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의 대선 개입 실상이 드러났는데도 이를 외면해온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한 천주교 전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과 박 대통령-새누리당-보수단체가 충돌하면서 한국의 천주교 성직자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독재에 항거하며 한국 천주교의 상징으로 자리잡아온 ‘정의구현사제단’과 달리 암울한 시절에도 침묵했던 주교단이 근래 들어선 국정원 대선개입 뿐 아니라 쌍용차, 밀양송전탑, 제주강정마을 등 권력과 첨예하게 맞서는 문제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이를 두고 이미 민주주의가 무너진 이명박 정부 때부터 나타났던 움직임에, 바티칸에 새로 자리를 잡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적이고도 개혁적인 행보와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사제는 거리로 나가야” 한국 교회에는?=지난 3월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전 교황과 달리 교회의 금기를 깨고 “사제는 거리로 나가야 한다”며 현장을 강조하는 목소리를 다수 내왔다. 교황은 지난 7월 25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가진 가톨릭 세계청년대회 축하연에서 “교회도 거리로 나가길 바란다”, “불평등에 무감각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은 빈부격차를 키울 뿐”, “돈과 권력을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행복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를 만족시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익보다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들의 타락한 이야기를 들으며 실망할 때도 있지만 믿음을 잃지 말라. 상황도 사람도 바뀔 수 있다”고도 교황은 강조했다. 심지어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교황은 “자비를 갖고 그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7월 29일 기내 인터뷰)고 말해 금기를 깨기도 했다.

이 같은 교황의 행보는 전 세계교회 해외 뿐 아니라 국내에도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의 경우 ‘바티칸라디오’는 지난 9월 26일자 기사에서 당시 서울광장에서 열린 시국미사에 대해 “사제들은 현 상황을 심각한 위기로 규정하면서 평신도들의 국정원 투쟁에 합류했다”고 전했다. 국내 사제단의 경우 지난 8월 보수적 성향을 나타내온 대구대교구를 비롯해 전국의 여러 교구에서 시국선언과 시국미사가 이어져왔다. 평신도보다 사제들이 적극적으로 나섰음을 뜻하는 움직임이었다.

이를 두고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장(평신도)은 26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교황 한 사람 바뀐다고 직접 우리 천주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천주교에서 한국사회의 각종 사회갈등 현안에 나서고 있는데 교황이) 지원과 지지가 되는 말씀을 해서 고무된 경향이 있다”며 “향후 (교황의 행보에 따른) 여파가 시간이 지날수록 오지 않을까 싶다”고 내다봤다.
 
   
지난 3월 즉위한 프란치스크 교황. 사진=한국천주교주교회의
 
경 소장은 “교황의 모습을 보면서 주교나 사제단이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지 않았겠느냐”고 분석했다.

나승구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대표신부도 이날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교황 한 사람 바뀌었다고 교회가 다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교황이 말씀하시니 힘을 얻고 격려받는 정도의 의미”라고 평가했다.

▷사제의 사회참여 “이명박·박근혜 정부탓”=한국 천주교의 사회참여를 두고 교황과의 관계 보다는 독재와 민주화를 경험하다 다시 민주주의 파괴에 직면한 한국 정치상황에 따른 요인이 더 크다는 것이 교계의 평가이다. 경동현 소장은 “과거와 달리 최근 들어 주로 사제가 주도로 하는 게 활발해진 것 같다”며 “이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면서 달라진 시국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상봉 ‘카톨릭뉴스지금여기’ 편집국장은 26일 “사회참여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던 사제들이 이명박 정부 때 용산참사와 4대강 문제가 터지면서 결집하기 시작해 각 교구마다 과거 사라졌던 정의평화위원회가 신설되고 사제와 평신도가 함께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됐다”며 “그런 가운데 올 3월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해 여러 발언을 하면서 활동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신부들이 이명박 정부 때 학습한 의식과 노하우가 박근혜 정부 때 발현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교황의 영향 2월 추기경 서임…주교 임명권은 교황=프란치스코 교황의 영향이 실질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교황은 전 세계의 주교에 대한 인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법 377조엔 교황이 주교들을 임의로 임명하거나 합법적으로 선출된 자들을 추인한다고 돼 있다. 추기경 역시 교황이 임명한다. 국내엔 현재 서울대교구장을 사퇴한 정진석 추기경이 있으나 80세가 넘어 교황 피선거권이 없기 때문에 오는 2월 한국에도 새 추기경이 임명(서임)된다.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장은 “교회와 주교, 사제로 연결돼 있는 성직자 집단에게는 (새로 선출된 새 교황의 말씀과 정신이) 더욱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사제의 인사권은 주교가, 주교의 인사권은 교황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한상봉 카톨릭뉴스지금여기 편집국장도 “추기경과 주교 임명권을 교황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인사권자인 교황의 발언과 입장을 무시할 수 없다”며 “이런 구조를 고리로 한국 천주교 성직자 집단이 어느 정도 변할 수는 있겠으나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22일 롯데마트 군산점 앞에서 열린 '불법·부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 촉구' 촛불집회. 사진=강성원 기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의 시국미사에 대해 ‘정치참여금지’ 강론을 발언으로 비판을 받은 염수정 서울대교구장(대주교)도 정작 강론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여러 군데서 인용하기도 했다. 실제 교황의 말씀을 근거로 강론을 펴지 않으면 신자들에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게 교계의 관행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 천주교 건드렸다간 거대한 역풍 맞을 것”=이와 관련해 박근혜 정부가 가장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천주교집단에 칼을 들이대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22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의 박근혜 대통령 사퇴 시국미사에서 박창신 신부의 발언을 두고 온 정치권이 호들갑을 떨면서 검찰까지 수사를 검토하겠다고 밝히자 “그러다 거대한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경동현 소장은 “박창신 신부의 해당 발언만을 문제삼는 식으로 대응할 경우 더 큰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상봉 편집국장도 “검찰의 박 신부 수사 언급은 이데올로기 공세에 불과하다”며 “박 신부도 마음대로 하라는 입장이며, 실제 강론 내용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평가했다. 나승구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대표신부는 “어떻게 나올지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