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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조선 편든 미 군인... 그는 현실판 '유진초이'였다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미국의 배상 요구를 막은 미국인

19.04.25 08:55l최종 업데이트 19.04.25 08:55l

 

 

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편집자말]

우리는 학교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해 배운다. 1866년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선원들이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발포·감금 등의 만행을 저지르다 주민들의 공격을 받고 불에 탄 사건이다. 5년 뒤 미국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이유로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쳐들어와 전쟁을 일으켰다. 바로 신미양요다.

사실 이게 끝이 아니다. 미국은 불에 탄 제너럴셔먼호의 손해배상 또한 조선에 요구하려 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국내에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중국이 조선의 종주국이라 여겼던 미국은 중국 측에 제너럴셔먼호 배상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이 '그 문제는 자신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고 거절해 유야무야됐다. 그 뒤로 미국이 조선에 제너럴셔먼호 배상을 정식 청구한 바가 없다. 이유가 무엇일까? 경위야 어찌 됐건 조선 땅에서 미국 배가 불태워졌고 미국인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모두 살해된 사건 아닌가. 배상을 요구하려다 못했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본국에 맞서 조선 변호한 미 외교관
 

조지 클레이턴 포크 George Clayton Foulk(1856-1893)
▲ 조지 클레이턴 포크 George Clayton Foulk(1856-1893)
ⓒ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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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의문을 풀어줄 단서가 있다. 캐나다 출신이자 연세대 교수를 지낸 새뮤얼 홀리가 쓴 책 <조선의 미국 남자>(AMERICA'S MAN IN KOREA, 2008)에 실린 서신들이다. 다음은 1886년 2월 12일 조지 클레이튼 포크(1856~1893)라는 미 해군 중위가 조선에 머물 당시 부모님께 쓴 편지다.
 

"지금 저의 관직 생활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태까지 저는 정부에 순종해 왔지요. 정부의 지시들이 저의 양심과 정의에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셔먼호 사건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게 됐답니다. 셔먼호는 약 스무 해 전에 조선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선박이랍니다. 승선자들은 모두 죽었고요. 그 배상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요구가 옳은 일이라면, 옛날 인디언들이 미국인을 죽였다는 이유로 인디언 후손들에게 배상금을 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셔먼호가 결코 조선에 올 일이 아니었음을 우리 정부가 망각한 듯합니다. 셔먼호 사람들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니 그 결과 또한 그들의 몫이겠지요.
이 일로 조선을 몰아세워야 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제가 여태껏 겪어본 적 없는 가장 당혹스러운 문제랍니다."

외교관들은 자신의 양심이나 가치관에 어긋나는 지시를 본국 정부로부터 받기도 할 것이다. 조지 포크는 그러한 상황에서 몹시 난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이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조지 포크는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공적으로 처리했을까? 갈등 끝에 결국 정부의 방침에 순응하고 말았을까? 아니면 직을 걸고 항명이라도 했을까?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10여 년 후, 조선과 미국은 외교관계를 맺었고 1883년 서울에 미국 공사관이 들어섰다. 조지 포크가 인천 앞바다에 당도한 것은 그 다음 해 5월 31일이었다.

초대 주한 미국 공사인 푸트(Foote)가 1885년 초 이임한 뒤 미국 정부는 후임을 임명하지 않았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미 해군 대위인 유진초이(이병헌)가 본국의 지시로 주한 미 영사대리를 맡았듯이, 군인인 조지 포크는 주한 미 대리공사로 임명된다. 그리고 재임 기간에 본국 정부로부터 셔먼호 사건과 관련해 조선 정부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라는 훈령을 받는다. 사건이 발생한 지 20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지는 3년 만이었다.

"조선인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지 포크가 정부의 지시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알려면 그와 본국이 주고받은 문서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130년 전의 참고 자료를 찾았다. 1951년 조지 매큔과 존 해리슨이 출간한 <한미관계>(Korean-America Relations)라는 책에 수록돼 있었다.

1885년 7월 24일 국무부의 법무관 프란시스 워톤(Francis Wharton)은 국무장관 베이야드(T.F.Bayard)에게 아래와 같이 보고한다.
 
"본 배상 요구는 1866년 조선에서 발생한 제너럴셔먼호의 학살 사건에 따른 것입니다. (...) 사건에 대하여 여지것 외교적 행동이 취해지지 않았던 것은 비교적 최근까지 조선에 우리 외교관이 없었던 상황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제 포크씨가 대리공사로 주재하고 있는 만큼 관련 서류를 그에게 보내어 조사케 하고 조선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봅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7월 31일, 베이야드 국무장관은 조지 포크에게 공문을 보내 조선 정부에 배상을 청구하고 그 결과를 상세히 보고하라고 훈령을 내린다.

그는 "이 문제가 그동안 휴면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은 미국이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제너럴셔먼호의 파괴로 인해 발생한 제반 손실과 상해, 승무원의 사망에 등에 대하여 조선 정부의 책임을 해제시켜준 일은 전혀 없다"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사건 발생 후에 시간이 경과했다고 해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배상 청구의 유효성이 영향을 받을 수는 없다"라고 못박았다.

이에 조지 포크는 장문의 보고서를 보냄과 동시에 반론을 개진한다. 국무장관과 휘하의 외교관 사이에 예사롭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조지 포크는 아래와 같은 요지로 본국 정부의 지시에 저항한다.
 
"셔먼호 도착 시기는 대원군의 전제적 권력 행사가 최고조에 이르고 있던 때였습니다. 기독교인이 박해의 표적이 됐습니다.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들을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처형됐습니다. 또한 수천 명의 비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으로 의심을 받아 처형당했습니다.

평양 일대에서 박해는 특히 심했기에 지역 전체가 흥분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프랑스 신부들의 죽음, 그리고 기독교 박해를 보복하기 위해 외국인들이 쳐들어올 거라는 불안감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셔먼호가 접근해 올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복수하러 온 것이라고 여겼으며 온갖 억측과 공포가 퍼졌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방관하고 있으면 외국인과 내통한 자로 지목돼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공격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은 그러한 공포와 흥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너나없이 셔먼호 파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근거로 조선인들을 변호하면서 배상 청구의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조지 포크, 그는 누구인가
                                                       
 조지 포크가 수집한 대동여지도
▲  조지 포크가 수집한 대동여지도
ⓒ 미국 지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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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포크는 다시 1월 23일 보고를 통해 "조선인들이 셔먼호를 약탈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사흘 후 다시 아래와 같은 보고서를 보낸다.
 
예로부터 조선 해상에서 조난 당한 배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규가 시행돼오고 있습니다. 조선 정부가 비용을 부담해 음식과 생필품을 제공한 후 안전하게 떠나도록 조처하는 것입니다. 해안에 관리들이 배치돼 있는데, 그들의 임무는 이양선이 나타나면 그 목적을 조사하고, 조난 당한 배에 대해서는 법령에 따라 구조를 실시하는 일입니다. 서해상에서 중국 배, 동해상에서 일본 배가 조선 당국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귀환한 사례는 수천 건에 이릅니다.

조선은 조난 당한 외국 배들을 자신들의 비용과 인력으로 구조한 후 잘 보살펴 돌려보낸다는 것을 조지 포크는 알리고 있다. 제너럴셔먼호가 만일 조난당했더라면 조선 정부로부터 그러한 관대한 조처를 받았을 터다. 그렇게 인도주의적인 조선을 향해 셔먼호가 무력 도발을 한 것인데 어찌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조지 포크는 그렇게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조지 포크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여겼는지 배상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 이것이 조선 정부가 셔먼호 사건과 관련해 미국의 배상 요구에 시달리지 않게 된 숨은 배경이다.

조지 포크는 당시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외교관이었다. 때는 약육강식·우승열패의 제국주의 시대였고, 외교관과 군인은 그 첨병이었다. 그런데 그는 시류에 정면으로 맞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조지 포크, 그는 누구인가.

조지 포크는 163년 전인 1856년 10월 30일 미국 펜실바니아주 랭캐스터 카운티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시골 소년이 푸른 꿈을 품고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1872년 6월. 그의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4년 후인 1876년, 그는 눈이 푸른 스무 살 청년의 모습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조지 포크의 서한과 여행기를 쓴 새뮤얼 홀리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지적이고 유능했으며 자신감에 차 있었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스타일이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정의감이 투철했고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책임감이 강했다. 한 마디로 해군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재목으로 주목을 받았다. 겉으로는 쾌남아였지만 내면에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를 잘 받는 청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고집불통인 데가 있었고 한 번 옳다고 믿으면 물불 안 가리고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다. 그런 강직한 성격은 훗날 조선에서 문제가 될 것이었다."

조지 포크는 조선의 개항 초기와 관련해 많은 자료와 기록을 남겼다. 연구가들은 그의 기록이 독보적인 가치가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그가 가족에게 쓴 많은 편지와 조선 여행기는 매우 값진 기록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국내에는 그 내용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연재를 시작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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