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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떠오르는 시신 생각, 그래도 버텼다

[인권이즈커밍⑪] 고은지 난민인권센터 활동가

17.11.07 09:55 | 글:선대식쪽지보내기|사진:이희훈쪽지보내기|편집:최유진쪽지보내기

여기, 인권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이들 덕분에, 인권은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작 그들의 삶은 험난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암과 투병하고, 구치소에서 노역을 하기도 합니다. '인권재단 사람'과 <오마이뉴스>는 인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인권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 고은지 난민인권센터 활동가 ⓒ 이희훈

문 앞에 버려진 삼촌의 시신.

고은지씨는 길을 걷다가, 불현듯 이 장면이 떠올랐다. 너무 괴로웠다. 언젠가는 깊은 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꿈에서 온갖 고문이 자행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떨쳐내고 싶었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니, 떨쳐낸다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또 다른 장면이 떠오를 테니까. 납치, 고문, 살해와 연결되는 장면과 이미지는 이미 그의 삶에 깊숙이 스며든 지 오래인 탓이다. 

고은지씨는 난민 인권활동가다. 활동가들은 난민들이 고향 나라에서 겪은 일을 꼼꼼하게 정리해야 한다. 끔찍하고 잔인한 사연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 쌓이다보면, 2차 트라우마로 이어지기 쉽다. 활동가 숫자가 부족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환경에서 일해야 했던 난민활동가들은 트라우마를 예방하거나 쉴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보장받기 힘들었다. 많이들 그렇게 떠났다. "마의 3년이라고 해요." 은지씨의 말은 이어진다. 

"지금까지 많은 동료들을 떠나보내며 마음이 찢어졌어요. 1세대 난민활동가들이 활동가의 안전이나 행복을 고민하는 데 부족했기 때문이에요. 활동가들을 보호해야 난민 인권 활동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남은 동료들과 활동가 보호 체계를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했어요."

은지씨는 스스로 트라우마를 이겨내야 했다. 또한 난민 인정 비율이 1.54%(2016년 난민 지위 심사 대상자 가운데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의 비율)에 불과한 현실 속에서 무기력감을 감내하는 일도 견뎠다. 난민으로 인정받아도 한국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보면서 좌절감도 느꼈다. 그래도 은지씨는 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2011년 처음으로 1000명을 넘은 난민 신청자 숫자는 지난해에는 7542명에 달했다. 우리는 분쟁과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머나먼 나라를 찾은 사람들을 외면해도 되는 걸까. 은지씨를 비롯한 소수의 난민활동가들만이 "노(No)"라고 외치고 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었다
 
▲ 고은지 난민인권센터 활동가 ⓒ 이희훈

"왜 난민 활동가가 됐나요?"

은지씨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자, 그는 기자를 20년 전의 초등학교로 데려갔다. 은지씨는 1987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일본에서 일하는 한국인이라 그 역시 한국인이었다. 7살 때 부산의 할머니 집으로 왔다. 한국말을 잘 못했지만, 유치원을 다니고 이듬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한국말이 서투른 은지씨를 놀렸다.

"친구가 놀다가 '쟤는 일본에서 왔으니까, 쟤 빼고 놀자'라고 말했어요. 누군가는 '일본X'이라고 욕하면서 지나가기도 했어요. 저는 제가 태어난 곳을 숨겨야 했어요.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배제되고 경계 밖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한국어를 완전히 배워, 놀림을 받지는 않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갈등을 느꼈다. 그는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늘 의문을 품고 살았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기로 했다. 2008년 4월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봉사활동을 위해 방글라데시로 향했다. 주변에서 그를 말렸고 은지씨 역시 망설였지만, 결국 비행기에 올랐다. 

방글라데시의 첫 인상은 은지씨에게 충격이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버려진 아이들, 장례 치를 돈이 없어 거리에 방치된 시신을 봤어요. 그리고 위험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10년 감수했네'라는 말을 쓰잖아요, 그곳에서는 '지본 베레게체'라는 말을 써요. '삶이 늘어나버렸다'라는 뜻이에요. 그들에게 삶은 고통스럽고 빨리 끝내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들은 본인이 선택한 것도 아닌데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런 삶을 사는 거죠."

고민이 깊어갈 무렵, 휴가를 받아 인도 다즐링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 난민을 마주했다. 

"우연히 티베트 난민 공동체에 갔어요. 티베트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겪고 이곳으로 오게 됐는지를 알려주는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었어요.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사진 한 장이 있어요. 중국 공안이 티베트 승려를 총으로 겨누는 장면이에요. 삶이 송두리째 뽑혀 다른 나라에서 삶의 터전을 찾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난민의 존재를 알게 되니, 방글라데시의 난민도 눈에 들어왔다. 불교를 믿는 소수민족인 줌머 족이었다. 이 나라의 남쪽 치타공 지역에 살았던 줌머 족은 이슬람국가인 방글라데시 다수 족인 벵갈인들의 박해 탓에 산악지대로 밀려나 살고 있다.

은지씨가 봉사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줌머 족 친구를 통해 그들이 처한 현실을 깨달았다. 

"친구가 제게 연락을 해서, 누군가 옆집에 불을 질렀다고 했어요. 제가 그 마을에 가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사는 게 안전하지 않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했어요. 단지 생김새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다는 게 너무 화가 났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겪은 일도 떠올랐어요."

난민을 마주하다
 
▲ 고은지 난민인권센터 활동가 ⓒ 이희훈

2009년 12월 1년 8개월의 방글라데시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난민으로 가득 찼다. 전 세계에 수많은 난민이 있고 무엇보다 한국에도 난민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2011년에는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있는 인도 맥그로드 간즈에서 한 달 동안 머무르면서, 어떤 확신이 섰다. 

"그리운 고향에는 더이상 갈 수 없지만, 여전히 티베트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봤어요. 자신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겼는데도,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 모습을 보고, 남은 삶을 난민 인권 활동에 쏟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은지씨는 난민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고, 2012년 3월 난민인권센터에 들어갔다. 난민들이 우리나라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맡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기력, 좌절감과 싸워야 했다. 은지씨는 A씨 이야기를 꺼냈다.

A씨는 고향 나라에서 정치·종교적인 이유로 살해 위협을 받았다. A씨는 우리나라로 도망쳤다. 1997년의 일이다. 몇 년 뒤, A씨는 정부에 난민 신청서를 냈다.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의신청 절차 고지가 없었다. A씨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숨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미등록 외국인의 삶을 살았다.

은지씨는 2012년 A씨를 만나 난민 신청서 제출을 도왔다. 하지만 미등록이라는 이유로 교도소와 마찬가지인 화성 외국인 보호소에 구금될 위기에 처했다. 은지씨가 보호소 담당자에게 "A씨는 1997년 당시 난민 신청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라고 호소했다. 소용없었다. A씨는 2년 동안 이곳에 구금됐다. 은지씨는 그곳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같은 상황에 처했던 A씨의 친구는 영국에 갔는데, 6개월 만에 난민으로 인정받았어요. 지금은 잘 정착해서 살고 있어요. 영국에 간 친구는 운이 좋았던 거고, 한국에 온 A씨는 운이 나빴던 거죠. 구금된 뒤, 얼마나 무기력감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다행히 A씨는 난민으로 인정받았어요. 첫 난민 신청 이후 18년 만의 일이었죠."

은지씨는 난민을 도와 국가와 싸워야하지만, 내부와도 싸워야 한다. 난민을 돕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한국을 찾은 난민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다. 

"난민 활동가들이 최소한의 인권 의식을 가졌으면 해요. 그래야 많은 활동가들이 좌절하지 않고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HIV 감염인, 에이즈 환자, 성소수자들을 돕는 분들과 만나, 소수자 네트워크를 만들었죠."

난민 인권 최후의 보루
 
▲ 난민인권센터를 방문한 한 청년과 상담을 하고 있는 고은지 활동가 ⓒ 이희훈

은지씨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제 길을 가고 있다. 강제송환을 막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맡고 있다. 난민에게는 마지막 희망인 셈이다.

"어떤 난민이 난민 신청 결과를 받으러 갔는데, 실종이 된 거예요. 알고 보니 인천공항에서 강제송환 직전에 있었어요. 주말 밤이었는데, 그때 이륙하는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는 모든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어요. 난민인권센터 전체가 비상사태였죠. 강제송환은 급하게 막았어요. 이분은 운이 좋았지만, 저희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강제 송환된 사람들은 더 많이 있겠죠."

은지씨는 난민을 향한 왜곡된 편견을 깨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우리 사회는 난민을 불쌍하거나 위험한 사람으로 여긴다. 심지어는 난민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마른 여자 연예인을 향해 쓰는 '난민팔뚝'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은지씨가 난민들이 쓰는 에세이를 시민사회에 공유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유다. 

난민인권센터에 소속된 난민 활동가로 산 지 6년째다. 그동안 많이 지쳤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은지씨는 초등학교 때 태어난 곳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겪은 일을 생각하며, "난민 문제는 나의 문제"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난민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낯선 존재예요.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인권 침해와 동떨어져 있지 않아요. 난민들이 한국에서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난민이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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