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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시평] ISDS와 강제동원 청구권의 관계
우리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빌미로 일본이 경제 도발에 나섰다. 패소한 일본 기업들이 법원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버티자 이들의 국내 자산에 대한 매각 절차가 시작되었다. 최종 매각 결정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릴 텐데 일본 전범 기업들의 반격 수단으로 투자자-국가분쟁해결제도(ISDS: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가 유력하다. ISDS를 통하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의 집행을 막을 수 있고, 자산이 매각되더라도 손실을 보전받을 수 있다.
ISDS 사건만 보도하는 전문지 IA Reporter 도 일본 기업들의 ISDS 제기 가능성을 여러 번 언급한 바 있고, 국내 언론도 작년 대법원 판결 직후 일본 정부가 ISDS까지 고려한다는 보도를 냈다.
그 동안 우리를 상대로 제기된 ISDS 분쟁 사건을 보면, 일본의 전범 기업들이 ISDS를 반격 카드로 꺼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ISDS가 태동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현대판 BIT의 효시는 유럽국가들이 1950년대 말부터 추진한 양자간 투자 협정이었다. 선두에는 독일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지고 해외 투자 자산을 몽땅 잃게 생긴 독일이 나섰던 것이다. 전 세계 최초 BIT가 바로 1959년에 독일이 파키스탄과 맺은 투자 협정이고, 우리나라가 맨처음 맺은 BIT의 상대방도 독일이었다. 만약 일본 전범 기업들이 우리 법원을 통한 자산 매각을 막기 위해 ISDS를 활용한다면, BIT의 정신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일본 기업들이 ISDS를 위해 기댈 조약은 2003년에 발효된 한일 BIT(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간의 투자의 자유화·증진 및 보호를 위한 협정)와 2014년에 발효된 한중일 BIT다. 이들 BIT는 전범 기업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다.
먼저 절차의 일방성을 살펴보자.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 제2항의 중재를 통한 분쟁해결이나 일본 정부가 거론했던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한 분쟁해결은 일본이 일방적으로 시작할 수 없다. 국제사법재판소는 한일 양국이 모두 동의를 해야 비로소 관할권을 갖고 재판을 할 수 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의 중재는 중재위원회 구성에 우리 정부가 협력해야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ISDS는 일본의 전범 기업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일방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ISDS 절차 진행에 동의하지 않을 재주가 없다. 일본과의 조약을 통해 동의권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다(한일 BIT 제15조 제3항, 한중일 BIT도 같은 조항에 같은 내용을 두고 있다). 그리고 ISDS는 일본 기업만 제기할 수 있고, 우리 정부가 일본 기업을 상대로 뭘 청구할 수 있는 절차는 두지 않는다.
다음은 내용의 일방성이다. 우리 정부는 일본 기업을 상대로 무엇을 해 줄 의무만 진다. 일본 기업은 우리나라에 대해 아무런 의무가 없다.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거나 대한민국의 법률과 규정을 잘 지켜야 한다거나 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따위의 의무는 없다. 일본 전범 기업이 ‘외국인 투자자’라는 외피를 뒤집어쓰면 우리나라를 상대로 오로지 권리만 주장할 수 있다. 이 권리에는 투자자의 ‘만능 열쇠’로 불리는 공정·공평 대우 뿐만 아니라 수용·보상(한일 BIT 제10조)이 포함되어 있다. 지금까지 전 세계 ISDS 분쟁에서 투자자들이 거의 100% 주장하는 권리가 바로 ‘공정·공평 대우’이다. 투자 유치국은 외국인 투자자를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우할 의무를 지는데, 여기에는 사법정의가 포함되고, 따라서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이 ‘공정·공평 대우’ 의무를 위반했다고 다툴 수 있다. 법원의 자산 압류, 매각 절차는 수용·보상 의무 위반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필자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 ISDS 분쟁에서 등장하는 매우 전형적인 것들이다.
2012년 론스타의 ISDS를 시작으로 우리나라를 상대로 제기된 ISDS 분쟁에서 청구된 손해액이 117억 달러에 달한다. 불과 7년 만에 약 14조 원의 분쟁에 휘말린 것이다.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폭발적인 증가세다(대한상사중재원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처리한 1899건의 국내 중재와 국제 중재를 모두 합쳐도 규모가 4.9조 원에 불과한데 우리를 상대로 한 ISDS의 경우 건 수는 10건에 불과하지만 배상 청구액은 2배가 넘는다. 평균 배상액으로 따지면 ISDS가 453배에 달한다). 일본 전범 기업들이 ISDS를 제기한다면 이는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충격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ISDS 출구 전략을 빨리 마련해야 한다.
마침 이낙연 총리가 7월 12일 국회 예결위에 출석해 ISDS가 “폐지돼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공식 답변함으로써 출구 전략의 큰 그림을 제시했다. 문제는 출구 전략을 구체화할 실무 부서에서 총리의 공식 답변을 개인 의견으로 전락시키고 나섰다는 점이다.
이달 초 중국에서 열린, 인구수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시아 태평양 지역 FTA인 역내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상장에서 산업통상자원부가 꾸린 우리 협상단은 국무총리의 공식답변이 나온지 한 달도 안 되어 이를 무시하고 ISDS 지지 입장을 표명 했다. 국회 예결위에서 이낙연 총리가 답변할 때 현장에 있었던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 총리 답변에 이은 후속 질의에 직접 답변을 했기 때문에, 산통부는 누구보다도 총리의 의중과 취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국제 무대에서 대놓고 총리를 무시했다.
그 직전에는 법무부와 외교부가 반기를 들었다. 법무부와 외교부는 지난달 말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에 제출한 ISDS 개혁방안 에서 ISDS 폐기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먼 것들로 채워 우리 정부의 개혁방안을 냈던 것이다.
2012년 2월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 의원 모두를 포함한 96명의 국회의원이 세종문화회관 앞에 모여 이렇게 주장한 서한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다.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는 국내 기업과 외국 기업에 차별 없이 적용되는 공공정책조차도 사기업이 국제중재기구로 끌고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이것은 공공 이익을 보호해야 하는 양국 정부의 정책 공간을 축소하고, 공공 서비스를 보호하고 국민 건강, 식품 안전, 그리고 환경 보호를 증진하려는 국가의 권한을 무력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위험한 제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서한에 서명한 전·현직 국무위원으로는 이낙연 총리, 김부겸 전 행안부 장관, 박영선 중기부 장관이 있고,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노영민 비서실장도 동참을 했다(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명자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뿐이다). 7년 전 ISDS 폐기 주장의 근거들은 이제 폭발적인 분쟁을 초고속으로 경험한 우리에게 막연한 우려가 아니라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ISDS를 유지하려는 이해집단을 잘 통제하면 이낙연 총리가 주장했던 출구는 쉽게 열 수 있다. 더구나 당시 서한에 서명했던 의원들이 야당 대표로 있어서(심상정 정의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국회의 초당적 지지도 가능하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남희섭 소장은 참여연대 ISDS 대응 TF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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