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드는 의문 (4)

8.15 직후 3일간 휘날린 태극기

흔히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발표해 광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맥아더 ‘일반명령 제1호’(한반도 38도선, 베트남 16도선 분할)와 항복문서는 8월 11일 3부조정위원회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통치권 이양을 시작했고, 8월 15일 조선총독부 건물에는 의연히 태극기가 휘날렸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이 보낸 미군 선발대는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모든 체제를 변경하지 말고 계속 유지하다가 정식 항복할 때 일본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 인계하라”고 통고했다.

미국의 통고를 받은 조선총독부는 8월 18일 오후 여운형에 대한 행정권 이양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인계한 신문사와 학교 등도 다시 접수했다. 이런 조치에 따라 조선총독부에 게양된 태극기도 다시 일장기로 바뀌었다.

▲1945년 9월 9일 미 점령군이 조선총독부 국기 게양대에 걸린 일장기를 성조기로 교체하고 있다. [사진 : 주한미군 페이스북]
▲1945년 9월 9일 미 점령군이 조선총독부 국기 게양대에 걸린 일장기를 성조기로 교체하고 있다. [사진 : 주한미군 페이스북]

조선총독부와 건국준비위원회

8월 20일 미군 B29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웨드마이어 장군 명의의 삐라를 시내에 살포했다. 내용은 조만간 미군이 진주한다는 예고였다.

미국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건국준비위원회는 통치권 이양을 완강하게 전개하는 한편 임시정부수립에 박차를 가한다.

이에 당황한 조선총독 아베는 8월 28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에게 한반도 상황을 전하고 치안유지권을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에 다음과 같은 즉각적인 회답이 왔다.

“귀하는 우리 군대가 책임을 떠맡을 때까지 38선 이남의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기구를 보전할 것을 지시한다. 나는 귀하에게 그 곳의 질서를 유지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권한을 부여하며 지시하는 바이다.”

이를 받아본 아베의 회신은 “귀하의 명철한 회답을 받고 본인은 지극히 기쁘다”라는 것이었다.

-분단 전후의 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외 저>

▲ 미 미조리호 함상에서 일본대표로 시게미스 마모루 외무대신에 이어 우메스 미치로 육군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이 광경을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이 지켜보고 있다(도쿄, 1945. 9. 2.). [사진 : 맥아더기념관]
▲ 미 미조리호 함상에서 일본대표로 시게미스 마모루 외무대신에 이어 우메스 미치로 육군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이 광경을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이 지켜보고 있다(도쿄, 1945. 9. 2.). [사진 : 맥아더기념관]

조선인민공화국과 미군정

9월 2일 미군 미조리호 함상에서 일본 육군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같은 시각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 명의의 포고 삐라가 다시 서울 상공에 살포되었다.

9월 6일, 미군 협상단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여 조선호텔에서 조선총독부와 예비교섭을 시작했다. 그날 저녁 건국준비위원회는 대표자회의를 열어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창건한다. 이로써 38선 이남에 해방 후 첫 정부가 생겼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첫 사업으로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친일파 척결에 나섰다.

그러나 운명의 9월 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24군단 7만여 명의 미군이 38선 이남을 점령(occupy)했다.

‘조선 인민에게 고함’으로 시작하는 맥아더 포고령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최고통치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 발포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해야 한다. 점령군에 반항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엄벌에 처한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광복을 맞이한 우리 민족이 스스로 세운 정부, 당연히 조선인민공화국에 가야 할 통치권이 미 점령군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미군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미 점령군은 일본군 무장해제가 목적이었을까?

8.15부터 미군정을 선포한 9월 8일까지 미국이 벌인 치밀한 한반도 점령계획은 미군이 단순히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순수한 목적으로 진주하지 않았음을 웅변하고 있다.

특히 8월 14일 청진과 나남에 소련군이 상륙하여 일본군을 몰아냈으며, 16일에는 훨씬 더 남쪽인 원산에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이러한 진공 추세로 볼 때 소련군이 일본군 패잔병을 한반도 전체에서 몰아내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반면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서 1천Km 떨어진 오키나와 주둔군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미국이 38선 이남의 일본군 항복이 목적이었다면 같은 연합군인 소련에 맡기고 굳이 한반도에 진주하지 않아도 된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의 만류만 없었다면 일본은 건국준비위원회로의 통치권 이양을 거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일본 통치배들은 한시라도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고, 건국준비위원회는 빠르게 통치권 이양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이 조선인민공화국에 가야할 통치권을 찬탈한 이유는 친미 정권을 세워 한반도를 영구 점령하기 위해서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당시 국공내전 중이던 중국에 국민당을 지원해 친미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던 사실에서도 이런 추측은 가능하다.

무엇보다 미군이 지금까지 이땅에 주둔하며 국군을 지휘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무기 강매와 군사훈련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오늘의 현실이 광복 당시 미군이 진주한 목적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광복절에 드는 몇가지 의문

광복 70여년이 흘렀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다. 반복된 강요로 굳어지고 엉켜버린 진실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몇 가지 질문에 답해 본다. [편집자]

[연재] 광복절에 드는 몇가지 의문

(1) 일본은 왜 8월15일에 항복했나?

(2) 38°선을 왜 한반도에 그었나?

(3) 나라면 ‘찬탁’일까, ‘반탁’일까?

(4) 미군점령, 일본군 무장해제가 목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