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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타는 장민호씨 가족들 마음 알아주기를

애타는 장민호씨 가족들 마음 알아주기를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3/10/27 [03:33] 최종편집: ⓒ 자주민보
 
 
 
▲ 보안법으로 7년 옥고를 석방되자마자 외국인 보호소에 다시 구속수감된 장민호 씨, <구속노동자회 소식지 펌> ©자주민보


구속노동자후원회 이광열 집행위원장은 최근 본지와의 통화에서 장민호 양심수를 외국인보호소가 아닌 집에서 가족과 보내며 정부의 해외로 추방 결정에 대한 이의신청 결과를 기다릴 수 있게 해달라는 청주 외국인보호소 보호일시해제조치를 바라는 청구서를 보호소에 제출할 때, 청주보호소에서는 가급적 25일 토요일까지 결정을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그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어 장민호 씨는 계속 또 다른 감옥인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되어 있고 기다리는 가족들은 더욱 애가 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관련기사: http://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4128&section=sc4&section2=)


“아마 정부에서도 고심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청주 외국인보호소는 환경이 열악해서 한 방에서 열 명도 넘는 사람이 기거하고 있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난방 등도 부족하며 생필품 구입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입니다. 장민호 씨도 보호소 생활을 감옥 못지않게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특히 난치병으로 병원을 왔다갔다 하며 치료를 받고 있는 장민호 씨 어머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부디 하루빨리 가족들과 만날 수 있게 정부에서 인도주의적인 결정을 신속히 내려주기를 바랍니다.”

사실 장민호 씨 가족들은 하루를 천년처럼 느끼며 장민호 씨가 석방되기만을 간절하게 기다려왔다. 그 마음이 구속노동자후원회 소식지 ‘구속노동자’ 2012년 6월호(68호)에 잘 실려 있어 아래에 소개한다.


소개한 내용 중에 국정원의 협박으로 장민호 씨 아내가 급히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귀국했고 바로 이혼장을 감옥에 있는 장민호 씨에 보내게 되었다는 가족들의 입장은 사실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면이 없지는 않다.

필자도 국정원 수사를 받아보았지만 국가기관답게 인권을 잘 보장해 주었었다. 아내의 방은 여성 수사관들이 와서 조사하고 변호사 접견과 가족 면회도 자유롭게 보장해주어 국정원 면담실에서 장인 장모님께 큰절까지 올리며 안심시켜 드릴 수 있었는데 왜 장민호 씨의 아내는 국정원을 갔다 온 후 넋이 나가 안절부절 못하고 바로 짐을 싸서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넘어갔으며 가자마자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첫 편지이자 마지막 편지가 된 이혼장을 보내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말 관타나모 수용소를 들먹이며 협박을 한 것이 맞는지 믿기지 않는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의 입장이 있다면 그것도 충실히 보도할 생각이다.


이런 논란의 여지가 없진 않지만 장민호 씨의 구속기간 심장병 수술을 했음에도 아들이 걱정할까봐 알리지 않고 감옥 안이지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는 어머니의 그 절절한 자식사랑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어, 정부에서 이런 가족들의 마음을 좀 헤아려 달라는 취지로 소개하게 되었다.

일일천추 석방을 기다려온 어머니가 7년만에 감옥에서 나온 아들에게 밥한끼 따듯하게 해먹이지 못하고 또 다른 감옥인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되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동네에서 착하기로 소문난 동생을 자랑스럽게 여겨온 누이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면 어찌 하늘이 무심타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건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고 있는 것 아닌가.


부디 정부에서 이런 가족들의 마음을 고려하여 인도주의적인 결정을 하루 빨리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가슴에 한 맺힌 걸 어떻게 다 푼대”
-국가보안법 ‘일심회 사건’으로 구속된 장민호 님 가족 인터뷰
<구속노동자후원회 소식지 ‘구속노동자 2012년 6월호(68호)에 실린 글>


전국교사대회와 쌍용차 범국민 대회가 있던 지난 5월 19일, 오전에 국가보안법(일심회 사건)으로 구속된 장민호(마이클 장) 동지의 어머님 성경완 님(80)과 누님 장화옥(57) 님이 살고 계신 일산 댁을 찾았다. 5월 18일 민주화 항쟁 다음날이기도한 이 날,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명 아래 여전히 국가의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고통 받고 있는 동지의 가족을 만나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두 분께서는 친히 마중까지 나와 주시며, ‘먼 길 오느라 애썼다’며 두 손을 맞잡아 주셨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누이는 국가보안법을 비판하면서도, 동생의 신념에 반하거나, 다른 가족들에게 누가 될 것을 염려하시며,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 구속 수감 당시 장민호 씨에 대한 탄압을 규탄하는 가족들 ©자주민보, 민중의소리 제공

누나 : “저희 가족들도 동생 생사를 며칠 동안 몰랐어요. 애가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나, 행방불명이 됐나 걱정을 하다가 뉴스를 보고 알았어요. 그래서 너무 놀랐죠. 우리 민호가 뉴스에서 총책(총책임자 : 편집자 주)이라고 나오는데, 저희는 총책이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제 입장은 국가보안법이 폐지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이)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고, 동족인데, 그것을 가지고 대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하필 ‘내 동생이 왜 그 길에 앞장섰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국가보안법 같은 것도 없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잖아요. 미국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포섭됐다고 하는데……. 믿기지가 않아요. 그렇다고, 동생이랑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나 얘기를 해 본 것도 아니에요. 항상 곁에 누군가 있는 감시받는 상황 속에서 접견을 해서 지금껏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적이 없죠. 저희로서도 언론보도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죠. 믿고 싶지는 않지만…….”


어머니 : “아주 혼이 빠졌어. 뉴스에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고 딱 나오는데, 장 마이클이 국정원에서 말이야, 그래서 변호사들이 쳐들어가니, (누나 : 얼마나 겁박을 했겠어!) 변호사들을 못 들어가게 막았다고 하잖아. 뭐 꾸미느라고. 검찰에서 국정원한테 빨리 넘기라고 하니, 일주일만 더 여유를 달라고 해서, 일주일 더 연기돼서 얼마나 당했는지. 검찰에 와서 면회했는데 애가 이상해.”


누나 : “국정원에서 너 어서 고해라, 안 불면 미국의 부인이랑 관타나모 수용소라 했나? 감옥에 보낸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벌벌 떤 거죠. 미국에 간첩들만 보내는 곳이라며.”


어머니 : “그 당시에도 우리 아들이 나한테 직접 말할 기회도 없고, 가면 (손으로 면회하는 곳을 그리시며) 너 잘 있었니? 잘 있어라 밥 잘 먹고 있어라. 엄마도 조심하고 누나도 조심하고. 그 말 하면 시간이 있어야지! (흐느낌) 가서 일심회가 뭐냐? 이랬더니 ‘나도 몰라!’ 지도 모르는데 검찰이 붙인 것인지…….”


누나 : “그때 당시에 애가 넋이 나간 거야. 정신이 없던 거야. 그 착한 애가…….”


장민호 씨는 어릴 때부터 약자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고 한다. 누이는 장민호 씨가 미국에 유학을 간 것도 집안이 부유해서 간 게 아니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가슴에 한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씀을 이었다.


어머니 :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좀 특이했어요. 우리 남편이 일찍이 간경화로 고생하셔서, 일을 못하고 제가 대신 나가서 생활을 꾸렸어요. 민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저녁 늦게 들어왔어요. 목욕을 시키는데, 온 몸이 시뻘겋게 피멍이 들었는데 걔는 말을 안 해. 그래서 계속 왜 그러냐고 채근하니, 싸움을 했대. 왜 네가 매를 맞았니? 생전 싸움도 안 하는데……. 그래서 내가 학교에다 전화를 걸어서 엉엉 울었어요. 알고 보니, 지금으로 말하면 왕따인 어떤 애를 급우들이 괴롭히니, 우리 아들이 역정 내서 싸움을 한 거야.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라더라고. 민호가 통일운동을 한 계기도 의로운 마음 때문이었다고 생각해. 그때는 학생들이 다 데모했잖아요. 우리 아들은, 마이클은 성균관대학교였는데, 대학을 다니면서……. 얼마나 착한 아이인데.”


어머니는 장민호 씨가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고 하셨다. 신림동 산꼭대기 마을에서 용산까지 학교를 다녔는데, 먼 거리라 일찍 나와야 하는데, 남들보다 더 일찍 나와서 버스에서 무거운 짐을 이고 내리는 분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도와줬다고 하셨다.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이 책가방을 옆에 두고 그 짐들을 다 받는 모습을 떠올리면 왜 이리 애가 착하기만 하고 미련하냐고 말씀하시며, 그런 아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리다고 했다. 어머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Q 그렇게 반듯하고, 착한 장민호 씨가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 가족들, 당시 집안 상황은 말도 아니었을 것 같네요.


누나 : “그렇죠. 회사에서 쫓겨났지, 집도 하루아침에 날아가고, 부인은 미국으로 애 데리고 가 버리고……. 누구를 시켜서 접견하며 이혼 신고를 하더라고요. 더 황당한 것은 감옥으로 서신이 왔는데, 이혼장인 거예요.”


어머니 : “그 아이는 제 것이라는 게 없어. 그렇게 산 애가 왜 피붙이들이랑 생이별을 하고 감방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지. 난 너무 무서워. 세상에 그런 보도가 나고, 난리가 나서 동네에서 내가 걸어가면 사람들이 다 외면하는 거야. (사람들이) 신문이랑 방송에 난 것을 그대로 믿더라고. 한번은 며느리는 나가고, 애들은 학교에 있는데 동아일보 기자가 우리 집에 왔어요. 그 기자에게 불리지도 말고, 줄이지도 말고 ‘고대로’ 쓰라고 말했지. 그 기자는 며느리도 만날 요량이더라고.

우리 며느리가 이 사람이랑 만나고 있다고 전화가 왔는데, 밤10시가 돼도 안 들어와요. 그래서 제가 기자한테 전화를 걸어서 며느리랑 있느냐 했는데, 헤어진 지 오래됐다고 해. 그래서 제가 늙은이한테 거짓말 하지 말라고, ‘우리 며느리 해코지 하지 말고, 어디 가두거나 이러면 나 이 세상에 편지 쓰고 자결할 거야’ 이러니까, 그 기자가 ‘어머니 저 믿으세요. 손 끝 하

나 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일이 있겠죠.’ 이러는 거예요. 그날 12시 쯤 며느리가 들어오더라고요. ‘너 왜 이제 들어오니?’ 이러니 애가 말을 안 해요. 애가 제정신이 아니야. 뭘 집으려고

해도 손을 덜덜 떨고, 안절부절 못하는 거야. 그리고 열흘 후에 짐 같은 것도 어디다 부탁을 했는지 사람들이 짐을 다 꾸려서 다 가져가. 저녁 때 오더니, 애가 반죽음이야. 우리 손녀가 그때 여섯 살이었는데, 나를 막 껴안고 ‘엄마 무서워!’ 이러는 거야. 그러더니 ‘어머니 얘 옷 좀 입혀 주세요!’라고 하고, ‘저 어디 다녀올 테니, 형님 집에 좀 계세요’라고 말하고 큰 가방을 놓고 나가며, 집안 세간을 다 버리래. 나가기 전에 뭘 싼 것을 나에게 주면서 ‘이거 가지고 고모네 집에 가 계세요! 제가 다시 갈 테니까!’ 이러는 거야. 그때 내 생각에 이제 난 죽었구나. 국정원에 갔다 와서 그렇게 된 거예요. 가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애가 정신을 못 차려요. 집이 텅텅 비어서 너무나 무섭잖아요. 얘(누이)한테 전화를 건 거예요. 그리고 싼 게 뭔지 봤더니 돈이더라고요. 내가 걸을 수가 있어야지. 무서워서. 심장이 떨려서. 얘(누이)한테 전화를 하니, ‘엄마 택시 타고와!’ 버스를 타고, 내렸는데, 넘어졌어. 밤중이라 눈도 어둡고. 그래서 이튿날, 얘(누이)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비행기 타기 직전에, 그것도 얘(누이)네 신랑에게 얘기한 거야. 집을 청산한 거야. 아니, 열흘 안에 집을 파는 게 어딨어? 난 집 판지도 몰랐지. 열흘 후에 집을 내주래. 그 말 딱 하고 소식이 없는 거야.”



Q 장민호 씨는 부인에게는 어떤 남편, 아이들에게는 어떤 아버지였나요? (어머니께서 보청기를 끼고 오셨다.)


어머니 : “잘했지. 며느리는 영어 강사를 했는데, 주로 저녁에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까……. 아마 좋은 남편은 못 됐을 거요. 저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더라고요.”


누나 : “애들 안 예뻐하는 아빠가 어디에 있겠어? 부인이 직장이 있어서, 늦게 들어오니까. 애들 데리고 호수 공원에 가서 자전거 타고, 나보고도 호수공원 앞이니까 오라고 하고, 같이 저녁 먹고, 헤어지고 그랬는데, 그 아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다는 거야~! 이해가 안 가고 (허탈한 웃음) 예전에도 그렇지만, 집권당이 뭔가 크게 터뜨리는 희생양이 그 시기에 필요했던 것 같아.”



Q 장민호 씨처럼 부인이나, 자제 분들도 미국 국적인가요? 면회는 종종 오나요?


누나 : “조카들은 어리죠. 17~18살이에요. 면회는 안 오죠. 아이들도 상처가 큰 것 같은데, 이혼은 했지만, 그래도 고모니까 아이들에게 이메일도 보내고 그러면 답장이 오기는 와요. 한 다섯 통 보내면 한 통 오나? 아마 그곳에서도 굉장히 살기가 힘들 거예요.”


어머니 : “며느리는 미국 사고방식이었어. 국적도 미국이고, 깊은 말뜻도 모르고, 무슨 일 있으면 폴리스 부른다고 하고……. (한국식으로) 싹싹하지는 않았지만, 잘했지. 어서 다 만나야 하는데……. 한국에 있는 우리가 면회를 가기는 하는데, 자주는 못 가지. 그때 최기영, 이정훈 그 양반들은 형량도 3년 정도 나와서 나왔는데, 우리 아들은 아직도 있고 말이야, 왜 우리 아들이 주도했다는 건지…….”



Q 면회 때마다 마음이 힘드시겠네요.


누나 : “밖에서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죠. 인권 침해는 이루 말할 것도 없어요. 매년 8월 달에도 온 가족들이 대전을 가요. 작년에는 못 갔는데, 왜 그랬냐면 접견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왜 안 되냐?’ 물어 보니, 이유를 말할 수 없대요. 우리는 일단 대전 근처에 온천에 갔어요. 그런데 미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마이클 장이 가족들에게 접견을 요청했는데, 너희는 아느냐’고 하며, 그 안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예요. 제 동생이 미국 국적이라 대전 외국인 수용소(편집자주: 대전교도소 외국인 사동)에 있는데, 변호사를 통해 알아보니, 교도관이랑 싸운 거예요. 중국동포 그런 사람들을 교도관이 인권 탄압을 한 거예요.(옷 벗겨서) 남자 같은 경우에도 성기 같은 곳을 잡고 그랬대요. 동생이 그것을 못 참은 거죠. 제 동생이 교도관이랑 싸우고 교도소장 나와라 했는데, 걔네들은 항상 그렇잖아요. ‘지금까지의 관행이다’ 그래서 싸움이 붙은 거예요. 밉보인 거죠. 그래서 독방에 가뒀다는 거예요.”


어머니 : “저는 나이 팔십이 먹도록 옥안에 옥방이 있다는 것을 처음 들었어.”


누나 : “옥 안에 기대지도 못하게 똑바로 앉게 했어요. 조금이라도 자세가 틀어지지 않게 감시하고 말이죠. 특별 사면은 형량의 3분의 2를 하고 나면 자격이 주어진대요. 그래서 ‘올해 혹시 바라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게다가 요즘 통합진보당 사태랑 관련해 뉴스에 일심회 얘기가 다시 나오고……. 아, 사면이 되겠어요? 안 되지. 그나마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되면 될까 했는데, 요즘 돌아가는 거 보면……. 그래서 너무 속상해서,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냈어요. 국가보안법으로 들어가 있는 장 마이클 누나다, 사면이 그동안 많이 있었는데, 국가보안법은 사면이 없었던 것 같다. 7년을 받았고, 올해가 지나면 6년이 돼 간다. 형량의 3분의 2가 지났는데, 사면해 주면 감사하겠다. 어머니도 연로하시고, 꼭 제 동생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으로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도 사면되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그랬는데, 편지가 오더라고요. 말하기를, ‘귀하가 보내신 편지는 저희가 잘 받았다’ 걔네들은 늘 같은 말이고, 그렇게 대처하는 매뉴얼이 있나 봐요. 이 민원에 관해서는 잘 해놨다가, 사면에 참작을 하겠다. 그런 식으로 답변 오고 끝이 더라고요.”


어머니 : “내가 공부를 해서 유식하면 소설을 썼으면 좋겠어. 어휴. 가슴에 한 맺힌 것을 어떻게 다 푼대.”


어머니는 장민호 씨가 미국에 있을 때 가족들 곁으로 오려고 미군에 입대해서 4년 동안 복무하며, 그 안에서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미군의 병영 문화를 바꿨다고 했다. 또, 한국(의정부)으로 파견돼, 일산 집도 오가면서 매달 생활비를 300달러 이상씩 부쳤던 아들을 떠올리며 눈가에 엷은 촉촉함을 내보였다.



Q 마지막으로 어머니께서는 아드님께, 누님 분께서는 동생에게, 혹은 양심수·구속노동자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요?


어머니 : “난 우리 아들이 살아 있는 것만 해도 하나님께 감사해요. 살아서 우리 아들 보는 것만 해도 너무너무 고맙고……. 제발 딴 생각하지 말고, 만날 때까지 그저 무사하길 바래요. 저희 어린 가족들 불쌍한 것들이 무슨 죄야. 그것들을 생각해서라도 지가 빨리 나와야 할 거 아니야. 그게 부탁이야. 제발. 그저 무사히 나와서 얼른 어린 것들 만나고, 제 누나도 만나야지. 벌써 몇 년 동안이야. 내가 몇 년 동안 입원하고 퇴원하고 입원하고 퇴원하고 검사비가 얼마야?

2008년에는 심장 수술까지 했잖아. (가슴을 치면서) 우리 아들은 그것도 몰라. 그것을 알면 가슴 아파할까 봐……그저 딴 생각하지 말고, (흐느끼면서) 무사히 저희 가족 만나고, 엄마 품으로 돌아오길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그렇게 전해 줘요.”


누나 : “민호 힘내고! 출소할 때까지 운동도 잘 해서 몸 건강히! 양심수나 구속노동자 분들도 건강하셔야 되는데…….

(아휴) 구속노동자후원회 다음 카페도 가 보니 여러 분들이계시더라고요. MB 정권에 맞서서, 부당함에 투쟁을 하고 계신 거잖아요. 정권이 바뀌어서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편안히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정리-김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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