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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경제학, 예수님이라면 자본주의에 찬성했을까?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17-12-24 17:20:19
수정 2017-12-24 1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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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천국의 문턱에서 심사를 받았다. “당신은 신을 영접했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네”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면접관은 “좋습니다. 그러면 아래 평가지에 자신의 도덕성 등을 상세히 기록하세요. 당신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인지 심사해보겠습니다”라고 요청했다.

천국의 문턱에 선 이 사람은 떨리는 마음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 기록지를 받아든 면접관이 “평가를 마치겠습니다”라며 자리를 뜨려 했다. 이 사람은 다급한 심정으로“제 점수가 어떻게 나왔나요? 저는 천국에 갈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면접관이 태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을 했다.

“조금 더 기다리셔야겠어요. 이게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여서요. 오늘 천국 경쟁률이 4.5대 1이거든요. 님 점수가 다른 사람에 비해 얼마나 높은지 경쟁을 붙여봐야 최종 당락을 알 것 같습니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만약 천국행을 이렇게 결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 사람의 삶과 도덕성을 절대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천국 자릿수에 맞춰 사람들을 경쟁 시스템으로 내몰아 천국행 자격을 결정하는 거다. 인사고과 상위 10%에게만 인센티브를 주듯이 죽은 자들 중 10%만 천국행을 허락한다. 그게 말이 되냐고? 당연히 말이 안 된다.

천국행을 그렇게 결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우리는 왜 이런 시스템에서 살고 있을까? 천국은 누구나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누릴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삶’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누릴 수 없다. 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삶의 기회를 누린다. 신이 펼쳐주는 세상(천국)과, 그 신이 만든 인간 사회는 왜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공공재로서의 천국

경제학에서는 공공재라는 개념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재화 또는 서비스를 뜻한다. 예를 들어 공기, 햇빛, 흐르는 강물 같은 것이 누구나 자유롭게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다. 그리고 예수가 민중들에게 길을 열어준 천국도 당연히 공공재에 속한다.

자본주의는 이 공공재를 끔찍이 싫어한다. 공공재는 누구나 노력 없이 사용할 수 있기에 자원을 낭비하고 분배를 비효율적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공적 영역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사유화해 민영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다못해 초등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하는 행위도 자본주의는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게 공공성을 강조해서 공짜 밥을 남발하면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않는단 말야!”라고 절규한다.

천국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다(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천국은 자본주의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매우 비효율적이고 분배의 정의에도 어긋나는 공공재가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성탄 전야 미사에서 아기 예수상에 입을 맞추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성탄 전야 미사에서 아기 예수상에 입을 맞추고 있다.ⓒAP/뉴시스

생각해보라. 평생을 선하게 살면서 주 예수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른 사람과, 죽음 직전에야 겨우 회개를 한 강도가 똑같이 천국에 간다면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실제 성경에는 예수의 오른쪽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던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회개하자 예수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며 그를 천국으로 초대했다.

이렇게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자본주의 경제적 질서는 엉망이 된다. 경쟁에서 이긴 자에게만 천국을 보장해야 사람들이 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할 것 아니냔 말이다. 경쟁에서 패한 자들에게는 당연히 불지옥의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하는 건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예수는 자본주의를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다. 수많은 대형교회들이 기복신앙과 번영복음을 앞세워 돈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식으로 왜곡하지만, 예수는 모든 민중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공공재로 개방했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경쟁이 조금도 필요치 않다. 내 옆의 사람을 신앙심으로 이겨야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경쟁에서 패한 자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내야 내 자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는 그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으면 모두에게 그 천국 문이 열릴 것이라고 알려줬다.

우리 인류는 예수가 탄생하기 오래 전부터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돕고 살았다. 그 공동체를 우리는 ‘사회(society)’라고 불렀다. 지금에야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자본가를 타도하고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전복하려는 무시무시한 단어로 사용되지만, 초창기 사회주의자들이 사용했던 사회주의는 사람들끼리 돕고 사는 그 사회를 복원하자는 취지의 용어였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7000년 동안 유지했던 사회를 박살냈다. 돕고 살기는커녕, 경쟁에서 패한 자들은 반드시 죽음으로 내몰아야 사회가 더 효율적으로 발전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레이건과 함께 신자유주의를 이끌었던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는 “사회가 누구냐? 사회, 그런 것 따위는 없다. 우리는 모두 개별자로서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단언했다.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오른쪽)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생전 모습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오른쪽)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생전 모습ⓒ자료사진

그 대처 수상이 독실한 감리교인이었다는 것은 코미디에 가깝다. 그가 살아있다면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당신이 믿는 예수가 그렇게 가르치던가? 서로 돕고 사는 사회, 이웃을 배려하는 인간 따위는 없다고? 그래서 천국도 경쟁적으로 남을 짓밟아야 오를 수 있는 곳이라고?

그게 사실이라면 단언컨대 대처가 지금 있는 곳은 천국이 아닐 것이다. 천국에 가려면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데,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을 낳은 복지국가 영국을 죽음의 나라로 만든 대처 같은 이에게 자리를 내 준단 말인가?

아무리 기독교가 예수의 뜻을 왜곡하고 자본주의와 결탁하려 해도, 예수가 우리 민중들에게 열어준 천국의 길은 경쟁을 통해 효율을 낳는다는 자본주의의 길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함께 갈 수 있고, 누구에게나 그 복을 아끼지 않고 베푸는 ‘사회’의 길이다.

예수는 그 누구에게도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이유로 “나가 죽어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패자들이 죽어줘야 사회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인다”고 강조하지도 않았다. 예수가 꿈꿨던 사회는 결코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쟁에서 뒤쳐진 패자들에게 “나가 죽어라”라고 강요할 게 아니라 “같이 삽시다”라며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민중들에게 열어놓은 천국의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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