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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홍세화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4/13 14:11
  • 수정일
    2013/04/13 14:1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능력도 매력도 없는 좌파! 무식부터 탈출하자!

[인터뷰] '가장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홍세화

김용언 기자,안은별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4-12 오후 6:21:13

 

"우리는 서로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는 행복도 모르는, 고향도 잃은, 감사할 아무런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세대다. (…) 우리는 오래 머물지도 않고, 진정한 이별도 모르고, 제 가슴에서 나는 소리를 두려워하며, 도둑처럼 그 자리에서 몸을 숨기는 세대다. (…) 그러나 우리는 모든 미래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홍세화 전 진보신당 상임대표는 인터넷 포털 다음(DAUM) 카페 '가장자리를 소개합니다'(☞바로 가기)에 올린 글에서 볼프강 베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김주연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를 인용했다. 그는 이 글에서 '존재의 진실로 불행을 버텨낸 이'의 책에서 다시 한 번 희망과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고, "신자유주의 시대의 생존법이 금기라고 가르치는 것"인 '생각'과 '우정'을 무기삼아 다시 시작하자고 썼다.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는 건, 또다시 '5년 뒤'를 기약하는 정치의 논리가 아니다.

지난 10월 진보신당 당대표를 사퇴한 뒤 겨우내 강연회나 인터뷰 등에서만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던 그는, 사유와 실천의 학습 공동체 '가장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활동 중 하나로 격월간 잡지 <말과 활>(가제) 창간도 진행 중이다. 그는 "현실"이라는 강고한 단어에서 "배제"된 자들, 뿔뿔이 흩어진 개인이지만 그럼에도 "절망을 함께 느끼고 새로운 시작을 요구하는" 이들이 함께 나설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 일을 시작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의 책상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가 꽂혀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뒤 병으로 사망한 젊은 독일 작가와 21세기 마르크스주의의 재해석을 고민하는 일본 사상가, 그 둘 사이에 놓인 거리를 모두 포용할 수 있는 힘이 '가장자리'와 <말과 활>이 앞으로 보여주게 될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자리 잡은 '가장자리' 사무실에서 홍세화 전 진보신당 상임대표를 만났다. <편집자>

 

▲ 사유와 실천의 학습공동체 '가장자리'를 준비 중인 홍세화 전 진보신당 상임대표. ⓒ프레시안(최형락)

 

지리멸렬 한국의 진보

프레시안 : 2012년 10월 진보신당 당대표를 사퇴한 지 꼭 6개월만이다. 그간 어떤 생각을 통해 학습 공동체 '가장자리'와 격월간지 <말과 활>을 구상했나.

홍세화 : 지난해 4월 총선, 1.13퍼센트라는 결과를 받아들고 나서부터 우리가 대체 어떻게 다시 시작하면 좋을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때부터 당대표를 그만두려 했지만 당내 사정이 좋지 않았다. 당시 '하방의 길을 찾아서'(☞바로 가기)란 글을 썼는데, 거기에서도 "말(言語)의 진지를 구축하는 매체의 발간과 정치-철학 교실", "'전태일의 집' 또는 '민중의 집' 건설"을 준비하겠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대선 당시의 상황을 얘기하자면, 노동자 후보를 내세우자는 당 나름의 방침은 이루어졌지만 (내부적으로) 뭔가 삐끗해서 두 명의 후보가 나오게 되었고, 그 밖의 여러 과정에서 나의 인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나타났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그 속에서 우리 '진보'의 시간의 무게가 아주 가볍다는 생각을 했다. 그 미성숙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 것인가. 역시 학습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프레시안 : 2011년부터 약 2년간 월스트리트 점령으로 상징되는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거부 운동과 함께, 한국의 좌파들은 세상이 조금 바뀌려나보다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의 올랑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이후 대규모 반핵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도 잇달았다. 그러나 실상 변한 것은 없었고, 이른바 '민주진보 진영'은 대선 이후 큰 '멘붕'에 빠져들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당신은 처음으로 진보 정치의 현장에 나섰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 새로운 학습 공동체를 시작하게 됐다. 급변의 시기에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무엇이었나.

홍세화 : 몇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 2012년 총선과 대선이 맞물리면서 정권 교체를 위한 힘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통합'이라는 폭력적인 요구다. 세상을 어떤 내용으로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섬세한 물음 없이 '일단 정권을 바꿔야 한다, 바꾸기 위해서는 통합이 이뤄져야 한다'는 식으로 폭력성이 관철되었고 거기에 이른바 진보 지식인, 언론인, 매체마저 동원되었다. 그 문제가 바로 통합진보당 사태라는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2004년 13퍼센트의 지지율을 얻었던 진보 정치의 역량이 4퍼센트대로 곤두박질치는 현실로 나타났다. 놀라운 것은 여기에 앞장섰던 지식인들, <한겨레>를 비롯한 언론이 이후 이런 지리멸렬에 대한 어떤 반성도 성찰도, 분석도 진단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내 처지에서는, 진보 진영 내부적으로도 보수 진영과의 싸움에서만큼 혹은 그보다 강한 힘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 현실, 대의나 원칙이 애당초 지켜지지 않는다는 심각한 '구멍 뚫림'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앞서 말한 '시간의 무게'의 부재다. 내가 20여 년을 보낸 유럽 사회에서는 진보라 하는 가치에 적어도 나름의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다. 우리의 경우 스스로를 진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섬세함도 고상함도
향기도 느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인간에 대한 이해나 고뇌랄까, 인문학적인 토양은 지극히 취약한데 그 위에 사회과학의 지극히 어설픈 성을 쌓는 가분수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이른바 정파의 고집은 참 세다. 비록 정파에 갇혀 있을지언정 거기서 요구되는 공부가 충분하다면 괜찮겠지만, 정파 자체에 대한 공부의 깊이는 일천한데 그 정파를 둘러싸고 있는 장벽의 높이는 한없이 높다.

이런 과정에서 허망함을 느꼈다. 레닌의 말대로, 그야말로 "시작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절망을 함께 느끼고 새로운 시작을 요구하는 기운이 뿔뿔이 흩어진
씨앗으로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이번 일들을 시도해보게 됐다. 원래는 '민중의 집' 운동을 먼저 시작하려고 했는데 결국 '말의 진지'부터 꾸리게 됐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힘이 모인다면 말의 진지가 제대로 구축될 수 있을 것이고, 그게 나름의 힘을 갖는다면 각 지역에서 민중의 집 같은 공간과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다른 이들은 '현실 정치'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니까 실제 정치에서는 당신이 지금 강조하고 있는 학습, 공부, 사유와는 다른 감(感), 외교력, 친소관계 등이 더 중요하다는 식의 이야기다. 이 둘 사이의 간극에 대한 고민이 컸을 것 같다.

홍세화 : 현실이란 말은 크게 두 가지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정말 피치 못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의미로서의 현실이다. 또 하나는 바꿔야 할 현실이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바꾸어 나가고자 하는 의지는 특히나 진보에게 중요한 힘이자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어야 하지 않은가.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한국에서는 현실이라는 말 자체가 지극히 억압적이다. 그것이 진보의 족쇄를 채우고 있다는 인식을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이라는 말이 타협, 양보, 물러서기, 혹은 일신의 안위를 위하여 유보하고 포기하는 상황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등장하곤 한다.

자본주의 체제와 대면하는 의미에서의 현실 바꾸기와 진보 정치의 역량 강화는 아주 길게 보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마치 자기 세대 안에서 아주 금방 이뤄낼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하고, 그게 잘 안 되니까 자기가 몸담고 있었던 곳에서 발을 빼 움직여버리는 행태를 보인다. 그러면서 이른바 '현실 논리'를 편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그들이 과연 구체적인 '민중의 현실'에 천착한 적 있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노동의 정치 세력화라는 과제를 두고 어떻게 노동자의 역량을 키울 것인가, 조직화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상층에 있는 간부들의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는 데만 골몰한다. 솔직히 말해 민주노총 간부들은 이른바 '포함된 자'들이고, 그들만의 논의에서 배제된 자들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 안에서 현실 논리는 배제된 자들을 또 한 번 철저하게 배제하는 논리로밖에는 남지 못한다.

배제된 자들을 위한 민주주의

프레시안 : 당대표 사퇴 이후에도 당원 신분으로 몸담고 있는 진보신당(연대회의)에서도 최근 기관지 <기관지>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가장자리'와 <말과 활>을 준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홍세화 : 어떤 문제가 있어서는 전혀 아니다. 당이라면, 그것도 진보 정당이라면 나름의 기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나로서는 (<기관지> 창간이) 굉장히 바람직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내가 벌이는 작업과는 성격이 많이 달라서 부딪칠 이유는 없다.

프레시안 : <말과 활>의 색깔, 취지,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홍세화 :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10여 년이 흐른 현재의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보자는 취지다. 특히 노동 분할이라는 시대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싶다. 전체적인 색깔은 담론과 현장 르포르타주가 함께 들어가는, 지나치게 학술적이지 않은 분위기의 '좌파 교양지'로 만들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내가 진보요'하면 그 사람이 진보가 된다. 레드 콤플렉스의 영향 때문인지 그 선언만으로도 고마워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일종의 전횡이 일어난다. 진보적인 비판 의식의 형성이 대개 뒤집힌 채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구체적인 모순과 마주한 뒤 비판적인 눈을 키워나가는 게 아니라 좌파라는 선언을 하고 특정 정파적 입장에 따라 문제를 재단한다고 할까.

그 계기가 보통 학교에서 학생회 선배와의 만남인데, 한국 사회가 분단 사회다 보니 아무래도 가장 처음 접하는 분야가 현대사다. 어쩔 수 없이 흔히 말하는 엔엘(NL, National Liberation)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할까, 일단 그들을 거치게끔 되어 있고 거기서부터 여러 관점을 취해 나간다. 그런데 워낙 정파의 성벽이 높아서 (다른 문제의식이) 삼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미국만 물러가면 온갖 모순이 해결되는 양 생각한다거나, 마찬가지로 오로지 여성주의적 관점, 생태주의적 관점으로만 보려 하는 흐름이 일어난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역량을 키워나가는 건 좋지만, 모두가 닫혀 있는 것이다. 그걸 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굳이 '교양'이라는 말을 썼다.

그런 열려 있는 교양을 토대로 배제된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잡지로 만들어 나가고 싶다. 갈가리 찢어져 있는 많은 영역들을 서로 만날 수 있게 벽을 허무는 일을 누군가 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더 이상 책 몇 권 읽은 것 가지고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아는 양 행세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토론도 불가능하다. 오랫동안 유럽 사회에 있으면서 느낄 수 있었던 인간에 대한 섬세한 시각을 여기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 늘 아쉬웠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이라는 존재의 떨림, 흔들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진보(좌파)의 교양지'에서 좌파의 범주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현재 한국에서 좌파 혹은 진보라는 단어의 스펙트럼은 지나치게 방만해졌는데.

홍세화 : 앞서 말한 대로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이 외환 위기 이후 자본의 위기를 노동 부문에 전가하면서 생겨난 노동 분할 문제들이다. 그 하나의 단초로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식당 노동자 퇴출 사건이 상징적이다. 가장 강하고 전투적인 노조로 알려졌던 현대차 정규직 노조가 정리해고구조조정에 맞서다가 가장 약한 고리인 식당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300여 명을 희생시키는 타협을 했다. (*이는 <밥, 꽃, 양>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편집자 주) 자본의 위기가 노동에 전가되고, 그것이 확장되어 가장 약한 노동자들이 희생되는 구조를 잘 보여준다.

이 과정에 일차적으로 책임이 있는 건 정리해고법, 파견법, 비정규직법 등을 통과시킨 김대중·노무현 자유주의 정권 세력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자유주의 세력에 의하여 노동 분할이 아무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 이 부분을 잘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전까지는 박정희 시대에 양산된 '성장교(敎) 신도'들이 문제였다면, 외환 위기로 삐끗한 이후로는 거기다가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추가된다. 자유주의 정권은 노동을 분할함으로써,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배제시킴으로써 '위기를 타개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지금 남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제 공황 상태가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도 일어난다면, 더 이상 희생을 전가시킬 곳이 어디 있겠는가. 더 없다고 했을 때 사회의 혼란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알려진 바와 같이 독일 같은 사회에서는 '희생양 만들기'가 진행됐다. 우리도 내부에서 어떤 약자들을 축출 대상으로 골라낼 것인가 하는 커다란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흐름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문제, 또 그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즉 여기에는 그 사람들을 위기에 휩쓸려가지 않게 하는 문제와 그 사람들 스스로 주체로 나서기 위한 작업이라는 이중의 맥락이 있다. 어쨌든 진보 또는 좌파의 교양을 지향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배제된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고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와 실천의 양 날개

프레시안 : <말과 활>이라는 제호명은 어떻게 지었나.

홍세화 : 내가 지은 건 아니다. '고구려적이다'라는 말도 있기는 한데(웃음), 가제이긴 해도 결국 이대로 갈 것 같다. 말은 사유를 의미하고 활은 '활동'의 활(活)과 무기 활을 동시에 뜻한다. 즉 실천을 은유한다.

프레시안 : 그동안 만들어 온 <아웃사이더>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같은 정기간행물에서는 지식인의 극우성, 지식인의 죽음, 지식인의 소명 등의 주제를 크게 다루어 왔다. 이런 일련의 흐름이 <말과 활>에서도 연속되게 나타날지 궁금하다.

홍세화 : 그 주제가 빠질 수야 없겠지만 주된 내용이 되진 않을 것이다. 지나친 학술적 논의는 경계하기로 했다. 담론 영역도 각주 없는 에세이 식으로 다루는 것을 원칙 삼기로 했다. 또 그런 내용은 절반이고, 절반 가까이는 현장의 르포로 채울 예정이다. 현장의 기록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과연 어떤 갈등과 고민이 있는지, 현장에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려고 한다. 그 구체적 사건과 서사들을 담론 영역에 접목시키고 맥락화하게 될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요즘 격월간 잡지는 흔치 않다. 어떤 이슈, 담론이든 빠르게 소비하는 스마트폰 시대에 격월간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홍세화 : 지금 함께 하고 있는 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에서 가장 적절한 수준이 아닐까 싶다. 월간은 너무 바쁘고 계간은 너무 늦다. 스마트폰 시대에는 어차피 일간지도 그 속도를 못 따라간다. 시의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분석과 흐름, 맥락을 짚어주는 작업도 반드시 요구된다. 현장과 사유 양쪽에 발을 담그고 진단과 분석, 전망을 제시하면서도 너무 뜸하지 않고,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하중이 오지 않는 그릇으로 격월간이 적합하다고 봤다.

프레시안 : 참여하는 편집위원들은 누구인가?

홍세화 : 편집위원이 아니라 편집 네트워크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다른 잡지처럼 위원회가 이끌지 않고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중심에 둔 열어놓은 형태다. 지금으로선 약 20여 분이 분야별로 모여 깊이 있게 논의하는 식으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모두가 주체로 나서는 인문학"


프레시안 : <말과 활>은 학습 공동체 '가장자리'의 여러 활동 중 하나로 보인다. '가장자리'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나갈 예정인가.

홍세화 : '가장자리'는 내가 지은 이름이다. 변방이나 경계를 의미하기도 하고,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물러섬의 의미도 갖는다. 또 중앙 집중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러니 사실 서울에 있어선 안 되는 거긴 하다. (웃음) 어쨌든 '가장자리'라는 은유적 표현에 포함된 삶의 자세에 동의할 수 있는 분들과 함께 이 세상을 주체적으로, 섬세하게 고민하는 모임이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책 읽는 모임을 포함해 어떻게 네트워킹해 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 중이다.

프레시안 : 최근엔 인문학도 하나의 인기 상품이 되어버린 단어다. 인문 강좌, 인문학 콘서트의 수요가 많다. 특히 인기 강사진의 대형 강좌는 반응이 폭발적이다. '가장자리'는 이와 달리 소규모 모임을 지향하고 협동조합 방식을 채택했다. 단기간 내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방식도 고려해봄직 했을 텐데.

홍세화 : 두말할 것도 없이 주체의 문제 때문이다. 참여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대상화하지 않고 주체로 나서기 위해서는 그런 방식을 지향해야 했다. 워낙 주입식 교육에 익숙하기 때문에 각자가 표현에 나서기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서로 가까이서 만나기를 바라면서, 주체들이 자발적으로 솟구쳐 나오기를 바라면서 작고 참여적인 방식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인문학이 대체 뭐겠는가. 세상의 의미 있는 변화를 추동하면서 자기 형성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궁극적
목표 아니겠는가. 내 삶의 문제와 동떨어질 때, 그저 대상화되고 소비되기만 할 때 그것은 인문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문학을 '소비'하지 않고 '향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가 지금의 구조 속에서 어려운 과제인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옳은 길이라면 그 길로 가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홍세화 : 소위 진보 진영의 사람들이 아집이 센 편이라고 느꼈다. 그들이 생각을, 회의(懷疑)를 좀 했으면 좋겠다. 스스로 지금 정말 자기 존재의 완성태에 이르렀는지 물었으면 좋겠다. 감히 그렇다고 답 못할 것이다. 겸손함을 잊고 스스로 존재의 완성태에 이른 양 행동하면서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것 같다. 존재의 떨림과 시간의 무게를 살려내고, 그 속에서 호흡하면서 인간이라는 약한 존재로서의 출발점을 찾았으면 좋겠다.

감히 스스로 완성태에 이르렀다고 답하지 못하는 존재라면, 당연히 공부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그런 의미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 자세, 그 자리매김에 동의한다면 우리 모두 가장자리에서
만나자.
 

ⓒ프레시안(손문상)
 
 
 

 

/김용언 기자,안은별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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