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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석달만에 간판만 남았다"

[정세현의 정세토크] 북한 비핵화 포기한 미국, 들러리 선 한국

임경훈 서해문집 편집인(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5-13 오전 10:06:03

 

 

"손해 보는 장사였다." 정세현 원광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은 이번 한미정상회담의 결과를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했다. 북핵문제 해결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한미정상회담은 미국의 국익과 연관되어 있는 것들에만 논의를 집중한 채,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유의미한 결과를 거의 남기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북한의 완전 비핵화가 미국의 국익에 별 도움이 못될 것이며,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시리아 사태 해결'이라는 미국의 계산이 미사여구 형태로 반영된 회담이었던 것이다.

정 총장은 특히 이번 회담을 계기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비핵화가 아닌 비확산으로 전환한 점과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실행 의지가 없는 것이 확인되면서 앞으로 한반도에 평화도 전쟁도 아닌 불안한 상황이 지속될 것을 우려했다. 특히 북한은 추가 핵실험을 실시할 것이며, 핵무기의 소형화·경량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핵보유국의 지위를 확보하려 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또한 한국이 미국의 대중 포위전략에 합세하고 한반도에 MD를 배치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공동선언문에 남겨둔 것은 한중관계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경제발전을 지속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외교의 다변화 차원에서 한중관계 심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에도,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외교, 군사적으로 미국 쪽으로의 쏠림을 심화시키는 결과만 남겼다는 것이다.


다음은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평가와 향후 한반도 정세에 대한 정세현 총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편집자>
 

▲ 박근혜(왼쪽) 대통령과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일(현지시간)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의 이번 방미가 북핵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았지만 현상 타개를 위한 새로운 시도는 없었습니다. 이번 한미정산회담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정세현 :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대한 손익계산서를 쓰라고 하면 저는 손해 보는 장사였다고 평가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안인 북핵문제,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기간 중에 공약으로 내세우고 인수위 때도 그 중요성을 확인했던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 대해서 그야말로 외교적인 언사 이상의 지지를 못 받아냈기 때문입니다. 회담 직후 발표한 '한미동맹 60주년 기념 공동선언'을 보면 미국의 관심사항이 주로 거론되어 있고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습니다.

정상회담의 시기가 박근혜 정부에게 조금 불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올해가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이 되는 해인 데다가 최근 미국은 시리아 문제 해결에 외교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미국 측에서 북핵문제, 한반도 문제를 책임지고 풀어나가야 할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현재 공석입니다. 따라서 우리 쪽 외교라인에서 우리 문제를 미국과 구체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채널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4월 한중일을 다녀갔을 때까지만 해도 북핵문제를 풀기 위한 2자회담이나 4자회담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에 대한 우리 쪽의 후속조치가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해서 "박근혜 대통령의 접근 방식과 나의 접근 방식이 유사하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외교적인 언사입니다. 케리 국무장관은 한중일 순방 후 열린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해 "현재 상태에서 실현하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대화를 해가면서 북핵문제를 풀겠다는 것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인데, 미국 측은 대화를 통해 풀 상황이 아니라는 입장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라인으로 미국을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에서 우리가 강력하게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미북대화에 나서 달라"는 식으로 요구했다면, 미국도 공동선언에 그에 대한 표현을 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 측에서 이러저러한 요구가 있었고, 미국은 이를 충분히 경청하였으며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협의를 계속해 나가기로 하였다' 정도의 표현이라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 측에서 얘기조차 꺼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걸 종합해보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입안했을 때의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남북관계관이 대통령
취임 이후 3개월을 지나면서 바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사실상 간판으로는 걸어놓았지만 그걸 진지하게 추진할 의지가 사라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의지가 정말 강했으면 공동선언 어딘가에 그에 대한 표현이 들어갔었겠죠.

이제 케리 국무장관이 4월 중순에 한중일을 다녀가면서 남긴 얘기 중, "9·19공동성명으로 돌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선 6자회담은 물론 2자회담, 4자회담도 가능하다"고 했던 건 흘러간 얘기가 되어버렸고
중국역할론만 남은 상황입니다. 실제로 케리 장관은 중국에 대해 북핵 문제 해결에 나서달라고 했어요. 그 말은 자기들은 시리아 문제 때문에 정신이 없으니 북핵문제는 중국이 관리해달라는 얘기인데, 저는 중국역할론이야말로 미국의 착각 중의 착각이라고 봅니다.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중국이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서 미국식으로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근본적으로 북핵문제는 미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북한이 핵카드를 통해 받아내려고 하는 것들 중국이나 한국의 힘만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북수교, 평화협정, 경제지원은 미국이 결심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지금 동북아 혹은 아시아 전체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경합국면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중국이 미국
심부름이나 하고 있겠냐는 것입니다. 중국역할론은 따지고 보면 미국이 중국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국역할론에 대해 우리 정부에서도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중국이 북한에 대한 제재를 시작했다, 3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제재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미국이 얘기한 대로 중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면 북핵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니 그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쪽으로 입장을 정한 것 같습니다. 정상회담 뒤 진행한 기자회견 일문일답 과정에서도 그런 뉘앙스가 짙게 풍겼습니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면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한미가 모두 대화의 문호는 열려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는데 '대화의 문호가 열려 있다'는 표현만큼 소극적인 외교 자세는 없습니다.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고 했는데, 북한을 대화의 문으로 나오도록 하는 요인은 일체 없었습니다. 북핵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이 정부에 없지 않나, 그렇다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시작도 못하고 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박근혜 정부 시기의 남북관계가 이명박 정부 시기와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인데, 이명박 정부 때는 '비핵개방 3000'을 분명히 내세웠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대를 안 했어요. 그건 순서가 뒤바뀐 얘기였거든요. 실망할 것도 없었다고 봐야죠.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전 정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겠다고 공언했고, 인수위 때도 강조했었습니다. 3월 27일 열린 통일·외교부 업무보고에서도 남북대화를 해나가면서 북핵문제 해결의 길도 찾겠겠다고 밝힌 바 있었죠. 이번 정상회담에서 완전히 그 기대를 저버리게 만들었기에 실망이 더 큽니다.


프레시안 : 한국이 손해 본 장사라고 하셨는데, 국내 언론 대부분은 이번 미국 방문이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세현 : 그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외교의 목표를 단순히 한미관계의 유지·발전에 둔다면 손해를 본 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미관계가 외교의 전부였던 시절의 관점으로 보면 이번 외교는 성공한 거예요. 하지만 6.25 이후 60년 동안 미국의 안보우산 밑에서 충분히 경제력을 키웠기 때문에 이제는 이 경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외교의 다변화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미동맹이 60년이 넘었는데, 언제까지나 똑같은 스타일로 한미관계를 끌어 갈 수는 없는 거죠. 두 세대가 지나갔는데, 이제 제2의 과정을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한국 외교가 지난 60년 동안 미국 중심, 안보 중심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부터는 좀 동북아에서도 외교의 다변화, 주변국들과의 균형외교 쪽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발표한 한미 공동선언문은 앞으로 한중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언문 내용을 보면 미국의 대중 포위전략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식으로 판이 짜여 있어요. 공동선언문을 보면 "21세기 새로운 안보 도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동맹을 계속 강화시키고 조정해나갈 것이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21세기 새로운 안보도전'이라는 건 북핵문제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북핵문제는 이미 20세기말부터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인 도전이죠. 여기서 말한 새로운 안보 도전은 미국 중심의 동북아 군사질서에 대한 도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도전의 주체는 중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G2 반열에 올라온 중국을 얘기하는 것이죠. 박 대통령이 다음 달에 중국을 방문한다고 하는데 앞의 내용 때문에 중국의 의심을 살 수 있고 협조를 받아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미국과 손잡고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겠다는 내용인데,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중국은 시진핑 시대에 진입한 이후 중화부흥(中華復興)을 공개적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중국몽(中國夢)이란 말도 많이 쓰죠. 과거 천하를 호령하던 중국의 위상을 다시 구축 내지 회복하는 게 중국의 꿈이라는 겁니다. 이게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굉장히 위험한 도전인 거죠.

최근 들어 중국의 군사비는 지속적으로 증강하고 있습니다. 세계은행과 골드만삭스는 2025년경 중국이 미국의 GDP 규모를 추월할 것으로 내다봤고, 국제통화기금(IMF)은 PPP(실질구매력)를 기준으로 한 중국의 GDP총액이 2016년에 미국을 앞설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이 부쩍 늘었고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도 그러한 맥락에서 <ON
CHINA>라는 책을 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그런 전체적인 흐름에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2009년 11월에 중국을 첫 방문한 자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앞으로 4년 동안 10만 명의 학생을 중국에 유학 보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실제로 현재 많은 미국 학생들이 단기 연수나 유학 등으로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중국어배우는 미국 고교생들도 늘고 있고, 중국 전문가가 되기 위해 전공을 선택하는 대학생들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이처럼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이 커지는 가운데, 중국은 시진핑 시대로 넘어오면서 미국과 협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국의 중국 포위전략을 견제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어요. 아프리카 외교 강화라든가 러시아와의 관계 복원 등도 그 예입니다. 작년에는 한미일 서해 연합함대훈련에 대응하기 위해 서해에서 러시아와 합동 해상군사훈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북핵문제를 구실로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미사일방어망(MD) 구축을 얘기하는 것이 중국 입장에서는 대중 포위 압박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얼마 전 케리 국무장관이 "중국이 나서서 북핵문제를 해결해 비핵화가 이뤄지면 MD를 축소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본심을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이는 동북아 MD 배치가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자백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케리가 순진했죠.

프레시안 :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 해결은 사실상 포기한 반면, 미국의 대중국 포위전략에 끌려들어 가는 등 미국의 장단에 놀아난 셈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미국편에 서면 한중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거란 말씀이군요.

정세현 : 겉으로는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격상한다고 모양새를 만들어 놓고 실질적 내용에 있어서는 미국 중심의 외교, 미국의 국익을 증대시키는 데 협조하는 결과가 되어버린 겁니다. 우리 문제는 하나도 얘기를 못한 채 말이죠. 공동선언문 중 "북한의 도발로부터 양국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의 대응 노력과 함께, 정보·감시·정찰 체계 연동을 포함한 포괄적이고 상호 운용 가능한 연합방위력을 지속 강화해나갈 것이다"라는 부분은 사실상 MD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볼 때 미국은 이미 북핵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리는 비핵화 수준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생각은 접은 것으로 보입니다. 핵의 외부 유출만 막는 비확산을 미국의 정책 목표로 정했기 때문에 MD 얘기를 숨겨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죽고 사는 문제인 북핵문제 해결에 대해 미국은 막상 늑장을 부리고 중국에게 해결을 맡기면서 자신들은 시리아 문제에 올인 하고 있는 것도 그런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미국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인데, 아마 후자일 거라고 봅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북핵 문제 해결에 적극적 의지가 없고, 한국 역시 주도적 역할을 할 생각이 없다는 게 확인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정세현 : 그렇죠. 하지만 한국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죽으나 사나 비핵화를 밀어붙여서 미국이 그쪽으로 나오도록 해야 했습니다. 미국의 본심은 비확산일지라도 공식입장은 비핵화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약속을 지키라고 몰아붙였어야죠. 지난번 정세토크에서 "5년 뒤에 '박근혜 핵폭탄'이란 누명을 쓰기 싫으면 평화협정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아요.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만 얘기해놓고 그 입구인 남북대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고만 얘기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진행하려면 우리 쪽 대화의 문을 얼어 두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쪽 문 앞으로 가서 북이 나오도록 불러내야 합니다.

프레시안 : 북핵 문제와 관련해 미국은 비핵화보다는 비확산으로 입장을 정했고, 한국도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란 게 확실하다면, 앞으로 한반도 상황은 어떻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정세현 : 비핵화가 아닌 비확산으로 방침이 굳어져 미국과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된다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그 어떤 것도 실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보수 성향의 박 대통령 지지자들도 이런 식의 상황 진전을 반기지는 않을 겁니다. 반대할 가능성이 커요. 북한이 핵을 가지는 조건에서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할 거 아니냐 하는 문제죠. 이 조건에서 무슨 남북대화고 교류협력이냐 하는 반발이 나오게 될 겁니다. 결국 지금과 같은 상태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북핵문제는 방치되고 남북관계는 막히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입구가 남북대화이고 출구는 북핵문제 해결인데, 박근혜 정부가 스스로 나서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작동할 수 없도록 미국의 외교방침에 협조해버렸습니다.

북한은 앞으로 핵무기의 소형화·경량화를 추진해나갈 겁니다. '결국 핵카드를 통해 받아낼 수 있는 건 없어졌다. 이런 식이라면 수교도 틀렸고 경제지원도 평화협정도 기대할 수 없다. 결국 오바마 정부나 박근혜 정부에게 기대할 게 없다'고 생각하고, 금년 초 발표했던 대로 '핵무장과 경공업 발전 병진'이라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는 식으로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해 시비 거는 것도 당국 간 대화 여지를 스스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내정간섭으로 느껴질 수 있죠. 상대방을 인정하려면 그런 노선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지 말아야죠. 속으로는 마음에 안 들겠지만 겉으로 그런 것까지 간섭하려 들면 안 되죠. 북쪽 입장에서는 우리 길을 간다, 마이웨이 하겠다 할 수밖에 없죠.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 앞으로 상황이 바뀐다고 해도 새로 판을 짜기가 어렵지 않겠나 싶습니다.

프레시안 : 지난 2009년 오바마 1기가 출범할 때만 해도 미국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란 기대가 많았는데...

정세현 : 우리가 오바마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던 게 오바마가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연설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도 사실 그러한 구상 때문이었죠. 그러나 실제로 '핵무기 없는 세상'에 기여한 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상을 주었으니 노벨상을 가불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래놓고는 핵무기 없는 세상과는 관련 없이 미국의 군사적 해외 개입을 늘려나가는 쪽으로 가면서 북핵문제를 우선순위에서 밀어내더니 나중에는 '전략적 인내'란 말로 정당화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2009년 1년 동안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명박 정부의 반대와 오바마 정부 내 비확산론자들의 벽에 부딪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힐러리 국무장관은 비핵화로 가려 했다고 봅니다. 힐러리 장관의 구상대로 미국이 해주기만 한다면 북한이 비핵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벽에 부딪혀 비핵화를 포기하고 미국도 전략적 인내로 정당화하면서 상황관리 쪽으로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나마 힐러리는 대선후보였기 때문에 오바마 1기 정부에서 발언권이 있었어요. 자기의 판단을 정책으로 발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케리는 그보다 약한 듯합니다.

프레시안 : 지난번 정세토크에서 매년 봄이면 북한위협론이 제기되는 이유를 미국의 예산심의 일정을 연관시켜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요.

정세현 : 1983년인가 84년인가, 4월쯤에 한 일간지에 칼럼을 하나 쓴 적이 있어요. "해마다 봄이 되면 북한군 전진배치설이 나온다"로 시작하는 글이었죠. 1980년대는 1961년부터 시작된 남한의 군사정권이 북한의 대남위협 때문에 안보강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를 통해 군사정권의 존재 이유를 국민에게 설득하고 인식시키던 시대입니다. 툭하면 북한 핑계를 댔죠. 도발가능성, 북한군 전진배치 등. 그런데 이런 것들은 국내정치적인 필요도 있었지만, 미국의 국방 예산을 심의하기 전에 항상 미국발로 나오던 정보였습니다. 1970년대부터 거의 매년 봄만 되면 전진배치설이 나오는데, "그런 식으로 전진배치 한 걸 모두 합산하면 지금쯤 북한군은 제주도 남쪽에 가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제가 썼던 일이 있습니다.

이번 박근혜 정부 들어 초기부터 북한의 도발과 위협이라는 것을 언론에서 부각시키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보면 보수언론에서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시작할 수 없도록 상황을 만든 측면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된 상황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고, 북한의 행동만 보도하면 '저들과 무슨 대화며 신뢰냐' 하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죠. 그런 주장이 대세가 되면 신뢰프로세스는 못 하게 되는 거죠. 올해 독수리 훈련(3월 1일~4월 30일)이 예년에 비해 유난히 강도가 셌어요. B-52 전략폭격기, B2 스텔스 폭격기, 핵잠수함, 구축함 등이 동원되어 고강도 훈련을 했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통상적이고 방어적인 훈련이라고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위협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으로서는 '남쪽의 새 정부와 미국의 2기 오바마 정부가 새로 출범하면서 세게 나오는 이유가 둘이 손잡고 우리를 정말로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판단을 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극력 저항을 한 것이죠. 우리 쪽에서 보면 도발 위협이지만 북 입장에서는 저항이자 반발이죠. 그렇게 북한이 극력 저항, 반발할 수 있는 밑자리가 독수리 훈련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렇다면 미국은 왜 그랬는가? 미국의 예산제도를 보면 매년 5월 15일부터 하원에서 세출예산 심의가 시작됩니다. 그전에 2월 첫째 월요일까지는 대통령이 연방정부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해야 해요. 상하원 각 위원회는 6주 내에 각 예산위원회에 예산평가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정부안을 받아서 실무자들이 1차적인 코멘트를 달아 위원회 위원들에게 제출하는 거죠. 4월 15일까지 상하원에서 예산심의할 것을 결정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고, 5월 15일부터 하원에서 예산심의서를 세부적으로 검토하게 됩니다. 6월 30일까지 하원에서 13개 세출예산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리고 7월에는 하원에서 통과시킨 세출예산안을 상원에서 심의하게 됩니다. 7월 15일 대통령이 수정예산안을 제출하고, 9월 30일 대통령이 최종 서명하면서 예산안은 확정됩니다. 그리고 10월 1일부터 새 회계연도가 시작됩니다.

중요한 것은 3월 중순부터 5월 15일까지 두 달은 예산심의 관련한 각종 평가보고서가 나가는 시점이라는 점입니다. 미 국방부 쪽에서는 기존 예산을 삭감당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에 따라서는 미군이 나가 있는 지역에서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것이죠. 올해 유난히 훈련강도를 높인 것은 이번 2기 오바마 정부가 재정절벽 상태에서 출범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북한으로 하여금 극력 저항, 반발하게 만들어서 북한위협론을 명분으로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예산을 깎지 않게 하려는 계산이 작용했었지 않나 싶습니다.

프레시안 : 하지만 독수리훈련의 강도가 세진 것은 올해 2월 북한이 감행한 3차 핵실험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정세현 : 북한이 그 일정을 의식했다고는 보기가 힘듭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움직인 것이죠. 독수리훈련은 북한의 핵실험 이전인 작년 가을부터 계획되어 있던 것이고, 3차 핵실험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유엔 결의안을 통해 결론이 난 것이죠. 3월부터 더해진 것은 재정절벽 상황에서의 예산편성 문제 때문에 국방예산을 삭감당하지 않기 위한 근거자료라고 볼 수 있죠. 미국 정부부처 간 이해관계나 의회 내 삭감파와 유지파 사이의 경쟁 속에서 우리는 곡조도 모르고 대북강경파 논리나 쏟아냈던 거죠.

개성공단 건도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동북아 긴장조성에 우리가 협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질러봤던 카드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기에 대해 더 세게 나가버리니까 북한의 퇴로가 없어진 것이죠. 이명박 정권 때도 그런 식으로 통행제한을 한 적이 있지만 나중에 풀렸거든요. 하지만 이명박 정권 때는 독수리 훈련이 이렇게 세지 않았었죠. 이명박 정부때 개성공단 문제가 터진 시점이 군사훈련 시기도 아니었고요. 올해 북한이 고강도 독수리 훈련에 대해 반응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개성공단과 연관시켜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겠죠. 박근혜 정부로서는 운이 안 좋은 측면도 있어요.
 

▲ 미국 스텔스 전략 폭격기 B-2 ⓒ뉴시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앞에서 말씀하신 북한, 그리고 남북관계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이 바뀌게 된 계기가 됐던 게 개성공단 문제일까요?

정세현 : 그럴 거라고 봅니다. 사실은 그 개성공단 문제를 계기로 남북대화를 시작했어야 했어요. 당시 당국 간 접촉이 필요한 상황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종업원 철수 등의 강경조치를 취하게 된 건 김관진 국방장관의 인질구출 얘기라든가, '북한은 돈 때문에 개성공단을 폐쇄하지 못할 것'이라는 보수언론의 달러박스론 등 때문이었는데, 그에 대해 강하게 반응하면 남쪽에서 회담을 하자고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면 거기서부터 박근혜 정부와 남북관계의 새 판을 짜나갈 수 있지 않겠나 하고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나가면 개성공단 투자도 늘리고 금강산 관광도 재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크게 질렀는데, 이쪽에서 잘라버린 것이죠. 그런 식으로 강하게 나가게 된 것은 독수리 훈련과 관련된 한반도 군사상황, 그에 대한 북한의 격렬한 저항과 반발에 대해 단호한 반응을 보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한 것 같습니다. 그때 이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 식이라면 미국이 한반도에서 추구하는 전략적 목표는...

정세현 : 핵비확산과 MD라고 할 수 있죠. 그냥 이런 식으로 가게 될 겁니다. 우리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태에서 분단 극복은 엄두도 못 낼 것이고 한반도 상황의 안정적 관리도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프레시안 :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북이 계속 대치 상태에 있다면, 바로 이런 상황이 미중관계를 더욱 갈등 쪽으로 몰고 가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드는데요?

정세현 : 북핵문제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버렸습니다. 미일동맹 강화 내지는 일본의 방위력 증강, 한미동맹 강화를 통한 안보협력, (공동선언에 있듯이) MD 배치 등을 추진하면서 중국을 견제하면 중국도 대응하기 위해 국방예산을 더욱 증가시킬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안보는 60년 이상 미국에 의존해 와서 쉽게 벗어날 수 없지만, 경제발전을 지속하려면 한중관계를 원만하게 풀어가야 하는데, 이렇게 완전히 미국 쪽으로 쏠린 상황에서 경제 쪽만 중국과 손잡고 잘해보자고 할 수 있을까요? 박근혜 정부는 집권 5년 동안 한중관계를 심화·발전시켜서 경제 면에서 G10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현재 그 입구인 한중관계를 막는 상황이 되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듭니다. 미국의 대중국 압박에 동참하면서 무슨 재주로 한중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중국이 그것도 못 읽어낼까요? 다음 달 예정되어 있는 중국 방문 계획이 외형상으로 보면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의 균형을 잡겠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번 한미정상회담 때문에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자기 편으로 확 끌어당겨 버린 것이죠. 앞으로 미중관계에서도 미국의 전략은 북핵문제를 활용해서 군사적으로 중국에 압박을 가하고 포위하는 쪽으로 나가겠죠.
 

 
 
 

 

/임경훈 서해문집 편집인(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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