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북한 핵무기연구소 관계자들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위한 폭파작업을 했다. 풍계리 핵실험 관리 지휘소시설 폭파순간 목조 건물들이 폭파 되며 산산이 부숴지고 있다. 이날 관리 지휘소시설 7개동을 폭파했다. 북한 핵무기연구소 관계자들은 '4번갱도는 가장 강력한 핵실험을 위해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북한이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만탑산 계곡 ‘북부핵시험장’의 갱도와 관련 시설을 연쇄 폭파해 폐기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를 향한 첫 가시적 실천 조처를 선제적으로 단행한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최근 ‘한-미 연합군사훈련’과 ‘비핵화 방안’ 등을 놓고 고조되던 북-미 간 신경전이 급기야 회담 취소로 이어진 것이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의식’은 이날 오전 11시께 북쪽 2번 갱도와 관측소 폭파의 굉음과 함께 시작됐다. 북쪽이 지금껏 실행한 6차례의 핵실험 가운데 5차례를 소화한 2번 갱도는 풍계리 핵실험장의 상징적 심장부다.
북한은 이어 오후 2시17분에 서쪽 4번 갱도와 단야장(금속을 불에 달구어 벼리는 작업을 하는 자리)을 폭파했다. 곧이어 시설 관련자들이 사용해온 생활건물 본부 등 5개 건물을 철거(2시45분)했다. 핵실험에 한번도 사용되지 않아 4번 갱도와 함께 이번 폐기 행사의 핵심으로 꼽힌 남쪽의 3번 갱도는 오후 4시2분께 폭파됐다. 15분 간격으로 현장에 남은 군 막사 2개동까지 폭파돼 이날 ‘폐기 의식’은 마무리됐다. 동쪽의 1번 갱도는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뒤 방사능 오염을 이유로 이미 폐쇄돼, 이날 따로 폭파하지 않은 듯하다.
북한 핵무기연구소는 이날 저녁 성명을 내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핵무기연구소에서는 24일 핵시험 중지를 투명성 있게 담보하기 위하여 공화국 북부핵시험장을 완전히 폐기하는 의식을 진행하였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각) 저녁 뉴욕에서 열린 이민 관련 행사에 참석한 뒤 백악관으로 돌아와 숙소로 들어가며 손을 흔들고 있다. UPI 연합뉴스
그러나 이날 밤 늦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북한 외무성 관리들이 미국을 강경하게 비난한 것을 이유로, 6월12일로 예정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당신을 몹시 만나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당신들이 최근의 담화문에서 드러낸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인 적대감을 볼 때, 나는 이번에는 오랫동안 계획해온 회담을 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따라서 이 편지는 우리 양쪽을 위해, 그러나 세계에는 손해를 끼치겠지만, 이번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을 것임을 밝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지난 16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리비아 모델’을 거론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난하면서 북-미 정상회담을 “재고려”할 수 있다고 한 데 이어 24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거듭 같은 기조의 담화를 발표한 데 자극받은 것으로 보인다. 최 부상은 이날 담화에서 “미국이 우리의 선의를 모독하고 계속 불법무도하게 나오는 경우 나는 조-미(북-미) 수뇌회담을 재고려할 데 대한 문제를 최고지도부에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겨냥해 “핵보유국인 우리 국가를 고작해서 얼마 되지 않는 설비들이나 차려놓고 만지작거리던 리비아와 비교하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인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편지에서 김 위원장에게 “당신이 핵 능력을 말했는데, 우리 핵 능력은 내가 그걸 사용할 일이 없기를 신에게 기도할 정도로 아주 거대하고 강력하다”고 했다. 북한이 “미국이 우리를 회담장에서 만나겠는지 아니면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나겠는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과 처신 여하에 달려 있다”(최선희 부상 담화)며 핵 능력을 과시한 것을 반박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특히 북한은 항구적 평화와 위대한 번영, 부유함의 기회를 잃었다. 이 상실된 기회는 역사에서 매우 슬픈 순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북-미 정상회담을 재추진할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그는 “언젠가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한다”며 “이 가장 중요한 정상회담과 관련해 마음이 바뀌면 주저하지 말고 내게 전화하거나 편지를 보내달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미국인) 인질들을 풀어준 것은 훌륭한 제스처였고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밤 트럼프 대통령의 서한이 공개된 뒤 외교·안보 참모들을 관저로 긴급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의 뜻이 무엇인지,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고 시도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주 김계관 부상의 강경한 담화와 남북 고위급 회담 취소 등으로 경고등이 켜졌던 남-북, 북-미 관계는 23일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6월12일 북-미 정상회담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합의함에 따라 동력을 얻는 듯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진행할 뜻을 밝혔고, 북한이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의 핵실험장을 외국 언론인들 앞에서 폭파한 것도 긍정적 신호로 여겨졌다. 이번 주말 싱가포르에서 북-미 고위급 접촉이 이뤄질 것이라는 보도까지 나오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취소를 선언함에 따라 올 들어 쌓아온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급속한 냉각기를 맞으며 다시 위기 국면에 들어서게 됐다.
공동취재단, 김지은 황준범 성연철 기자
mirae@hani.co.kr
[화보] 풍계리 취재단이 본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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