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아버지였다. 푸른 수의를 입고, 높다란 담벼락 너머에 갇혀 있는 아버지의 존재가 나의 청소년기를 규정했다. 하지만 그 길을 따른다는 건 쉽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수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아버지의 모교인 경북대 수학과에 입학한 1987년, 하지만 당시 대학은 청춘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는 연일 최루탄으로 뒤덮였고, 나도 공부에만 몰두할 수는 없었다. ‘수학이냐, 학생운동이냐’를 놓고 갈등하던 나는 결국 학생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1987년 6월의 거리를 가득 메운 민중들의 항쟁이었고, 민주화의 열풍 속에 이루어진 아버지의 석방이었다.
나는 민중항쟁의 역사에 직접 참여하면서 민중들의 힘을 믿을 수 있었다. 역사의 진보는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하던가. 1987년의 민중항쟁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2000년대로 이어졌다. 촛불항쟁은 다시 윤석열 탄핵을 위해 치켜든 응원봉 빛의 혁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현장에서 나는 제국주의 침탈에 맞선 증조할아버지의 시대, 분단과 독재에 맞선 아버지의 시대, 그리고 자주, 민주, 통일의 우리 시대를 넘어 새롭게 펼쳐질 다음 세대의 미래를 확인하는 중이다.
산산이 부서진 그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기억의 힘
그렇게 세대를 이어나가는 역사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기억의 힘이라고 믿는다. 먼저 간 이들의 치열했던 삶을 잊지 않고, 그들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기억의 힘. 아버지는 어린 시절 밀양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과 해방부터 6.25전쟁까지 밀양의 투쟁사를 생생히 기록한 책 '끝나지 않은 길'을 통해 기억의 힘을 보여주었다. 나는 '아버지 안재구'를 통해 그 작업을 이어갔을 뿐이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신념’은 그러한 작업의 결과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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