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from diary 2010/02/26 11:41

니나님의 [케인즈는 왜 프로이트를 숭배했을까? -서론] 에 관련된 글.

p.51

 

사실 놀라운 역설은 내가 소비할 것이 많을수록 절망은 크다는것이다. 개리 베커나 켈빈 랭커스터 같은 극단적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근본적이고 존재론적이며 유일한 진짜 희소성은 인간 시간의 희소성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빨리 달릴수록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줄어든다. 왜냐하며 스트로보스코프 효과처럼 내게는 수천개의 소비의 가능성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일석이조의 효고를 거둔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무척이나 고민스런 문제 즉 지루함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지루함이란 시간의 과다함이 주는 댓가이며, 시인의 괴로운 부분이고, 보들레르의 우울이다. 시간의 과다함이란 게으른 자의 특권이기도 한다. 아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시간이 있다구! 자 빨리 사용해버리자!

 

....

 

축적한다는 것은 결국 시간을 한쪽으로 치우는 일이다. 모래시계에 모래가 쌓이듯 말이다. 참, 시간에 시간을 더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멈출 수 없는가?

나와 함께 달리는 군중 때문이다. 내가 서버린다면 나를 밟고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시장이 군중현상의 결과라는 케인즈의 발견은 위대하다.

- 앞서 보았듯 경쟁이란 함께 달리는 것이다.

-경쟁이란 또한 함께 요청하는 것이다.

-투기란 서로를 무한정 바라보는 것이다. 수많은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무한히 반복되듯이.

 

 

 

p.56

 

시간의 세속화는 노동의 해방을 낳았다. 이제 노동은 가치일 뿐 아니라 가치를 생산하는 요소로 인정되었다. 이제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시간이 속한다면, 눈물의 계곡에서 고통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동시간에 가치를 부요하는 것이었다. 삶이 강요하는 수많은 복종과 불행에도 우리는 인생을 사랑하는 척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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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6 11:41 2010/02/26 1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