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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총 쐈다'며 펄쩍 뛰는 일본, 대체 왜 그럴까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북 선박 구조하려던 광개토대왕함, 일본이 물고 늘어지는 이유

18.12.24 11:28l최종 업데이트 18.12.24 11:29l

 

 

 광개토대왕함.
▲  광개토대왕함.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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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해군 광개토대왕함이 독도 북동쪽에서 북한 선박을 구조하던 중에 자위대 초계기(경계용 순찰기)를 향해 레이더가 가동된 사실을 두고, 일본 측이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방위성 대신정무관(부대신 밑), 약칭 방위정무관을 맡고 있는 야마다 히로시 참의원 의원은 22일 트위터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자위대 대원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는 행위는 용서하기 어렵다. 우리 편인가 싶었더니, 등 뒤에서 총을 쏘는 행위다. 한국 정부는 북조선의 배를 수색하기 위해 통상적인 레이더에 더해 화기 관제 레이더도 사용했다고 말하지만, 화기 관제 레이더는 공격 목표에 대고 겨냥하는 것이다. 수색에는 쓰지 않는 것이다. 납득할 만한 설명을 단호히 요구한다."

  

 본문에 인용된 방위성 대신정무관의 트위터.
▲  본문에 인용된 방위성 대신정무관의 트위터.
ⓒ 야마다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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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MBC '뉴스투데이'에 따르면 국방부는 "우리 함정이 정상적인 작전 임무를 수행하면서 레이더를 운용한 사실은 있지만, 일본 해상 초계기를 추적한 사실은 없다"며 "(이런 내용을) 일본 측에 이미 설명했다"고 밝혔다. 또 23일 <연합뉴스>와 인터뷰한 군 소식통에 따르면, 일본 초계기를 향해 영상 촬영용 광학카메라를 켰을 뿐 레이저 빔을 발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자위대를 위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방부가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있는데도, 일본은 아랑곳없이 험악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국방부가 해명을 한 뒤인 23일에도, 방위성은 트위터를 통해 "대한민국 해군 함정이 화기 관제 레이더를 해상자위대 초계기를 향해 겨냥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비난했다. 우리 해군이 해상자위대를 의도적으로 공격하려 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레이더를 수색용으로 가동한 게 아니라, 공격용으로 가동한 것처럼 부풀리는 듯하다.

국방부 해명에도 꿈쩍 않는 일본, 그 속내는 
 

 본문에 인용된 방위성의 23일자 트위터.
▲  본문에 인용된 방위성의 23일자 트위터.
ⓒ 방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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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1톤 미만 소형 목선이 한일중간수역인 독도 동북쪽에서 표류 중이라는 신고가 지난 20일 해군에 접수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광개토대왕함이 밤늦게까지 수색을 벌이다가, 북한 국적인 이 선박에서 4, 5명 정도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중 한두 명은 이미 숨진 상태였고, 나머지는 영양실조로 뼈마디만 앙상한 상태였다. 최소 3주 이상 굶주린 채 표류한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표류 선박이 일본 어선이었대도, 광개토대왕함은 구조를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자국 부근 해역에서 표류 중인 선박을 구호하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세계 각국의 관행이다. 서양에 대해 시장개방을 거부했던 흥선대원군도 조선 연해에서 표류하는 미국 선박들을 구조해줬다. 이번에 광개토대왕함이 인도주의적 조치를 취한 것도 이 같은 국제적 전통에 입각한 것이다.

 

그런 구조 활동을 하다가 자위대 초계기를 상대로 레이더를 가동한 것뿐이라고 국방부가 해명했는데도, 일본 정부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으니 도리어 의아함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행동이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기 위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없지 않다.

만약 아베 신조나 그 후임자가 국민들을 설득해 개헌에 성공한 다음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전쟁을 금하는 일본 헌법 제9조가 개정되어 합헌적으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된 상태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다면 어떨까?

그럴 경우에는 일본의 시비와 트집이 한층 더 노골적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제까지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우리 민족도 1800년대 후반부터 처절한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 일본의 현재 행동을 보면서 미래에 대해 우려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국시대 도교 사상가인 장주(莊周, 기원전 369~289년)는 <장자> 제물론(齊物論) 편에서 "저것도 하나의 시비요 이것도 하나의 시비이다(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라면서 시비를 초월한 도(道)의 절대적 경지 즉 도추(道樞)를 추구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교적 분위기를 일정 정도 풍기는 무사의 나라 일본은 시비를 초월하기는커녕 시비를 적극 활용하는 국가적 행보를 걸어왔다. 1860년대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에서 변방 대우를 받던 일본이 1894년에 동아시아 최강 청나라를 격파하고 1904년에 세계 공동최강 러시아를 격파하며 최정상급 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던 데는,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는 외교전략이 큰 역할을 했다. 물론 다른 강대국들이라고 해서 이런 전략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정도가 좀 심한 편이었다.

독립왕국이었던 오키나와를 강점하는 과정에서도 일본의 시비 외교, 트집 외교가 한몫을 했다. 한자로 유구(琉球), 일본어로 류큐로 불렸던 이 나라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72년부터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체결하고, 조선 광해군 때인 1609년부터 명나라와 더불어 일본 사쓰마번과도 사대관계를 체결했다. 이중으로 상국(上國)을 뒀던 것이다.

부산 밑인 규슈섬의 최남단이 지금은 가고시마현으로 불리는 사쓰마번이었다. 번(藩)은 제후의 영지였다. 제후들이 어느 정도는 독립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쓰마번이 유구왕국과 외교관계를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구왕국이 중국과 사쓰마 양쪽을 상국(上國)으로 받들기는 했지만, 법적으로 볼 때는 중국과 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의 경우에는, 지방정부와 사대관계를 체결했을 뿐이다.

물론 사대관계가 있다고 해서, 한쪽이 독립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과 중국의 사대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상국과 신하국은 각각 별개의 독립국이었다. 현대 국제관계에서는 모든 국가를 평등하게 다루는 데 반해, 옛날 국제관계에서는 국력의 차이를 외교관계에 반영했다. 강한 나라는 높이고 약한 나라는 낮추었다. 그러다 보니 강한 나라는 상국으로 대우하고, 약한 나라는 신하국으로 대우하게 됐다. 이런 국제관계를 사대관계라고 불렀다.

일본 중앙정부와 유구왕국 사이에는 그런 사대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유구 문제에 간섭할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개의치 않았다.

1871년 유구인들이 대만(타이완) 동해안에서 표류하다가 상륙한 뒤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를 당하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청나라에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았다. 유국왕국 백성들을 일본 국민으로 간주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한다면서 청나라에 반격을 가했다. 유구왕국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한편, 1874년에는 대만에도 군대를 파견했다.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준다는 게 출병 명분 중 하나였다.

일본의 행동은 동아시아 관행으로 보면 명분이 약했다. 일본이 유구 문제에 개입할 근거가 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일본은 많은 것을 얻어냈다. 청나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유구-청나라 관계도 끊어놓았다. 이를 발판으로 유구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다가 1879년에는 이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이때부터 오키나와 역사에는 한이 서리기 시작했다. 또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승리의 대가로 그간 눈독을 들이던 대만도 얻어냈다. 단 한 건의 시비가 이처럼 엄청난 결과로 연결된 것이다.

일본 잘못인데... 다분히 의도적인 '시비걸기'

유구와 청나라를 상대로 시비 외교, 트집 외교를 벌여 일대 성과를 거둔 일본은 이듬해 1875년에는 조선을 상대로 유사한 일을 벌였다. 유구 때와 다른 게 있다면, 그때는 우발적 사건을 빌미로 시비를 걸었던 데 반해, 이때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뒤 시비를 걸었다는 점이다. 굴욕적인 강화도조약 체결의 시발점이 된 운양호(운요호)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 군함 운양호는 조선 정부를 자극할 목적으로 부산에서부터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조선 연안을 측량했다. 그러다가 강화해협까지 침범했다. 그러니 강화도 내 군사기지인 초지진에서 대포를 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빌미로 일본군은 초지진 포대를 제압한 뒤 영종도에까지 상륙해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그 섬에서 일본군이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누가 봐도 일본의 잘못이었는데도, 도리어 일본이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았다. 1873년 흥선대원군 하야로 대외투쟁력이 약해진 조선 정부는 일본을 가라앉힐 목적으로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시장을 개방하고 치외법권도 인정해주었다.
 
 운양호.
▲  운양호.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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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지진.
▲  초지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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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열강이 동아시아를 압박하던 1800년대에 일본은 서양의 '이쁨'을 받는 나라였다. 1870년대부터 서양 문물을 적극 수용할 뿐 아니라 서양과 보조를 맞춰 동아시아 침략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런 서양이 보기에도, 일본의 외교방식은 도를 넘는 것이었다.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아 이익을 챙기는 모습이 과도하게 보였던 것이다.

1900년이었다. 의화단 운동이라는 반외세 농민투쟁으로 청나라가 소란스러울 때였다. 중국대륙 중에서도 북중국이 의화단운동의 열풍에 휩싸였다. 이로 인해 서양열강의 관심이 북경(베이징)을 비롯한 북중국에 쏠려 있었다. 이 틈을 타서 일본은 남중국에 대한 공략에 착수했다.

군사행동의 명분을 찾고자 일본은 복건성(푸젠성) 하문(샤먼)에 있는 일본 불교포교원에 불을 질렀다. 대만에서 바다 건너로 보이는 그곳을 장악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방화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래놓고 일본은 중국인 폭도들의 소행으로 몰면서 시비를 걸었다.

이때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하문에 군대를 출동시켰다. 심지어 대만에 주둔 중인 1개 여단까지 출동시켰다. 이런 모습에, 일본의 동맹국이자 세계 최강인 영국마저 혀를 내둘렀다. 영국은 일본에 항의를 제기했고, 일본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조선 사람들이 교양서로 읽은 <명심보감> 계성(戒性) 편에 "시비라는 것은 내실이 없어서 결국 모두 헛것이 된다(是非無實相, 究竟摠成空)"라는 문구가 있다. 시시비비는 무익하므로 애당초 시작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1800년대 조선 사람들은 이웃나라 일본이 시시비비를 앞세워 무익이 아니라 유익의 극치를 달리는 것을 목격했다.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아 몇 십 년만에 세계 정상급 국가가 되는 것을 목격했다.

2018년 현재의 일본은 1800년대 후반이나 1900년대 전반에 했던 것 같은 시비 외교, 트집 외교를 벌이기가 힘들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렇다. 하지만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때가 되면, 과잉 반응이 시비와 트집으로 이어지다가 국제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생겨난다. 

시비와 트집을 통해 일순간에 강대국으로 올라선 경험이 있는 일본이다. 군사대국화를 향해 달려가는 일본의 행보에 가속도가 붙을수록, 이런 류의 사건이 점점 더 불어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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