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딴지 총수부터 '나꼼수'까지, 김어준

아르마니 탐했던 소년, '진보 교주'로 부활하다!

[노정태의 논객시대] 딴지 총수부터 '나꼼수'까지, 김어준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4-05 오후 6:33:44

 

 

1.

1988년 서울올림픽의 모토는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급변하고 있었고, 동시에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1987년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시민사회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성취감을 얻었지만, 동시에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면서 기나긴 정치적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후, 그간 기층 단위에서 조직되었던 노동운동이 표면화되면서 이른바 789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공장의 말단 직원부터 중간 관리자까지, 전두환의 신군부가 억지로 찍어 누르고 있던 임금이 대폭 상승했다. 국민 모두가 이른바 '중산층'이 되는 그런 시대가 열렸다고, 다들 꿈꾸게 되었다.
 

▲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 ⓒ프레시안(최형락)

높아진 임금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서울로 몰려들었고, 부동산뿐 아니라 주식시장 등 온갖 금융 영역이 넘실거렸다. 더욱이 당시는 이른바 '3저(低) 호황'의 시절이기도 했다. 금리, 유가, 달러 환율이라는 세 가지 주요 경제 지표가 모두 낮아졌다. 누구나 쉽게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기름 값 부담 없이 자동차를 사고, 더 여유가 있으면 해외여행도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을 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사실상 좁은 섬 안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은 바야흐로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때 한 청년이, 3수 끝에 지망하던 서울대가 아닌 다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87학번이 되었어야 했을 그는 89학번이 되었고, 자신이 원하던 서울대가 아닌 홍익대에 들어갔으며, 학교 안에 정 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는 50개가 넘는 나라들을 들락거렸다. 본인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그렇게 배낭여행에 몰두한 것은 입시에 실패하였다는 자괴감을 "여행을 떠나 세계를 만나"면서 "내가 살던 동네가 얼마나 비좁은 공간인지 절감"하고, "그를 통해 내가 겪은 실패라는 게 사실은 대단한 게 아니라"(<건투를 빈다>(김어준 지음, 푸른숲 펴냄, 26쪽))고 확인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묘한 방식으로 때를 잘 만났다. 만약 본인의 뜻대로 서울대 87학번이 되었더라면, 87년 6월 항쟁의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가 대학교 새내기 시절을 보낸 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진 89년 무렵에는 이미 3학년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배낭여행을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배낭여행을 통해 경험하는 내용들로 자아를 형성하기에는 다소 때를 놓치는 모양새가 된다. 배낭여행에서의 경험을 '근원적 체험'으로 삼기에는 그 전에 겪은 일들의 무게가 너무 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어준은 3수를 했고, 87년 항쟁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절묘하게 비껴간 채, 민주주의와 역사의 흐름에 한 몫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2.

신문 칼럼, 강연, <딴지일보>에 본인이 쓴 글 등을 통해, 김어준은 배낭여행을 통해 얻은 원체험의 몇몇 굵직한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핵심적인 레퍼토리를 몇 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파리 오페라 극장 대로변 양복점에서 두 달 치 여비를 털어 BOSS 양복을 충동 구매한 이야기
(2) 이탈리아에서 다비드 상의 허리 라인을 보고 그것이 아르마니 양복과 쏙 빼닮았음을 깨닫고, 문화적 심미안을 가질 수 없었던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애를 느낀 이야기
(3) 독일에서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탄 채 버스를 탈 수 있도록 바닥이 기울어지도록 만들어진 버스를 본 이야기

각각의 내용을 간략하게 검토해보자.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기차에 타기 전날, 90년대 초반 배낭여행을 하던 김어준은 파리 오페라 극장 대로변에 있는 한 양복점의 쇼윈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양복에 말 그대로 '꽂혔다.' 뭔가에 홀린 듯 가게에 들어가 와이셔츠, 바지 등을 하나씩 착착 걸쳐가며, 그때까지 자신이 봐온 스스로의 모습을 훨씬 뛰어넘는 누군가를 보았고,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두 달 치 여비에 해당하는, 100만 원 가량. 냉큼 지르면 두 달 굶어야 할 상황이다. 김어준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절약한 100만 원을 향후 두 달간 숙소와 식량에, 합리적으로 소비한다면, 그럼 지금 당장의 이 환희는, 고스란히, 보상받을 수 있는 건가."(같은 책, 48쪽) 물론 대답은 '아니오'였고, 일단 옷을 산 그는 로마에서는 배낭여행객 숙소 '삐끼' 노릇도 했으며 부다페스트에서는 암달러상으로 여비를 벌기도 했다고 술회한다.

그 여행에서 겪은 일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피렌체에서, 김어준은 본인이 인솔하던 학생 관광객들을 우피치 미술관에 몰아넣은 후 고개를 들어 그 전까지 백 번은 넘게 마주쳤던 다비드 상을 보고, 모종의 깨달음을 얻어 벌떡 일어났다.

"쇼윈도 안에 진열되어 있던 '페라가모' 구두 뒤축에서 느꼈던 그거. '긴장감.' 동시에 돌멩이를 움켜쥔 오른팔의 늘어진 곡선 역시 낯익었다. 맞다. '야들야들.' '아르마니' 양복의 허리 라인이었다. 터무니없게도 말이다."(같은 책, 74쪽)

훗날 <한겨레>에 연재한 상담 칼럼 '그까이거 아나토미'를 묶어 <건투를 빈다>(푸른숲 펴냄)라는 제목의 책으로 내면서 이 기억을 곱씹던 김어준은, 온 세상을 쏘다니며 좋다는 명작들은 다 보고 다니면서도 왜 본인이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했는지, 왜 자신의 미적 감수성이 그렇게 '후지게' 세팅되어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그는 그 이유를, 명작들을 '외워서' '시험 보게' 만드는 한국의 공교육에서 찾고,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야 할 청소년기를 그렇게 보낸 스스로가 '인간의 말을 배울 시기를 놓친 늑대소년'과 다를 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후, 길든 짧은 여행에서 돌아와 국적 불명의 아파트로 가득 찬 대한민국의 도시를 다시 마주하는 순간마다, 떠오르는 단상이 하나 있다. 우리 유전자 어딘가에 몇 천 년을 축적해온 고유한 선과 면과 색에 대한 감각이 분명 존재할 텐데, 식민과 전쟁과 개발을 정신없이 겪어내느라 그 집단 기억을 상실해버린 무국적의 우리 도시들을 보고 있자면, 늑대소년으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잃고 으르렁거리는 것밖에 못 하게 만든 정글을, 떠올리게 된다. 난 이 콘크리트 정글에서 그렇게 늑대소년으로 길러졌던 게다. (같은 책, 76쪽)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달리 독일은 김어준의 문화적 감수성을 자극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독일에서, 굳이 말하자면 '정치적 올바름'의 한 기준을 얻게 된다. 장애인을 약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 바라보고, 그래서 대중교통이니까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대중들이 버스에 탈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혜주의적, 온정주의적 관점이야말로 더 큰 폭력일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고 대우하는 분위기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 <닥치고 정치>(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btn

2000년 <한겨레21>에서 김규항과 함께 누군가를 인터뷰하거나 두 사람이 방담을 나누는 형식의 코너 '쾌도난담'을 진행할 때, 장애인 인권 확보를 위한 전국청년학생연합 공동 대표인 박지주 씨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야기한다. "장애인을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고"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장애인이 "바라는 건 동정이 아니라 구성원으로 인정을 해 달라는" 것임을 명확히 하고, "아주 근본적인 이런 부분부터 뒤집어가야"(<쾌도난담>(김규항ㆍ김어준 대담, 고경태 정리, 태명 펴냄), 151쪽) 한다는 것이다. 대단히 모범적인,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적 발언의 구성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1) 본인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개인적 태도, 동시에 미래의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핑계로 현재의 쾌락을 유예하지 않는 자세. (2)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온 본인 및 한국 사회의 심미적 미발달에 대한 인식, 그러므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3) 타인의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약자로서 목소리를 높이는 포지션을 노리지 않고, 평범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요구하고 보장하는 정치적 태도. 이 세 가지를 조합하면, 주로 <건투를 빈다>에 수록되어 있는, 대중들이 '쿨'하다고 생각하는 김어준의 사고방식의 얼개가 나온다.

3.

자기 스스로 자기 삶에 책임을 지되, 엄숙하지 않고 유쾌하게 즐기며 사는 사람. 동시에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자기 인생의 미적 측면을 늘 생각하는 사람. 타인들을 자신과 똑같이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바라보고 바로 그 시점에서 연대할 수 있는 사람. 배낭여행을 다니며 얻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김어준이 스스로를 구성하고, 또 타인에게도 통용될 수 있을만한 어떤 '주체의 유형'으로 창출해낸, 말하자면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모델이다.

한국인들은 습관적으로 일본을 '섬나라'라고 부르곤 하지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휴전선으로 막힌 대한민국이야말로 사실상 일본보다 더 작은 조그마한 섬나라에 불과하다. 게다가 한국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 때문에 국민들에게 해외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늦은 시점부터 제공하였고,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모든 국민에게 해외여행이 '허락'된 것은 김어준이 대학에 들어간 1989년부터의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1987년에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을 누군가와 1989년에 대학물을 먹기 시작한 이가 걷게 되는 길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자가 굳이 말하자면 '구세대의 막내'였다면, 후자는 한국인 중 거의 최초로 '세계'를 본인의 자아 형성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신세대의 맏이'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첨단에 김어준이 서 있었고, 그는 5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을 일종의 역할 모델로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좀 더 개인사적인 맥락을 짚고 들어가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그는 1987년에 들어갔어야 할 대학의 문턱을 1989년에 밟았다. 1987년 6월 항쟁만 놓친 게 아니다. 재수를 안 하고 대학에 들어갔다면 온몸으로 즐겼을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혀 향유하지 못했다. 오히려 공부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눈과 귀가 쏠리는 자기 자신을 질책하거나,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스포츠 중계를 본 후 자꾸 고개를 드는 불안함을 어떻게든 달래야 했을 것이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88올림픽 슬로건을 두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웃긴 말"이라고, "세계가 우리만 달랑 빼놓고 자기들끼리 모여 만든 무슨 특설 링도 아니"(<건투를 빈다>, 56쪽)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모습에서, 눈앞에 열린 축제를 즐기지 못하면서 쪼그라드는 자존심을 추슬러야 했던 한 수험생의 번민이 인간 꼬리뼈처럼 남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영 생뚱맞은 일만은 아니다. 1988년에는 '세계'가 '서울'로 올 수는 있었지만, '서울'이 '세계'로 갈 수는 없었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당시에는 정말 세계가 "우리만 달랑 빼놓고 자기들끼리 모여 만든 무슨 특설 링"이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2002년 월드컵에 대한 김어준의 열광을 이해하기 위해 포석을 깔고 있다. 축구는 멋진 스포츠이며, 쿨한 코스모폴리탄이라고 해서 자기 나라 대표 팀의 경기에 열광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2년 한일월드컵을 보며 모종의 깨달음을 얻고, 그 기억을 끝없이 반추하며 김어준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캐릭터는, 앞서 우리가 말한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4.

2002년 6월 13일, 포르투갈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1대 0으로 힘겹지만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조별 예선 3라운드, 한국은 폴란드를 상대로 1승을 거두었고 미국과 비겼기 때문에, 기왕이면 이겨야 복잡한 계산 없이 꿈에 그리던 16강 고지에 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국 팀은 포르투갈을 이겼다. 이른바 '황금 세대'라고 하는, 당시 유명한 선수들을 망라하고 있던 우승 후보 포르투갈을 꺾고 자력으로 16강에 진출한 것이다.

문제는 그에 대한 언론 반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론들이 포르투갈 전을 보도하는 그 태도가 김어준의 내면에 잠들어있던 무언가를 건드렸다. 이틀 뒤인 6월 15일, 그는 자신이 '총수'로서 운영하던 사이트 <딴지일보>에 자신의 이름을 달고 한 편의 글을 올린다. 제목은 '우리는 강팀이다'.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와는 또 다른 하나의 캐릭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건투를 빈다>(김어준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btn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포르투갈 대표팀은 한국을 이기지 못하면 16강 진출이 어려워질 상황이었다. 그래서 거칠게 플레이했고 반칙이 많이 나왔는데, 그러다가 당대 최고 수준의 스트라이커인 주앙 핀투가 퇴장당했다. 곧이어 또 한 명의 선수인 베투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 포르투갈은 9명, 한국은 11명이 경기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상황에서 박지성의 결정골이 터졌고, 포르투갈은 그 한 점 차이를 결코 만회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어쨌건 즐겁다는 분위기가 대세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지만, 김어준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이 홈 어드밴티지를 이용해서,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에 힘입어, 제 실력대로 하면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기고 16강에 올라갔다고 말하는 한국인이 어딘가에 있긴 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누구의 발언을 반박하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축구 전문가"가 누구인지에 대해 지금의 우리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아무튼 그런 태도,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 스스로 비겁한 승리를 했다고 생각하고야 마는 패배주의 근성을 김어준은 질타하기 시작했다.

이번 게임에선 우리가 이길 만하니까 이긴 거다. 우리가 정당하게 페어플레이해서 이긴 거 맞다. 그러니 우리가 비겁하게 승리를 뺏어낸 거라 생각하고 스스로 쪼그라들고 스스로 비아냥거리는, 만성적 패배주의에 찌들어 차분하기 짝이 없는 일부의 소심한 사람들아, 이제 제발 그만 차분해 하고 흥분해서 발광을 하며 날뛰는 주변의 정상적인 인간들이랑 어깨동무하고 같이 마음껏 난리치길 바란다. ('우리는 강팀이다', <딴지일보>, 2002년 6월 15일)

이탈리아 전에서도 역시, 세계 톱클래스 선수인 토티가 퇴장을 당한 후 한국이 이겼다. 마찬가지로 오심 논란이 있었고 홈 어드밴티지 논란도 있었다. 그에 대한 김어준의 대응도 역시 한결같았다. 그리고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한국팀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또 이겼다. 김어준은 그때까지도 남아있는, 혹은 본인의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는 '패배주의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그래서, 한편으론 정말 속상하다. 그동안 얼마나 이겨보지 못했으면, 얼마나 패배에 익숙해져 있으면, 얼마나 바깥의 눈치를 보고 살아왔으면…이렇게까지 작은 행운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도리질하고 있는 건가 말이다. 제발 이제부턴 익숙해지자. 승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라. ('믿어라! 우리가 강팀임을', <딴지일보>, 2002년 6월 24일.)

5.

2003년 9월 1일, <딴지일보>에 새로운 글이 하나 업데이트되었다. 제목은 '우리는 강팀이다 II'. 작성자는 당연히 김어준 총수였다. "승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라"고 권했던 그가, 자신이 남들에게 권한 바로 그 '승자의 시선'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 모종의 체계적인 세계관을 형성해내고자 노력한 결과물이 바로 그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상대한 수많은 나라 중, 김어준은 이탈리아 전에서의 승리를 각별한 것으로 꼽고 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는 축구도 잘하지만 유니폼도 멋진 그런 나라이기 때문이다. 전직 복서 출신의 스트라이커 비에리의 거대한 체구가 공포감을 자아내는 만큼, 그들이 입고 있는 파란색의 쿨한 유니폼 역시 김어준에게 깊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 편 태클은 기술이고 상대편 태클은 폭력으로 자동 해석되는 그 전쟁 상황에서조차, 도대체 그들 유니폼의 상대적 세련미는 부정하기는 힘들었다"며, "그리고 난 그 유니폼이, 비에리의 선제골만큼이나 부러웠다"('우리는 강팀이다 II', <딴지일보>, 2003년 9월 1일)며 김어준은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 본론의 내용 중 대부분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김어준의 주요 레퍼토리 중 (2)번을 수없이 확대재생산한 것이다. 어쩌면 (2)의 내용이 '우리는 강팀이다 II'를 쓰는 과정에서 그의 의식 속에 고착화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선후 관계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김어준이, 본인이 배낭여행을 다니며 '개인'으로서 느꼈던 문화적 격차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법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자신의 눈을 호린 이탈리아의 '명품'들이 수많은 가족 기업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 가족 기업에서 일하는 장인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일을 하는 것일 뿐인데 왜 그것이 나에게까지 아름답게 보이는가, 왜 나에게는 내가 익숙한 대로 하면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좋은 것이 될 수 있는 그런 전통과 문화적 맥락이 없는가 등을 고민하던 그는, 하릴없이 다음과 같은 '서론의 결론'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가 발명한 민족주의라는 허구의식으로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며 단군신화 파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스스로 몰랐던 우리네 가치와 새롭게 정립해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보다 세련되고 보다 당당하고 보다 자유롭고 보다 행복한 개인이 되자는 이야기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련다. (김어준, 같은 곳)

'우리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과 그것을 통해 "보다 자유롭고 보다 행복한 개인이 되"는 것 사이의 간극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당시 <딴지일보>를 열심히 보던 나 또한 김어준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며 자주 들어가 업데이트를 확인했지만, 단절된 역사적 지평 위에서 자아를 형성해야 하는 변방의 식자들이 겪는 공통의 문제에 대해, 김어준이라고 해서 뾰족한 해법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것'이 아닌 근대적 자아를 형성하고자 하면, 그것은 몸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사실 앞서 말한 '어설픈 근대적 자아'가 자신의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지평 위에 서있을 뿐,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흑인들의 음악인 힙합을 하면서 '미국인 흉내'를 내는 것만큼이나, 이미 전통이 단절된 지 오래라는 현실을 무시하고 '조선인 흉내'를 내고자 발버둥치며 '만들어진 전통' 위에서 국악을 하는 것 역시 애처롭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세계'의 존재를 실감한 모든 이들이 한번은 겪게 되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어준은 그 문제에 대한 태도와 축구 경기를 볼 때의 응원하는 자세, 한국팀의 승리를 당당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패배주의적인 태도 등을 잇는 어떤 '선'을 발견했다. 우리가 비겁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강팀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몸에 찌든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그렇다고, 승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버릇을 들이면 달라질 것이라고, 그는 믿었고 외쳤다. '이거 파시즘적인 구호 아냐?'라고 의심하지 말고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다 보면 언젠가 대한민국도 이탈리아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 있을 터였다.

6.

2003년 9월의 김어준이 사회진화론적 뉘앙스를 지니는 논의를 전개해가며 문명사적 고찰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2002년 12월 '역사의 후퇴'를 막아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면서 당시 축구협회의 회장이었던 정몽준은 갑자기 유력한 대선주자로 떠올랐고, 그때까지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려가던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 노무현은 위기에 빠졌다.

탁월한 연설 능력, 열성적인 핵심 지지자 층의 헌신적인 선거운동, 독보적인 정치적 감각과 타이밍 등을 통해 그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대선후보 경선을 승리로 이끌어내며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문제는 갑자기 정몽준이 등장하고 나니, 노무현이 차지하고 있던 '깨끗하고 신선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많이 빛을 잃었고, 온 나라를 휩쓸고 있던 축구 열기가 그에게 전혀 이롭지 않게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화 - 6인 6색 인터뷰 특강>(진중권 외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btn

노무현은 다시 한 번 창의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했다. 정몽준 측에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를 제안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여론조사가 정치의 도구로 전면화되었고, 동시에 '본선 경쟁력'을 이유로 후보들이 단일화하는 경향을 만들어내었는데, 이것은 모두 이후 10년이 넘도록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노무현은 정치적 도박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으로서의 정치인에 관심이 많았던 김어준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그를 인터뷰한 전적이 있었다. 노무현이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잠재력과 가치를 일찌감치 간파했다는 것은 김어준의 자부심 중 큰 부분을 구성한다. 김어준에게 노무현의 당선은 역사의 가치가 현실화된 것이었고,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퇴보할 일은 없을 터였다. 월드컵에서 당당하게 이탈리아를 무찔렀고, 대선에서 당당하게 '수구꼴통'들을 이겼으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강팀이라는 것을 아직도 못 믿는 패배주의자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전파하는 일 뿐이다.

그것이 2003년 9월의 일이다. 하지만 고작 반년이 지났을 뿐인 2004년 3월 12일,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물론 2004년 5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탄핵의 역풍으로 그가 자신의 지지 세력과 함께 만든 열린우리당은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는 쾌거를 누리게 되지만, 아무튼 노무현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국회에 의해 탄핵소추된 대통령이 되었다.

김어준뿐 아니라 다른 노무현 지지자들이 누리고 있던 '정신적 태평성대'는 바로 그 시점에 끝났다. 그들에 의해 막연하게 무리 지어진 '기득권', 혹은 '수구꼴통'이나 '조중동'으로 표상되는 거대한 악과의 투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터였다. 내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들은 '우리 대통령'을 공격한다. 내가 손을 놓고 있으면 '우리 대통령'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김어준의 머릿속에서 영원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7.

김어준은 축구가 전쟁의 대리물이라는 사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축구라는 대리전쟁에서 승리한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그의 언설 속에는, 마치 러일전쟁 당시 자국을 응원하고 승전보를 기뻐하던 일본 지식인의 그것과 비슷한 정조가 흐른다. 동시에 그에게 '우리'의 세상은 '저들', 즉 서양의 그것과는 달리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하지 못해 역사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자기 자신의 문화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도리어 부끄러워하는 경향을 띄고 있었는데, 그렇기에 모두 한마음이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며 국가대표 축구팀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과정은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근대적이지도 않은 파편화된 개인들이 '한국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응원하고 목소리를 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응원의 대상이 반드시 축구에 한정되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대입하거나 적어도 몰입할 수 있는 '섹시'한 대상과, 그 대상에 몰입하는 것을 추하다고 혹은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하면서 흥을 깨지 않는 것이 관건일 뿐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김어준에게 바로 그런 대상이었다. 황우석 박사가 <사이언스>라는, 서양의 합리성과 이성을 대변한다 할 수 있는 과학 전문지의 1면을 장식하는 것 역시, 김어준에게는 과학이 아닌 '우리'의 승리였다.

황우석 박사팀이 연구원의 난자를 이용해 배아줄기세포 배양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MBC 시사교양프로그램 <PD수첩>은 폭로했다. 2005년 11월 22일의 일이다. 이틀 뒤인 11월 24일 황우석 박사는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민국이 황우석 사태를 놓고 '둘로 갈라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황우석의 편을 들고 있었고, <PD수첩>과 <프레시안> 그리고 일부 지식인만이 황우석 팀의 연구 윤리 등을 지적했다. 그 '대부분의 사람들'에는 김어준,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시점에서 김어준은 <부산일보>에 '황우석 사태 관전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다. 11월 29일의 일이다. "황우석 사태, 생뚱맞게도, 월드컵이 오버랩 됐다"며 말문을 연 그는, "말하자면 <PD수첩>은, 2002년 안정환의 이태리전 결승 헤딩골은 카메라 사각이어서 제대로 잡히지 않아 그렇지 사실은 안정환의 핸들링이었다는 것을 온갖 자료를 동원해 증명해내고 또 손에 닿은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안정환은 거짓말쟁이라는 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입증한 꼴" ('황우석 사태 관전기', <부산일보>, 2005년 11월 29일)이라는 독창적인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11명의 태극전사가 축구를 하는 것과, 10여 명의 연구진이 실험실에서 배아줄기세포 복제 연구를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단번에 지워진다. "모든 이의 자부심과 뿌듯함"을 위한 것이므로,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보다 공통점이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줄기세포복제 연구 자체가 날조된 것이 아니라 그저 '연구 윤리 위반'이 문제인 것으로 여겨졌던 11월 말, 김어준의 입장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팀에게 유리한 편파 판정 논란이 일어났을 때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궤적을 그렸다. FIFA에서 새로 적용한 심판 규정 때문에 토티가 퇴장되었을 뿐이라고 우리가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듯이, "충분히 자발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경우, 연구원 난자기증 가능하단 것이 배아복제 실험과정에서 우리가 경험적으로 획득한 실험윤리라고 국제과학계에 주장하는 꼴 좀 봤음 한다"고 김어준은 말했다.

전쟁의 대리물로서의 축구.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전쟁. 하여 이제는 세상사 모든 일이 '감정이입'하고 '열광'할 수 있고 그래야 하는, 축구경기이자 곧 전쟁이 되어버렸다. 황우석의 연구 자체가 날조된 것임이 확인되어 본인의 패색이 짙어지자, 김어준은 <한겨레> 지면을 빌어 "황우석 사태, 이제 그만 닥치자"고 외친다. "대중의 감정이입을 멍청한 착각이고 위험한 파시즘이라고만 단정하는 게으르기까지 한 관성적 비판과, 영웅적 캐릭터로부터 위무 받고 대리만족 느끼던 대중을 간단히 애국주의로 괄호 치는, 그 야박하고 오만한 이성주의가 난 훨씬 더 재수 없다"('황우석 사태, 이제 그만 닥치자', <한겨레>, 2005년 12월 29일)고 한발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황우석 사태에 대해 순순히 "닥칠" 수 없던 것은 정작 김어준 자신이었다. 2006년 2월 2일 <한겨레> 지면에 오른 '황우석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김어준은 황우석과 미즈메디와 공동연구자 새튼과 또 다른 과학 전문 학술지 <네이처> 등을 소재로 삼아 이런 저런 음모론과 가설을 마구 던져놓는다. 물론 그 중 어떤 주장에도 책임을 질 수는 없기에, "나중에 바보 되면 내 배는 내가 알아서 째리라. 하지만 난 이 사건이 도대체 이상하다. 나만 그런가"('황우석 미스터리', <한겨레>, 2006년 2월 2일)라고 흐지부지 결론을 내리지만,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스타일은 이후 김어준의 활동 방향을 그대로 예상할 수 있게끔 한다.

8.

박지성에게 '두 개의 심장'이 있듯이, 우리는 김어준에게 '두 개의 자아-캐릭터'가 있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배낭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을 곱씹으며 만들어낸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가 한 편에 서있다면, 노무현의 당선과 2002년 한일월드컵, 노무현 탄핵, 황우석 사건, 이후 노무현의 검찰 조사와 자살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비극을 통해 확고해진 '음모론적 정치선동가'가 다른 한쪽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 양자 사이의 간극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개인주의자 김어준과 정치선동가 김어준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고의 프로세스를 가지고 움직인다. 개인주의자 김어준에게 조직이란 개인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며 삶을 방해하는 조직이 있다면 개인은 그것을 버리거나 바꿔야 한다. 하지만 정치선동가 김어준에게, 우리가 어지간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조직인 대한민국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하고 자랑스럽지 않아도 자랑스러워해야 할 당위를 내포하고 있는 무언가다.

음모론적 정치선동가 김어준이 황우석에게 '올인'했다가 황우석의 연구 조작이 드러나면서 큰 위기에 빠졌을 때, 한동안 발언권을 잡지 못했던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 김어준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한겨레>에 연재된 상담 코너 '그까이거 아나토미'는 김어준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개인주의적 감수성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고 시원시원하게 조언하는 '딴지 총수' 김어준을 보며, 사람들은 그가 <사이언스> 1면의 논문 게재를 안정환의 헤딩슛과 비교하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기억 저편으로 넘겨버릴 수 있었다.
 

▲ 2011년 11월 30일 서울 특별공연을 연 '나는 꼼수다' 팀 ⓒ프레시안(최형락)


그렇게 대중적 입지를 회복한 김어준은 2011년 <닥치고 정치>(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를 출간하고 그해 연말부터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를 시작하면서 완전한 대중적 스타로 떠올랐다. 임기 4년차에 접어들어 예전만큼 권력의 '말빨'이 먹히지 않게 된 대통령 이명박을 소재로 삼아, 정치선동가 김어준의 관심사인 온갖 음모론과 '시나리오'들이 가미되자, 특히 노무현의 자살 이후 정신적 공허감에 빠져있던 구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닥치고 정치>는 상당히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 1위를,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는 아이튠즈 전체 팟캐스트 중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개인주의자와 정치선동가의 묘한 동거는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닥치고 정치>를 펼쳐보자. 개인주의자 김어준은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시위의 배후로 노무현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놓고 "자기들 잘못을 정면으로 인정할 수 없는 초라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들이 가장 쉽게 매달리는 사고 패턴"이라며, "그런 자들은 일이 잘못되면 배후나 음모가 있어줘야"(<닥치고 정치>(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 104쪽)한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런데 책을 조금만 넘겨보면 이번에는 서태지와 이지아의 이혼 사실이 어떻게 언론에 알려졌는가에 대해, 김어준 본인이 바로 그런 "배후나 음모"를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른은 이명박의 법무적 경호실장"인데, "그런 바른이 이지아의 법적 대리인"이고, "그 재판의 정확한 성격을 알았던 사람은 이지아 측 변호인단밖에 없지 않느냐는 추론이 가능"(같은 책, 108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지적 가카 시점"이라는 유명한 유행어가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다시피, <닥치고 정치>와 '나는 꼼수다'의 상당 부분은 바로 그런 음모론에 할애된다. 그렇다면 음모론적 사고방식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대목이 책에 등장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개인주의적 자아가 남겨놓은 다잉 메시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9.

<건투를 빈다>의 김어준은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이고, <닥치고 정치>의 김어준은 '음모론적 정치선동가'라고, 따라서 우리는 후자를 버리고 전자를 취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직전에 살펴본 것처럼 <닥치고 정치>에서 김어준의 개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희미하게 엿볼 수 있듯, <건투를 빈다>에는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아르마니 양복 밑에 감춰져 있는 'Be the Reds'티셔츠의 땀자국이 남아있다. 양자는 떼어놓으려야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자아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얼굴이다. 그 부분을 확인해보자.

나이 70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물어본 김어준은, 기력이 쇠하고 난 후 동네에서 작은 식당을 하나 하고 싶다며 본인의 "70대 리스트" 중 일부를 공개한다. 그는 "그저 열 받는 것과 흥분되는 것이 공유되는 '꽈'가 같은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수다 떨며,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과 영 관련 없이 늙어가고"(<건투를 빈다>, 83쪽) 싶은 것이다.

하여 그런 거점으로 난 식당 하나를 열 게다. 그래서 35년 전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을 이야기하면서 어제 일처럼 같이 열광하고 30년 전 2008년 광우병 사태를 이야기하며 오늘 일같이 함께 흥분하는 사람들, 노년엔 그렇게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놀고 싶다는 거다. (김어준, 같은 곳)

자, 지금의 김어준이 볼 때, 35년 후의 김어준이 여전히 열광할만한 소재가 있다면 무엇인가?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이다. 30살을 더 먹은 김어준이 여전히, 분노의 뉘앙스로 흥분할만한 일은 뭘까? 2008년 광우병 사태가 그것이다.

잠깐, 2008년 광우병 사태라고? 이 말은 좀 이상하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솔직하지 못한 표현인 것 같다. '꽈'가 같아서,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 박사 사건은 인간이 저지른 과오를 악마적 의도라고 단정하는 진영 논리로, 저지른 잘못에 합당한 징벌을 상회하는 결과적 폭력이었다고 여기지만, 그래서 그저 생래적 보수성을 타고났을 뿐인 불완전한 인간 하나를 사회적 걸레로 용도 폐기하는 진보의 잔인한 비인간성을 목격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또 하나의 책이 만들어져야 하니까, 그건 그냥 내가 욕먹고 말게.(웃음) 다만, 국익 드립.(웃음) 난 황우석이 말한 국익에 전혀 관심 없어. 이해시키기 힘들다, 참. 끝.(웃음) (<닥치고 정치>, 299쪽)

반대로, 우리는 대체 "2008년 광우병 사태"의 그 무엇이 김어준을 그토록 흥분하게 하는지, 그런데 그 흥분을 대중들과 나눌 수 없어서 굳이 개인 클럽까지 열어가며 통하는 사람들에게만 속삭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광우병 사태의 악역은 이명박이요 선량한 희생자는 <PD수첩>과 국민들이었다. 혹시 김어준은 광우병을 다루던 <PD수첩>의 '취재 윤리'가, 마치 황우석 사태 때의 그것처럼,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대세에 휩쓸려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인가? 대중의 심기를 거스르고 이명박을 감싸 안으며 '<PD수첩>, 광우병, 씨바 왜 그따위로 검증하냐'고 따질 생각이었던 것인가?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김어준이 지금까지도 분노하는 사건은 황우석 사건이지 광우병 사태가 아니다. 겁먹은 개인을 대중과 미디어가 몰아가서 벼랑 끝으로 밀어낸 사건. 앞서 인용된 것처럼 김어준은 황우석 사태를 그렇게 이해한다. 우리나라를 위해 뛰는 선수가 핸들링을 했다고, 한국인들이 FIFA에 제소해서 그의 선수 자격을 박탈해버린 사건. 우리가 우리 편을 구석으로 몰아붙인 사건. 개인을 도구로 삼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는 진보의 잔인함을 드러낸 사건. 그리하여, 노무현의 탄핵 및 자살과 어렴풋이 겹쳐 보이는 사건.

월드컵에서 황우석으로 이어지는 김어준의, 말하자면 '흑역사'를 그의 단행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각각에 대한 언급이 이러한 형태로 '은폐'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이것이이야말로 의미심장한 일이며,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에 들린 단행본을 열쇠삼아 인터넷을 검색하게 되었고, 김어준이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나머지 반쪽의 자아를 확인함과 동시에, 그가 살아온 시대의 밑그림을 얻게 된 것이다.

10.

김어준은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얼마 전, 국내에서 가장 많은 월급을 주는 포스코에 입사했지만 6개월 만에 퇴사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그 일마저도 끊기게 되어 하릴없이 만든 것이 <딴지일보>였고, 이후 그는 지금까지 '<딴지일보> 총수'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대학 시절을 배낭여행으로 보내고도 국내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주는 직장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이 그것을 박차고 나와 "인생은 비정규직"이라고, 삶에 보직은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애초에 정규직이 될 가능성조차 너무도 희박해서 한 줌의 지푸라기를 쥐고자 그가 말하는바 '초식동물'의 삶을 감내하는 이들은, 부러움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난 다음부터, 기존에 정의되었던 표준적인 삶의 모델들이 하나씩 허물어졌다. 직장은 더 이상 직원들을 지속적으로 챙겨주지 않는다. 노동자는 쓰고 버리는 건전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고, 김어준이 유럽에서 보던 으리으리한 명품들은 이제 서울 시내 백화점만 가도 손쉽게 구경할 수 있다.
 

▲ 김어준. ⓒ프레시안(김하영)


김어준이 만들어낸 개인의 모델,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는 그래서 더욱 불안해진다. 삶이 통째로 비정규직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 칼날이 언제 내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개인주의자이고, 따라서 기존 정당과 노동운동의 조직 등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약하디 약한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감정이입과 열광뿐일 것이다.

정치선동가 김어준은 바로 그 결여를, '나는 대중들에게 열광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자아-캐릭터를 통해 채워 넣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마약 중독자이기도 한 마약 딜러처럼, 음모론적 정치선동가로서의 김어준은 정치인을 연예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 선별하여 대중들의 앞에 던져놓는다. 본래 서울대 조국 교수를 '띄우기' 위해 <닥치고 정치>를 기획했지만, 간을 보고 아니다 싶어서 문재인으로 갈아탄다는 그 모든 과정이 책에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치선동가로서의 김어준은 무책임해질 수밖에 없다. 김어준이 선동하는, '닥치고' 문재인을 지지하자는 그 '정치'는, 경제적 굴레 앞에서 자발적으로 복속하지 않을 수 없는 현재 앞에,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그저 '박근혜는 아니지 않느냐', '공동체의 최소한의 염치가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수준에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문재인을 닥치고 찍어봐야, 어차피 우리 모두의 인생이 비정규직이다. 대통령 바뀌었다고 해서 너와 나의 직장만 정규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삶의 조건이 과연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대통령을 바꿀 수 있지만, 결국 인생은 알아서 사는 것이므로, 대통령은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없다. 대통령 뿐 아니라 모든 '정치'가 그렇다. 정치를 향한 참여와 열광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지난 10여 년간, 반대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실제의 삶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들어만 갔다. 결국 2012년 대선은 박근혜와 문재인이 아니라 박정희와 노무현이 맞붙는 상징계의 싸움이 되어버렸고, '나는 꼼수다'의 열광은 세대별 인구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 결과 앞에서 '멘붕'했던 김어준은, 마이크도 채 끄지 않은 채 스튜디오를 떠났고, 스스로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늘 하던 대로 아침에 카페 가서 에스프레소 한잔 마시며 유럽·미국 뉴스 훑고, 알아둘 기사 있으면 그쪽 기자에게 연락해 뒷이야기 듣고, 관계 맺고 자료 조사하고, 구상"(<시사IN> 290호, 39쪽)했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음모론적 정치선동가가 패배를 곱씹는 사이,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페르소나가 팬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11.

1987년 민주화 투쟁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모두 놓친 한 청년은 이 좁은 세상이 너무도 갑갑했다. 때마침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루어지고, 또 3저 호황의 결과로 국내에서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만한 여비를 손쉽게 마련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그 청년의 20대는 더욱 우울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좋은 시점에 대학에 들어갔고, 사실상 '배낭여행 1세대'로서 개척 세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만끽했다.

<한겨레>에서 주관한 인터뷰 형식의 특강에서, 김어준은 늘 그렇듯 젊은이들에게 여행을 많이 다니고 연애를 하라고 조언했다. 문제는 그 여행 경비를 마련하는 방법이다. 김어준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다른 나라의 여행 여건과 편의시설 등을 소개하는 비디오를 찍어주는 대신 여행사에서 자신에게 항공권을 제공하는 '딜'을 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자기가 처한 상황 안에서 애를 써서 방법을 찾다 보면 방법은 무수히 많다고 생각"(<화 - 6인 6색 인터뷰 특강>(진중권 외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289쪽)한다고, 그러니까 각자 알아서 방법을 찾아서,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구글 지도로 파리와 뉴욕과 런던의 뒷골목까지 헤집고 다닐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구글 스트리트 뷰로 에베레스트와 킬리만자로까지 구경할 수 있게 된 지금, 이런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김어준이 처음 여행을 다니던 그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세계'의 물꼬가 트였고, 가장 먼저 뛰쳐나간 사람들은 또 누구보다 빨리 한국에 돌아와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세계'의 모습을 소개하고 전파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낭만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아직까지는 세계가 덜 평평했던 그런 시대의 모험담인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캐릭터가 김어준을 '쿨'한 존재로 만들어줬다면, 88올림픽을 즐길 수도 없었던 한 청년이 2002년 월드컵을 보며 개인에서 '우리'로 도약한 후 몇 번의 질곡을 거쳐 주조해낸 음모론적 정치선동가의 캐릭터는 그를 '핫'하게 만들었다. 얼핏 보기에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개의 입장이 한 사람의 몸에, 모종의 담론적 굴절을 통해 안착해 있다.

그 둘을 떼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치선동가가 이끌어낼 수 있는 대중적 팬덤은 개인주의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지만, 정치선동가가 삐끗할 때면 언제나 개인주의자가 구원투수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자유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21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두 개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열광의 정치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파시즘의 이상향으로 서서히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김어준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부모에게 인생을 저당 잡히고 살아가서는 안 될 개인이면서, 동시에 국가대표 축구팀의 경기를 보고 함께 환호해야 마땅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늙은 몸을 인질로 삼아 자식들의 삶을 침범하는 부모와 싸우는 청년의 건투를 빌어주지만, 그 청년이 닥치고 문재인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김어준은 그를 '겁쟁이 유인원' 쯤으로 낙인찍을 것이다. 김어준이 말하고 실현하는, '인생은 비정규직'이기에 오는 자유는, 그의 자유를 동경하는 수십만 비정규직 청취자들의 비자발적 자유가 없다면 성립할 수조차 없다. 이 간극과 양면성이야말로, 늑대소년이 PC방에 앉아 이번 시즌 아르마니 수트를 검색하고 있어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그 자체다.
 

본 원고는 비정기 문화 잡지인 <DOMINO> 3호에 실렸던 '늑대소년은 이탈리아에서 무엇을 보았나'를 수정·증보한 것입니다.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