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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소설읽기 3 - 난 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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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8/10/04 16:24
  • 수정일
    2008/10/0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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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자님의 [성장소설 읽기 2] 에 관련된 글.



이상권 지음. 난 할거다. 사계절 출판사

 

평범한 시골 학생이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그 낯섬과 거침 앞에서 얼마나 힘들고, 상처받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그렸다. 그러면서 어떻게 자신만의 힘을 기르고 찾아가는지를 함께 제시하였고, 그 과정이 평탄치 않음을 빠뜨리지 않았기에 더욱 좋았다.

눈이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일삼는 학교의 상황 또한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남자 고등학생들의 심리와 상황에 대해 짐작해 보지도 못했으면서,

청소년 건강행태에 대해 우려를 했던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또한,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좋은 환경이란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다.

성장기에 책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위로와 힘이 얼마나 큰지도 확인할 수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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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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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8/10/02 20:06
  • 수정일
    2008/10/0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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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액션영화를 혼자 가서 보기는 처음이다.

사실, 액션영화라서 간 것은 아니고, 제목만 보고 영화에 관한 이야기인가보다 하는 기대와

반값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영화였기에 선택했다.

아, 한가지 더. 전철에서 우연히 젊은 여성 둘이서 '소지섭'이 너무 잘 생겨서 줄거리도 잘 모르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를 잘 모르긴 하지만,

영화를 빗대어 현실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내맘대로 해석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말이다.

고운 소년 티를 벗지 못한 액션배우의 모습과 피로 얼굴이 범벅이 된 깡패의 얼굴을 큰 화면에 반반씩 나누어 클로즈업 하는 것이 마지막 장면인데, 피묻은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직면하지 못하고 외면하면서 '모방'한 것을 실제려니 생각하고 싶을 만큼 현실은 냉혹한 것이라고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 진짜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는 극중 영화배우와 깡패에게도 영화 중간중간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현실의 모습도 있음을 잊지 않고 보여주었다. 그 현실은 '사랑'이라고.

결국 절망도 희망도 모두 '현실'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보니,

그럼 영화는? 질문하게 된다.

정말 저렇게 살아보고 싶은 누군가의 삶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주인공의 대사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바램을 가상적으로나마 채워주는 것이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한번 쯤 살아보고 싶은 삶이 있음을 확인하게 해주는 기회로서의 영화.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임을 잊지 말것을 당부하는 듯했다.

어찌보면,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 인 척'하거나 '꿈을 꾸는 듯' 살고 있는 순간이 종종 있다.

주어진 역할, 지위, 배경.. 이런 것들이 마치 자신의 전부인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세상이다.

보다 냉철한 분별의 지혜가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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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소설 읽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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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8/09/2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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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2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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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자님의 [성장소설읽기] 에 관련된 글.

학생강의 준비를 위해 작성한 도서 목록에 포함된 책이다.

이금이가 쓴 '너도 하늘말나리야"

 

 



세 아이와 그 가족의 이야기다. 엄마가 이혼을 하고, 병원간호사를 그만 둔 후 달밭이라는 농촌의 진료소장으로 오게 된 미르, 아주 어릴 적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재혼을 하면서 할머니에게 맡겨져 자라고 있는 소희, 봉사활동을 왔던 여대생인 엄마가 농촌 총각인 아빠와 결혼을 하여 열심히 농사일을 거들다가 병으로 돌아가신후 말을 잃고 살아가는 바우.

 

미르, 소희, 바우의 심정과 각각의 부모와의 관계가 진솔하게 서술되어 있다. 무엇보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들이 각자의 처지에 대해 어떻게 다른 감정적 반응을 하는지가 잘 드러낸 점이 돋보인다.

상사화, 괭이밥, 하늘말나리... 다양한 들꽃들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동일시하는 것도 좋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거나, 공식/비공식의 두가지 일기를 쓰면서 작가가 되고 싶다거나 하는 아이들의 바램은 그림그리기와 글쓰기가 갖는 치유의 힘에 대한 작가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리라.

 

어른들도 누구나 통과했을 그 시절... 그 시절을 까맣게 묻어두고서는

결코 평안한 하루를 보낼 수 없을 것 이다. 책을 덮기전 울컥 쏟아진 눈물이 그 이유다. 덮어두었다고 해서 없어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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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8/09/04 21:45
  • 수정일
    2008/09/0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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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고

 

눈빛을 주고받지 않아도

가슴이 시리도록 해주고

 

기억을 끄집어 내느라 애쓰지 않아도

어느 틈엔가 그 옛날 그리운 시간으로 데려다 주고

 

지루하고 무료한 정적과 싸우지 않아도

이 가락 저 가락 바꿔가며 귀에 들려주는

 

벗이 있으니

 

다행이다.

안심이다.

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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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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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08/09/01 09:46
  • 수정일
    2008/09/0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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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내내 돌보지 못했던 밭에 갔더니, 완전히 밀림이 되어버렸다.

우리 뿐아니라, 이웃사촌들도 역시 무심한 사람들인 탓에 주변이 온통 숲을 이루어 우리 땅이 어딘지 형태조차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팔을 걷어부치고, 낫, 호미, 삽, 쇠스랑 ... 온갖 장비를 동원하여 풀을 제거하기 시작한지 세시간 정도 지나서야 비로서 무언가 심을만한 모양이 드러났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줍듯, 풀잎 조각과 뿌리들을 집어내기란 얼마나 힘들던지...

일부 뒤섞여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포기하고,

배추, 무 모종을 심고,  쪽파 뿌리, 아욱과 당근의 씨를 뿌렸다.

엉덩이를 들 힘이 없어서 땅바닥에 퍼지르고 앉아 심기를 다하고 나니,

목도 마르고, 몸은 땀으로 범벅, 팔다리 쑤시고, 얼굴이 따끔거리고..

아이고 죽겠다를 반복하면서 돌아왔다.

하룻밤 자고나니 더 쑤신다.

 

올 가을 밭일은 봄 농사보다 더 힘들 것 같다. 배추에는 벌레가 많이 생겨서 하룻사이에 다 망가진다고,

고수농사꾼 할아버지가 한심한 우리를 들여다보며 자주 와보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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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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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8/08/23 18:36
  • 수정일
    2008/08/23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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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일찍 일어나 한가한 토요일 오전. 마침 보고싶었던 영화가 시간이 맞더군요.  이스라엘 영화 "누들",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남편은 군인으로 전쟁에서 죽고, 두번째 남편은 파일럿으로 사고로 사별을 한 스튜디어스 미리의 집에 불법체류자인 중국인 가정부가 잠시 나갔다가 오겠다며 아들을 두고 가서 연락두절이 되어버렸지요. 갑자기 말이 통하지 않는 소년을 떠맡은 미리와 그 가족들은 처음엔 어떻게 이 아이를 처리(?)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애타게 엄마를 만나고자 애쓰는 아이의 마음에 끌리게 되었습니다. 이리저리 수소문하고, 중국어를 하는 언니의 옛애인의 도움으로 엄마가 강제추방되어 일하고 있는 북경의 음식점을 찾아냈는데 무국적자인 아이가 비자를 받을 길이 없었던거지요. 그러던 중 주변에서는 미리에게 아이를 맡아 기르라고 권유를 하지만, 아이가 엄마와 헤어져 느끼는 슬픔에서 자신이 겪은 이별의 슬픔을 읽어내는 미리는 용기를 내어 불법(?)을 감행하게 됩니다. 결국,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데려다 주는데 성공을 하지요. 미리와 아이가 겪은 헤어짐과 만남이라는 큰 줄거리의 곁가지로 언니와 형부, 옛애인 등의 엇갈린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도 섞여있구요. 북경의 한 시장, 음식점 앞에서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길 때 제 가슴이 뻐근해지며 눈물이 흘렀습니다. 제 무의식중에 눌려있던 이별의 아픔이 건드려진 것이게지요. 그런데, 마음은 참 따뜻하고 편안했습니다.
아픔을 지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용기를 내는 모습! 연대란 바로 이렇게 가능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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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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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8/08/22 18:32
  • 수정일
    2008/08/22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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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시간 빚을 지고 살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 빚은 더 커질텐데...

온전히 되갚거나 탕감받을 길이 없어 보인다.

 

그 빚 안 받겠으니

그만 청산하자고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한들, 내 맘에 부채감이 없어질까?

 

적어도 잊어버리지는 말아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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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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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8/08/21 11:10
  • 수정일
    2008/08/2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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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가장 큰 업적은 연구실 정리다. 그냥 정리한 정도가 아니라, 책상과 집기를 개비하고, 낡은 것은 모두 버리는 대대적 공사였다. 거금 일백만원 가량의 투자를 서슴치 않았다.

그동안, 사실 10여년전 학교에서 준 철제 장과 파일박스, 내 돈으로 산 회의용 테이블, 다른 학교로 간 동료가 넘겨주고 간 책상... 온갖 서류들과 자료들이 쌓여져 있던 상황을 모두 바꾸고 싶었더랬다.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았나보다. 집과 직장이 멀다보니, 잠시 와서 꼭 해내야 할 일을 처리하는 장소로만 생각했지 편히 있으면서 즐길 수 있는 장소라는 기대는 없었던 듯 하다.

그런데, 이제 맘이 바뀐게다.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내"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진 것이다. 왜 일까?

이유야 어찌되었든 버릴 것 버리고, 새로 바꾸고 나니 기분이 좋아진다. 마음도 가볍다.

즐겁게,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만큼 마음껏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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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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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08/08/19 14:30
  • 수정일
    2008/08/1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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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손님은 누구라도 반갑지 않다고들 한다.

열흘간의 여행 끝에 피곤한 몸으로 돌아왔더니, 시동생의 막내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을 비우는 동안 다섯식구가 서울나들이 겸 휴가를 보내고 가라했더니, 그 끝에 막내는 무용레슨을 받아야 한다고 두고 갔다. 하루 이틀 더 있는 정도가 아니라, 2주를 더 있겠다고 했다.

더운 날씨, 피곤한 몸.. 선풍기 틀고, 문 열어 놓고 자도 잠을 제대로 자기 어렵던 날들을 불청객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무용을 하여 예고를 가겠다는 아이. 부모에게 단단히 잔소리를 들었는지 무엇이든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신경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다. 자는 시간, 먹는 시간,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 모두 내 소관이 아니란다.

내 공간에 와 있으면서, 통제받기를 거부(?)하는 당돌함이 처음에는 몹시 언짢았지만, 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데 며칠 걸렸다. 아이를 미워할 순 없으니, 부모에 대해 짜증을 낼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속으로만!! 시댁식구란 그런가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위 요즘 아이를 관찰하는 기회로 삼는 나를 재발견하였다. 혼자서 컴퓨터와 PDA인지 DMB인지 모를 손바닥만한 컴퓨터, 핸드폰 등으로 말없이 얼마나 잘 노는지 한편 놀라웠다.

버릇처럼, 저렇게 혼자 놀기를 즐겨하면 사람과 어떻게 소통을 할 것인지 혼자 걱정을 늘어지게 했더니, 주말에 시댁에 가서 만난 지 언니와 어찌나 수다를 재미있게 떠는지 또 한번 놀랐더랬다.

2박3일 내가 집을 비우는 동안, 조카와 큰아빠가 함께 외식을 했단다. 같이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지 살길을  이미 다 구상하고 있는 아이라고 몹시 대견해 했다. 자기가 무용을 하려는 이유, 무용을 하지말라고 말리는 이유에 대한 반박논리를 나름 분명하게 설명하고, 특히 고등학교 자녀의 학비를 대주는 회사를 다니는 아빠에게 자기가 대학에 가기 전에 절대 그만두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고 했다.  대학을 가면, 자기 힘으로 어떻게든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보여주었단다.

자연스레,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모습을 떠 올려보게 된다.  세상물정 모르고, 부족함이 마냥 싫기만 했던 시절......

비오는 아침, 가방을 끌고 양 어깨에 메고도 혼자 갈 수 있다고 하는 아이를 굳이 터미널에 데려다 주면서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시절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은 아닐까 안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특별히 해줄 게 없으니까, 자꾸 걱정거리만 찾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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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소설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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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8/08/14 14:55
  • 수정일
    2008/08/1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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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덥고, 여독을 푼다는 명분하에 붙잡고 읽었던 두권의 책. 요즘 들어 자꾸 뒤를 돌아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많아지고, 그게 좋기 때문이지 싶다.

 

# 지상에 숟가락 하나

남자들이 쓴 소설을 읽으며 대개는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안들었는데, 읽어보니 예외였다. 신문광고에

제주도가 고향인 작가의 어린시절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 지난 봄 4,3 기념관을 다녀왔던 기억도 나고 해서, 붙들었다. 작가의 중학생시절까지 자신의 내면과 경험, 가족과 사회적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현실감있게 풀어놓은 이야기였다. 중학생시절까지만을 쓰는 이유로 그 때까지가 고향산천의 자연과 더불어 그 일부로서 살아온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을 키운 고향의 바다, 산, 바람, 냄새, 식물, 동물들.. 참으로 가난하고, 잔인한 시절을 살았지만 그 자연의 품에서 위로받고 살아날 수 있었음을 고백하는 작가의 강인함과 진솔함이 좋았다. 성장하면서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애정과 미움, 갈등 또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작가가 갓 태어난 영유아시절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음은 아마도 융 심리학과 같이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한 노력을 했던 덕분으로 보여진다.

저 깊은 곳에 숨겨진 자신의 여성성을 잘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모습 또한 놀라웠다. 대개 심리학적인 이해에 대한 관심은 여성들에게서나 흔히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이었다. 성장기에 겪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경험도 진솔하게 소개하여 남성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다.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살아온 날들을 충분히 기억해내고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하면서 온갖 감회와 감정을 쏟아놓을 수 있는 것은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닐까? 언젠가 나도 한번 시도해보리라...

 

# 유진과 유진

다음 학기에 1학년 학생들에게 "인간발달의 이해"를 강의할 것을 자청한 바 있기에 청소년들의 심리와 경험에 관심이 간다. 동일한 상처를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며 자라는 큰 유진과 작은 유진의 이야기다. 어쩌면 아이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어른, 부모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불가항력적인 상처를 받고, 그 상처로 인한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그 흔적을 드러내지 않도록 꼭꼭 감싸며 오히려 만회하기 위하여 주어진 "역할"에 집착하는 방식이 있다. 작은 유진은 전교1등을 하는 학생으로서 그 상처를 포장하도록 길러진다. 반면, 큰 유진은 그 상처의 아픔을 위로받고, 마음껏 같이 슬퍼해주며 존재 자체로 소중함을 인정받으며 자연스럽게 살아가도록 길러졌다.  감정의 자연스러운 분출과 흘러감을 허락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가출한 두 소녀가 부모와 다시 재회하는 상황에서 두 모녀가 보인 반응이 아주 대조적이었다. 화가 나면서도 반갑고 기쁜 마음을 끌어안고 표현할 수 있는 관계와 서서 바라보고 속으로만 느끼고 판단하는 관계.

내 사고가 유독 "...로서   ...해야 한다"에 고착되어 있었던 이유에는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함이 자의반 타의반 작용했던 것임을 부정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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