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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가슴만 더 아파요”

[커버스토리]“유미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가슴만 더 아파요”

속초 |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삼성 사과 이후…‘백혈병 피해자’ 고 황유미씨 부모 인터뷰

고(故) 황유미씨의 어머니 박상옥씨(왼쪽)와 아버지 황상기씨. 속초 | 이준헌 기자

고(故) 황유미씨의 어머니 박상옥씨(왼쪽)와 아버지 황상기씨. 속초 | 이준헌 기자

 

황유미씨는 아버지의 택시 뒷자리에서 숨졌다. 2007년 3월6일,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백혈병 치료를 받고 속초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앞좌석에 있던 유미씨 부모는 심상치 않은 딸의 숨소리를 듣고 영동고속도로 갓길에 급히 차를 세웠다. 어머니가 딸의 눈을 감겼다. 삼성전자에 취직해 기숙사로 떠나는 열여덟살의 유미씨를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서 기쁜 마음으로 배웅한 지 3년5개월 만에 부부는 딸을 영원히 잃었다. 

그 후로 11년, 유미씨 가족은 ‘삼성 백혈병 투쟁’의 상징이 됐다. 2018년 11월23일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는 삼성 백혈병 문제에 대한 최종 중재안을 냈고, 삼성은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유미씨가 세상을 떠난 지 4280일 만이었다. 5일 속초에서 유미씨의 부모인 황상기(63)·박상옥(58)씨 부부를 만났다. 딸이 세상을 떠난 뒤 우울증을 앓았던 어머니는 이날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 두 분 건강은 어떻습니까. 

황상기씨(이하 황) = 괜찮습니다.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씨는 괜찮다고 했지만 실은 이날 오전 급하게 치과에 다녀왔다. 이를 4개나 뽑았다. 이 뿌리가 다 썩었는데 노숙농성을 오래 하다가 치료할 때를 놓친 것 같다고 했다.

- 어머님은 우울증을 오래 앓았다고 들었습니다. 

박상옥씨(이하 박) = 저는… 아직 괜찮지 않아요. 우울증약도 먹고 위장약도 먹고. 여러 곳이 아파서…. 
 

삼성의 사과, 다짐으로 생각…중재안에 하청업체들도 포함해야죠
 

|우리 둘째 딸은 
남동생 공부 돕겠다고 고3 때 취직
삼성 입사한다니까 주위서도 축하 
2년 만에 급성백혈병 판정받고
2년 뒤 내 택시 안에서 세상 떠나 

 

|긴 싸움의 시작 
“개인적 질병인데 회사에 바가지”
산업재해 주장에 돌아온 건 고성 
언론도 정당도 날 도와주지 않아
이종란 노무사 만나면서 본격 소송
 

- 삼성과의 중재안에 마음이 복잡하셨을 것 같습니다. 

황 = 기분을 뭐라고 딱 한마디로 얘기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랜 시간을… 유미가 병에 걸린 게 2005년 6월 초니까 13년 반쯤 걸린 거거든요. 협약식 하는 날 ‘내가 정말 사인을 해야 하나’ ‘이 사람들하고 악수를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근데 억울함만 가지고 문제를 풀 수는 없는 거니까요. 지금 힘들게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한텐 삼성의 사과도 중요하지만 치료할 돈과 먹고살아야 할 돈이 더 중요하거든요. 만족하기 어렵지만 합의를 안 할 수가 없어서 한 거예요.

박 = 전 속 시원한 건 없어요. 우리 유미가 살아온다면 모를까…. 살아오지 않는 한… 가슴만 더 아파요. 삼성이 사과를 했다는데 진정성 있는 사과인지, 겉으로만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 중재안에선 어떤 점이 아쉬운가요. 

황 = 이번 중재안에선 삼성 반도체 공장과 LCD 부문 노동자들에 대한 것만 합의를 했거든요. 디스플레이 부문은 빠졌어요. SDS, SDI… 휴대폰 제조하는 하청업체, 협력업체 노동자들은 포함이 안됐어요.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병에 걸렸는데도 안 들어갔기 때문에 상당히 억울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이번 중재안은 개인별 보상액을 낮추되, 피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최대한 포함하는 방안으로 마무리됐다. 황씨 가족을 비롯해 여러 피해자들이 개별적 손해를 감수한 결과다.

- 삼성의 사과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황 = 이번 사과는 다짐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삼성이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 500억원을 출연하고 공공기관에 기탁해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안전문제를 연구하기로 한 거거든요. 돈을 내놓는다고 끝이 아니에요.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어떤 화학약품을 쓰는지도 알아야 하는데 삼성에서 자료 제출을 안 하면 병과 노동자의 인과관계 규명을 방해하는 거예요. 삼성은 여태껏 공익적 약속이라고 해놓고 지킨 적이 한번도 없어요. 삼성이 앞으로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야 피해자들은 그것이 진정성 있는 사과라고 인정할 거예요. 지금 당장 (이번 사과문이) 사과다 아니다 판단하긴 이른 것 같아요. 삼성은 10년 넘게 거짓말만 반복해왔어요. 처음엔 유미의 질병은 회사와는 아무 상관 없는 개인 질병이라고 했다가, 화학약품은 취급도 안 한다고 했다가, 나중엔 안전한 화학약품만 쓰는데 뭘 쓰는지는 영업비밀이라고…. 대기업이 대기업다운 행동을 해야죠. 자기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병에 걸려 죽게 만들어놓고 끝까지 책임 안 지려고 10년 넘게 가난한 노동자들을 몰아붙인 건 상당히 파렴치한 행동이잖아요. 

<b>아버지 택시 안에서 떠난 딸</b>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휴무’ 조명이 켜진 택시를 몰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 삼성과 싸운 11년 동안에도 황씨는 1주일의 절반은 택시기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아버지 택시 안에서 떠난 딸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휴무’ 조명이 켜진 택시를 몰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 삼성과 싸운 11년 동안에도 황씨는 1주일의 절반은 택시기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 유미씨는 어떤 딸이었습니까. 

박 = 3남매 중 둘째였는데 아주 착하고 솜씨 좋고 노래를 잘 불렀어요. TV에 나오는 거 보면서 율동 다 따라하고 웃고… 사진도 잘 찍고(박씨는 이날 인터뷰 중 이때 유일하게 엷은 미소를 지었다).

- 속초상고를 다니다 졸업 전에 취직이 됐죠. 

황 = 저는 전문대학에 가길 바랐는데 유미는 굳이 취직해 남동생 공부를 돕고 결혼할 돈도 벌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 취직했을 땐 다들 기뻐하셨겠네요. 

황 = 그랬죠. 고3 때 삼성에서 학생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서를 보냈어요. 성적 상위 30% 애들 중에 취업할 사람을 모집하는데 유미가 신청한 거예요. 삼성이 대기업이라 월급도 많이 주고 복지도 좋다고 해 주위에서 다들 아주 잘했다고 그랬어요. 나도 자랑도 하고 그랬어요. 2003년 10월5일에 속초상고에서 한 10명인가 선발돼서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서 수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죠. 나랑 유미 엄마랑 같이 가서 태워 보냈어요. 기숙사로. 

- 회사생활은 어때 보였습니까. 처음부터 힘들어했나요. 

박 = 일보다는 기숙사 생활이 좀 힘들어 보였어요. 유미가 막내라 쉬는 날이면 자기가 청소를 많이 한 것 같더라고요. 

황 = 4조 3교대로 일했는데 쉬는 날은 집에 종종 왔어요. 유미도 냉면을 좋아하고 유미 엄마도 냉면을 되게 좋아해요. 자기가 월급받은 돈으로 냉면도 사먹고 엄마랑 동생 옷도 사주고 그랬죠.

- 유미씨가 아픈 건 언제 알게 됐나요. 

박 = 2005년 5월 말쯤에 자꾸 어지럽고 토한다고 전화가 왔어요. 우린 체한 줄만 알고 소화제를 사먹으라고 했죠. 근데 자꾸 숨이 차고 멍이 든대요. 그래서 회사 앞에 작은 병원에 갔더니만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대요. 6월인가 병원에서 엄마·아빠가 좀 와야 한다고 해서 갔는데… 가서 보니까 애가 주사를 꽂고 병실에 누워 있더라고요. 사실 나는 그전에도 애가 눈이 희미해 보이길래 속으로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그게 아파서 그랬던 거였어요. 

황 = 병실에 있는데 의사가 저를 잠깐 복도로 나오라고 하더니 급성골수성백혈병이래요. 그 얘길 들으니까 다리에 힘이 없고 머리가 멍해지더라고요. 아는 선배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백혈병에 걸렸는데 죽어서 화장하고 제가 같이 산에 가서 뿌려준 적이 있어요. 그 생각이 딱 났죠. 유미한테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아, 며칠 있다가요… 그때가 아주 더웠는데 유미를 데리고 시원한 그늘 쪽에 앉아 병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집을 지으려고 돈 모아놓은 게 있으니 치료비는 걱정하지 말고 치료만 잘 받으면 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유미가 ‘우리 집에 돈이 어딨어’ 하고 걱정하더라고요.

- 회사에는 그때부터 못 나가겠군요. 

황 = 네. 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했어요. 다행히 2005년 12월6일에 골수이식수술을 받았어요. 수술하고 회복이 잘됐어요. 

- 삼성에선 언제 처음 연락이 왔나요. 

황 = 2006년 9월쯤에 회사 과장이 라인 담당하는 사람과 둘이서 집에 왔어요. 과장이 나랑 둘이서 얘길 하재요. 그러더니 더 이상 휴직을 해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사표를 써야 하는데 사표 쓰기 전에 회사에 하고 싶은 얘기를 해달래요.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만 6명인데 산업재해로 인정해 치료받게 해달라고 했어요(유미씨는 2인 1조로 일했는데 유미씨와 함께 일하던 이모씨도 백혈병에 걸려 2006년 8월 숨졌다). 그랬더니 그 과장이 ‘아버님 이 큰 회사 삼성을 상대로 이기려고 그러십니까’ 그래요. 난 못 이긴다고 했어요. 내가 어떻게 이겨요. 그럼 다른 걸 얘기하래. 그때까지 유미 치료비가 8000만원 정도 들어갔어요. 근데 회사에서 유미 치료비 모금운동도 하면서 유미 통장으로 얼마씩 돈을 보내준 게 있었어요. 그걸 합해보니까 3000만원쯤 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나머지 5000만원을 해달라고 했어요. 과장이 그렇게 하자면서 저쪽 방에 있는 유미를 오라고 하더니 백지 한 장을 꺼내서 반으로 접고, 거기에 유미 주민등록번호랑 이름을 쓰래요. 

- 유미씨가 싫다고 하진 않았나요. 

황 = 유미는 그 상황을 잘 몰랐어요. 쓰라고 하니까 쓴 거죠. 우리는 이게 직업병 같다고 의심은 했지만 사실 잘 모르잖아요. 근데 5000만원 치료비를 해준다니까 상당히 고마운 거예요. 그때 여기 송이가 많이 날 땐데, 내가 송이 따는 친구가 있어요. 송이 좀 땄냐고 물어보니까 큰 거 두 개가 있다고 해서 ‘유미가 일했던 곳 과장님이 오셔서 치료비를 해주신다니 그분들 드리게 좀 가져와’ 했죠. 송이가 아주 커서 신문지에 둘둘 싸서 줬죠. 

- 그걸 받아가던 가요. 

황 = 네. 근데 며칠 있다 보니까 유미가 밥도 잘 안 먹고 눈빛이 또 희미해요.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까 수치가 다 바닥이야. 병원에서 약을 받아와선 잠을 잤는데, 일어나니까 유미가 열이 아주 펄펄 난다고 그래요. 병원에 전화해보니까 백혈병이 재발한 것 같다고 빨리 오래. 겨우 입원해서 열 내리는 작업만 한 달을 넘게 했어요. 11월 어느 날인가 우리 집에 왔던 과장이 전화해서 병원 1층 로비에서 보재요. 과장이 100만원짜리 수표 다섯 장을 주면서 돈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것만 받으래요. 기가 막힌 거예요. 치료비를 준다고 사표를 받아갔는데… 내가 속았구나. 이 사람들이 자기네 공장에서 일하다 병든 사람을 이렇게 쫓아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확 드는 거예요.

- 소리라도 지르시지 그러셨어요. 

황 = ‘약속한 게 틀리잖아’라고 소리를 질렀죠. 그 돈을 안 받고 그 사람을 확 쥐어박고 싶었어요. 손이 막 이렇게 올라가려고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그 돈 500만원이라도 안 받으면 치료비가 부족할 것 같더라고요. 그때 받은 수표 100만원에 돈을 보태 병원비 200만원을 냈어요. 그리고 나머지 수표를 점퍼에 넣어뒀는데 유미 엄마도 정신이 없으니까 그걸 그냥 빨아버렸어요. 옷을 보니까 하얀 게 막 떨어져요. 수표 쪼가리 오그라든 걸 하나씩 펴서 책갈피에 놓고 맞췄어요. 석 장은 맞췄고 한 장은 절반이 날아갔는데… 그대로 덮어서 은행에 가져갔더니 직원이 한참을 보더니 수표번호를 보고 입금을 해줬어요. 그 직원이 참 열심히 고생해줬어요. 

- 그때부터 싸워야겠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황 =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삼성과 싸우기 시작한 거예요. 유미는 반도체를 화학약품에 담갔다 뺐다 하는 일을 했고,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병에 걸렸는데… 이대로 있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요. 인사과에 전화해서 막 욕을 했어요. 이게 산업재해가 아니면 뭐가 산업재해냐고. 그랬더니 부장, 과장들이 5명인가 차에 타고 왔어요. 요 밑에 지금은 없어진 ‘꼴통 다방’이라는 데서 그 사람들이 ‘개인적인 질병인데 왜 삼성에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느냐’고 나한테 막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유미는 집에서 다 죽어가는데 유미가 어떠냐곤 한마디 묻지도 않고. 그때는 내가 말주변도 없어서 뭐라고 말도 잘 못하고 막 울면서 나왔어요.

- 다른 곳에 도움을 청하셨습니까. 

황 = TV를 보니까 제보를 받는다고 나오는 거예요. 서울에 있는 큰 방송국이었는데 어떤 분이 전화를 받길래 얘기를 했죠. 그랬더니 나보고 회사에서 병이 걸렸다는 공문을 받아서 가져오면 방송을 해주겠대요. 그걸 어떻게 해요. 다음엔 114에 우리나라에 노동을 전문으로 하는 정당이 어디냐, 단체가 어디냐 물어봤어요. 그래서 전화했더니 다 내 얘길 듣고만 마는 거예요. 그러다 생각이 들었죠. 큰 방송사나 신문사는 삼성에서 광고를 받으니까, 삼성에 피해가 가는 기사는 안 쓰겠구나. 그래서 내가 유미한테 컴퓨터 들어가고 나오는 걸 물어봐서 배웠어요. 몇 날 며칠을 보니까 조그만 전화번호가 나와서 전화를 걸었어요(황씨가 그때 전화를 건 곳은 지금은 정간된 독립언론 ‘말’지였다). 기자가 속초로 와서 우리 유미 사진도 찍고 취재를 했어요. 

- 그 기사는 유미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왔지요. 

황 = 유미가 2007년 3월6일에 죽었는데 기자가 온 게 2007년 2월이었어요. 한 달 전쯤이었죠. 기사는 2007년 4월1일자로 나왔어요(황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일하다가 점심 먹으러 들어왔는데 우체부가 기사 난 것을 갖다줬어요. 밥 먹다 말고 둘이 울었어요.

- 유미씨 마지막을 여쭤봐도 될까요. 

황 = 수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오던 길이었어요. 유미를 (내 택시) 뒷좌석에 눕히고 굴러떨어지지 않게 보따리를 놓아 고정시켜놨어요. 영동고속도로에서 원주를 조금 못 왔는데 유미가 ‘아 더워’ 그러는 거예요. 보니까 땀을 죽죽 흘리는 거예요. 그래서 앞에 창문을 요만큼 열어서 바람이 조금만 들어오게 했어요. ‘됐어?’ 하니까 ‘응’ 그래요. 한 10분쯤 있다가 ‘아 추워’ 그래요. 창문을 올리고 ‘됐어?’ 하니까 ‘응’ 그래요. 원주를 지나서 횡성휴게소 고갯길을 올라오는데….

박 = 애가 어떤가 하고 뒤를 보니까 그때 벌써 애 눈이 하얗게 뒤집혀 올라갔더라고요.

황 = 애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어요. 얼른 고속도로 옆에 차를 세워놓고 내려 뒷문을 여니까 그사이에 벌써 숨이 다 넘어가버린 거예요. 유미 엄마가 막 울면서 눈을 감겨줬어요.

박 = 옛날에 할머니들이 사람이 저거할 때(박씨는 차마 딸이 죽는다는 표현을 쓰지 못했다) 눈을 감겨줘야 한다는 소리를 들어서, 눈을 감겼는데 잘 안 감겨지더라고요(박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을 멈췄다. 인터뷰는 잠시 중단됐다). 

황 = 차에서 어떻게 할 수 없어 이불을 덮어주고 두 시간을 달려서 왔어요. 병원에 가서 사망확인서를 받고 영안실에 안치했는데 삼성에서 전화가 왔어요. 오겠다고. 지금도 궁금해요. 어떻게 알고 전화했는지. 부장이란 사람이 ‘아버님 유미 보상 문제는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테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시고 장례식 잘 치르세요’ 하는데 이 사람들이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생각하고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b>“우리 딸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b>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왼쪽)와 어머니 박상옥씨가 5일 파도가 일렁이는 속초 바닷가 앞에 나란히 섰다. 황씨 부부는 “우리 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슴 아파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우리 딸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왼쪽)와 어머니 박상옥씨가 5일 파도가 일렁이는 속초 바닷가 앞에 나란히 섰다. 황씨 부부는 “우리 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슴 아파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유미가 우리와 함께 싸웠죠…이젠 엄마 아빠 걱정 말고 편히 쉬기를
 

|산업재해 인정받기까지 
“대기업이 사람 몇 명 죽었다고…”
되레 삼성 편들던 근로복지공단 
역학 조사 땐 문제 내용 바꾼 회사
작업 내용 적힌 유미 일기로 입증 

 

|살아있다면 서른셋 
우린 아직까지 ‘죽었다’ 표현 못해
반올림 활동, 지금부터 진짜 시작 
11년 전에는 힘들고 외로웠지만
‘피해자 연대’ 친구들 함께 걸어가
 

- 본격적인 싸움은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황 = 수원시민신문이라고 그때 막 창간된 곳에서 유미 기사를 쓰고 그 기자가 삼성 공장 앞에 가서 신문을 다 돌리고 했는데 경비원이랑 삼성 직원들이 다 빼간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내가 같이 싸워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 혼자선 못 싸우니까. 그 기자한테 아는 사람 좀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며칠 뒤에 다산인권센터를 알려줬어요. 2007년 8월에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서울 지하철이랑 버스를 안 타봐서 찾아갈 수가 없으니, 속초에서 버스가 출발하면 동서울터미널까지 가니까 거기서 만나면 안되겠냐고 했더니 그렇게 하자고 하더라고요. 동서울터미널에서 처음으로 이종란 노무사님과 박진 활동가님을 만났어요. 

삼성 백혈병 문제를 얘기할 때 이종란 노무사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노무사는 황씨와 반올림을 만들고 산재소송과 최종 중재안 도출까지 전 과정을 함께했다. 이 노무사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반도체 공장에 대해 알려진 게 없어 단순히 한두 명의 산재 신청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며 “여러 사람들의 힘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19개 단체가 모였고 2007년 11월20일 유미씨가 다녔던 기흥공장 앞에서 ‘삼성백혈병대책위’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모임은 이듬해 2월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반이라도 올리자는 의미로 ‘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 산재소송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황 = 평택에 있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하고, 유미가 죽고 난 뒤에 제가 조사를 받으러 갔어요. 직원이 옆에 쌓여 있는 서류를 자기 앞으로 가져와 그중에 한 장을 빼더니 ‘유미씨는 라벨 붙이는 작업을 하다가 3라인 3베이(화학약품 처리를 하는 곳)에선 석 달만 일을 했는데요’라고 하는 거야. 내가 그건 삼성에서 거짓으로 서류를 꾸민 거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책상을 꽝 치면서 ‘삼성 같은 큰 기업에서 사람 대여섯 명 죽었다고 서류를 거짓말로 꾸며서 올릴 것 같아요?’라면서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근로복지공단에서 삼성 편을 못 들어서 안달을 하더라고요(황씨는 그 직원의 이름을 기억한다고 했다). 

- 유미씨가 수습기간부터 반도체 공정 라인에서 일한 건 어떻게 입증됐나요.

박 = 유미 서랍에 일기가 있어서 내가 유미 아빠한테 줬어요. 삼성전자 2003년도 다이어리였어요.

유미씨가 남긴 다이어리와 작업노트에는 유미씨가 수습 때부터 화학약품을 취급하는 라인에서 일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화학약품에 물건을 떨어뜨렸는데 앞으로 주의하겠다는 내용의 다짐서와 약품 이름 등도 적혀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에선 유미씨의 병을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1심(서울행정법원)과 2심(서울고등법원)은 산재를 인정했다. 

- 역학조사(산재 신청에 따른 현장조사) 때도 문제가 많았지요.

황 = 2007년 9월1일에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역학조사를 처음 하러 들어갔어요. 유미가 병에 걸린 게 2005년 6월이니까 2년이 넘었어요. 유미한테 듣기론 라인 사이에 칸막이도 없고, 너무 더워서 마스크를 벗었다가 혼났다고 했거든요. 근데 들어가서 보니까 칸막이가 다 돼 있고 서늘한 게 환기도 잘되게 만들어놓았더라고요. 내가 이 역학조사가 제대로 된 거냐고 막 소리를 질렀죠.

- 삼성으로부터 거액을 제안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황 = 역학조사를 한 그날이었어요. 기흥공장에서 안전담당하는 그룹장이 저를 회의실로 불렀어요. 이런저런 얘길 하더니만 ‘아버님 제가 10억을 해드릴 테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계세요. 기자도 만나지 말고 사회단체 사람들도 만나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그래요. 그냥 밖으로 나왔어요. 그 길로 민주노총 경기본부까지 차를 몰고 한 20분쯤인가 가서 바로 이종란 노무사님한테 다 얘기했어요. 바로 소송 제기하고 기자회견 하니까 그때부턴 삼성 인사과 사람들이 수시로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꽃바구니 들고 과일바구니 놓고 가면서 산재보상금보다 낫게 해줄 테니까 (소송 취하하고) 돈 받으라고요. 한번은 얼마든지 다 해줄 테니까 금액을 얘기하래요.

- 백지 사표를 받아가더니 백지수표를 내밀었네요. 

황 = 그랬죠. 자꾸 찾아와서 쫓아내느라 몸싸움을 하고 밀어내고 그랬어요.

- 삼성이 제발 돈을 받으라는 입장으로 바뀐 거네요. 흔들릴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황 = 아니요. 전혀요.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 반올림 지원을 받다가 삼성 돈을 받고 사라지는 분들도 많이 있지요.

황 = 네. 근데 나는 이해해요. 사람이 당장 돈을 안 벌면 생활비가 끊기는 거잖아요. 반올림 싸움이 길어지니까 당장 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 삼성본관 앞에서 1인 시위도 오래 하고 노숙농성도 1000일 넘게 하셨습니다. 생계는 어떻게 꾸리셨습니까. 

황 = 1주일에 2~3일은 서울에서 시위하고 나머지는 속초에 내려와 택시운전을 했지요.

박 = 저도 올해 7월까지는 식당에서 계속 일했어요. 그러다 몸이 엄청 아파서 지금은 못 나가고 있어요. 

황씨 등 백혈병 피해자 5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산재인정소송 1심 판결은 2011년 6월23일 나왔다. 노동법 전문가인 판사 출신 박상훈 변호사와 산업의학의 출신인 박영만 변호사가 황씨 측 소송을 맡았지만 누구도 승소를 예상하지 못했다. 소송 상대는 사실상 삼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노동자들의 승리였다. 계란으로 바위를 깼다. 삼성 측 변호인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법정을 나갔다. 1심 판결 후 삼성 백혈병 문제는 국민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 1심에서 승소했을 땐 많이 기쁘셨을 것 같습니다. 

황 = 법정에서 판사님이 판결을 읽고 방망이를 두드리잖아요. 그러고 나서 내가 일어나서 ‘판사님 고맙습니다’ 하고 절까지 했어요. 그런데 나는 너무나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힘들게 이기긴 했지만 위대한 판결이라고까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1심 판결 이후엔 삼성에서 조정을 하자고 했죠. 

황 = 삼성은 재판을 스톱하자고 했죠. 우리는 대화는 대화대로, 재판은 재판대로 해야 한다고 했어요. 삼성은 말로는 대화하자고 했지만 전혀 진도가 안 나갔어요. 2심 법원에서도 재판을 미루다가 대화 진척이 없으니 판결을 내린 거예요. 

2014년 5월14일 권오현 당시 삼성전자 사장이 백혈병 문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올림은 당시 사과를 사과라고 기억하지 않는다. 이종란 노무사는 말했다. “발표문을 보면 가족들의 아픔과 어려움에 저희가 소홀한 부분이 있었다고만 해요. 작업환경에 대해선 어떤 잘못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사과라기보단 유감표명이었죠.” 2014년 8월21일 2심 판결도 황씨가 이겼다. 공단이 상고를 포기해 이 판결은 확정됐다.

- ‘삼성을 상대로 싸워 이긴 유일한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두렵거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습니까. 

황 = 그런 생각은 한번도 안 했어요. 내가 혼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같이 싸워달라고 해서 시작된 거잖아요. 반올림을 만들어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했다고 제보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그만둬요. 

박 = 유미 아빠 나이가 있으니까 건강이 걱정은 됐지만 말리진 않았어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시작한 거잖아요. 우리 애들도 안 말렸어요. 

- 생각나는 분들이 많으시죠. 

황 =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죠. 반올림은 어떤 한두 사람이 아니고 개개인과 단체가 다 모여서 된 거잖아요. 노무사님, 변호사님, 산업의학 의사 선생님들… 반올림 후원해주신 분들도 많잖아요. 언론인들, 와서 연극해주시고 영화 만들어주시고, 종교인들도 어느 종교 할 것 없이 와서 기도해주시고… 농성장 지나가다 고생한다고 커피 사주시고 밥, 과자 갖다주신 분들, 농성장 밤샘 지킴 해주신 분들,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해주시는 분들… 너무 많이 계셨어요. 

황씨의 말대로 여러 사람들이 삼성과의 싸움에 기꺼이 참전했다. 백도명 서울대 교수 연구팀은 2009년 재판과 무관하게 진행했던 반도체 공장 역학조사 결과를 공개해 재판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됐다. 2014년엔 영화 <또 하나의 약속>(감독 김태윤)이 개봉됐고, 문화창작집단 ‘날’이 만든 연극 <반도체 소녀>도 무대에 올랐다. 한 대학생은 유미씨를 ‘반도체 소녀상’으로 만들어 황씨에게 전달했다. 

- 평범한 가장에서 산재전문가가 되셨습니다. 자식 잃은 부모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들이 많았던 이 사회에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황 = 삼성이 변질된 건 정부 탓이라고 생각해요. 정부가 관리감독 역할을 하나도 못했잖아요. 직업병에 걸린 사람들이 자기가 왜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갔고 가정이 파탄났어요. 노동자를 보호하라고 만들어진 게 산재보험 아닙니까. 자료가 불충분하다고 기계적인 판단을 내리는 산재인정제도를 바꿔야 됩니다. 중재안이 발표되고 반올림에 제보가 굉장히 많이 들어왔어요. 11월에만 피해자 180명 제보가 왔어요(반올림에 따르면 11월28일 기준으로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일하다 병에 걸렸다고 제보한 이들의 수는 450명이고 이 중 151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지 몰라요. 피해자 여러분, 가만히 있는다고 회사나 정부가 나서서 절대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서 자신 있게 억울함을 얘기해주세요. 반올림 활동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고 끝까지 도울 겁니다. 

황씨는 지난해 출범한 ‘생명안전시민넷’의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위해 만들어진 시민단체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과 세월호 참사 유족들도 함께하고 있다. 거대한 비극의 한가운데 내쳐졌던 이들은 ‘피해자’라는 이름을 넘어 이렇게 연대하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다. 

- 유미씨가 살아 있다면 서른세 살이겠네요. 

박 = 나는 아직까지 우리 유미가 죽었다 이런 표현을 못해요. 그냥 ‘우리 유미가 잘못됐다’…. 유미도 여태 아빠랑 같이 싸웠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엄마 아빠 걱정하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좀 쉬었으면 좋겠어요. 

11년 전 외로웠던 유미씨 가족에겐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인터뷰를 한 5일 저녁 속초에선 ‘황상기를 지지하는 모임’이란 이름으로 뭉친 이들이 황씨 부부를 위한 작은 문화제를 열어줬다. 시 낭송과 음악 연주 등이 어우러진 자리에 속초시민이 70명 넘게 함께했다. 황씨 부부는 지난 6일 오전 유미씨를 뿌린 울산바위를 찾았다. 딸이 생전에 좋아하던 레모네이드와 딸기, 귤, 프리지어 꽃을 가져갔다. 박씨는 딸에게 오랜만에 인사를 건넸다. “유미가 도와줘서 아빠가 이겼어. 고마워.”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2080600035&code=210100&sat_menu=A070#csidx6aad15e8ec36b8b92cf03cdf1b8fdf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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