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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년들의 동네 공존기]함께 살기·일하기·놀기…‘상생의 풍경’ 을지로의 재발견

[커버스토리-서울 청년들의 동네 공존기]함께 살기·일하기·놀기…‘상생의 풍경’ 을지로의 재발견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입력 : 2018.07.28 06:00:03 수정 : 2018.07.28 06:01:01

 

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서울 을지로의 공업소 골목은 세월이 흘러 쇠락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지난 26일 공업소 골목에서 한 노인이 짐수레를 밀며 지나가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서울 을지로의 공업소 골목은 세월이 흘러 쇠락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지난 26일 공업소 골목에서 한 노인이 짐수레를 밀며 지나가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세운상가, 도시재생으로 탈바꿈 
‘원주민’과 새로 온 청년들 ‘협업’
“추억 조명에만 집중해 아쉬워” 

낡은 골목에 숨은 ‘핫플레이스’ 
공업소 사장님과 전시 연 예술가
“늘 긴장되는 건 젠트리피케이션” 

수십년 한 곳을 지켜온 사람들과 
새로운 세대가 함께하는 공간
을지로가 다시 주목 받는 이유
 

을지로에는 오래된 시간과 새로운 시간이 같이 흐른다. 수십년째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낡은 간판들 사이로 간판도 없는 아지트 같은 새로운 공간들이 숨어들었다. 또 을지로는 수십년째 성실한 노동을 수행해온 사람들의 땀이 흐르는 공간이면서 젊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발현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을지로가 기존의 강남이나 이태원 등 ‘핫플레이스’와 다른 이유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이전 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공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롭게 주목받는 을지로의 골목골목을 들여다봤다. 
 

■ 다시·세운 프로젝트 

1968년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로 문을 연 세운상가는 올해로 50년이 됐다. 상류층이 거주하는 호화아파트로 주목받았고 한때는 국회의원회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90년대 재정비 논의가 대두하면서 철거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가 도시재생으로 방향이 전환됐다.

2015년 11월 서울시는 ‘2025 서울시도시재생전략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의 노후한 지역 13곳을 선정해 서울형 도시재생사업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계획이 담겼다. 세운상가도 그중 하나였다. 2015년부터 착수한 공사는 2017년 9월 1단계 사업을 마친 상태다. 세운초록띠공원이 있던 자리에는 세운광장이 탄생했고 3층 보행 데크가 정비되면서 세운상가 가동과 대림상가 사이에는 공중 보행교가 등장했다. 보수 과정을 거친 보행 데크에는 청년 스타트업, 창업점포 등이 입주했다. 오래된 가게와 새로운 가게는 공간만 공유하는 게 아니었다. 세운상가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장인·상인들과 새로 이곳에 들어온 청년들의 협력도 이어진다. 한때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세운상가 장인들의 저력이 요즘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다. 서울시는 기술력을 가진 장인과 청년들의 세대 간 교류를 주제로 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을지로를 4차 산업혁명의 혁신지로 부각시키려 한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가 새로운 일상을 만들기보다 오래된 ‘추억’을 조명하는 데 집중하는 점이 아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34년째 세운상가에서 전자통신기구를 판매하고 있는 정성규씨(57)는 새롭게 주목받는 세운상가가 오랫동안 이곳에서 전자제품 유통업에 종사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담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 “도시재생으로 만들어진 변화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어요. 그러나 예스러운 것, 추억할 수 있는 오디오 장비, 수리나 제조 이런 것들만 다루거나 아니면 아예 새롭게 들어온 것만 조명하는 게 아쉬워요. 저희처럼 오래 한 곳에서 전자제품을 팔아온 사람들도 세운상가를 지켜온 사람이거든요. 여기 들어온 청년층은 아직 좀 이질적으로 느껴져요. 저희와는 교집합이 별로 없으니까요. 전자제품 유통시장이 어렵긴 하지만 온·오프로 판매망을 넓힌 사람들도 있고 또 제조 아웃소싱과 같이 하기도 하고 다양한 콘셉트로 시도하고 있어요. 소규모지만 기반을 잡고 가는 가게들인데 여기에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지난 1월 서울 을지로에 문을 연 펍(pub) ‘감각의 제국’. 박송이 기자

지난 1월 서울 을지로에 문을 연 펍(pub) ‘감각의 제국’. 박송이 기자 

■ 숨어있는 핫플레이스 

을지로는 종종 ‘핫플레이스’로 소개되지만 막상 을지로에 들어서면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그날의 노동을 이어가고 있는 인쇄소·공업소 골목에서 변화의 조짐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방을 둘러봐도 ‘핫’하다는 카페나 펍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을지로3가역 앞 인쇄소 골목. 한 건물 입구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은 입간판이 서 있다. 한지에 붓글씨로 ‘감각의 제국’이라고 쓰여 있고 그 옆에는 #4층 #열린문화회관, #무릉도원 #퇴사잼 #펍 등의 해시태그에 붙어 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건물 층계를 따라 올라가니 2층엔 영화 관련 협회, 3층엔 적막하게 문이 닫힌 사무실이 있다. 한 층 더 올라가봤자 아무래도 ‘펍’ 같은 게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4층에 올라가 꽉 닫힌 문을 여니 갑자기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복고 감성을 자극하는 형형색색의 조명 아래 2명의 디제이가 디제잉을 하고 있다. 

이곳의 주인인 흥건씨(별칭·38)는 10년 동안 광고업계에서 일하다 2년 전 퇴사했다. 유명 광고제에서 상도 받고 즐겁게 광고 일을 했지만 더 늦기 전에 해보고 싶은 걸 해보자는 생각에 지난 1월 이곳에 펍을 열었다. 주변에서 작업실을 하고 있는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하고 영화도 상영한다. “단골 중에 예술가들이 많아요. 같이 놀다가 전시 같이 해보자, 음악 하면 여기서 공연해보자 이렇게 하는 거죠. 을지로는 그런 걸 펼치기 좋은 공간이에요.” 새로운 공간들이 간판 하나 없이 아지트처럼 숨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오래도록 인쇄소 하시고 공업소 하신 분들이 많은데 뭔가 새로운 가게들이 막 들어서서 골목을 접수하는 듯한 인상을 보이면 그렇잖아요. 또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막 드러내놓고 하기보다는 좀 숨겨놓는 게 아닐까 싶어요.”

예술가 그룹 R3028이 지난 6월 서울 을지로의 한 골목에서 ‘철의 골목’이라는 주제로 음악공연을 하고 있다. R3028제공

예술가 그룹 R3028이 지난 6월 서울 을지로의 한 골목에서 ‘철의 골목’이라는 주제로 음악공연을 하고 있다. R3028제공

■ R3028 

을지로에는 저렴한 임대료로 작업실을 찾는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홀로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인근의 장인·상인들과 어우러지기도 한다. R3028은 을지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그룹이다. R3028 고대웅 대표는 2016년 이곳에 작업실을 열고 ‘창작’ ‘전시’ ‘공연’ ‘예술교육’ ‘도심재생사업’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조형예술을 전공한 고 대표는 2015년 임대료가 낮은 작업실을 찾다 을지로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중구청의 공간지원사업을 통해 작업실을 꾸린 후 지역 기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예술과 을지로의 철골목은 멀게 느껴지지만 고 대표는 함께 하는 작업을 통해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다고 본다. “처음에는 낯설게 느끼시는 것 같았어요. 사실 이분들은 일한 만큼 수익을 내는, 어떻게 보면 정직하게 살아오신 분들인데 그림 그리고 조각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패턴에 대해서는 인식차가 있으셨겠죠. 이곳 사장님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공연, 기념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고 정이 많이 들었죠. 골목길에 멍하니 서 있으면 한쪽에서 팔짱 끼시면서 막걸리 먹으러 가자고 하세요. 정이 많은 이웃, 형들이 생겼죠.” 

지난 6월에는 산림동 한 골목에서 ‘철의 골목: 야인시대’ 전시를 열었다. “6·25 전쟁이 끝나고 험난한 시기, 산림동 골목에 모여든 사람들이 땀과 노력으로 불어넣은 바람이 철을 녹였고 한국의 산업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죠. 그들의 소망대로 아들, 딸들은 굶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나 우리는 어느덧 그 시간을 잊어가고 있어요. 그들의 노고가 녹아 있는 골목에서 그들의 삶을 주목하는 전시를 열었어요.” 공업소 ‘사장님’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진행하는 작업도 있다. “13곳의 공업소와 13명의 작가들을 매칭해서 셔터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작가들이 공업소 사장님들과 함께 시안을 짜서 그림을 그렸죠. 시안을 짜는 과정에서 공업소 사장님들도 예술 주체가 되는 거죠.”

관계를 이어가고 골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 즐겁지만 늘 긴장되는 건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젠트리피케이션은 쫓아올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미 청계상가 서편은 재개발이 시작돼 26층 건물이 들어온다고 해요. 동네 경관이 달라지고 상업의 변화도 극심해질 거예요. 사람들이 을지로가 ‘힙’하다고 하는데 그건 강남에서 느낄 수 없는 게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가치를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제조업·인쇄소 골목은 건재할까 

을지로에는 공구나 철물부터 금속을 다루는 공업소, 가구·조명·타일·도기까지 품목별로 자연스럽게 골목이 형성됐다. 을지로에 가면 없는 게 없고 구하지 못하는 게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과거 미군 부대의 기계와 공구를 가져다 팔면서 만들어진 소규모 업장들이 점점 늘어나며 을지로는 제작과 수리, 판매, 중간 단계의 상인까지 연결되는 제조 산업 클러스터로 발전했다. 모든 업종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하나의 공정을 처리한 사업장이 다음 공정을 담당하는 사업장을 소개해주는 사업방식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을지로 제조 산업의 많은 부분이 용산과 영등포, 구로 등 도심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을지로 인쇄 골목은 을지로 3가와 4가 그리고 충무로 일대에 이른다. 크고 작은 인쇄 업체가 밀집한 골목에는 쉴 새 없이 짐을 실어나르는 오토바이와 ‘삼발이’가 오고 간다. 을지로 인쇄 골목은 충무로 일대에 영화관이 등장하면서 전단지와 포스터 등을 인쇄하면서 성장해왔다. 1980~1990년대가 인쇄 골목의 전성기였으나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물량이 급감하고 이후 IT산업 발달 등으로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 지금 다시 을지로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1인 가구 위주의 저성장 시대, 해법은 도시재생” 

서울연구원 보고서…주민 참여 확대·임대료 안정화 대책 필요
 
서울연구원이 발간한 ‘서울의 미래, 도전받는 도시’ 보고서는 2040년 서울이 직면할 과제를 예시했다. 서울은 저성장과 고령화를 겪고, 기후변화와 세계화에 적응해야 한다.
 
보고서는 이 문제들에 대한 해법의 하나로 ‘도시재생’을 꼽았다. 기존의 도시정비 사업이 낡은 주택 등을 한꺼번에 부수고 새로 짓는 방식이라면, 도시재생은 지역의 역사·문화와 도시의 유산을 보존하면서 시민들의 변화한 생활양식에 맞게 공간을 개·보수하는 방식이다. 도시재생은 전면 철거방식인 신축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주민들이 참여해 지역 커뮤니티 기능을 강화할 수 있어 1인 가구 위주의 저성장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사회에 적합한 모델로 꼽힌다.
 
중앙정부 역시 도시재생 사업에 눈을 돌리고 있다. 정부는 2013년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쇠퇴도시지역을 대상으로 도시재생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도시재생을 공약으로 제시한 문재인 대통령은 도시재생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추진 중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주민참여형 도시재생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 도시재생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이나 체감도는 낮다. 당초 취지와 달리 지역주민의 요구나 필요 사업보다 관주도의 도시재생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한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추진하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결국 지가·임대료 상승, 부동산 투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대책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정부는 도시재생 뉴딜사업 추진지역을 발표하며 투기 조짐이 보이면 사업을 철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투기를 방지할 실질적인 개발이익 환수대책이나 젠트리피케이션 대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향후 임대료 안정화를 골자로 하는 ‘상생협약 체결 활성화’를 제시하긴 했지만, 이는 당사자가 거부하면 강제할 수 없다. 실제로 2014년 서울형 도시재생사업이 처음으로 시작된 서울 종로구 창신·숭인지구에서는 거래량이 늘고 지가가 오르는 등 투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임대료 갈등의 극단적 사례인 서울 서촌의 ‘궁중족발’은 ‘상생협약’이 별다른 실효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개정’이 절실하지만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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