 상징천황제가 황실전범(皇室典範)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일본헌법은 메이지헌법(明治憲法)의 ‘개정’이라고 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메이지헌법을 그대로 계승하는 형태로 이 황실전범에서는 남성밖에 천황이 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천황가에는 남아(男兒)가 출생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여성천황제’론이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경위를 보면 명백한 것처럼, 천황제는 근대의 공화제와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성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탄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남녀평등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천황제는 폐지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성은 남아를 낳는 도구로밖에 취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남아가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역겨운 이 제도의 본질이 드러난 것입니다. ‘여성천황제'론이라는 것은 실로 여성 멸시 위에 서 있는 것임을 생각이 있는 여성이라면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D: 그러한 것을 지적하는 것이 본래 공산당의 본분인데도....



B: 그리고 현재의 천황제를 자민당은 정치적으로 이용해왔지만, 그래도 현 천황은 일단 ‘상징천황제’라는 틀을 그 나름대로 인정하려고 해 왔습니다. 그러나 황태자 쪽은 더 나쁩니다. 그 처인 마사코(雅子)는 원래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그 경력을 이용하여 황실외교를 하고 싶다고 하는, 현행법상으로도 위법인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지요. 궁내청도, 천황도 그것을 그만두라고 한 것은 당연하지요. 신헌법 하에서는 천황도, 황태자도 정치 행위, 실로 외교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행위는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현 천황은 지나치지 않도록 하여 천황제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지요. 반면 황태자 쪽은 자민당이 천황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영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이번 기회에 천황제를 없애자는 여론을 환기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시이(志位)․이치다 (市田) 공산당은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게 되면 헌법 개악파에 유리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언급하지 말고 문제를 9조2)에만 좁히자고 합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잘못입니다. 천황제 문제 또한 다시 제대로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범죄성을 명백히 하여 신헌법을 올바르게 지켜나가려는 투쟁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지요. 인민주권의 관점에서 헌법의 3원칙을 분명히 지켜가는 ‘사상운동’의 광범한 전개가 9조 개헌 반대투쟁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입장에 서야 할 것입니다.



 D: 지금의 헌법 논의는 제가 보기에는 맥아더 이후의 논의일 뿐입니다. 맥아더는 천황의 이용가치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천황이 군벌이나 재벌과 결합하여 또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9조를 만들고, 동시에 반공방파제라는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본토에서 분리하여 기지로 만들었습니다. 현재 지배계급이 9조를 없애고 천황제를 강화하려고 하는 것은 일찍이 맥아더가 우려했던 일이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이지요.



B: 작년 11월에 나온 자민당의 개헌초안은, 천황을 원수(元首)로 한다는 조항에 대한 반대여론이 커지자 곧바로 철회되었습니다(인터넷에서도 사라진 듯하지만). 그러나 그 초안에서 현행 9조의 전반부인 제1항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후반부인 제2항에서 “무력행사를 동반하는 활동”이라고 하는 표현으로 교전권을 들이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매우 교묘한 수법입니다. 지금까지 9조의 해석을 왜곡하여 자위대를 만들고 해외파병까지 해왔지만 교전권만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슬쩍 덧붙이려고 하는 처사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민의 민주적 권리를 전체적으로 무너뜨리고 “국민주권”을 공동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저들의 개헌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글로벌리즘 하의 세계 제국주의의 세 개의 센터 중의 하나로서 아시아에서 패권을 확립해가려고 하는 일본 독점자본의 이러한 개헌 충동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9조에만 문제를 좁히는 소극적인 대응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헌법 9조와 상징천황제와 오키나와 군사기지



A: 헌법학자인 후루세키(古關彰一) 씨도 최근 HOWS3)의 강의에서 헌법9조와 상징천황제와 오키나와의 군사기지화의 관련성을 지적하셨지만, 사실 9조의 성립은 본래 GHQ(연합군사령부)의 의향이 컸지요. 뉴질랜드와 네덜란드 등은 정부의 공식요구로서 천황제의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그것을 맥아더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서는 지배자 측은 명확하게 계급의식을 가지고 임하고 있었습니다. 중의원 헌법조사회의 나카야마(中山太郞)는 "가장 염려했던 것은 9조와 천황제였는데, 천황제의 존속은 공산당도 찬성했다"고 발언하고 있습니다.



B: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라이샤워나 글루 등이 정치적으로 일본을 연구해오고 있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다음해인 1942년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고부터는 점령 후 천황을 이용한 통치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라이샤워의 답변서 중에는 “국민통합의 상징”이라고 하는 헌법 제1조의 용어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A: 우리는, 지금까지도 거듭 주장해왔듯이, 지배계급측은 신자유주의적인 개혁 속에서 9조뿐만 아니라 전후의 민주화과정에서 쟁취해온 권리들을 탈취하려고, 헌법을 개악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한편에서 천황제를 통해 내셔널리즘으로 인민을 통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양면공격이 가해지고 있음을 더욱 강하게 주장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9조가 전쟁의 참화에 의해 태어났다고 하는 발상이 공산당 등에도 강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와 그 상징으로서 9조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일본군이 아시아에서 2000만 명의 인민을 살해했고, 그러한 일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9조가 만들어졌던 것인데, 그러한 발상이 빠져 있습니다.



D: 앞으로 적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그때 국민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수준까지만 노력하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인식이 있습니다. 지금도 노동자는 가혹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배계급측은 더욱 더 가혹한 생활을 하게 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안이한 전망이 투쟁하는 쪽에, 특히 공산당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A: 헌법이 개악되면 더욱 심각해지겠지만, 그 전부터 일본은 전쟁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투쟁이 매우 약하고, 자위대는 이라크에서 철수하라는 목소리도 미미한 실정입니다.



D: 일본은 지금도 전시하인 것이지요. 이라크인들은 분명하게 ‘자위대는 점령군’이라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철수요구의 목소리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9조는 빛나고있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헌법은 울고 있습니다. 지금 헌법과 얼마나 서로 모순되는 일이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가를 직시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A: 우편 민영화도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조합조차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D: 민영화문제에서는 1975년 ‘파업권 쟁취를 위한 파업’이 일어났을 때 경영측은 이런 놈들은 기필코 때려 부수겠다고 다짐했고, 그로부터 30년에 걸쳐 3개 사 5개 현장을 때려 부수어왔습니다. 남은 곳은 우편뿐이지요. 그러므로 우편만 부순다면, 이제 본체로 오지요.



B: 그렇습니다. 국가공무원에요. 이미 오고 있지요.



D: [일본경제신문] 1면에 나와 있지만, 이번에는 전체 국가공무원의 임금을 5% 내려서 그 부분을 “성과주의”로 돌리거나 도시와 지방의 “격차시정” 등에 사용한다고 하며, 임금구조의 민영화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임금문제가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고용형태 문제일 것입니다, 파트타임 공무원이라든가 하는. 그러한 장기적인 전술․전략에서 주르르 지고 있습니다. NHK 얼마나 무서운가. 공산당이 9조찬성파는 60%를 약간 밑돈다고 말하고 있지만, NHK의 요란스러운 리서치 결과에 따르면 찬성, 반대가 각각 45%라고 합니다. 결국 지배계급측은 9조 개악도 정면 돌파하려고 승부를 걸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공산당의 사고방식은 이미 논파되어버린 것이지요.






21세기의 혁명과 비폭력 투쟁을



B: 아까 동아시아 공동체 얘기가 나왔지만, 일본이 아시아에서 제국주의의 센터를 어떻게 만들려고 하는지, 그 조감도가 인민 앞에는 아직 확실히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 독점자본이 중국을 주시하면서 아시아의 새로운 맹주가 되려고 하는 구상은 그 나름대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끄는,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아시아 공동체론이 지금부터 여러모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다케우치(竹内好)가 그 선구자인데, 히로마츠(廣松涉)나 구리하라(栗原幸夫) 등도 역시 그렇습니다. 요즈음엔 좌익이나 이전의 좌익에서 그러한 흐름으로 가는 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D: 그러한 흐름은 전후 줄곧 등장했습니다.



B: 그러한 흐름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나 문화론의 문제는 사라지고, 경제 문제 그리고 정치적인 과정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D: 일본 독점자본은 중국에 대해 초조해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내버려두면 중국에 주도권을 빼앗겨버린다. 현상적으로는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경제 시스템 자체는 완성되어 있지만, 각국의 자본주의적인 발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도 지금의 다국적 기업의 활동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도록, 자기부담의 군사력에 의한 뒷받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유사시에는 어떤 명목으로든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는 국가가 되고 싶다. 그러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B: 미국이 부시의 구상 하에서 중동의 석유를 독점하기 위해 전쟁을 할 때에, 제국주의의 세 극(極)중의 하나인 EU와 합의 없이 했습니다. 그에 대해 저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프랑스․독일 등의 저항은 세계인민의 평등공존의 입장의 그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이익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입니다. 또 하나의 극이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인데, 아시아 국가들도 각각 자본주의적 발전을 나름대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대립하면서도 다른 제국주의의 극에 맞서 공통의 이익을 주장하는 일이 나타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구상을 보여주는 것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C: 4월의 반둥회의(아시아․아프리카 회의) 50주년의 정상회의에 고이즈미가 간다고 하는데, 이는 일본 독점자본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B: 무언가 구상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겠지요.



D: 그것은 중국이 선수를 치고 있어서, 그 대응책을 일본은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C : 2002년 1월에 고이즈미가 동남아시아 각국을 방문하였고, 그 후 5월에는 오스트렐리아, 뉴질랜드에 가서 거기에서 동아시아의 FTA 경제권을 만드는 움직임을 시작했지만, 중국은 그 전부터 해왔기 때문에 그 뒤처진 것을 만회하려 하고 있습니다.



D: 돈을 이리저리 뿌리는 외교만으로는 일본은 더 이상 리더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5년 후, 10년 후까지 예측한 정책을 내놓지 않으면 전체를 장악할 수 없습니다.



C: 전후 보상 문제는 지금까지 돈을 뿌려 입막음을 해왔지만,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력이 강해지면, 중국이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에 항의하는 것처럼, 무언가 말을 하는 상태로 됩니다. 그러나 우려되는 바는 일본 독점자본이 2․30년 후까지를 전망하고 있다면, 아시아 국가들에게 사죄하는 것도 불사하고, 그 위에서 아시아를 지배해가는 책략을 생각하는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독일 정부처럼. 따라서 우리는 그 근간에 있는 지배계급의 전략을 간과하고 운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D: 그리고, EU에 대한 비판 역시 더 필요합니다. 요즘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거의 일본과 마찬가지지요. 연금의 경우 60세 지급을 65세로 올리려고 하고 있다든가, 먹고 살 만큼의 실업수당을 주고 있기 때문에 실업률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주장을 해대고 있다든가, 전혀 마찬가지 수법으로 모두 당하고 있습니다. 다만 유럽의 인민은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일본만큼 급속도로 당하고 있지 않습니다.



C: 라틴아메리카의 인민들은 견인분발하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가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4개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칠레․볼리비아가 준가맹국)에 준가맹하였으며, 쿠바도 지금부터 준가맹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FTAA 구상과의 대결입니다.



D: [사상운동]지나 [사회평론]지에서도 특집으로 다뤄왔지만, 역시 중남미의 투쟁은 굉장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올 여름(8월 초순~중순)에 베네수엘라에서 ‘세계청년학생제전’이 열리는데, 그 숨결을 꼭 취재하려 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해야 할 이야기가 끝이 없지만 이번에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사회평론] 2005년 봄호(4월1일 발행)에서는 ‘21세기의 혁명과 비폭력’이라는 대특집을 마련합니다 [주요 내용으로는 오니시(大西巨人) 씨와 다케이(武井昭夫) 씨의 대담, 하나타(花田淸輝)의 비폭력적 저항과 변혁의 구상을 검증하는 글의 재수록, 유지(湯地朝雄) 씨의 브레히트의 [코뮨의 나날]을 읽는다, 그리고 그리스 공산당 제17회대회 테제,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되는 혁명적 변혁과정,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내건 우리의 임무=닛타(新田進) 등]. 이 특집의 문제의식은 한마디로 말하면, 라고 하는 것입니다만, 본지에서도 병행하여 이 주제를 추구해가고 있습니다. 개헌저지의 통일전선을 만들어 내기 위한 이론과 실천의 보다 예리한 제기나, 아시아의 정세를 생각할 때의 중국의 평가 등, 지면상에서 다뤄야할 과제는 산적해 있습니다. 최근엔 HOWS 강좌에 젊은이들의 참가가 눈에 띌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국제적 시야와 역사관을 가진 지면을 만들어갈 작정입니다. 이번의 토론도 이것으로 끝내지 않고, 정세의 진전에 맞춰 계획하고, 게재해가고 싶습니다. ≪노사과연≫






일본 독점자본의 위기타개책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 조선문제․헌법개악․‘여성천황제’론을 둘러싸고 -[思想運動] 편집위원 좌담회



번역 : 정혜윤․이효영․채만수 | 노사과연 회원 |






[편집자 주: 이 글은 일본의 “活動家集團 思想運動”이 매월 1일과 15일에 발행하는 정치신문 [思想運動] 제733호(2005년 3월 1일자)에 실린 편집위원 좌담회 기록, “日本獨占資本の危機乘切り策 とどう鬪うか ― 朝鮮問題․憲法改惡․「女帝」論をめぐって”를 번역한 것이다.]














1) 현재 일본국 헌법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을 갖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행 헌법 하에서는 과거 근대 신권천황과 달리 ‘상징천황’이라 불리고 있다. 즉 천황은 상징으로서 국정에 관한 권능은 일체 없으며 일본국빈의 정신적 통합의 상징으로서 존속한다. 따라서 헌법에서 정한 일체의 국사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해서 행하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지위만을 인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일본의 지배계급들과 황태자 등은 그 권한의 강화를 위해 헌법을 개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역자)



2) 현재 일본국 헌법 9조는,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 내지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하게 이를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 해, 공군 기타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행 헌법에 따르면 일본은 군대를 가질 수 없으며 본토 침략에 대한 방어 이외에는 어떠한 전쟁에도 참여할 수 없다. 이는 현재 일본의 자위대 보유나 그 이라크 전쟁 파견이 실제로는 위헌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본의 지배계급은 헌법 9조를 특히 개헌하고자 지속적인 움직임을 보여왔으며, 최근에는 9조뿐 아니라 헌법 전반을 반동적으로 개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역자)



3) 홍고노동자학교(Hongo Workers School)의 약자로서, 이 좌담기사가 실린 정치신문을 내는 "활동가집단 사상운동"의 정기적인 노동자․활동가 정치강좌이다. ―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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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중심은 전향한 386 운동권

뉴라이트의 중심은 운동 청산하고 전향한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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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슈 | 2005-03-31 17:51:06  
사물운동의 법칙상 '새것(New)'이 세력화하는 순간 '낡은 것(Old)'은 도태된다. '뉴라이트', 이들은 자신들을 ‘새롭다.’ 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낡은 것을 이기는 새로움은 ‘진짜 새로움’이다. 한국의 우익, 보수진영이 ‘개혁적 보수’라는 ‘형용 모순’을 안고라도 얻고 싶은 것이 바로 새롭다'라는 평가 아닐까?

보수진영 스스로 자신이 낡았다며 ’07년 대선 필패론‘으로 색깔논쟁하고 있을 때 이른바 '뉴라이트‘운동이 치고 나왔다.

자유주의연대, 교과서 포럼, 뉴라이트싱크넷,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등 자칭타칭 이른바 뉴라이트로 일컬어지는 단체는 다수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단체는 자유주의연대라 할 수 있다.

지난 연말부터 보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것도 역시 자유주의연대인데, 이는 보수언론이 집중적으로 키워준 측면도 있지만, 거꾸로 보수언론이 열광할 만한 ‘상품성’을 자유주의연대가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현재 100여 명의 회원을 보유한 자유주의연대를 주도하는 면면들은 주로 '전향한 386'이라할 수 있다. '전향한 386'이 가지는 함의는 여러 가지인데, 우선 좌파운동권의 핵심에서 우파로 전향한 극적 요소 자체가 상품성을 가진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고, 또 하나는 과거를 공유하는 여당 내 386 혹은 좌파세력에 대한 공격수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격적, 집단적 전향 감행...화끈해야 먹힌다?

사실 '전향한 운동권'은 이들이 처음은 아니다. 김문수, 이재오 등 한나라당으로 들어간 구 민중당 계열 인사들은 물론, 열린우리당에 들어간 재야인사들과 386도 어떻게 보면 '전향한 운동권'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의 '전향한 운동권'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우선 이들은 '공격적, 집단적 전향'을 감행했다. 그 동안 정치권에 들어간 민중운동진영 인사들은 노골적으로 '과거의 동지'들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꿈을 실현하는 방법이 바뀌었'거나, '세상이 바뀌어서 행동방법도 바뀐' 정도. 정치노선 상으로도 개혁적 보수, 개혁 등이 이들의 위치.

그러나 자유주의연대에 참가한 이들은 과거의 동지들을 '사회주의자나 주사파'로 몰아붙이면서 스스로 '우파'의 위치에 섰다.

자유주의연대 대표인 서강대 신지호 교수, 홍진표 운영위원, 최홍재 운영위원은 모두 한때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에 몸을 실었던 이들이다. 경력 또한 민족회의 조직국장, 한총련 조통위 정책실장등으로 이력만 보아서는 소위 말하는 ‘골수’들이다.

뉴라이트 싱크넷, 기독교 사회책임 등 여타의 뉴라이트를 표방한 단체들은 그 면면을 살펴볼 때 기본적으로 제도권의 명망가 또는 학자 등을 중심으로 한 단체들로서 외곽, 혹은 지원부대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조직, 대중 사업의 경험이 없는 이들 조직에 선도적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 치밀한 준비와 조직적 진출

지난해 연말 출범을 통해 뉴라이트가 집중 조명을 받긴 했지만 이런 움직임이 배태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강철서신’으로 필명을 올린 김영환이 ‘주체사상 대부의 전향’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월간조선 조갑제, 탈북인사 황장엽 등과 두루 교감을 나누기 이전부터 운동진영에서는 이들의 움직임과 관련해 치열한 사상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른바 소위 ‘민혁당 사건’의 폭풍 속에서 김영환이 국정원수사실에서 ‘반성문’을 쓰고 동료들을 ‘밀고’ 한 대가로 국정원 철문을 나오는 순간 운동진영에서 그들의 ‘정치도덕적 생명’은 끝장났던 것이다. 뉴라이트의 등장에 진보진영이 심각한 입장정리에 앞서 코웃음 치며 ‘차가운 냉소’를 날렸던 것은 이런 사정과도 무관치 않다.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은 이와 관련 "96년에 '말' 지에 '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한다'는 요지의 글을 발표했을 때 엄청나게 돌이 날아왔고, 자의반 타의반 운동권에서 손을 떼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특히 김영환을 비롯 90년대 초반 비공개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서 일부가 1년여 정도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맑스주의, 주체사상, 대안적 이론 등에 대해 교감을 나눈 것이 그 출발이라는 것이다. 주체주의에서 반북주의로, 민중중심의 변혁이론에서 공동체론 이라는 계급협조주의, 신자유주의로 이동한 것이다.

‘지상낙원’으로 북의 사회제도를 동경하며 ‘강철서신’을 배달했던 이들이 어느 날 ‘인민의 지옥’으로 묘사된 ‘북한민주화론’을 들고 나오게 된 과정에 대해선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의 전향이 스스로 사상전향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과거에 활동했던 동료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숨죽이는 대신 ‘전두환은 애국자다.’ ‘주체사상은 독재이념으로의 변질’ ‘주석궁에 땡크를 진주시켜서라도 북한 민주화해야’(1997. 푸른공동체21. 내부토론자료중)라는 주장들과 함께 ‘공동체 사상’ 등을 쏟아내며 ‘전향이론을 생산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구체적으로 '북한민주화네트워크'의 결성과 ‘공격적 대북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미국 의회 강경파, 사회단체와의 교류로 이어졌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는 99년 전(前) 반미청년회 의장 조혁, 열린사회시민연합 교육정책위원장 이숭규, 희망공동체 전북연대 조직국장 오경섭, 시대정신 편집장 한기홍, 전 전대협 간부 김정수 등이 중심이 되었다.

'전쟁을 통해서라도 김정일 정권을 타도해야한다'거나 '황장엽씨의 인간중심 사상을 김정일이 왜곡한 것이 현재 북한의 주체사상'이라거나 '영어공용화론' 등 도발적인 주장이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초기에 생태주의적 경향의 '야마기시즘'에 대해서도 검토하는 등 청산한 이념을 채울 사상조류를 찾던 이들 그룹은 이후 '북한인권‘과 '반 김정일'에 주로 초점을 맞춘 이론, 실천 활동을 벌이게 된다.

북의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해 ‘아사설’이 국내에 돌고 대량탈북 사태와 황장엽씨의 망명 등의 배경 속에 절정을 이룬 이런 흐름은 이후 DJ 정부의 햇볕정책, 초기의 극적 효과의 소멸, 결과적으로 보수세력과 유사한 결론을 내놓은 점 등으로 인해 그 발언력이 상당부분 줄어들어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반북과 진보진영과의 단절을 공통경험으로 각기 분화

이후 이들은 약간의 분화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시대정신'의 주축 멤버였던 김영환 홍준표 한기홍과 최홍재 등은 북한 민주화 운동을 주된 방향으로 삼은 반면, 일부 그룹은 노무현 정부를 좌파이념을 벗어난 상대적으로 건전한 개혁세력으로 간주하고 여권에 결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분화과정에 대해 홍진표 운영위원은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사람을 거론하기는 그렇고, 당연히 뭔가 일을 하다 보면 의견차이가 있게 마련 아니겠느냐" 라며 "심하게 논쟁이 있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조금은 길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함께 '전향'을 감행했던 이들 중 일부는 자유주의연대를 결성하고 공개적으로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고 있지만, 또 다른 이들은 다양한 형태로 현 정부나 여당, 외곽기관 등에 포진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화과정이 ‘이념적 선택을 통한 분화’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들이 공유한 절대적 공감대역은 정제된 이념지향성이라기 보다는 우선 ‘반북과 진보진영과의 단절’ 이다.

이들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보수 세력의 내부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에서 10번까지의 면면을 살펴보면 1959년생인 전여옥 의원이 가장 나이가 젊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과거에 엄청난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엘리트 계층을 흡수하던 보수세력은 두 번의 대선 패배로 이 같은 프리미엄을 상당부분 상실하였고 후세대 충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연령적으로 386 세대는 정치의 다음 주역이 될 수밖에 없는데 한나라당이 찾을 수 있는, 386 세대는 자유주의연대 정도가 전부다. 나머지 386의 경우에는 한나라당에 대해 '생리적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

이런 사정 탓에 이론작업과 대중선전을 할 줄 아는 전향한 ‘젊은 라이트’는 보수 언론과 한나라당 개혁파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 차원에서 얘기한다면 자유주의 연대에서 내세우는 가치나 사회 개조의 대안이나 .. 이런 것과 상당 정도 뜻을 같이할 수 있다면 결합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홍진표 운영위원의 말이다.

한나라당 한 중진 의원은 최근 "뉴라이트 진영이 행정수도 이전반대 진영에 실무진으로 결합할지를 두고 고민한다고 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의원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행정수도'를 매개로 한나라당과 연대를 한다는 것이 모양새가 어색하고, 대선이 상당기간 남은 상황에서 지금 뭔가를 띄운다면 한번 사그라지었을 때 다시 일어서기가 더욱 어렵다는 점 때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권과의 연대나 세력화 작업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연대를 중심으로 한 뉴라이트의 흐름에 한나라당의 혁신계열이나 보수적 학자그룹들이 나서서 “그게 바로 내 생각‘ 이라며 앞 다투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연일 기획특집으로 이들의 활동을 띄워주고 있다. 적어도 학계와 언론, 보수교단, 한나라당의 일부 그룹을 비롯해 차기 대선을 노려보고 있는 세력들의 ’지지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올드 라이트‘라는 배가 삐걱거리며 침몰의 위기를 논하고 있을 때 등장한 뉴라이트를 한국의 보수우익들은 매력적인 노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정치지형이 결국 대통령선거로 집중되며 재편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뉴라이트 운동이 보수진영의 재편과 함께 ‘집권전략’과 함께 이념적 기반을 제시할 것이라는 가정은 지금으로선 필연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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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민족주의가 더 두렵다

중국의 민족주의가 더 두렵다

홍콩과 대만인들, 본토의 반일감정 분출에 불안


A Little Nervous

홍콩과 대만에 사는 사람들도 중국 본토인들과 똑같은 반일감정을 갖고 있을까. 그러나 그들 중에는 반세기 이전에 일본 침략자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중국의 분노에 약간의 거부감을 넘어 반감까지 갖는 사람이 많다. 홍콩은 중국이 새로운 지역 초강대국으로 자임하는 것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대만은 그것을 아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둘 다 일본이 오늘날 아시아의 안정을 위협한다는 중국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반면 오히려 그럴 개연성은 중국이 더 크다고 본다.

요즘 전개되고 있는 격렬한 민족주의 움직임은 중국 비평가들을 특히 긴장시킨다. “민족주의는 강력하고 날카로운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중국이) 그런 감정을 부채질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홍콩의 친민주주의 성향인 에밀리 라우 의원은 말했다.
그처럼 관점이 판이한 것은 역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홍콩에서는 중국의 정치적 동기에 대한 냉소주의가 팽배해 있다. 많은 주민이 공산당 독재를 피해 도망친 난민 출신이기 때문이다.

대만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50년간 일본 식민지였다. 그곳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잔혹상은 1947년에 자행된 2·28 사건이다. 당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군은 현지인들이 봉기하자 수만 명을 학살했다. 중국이 대만의 안보를 계속 위협하는 반면(거수기나 다름없는 중국 전인대는 최근 침략의 합법적인 명분으로 간주되는 반분열법을 통과시켰다).

일본은 대만이 공격받을 경우 방어를 돕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최근 실제로 친독립적인 대만단결연맹(臺灣團結聯盟)의 쑤진창(蘇進强) 주석이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일본 보수파와 대만의 긴밀한 관계를 새삼 부각시켰다.

아시아 다른 국가들의 뜨거운 반일감정과 달리 대만인은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대만 젊은이들은 일본의 패션·팝음악·소비문화에 젖어 성장했으며 일부 구세대는 식민통치가 2차대전 후 대만이 급속한 공업화를 이루는 토대를 제공했다고 본다. “그들은 좋은 것만 기억하려 한다.

그것은 대체로 오만한 중국에 대한 반작용이다.” 대만 중화구아기금회(中華歐亞基金會) 린충핀 이사장의 말이다. 타이베이에 있는 중국학술원 사회과학연구소의 창마우케이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두 제국 사이에 갇혀 있다. 대만은 양국과 가까운 관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대만의 안보는 양측의 호의에 달려 있다.”

중국은 이미 홍콩과 대만의 다소 반항적인 정치인들을 향해 민족주의라는 무기를 휘두르고 있다. 지난해 말 중국의 관영 미디어는 홍콩 민주당의 마틴 리(李柱銘) 전 주석을 ‘비애국자’라고 낙인 찍었다. 홍콩의 정치개혁에 관한 공식노선에 도전했다는 이유에서다.

반일시위를 연출된 정치전쟁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은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베이징이 원한다면 ‘반중’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전술을 구사할 위험성이 상존한다”고 홍콩 애플 데일리의 류킨밍 편집국장은 말했다. 다음 타깃이 될지 모르는데 중국인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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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족주의로 촉발된 주도권 쟁탈전

신 민족주의로 촉발된 주도권 쟁탈전

중·일 갈등의 본질은 고삐 풀린 분노와 상처받은자존심의 충돌에 있다


Furies Unleashed

중국 최고 지도자들에게 이번 소요는 마치 되풀이되는 악몽 같았다. 4월 16일 성난 중국인 2만 명은 “일본 돼지들, 나와라!”라고 외치며 상하이(上海)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현지 주재 일본 영사관엔 돌과 토마토가 날아들었고, 일본인 가게가 부서졌다. 닛산 자동차 한 대도 전복됐다. 지금까지 성난 시위 군중에게 다친 일본인은 2명이다. 규모는 작지만 항저우(杭州)와 톈진(天津)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2주 전엔 중국인 시위대 수천 명이 베이징(北京)의 일본 대사관 유리창을 깼다. 불과 몇 시간 뒤 중국의 막강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위기 관리를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시위 확산을 방치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다른 문제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기회를 시위자들에게 주지 말라는 뜻”이라고 중국의 한 고위 소식통은 전했다. 이 소식통은 이처럼 예민한 경계 분위기는 수주간의 대규모 시위로 천안문 광장이 마비된 1989년 당시의 정치국 대책회의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지도부는 통제력 상실을 원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일부 공식적인 격려까지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번 시위의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 정부가 자신들의 2차대전 전력(前歷)을 미화한 개정판 역사 교과서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글대는 중·일 분쟁의 원인은 실제론 과거의 전쟁에 관한 게 아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저지른 잔학 행위에 대해 이미 사과했고, 이름만 다를 뿐 340억 달러의 ‘개발 원조’를 중국에 제공했다고 주장한다(이 같은 사실은 중국 언론에선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 분쟁의 진짜 원인은 두 나라가 아시아의 경제·외교·군사적 미래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위해 갈수록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20년간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자부심과 힘을 함께 갖게 된 중국은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 갖게 된 외교적 힘을 휘두르고 있다. 반면 일본은 중국의 부상(浮上)에 불안감을 느낀 결과 2차대전 이후 줄곧 외교정책의 기조였던 평화주의를 내팽개치고 있다.
양국은 현재 새로운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 중이다.

특히 일본 언론이 ‘갈등의 바다’라고 표현한 동중국해에 대량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해저 천연가스가 폭풍의 눈이다. 일본 통상산업성은 지난주 그 지역의 석유와 가스에 대한 채굴권을 일본 민간 기업들에 부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그곳에서 석유 탐사 작업을 해오던 중국은 즉각 이를 ‘심각한 도발’로 규정했다. 양국은 쌍방 간 교역이 급증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상대방의 전략적 야망을 꺾겠다는 태도다.

중국은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고, 일본은 중국의 미주개발은행(IDB) 가입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워싱턴 DC에 거주하는 중국학자 페이민신은 “심리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양국은 매우 불편한 관계에 접어들고 있다”며 “이것은 후일 중·일 관계의 일대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마찰은 보다 큰 현상의 등장을 의미한다. 동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는 민족주의의 새로운 부상이다. 이 지역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주장하면서도 상대국의 이익엔 도전하는 것에서 명백히 알 수 있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흔들리는 정치적 지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민족주의적 정서에 호소하고 있다.

대만에서도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들이 대만의 정체성에 대한 보다 확고한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2년 이후 자신을 중국인이나 중국계 대만인이 아닌, 오로지 대만인으로 여기는 사람의 수는 대만 전체 인구의 18%에서 40%로 증가했다. 타이베이(臺北)에 위치한 중국학술원 사회학연구소의 창마우퀘이는 “우리의 세계관은 변했다. 이젠 중국이 아닌 대만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말했다.

물론 아시아에서 국가적 자긍심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그러나 과거엔 그것이 주로 역사적 원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제국주의와 전쟁의 공포에 대한 방어적 반응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국립대 동아시아센터의 연구교수인 데이비드 켈리는 “역사적으로 몸에 밴 감정을 과소평가할 순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민족주의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성장한 보다 젊은 세대의 열망에 더 많이 뿌리를 두고 있다. 도시 중산층 중 일부는 이제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올림픽 개최를 부르짖는 것이 대표적 예”라고 덧붙였다.

지난 30년간 동아시아는 경제 발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시기에 한국과 중국의 정치인들은 일본의 수정주의적 교과서, 위안부, 더 최근엔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에 대해 자주 흥분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는 자신들의 생활수준을 높이기에 바빴다. 가슴을 치며 분노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젠 그것도 옛날 얘기다. 젊고, 교육받고, 기술적으로 앞서가는 요즘의 젊은 아시아인에겐 경제적 안정이란 메시지가 1970년대나 80년대처럼 절실히 와닿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돈·여가,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갖고 있다. 게다가 새로 찾은 사회적 자유와 인터넷 덕분에 자신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이 같은 태도는 정부의 정책에도 갈수록 큰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중국 정부가 대만에 대해 보이고 있는 강경 입장의 배경에는 중국 젊은층의 여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중국 네티즌이 벌이고 있는 온라인 청원에 서명한 사람은 이미 2200만 명에 이른다.

오늘날 중국 최대의 민족주의 단체 중 하나는 ‘애국자동맹망’(愛國者同盟網)이다. 웹 디자이너 루윤페이(29)를 포함한 중산층 도시 전문직이 주도해 세운 단체다. 이 단체의 웹사이트는 이미 회원 7만6000명을 거느리고 있다. 중국 정부가 새로운 철도 건설을 위한 주요 계약을 일본 회사와 체결하자 애국자동맹망은 반대 운동에 나서 8만6000명으로부터 전자서명을 받아냈다.

그 결과 계약 자체가 무산될 처지다(적어도 현재까진). 시위 참가를 부르짖는 네티즌의 요구는 지금까지 중국 내 8개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이 미군 주도의 NATO 군에 의해 폭격당하자 시위자들이 미국 대사관을 난장판으로 만든 1999년 시위 이후 최대 규모다.

어느 정도의 민족주의 정서는 스트레스 많고 급변하는 사회에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민족주의 간 충돌이 위험 상황으로 이어질 경우다. 그 같은 위험은 동아시아에서 잠재적 폭발성을 내포하고 있다. 국가 간 경계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한 서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지역엔 유럽연합(EU)이나 NATO처럼 역내를 아우르는 국가 간 기구가 없다. 쉽게 말해 국가 간 긴장을 줄여 주거나 상호 협력을 위한 틀을 제공할 구조가 없는 것이다. 영토 분쟁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곳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중 네 곳은 역사적 과오 때문에 아직도 주변국들의 의혹과 두려움을 사고 있는 일본과 관련돼 있다.

중·일 관계는 지난해 11월 동중국해에서 군사적 대치 상황이 발생한 이래 악화일로를 걸어 왔다. 당시 일본 자위대는 자국 영해를 침입한 중국의 핵추진 잠수함을 발견했다. 양국이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천연가스전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자위대는 그 잠수함을 이틀 동안 추격한 뒤 중국 측에 사과를 요구했다. 결국 중국은 사과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 잠수함의 일본 영해 침범이 아니라 군사적 대치를 혐오하는 일본이 직접 잠수함을 추격해 쫓아냈다는 점”이라고 미 외교협회(CFR)의 중국 문제 분석가 애덤 시걸은 말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은 더욱 강경한 대중국 노선을 채택했다. 우선 방위백서에서 중국을 군사적 위협으로 못박았다. 1월 19일에는 일본과 미국이 전례없는 공동성명을 통해 현재와 같은 대만의 사실상 독립 상태가 ‘공동 전략 목표’라고 선언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내각엔 대만에 동조적인 보수·우익 인사가 더러 포진해 있다. 일본은 16년째 지속되고 있는 EU의 대중국 무기 금수조치를 해제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하기도 했다.

고이즈미는 2001년 총리에 선출된 이후 일본의 정체된 정치 시스템 개혁을 위한 핵심 과제로 국가적 자긍심 회복을 내세웠다. 특히 일본의 젊은 세대가 그의 견해를 수용했다. 중국 전략가들은 일본 정부가 미국의 보수적인 매파 행정부 때문에 더욱 대담해졌다고 믿는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다가오는 ‘중국의 위협’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지난 3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가 대만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반(反) 국가분열법을 통과시킨 것은 중국 지도부에 반드시 득이 된 것은 아니었다. 반분열법은 대만에 대한 국제 사회의 동정심을 높여준 동시에 중국을 더욱 호전적으로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적 자긍심 외에 불안감도 일본의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데 한몫한다. 일본 템플대의 제프리 킹스턴 교수는 “국제 서열에서 일본의 위치가 위태롭다”며 “지금은 중국이 일본을 앞지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 동안 일본은 아시아의 가장 역동적인 경제대국이란 지위를 포기한 듯했다. 그 여파로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현재 깊은 불안에 빠져 있다. 심지어 일부는 포퓰리스트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도지사나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죄책감을 뒤집는 작품을 내놓았다) 같은 다양한 인사들이 전파하는 위대한 국가의 꿈에서 위안을 찾고 있다.

중국의 현 정권도 자신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민중의 민족주의에 영합하는 편이 자신들의 정통성 결여를 불식하는 데 유리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인민들의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이념이 아니다. 그 뒤를 이은 ‘금전 숭배’도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에 대한 좌절감을 낳았다. 1930년대에 강경한 반일 노선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은 중국 공산당으로선 일본으로 화살을 돌리는 게 안전한 길이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이 긴장 완화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양국 간 교역 규모는 연간 2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지난해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일본의 최대 무역 파트너가 됐다. 일본 기업들은 중국에 막대한 금액을 투자해 현재 중국인 약 100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다카시마 하쓰히사(高島肇久) 일본 외무성 대변인은 “양국의 상호 의존도와 보완성이 워낙 높아 서로 경원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며 “이처럼 밀접한 관계를 손상시켜선 안 된다”고 말했다. 옳은 얘기다. 그러나 2001년 이후 양국 간에는 정상회담이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후진타오 주석과 고이즈미 총리는 4월 22일 자카르타의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 참석할 것이다. 그러나 둘이 만날 계획이 있는지는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중·일 간 불화가 군사적 대치로 증폭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거나 봉쇄할 가능성이 우려로 남아 있다(그것은 계속 예측할 수 없는 요인이 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의 급속한 군 현대화는 이미 역내 군비경쟁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특히 중국 해군은 신형 수륙양용 공격정 23척과 공격용 잠수함 13척을 추가로 확보해 5년 전과 비교할 때 훨씬 강해졌다. 지난해 12월 중국 정부는 신형 핵추진 잠수함 1호를 진수했다. 미국 정보기관들의 예측보다 수년이 빨랐다. 중국은 또 자국산 디젤-전기 동력 잠수함도 건조 중이다.

민족주의는 한번 터져나오면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주 중국 네티즌은 5월 4일(1차대전 후인 1919년 일본의 요구에 굴복한 중국 정부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이 벌어진 날)을 기념해 천안문 광장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 개최를 요구했다. 1989년의 망령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중국 지도부는 천안문 광장에서의 민중 집회를 허용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반일 시위가 공안에 의해 좌절됐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시위대는 분노의 화살을 일본에 아부하는 정부 쪽으로 돌릴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 공산당 정치국은 위기관리 회의를 훨씬 더 자주 열어야 할지 모른다.

With JONATHAN ANSFIELD and CRAIG SIMONS in Beijing, HIDEKO TAKAYAMA and KAY ITOI in Tokyo, B. J. LEE in Seoul and JONATHAN ADAMS in Tai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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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부시의 입이 찢어지다

[하재근 컬럼]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 부시의 입이 찢어지다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04-28 16:12]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우습게 알지만 우크라이나는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구소련의 곡창지대 정도?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체르노빌 원전사고?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농사에만 의존하는 한가한 나라가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강국이 될 잠재력이 있다.

세계적인 곡창지대면서 구소련 산업의 25%, 군수산업의 40%를 담당했을 만큼 중공업 또한 발달했다. 광대한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5000만에 달하는 인구, 풍부한 자원, 산업기반이 동과 서 어느 쪽에 속하느냐에 러시아 제국 부활의 사활이 걸렸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속하게 되면 영국-프랑스-독일-폴란드로 이어진 동방제국 포위망이 흑해를 넘어 터어키로 이어지게 된다. 프랑스-독일 동맹에서 발아한 유럽연합이 독일의 무지막지한 청산사죄 신공으로 폴란드를 넘어 우크라이나까지 접수하면서 오랫동안 동방의 바다였던 흑해가 미국-서방의 내해로 귀속되는 것이다. 로마제국 시대 이래로 처음인가?

반면에 이미 발트해를 잃은 러시아가 흑해까지 잃게 되면 서방으로의 출구는 봉쇄된다. 흑해연안과 코카서스 지방에서의 러시아의 위축은 터키의 운신폭을 넓혀준다. 터키가 자유로워지면 이란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고 아직도 러시아와 가까운 중앙아시아의 ‘~~스탄‘시리즈의 나라들까지 미국의 포위망-유럽의 팽창선이 연결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동와 서 사이에 낀 우크라이나의 중요성이다.

세계에서 다락방 거주 기네스 기록을 보유한 나라는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의 스테판 코발추크씨는 무려 57년 동안이나 자신의 다락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1942년 나치를 피해 다락방에 숨어든 후 2차 대전 후엔 소련군을 피해 다락방 생활을 계속하다 1999년이 되서야 75세의 노인이 되어 다락방에서 나온 것이다.

스테판 코발추크씨의 이야기는 서방과 동방 사이에 낀 우크라이나의 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중국과 미국 사이에 낀 나라로서 동병상련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동선으로 봐선 유럽 동남부의 중심국가이며 미국패권체제의 최전선인 우크라이나에 조만간 최초의 한국 대통령 순방이 있을 건 확실해 보인다.

작년까지만 해도 정정이 불안정했던 우크라이나가 안정됐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얼마 전에 친러 정권이 무너지고 친미 정권이 섰다. 그것이 이른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동서의 대결, ‘오렌지 혁명’이다. 이 오렌지 혁명으로 부시는 기고만장이고 러시아의 푸틴은 ‘아주, 매우, 많이’ 불쾌한 상태다.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둔 동과 서의 신경전은 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94년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이 이루어진 후, 1995년 옐친은 독립국가연합내 러시아의 주도적 위치 확립, 공동군사사령부 창설, 러시아 군대의 주도적 역할, 공동 외교 정책 수립, 독립국가내 러시아 신문 보급, 각국 관료의 훈련을 러시아가 맡을 것 등을 주장하고, 곧이어 96년 러시아의 두마는 소련해체 무효 선언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서방은 즉각 반응을 보인다. 96년 7월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이 지니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또 미국의 교두보이자 유럽의 중추인 독일의 수상은 “유럽에서 우크라이나가 차지하는 견고한 위치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도전받을 수 없다.”라고 선언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제국 부활시도에 반대하고, 이 때 우크라이나의 노선을 지지했던 나라가 중앙아시아의 중심 우즈베키스탄이다. (우즈베키스탄엔 노무현 대통령이 다음 달에 방문한다.)

같은 시기 미국-서방의 공세에 불안감을 느낀 옐친은 반패권 동맹을 구상하는데, 그것은 러시아-이란-중국의 결합, 바로 몽골제국의 부활이었다. 1996년 옐친은 베이징을 방문해 세계패권체제를 비난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중국의 리펑은 러시아에 답방하여 “(세계가) 유일 강국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양국이 공동으로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서방의 자본 투자가 아쉬운 터에 러시아-중국은 아직 미국을 노골적으로 적대할 수 없었다. 반패권 동맹은 흐지부지 됐지만, 그 당시의 구도가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이후 현재에 이르러 다시 재현되는 중이다. 지금 푸틴은 이란에 손을 내밀고 있고, 중국과 관계를 맺으며, 더 나아가 중국은 인도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기고만장한 부시가 “자유의 확산”을 선언한 데 대한 반작용이다.

2002년도에 실시된 우크라이나 총선에선 출구조사를 ‘우크라이나공공감시위원회’와 국제부흥재단이 공동으로 실시했다. 국제부흥재단은 조지 소로스가 이끄는 재단이다. 소로스가 왜 거기에 있지?

2003년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얄타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벨로루시를 잇는 독립국가연합 경제공동체를 만들겠다고 발표한다. 명백히 EU에 대한 응전이고, 날로 미국의 영향력이 잠식해들어 오는데 대한 반발이다. 예전 같으면 출구조사를 해도 러시아가 했을 거였다. 그런데 소로스가 쳐들어와서 하다니!

2002년 총선에서 빅토르 유슈첸코가 이끄는 야당이 약진한다. 유슈첸코의 부인은 미국인이고 미 국무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그 때문에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서 정략적으로 유슈첸코에 접근해 결혼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부인뿐만이 아니라 유슈첸코 자신이 브레진스키, 메들린 올브라이트, 조지 소로스 등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등 미국과 매우 가깝다고 알려져 있다.

2004년 유슈첸코는 우크라이나 대선에 출마한다. 친러파인 쿠츠마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인 야누코비치 총리를 내보낸다. 이렇게 해서 결국 우크라이나 대선은 동과 서, 미국-유럽 대 러시아의 대결이 된다. 유슈첸코가 이기면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속하게 되고, 야누코비치가 이기면 러시아의 자장 안에 남는 것이다.

푸틴은 대선기간 중 두 번이나 우크라이나를 방문하며 야누코비치를 민다. 게다가 대선 결과 공식 발표가 있기도 전에 야누코비치에게 당선 축하 전화를 걸어 서방의 반발을 산다. 그러나 상황은 러시아의 애틋한 꿈과는 다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2004년 11월 22일 우크라이나 중앙선관위는 야누코비치의 승리를 발표한다. 유슈첸코는 즉각 불복을 선언하고 지지자들에게 민중항쟁을 촉구했다. 군중이 선거부정에 항의해 몰려들고 우크라이나 서부 지방의 지역 의회는 유슈첸코에게 복종할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남북이 갈려 동서의 대리전을 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동과 서가 갈려 미국-유럽 대 러시아의 대리전을 한다. 여기에도 역사적 배경이 있지만 넘어가고, 유슈첸코가 대선 결과를 무시하고 “내가 당선자”라며 스스로 선언하자, 백악관은 즉각 선거부정 조사가 끝날 때까지 공식적인 대선 결과 발표를 유보해달라고 우크라이나 당국에 촉구한다.

애가 탄 푸틴은 선거 결과가 발표된 후 바로 야누코비치 당선자에게 축하메세지를 보냈는데 미 국무부는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한다. 유럽연합(EU)도 대선결과 발표를 재고해달라고 우크라이나 당국에 요구하고,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도 비민주적 선거였다고 비난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를 서방의 내정간섭으로 규정, 강력히 반발한다.

유슈첸코가 선거불복을 선언할 수 있었던 정당성은 대선 출구조사에 있었다. 출구조사 결과과 선관위 발표가 달랐던 것이다. 그 출구조사가 가능했던 건 바로 미국의 지원이었다. 미국은 수천만 달러를 우크라이나 대선 과정에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스탠퍼드대 마이클 맥파울 교수는 <워싱턴포스트>에서 미국은 우크라이나 내정에 간섭한 것이 맞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미당국은 그걸 민주주의 촉진운동, 시민활동 지원 등으로 부르지만.

유슈첸코의 선동에 수만 명의 지지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모두 오렌지색의 상품을 몸에 둘렀다. 그래서 ‘오렌지 혁명’이다. 그런데 이 수 많은 오렌지색 상품은 어디서 갑자기 나온 것일까? 러시아 언론은 우크라이나에 공급된 대량의 오렌지색 상품과 조지 소로스가 연관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우크라이나 시민혁명은 조지 부시와 조지 소로스, 두 조지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부시가 대통령이 된 후 구소련 영역에서 일어난 정변은 모두 부정선거와 시민의 비폭력 시위라는 수순을 밟았는데, 이것이 철저히 기획된 <포스트모던 쿠데타>라는 음모론이다.

실제로 미 의회의 자금지원을 받는 민주주의재단(NED)은 1997년부터 우크라이나 청년들을 교육시켰으며 그들이 유슈첸코 진영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 유슈첸코도 이 단체의 지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또 거리시위를 주도하는 포라(Pora-시간이 됐다는 뜻)라는 학생조직은 소로스의 열린사회재단의 후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혁명의 상징색이 불길을 뜻하는 오렌지색으로 된 것부터가 자연발생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서방 정치기획자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크렘린 정치고문 파블로프스키는 “서방이 우크라이나에서 혁명을 실험하고 이를 러시아에 확산시키려 한다”라고 비난했다. 유럽연합 주재 러시아 대사는 구소련권 내의 정변에 배후조종하고 자금을 대는 단일한 집단(즉 미국)이 있을 거라고 비난했다.

23일, 푸틴은 “우크라이나 대선을 비판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24일, 파월 미 국무장관은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를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크바스니예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전권 중재자 자격으로 우크라이나를 방문한다. 말이 중재지 사실상 미국-유럽연합의 우크라이나 접수다. 독일이 오데르-나이세선을 돌파한 보람이다. 폴란드가 미국-독일을 대리해 우크라이나에 들어간 것이다.

11월 28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대선 무효를 결의한다. 29일, 친러파인 쿠츠마 대통령은 완전 재선거안을 제시하고 러시아를 긴급 방문한다. 그러나 유슈첸코는 결선투표를 주장한다. 12월 2일, 푸틴은 쿠츠마 대통령의 완전 재선거 제안에 찬성하며 서방의 개입에 경고를 보낸다. 부시는 즉각 미국의 참여는 계속될 것이라고 응수한다.

12월 3일, 우크라이나 대법원은 유슈첸코의 결선투표 주장에 손을 들어준다. 야누코비치 당선자는 “판결이 강력한 정치적 압력 아래 내려진 것”이라고 비난한다. 같은 날 푸틴은 인도에서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독재자로 행세하고 있다”며 “균형 잡힌 민주적 국제법 체제”를 주장한다. 국제법 체제? 이건 노 대통령의 메뉴이기도 한데?

아무튼, 6일, 푸틴은 “일부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민주주의'로 표현할지 몰라도 러시아는 그 같은 사태 진전을 용인할 수 없다”며 미국에 연일 맹공을 가한다. 그러나 10일,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외무장관들과 파월 미 국무장관은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나 자유로운 재선거에 합의한다.

이 시점에서 폭탄이 터진다. 11일, 오스트리아 의료진은 유슈첸코가 다이옥신에 중독됐다고 발표한다. 유슈첸코의 얼굴 피부는 그즈음 급격히 망가졌다. 그것이 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중독에 의한 것이라는 발표다. BBC는 유슈첸코 독살기도설을 보도한다. 러시아, 혹은 친러파가 유슈첸코를 암살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미국은 “진단 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진상조사를 촉구한다. 독살설은 결선투표를 불과 15일 앞두고 발표돼 선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나중에 유슈첸코의 주치의로 일했던 로타르 비케 박사가 다이옥신 중독설은 '거짓'이라고 밝혀 파문이 일었다. 그는 다이옥신 중독 진단을 거부해 주치의에서 해고됐고, 미국에서 파견된 의료진이 유슈첸코를 만났다고 한다. 물론 의혹일 뿐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이것이 오렌지 혁명의 전말이다. 재선거는 유슈첸코의 승리로 끝났다. 유슈첸코는 2005년 1월 24일, 대통령 취임 바로 다음날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과 기존 종주국 러시아와의 긴밀한 동반자 관계를 확인한다. 취임 직후 미국으로 가 한미동맹을 확인한 노 대통령과 비슷한 행보다.

유슈첸코는 올 4월엔 미국을 방문해 부시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같은 시기 푸틴은 독립국가연합 지도자들을 차례차례 만나며 세력권 단속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독립국가연합 4개국 경제공동체는 지지부진해진 상황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추진하고 있고, 유럽은 우크라이나에 시장을 개방해줬다. 푸틴이 분통을 터뜨릴 만도 하다.

문제는 미국이 이런 유럽에서의 경험을 북한에 적용하려는데 있다. 유럽 사정과 한반도가 같은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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