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남북공동성명 산파역인 이후락 중앙정부보장과 김영주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 [사진출처-노동신문 1972.7.4]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평양방문-'72.5.2~9]


"대동강이 참 아름답습니다."

"조선이야 다 아름답지요."

1972년 5월 2일 저녁 6시 5분 평양 주암초대소에서 마주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의 첫 대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린 남북 당국 고위급회담은 저녁 7시 53분까지 1시간 53분간 진행됐다.

남측에서는 실무접촉을 계속해 온 정홍진이 한적 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 직책으로, 북측에서는 김중린 당 비서, 류장식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겸 대외사업부장, 그리고 정홍진과 실무접촉을 해 온 김덕현(당 중앙위원회 직속책임지도원) 이 배석했다고 『남북회담사료집』은 기록하고 있다.

이후락은 "12시 반에 서울에서 점심을 들고 벌써 이렇게 평양에서 마주 않게 되니 참 가까운 곳입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오가지도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라고 하면서 "내가 평양가기를 결심한 것은 관광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고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는 시발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친한 친구도 말렸지만 김영주 선생의 정치적 역량을 믿고 '이야기를 하면 될 것이 아니냐'하고 왔습니다. 수상께서도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넸다.

김영주는 "박대통령께서도 안녕하십니까"라고 묻고는 "이후락 부장선생의 친서를 받았고 내가 정홍진 선생을 통하여 서로의 의견을 전달받았고...우리 구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기회에 오셨습니다"라며 부드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안 올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이후락의 물음에 김영주는 "초보적 접촉을 통해서 말씀한 바를 분석해 보면 오시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원래 4월 중에 오기를 원했던 것은 정홍진이 '''조국문제'에 대해서는 일방적 제안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전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빨리 오셔서 토의하자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4월)29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토의하며 제기하여 하였다. 원래 두가지 문제를 취급하려 했는데 예산문제만 취급하고 대남문제는 보류했다"고 대답했다.

이어 김영주는 "지금 정세는 조국통일을 위한 대단히 좋은 정세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세를 놓치지 않고 정세에 맞게 우리가 대화하면 좋은 결과가 오리라 생각한다"고, 이후락은 "성공을 꼭 해야지요"라고 화답했다.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 명의의 신변안전보장각서 [사진출처-남북대화사료집]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 명의의 신변안전보장각서 [사진출처-남북대화사료집]

덕담과 인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이후락은 "나 자신이 사회주의 체제를 보고 내가 알게 되고...또 김영주 부장도 와보고 서로 이해를 촉진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인도적 회담을 촉진시켜 인적교류, 물적교류, 통신교류 등을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서로의 이해를 촉진시키고 그러한 단계를 거쳐 통일문제를 다루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고 먼저 발언했다.

그러면서 김영주가 임명한 몇 사람의 그룹과 자신이 임명한 그룹이 서로 평양과 서울을 왕래하며 서로 교류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통일을 위한 '작업회담'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김영주와 자신이 주역이 되자고 강조했다.

"중앙정보부장을 가장 미워할 줄 안다. 그러나 나는 통일문제는 이념을 초월하여 생각하고 있다. 김부장의 경우도 이런 문제를 갖고 이야기할 때 당과 내각에 반대의견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안에서도 내가 무어라 이야기를 하면 오해받기도 한다. 북쪽은 김부장이 책임지고 남쪽은 내가 책임지고 남북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가자"

김영주는 "합시다. 그럽시다"라고 혼쾌히 동의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시작이고...어떻게 하자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거북한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대화를 풀어나갔다.

이후락은 △진행중인 적십자회담의 순항 △양측 실무자간 인사교류, 경제교류 등 협의 △남측 상사(商社)의 평양주재 제의 △대외선전 성격의 일방적 제안 중지, 상호 비난과 비방 중단, 상호 무력사용 중지를 언급하며 이를 확고히 합의하면 통일문제는 90%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어느 사회에서나 어느 계층의 내부에는 무력으로 통일해야 된다는 강경론이 있다"고 하면서 "오늘도 오면서 당신들의 사회주의 건설을 보았다. 이런 것들을 파괴해서는 안된다. 김영주 선생과 내가 평화의 기수로서 이러한 일이 다시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주는 먼저 '상호불신과 오해'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자신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으니 먼저 북에 대한 오해와 불신에 대해 말해보라고 이후락에게 기회를 주었다.

이후락은 '6.25전쟁'을 거론하며 "격폐(隔閉)해 놓고 보면 불신과 오해를 풀 수 없다"는 점을 재차 언급하고는 "사람이 오가고 하면 과거에 피맺힌 오해가 있다 하더라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도 20년이 지났으니 이제 피에 맺힌 원한도 풀 용의가 있다"고 운을 떼자 김영주는 '그 나머지 다 이야기 하자'고 기다린다.

이후락이 "오해는 이데올로기의 차이에서 도리없이 생겨나가는 것이 아니냐"며 북측 김중린 비서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넘기자 김중린은 "제도상의 모순에서 오는 오해와 불신을 민족적 입장에서 해결해 나갈 수 있지 않겠나"라며 "이왕 부장님께서 오셔서 오해와 불신이 무엇인가 툭 털어놓고 서로 확실히 해두고 시작하면 풀릴 수 있다. 이를 대화의 기초로 하자는 뜻이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처음 만났으니 '툭 털어놓고 체계없이' 이야기하자는 대화는 이렇게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김영주는 먼저, 왜 남측은 제국주의 군대 철수를 반대하는지를 따졌다.

이에 대해 이후락은 "북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미군을 한국내에 끌어들인 것은 바로 당신들이다. 미군이 나가고 없을 때 남침해 오지 않았나. 이제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하게 하는 것도 바로 당신들(북)의 책임이다. 그것은 이제는 다시 남침을 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는 일이다"라고 대꾸했다.

김영주가 "우리의 전쟁준비는 방위적인 성격이다. 우리는 남침기도가 없다. 어째서 있지도 않은 남침에 대해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선전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라고 되물었다.

이후락은 "노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무장간첩이 내려오고, 대통령을 암살하려 1.21사태를 일으키고..., 이런 사태를 김 부장이 모른다면 이것은 큰 문제이다. 군인들의 말을 서로 믿지 말자. 우리도 전쟁준비하고 있지만 북침할 의사가 없다"고 응수했다.

북측은 '일본 군국주의가 초보적인 남침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노농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를 조직한 것은 일본 군국주의를 막기 위한 것이지 우리 민족끼리 싸우자는 것은 아니라고 거듭 주장했다.

이어 6.25전쟁 발발에 대해서도 "그것은 이승만이 까치봉이요, 송악산이요 먼저 도발행위 자꾸 했고, 그 뒤 미 제국주의가 우리를 침략하니 맞받아 싸운 것"이라고 하면서 "미제국주의,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에 맞받아 싸우기 위해 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이후락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불신을 없애야 한다. 결국 북이 남을 믿지 않고 남이 북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우리쪽도 정부의 기본방침이 자주, 자립, 자위이고 언젠가는 남의 힘을 빌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비상사태를 선포한 것도 힘을 키워 남침을 막자는 뜻이지 북침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하게 맞받았다.

북측이 '박정권은 미국과 일본의 앞장이로 생각하고 일본과 미국이 추켜 가지고 쳐들어 올 것으로 알았다'는 주장을 펼치자 남측은 "박대통령 정부는 미국과 일본이 추킨다고 그렇게 할 정부가 아니다.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라고, 그것은 큰 오해"라며 펄쩍 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이 '미국과 일본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거듭 이야기하자 이후락은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는 되지 않는다. 그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 자주노선을 취하고 있다. 우리의 자주노선을 확실히 알아두어야 한다"고 맹렬히 주장했다.

이쯤에서 북측은 "좋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라고 하면서 공작원, 간첩문제를 거론하고는 '호상성'이라고 주장했다. 서로에게 모두 있는 일이 아니냐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28일에도 한사람 죽였다. 손들라 하는데 손들지 않아 죽였다"고 했다.

이에 이후락이 간첩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할 이야기가 더 많다고 나서자 북측은 '청와대 사건'('68.1.21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던 사건)을 먼저 언급했다.

"우리 사회의 내부에서도 좌경기회주의, 우경기회주의, 좌경맹동주의, 우경분자가 있다. 청와대 사건은 좌경맹동주의자가 한 것"이라고 하면서 "군대에 있는 맹동분자들이 조직했다. 이것을 우리는 후에 알고 다 처벌했다"라고 고백한 것.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총비'(總秘)동지(김일성 수상)를 세계에서 다 존경하고 있는 조건하에서 그런 너절한 짓 안한다. 청와대 사건에 대하여서는 똑똑히 이해하여 주셔야 한다"고 거듭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일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후락이 "앞으로는 그런 맹동분자가 없기를 바란다"고 하자 북측은 "앞으로는 절대 없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김영주와 이후락은 체제와 이데올로기는 각기 내부의 문제이고 '민족의 자주통일'이 최대, 최상의 과업'이라는데 동의하고, 이후락은 이에 더해 "이 다음 통일될 때 어떤 '이데오로기'가 채택될 것인가는 그때 우리 5,000만 민족의 대다수 의견에 맡길 것이고...나는 자본주의 골수이고, 김부장은 공산주의 골수이다. 그러니 이런 문제는 우리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에 김영주가 "옳다. 우리의 세계관은 유물론이요, 유물변증법이요, 자본주의는 형이상학이요, 유심론이요. 이부장이 이제 말한 것이 옳다. 이런 문제는 제켜 놓아야 한다"고 대꾸한 것도 인상적이다.

김영주가 '외세배격' 주제를 꺼내자 이후락은 "외세를 배격해야 한다는 것은 김부장이 밝히지 않더라도 내가 할 임무"라며, 다소 장황하게 "박대통령의 정권이 있는 한 우리가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가 절대 안된다는 것을 믿어달라"고 재차 강조했다.

남측의 비상사태 선포에 대한 항의성 언급이 나오자 이후락은 "제발 부장 선생의 '솔하(率下)에 아까 말한 맹동분자 없기를 바란다"고 일축하고는 북측에서 넘어오는 삐라를 문제삼아 "그것은 절대로 그쪽에 유익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자극하여 단결하도록 만든다. 절대로 유익하지 않다"고 되받아쳤다.

김영주는 "그것은 호상성이다. 앞으로 안하면 되는 것"이라고 짧게 답변하고는  첫날 회담을 마무리한다.


김영주, 김일성-박정희 정상회담 첫 제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면담하는 김일성 수상 [사진출처-중앙일보 1972.7.5]

2차회담('72.5.3)은 모란봉(牡丹峰) 초대소에서 전날 남북 참석자들이 다 나온 가운데 오후 4시부터 6시 30분까지 진행됐다.

김영주는 서두에서 "남조선을 집권하는 분들이 미국과 일본놈들의 앞잡이가 안되고, 나라를 통일하겠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고 "박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이전 시기에 통일을 빨리해야 되겠다는 것도 아주 좋은 말씀"이며 "특히 오해와 불신에 대해서 초보적인 의견을 나눴기 때문에 이런 일은 대단히 좋다고 생각한다"고 운을 뗐다.

그 다음 본론으로 들어가 통일의 시기에 대한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진다.

김영주는 남측 통일방안을 △남북적십자회담 가족찾기 운동부터 시작해 인적 물적 교류를 거쳐 정치회담을 하자는 것으로 정리하고, 북측 의견으로 △정치협상을 빨리 해야 그밖의 문제가 빨리 해결될 수 있다. 즉 가족찾기, 물적 교류 이런 것들은 정치협상만 되면 저절로 풀려나간다. 인적왕래, 물적교류는 정치협상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제시했다.

"비공개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자체가 정치협상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주는 정치협상의 방법에 대해 언급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이부장과 내가 정치협상을 하고 있는 만치 이 급에서 내려가지 말고 급이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만 단번에 해결된다"며, 이번 "정치협상의 '구경'(究竟, 궁극)은 수뇌회담을 마련하는데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통일문제, 우리 급에서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치협상은 우리 당 '총비동지'와 박대통령간에 정치협상을 열어야 한다. 정치협상을 한다하는 것이 전체 우리 동지에게 알려진다면 긴장완화가 될 것이다. 정치협상을 한다, 그렇게 되면 인민이 협상에 기대를 걸고 그 다음으로 조국통일을 빨리하는 의의를 가지게 된다"며 남북정상회담이 갖는 의의에 대해 말했다.

이어 정상회담을 위한 사업으로 "수뇌자급 회담을 조직하고 인민들에게는 이 부장이 제3국에서 공동성명 발표하자고 한 것, 이것이 전적으로 좋은 방안"이라며, "이부장 선생과 나하고 협상하면서 수뇌자 회담을 마련하고 대외적으로 우리측에서 중요간부 한 사람을 파견하고 이부장도 중요간부 한사람을 파견해서 서울이나 판문점이나 평양에서 공동성명을 채택하자는 것"을 제안했다.

공동성명에는 "쌍무적, 다무적 정치협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시키고, 각 정당, 사회단체를 참여시키고, 물론 공화당이 주역을 하고.." 등 주요 내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어 "우리의 대화는 사실 공화당과 노동당의 대화"이지만 "양당간에 우리는 철저히 하고 정치협상할 바에는 다른 정당들이 참여할 것이 뻔한데 다른 정당 사회단체들도 참여시켜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계단식'(단계적)으로 하게 되면 시기성 문제가 중요한데, 너무 지연된다"며 "과거에도 정치협상, 평화협상 하자고 우리 총비동지께서 여러번 제의했다"고 재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촉구했다.  

더불어 정치협상과 관련해 '공존' 문제를 거론하고는 "독일에서는 공존문제가 제기되었다. 서독은 군국주의가 부활되고 독점자분주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평화적 공존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우리는 전패국이 아니고 우리나라 남반부에는 독점자본가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군국주의도 아니오, 그러므로 우리는 영구분열이 필요없고 공존이 필요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이 '72.1.11 신년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성급한 통일론 엄금'을 거론하고는 "이것은 시대사조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세계정세는 통일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영주는 "남조선 내부에 보면 친일파, 친미파, 국수주의자도 있지만 이후락 부장 선생 누르면 될 것 아닌가? 우리 안에도 좌경맹동주의자, 우경기회주의자, 이것은 내가 누르겠다"며 정상회담을 서둘러야 한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남북 직통전화 가설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어제 식사하면서 직통전화 놓자, 직통전화로 남파, 북파 다 막자고 했다. 이런 째째한 문제를 갖고 전화 놓자면 나는 놓을 생각 없다. 그러나 정치협상 논의하자면 당장 놓자"고 재촉하듯 말했다.

다음으로 두개 체제·제도에 관한 문제도 언급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제도간에는 원칙적으로 불상용적 모순이 있으나 맑스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적용하지 않는 우리나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박대통령이나 이후락부장이 자본가 아니므로 투쟁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남측에 있는 절대다수의 자본가는 제국주의 국가에 있는 독점자본가가 아니라 민족자본가이며, 연구 결과 사회주의 경리형태와 자본주의 경리형태를 그냥 둔 민주주의혁명단계에서 민족자본가는 사회주의 경리의 우월성을 인정하여 우리에게 협력했다고 덧붙였다.

투쟁대상으로 정한 것은 제국주의 세력을 업고 나라 팔아먹은 극소수의 매판자본가인데,  이런 사람들은 그렇게 안하면 안될 것이니 우리 내부에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는 논리이다.

남측 정권이 자본주의 체제를 대변하고 북은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것일 뿐 "구조적 근본적 모순은 없다"는 대목에 이르자 이후락은 "결국 공산주의로 통일해야 한다는 논리"라고 반박했다.

이에 김영주는 "계급투쟁은 작은 문제이고 민족통일이 가장 큰 과업"이라고 주장을 이어가고, 이후락은 "통일이 될려면 한 '이데오로기'로 통일이 될 것이 아닌가"라며 대답을 다그쳤다.

외세를 배격하는 당면 투쟁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남북이 각각 10만명 규모로 군비축소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후락은 "그러면 우리 남쪽 군대도 두만강, 압록강으로 옮겨가야 되겠다"고 쏘아붙였다.

김영주는 지지 않고 '대국주의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중국과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에 침략은 없다'고 하면서 남측이 '실력배양, 승공통일' 구호를 대신해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구호를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실력배양은 전쟁준비이고 승공통일은 공산주의를 이기고 통일한다는 것 아닌가? 공산주의를 뒤집어 없앨 수 없다. 공산주의가 세계적 범위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너무 무서워 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의 공산주의은 자주적인 공산주의이다."

당시 냉전체제가 무너지는 데탕트 분위기에서 공산주의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근저에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립적 경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북에는 중공업이 발전되었고 남에는 경공업이 발전되었다"고 하면서 "총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빨리 정치협상을 하고 총비동지와 박대통령과의 협상을 빨리하게 하자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락, '남북 정상회담'..여건 마련이 더욱 중요
"섣부른 정치협상은 큰 실망을 가져올 수 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방문과 박성철 제2부수상의 서울방문을 뒤늦게 알린 [노동신문] 1면 [사진출처-노동신문 1972.7.4]

장시간 김영주의 이야기를 듣던 이후락이 본격적으로 반론을 폈다.

"어제 제기한 것은 진정 통일을 빨리 하기 위한 것이지 늦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며 "양단된 상황에서 너무 섣불리 정치협상을 했다가 희망이 큰 실망으로 될 수 도 있다. 그래서 단계적인 방법을 제안했"다는 것.

그리고 "통일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때 김 수상과 박 대통령의 회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김 수상과 박 대통령이 회담을 하면 잘못될 경우 실망이 크게 된다"며 정상회담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분명히 했다.

또 "남쪽에 있어서의 체제는 박 대통령과 내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국민들이 결정한 것이고 그 체제의 변경도 국민들이 결정할 것"이라며, 북의 주장을 반박했다.

박정희도 그해 5.16기념 치사에서 "조국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는 앞으로도 여러가지 난관이 있겠지만 성급하게 서두르기보다는 하나하나 단계적인 접근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며 '통일문제의 단계적 접근론'에 힘을 실었다. 

이후락은 북측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승공통일'에 대해서는 마치 '남반부 해방'이란 구호와 같이 '체제를 유지 보호하기 위한 구호'이지 않느냐고 되받아치고, 미군 철수 주장에 대해서는 미군이 우리(남)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나아가 전쟁의 경험으로 인해 남북의 불신이 생겼는데, 과연 외국군이 남한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것인지, 물러갔던 미군을 다시 들어오게 한 것은 '현명하지 못한 전쟁때문에' 초래된 것은 아닌지 따져 물었다. 

또 "많은 사회단체와 통일협의 하자는 것은 대외적 '쇼'이지 실질적 의미는 없다"며 "주권자로부터 위임받은 사람이 실질적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북측이 제의한 제정당 사회단체가 망라되는 정치협상에 대해 거부의사를 명확히 했다.

박 대통령과 김 수상의 회담에 대해서도 "통일문제가 해결된다면 지금 당장 만나야겠지, 그러나 여건의 마련이 더욱 중요하다"며 재차 반대입장을 밝혔다.

김영주는 "협상은 협의하고 상론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되어서 인민들에게 역효과를 주는 것인가? 정치협상은 인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인적, 물적 교류 다 해결된다"며 주장을 접지 않았다.

논의가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접어들자 의견대립도 차츰 날카로워졌다.

김영주는 사회단체 협상에 대해 "모두 앉아서 깊지 않은 문제를 취급하게 하고 깊은 문제는 우리들이 해야 하고, 궁극에 가서는 박 대통령과 '총비동지'(김 수상)가 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과정을 "긴장완화를 위해서 지붕을 씌워놓고 내부미장을 하자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이후락이 "나는 기초를 닦아놓고 집짓자는 것"이라고 대꾸하자 김영주는 "정치협상은 기초가 되고 지붕도 된다"고 응수했다. 

체제 차이는 당연히 더욱 뜨거운 논쟁이 됐다.

남북 체제 차이 논쟁

북 : 체제의 차이, 이것은 이부장 선생 말씀처럼 책임지고 대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박 대통령과 남조선의 집권하고 있는 분들은...대변하는데 있지, 계급투쟁은 아닙니다.

남 : 대변한다는 것은 체제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북 : 차이는 상호대변하는 것이고 투쟁대상은 매판자본가입니다. 박 대통령, 이부장님, 자본가도 아닙니다. 개인이 투쟁대상이 아닙니다.

남 : 대변한다는 것은 수호한다는 것입니다.

북 : 개인은 투쟁대상이 아닙니다.

남 : 개인은 문제되지 않읍니다.

북(김중린) : 부장 동지 말은 이 부장 선생이 양극이라고 하니까, 그것을 깊이 분석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고 주는 민족해방, 민족통일이라는 것입니다.

남 : 나는 민족해방은 이미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 : 그러니까 오해가 풀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해한 것은 당신들이 미국과 일본을 등에 업고 나라 팔아먹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고...그 다음에 남반부 해방과 승공통일..., 이는 다릅니다. 해방이란 미국, 일본에서 해방을 의미합니다.

남 : '승공통일' 이런 문제는 상호성입니다. 5차당대회때 수상께서도 남반부 혁명...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승공통일'이란 말은 '슬로간'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그리 신경쓸 것 없읍니다.

북 : '슬로간'의 의미에 차이가 있읍니다.

남 : 인민혁명 다 같은 뜻입니다.

북 : 그것은 내부문제이고 다릅니다.

남 : 승공통일이든, 공산통일이든 그것은 주권자들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북(김중린) : 좋습니다. 우리는 남조선 공산화해서 통일한다는 구호 내놓지 않고 있읍니다. (김영주) 논쟁 많이 해야 해결됩니다. 앞으로 합작하자면 민족통일이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남 : 자본부의, 제국주의로 규정짓고, 욕하는 것이나, 공산주의 욕하는 것이나 이런 것 갖고 신경쓰지 말자는 것입니다.

북 : 우리 이 문제로 옥신각신하지 맙시다. 우리 이념을 초월합시다.


이후에도 양측은 6.25전쟁 발발에 대해 '맨 처음 우리(북)를 집적거린 것은 이승만이다. 그후에 유엔군이 위성군을 데리고 들어왔다', '미군이 철수하자 북쪽에서 쳐내려 왔다'는 등의 입씨름을 하다가 다시 정치협상 문제로 복귀했다.

이번엔 김중린 비서가 나서서 "우리 정치협상 하자는 공동성명 하나 발표할 수 있지 않나?"라며 "모처럼 고위급 회담이 마련되었는데 그 급을 낮출 필요 있겠는가? 수뇌급 회담으로 가야지"라고 분위기를 몰아갔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휴식에 들어가기로 한다.

이번에 공개된 회담 대화록 중 이후락과 김영주의 회담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통일부는 이후 이후락 중정부장이 김일성 수상과 면담한 과정(남북제7권103~125쪽)은 모두 '공란'으로 남기고 공개했다. 

이후락 부장은 평양 방문 기간 중 김영주와 두차례 회담을 하고 김일성 수상과 2차례 면담했다.

이 부장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상호비방 중상 중지 △선전적 통일제안 중지 △무력도발 중지 남북직통전화 계속 유지 등 신뢰분위기 조성 문제를 주로 제기하고 김일성 수상은 △외세의존반대, 평화적 해결, 민족대단결 등 통일 3대원칙 △6.15와 같은 일은 다시 없을 것 △청와대 사건 관련 좌경맹동분자 철칙 △박성철 서울 파견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을 제시했다.

 

[박성철 제2부수상 서울 방문-'72.5.29~6.1]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 제2부수상의 서울회담(1972.5.29) [사진출처-남북대화사료집]

박성철 제2부수상은 1972년 5월 29일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해 이날 오후 4시부터 5시 25분까지 서울 영빈관 회의실에서 이후락 중정부장과 마주 앉아 1차 회담을 진행했다.

남측에서는 실무접촉을 계속해 온 정홍진이 한적 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 직책으로 계속 참석하고 김치열 중앙정보부 차장, 이철희 정보차장보, 김동근 보안차장보, 강인덕 제9국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북측에서는 이후락의 평양방문시 참석했던 김중린 당 비서가 빠지고 류장식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겸 대외사업부장과 북측 실무자인 김덕현이 같이 왔다.

이후락 부장이 모두 발언을 통해 "현재 진행중에 있는 남북적십자회담에서 인도적인 문제를 하루 빨리 처리해 나가는 일방, 우리가 인적, 물적, 통신적 이러한 사회적 교류를 통해서 서로의 이해를 위한 즉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이 공산주의 사회가 어떻다는 것을 이해하고 또 공산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의 바탕위에서 통일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제가 평양에서 주장했던 기본방향"이라고 자락을 펼쳤다.

또 "우리가 통일을 위한 정치회담을 열때는 기필코 그 회담을 성공시키는 안전판을 마련해 놓고 회의를 시작한다. 이러한 안전판을 가지지 못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속에서 회담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라며 단계적 접근론을 피력했다.

우선 자신과 김영주 부장이 신뢰를 두텁게하면서 이런 문제를 정리해 나가고 "하나 하나씩 문제를 제기해서 합의를 보고, 그것을 발표하고 하는 이러한 협의체를 확대해서 추진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 또 그러한 과정에 있어서는 서로 우리가 제3국으로부터 다같이 흉을 듣기 쉬운 상호비방을 한다든지 또는 되지도 않는 선전적인 통일방안을 일방적으로 한다든지, 무력행위를 한다든지 하는 이런 것을 하지 말자"고 한 제의 내용을 설명했다.

지난 평양회담에서 자신의 제의가 이렇다 할 결론은 얻지 못했지만 서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또 모두가 평화적 통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결과를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이후락은 "회의의 마지막 고비에 들어가서 특히 김일성수상께서도 여러가지 우리의 대화에 대해서 고무적인 격려가 있었다"며 김일성 수상과의 면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박성철은 "김영주 조직부장 동지께서 몸이 여의치 못하시기에 김일성 수상님의 위임을 받고 제가 오게 되었다"며 김영주 부장을 대신해 자신이 서울을 방문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전번 이후락 부장 선생의 평양방문은 부장 선생의 입장으로보나 우리들의 공동사업의 견지에서 보나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인사를 전하고는 준비한 원고를 낭독했다.

이후락의 평양방문 성과 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것은 "부장선생께서 두차례에 걸쳐 김일성 수상님의 접견을 받고 그이께서 내놓으신 조국통일의 세가지 원칙에 대해서 상호합의를 본 것이었다"고 하면서 "이러저러한 오해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세가지 원칙에 기초하여 외세의 간섭이 없이 민족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제도와 신념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할 수 있으며, 전쟁이 없이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강조했다.

박성철은 "바로 이것이 앞으로의 통일의 성공을 위해서,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하다"며 "이렇게 되니 사실상 우리는 서로 손잡고 통일문제를 풀어나가는데서 가장 튼튼한 토대를 쌓은 셈"이라고 거듭 높이 평가했다.

이어 "조국통일의 근본적 입장에 대해서 원칙적인 합의를 본 조건에서 앞으로 우리가 할일은 이미 합의된 원칙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라며, △긴장완화 △동족상잔 방지 △상호비방과 중상 중지 △민족적 화목과 단결 도모 △민족적 유대 회복과 인도적 조치 △정치, 경제, 문화의 다방면에서 교류와 합작을 실현하는 문제 등을 나열했다.

그러면서 현실적으로 문제를 풀자면 "상호 정치적 타협을 이룩하고 실무적인 합의를 달성하며 해당한 실무적 조치들을 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박성철은 평양회담을 전진시키기 위한 △상설적 협의기구 설립 △수뇌자(남북정상)회담 △공동성명 발표 등을 공식 제안했다.

상설 협의기구는 "지난번 평양회담에서 원칙적으로 합의에 도달한 조절위원회 혹은 민족통일공동위원회와 같은 것을 내오는 것이 필요하다"며, 김영주와 이후락을 양측 위원장으로 하고 각각 3~5명의 위원을 임명해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박성철, '상설협의체·수뇌회담·공동성명 발표' 제의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의 예방을 받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출처-중앙일보 1972.7.5]

제안은 구체적이었다.

위원회의 역할은 "긴장상태를 완화하는 일로부터 조국통일에 이르기까지의 정치, 군사문제 전반에 대하여 협의, 결정하고 그 집행을 조절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다만 모든 분야의 문제를 다 토의하도록 하면 오히려 복잡해 질 수 있고 또 취급하기에 부적절한 문제들이 일부 있을 수 있으니 '고위급 경제, 문화교류 협의위원회'를 만들어서 "예술인, 체육인, 과학자들의 교류문제, 기업가, 상인들의 내왕문제 등을 협의하고 해당한 행정적 조치들을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 '경제, 문화 교류협의회'는 해당 분야를 행정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다른 급으로 구성하며, 필요하다면 각 부문별 분과위원회를 둘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평양회담때부터 강조해 온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우리 앞에 제기된 복잡한 사업들이 원만히 풀려 나가자면 수뇌자회담을 마련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다시 제안했다.

"이미 김일성 수상님께서 박 대통령과 친우로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만큼 박 대통령께서만 응낙하신다면 두분의 상봉은 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본다"고 하면서 "우리는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부장선생이 이 문제를 푸는데 적극 노력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박성철은 이어 "부장선생의 평양방문과 우리의 서울방문 결과를 발표하자"고 제의했다.

"남북 고위급 대표들의 상호방문이 있었고 이러저러한 중요문제들에서 이해의 일치를 보았다는 것을 온 겨레와 세상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내놓을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공동의 위업에 대한 서로의 책임감을 높이고 이미 합의된 내용을 확실히 굳여 나가는데는 물론 우리나라의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온 겨레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그들의 지지를 획득하는데서 큰 의의를 가지는 것"이자 "남북간에 쐐기를 박으려는 일부 열강들을 제압하는데서도 큰 작용을 하게 되리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후락은 박성철의 3가지 제안에 대해서는 숙고 후 다음 회의에서 의견을 제시하겠다고 하면서, 회답과 관계없는 사견이라며 "오늘까지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있던 정부가 갑자기 국민들에게 뒤집어 제시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혼란을 가져오기 쉬운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어려운 과제들도 많이 있는 것"이라며 회담내용 공표에 대한 부담을 털어놓았다.

박성철도 "마찬가지로 우리도 남조선혁명을 한다는 구호를 버린다는 것은 우리 인민들에게 혼란을 주고 불신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호응했다.

그러면서 "우리 이론이 옳다. 우리 제도도 옳다. 서로 이렇게 똑같은 소리만 계속하면 이것은 상치(相馳)될 뿐이며,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침체된 상태에 그냥 머무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초월하자. 초월해서 민족적 대단결의 입장에서 문제의 출발을 찾고, 또 이에서 출발해야 문제가 풀리지, 만약에 그렇지 않고 본래 견해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면 밤낮 그대로 있지요"라며 이후락이 김 수상과 합의한 통일3원칙을 풀어 말했다.

또 "정치협상을 먼저 하다가 이게 합쳐지지 않을 때에는 또 다시 서로 등지고 싸움이 붙을 수 있다"는 이후락의 우려에 대해 북쪽 내부적으로도 고민했다고 하면서 긴장상태를 푸는 문제와 남북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문제를 비롯한 기타 문제도 많은데 자신들도 생각타 못해 "이 두가지를 다하자"는 결론을 내렸다며 진일보한 의견을 내놓았다.

"한 문제씩, 한 문제씩 합의 못보는 것은 놔두고, 또 합의보는 문제는 또 합의해 보고, 이렇게 하고, 그 다음에 부장선생이 말한 인적, 물적, 통신교류하는 것도 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이후락의 의견을 수용한 절충안인 셈인데, "(그렇게) 접촉해서 이해시킬 것은 접촉해서 이해를 시키고, 또 우리끼리 접촉해서 이런 문제가 되는가 안되는가 의사도 소통해 보고, 이래서 한번, 두번, 세번 계속해 봐야 그 무엇은 못하겠으니 못하겠으면 놔두고, 긴급한건 앞에 하고 또 이렇게 해보아야 되겠다, 우선 그런 생각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서로 래왕해도 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 같지 않다. 다 좋다는 사람도 있고, 좋지 않다는 사람도 있다"며, "문제는 민족의 대단결을 앞세우고 이론과 제도의 차이도 초월해서 민족의 대단결의 입장에 서야 각각 합의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락의 앞선 우려에 대해서는 "회담을 해 볼 필요가 있고, 그래서 방금 합의를 못보더라도 그것은 그대로 두고 합의된 거라도 하나씩 풀어가고, 안되면 한 절반 또 놔두고 이런 식으로 해서 이해가 깊어지면 이것은 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진지하게 풀어보자"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야단난다고만 생각하고 밤낮 그저 있겠는가"라는 행간의 질타도 읽힌다.

박성철은 김일성이 이후락에게 "하여튼 당신처럼 용감한 분이 있으니까 문을 열어 놓았다. 당신은 영웅이다"라고 했다는 말을 상기시키고는 "누구든지 그 전에 그런 인물이 없으니까. 가면 죽겠는지, 붙들어 매겠는지, 겁이 펄펄 나니까 못왔지요, 우리도 배웠다. 이후락 선생이 와서 우리를 믿고 왔으니까, 우리도 믿어야지, 그래서 우리도 왔지요"라고 이후락을 추켜세웠다.

이후락은 "사실 이것으로 공식적 회담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다"며 "제가 평양에서 말씀드린 내용이나 오늘 박선생님이 가지고 오신 내용, 상당히 근접되어 가고 있는 부분이 많다고 느껴진다"고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평양에서 만난 김일성 수상이 박성철의 서울방문을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한 일과 회담내용을 공표하자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또 '남조선 해방한다고 인민교양을 해 놓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등 북측 의중을 떠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박성철은 "올때까지는 비밀이고 또 그 합의해서 공표를 하면 하는 거고, 하여튼 우리가 대담하게 생각을 해야지, 이것 무섭고, 저것 무섭고 하면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한마디로 정리했다. 또 "우리가 솔직해 말해서 그 전에는 자기만이 옳다고 자꾸 했다. 남조선 해방하자. 여기서는 또 승공통일하자. 똑같은 소리를 했는데 그 내용은 둘다 다 똑같은 거다. 양측이 똑같은 주장이지만 어느 측이 더 좋고 더 나쁘고 할 것도 없다고 본다"고 융통성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평양에서 이후락을 만난 김일성이 '두가지(이념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대단결의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문제를 풀 수 없다, 누가 옳고 누가 나쁘다 하는 식으로 자꾸 시비나 논쟁을 한다면 몇십년이 걸릴지 모르겠다'고 한 말을 거론하고는 거듭 '민족대단결' 원칙을 강조했다.

이미 그의 서울 방문을 며칠 앞둔 '72.5.26 김일성 수상이 뉴욕타임스 기자들과 회견에서 "우리는 남조선을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로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 민족 대단결을 위해 제도상 차이와 이념과 신앙의 차이를 초월해야 한다는 원칙을 표명하고 남북 사이 서신거래와 인사 내왕, 무역과 경제협조에 대해서도 통일을 위해 좋은 일이라는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후락은 "우리의 통일은 외세에 의해서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우리가 통일해야 되겠다 하는 원칙이다. 그리고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해야 되겠다 하는 것이다. 셋째는 서로 단결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단결해야 되겠다 하는 것을 알면서도 단결할 분위기가 안된데 문제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고 통일 3원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이어 "지난번 내가 평양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한 과정에서 많은 소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인적, 물적 교류를 하자'는 박성철의 제의에 대해서는 평양에서 김영주가 '긴장상태 완화'와 순서가 바뀌었다며 반대하더니 어찌된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박성철은 이에 대해 "안한다는게 아니라 정치회담 먼저 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이후락이 돌아간 후 많은 내부논의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내친김에 이후락이 북측은 한국의 자본주의를 일본놈들이 착취하던 사회체제로 오해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자 박성철은 "새마을운동도 좋은 것이다. 인민들을 잘 살게 하자는 것..."이라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남북조절위원회 합의, 수뇌회담 등 결론 미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명의의 신변안전보장각서 [사진출처-남북대화사료집]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명의의 신변안전보장각서 [사진출처-남북대화사료집]

첫날 1시간 30분 가까운 시간동안 회담을 마친 남북 양측은 이튿날(5.3) 같은 장소에서 오후 5시에 만나 2차 회담을 시작했다.

이후락은 "귀측의 의견들이 지난번 평양회담에 비해 상당히 우리측 의견에 접근하고 있음을 환영하는 바"라며, '조국통일과 남북관계의 제문제 해결에 대한 기본방침'을 여러차례 이야기 했으니 북측 의견에 대한 대답을 하겠다며 △조절위원회 △기타 위원회 △수뇌자 회담 △공표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먼저, 조절위원회에 대해서는 북측에서 제기한 의견을 수용해 이후락과 김영주가 위원장을 맡아 각각 3~5명의 위원으로 조절위원회를 구성하자는데 찬동하며, 역할에 대해서는 제한없이 '남북문제 개선을 위한 제사업'으로 규정하되 '결코 공식적 결정의 역할까지 할 수 없다'고 북측의 양해를 구했다.

남북 정상, 수뇌자 회담에 대해서는 "통일과업을 추진함에 있어 어느 때에나 필요하다면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원칙적 의견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시기, 여건 등은 이미 평양에서 본인이 충분히 설명드린 바 있으며, 그 내용에 변함이 없다"고 부정적 판단을 재확인했다.

회담내용 공표에 대해서도 언제까지나 비밀로 할 수는 없고 언젠가는 밝혀야 할 책임도 있으나 그 시기는 다시 고려하여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성철이 '조절위원회 합의 사항에 대해 공식적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문구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이후락이 "국회에서 중앙정보부장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하고 말할 수도 있고 또 정부조직법 관계도 있으니 이렇게 표현해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라고 답하자 북측은 즉각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박성철은 수뇌회담에 대해 "서로 만나도록 노력할 것을 부탁한다. 당장 만나는 날짜를 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형편이 못되면 안되는 것이고..."라고 하면서도 이미 충분한 의견교환이 있어서인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회담 내용 공표와 관련해서는 이후락이 평양에 다녀 온지도 1개월 여가 지났으니 이제 발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북측 의견이 나왔고, 이에 이후락은 '발표하는 원칙에는 물론 찬동'이지만 "지금 5월은 아직도 '승공의 달'이다. 이 시기에 발표한다면 솔직히 말해서 이 정권이 존속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며 신중을 기했다.

"지금 북쪽에서 아무리 평화적 통일을 하자고 해도 우리 국민은 이를 믿지 않는다. 만일 박 대통령께서 북이 평화적 통일하자 하여 그렇게 하자고 한다면 국민들은 박 대통령께서 돌았다고 할 것"이라고 하면서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이 없다는 것을 국민 스스로 체취로 느끼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라는 근거로 북측을 설득했다.

그러나 박성철은 "서로 긴장해서 싸움해서는 안되겠다 이런 큰 마음을 먹고 만났다. 그러나 전선의 군대나 전체 인민은 전쟁이 언제 날지 모른다 믿고 있다.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비밀로 하면 아무 일도 못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회담내용 공표할 것을 재촉했다.  

이후락은 "발표가 설사 좋다 하더라도 그 시기는 늦추고 빨리 서두르면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으니까...김 수상께서는 (남측 내부 사정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고 하면서 더 이상 이 문제와 관련해 박성철에게 할 이야기가 없으니 이 문제는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잘라 말했다.

10분간 휴식을 취한 뒤 재개된 회담에서 북측은 이후락의 6월 평양 방문을 초청하면서 거듭 '보도하지 않고서는 불신을 풀 수 없다'고 강조했지만 이후락은 "발표야 한 두장의 문서로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먼저 남북의 지도자간의 신임이 문제이다. 거기서부터 국민에 대한 계몽이 시작된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입장"이라며 북측의 이해를 구했다.

결국 이날까지 이후락과 박성철은 두차례 회담에서 기본원칙에 대한 합의를 마치는데 그쳤으며, 다음 날 박성철은 박정희 대통령을 한차례 만나 의견교환을 했다.

박정희-박성철 면담 기록(160~181쪽) 역시 이번 남북회담사료 공개에서는 누락됐다.
 

11차례 비밀실무접촉과 실무자 상호방문

이후락의 평양방문과 박성철의 서울방문은 실무자인 남측 정홍진과 북측 김덕현이 11차례에 걸친 비밀접촉을 하고 평양과 서울을 상호방문해 김영주와 이후락을 만나 사전 조율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정홍진과 김덕현의 앞선 비밀접촉에서 양측은 실무자급 교환방문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정홍진은 1972년 3월 28일부터 31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2차례에 걸쳐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과 면담을 갖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부장사이의 회담문제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정홍진은 김영주 부장에게 보내는 이후락 부장의 신임장과 서신(김영주 부장 귀하)을 휴대하고 '72년 3월 28일 오전 9시 15분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통해 평양으로 향했다. 판문점에서 김영주 부장이 이후락 부장앞으로 보낸 신변안전보장각서를 접수한 것은 물론이다.

김영주와의 면담에서 정홍진은 △이후락-김영주 면담 조속 실현 △선진적 통일제안·상호비방 지양 △물적 인적 교류 선행으로 남북 격폐해소를 주장했고 김영주는 △이후락과의 회담목적은김일성-박정희 수뇌자 회담 마련에 있고 △상호불신과 오해 제거 문제, 정견차이 문제, 자위 문제, 경제협력 문제 등을 논의 사항으로 제시했다.

김덕현은 그해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서울을 방문해 2차례에 걸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면담을 통해 이후락 부장의 평양방문과 김영주화의 회담을 확정했다.

김덕현은 1972년 1월 7일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명의의 신임장을 휴대하고 그해 4월 19일 오전 9시 30분 판문점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을 거쳐 서울을 방문했다. 이후락 부장이 김영주 부장에게 보낸 신변안전보장각서를 접수한 그는 김영주 부장의 초청 서신(리후락부장 선생 귀하)을 전달했다.

이후 '72.4.27일 남북직통전화 가설을 위한 실무회의가 열리고 다음날 남북직통전화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자유의집'과 '판문각' 사이 2회선 가설되어 4월 29일 서울-평양간 직통전화가 시험통화되었다.

7.4남북공동성명 발표와 이를 위한 첫 시도인 이후락의 평양방문이 가능하게 된 사전 절차는 이렇게 진행됐다.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 발표부터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72.10~11) △남북조절위원회 회의('72.11~'73.6)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의('73.12~'75.3)까지 '남북회담문서 ③' 기사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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