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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 백수의 히말라야 동행

스님과 백수의 히말라야 동행

 
청전 스님 2013. 06. 05
조회수 115추천수 0
 

 

히마라야 설산을 누비는 청전스님-.jpg

히말라야 설산을 누비는 청전 스님

 

 

<히말라야 도사의 히말라야에서 밤을 맞다>

 

험로를 한달음에 가게 한 “니째 도 키로!”(이 킬로만 더 가요)

 

‘히말라야 도사’ 청전 스님이 한국에서 온 백수 산사람과 함께 희말라야 산행길을 나섰다. 매상을 올리기 위해 20킬로를 2킬로라고 속인 찻집 주인 말만 믿고 한 산행에서 밤 10시까지 헤매다 목적지에 도착해 먹은 밥 한그릇은 진수성찬보다 꿀맛이었다.

 

“때론 나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조차 내가 험고를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가 될 때가 있다. 찻집 아저씨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20킬로가 넘는 길을 한달음에 갈 수 있었을 것인가.”

 

 

산을 좋아하다가 아예 공무원까지 내던지고, 무작정 히말라야 품안에 살아보겠다고 작심한 분이 다람살라로 찾아온 적이 있다. 자칭 전국백수연합회 회장이라는 이재환씨였다. 그는 한국의 웬만한 산을 다 올랐고, 백두대간 종주도 두 번이나 했다니 산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람살라에 오기 전 네팔의 이름난 트레킹 코스들을 돌고, 티베트의 성산 카일라스를 두 번이나 순례를 해 히말라야에도 이골이 난 사람이다.

 

 히말라야 산행은 한 구간만 가려고 해도 열흘이 넘는 일정이어서 텐트와 먹을 것 등짐이 많아 고역이다. 그런데도 그때 둘이 죽이 맞아 다람살라 뒷산 트리운드로 올라갈 때 가장 가기 어려울 듯 보이는 지점을 목표로 길을 나섰다. ‘바라방갈’이란 산동네였는데, 이 일대 히말라야에서도 최오지다.

 

 해외 등반가들이 다니는 유명 루트가 아니니 코스에 대한 정보도 전무하다. 천행으로 사람을 만나면 물어물어 가는 원시적인 산행 외엔 방법이 없는 길을 무작정 떠난 것이다.

 

 4340미터 고지인 인드라하라 패스를 넘을 때부터 첫 고비가 닥쳤다. 느닷없이 눈과 우박이 내렸다. 둘은 조그만 바위틈새에 몸을 웅크리고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등산로보다 하산로가 훨씬 위험했다. 우박과 눈으로 길이 얼어붙어 버렸다. 아이젠 없이 지팡이 하나에만 의지해야 했기에 급경사에서 미끄러지면 수백미터 벼랑으로 떨어져 주검을 찾을 수도, 천도재도 지낼 필요가 없는 황천행이었다. 콧김이 얼어붙는 날인데도 미끄러운 발끝의 촉감 때문에 생땀이 났다.

 

청전스님과 이재환씨.jpg

인드라하라패스에서 청전 스님과 이재환씨

 

 

히말라야 설산-.jpg

히말라야의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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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경사에 위태위태하게 자리한 히말라야 오지의 집들

 

 

 

 그렇게 산행중에 비박을 하며 이레 만에 도착한 마을이 다라리였다. 처음 목표로 한 바라방갈에 이르기 전 마지막 마을이었다. 다라리 사람들은 자기 마을로 찾아든 외지인을 처음 본 듯이 신기해하며 둘레에 모여들었다. 손짓 발짓으로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자 철 이른 사과를 따주었다. 천도복숭아가 그보다 맛이 있을까? 지금도 사과하면 다라리 산골에서 먹은 그 사과향으로 인해 군침이 돈다. 내리 두 개의 사과를 껍질째 우적우적 씹어 삼키고는 인도돈 십 루피를 주었다. 하지만 신인 듯 길손을 맞이하는 산골 동네 사람들이 돈을 받을 리 없다.

 

 필자는 산골마을에 다닐 때는 언제나 한국의 지인들이 보내주는 진통제와 연고 항생제 등 의약품을 배낭 가득히 담아간다. 그날도 저녁을 물린 뒤 마을 사람들이 아프다는 부위에 따라 상비약을 나눠주었는데, 산 너머에 산다는 50대쯤의 남자가 자기 아내가 많이 아프다면서 이곳에 데려올 테니 가지 말고 꼭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주일 넘는 산행중 만난 산골 사람들에게 약을 다 나눠줘 버린 뒤였다. 부인이 아파도 의약의 혜택을 받을 길이 없어, 나를 신의처럼 믿고 산 넘고 물 건너 아내를 데려오겠다던 그 오지인의 순박하고 안타까운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튿날 바라방갈까지 거리를 물으니 ‘십 킬로미터’란다. 해 지기 전엔 도착하기 위해 이른 아침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런데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 이제나저제나 했지만 마을이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산이라면 이골이 난 나나 이재환씨 걸음으로 10시간 이상을 달리다시피 했으니 족히 20킬로 이상은 갔을 성싶은데도 첩첩산중일 뿐이었다. “왜 이 먼길을 10킬로라고 했을까”라고 부아가 치밀었지만, 문명인들의 거리 개념 없이 자기들의 어림짐작으로 쉽게 내뱉는 오지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우리가 바보였다. 

 

 해가 지면서 비까지 내려 옷도 흠뻑 젖어서 추워 떨렸다. 그러니 전등을 켜고라도 기어코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산행 중 산골마을 가게에서 산 건전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깜박깜박하더니 채 1분도 안 돼 꺼지는 게 아닌가. 아마 가게에 들여놓은 지 10년도 더 지나 자연 소모된 건전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날이 칠흑처럼 어두워 더 이상 한 발도 더 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진 자리 마른자리 가릴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텐트를 치고 요기를 할 엄두도 못 내고 춥고 배고픈 상태로 지쳐서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해가 떠오른 뒤에야 미숫가루로 간신히 연명만 하고 또 길을 재촉했다.

 

 그 길엔 태고 적 전나무 숲이 하늘과 땅을 뒤덮고 있었다. 그 숲을 벗어난 순간 도연명이 말하는 별천지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너와 지붕으로 엮어진 마을이었다. 수십 년 전 강원도 삼척이나 정선지방 산골 순례 길에서 보았던 것과 다름없었다.

 

그 사이 굴뚝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해발 2550미터의 깊고 깊은 산골에 이런 마을이 숨어있었다니. 입이다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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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과 히말라야의 양치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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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오지의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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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뒷쪽 맨왼쪽)과 다라리 마을 주민들

 

 

 바로 바라방갈마을이었다. 놀랍게 이곳에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 6개월이라고 했다. 겨울이면 추운 이곳에서 머물러 있을 교사가 없어서였다. 이른 가을에 하산한 교사가 눈이 녹는 5월께 산을 넘어오는 날이 개교 날이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이틀을 지냈지만 무리한 산행으로 지친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엿새가 걸리는 5050미터 고개의 타인투 패스를 피해 4700미터 고개인 탐사르 패스를 택해 넘었다. 그 고개에서 예상치 못하게 눈밭에 청정한 호수가 있어서 그야말로 ‘하늘 호수인가’ 몇 번이고 다시 봐야 했다.

 

그러나 선경이 주는 기쁨은 잠깐이고 또 한발 한발의 고행길이 이어졌다. 간신히 고개를 넘으니 허름한 찻집이 있다. 여름철에 곡식이나 생필품을 나르는 마부들의 중간 숙박처로 밥과 짜이(밀크티)를 파는 곳이다. 그곳에서 짜이를 한 잔 시켜 마셨다. 그런데 아직도 해가 많이 남아 이곳에서 숙박하기보다는 더 하산하기로 하고 찻집 아저씨에게 “얼마나 더 가야 다음 숙소가 나오느냐”고 물으니 “니째 도 키로(2킬로만 더 가요)”라고 답한다. 2킬로면 잰걸음으로 반 시간이면 족했기에 날 듯이 길을 나섰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2킬로면 나온다던 집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더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밤하늘에 별이 총총 나있어서 희미하나마 그 별빛을 등불 삼아 한발 한발 내 디뎠다. “이놈의 ‘니째 도 킬로’가 도대체 어찌 된거냐”고 한탄하면서.

 

 마침내 밤 열 한시가 되어서야 구원의 빛이 저 멀리 눈에 띄었다. “이제 살았네!” 하고 들어가니 그 찻집 아저씨가 말한 바로 그 집이었다. 그때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바로 그 아주머니는 그 아저씨의 아내였다. 우리를 자기 집에서 밥을 먹이고 재워 매상을 올리려고 이십여 킬로를 줄여 이 킬로라고 말했다는 것을. 그날 밤 12시가 되어서야 먹은 밥 한 그릇과 야채 한 그릇은 어느 진수성찬보다 맛이 있었다. 그런 꿀맛이 어디 있을까.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나면서, 다람살라에서 비상음식을 싸오느라 챙겨온 플라스틱통과 잡동사니들을 모두 내주었다. 산골에서 긴요한 세간살이를 얻자 아주머니는 다 빠진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그 후로 이재환씨와 몇 번 산행을 함께했는데, 험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니째 도 키로!”를 박자 맞추듯 내뱉으면 웃음이 터지고 없던 힘이 났다.

 

 고지를 넘는 것과 같은 힘든 과정이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때론 나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조차 내가 험고를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가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고통이 곧 행복의 씨앗이 된다. 그때도 찻집 아저씨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20킬로가 넘는 길을 한달음에 갈 수 있었을 것인가. 지금도 힘든 여정을 만나면 찻집 아저씨의 말이 저절로 주문처럼 되새겨진다.

 

 “니째 도 키로!”

 

 청전 스님

 

 

 

 

조현이 히말라야에서 만난 청전 스님

 

‘휴심정’ 벗님글방 필자 가운데 청전 스님의 글을 1번으로 택한 것은 청전 스님의 산행기가 결코 남 얘기처럼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신학대학에 다니다가 송광사(전남 순천)로 출가해 25년째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히말라야에서 수행중인 그를, 사람들은 ‘히말라야 도사’라고 부릅니다. 포터들에게 배낭과 먹을 것까지 양껏 지우고 귀족 산행을 하는 일부 산악인들과 달리 오지인들에게 줄 상비약까지 등에 지고 아무도 가지 않은 산길을 달리는 그를 보면 그런 말이 과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제가 청전 스님을 우연히 만난 건 11년 전 신문사를 1년 쉬고 인도를 순례하던 중 다람살라에서였습니다. 그때 오지 중의 오지라는 스피티 등을 함께 순례하며 한 달을 함께 보냈지요.

 

3년 전엔 한 달간 라다크를 순례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개인 싱고라를 함께 넘기도 했습니다. 청전 스님은 이제 60살이니 이팔청춘이 아니지만 산에 가면 여전히 펄펄 납니다. 갈림길에서 앞서 가던 그가 보이지 않아 애타게 부르며 당혹해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라다크에선 고산병에 시달리며 지쳐 떨어지자 “설산에 묻어버리고 가겠다”며 제 분기를 자극해 다시 산을 기어오르게 한 분이지요.

 

그러나 병에 걸려도 의약품 구경도 못하는 오지인들의 아픈 곳을 쓰다듬으며 약을 주는 그를 히말라야인들은 ‘산타클로스 스님’이라며 좋아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면 어김없이 공중파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출연을 의뢰하지만 “수행자가 그런 데 얼굴을 내밀면 좋지 않다”며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휴심정 독자들에게만 무주상글보시를 해주고 있습니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이 글은 <한겨레> 지면 6월 5일자 25면에 나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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