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삼성노동인권지킴이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쏩니다.

삼성노동인권지킴이가 영화 < 또하나의 약속>을 쏩니다.

그동안 영화를 보고 싶으셨는데 못 보셨던 분들 많이 많이 와 주세요. 선착순입니다. 빨리 신청하세요.

 

일시 : 2014년 2월 17일 20시 10분

장소 : 광화문 인디스페이스

 

참고 : 영화 속 실제 주인공 황상기 아버님(박철민 분)도 오십니다.

 

신청은 slw20131210@gmail.com 으로 해주시면 됩니다. 연락처(휴대전화번호) / 이름 / 필요한 인원(1인 2매까지) 적어서 신청해주세요.감사합니다.

 

문의 02-3667-1210 삼성노동인권지킴이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828224077203043&set=a.662408683784584.1073741826.100000463766072&type=1&theater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화려한 성과급! 삼성노동자는 인간의 권리에 배고프다

화려한 성과급! 삼성노동자는 인간의 권리에 배고프다

 

 

삼성노동인권지킴이-조대환-

 

매년 이때 쯤, 초미의 관심사는 삼성에서 얼마의 성과급이 지급될 것이냐다. 매년 수천만의 성과급 잔치를 벌이는 삼성 노동자들의 모습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반도체 사업부는 올해도 어김없이 2013년 실적을 바탕으로 연봉의 40%에 해당하는 성과급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과장급의 경우 2000만원 이상 받게 된다. ‘성과급 잔치’ 보도를 보면 일반 노동자까지 몇 천 만원씩 받는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언론보도를 꼼꼼히 살펴보면 성과급의 수준은 임원들과 직원들을 모두 포함하는 액수다. 직원의 경우에도 고액연봉의 간부까지 포함해서 평균을 낸 것이기 때문에 실제 생산현장의 노동자들이 받는 성과급은 이보다 훨씬 적을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기업에 비해서 여전히 삼성노동자들의 임금총액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통상임금 문제에서도 드러났듯이 대부분 기업은 기본급에 포함시켜 지급해야할 임금을 성과급이라는 이름으로 지급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치 수천만 원의 ‘꽁돈’이 생긴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들에게 당연하게 돌아갔어야 할 미지급 임금인 셈이다. 2006년 2월 2일 조선일보 보도에서조차 성과급을 제외하고 따졌을 때 삼성전자의 대졸 초임 연봉은 조사 대상기업 중 221위에 그쳤다.

 

또한, 삼성은 유독 성과급의 형태가 다양하고 복잡하다. 제아무리 삼성노동자라고 해도 기본급으로 살 수 없고, 심지어 다른 기업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낮은 경우도 있다. ‘화려한 삼성맨’은 낮은 기본급을 성과급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이 성과급을 놓고 노동자 사이 무한경쟁을 하도록 조장한다는 사실이다. 언론에 보도되는 성과급을 모두가 공평하고 공정하게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회사 내 수많은 부서와 분야, 작업장의 부서별, 조별 등급을 매겨서 성과급을 차등적으로 지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조건으로 노동자들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당하고 있다.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할 수도 없고, 반인권적, 비인간적인 인사조치와 노동탄압에도 저항할 수 없게 만든다. 실제 최근 한겨레 신문은 삼성반도체 생산라인에서는 조별 경쟁 때문에, 식사도 거르고 화장실 가는 것도 참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한겨레 2014. 1. 6)작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이 얼마나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에버랜드와 같은 서비스 업종에서는 고객의 비인격적 대우와 욕설을 감내해야 한다. 회사의 잘못된 방침으로 발생한 문제도 노동자가 처리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이 발생해도 회사는 모른 체하는 것이 다반사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이 받는 정신적 심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불만을 제기하거나 고객응대에서 불만사항이 접수된다면 성과급에서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전부 감내해야 한다.

 

삼성내부에 경쟁과 성과주의는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부인하게 만드는 악랄함이 있다. 여성노동자가 생리휴가를 쓸 권리, 몸이 아파서 조퇴할 권리를, 다른 노동자들의 노동강도 때문에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는 다른 사업장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내부경쟁과 성과주의는 삼성처럼 고액의 성과급을 미끼로 1년 내내 경쟁과 성과측정을 하는 곳에서는 '노동강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차원의 권리 억압적 요소인 것이 분명하다. 연말 성과급이 나로 인해 '우리'가 성과급에서 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가 노동자들의 반인권 상황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은 단결권 단체교섭권을 부정하는 삼성의 반노조 경영방침과 결합하면서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반올림의 자료를 인용한 오마이뉴스 보도(2013년 12월 18일)에 따르면 삼성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으로 의심되는 질환을 앓고 있거나 사망한 노동자의 숫자는 모두 138여명을 넘어서고 있다. 사망자만 해도 56명이다. 지난해 세상이 떠들석했던 'S그룹 노사전략'에는 매년 자살자가 00명 수준이기 때문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도 나온다. 삼성 내부에 두 자리 수 자살자가 일상적으로 존재한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극단적인 경쟁과 성과주의가 노동자들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는 자료다. 이 두 가지 수치는 노동자들을 성과와 경쟁으로만 내몰면서 기본적인 노동인권을 보장하지 않는 삼성의 경영방침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 사회와 언론이 눈여겨 봐야할 것은 삼성의 성과급이 얼마인지가 아니라 삼성의 성과급 속에 노동자들의 노동인권이 얼마나 실종되고 있는지 여부다. 화려한 성과급 잔치 뒤에서 여전히 삼성노동자들은 기본적인 노동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삼성의 고액 성과급 정책은 화려한 성과급보도를 통해서 삼성에 노조 없이도 고액연봉을 받는다는 허위의식을 퍼트려 세상 사람들과 삼성노동자들을 갈라놓는 교묘한 술수이기도 하다. 사실 삼성이 지급하는 성과급은 과장되고 포장된 측면이 크기도 하다. 다양하고 복잡하며, 임원 및 간부들의 성과급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며, 원래 노동자들에게 지급해야할 통상임금을 후불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노동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과급이 아니라 '경쟁과 성과'의 이름으로 빼앗아간 '인간의 권리'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민주주의와 진보를 역행하는 3자 통합 안을 거부하라

민주주의와 진보를 역행하는 3자 통합 안을 거부하라

 

신자유주의를 용서하는 가!

결국 진보정당은 신자유주의와 동거하는가! 지난 11월 20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통합연대 3자가 통합을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 11월 27일 민주노동당은 당대회에서 90%에 이르는 찬성으로 통합을 확정했다. 1년 넘게 진보진영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을 위해 쌓아 올렸던 탑이 완전히 무너진 셈이다. 이들은 진보진영 대통합과 통합 진보정당 건설을 목표로 두고 2012년 총선 예비 후보 등록일인 12월 13일에 맞춰서 통합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한나라당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중산층의 이해를 대변했다고 하지만 결국 철저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집권동안 한미 FTA 협정을 체결했으며, 미국의 군사 세계화 전략을 그대로 추진하면서, 평택 대추리에 미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주민을 내쫓았다. 제주 강정 해군기지 또한 노무현 정부 당시 확정한 사업이었다. 복수노조 유예, 그리고 노사관계 선진화방안이라는 이름의 노동법 개악 모두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완성된 것이다. 손배 가압류의 대표적 희생자였던 배달호, 김주익 열사의 죽음은 이명박 정권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발생했으며, 스스로 ‘노빠’라고 자랑스럽게 떠버리는 유시민이 바로 그 가운데 있었다. 노동자 민중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하는 민주노동당이 과연 앞으로도 힘없는 노동자 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은 민주당을 비롯한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연합을 반복해왔다. 문제는 그동안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해온 민주노총 등 노동자 민중의 이해관계가 국민참여당과 같은 중도 보수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는 점이다.

국민참여당은 노무현의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계승한다는 점에서나, 국민 참여당 내부에 ‘혁신과 통합’이나 민주당과 통합을 추진하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지 분명하다. 노동자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민주노동당과 중도 보수를 지향하는 범 민주당 세력간의 “계급연합”인 셈이다. 두 계급 간에는 화해할 수 없고 합쳐질 수 없는 강이 있다. 이 두 흐름을 진보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인위적으로, 강제적으로 합치려는 것은 ‘정치공학적 대운하’라고 비유할 만하다. 인위적인 대운하가 생태계에 미치는 파장만큼 이질적인 집단의 정치적 타협이 몰고 올 파장과 폐해가 걱정되는 이유다.

 

국민참여당의 전과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미래에 노동자 민중이 없는 것이 문제다

 

민주노동당은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몇몇 정책에 대해서 유감을 표시 한 것으로 그들이 반성했다고 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또한 진보진영이 통합해야 정권교체가 가능하기에, 통합진보정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를 용서한다고 해도 미래가 쉽게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과거 행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시민과 국민참여당 또 더 나아가 민주당이 담고 있는 진보는 무엇인가? 백번 양보해서 민주노동당이 담고 있는 진보의 미래는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미래가 함께 동거할 신자유주의 세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도달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니 도달한 만 못하다.

 

통합을 앞두고 있는 3자가 공유하는 지점은 오로지 반MB전선과 정권교체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난한 99%를 상대로 이익을 추구하며 무한 질주하는 신자유주의는 결코 "당"을 가려가면서 수렴되지 않는다. 지배 권력과의 결합을 통해서 다양한 형태로 변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그리고 이명박 정권 사이에 차이는 크지 않다. 노동정책의 차이, 복지 수준의 차이, 대북 정책의 강약 차이가 날 뿐이다. 시장 규제를 상대적으로 약하게 하느냐 강하게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노무현을 계승하는 국민참여당의 노동정책이 노무현 정부 정책과 차이 날 리 만무하다. 모두 알고 있듯 노사관계 로드맵은 노무현 정부 시절 작성되어 계속 이어져가고 있다.

 

아니면 최소한 가진 자들의 법인세율을 획기적으로 올리겠다는 계획이 있는가? 부유세나 토빈세를 도입할 의지가 있는가! 노무현의 반 노동자적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가! 지난 정부에서 새만금 사업을 두고 ‘이미 시작된 사업이기 때문에 중단할 수 없다’던 노무현주의자들이, 수 조원에서 수 십 조가 들어가는 4대강 사업을 과연 중단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든 빨아들여 가진 자들, 1%의 이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와 결별하지 않는 한 99%의 미래를 얘기하는 진보정당은 어불성설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민주노조 운동에서 ‘배타적 지지’라는 악법을 통해서라도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왔던 이유는 노동자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 사명을 다할 수 없다면, 노동자․민중․서민의 정당자격을 잃는 셈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새삼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애초 배타적 지지 방침은 뜨거운 감자였다. 그만큼 새로 출발하는 “당”에 배타적 지지라는 특권을 계승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민중 노동조합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정당에게 배타적 지지라는 독점적 지위를 계승해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민주노조 운동이 신자유주의의 세력과 함께 하는 정당을 배타적 지지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을 넘어서, 자기파멸에 가깝다.

노동자 민중을 위한 진보정당이란 노동조합원을 당원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주어지는 자격이 아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노동조합이 지지하는 정당이기 때문에 진보정당이라는 논리 또한 설득력이 없다.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구체적인 방향과 정책을 제시할 때 노동자 민중을 위한 진보정당이라 할 수 있을 게다.

 

3자 통합은 충격적인 현실이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 삼아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에도 대 수술을 가할 필요가 있다. 이제 정치의 주도권을 “당”이 아닌 현장으로 가져와야 한다. 노동조합이 의회에서 표를 찍을 수는 없지만, 어떤 의원, 어떤 정당에게 투표할 지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은 있다.

 

어제의 친구가 신자유주의와 한 배에 오른 지금,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왕성한 정치활동으로 반 신자유주의를 분명히 한다면 그 배는 심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나눠져 있던 시기에 노동조합에서는 “둘 다 비슷해서 현장에 어느 당을 지지해야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힘드니 통합하라”고 하소연 했다. 이 말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색깔의 차이가 없다는 의미기도 했지만, 바꿔 말하면 노동조합 스스로 정치적 지향이 불분명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노동조합이 분명하게 갈 길을 간다면, 노동자 민중에게 표를 얻고자 하는 정당 스스로 더 나은 정책, 더 계급적인 입장을 밝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민주노총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주노조 운동이 신자유주의와 동거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 출발은 어렵지 않다. 애초 원칙도 없었던 정치방침이자, 이미 효력을 상실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는 것에서 출발하면 된다.

 

지금 민주노총에 필요한 것은 특정 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다른 모든 것에 우선에서 배제한다는 원칙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배타적 배제를 천명한다면 노동조합에서는 다양한 진보정치와 연대 연합하는 것은 물론 선택의 폭도 넓어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2011년 12월 1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포이동 화재 이후2

포이동! 화마가 쓸고간 자리에 다시 희망의 기운이 넘쳐나길 바라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포이동 화재 이후

포이동 화재 이후 포이동 지지방문단이 6월 19일 방문했습니다.

참혹한 화재 현장에도 그곳에는 여전히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지켜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지금 더 큰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

 

그들이 민중이고 우리 이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화재 현장에도 여전히 망루는 건재하며, 삶의 공간이 사라졌지만 삶의 터전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강남구는 포이동 주민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이곳은 서울 강남구 포이동이며, 암울하고 참혹한 빈민의 역사입니다.

정당하고 당당한 주거군을 보자하는 포이동 주민들의 요구는 화재 전이나 후,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배불리 먹지 못하는 공산주의는 반쪽 공산주의이듯,

이웃의 눈물에 관심가질때 참다운 진보의 가치도 확산될 것입니다.

 

그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 바로 우리의 연대와 관심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언제부터 노동자신분 세습이 질투 받았을까?

[인권 '제로섬-게임'을 넘어]

언제부터 노동자신분 세습이 질투 받았을까?

 

 

 

조대환(이윤보다인간을 집행위원장)

 

 

사농공상과 노비에서 노동자 계급으로!

신분을 넘어설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신분을 탈출하는 것은 고사하고, 신분간의 사랑에도 모진 형벌이 가해졌다. ‘사농공상’과 거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군상들의 삶은 인간 이하였고, 인간이기 위한 탈출의 몸부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신분의 벽이 무너진 것은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신분이 폐지되었다고 해서, 계급마저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근대 이후의 밑바닥 신분은 노동자 계급이 차지했고, 인간 이하의 이들은 언제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기도 했다. 심지어 노동자로 불러지지도 못하고 ‘공돌이’, ‘공순이’로 불러졌으니 말이다. 계급적인 관점에서야 ‘노동자’가 자랑스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계급투쟁적인 관점이고, 힘의 관계에서 여전히 우위에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누구도 노동자란 불림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 게다. 하물며 자기 자식이 노동자로 살길 원하는 부모가 어디 있었겠는가?

 

어찌 보면 우리 모두 ‘홍길동’이었는지 모른다. 부모가 노동자인 것은 말하기 부끄러워하고, 자식이 자기와 다른 신분을 얻길 원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가 미치도록 교육에 투자 했을 터다. 신분의 탈출은 본인의 노력과 함께 신분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노력이 결합되었던 것이고, 자식 대에 마저 무능과 노동자 인생을 물려주는 것을 주위에서도 달갑게 보지 않았던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우리네 모습이었다.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 ‘신분굴레’ 마저 시기하는구나!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 신분의 세습과, 천한 노동자 신분의 세습을 시기하고 질타하는 진풍경을 만나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유명한 장관 자녀의 특채야,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판이 어울리기도 하거니와, 지배 계급의 이런 신분 세습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터!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을게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자녀들이 정규직에 응시할 때, 가산점을 부여하는 요구안을 제시했다고 해서 말이 많다. 이른바 특혜채용이라는 주장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현대 자동차는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 정규직 노조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않은 곳은 없다.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자기들만의 이익추구에 여념이 없는 현대차 노동조합을 비난해 왔던 터라 이번 사건은 또 한 번 도마 위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슬프지만, 유래 없는 고용불안 청년실업의 시대에 현대자동차가 도를 넘어선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은 좌우를 넘나들며 시대를 공감(?)할 수 있는 ‘아이콘’이다. 이 비판에서 현대자동차 노조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그동안 현대자동차 노조가 보여준 모습은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만 챙기기 위한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0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라는 대법원 판결’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에 대해서도 정규직 노조가 미온적으로 대처한 사례가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자동차가 사회적인 문제와 동떨어져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비판은, 좌파적 입장에서야 십분 공감하게 된다.

 

노동조합이 사회적 의제에서 멀어지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투쟁에 함께하지 않을 때 노동조합은 이익집단으로 전락해온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과는 절대 연대하지 않고, 자기 밥그릇 지키는데 급급해 하는 노동조합의 모습은 결국 정권과 자본의 의도대로 움직여지는 꼭두각시 노조로 가는 수순일 뿐이다.

 

그렇지만 현대차 노조를 비판하는 사회여론은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보자면 낯설기 그지없다. 보수언론이 주도하는 비판의 핵심은 결국 노동자가 자식에게 노동자 신분을 세습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 천한 신분의 ‘내리 흐름’을 특권이자 최악의 이기주의라는 게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의 신분을 세습할 경우 과연 어떤 삶을 살까? 2008년 기준 현대자동차 생산직 초임은 115(기본급)만원이었다. 생산직 전체 평균 기본급이 158만원이었다. (한겨레21 794호 참고) 얼마 전 만난 현대차 전주공장의 40대 노동자는 “지난 달에 일을 별로 못했더니 110만원 나왔다”고 했다.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물론 수당을 합치면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주야특근에 개인의 삶이 없고 골병드는 댓가에 비할 수 있을까!

 

비천하고(?) 고된 삶을 대물림하겠다는데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코메디다. 이런 현상은 그만큼 민중들의 삶이 고되다는 증거다. 월급이 많건 적건 그렇게 일할 수 있는 행복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느냐는 비판이 들려온다.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파업에 대해서, 그 조건이면 나는 군말 없이 일하겠다며 파업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자식에게 같은 삶을 물려주겠냐고 묻는다면 아마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이글을 쓰는 이유는 현대 자동차 노동조합을 두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대 자동차 노조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비판꺼리가 많다. 현대차 정규직 노동조합에 대해서 “함께 살자”는 가치가 없다고 비판한다면야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최근 벌어진 논란은 그런 의미 있는 비판은 아니었다. 시기이자 질투지만, 막연한 시기와 질투로 매도할 수 없는, 빈곤과 불안으로 몸부림치는 대중의 절규다. 그렇기에 슬프다.

 

이제 권력자와 가진 자들은 맘이 편할지 모르겠다. 노동자들은 신분을 넘나들지 않고 그 자리를 세습하겠다고 한다. 감히 가진 자들, 권력 있는 자들의 경계선 안쪽으로 얼씬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제 사법고시 합격률에서 강남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는 뉴스는 뉴스가 아닐지 모른다.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다는 조소조차도 사라질지 모른다. 거기에 같은 노동자들끼리, 가진 자들이 보기에 미천한 신분을 서로 갖겠다고 공격하니 말이다.

 

노동하는 것이 부끄러워 세습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현대 자동차 노조는, 고통스러운 대중의 현실을 어떻게 끌어내야할지 몰랐다. 자신도 고통스러웠던 그 착취의 굴레를 자식 대까지 물려주겠다는 그 순진함이 문제일 뿐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은 계급을 물려주는 것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서 그것이 깨질 때 해소될 뿐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 기억해야 한다.

 

계급투쟁은 현재 더 많이 나누기 위한 것이고, 후대에 더 나은 삶을 물려주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따라서 현대 자동차 노조의 결정은, 고통 받는 계급과 함께 현실의 착취를 끝내는 연대와 나눔의 투쟁에 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착취당하지 않는 삶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계급투쟁에 역행한 것이다.

 

아울러 현대자동차 노조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비판하지 않는 현실은, 노예의 삶을 서로 차지하겠다는 아귀다툼에 지나지 않는다. 2011년 현금 배당금으로 정몽준이 574억 7천만원, 이건희 510억 8천만원, 문제의 현대자동차 회장 정몽구 399억 4천만원을 받았다. 이런 사회에서, 하루 12시간 휴일마저 반납한 노동의 삶을 물려주겠다고 하는 쪽이나 그것을 특혜라고 비판하는 쪽이나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소롭지 않겠는가!

 

현대 자동차 노조여! 당신들이 가진 특권(?)을 반성하지 말고 노예의 삶을 자식 대까지 물려주겠다는 순응을 반성하라. 자식의 미래가 걱정되거든 계급을 유지하지 말고, 철폐하라!

2011. 4. 25

<이상>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프 강좌 연습 ㅜㅜ

김프 강좌 숙제.

흠 웹자보라 언제 제대로 만들까? 어째든 숙제는 해야지요.^^;

 

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우리가 너희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면

[인권 : 제로섬 게임을 넘어서]

우리가 너희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면

 

 

하이하바

 

공 공재산의 손해란 무엇을 이야기할까? 공공건물의 손해일 수도 있고, 공기업이나 국가기관의 수익사업에서 손실분이 커지는 것을 말 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공공의 영역은 많은 사람과 접촉하기 때문에 다양한 이해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은 언제나 사회를 유지하려는 입장으로 다양한 사회정치적 입장을 차단하고 조절한다.

당연하게 이 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즉 경찰이나 국가권력이 다양한 민의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은 국가가 가져야할 당연한 자기비용이자,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회적 비용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에게 책임지울 수 없는 영역이다.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정치행위가 사회로 표출되어서 하나의 공동행동을 만들어 낼 때는 그것은 사회적 공동체이며, 그에 대한 결과 또한 사회적 비용으로 충당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권력의 경우, 감정이나 손익을 실제 경험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게 지배질서를 대변해 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런데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최근 들어 공권력이나 공공기관은 스스로를 감정의 주체, 손익의 주체로 행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발휘되는 공간이 사회적인 의견전달과 정치적 행위 과정이라는 점에서 충격이 크다. 바로 경찰이 다양한 집회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 장비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혹은 시위 주최 측에 대해서 서울광장 관리비용에 대한 청구 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난해 촛불 시위에 대해서도 경찰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상황에서 본격화되었다. 2008년엔 경찰이 광우병대책위에게 3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는가 하면, 2009년 6월 하이서울페시티발 행사 문제로 서울시는 9명의 시민에게 2억 3천500만원을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밖에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2007년 민주노총 집회나 이랜드 홈에버 투쟁에 대해서 경찰이 수 천 만원씩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했다.

이 런 국가권력의 행동은 국가공권력을 사인화 시키면서 감정과 손익의 주체로 삼고자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결국은 집회시위와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다. 사회적 소통의 과정에서는 충분히 예기치 못한 충돌과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을 전제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을 담당하는 주체가 공적 인격이 아닌 개인적 인격의 담지자로 기능한다면 공적 체제와 민주주의 의사전달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의 책임은 철저하게 개인이 지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국가기관은 스스로 가진 공적 인격을 거부하는 셈이다. 이렇게 공적 인격의 거부를 하고자 한다면 국가기관 스스로가 답해야하는 문제가 있다.

 

11.jpg

<사진출처 : 한겨례신문>

그 질문을 하기 위해서 여기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얼마 전 민족일보 사건에 대해서 법원이 배상판결이 나왔다. 유신정권에서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작사건과 불법살인이 최근 새로운 심판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한 많은 사람들이 진실과 명예를 회복하고 있으며,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을 받고 있다. 민족일보 사건의 경우 아직 1심 사건이지만 99억 원이 배상 판결이 났다. 이미 얼마 전에는 인혁당 사건에서는 8명의 유가족에게 배상금 245억 원 및 이자 392억 원을 포함하여 637억 원을 지급하라고 법원이 판결이 완료되었다.

이 밖에도 경찰과 검찰 그리고 정치 판사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살인과 감금에 대해서 국가 배상 판결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 렇게 배상해야할 천문학적 돈은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배상에서 과연 또 다른 공동의 피해자였던 국민의 책임이 있는가? 권력을 찬달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인권유린을 직(간)접적으로 지시한 정치 지도자들, 불법, 위법적 행위를 막론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른 수사관들 및 검찰과 경찰 등 공안 기관들, 정치적 조작사건이며, 헌법에 위배되는 사항인걸 알면서도 국가권력의 시녀역할을 했던 법원이 실질적인 범죄자들이다.

그렇다면 결국 배상의 실질적 책임은 이들에게 있다. 만일 국민들이 이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천문학적 보상금을 국민의 세금으로 내야할 하당의 의무가 없으며 위법과 가해행위의 실 주체인 검찰, 경찰, 법원 (혹은 그 구성원)이 국가 재정과는 별도로 책임을 져야 한다. 단 경찰이나 국가권력이 지금처럼 국가권력의 공적 손해를 공적 비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적 개인으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말이다.

경 찰의 시위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소재를 묻는다는 포장으로 싸여 있다. 그러나 이 비용은 사실상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민중의 정치행위를 차단해온 경찰과 국가권력의 불법행위가 원인으로 발생한 비용일 뿐이다.

민 주주의라는 진행형의 정치행위에서 다양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불법과 폭력으로 왜곡해서 차단하는 국가와 경찰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모든 민주주의 이행의 과정, 헌법질서의 이행과정에서도 비용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쌍용자동차를 바라보는 사회적 자세

쌍용자동차를 바라보는 사회적 자세

:폭력과 갈등의 쌍용자동차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7월 22일에는 경찰은 4일째 공장 안으로 진입해 농성중인 노동자들과 충돌했다. 그날 저녁 공장 진입에 맞서던 노동자의 얼굴에 테이저 건으로 추정되는 철심이 박혀 긴급한 치료와 이송이 필요했으나 회사에서 119와 의료진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쌍용자동차 문제는 노동자와 회사 그리고 정부 사이에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명예퇴직한 직원의 자살이 이어졌고, 얼마 전에는 농성 중이던 노동자의 아내가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첨예한 대립과 노동자들의 고립 상태에서 공권력 투입할 경우 자칫 처참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불을 보듯 뻔 한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 25일에는 쌍용 사측이 일방적으로 협상을 거부해 사태를 더욱 더 파국으로 몰아가는 중이다.

 

지금까지 쌍용자동차는 물론이고 대부분 산업에서 노동자들의 경영참가를 인정한 적은 없다. 이 말은 결국, 현 쌍용자동차의 부실 책임은 쌍용자동차 사측에 있다는 얘기다.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쌍용 자동차는 이 문제를 노동자들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중이다. 철저한 자본주의 논리로 치자면 쌍용자동차는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을 온당하게 스스로 져야 한다. 그러나 회사가 공중분해 되지 않고, 법정관리를 받는다는 것은 쌍용자동차 문제가 결국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함에도 사측과 일부 언론에서는 노동자들만이 반사회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자신들의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은 뒤로 숨기고 있다.

 

자동차 산업은 거의 포화상태다. 따라서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일 게다. 그러나 그 기본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여력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실업율이나, 경제성장율과 같은 수치로 판단할 수 없는 전 사회적이고 장기적인 사회적 자산을 상실하게 된다. 이 사회적 자산은 그 사회가 어떤 생산체제를 가지느냐와 별개로 항상 중요시 되어야 할 문제다.

 

언제나 그렇듯이 구조조정이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만을 강요한다면 노동현장에는 영원한 ‘적’만이 있을 뿐이다. IMF 이후에 노동자들에 대한 일방적 구조조정의 칼날은 수많은 노동자를 거리를 내몰았다. 97년 당시의 정리해고는 노동자들의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마저 거리로 내몰 정도로 참혹했다. 그와 같은 영혼의 유린 속에서 노동자들이 배운 것 중 하나가 ‘가족 같은 회사,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보장하고 평생 일자리를 약속하는 회사’는 없다는 의식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런 배움이 어떤 상황에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공포심으로 나타났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동자들의 연대를 약화시켰으니 유효적절한 성공이었겠지만, 사회적 입장에서 보자면 공존과 공동체라는 커다란 사회적 자산의 유실이다.

 

자본을 위한 합의가 아닌 사회적 자산을 남기기 위한 합의와 협력은 이제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정리해고에 반대해 싸우는 967명의 노동자들은 지금까지 쌍용자동차의 일부였다. 그들이 주장했던 정리해고 없는 임금삭감, 교대제, 일자리 나누기 등은 강경하고 원칙적인 노동운동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노동운동 내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자구안은 회사와 정부 측에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쌍용자동차는 애초 사측이 제시한 2,670여명 혹은 그에 상응하는 정리해고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결국 순차적으로 해고라는 살인은 반복될 것이며, 생존권을 상실한 노동자들은 사회라는 공동체에서도 영원히 추방되는 공포를 보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공포가 전 사회에 만연하게 되리라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이미 구성원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마주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나의 삶을 위해 동료를 저버리는 행위는 결국 미래의 표적이 되기 위해 앞서서 달려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지금 정부와 쌍용자동차 사측이 대화를 거부한 채 일방적인 정리해고와 공권력 투입을 준비하는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살인 이전에 사회결속에 대한 거부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 ‘경쟁만이 최고’ ‘승자독식’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 불투명한 자본주의 기대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회적 자산, 공동체라는 우리 모두의 사회를 유린하고 있지는 않은가?

 

◈◈◈◈◈◈◈◈◈◈◈◈◈◈◈◈◈◈◈◈◈◈◈◈◈◈◈◈◈◈◈◈◈◈◈◈◈◈◈◈◈◈◈◈◈◈◈◈◈◈◈◈

 

 

성공론

체게바라

 

노동자들이여,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

자본가들이여,

열심히 착취하면 성공한다!

 

그 노력과 착취로 성공한 대가가 바로

굶주림과 불평등으로 얼룩진 이 세상이다

독재와 제국주의가 사라지지 않은 성공은

어떠한 행복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 성공은

남의 실패를 짓밟고 올라온 성공이요, 그 행복은 남의 불행을 짓밟고 올라온 행복일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쌍용자동차 고공농성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독립문 앞 고가도로에서 정리해고 철회, 공권력 투입 반대를 외치며 고공 농성 중이다. 이 노동자는 곧바로 구조대가 아닌 경찰에 의해서 쫓기다 고가도로 아래로 떨어졌다.(2009년 7월 23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