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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순씨는 장애인 딸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싸운다

복순씨는 장애인 딸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싸운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입력 : 2017.12.24 09:43:03

 

시각중복장애인 효정양의 엄마 강복순씨가 12월 18일 아이의 하교를 도우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시각중복장애인 효정양의 엄마 강복순씨가 12월 18일 아이의 하교를 도우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시리즈 목차 

1 시각중복장애인 효정이 엄마 복순씨 

2 장애학교 주변을 떠도는 엄마들 

3 내가 외로운 법정 싸움을 하는 이유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 현실은 그러나 장애인 특수학교 건립 계획만으로도 마을 주민들이 갈라질 정도로 큰 갈등을 빚는다. 장애인들도 당연히 누려야 할 교육 받을 권리와 행복추구권이 집값 하락이라는 논리 속에 번번이 무시된다. 장애아의 부모들은 비장애인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들을 획득하기 위해 투사가 돼야만 한다. <주간경향>은 세 차례에 걸쳐 장애아를 돌보는 엄마들과 주변의 사연을 통해 오늘날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되짚어 보려 한다. 1회는 시각중복장애인 효정이를 돌보며 장애인 권리를 위해 싸우는 엄마 강복순씨의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어느 날 남편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복순아, 이제 그만하자. 너 언제까지 그럴 거냐.”

나는 내 딸 효정이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1998년 7월에 태어난 내 첫째딸 효정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백일이 다 될 때까지 효정이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어쩌면 효정이의 세상은 어둠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다. 조카를 보러 온 친정언니들이 나에게 말했다. “복순아, 언니들 말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효정이 눈이 좀 이상한 것 같다. 효정이가 사시면 고치면 되는 거니까 일단은 병원을 한 번 가보자.” 나는 무서웠다. 겁이 나서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병원에 가서 의사가 “아이가 눈이 안 보이네요”라고 말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친정엄마는 두 언니들을 잡았다. 왜 애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한테 그런 말을 하느냐고 혼냈다. 나는 그냥 버텼다. 

남편은 나보다 강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까. 100일이 채 안된 효정이를 끌어안고 있는 내게 남편이 먼저 병원에 가보자고 권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둘이 김안과를 갔다. 의사는 곧바로 “여기가 아니라 큰 병원을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서울대학병원으로 갔다. 곧바로 엠알아이(MRI) 촬영과 약물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친정엄마랑 아이를 업고 신(神)발이 제일 좋다는 오대산으로 갔다. 오대산 자락에 있는 보살에게 500만원을 주고 세 번의 굿을 했다. 새벽 첫 이슬이 내리기 전에 대기하고 있어야 아이가 낫는다고 해서 효정이를 들쳐업고 새벽 2시에 산을 올랐다. 친정엄마는 아이 배냇저고리와 아이 아빠 속옷을 들고 오대산 자락을 따라왔다. 

효정이는 결국 그날 이후 폐렴에 걸려 한 달을 입원했다. 그쯤 되면 나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신이 있으면 거기에라도 매달려 우리 효정이가 앞을 볼 수 있기를 빌었다. 서울대병원에서 결과가 나왔다. 담당교수는 나와 아이 아빠에게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얘 눈 못뜨니까 그냥 애 잘 키울 생각이나 하라”고 했다. 효정이는 선천적 시신경위축이었다. 눈이 돌아갔다. 없는 돈 끌어다 500만원이나 주고 굿까지 했는데. 교수를 붙들고 싸웠다. 전공의들이 나와 아이 아빠를 끌어냈다. 병원 밖을 나온 순간부터 우리는 장애아이의 부모가 됐다.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내 새끼가 아픈데 부모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지난 9월 5일 서울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열린 특수학교 관련 토론회에서 한 참석자가 ‘특수학교 먼저’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다. / 연합뉴스

지난 9월 5일 서울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열린 특수학교 관련 토론회에서 한 참석자가 ‘특수학교 먼저’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다. / 연합뉴스

나도 한때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애를 낳고 복직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직장은 이제 나에게는 사치였다. 효정이와 내 앞에는 끝나지 않을 병원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장 동기, 언니들이 회사 민영화로 연봉이 오르고 직책도 오를 동안 나는 내 아이의 눈과 손, 발이 돼야 했다. 효정이가 서울맹아학교 유치부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아이와 꼬박 5년을 붙어 있었다. 3살 터울로 태어난 둘째는 우리의 멘토였다. 아들이 뒤집으면 아들의 모습을 보며 효정이 뒤집기를 가르쳤다. 아들이 네 발 기기를 하고, 걸음마를 하는 것을 관찰해 효정이를 가르쳤다. 시각장애아이들은 시각적 자극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를 몸으로 가르쳐야 했다. 비장애아이를 키우는 부모도 모든 것이 처음일텐데, 시각장애아는 나도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시각장애인을 본 경험은 출퇴근 때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맹인의 모습을 본 게 전부였다. 

우울증이 심해졌다. 집 안의 모든 불을 끄고 살았다. 커튼을 쳤다. 남편이 한마디 하면 “애새끼가 눈도 안 보이는데 불은 켜서 뭐 해”라고 날선 말을 뱉었다. 효정이가 4살 될 때쯤이었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보다 안산에 사는 동진이 사연을 접했다. 7살 시각장애아 동진이가 동네 심부름을 다니고, 일반 아이들과 노는 게 나왔다. ‘저 아이의 엄마와 통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담당 PD를 수소문해 울고불고 사정해서 동진이 엄마를 찾았다. 동진이 엄마는 내 동앗줄이었다. 이후 서울맹아학교 유치부에 다니며 동진이 엄마를 다시 만났다. 내게 “효정이 엄마야, 너 그냥 종로로 이사 와라. 여기서 우리 의지하며 살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 아이가 5살 되던 2003년에 종로구에 정착했다. 

어느 날 맹아학교 학부모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효정아 얼른 와라. 여기 좀 도와야 한다.” 당시 용산초등학교 학생 수가 줄어서 용산초 절반을 잘라 서울맹아학교 용산분교를 만들 예정이었다. 용산구 주민들의 항의는 너무 거셌다. 맹아학교 공사 첫 삽 뜨는 것을 막아섰다. 내게 “저 ×× 같은 ×가 저 모양이니 병신 ××를 낳았지”라고 말했다. 집안 대대로 목사인 한 주민이었다. 포클레인이 들어서지 못하게 마을 주민들이 학교부지에 눕기도 했다. 그때 장애아 엄마 2명이 포클레인 삽 위에 올라탔다. 기사님께 “모든 일은 우리가 책임질게요. 제발 학교 안으로 들어가주세요”라고 빌었다. 포클레인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니 주민들이 전부 일어섰다. 그렇게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세상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깨달았다. 장애인 엄마가 투사가 되는 것은 그냥 내 아이를 지키려는 것이다. 약한 내 새끼 공부는 가르쳐야 하고, 사람은 만들어야 하는데 부모 아니면 아무도 내 새끼를 도와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가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2007년 5월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제정이 막바지였다. 장특법 제정은 반대가 심했다. 특수교육 현장을 바꾸는 건 다 돈이 들어가니까 다들 예산낭비라며 반대했다.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는 그 평범한 엄마들이 머리를 깎고 삼보일배를 했다. 그때 현장에서 만난 한 아이의 엄마가 이 말을 했었다. “효정아, 이 법이 통과돼야 우리 애들 교육시킬 수 있다.”

나는 우리 딸의 생애주기마다 싸워 왔다. 장특법이 무서운 것은 학교장이 아이의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법이 통과돼야 내 딸이 학교를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내 딸은 20살이 됐다. 이 다음은 평생교육법 개정이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효정이 엄마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혜택을 받고 살아”라고 말이다. 나도 ‘나보다 몇 년 위 극성맞은 엄마가 있으면 편하게 따라갔을텐데’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암환자다. 2015년 특수교사 정원을 두고 반대의견을 내는 의원들이 있었다. 유방암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병원 화장실에서 피주머니를 빼고 친한 엄마에게 부탁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의사 허락 없이 의원들을 만나러 갔다. 특수교사 정원 확충은 엄마들에게는 큰 문제였다. 특수학급은 늘 과밀이었다. 효정이처럼 시각장애에 인지손상까지 있는 중복장애아들을 한 반에 6~7명씩 몰아넣고 선생님 한 분이 보라고 하면 그 사람보고 그냥 나가라는 말과 같았다.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아이 교육이 달린 문제였다. 그때 의원들을 만나 설득하고 다니면서 특수교사 정원이 700명으로 확 늘어났다. 그렇게 하나하나 나를 비롯한 장애아 엄마들이 아이들의 길을 닦아가고 있다. 공무원들은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엄마들은 너무나 잘 안다. 기획재정부 공무원들은 전화도 잘 받아주지 않았다. 과장해서 백 번 전화하면 한 번 누구인가 싶어 확인전화하는 식이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19대 의원일 때 정 의원실 비서관과 함께 있는데 기획재정부 공무원이 때마침 콜백을 했었다. 그 직원은 우리에게 “당신들이 진짜 엄마가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 당신들 그냥 영리단체 아니냐”고 했다. 듣다 못한 비서관이 “종로구에 사시는 엄마가 맞다”고 확인해줬다. 그제야 기재부 직원은 우리를 만나줬다. 늘 그런 식이었다.

나는 지금 효정이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공기 좋은 외진 곳으로 가서 살고, 효정이는 교통도 좋고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에서 나와 떨어져 살았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암수술과 항암치료를 받는 한 달여 기간 동안 남편은 둘째·셋째아이를 보살피고, 효정이는 지역사회에 주간·단기보호를 맡겼다. 


내가 퇴원해서 아이를 데리러 가니 아이가 울면서 내 팔을 꼭 잡았다. 암이니 수술이니 입원이니 하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으니 그저 엄마가 자신을 버린 줄 알았던 것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딸과 떨어질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정이가 장애인들끼리 특정 시설에 모여 사는 게 아니라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평범한 삶 속에 스며들어 살 수 있는 장애인 주거모델을 만드는 게 내 마지막 목표다. 내 딸 효정이에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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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240943031&code=940100#csidx9c1c140d546f4a3a04e8a7c2462f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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