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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청산 정국은 정당들에게 무엇을 남겼나

적폐청산 정국은 정당들에게 무엇을 남겼나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입력 : 2017.11.19 09:58:00

 

11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특별위원회 제1차 예산안 등 조정소위원회에서 백재현 위원장 등 의원들이 회의를 시작하고 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이날 예산안 조정 소위원회 첫 전체회의에서 내년 부처별 예산안 심사에 돌입했다. / 권호욱 선임기자

11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특별위원회 제1차 예산안 등 조정소위원회에서 백재현 위원장 등 의원들이 회의를 시작하고 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이날 예산안 조정 소위원회 첫 전체회의에서 내년 부처별 예산안 심사에 돌입했다. / 권호욱 선임기자

 

적폐청산은 촛불시민들의 바람이었다. 바람을 탄 칼날이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청와대와 검찰이 주도한 적폐청산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검찰이 남재준·이병기 전 국정원장, 김관진 전 국방장관을 구속하고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등 친박 핵심 의원들에게로 수사대상을 확대한 동시에 비서진들이 비리에 연루됐다는 의혹으로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사퇴했다.

청와대는 반부패 수사에는 성역이 없다는 원칙을 내세웠지만 적폐청산만 집중하기에는 어려운 일이 됐다. 정권의 명운을 좌우할 다음 전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케어’(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 대선 공약을 실현할 예산정국을 앞두고 각 정당은 전열 재정비에 나서고 있다. 길게는 촛불 때부터 1년, 짧게는 선거 이후인 지난 6개월간 몰아쳐온 적폐청산의 바람은 대선 후 각 정당의 재정비에도 깊은 흔적을 새겼다. 한국당에는 ‘생존위협’을,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에는 ‘존재감 상실’을, 민주당에는 ‘높은 지지율과 더불어 청와대 종속’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남긴 정국으로 요약할 수 있다.
 

 

■‘친홍’과 ‘반홍’으로 급속 재편 

“육참골단(肉斬骨斷)이라더니, 지독한 사람들이구나 싶습니다.” 한 자유한국당 관계자는 전병헌 전 수석의 사퇴 소식을 두고 ‘내 살을 베어주면서 상대방의 뼈를 끊는다’는 사자성어를 인용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통이나 희생도 감내하는 지독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쓴 이 사자성어는 홍준표 한국당 대표의 지난 7월 3일 당대표 취임 일성이기도 했다. “육참골단의 심정으로 당을 혁신하겠다”고 한 홍 대표는 약 3개월 만에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명했다. 친박 핵심 의원인 서청원·최경환 의원의 제명도 거론되고 있다. 한국당에게도 베어낼 살덩어리는 ‘박근혜 정권’이었다. 홍 대표는 지난 1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국회 및 중앙·지역당 사무실에 이승만·박정희·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걸도록 지시했다. 보수우파의 적통을 잇는다는 의미다. ‘적폐세력’으로 규정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은 호적에서 판 셈이다. 제명 등의 조치에 반발하는 당내 친박세력에 대해서는 ‘잔박’(박근혜 잔당)이라는 별칭까지 사용했다. 

 

한국당 관계자는 “당의 사정은 좋지 않다. 친박세력에 대해서 수사가 진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홍 대표 역시 재판이 걸려 있다”면서도 “보수우파 전체의 명운이 걸려 있는 만큼 결국 당은 ‘친홍’이냐 ‘반홍’이냐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다”고 말했다. ‘적폐청산 정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과거 의원시절부터 여론 동향에 민감하고 친이계로 분류됐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과도 대립했던 홍 대표이니만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적폐청산을 외치는 여론이 한국당에 작동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다. 이병기·남재준 전 국정원장, 김관진 전 국방장관, 안봉근·이재만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이 구속되는 등 검찰 수사가 ‘친박’에 집중돼 있다는 점도 개편을 가능하게 했다. 여론조사 분석업체인 시대정신연구소 엄경영 소장은 “전병헌 전 정무수석과 관련된 댓글에서도 ‘전병헌 전 수석을 쳤으니 더 세게 적폐청산을 해야 한다’는 흐름이 감지된다”며 “이런 강렬한 분위기가 한국당 스스로도 친박을 청산할 기회를 부여한 것”이라고 말했다.

적폐청산 여론이 한국당의 근본적 혁신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한국당의 ‘친박 청산’은 불완전하다. 당장 친박 핵심세력이자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 문제로 검찰 수사대상에 오른 최경환 의원의 제명도 불투명하다. 정우택 원내대표는 13일 “서청원·최경환 의원 제명은 내 임기 내에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바른정당과의 통합 조건으로도 거론됐지만 끝내 결렬됐다. 홍 대표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의혹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재판 결과에 따라 홍 대표의 리더십은 뒤집어질 수도 있다. 당내에서도 홍 대표가 친박 청산을 권력 강화에 이용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강렬한 대여투쟁 불가피한 예산정국 

인적 청산 외 이슈 파이팅에도 여론을 전혀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당이 당론으로 채택한 전술핵 재배치론은 국내외의 보수적인 안보·정치학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정진석 한국당 의원은 1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지키던 북한 병사가 귀순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으로부터 피격당할 때 한국군이 대응사격을 하지 않았다고 “교전수칙 위반”이라고 비판했으나, JSA는 교전수칙이 적용되는 구역이 아니며 오히려 모범적 대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바른정당 의원 일부의 한국당 재입당도 당 지지율에는 큰 시너지 효과를 주지 못하고 있다. 갤럽 조사에 의하면 통합 전보다 2%포인트 오른 14%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한국당은 현 정부를 좌파 포퓰리즘 정권으로 규정한다. 최저임금제, 문재인 케어 관련 예산정국에서 강렬한 대여투쟁을 예고했다.

 

김우석 미래전략개발연구소 부소장은 ‘생존투쟁’이라고 분석했다. 김 부소장은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로까지 확대되면서 존재 자체를 말살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나오며 마찬가지로 상대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생존투쟁’에 빠지는 악순환이 우려된다”면서 “생존투쟁을 예산과 입법을 다루는 국회로 가져오면 문재인 정부의 주요 개혁정책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당에 의해 개혁정책이 좌절되더라도 여론은 문 정부의 실패로 인식하고 지지층이 이탈할 것을 계산한 행보라고 볼 수 있다. 적폐청산의 여론에 밀려 친박 청산까지는 시도하고 있지만 현 정부 흠집내기의 필요성도 높아졌던 것이다. 이 구도는 보수 지지층에게 바른정당보다 한국당을 선택하도록 만든 유인동기가 됐다. 

적폐청산 속도조절은 이 때문에 여당에서 오히려 절실한 과제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예산정국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복지·노동 분야에 대한 개혁 드라이브에 시동을 거는 입장에서 다른 국면을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적폐청산 정국은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은 안정화시켰지만 당의 체질에는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시각도 나온다. 협치 대신 적폐청산이 도드라진 것은 인사정국 이후부터였다. 정부는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특정 인사들을 ‘인사 실패’로 규정하는 야당에 맞서 적폐청산 카드를 본격적으로 꺼내들면서 정국을 돌파했다. 집권 초 설치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의원들을 중심으로 적폐청산위원회 TF가 설치되고 국정감사는 ‘적폐청산 국감’으로 명명할 정도였다. 정국 주도 70% 선을 유지하는 등 안정적인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진 것은 청와대였다. 세월호 보고 시각 조작 등의 이슈가 청와대발로 나왔다. 청와대 홈페이지의 청원사이트도 적폐청산을 응원하는 시민들의 창구가 됐다. 김우석 부소장은 “적폐청산 정국이 진행되는 동안 민주당은 완전히 청와대에 종속됐다”며 “현재 정무수석이 공석인 상황에서 야당들은 청와대에 의견을 전달할 통로까지 사라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10일 오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뒤 정회가 선언되며 자리를 뜨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10일 오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뒤 정회가 선언되며 자리를 뜨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존재감 사라진 중도정당의 전략은 

‘예산정국’을 앞두고 강렬한 여야 대치 상황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정부와 여당 내에서도 나온다. 공약을 실현하는 과정은 적폐청산처럼 박수만 쏟아질 수 없다. 때로는 여론과 대립하는 것을 각오하고 정치하는 문법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탈원전 정책이나 문재인 케어를 예로 들었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핵심으로 하는 문재인 케어나 탈원전 정책의 핵심은 시민들이 비용부담을 더 지는 데 있다. 그러나 여론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보면 보험료나 전기료 인상은 절대 말할 수 없게 된다. 청와대를 향해 직접적으로 쏟아지는 여론에 떠밀려 ‘인상은 없다’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개혁은 좌초된다. 청와대는 이쪽에 대해 말을 아끼고 국회로 논의를 가져가야 하는데 지금까지 해온 방식으로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 조심스럽다.”

 

예산정국이 시작되는 순간 적폐청산과 달리 ‘선악’의 문제나 ‘범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 고민의 핵심이다. 민주당의 한 의원실 관계자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실제로 중소기업들이 지는 부담은 무시할 수 없고, 이 문제와 관련한 야당의 지적에도 타당한 면이 있어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국민의당이나 바른정당 등 제3정당의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다. 최명길 국민의당 의원은 지난 16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한 중소기업의 임금부담을 세금으로 지원해주는 방안에 대해 “최저임금 인상분을 예산으로 보전한다는 전대미문의 발상”이라며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이 추진하는 사회적 참사 해결법에는 협조할 의지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당은 중소기업 인건비 지원 예산안을 7대 포퓰리즘 예산으로 규정하고 삭감 의지를 다지고 있다. 국민의당이 캐스팅보트로서 역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공약 실현 여부가 판가름난다는 것이다. 적폐청산 정국에서 중도성향의 정당들이 존재감이 없었던 상황이라 이 두 당은 예산정국에서 상황을 반전시킨다는 계획이다. 

지난 5월 더불어민주당의 국민의나라위원회와 민주연구원도 이 점을 지적했다. 이들이 낸 ‘신정부의 국정 환경과 국정운영 방향’에서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가 강해질수록 기득권층의 저항이 격화할 수 있다. 또 급진적 개혁 진영은 더딘 개혁을 비판하는 ‘샌드위치 상황’에 놓일 수 있다”며 “개혁 의지를 중심으로 일부 야당과 협력적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 단독정부를 유지한 상태에서 사안별 협력을 추진하거나 국회 내 개혁연합을 구축하는 방안, 통합정부 및 연정 파트너십 방안 등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우석 부소장도 “정권 초 말했던 협치의 정신이 되살아나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적폐청산 정국은 통치의 정상화에 기여했다.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여부는 다음 예산정국에서 드러날 전망이다. 엄경영 소장은 “촛불시민들의 염원은 민주주의의 실질적 개선이었다. 사법권력을 동원한 적폐청산은 시민들이 지지하는 일이었다”면서도 “단 적폐청산이 정치보복이라는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미래지향적 가치와 연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1190958001&code=910100#csidxe860543463be6cc838cac3a7064535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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