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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이 창창한 수학자는 왜 사형수가 됐을까?

안영민 시민기자yman1209@naver.com전 민족21 편집국장, 경북대 민주동문회 회장다른 기사 보기앞날이 창창한 수학자는 왜 사형수가 됐을까?

아들이 쓴 아버지 평전 <아버지 안재구> 출간

박정희 유신독재에 목숨 걸고 투쟁한 ‘남민전’

‘구국전위’ 사건으로 아버지와 아들 함께 구속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에게 배운 지조와 절개

아들이자 동지로서 써 내려간 아버지의 생애

시대와 역사 관통하며 대물림한 그들의 신념

나의 아버지는 수학자였다. 1970년에 37세의 나이로 박사학위를 받고 국립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전도유망한 학자였다. 아버지가 몸담은 경북대 수학과에서 펴낸 '경북매스매티컬저널'은 국내 최초의 수학 학술지로 세계 여러 대학의 수학과와 교류했다. 그 덕분에 아버지도 미분기하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나의 아버지는 사형수였다. 1976년에 박정희 유신독재 타도를 위해 결성된 지하조직 ‘남민전’의 중앙위원이었던 아버지는 1979년 10월에 조직이 적발되면서 체포돼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이들은 세계의 수학자들이었다. 200여 명의 수학자가 구명운동에 나섰고, 그 덕분에 아버지는 2심에서 무기로 감형됐다.

 

1979년 10월에 터진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된 안재구 교수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남민전 사건 재판 때의 안재구 교수 모습.

'사형수가 된 수학자, 아버지 안재구'

최근에 내가 쓴 책의 제목이다. 아들이 쓴 아버지의 평전은 보기 드물다. 사형수가 된 수학자도 마찬가지다. 이리저리 검색해 봤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이 책이 특이한 평전인 이유다.

나는 앞날이 창창한 수학자의 길을 가던 아버지가 왜 남민전이라는 지하조직에 가입해 변혁운동의 길에 들어섰는지 그 연유가 늘 궁금했다. 박정희 유신독재 치하에서 변혁운동을 한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실제로 1960~70년대 통혁당, 해방전략당, 인혁당 등 갖가지 조직의 이름이 붙은 사건들이 허다하게 터졌고, 많은 이들이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버지로 하여금 목숨까지 걸게 했을까. 어렵게 쌓아 올린 학문도, 가족도 다 포기하도록 만들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아버지 안재구' 책의 주제다.

 

경북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당시 안재구 교수의 단란한 가족 사진. 맨아래 가운데가 저자인 막내아들 안영민.

재소자와 면회자로 뒤바뀐 처지

아버지의 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세상은 나를 ‘간첩 자식’이라고 냉대했고, 나는 무기수로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내가 담장 밖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1988년 12월에 가석방된 아버지와 재회한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1990년 3월 거리 시위에 나선 내가 그만 붙잡혀 구속됐다. 나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출소한 대구교도소에 갇혔다. 그때 대구교도소로 면회를 왔던 아버지의 첫마디가 내 가슴속에 아직도 또렷이 새겨져 있다.

“전에는 네가 나를 면회하러 왔는데, 오늘은 정반대가 되었구나.”

당시 어머니는 “어째 감옥까지 대를 잇는단 말이고”라며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10년을 찾아다닌 교도소에 다시 아들을 보러 와야 하는 신세가 참담했으리라.

‘빨갱이 부자’라는 낙인

어머니의 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4년 6월에 ‘구국전위’ 사건으로 아버지와 내가 함께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공안당국은 우리 부자를 동시에 구속시킨 뒤,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의 인질로 삼아 간첩 사건을 조작하려고 했다. 아버지는 다시 무기형을 선고받았고, 나는 2년 4개월의 징역을 살아야만 했다. 그나마 남민전 사건 때는 석방까지 10년이 걸렸지만, 구국전위 사건 때는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세상은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공안당국은 아버지와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2011년 7월에 아버지와 나는 다시 간첩 혐의로 압수수색을 받고, 수사와 재판에 시달려야 했다. 불구속 상태라지만 괴롭힘은 무려 7년이나 계속됐다. 2009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 이 꼴을 보여드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1979년과 1994년, 그리고 2011년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의 세월 동안 저들은 아버지와 나를 참 모질게도 대했다. ‘빨갱이’ ‘간첩’이란 낙인이 대를 이어가며 자행됐고, ‘대를 이은 빨갱이 부자’라는 언급이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생전의 안재구 교수(1933-2020)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만난 아버지와 아들

2020년 7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평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슴 속에 맺힌 상처로 남아있던 대목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내가 남민전 사건은 이해한다. 너거 아버지도 청춘을 바친 경북대에서 쫓겨났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냐. 박정희 정권이 정말 미웠겠지. 그래서 유신독재 타도하겠다고 조직을 만들고 한 거 다 이해한다. 그런데 구국전위는 왜 또 했을까. 그것도 환갑의 나이에…. 책 쓰고, 강연 다니면서 존경받는 재야인사로 살면 될 텐데 뭣 때문에 또…

.”

어머니는 맺힌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어머니의 궁금증을 대신 풀고자 했다. 그것은 곧 나의 궁금증이기도 했다. 수학자이자 민족해방 전사, 통일운동가로 살아온 아버지와의 대화는 2011년의 압수수색 사건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뒤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는 말지와 민족21 기자 시절로 되돌아가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만난 우리들의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팔순을 훌쩍 넘긴 아버지의 건강 문제가 앞을 막아섰다. 결국 나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아버지는 무엇을 위해, 어떤 신념으로, 굴곡지고 험난했던 87년의 생을 기꺼이 감당했을까.

 

안재구 교수의 조부인 안병희 선생(1890-1953). 안병희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민족해방운동을 하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고, 해방 이후에는 밀양에서 건준 부위원장과 민전 부위원장을 맡아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을 벌여 나갔다.

한 번의 사형선고, 두 번의 무기징역을 이겨낸 힘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당신의 할아버지, 내게는 증조할아버지인 우정(于正) 안병희 선생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에는 자주적인 인민정부 수립을 위해 고향인 밀양에서 활동하다 갖은 고초를 겪은 분이다. 아버지는 열두 살이던 해방 날,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밀양의 화악산에서 내려와 청년들의 무등을 타고 밀양 읍내로 들어서던 증조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애국애족의 정신을 키웠다. 미군정의 폭압 속에서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목숨을 바친 밀양의 아재들과 선배들을 보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절절하게 깨달았다.

당시를 떠올리며 아버지는 내게 ‘지조’와 ‘절개’를 말했다. 아버지에게 증조할아버지는 평생을 지조와 절개를 지키신 분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지조와 절개가 있어야 나라를 되찾겠다는 불굴의 신념도 생기고,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도 나올 수 있다”라고 강조하셨다. 할아버지한테 배운 지조와 절개야말로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이겨낸 힘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무기징역을 감내할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아들은 왜 아버지가 걸어간 고난의 길을 뒤따랐을까?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아버지가 걸어간 고난의 길을 어떻게 아들도 뒤따를 수 있었나. 어려서부터 아버지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통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건 어떤 연유인가. 내가 '아버지 안재구'를 쓴 것은 위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때는 친일 매국노들이 다시 돌아와 활개를 치던 ‘가짜 해방’의 미군정 시기였다. 지조와 절개를 지킨다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어려운 때였다. 변절과 배신이 혼탁한 세상을 살아내는 지혜로 포장돼 정의와 도리를 난도질하던 때였다.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길을 묵묵히 따랐다. 평생 ‘진짜 해방’을 추구했고, 이 길에 모든 것을 바쳤다.

 

1991년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맡았던 안영민(오른쪽)은 말지와 민족21 기자로 활동하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운동에 나섰다.

내게는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아버지였다. 푸른 수의를 입고, 높다란 담벼락 너머에 갇혀 있는 아버지의 존재가 나의 청소년기를 규정했다. 하지만 그 길을 따른다는 건 쉽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수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아버지의 모교인 경북대 수학과에 입학한 1987년, 하지만 당시 대학은 청춘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는 연일 최루탄으로 뒤덮였고, 나도 공부에만 몰두할 수는 없었다. ‘수학이냐, 학생운동이냐’를 놓고 갈등하던 나는 결국 학생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1987년 6월의 거리를 가득 메운 민중들의 항쟁이었고, 민주화의 열풍 속에 이루어진 아버지의 석방이었다.

나는 민중항쟁의 역사에 직접 참여하면서 민중들의 힘을 믿을 수 있었다. 역사의 진보는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하던가. 1987년의 민중항쟁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2000년대로 이어졌다. 촛불항쟁은 다시 윤석열 탄핵을 위해 치켜든 응원봉 빛의 혁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현장에서 나는 제국주의 침탈에 맞선 증조할아버지의 시대, 분단과 독재에 맞선 아버지의 시대, 그리고 자주, 민주, 통일의 우리 시대를 넘어 새롭게 펼쳐질 다음 세대의 미래를 확인하는 중이다.

산산이 부서진 그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기억의 힘

그렇게 세대를 이어나가는 역사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기억의 힘이라고 믿는다. 먼저 간 이들의 치열했던 삶을 잊지 않고, 그들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기억의 힘. 아버지는 어린 시절 밀양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과 해방부터 6.25전쟁까지 밀양의 투쟁사를 생생히 기록한 책 '끝나지 않은 길'을 통해 기억의 힘을 보여주었다. 나는 '아버지 안재구'를 통해 그 작업을 이어갔을 뿐이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신념’은 그러한 작업의 결과물일 것이다.

 

'아버지 안재구' 책 표지. 내일을 여는 책

‘신념’이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시대와 역사를 관통하며, 현실의 삶과 끊임없이 갈등하며, 집단의 공동체성을 통해 비로소 한 사람의 가치관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신념이 그랬듯이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신념’ 또한 마찬가지다.

집단의 공동체성이 배제된 개인의 신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신념이 아니라 세상을 파괴하는 맹목이 될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왜곡되고 폭력이 된 신념을 ‘극우’라는 이름으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무수히 목격하고 있다. 그 너머에서 다시 만날 우리들의 세계는 다양한 신념의 존중과 공존 속에 활짝 꽃필 것이다.

* 이 글은 인터넷언론 <미디어 날>과 미디어 날이 발행하는 <계간 날>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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