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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저가 기회…대기업에 사내유보세 매겨 투자 유도해야"

 

[강연] 김영호 전 장관 "한국 경제 4년 내 결판"

김하영 기자(=화성)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6-06 오전 9:44:09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전 산업자원부 장관)가 "55조 원의 유휴 자금이 투자되지 않고 10대 기업에서 놀고 있다"며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에 과세해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5일 수원대학교 국토미래연구소의 주최로 열린 특강에서 "한국은 7~8년 째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 수준에 머무르며 선진국 문턱을 못 넘는 '문지방 국가'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앞으로 4~5년 내에 날지 못하면 길을 잃고 말 것"이라면서 박근혜 정부와 6월 정기국회를 열고 있는 국회를 향해 경제 정책 과제를 제시했다.

김 교수는 최근 엔저 현상에 대해 "내가 정부에 있을 때(2000년)도 엔저 현상이 있었지만 한국은 수출을 굉장히 많이 했다"며 "수출은 껄끄러워졌지만 수입하기에는 얼마나 좋아졌냐. 이럴 때 설비와 부품 등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뤄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중국의 경제가 수출 주도에서 수입 주도로 바뀌는 순간이 온다"며 "설비, 기술, 소프트웨어 투자로 중국이라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탈 수 있는 체질 개선의 시기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호랑이를 타지 못하면 호랑이 밥이 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또한 실업 개선을 위한 일자리 나누기 사회적 대타협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노동시간이 미국은 1700시간, 독일은 1200시간인데 우리나라는 2250시간"이라며 "노동시간을 1800시간으로 줄여 일자리를 나누면 산술적으로 최소한 300만 개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김 교수는 "노사정위원회에서 노동시간을 1800시간으로 줄이기로 합의해놓고도 실시하지 못하고 연기해버렸다"며 "경총, 한국노총 등이 모여 있는 노사정위원회가 국민들을 대표하는 대타협의 주체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박근혜 정부는 사회적 대타협에 정면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때"라며 "노사정위원회를 다시 구성해 헌법기관에 준하는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영호 교수의 강연 요약이다.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슈바이처와 3등석, 그리고 르노자동차

수원대학교에서 지금의 한국 경제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영광입니다. 모 신문기자가 제게 "요즘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BMW를 타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BMW가 무엇인지 아시죠? B는 '버스', M은 '메트로'의 지하철, W는 '워킹'(웃음). 이 이야기를 하자 기자가 저를 측은하게 보길래 슈바이처 얘기를 했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독일어 공부를 위해 슈바이처 자서전을 읽고 굉장한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슈바이처가 노벨 평화상을 받고 고향에 갔는데, 고향 사람들이 모두 슈바이처를 맞이하기 위해 기차역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2등석 승객들이 다 내렸는데 슈바이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슈바이처가 안 왔나 싶었는데 3등석 승객들 끝에서 슈바이처가 내리는 것입니다. 주민들이 "왜 3등석을 탔느냐"고 슈바이처에게 물었더니 슈바이처가 무엇이라고 대답한 지 아십니까? "4등석이 없어서요."(웃음)

제가 대학 시절에 이 이야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나도 훌륭한 사람이 돼서 3등칸을 타고 누가 물으면 '4등칸이 없어서요'라고 대답해야지 결심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결심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2000년 파리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파리에서 르노자동차 회장을 만나 삼성자동차 매각 협상을 할 때였습니다.

삼성자동차 매각을 위한 많은 준비를 해서 르노자동차 회장을 만났습니다. 회장과 명함을 주고 받는데 명함에 적혀 있는 성이 '슈바이처'인 겁니다. 그래서 호기심에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와 무슨 관계냐"고 물었더니 "내 할아버지입니다"라는 거 아닙니까. 치밀하게 준비해간 매각 협상 시나리오는 사라지고 반가운 마음에 어릴 적 우상의 자서전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회장에게 "당신 할아버지는 아마 르노 자동차를 타지 않을 것입니다"고 농담을 했습니다. "왜?"냐고 묻는 회장에게 슈바이처 자서전의 3등칸 이야기를 해줬죠. 그랬더니 회장은 할아버지 자서전의 표지는 봤지만 내용은 읽어보지 못했다면서 기억 나는 내용이 있으면 얘기해달라고 하더군요. 슈바이처의 자서전은 독일어 공부를 위해 외우면서 봤었는데, 신기하게도 수십년이 흘렀지만 그 자리에서 몇 가지 이야기들이 떠올라 독일어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르노자동차 회장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 르노자동차는 삼성자동차를 인수했습니다. 한국에서 인수 기자회견을 하는데 르노자동차 회장이 인수 이유로 자동차 분야에도 전자 기술의 비중이 높아지기 때문에 삼성전자의 전자 기술이 자동차 분야에 시너지 효과를 기대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주무 장관이 할아버지의 자서전을 독일어로 외우는 것을 보고 감동받은 것도 심리적 요인 중에 하나라고 대답하더군요. 여러분이 지금 공부하는 것들이 언제 어떻게 유용하게 활용될지 모릅니다.(웃음)

2000년, 한국은 여러 분야에서 구조조정을 했습니다. 삼성자동차 매각도 그 중 하나였는데, 당시 삼성자동차 채권을 갖고 있는 산업은행금융적 압박을 받아 회사를 얼마에 파느냐가 중요한 정책 기준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금융적 기준 보다는 산업적 기준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싸게 팔아도 좋으니 르노자동차가 한국을 아시아 지역 생산 판매 거점으로 세우게 해 자동차 산업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런 주장을 하니 재무장관이 저를 회의에도 부르지 않더군요. 그리고 삼성자동차 매각에서 산업적 관점은 후퇴하고 금융적 관점만 남았습니다. 한국의 경제정책이 주로 금융적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진국 문턱에서만 8년
 

▲ 김영호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한국 경제는 중진국 함정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중진국 함정'은 주로 1인당 국민소득이 2000~5000달러를 돌파할 때 생긴다고 합니다. 못 살 때는 휴일도 없이 밤낮으로 일하던 국민들이 소득이 올라가면 휴일에는 쉬고 놀러도 다니면서 '헝그리 정신'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소득이 올라가는 과정에서 소득 불균형이 심해지는데 불평등이 가장 심해질 때 근로 의욕이 떨어집니다. 선진국들도 기술 특허 침해 등에 대한 견제가 본격화되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도 환경오염이 심해집니다. 이런 성장 저해 요인들이 합쳐져 경제 성장 과정에서 중진국 함정에 빠진다고 합니다. 요즘 중국이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중진국 함정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벗어났다고 봅니다. 한국은 중진국은 이미 넘어섰고 선진국 문턱에 있는데, 7~8년째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문턱에 걸려 있습니다. 2만3000달러까지 올랐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양적 완화에 따른 달러가치 하락 때문이지, 한국이 실질적으로 3만 달러에 이를 전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 '문턱 국가', '문지방 국가'라고 합니다. 우선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자리 10만 개를 만드는데 경제성장 1%가 필요하지만, 한국은 경제는 성장하지만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저성장 추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WLB(Work & Life Balanc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WLB도 현저히 악화되고 있습니다. 일과 삶이 분균형합니다. 일을 하자니 삶이 파괴되고, 가족을 중시하자니 일이 어려워지고. 가정 파괴 현상이 일어납니다. 아이를 안 낳습니다. 부모를 돌보지 않아 노인 자살 현상이 생깁니다. 출산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습니다. 자살률은 매우 높습니다. 1인당 노동시간은 2250시간으로 아주 높은 수준입니다. 2200시간이 넘는 노동 시간을 지속하면서 창조적인 경제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일본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가는데 7년, 싱가폴이 5년 걸렸습니다. 우리는 8년이 지났는데도 당분간 전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GDP도 한국이 세계 10위일 때가 있었지만 15위까지 밀려났고, 경쟁력 지수는 24위입니다. 참, 위스키소비량은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이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삼성이 잘 나간다고 하지만, 삼성 그룹 안에서도 잘 나가는 건 삼성전자 뿐입니다. 삼성전자 안에서도 핸드폰 뿐입니다. 삼성이 애플을 능가했다고 우리는 만족하고 있지만 착시 현상입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고 유럽에 가서 세계화가 아니라, 수원 시내의 백화점의 한 진열대 안에 이탈리아, 스위스, 일본 제품들이 서로 경쟁되고 있는 것이 세계화입니다.

핸드폰 하나에도 디자인은 이탈리아, 핵심 부품은 일본, 조립은 중국에서 하는 등 세계화가 담겨져 있습니다. 가격 경쟁을 위해서라면 부품을 대만 산으로 바꿀 수도 있고 조립 노동력을 말레이시아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이 뿐입니까. 이 회사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은 영국, 일본, 미국 등 전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세계 곳곳의 여러 생산 요소를 얼마나 잘 배합하느냐. 정보를 어떻게 잘 결합하느냐 경쟁력이고 세계 시장에서의 성패가 갈립니다. 세계화는 배 타고 비행기 타고 멀리 가는 게 아닙니다.

브레이크 없는 금융

요즘은 특히 더 어떻습니까. 하루에 세계에 유통되는 돈이 4조 달러라고 합니다. 하루에 거래되는 실물 무역액이 400억 달러 정도 됩니다. 금융 경제가 실물 경제의 100배입니다. 자동차 한 대는 수출하려면 만들어서 배에 싣고 이동해서 검역하고 다시 수송하고 한 달이 넘게 걸립니다. 그런데 금융은 영국에서 한국으로 돈 보내는데 클릭 한 번이면 됩니다. 한국에 50억 달러만 들어오면 주식과 채권 시장이 폭등하고, 반대로 빠져나가면 폭락합니다. 클릭 한 번에 순식간에 빠져나가기 때문에 예고도 없습니다. 개미들만 돈을 잃고 박살이 납니다. 이렇게 주식 가격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을 '붐꽝 경제'라고 합니다. 이런 해지 펀드들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며 '토빈세' 주장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이걸 방치하는 게 무슨 금융정책입니까. 최근 해외 조세피난처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를 파헤친 곳은 아무런 힘과 권한도 없는 <뉴스타파>라는 작은 독립 언론입니다. 모든 힘과 권한을 갖고 있는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는 뭘 하고 있습니까.

한국은 내외부적으로 위기의 상황에 있습니다. 유럽은 재정적자, 미국은 재정절벽에 허덕이고 있고, 중국은 중진국의 함정에 경제가 주춤합니다. 일본이 대대적인 양적완화 정책을 펼치면서 엔저 현상으로 일본과 수출품이 60~70%가 겹치는 한국의 수출 품목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도 5대 부채(가계, 기업, 은행, 정부, 공기업)가 너무 많습니다. 실업률, 특히 청년실업률이 너무 높습니다. 취업 재수생이 사회 계층을 이루는 나라는 한국 뿐입니다. 중소기업, 벤처기업, 스타트업 기업이 실업을 해소해줘야 되는데 역부족입니다. 'LLL(lifelong learning: 평생교육) 시대'라고 하는데, 평생교육 시스템도 미비합니다. 93세에 책을 낸 피터 드러커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Learning keeps me young"

유한킴벌리만 하더라도 4조 3교대제를 실시해 하루에 8시간씩 3일을 일하고 하루를 쉴 수 있습니다. 쉬는 하루에는 사내 대학을 다닌다든지 연수를 간다든지 평생학습을 받습니다. 평생학습이 가능한 사회가 경쟁력이 높은 사회입니다.

한국에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고 봅니다. 중국의 핸드폰 제조 기술은 한국 턱 밑까지 왔다고 합니다. 조선업이 잘 나간다지만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게다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4~5년 안에 날지 않으면 길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한국 경제 4~5년 안에 결판, 박근혜 정부 중책

박근혜 정부의 정책이 아주 중요합니다. 4.1 부동산 대책의 약효를 잃었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데, 주택 가격 하락은 금융 파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지만 저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시대를 졸업했어야 합니다. 그보다는 6월 정기국회가 중요합니다. 경제민주화 입법이 6월 국회에서 이뤄짐으로써 '위대한 6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부에서는 고용률 70% 달성을 위해 시간제 고용을 늘리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노동시간이 2250시간 정도로 미국(1700시간), 독일(1200시간)에 비해 높습니다. 노동시간을 1800시간으로 줄여 일자리를 나누면 최소 300만 개의 일자리가 생깁니다. 그런데 노사정위원회에서는 노동시간을 1800시간으로 줄이기로 합의했지만 실시 시기를 유예했습니다. 기득권자들이 합의는 해놓고 실시 못하겠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노사정위원회가 사회적 대타협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한국노총은 전체 노동자의 5%도 대변 못합니다. 노조는 비정규직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조 마피아라는 말도 나옵니다. 경영과 소유가 구분되지 못하는 우리나라에서 경총은 경영자 집단입니까 오너 집단입니까. 대타협의 조건이 성숙돼 있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사회적 대타협에 승부를 걸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시도에 대해 시민들은 격려하고 박수를 보내야 할 때입니다. 네루다의 시처럼 지금 날지 않으면 길을 잃습니다. 노사정위원회 멤버를 개편하고 헌법기관에 버금가는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봅니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도 사회대통합을 얘기했고, 야당도 안철수 씨도 대타협을 중요 정책 과제로 걸었지 않습니까.
 

▲ 김영호 교수 수원대 특강. ⓒ프레시안(김하영)


박근혜 정부, 사회적 대타협에 승부 걸어야

또한 지금 '엔저'라고 해서 아우성인데, 과거 제가 정부에 있을 때도 달러 당 엔화 환율이 101~105엔 사이를 오갔습니다. 그래도 한국은 수출을 많이 했습니다. 수출 가격 경쟁력에만 매달릴 시기가 아닙니다. 엔저 현상으로 수출이 껄끄럽기는 하지만 수입 하기에는 얼마나 좋습니까. 이럴 때 제대로 투자가 이뤄져야 합니다. 중국이 수출 중심에서 내수 소비 중심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다가올 것입니다. 그 순간 중국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탈 수 있는 투자가 필요합니다. 설비, 기술, 소프트웨어에 투자해서 한국 경제의 체질을 개선해야 할 시기입니다.

토빈세 얘기도 잠깐 드렸지만, 지금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회사 유휴자금, 사내 유보금이 너무나 많습니다. 10대 기업의 사내 유보금이 55조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놀고 있는 이 사내 유보금에 세금을 매기면 설비 투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호랑이를 타지 못하면 호랑이 밥이 됩니다."

 
 
 

 

/김하영 기자(=화성)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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