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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일제 망령…해법은 동학농민군 계승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16> 갑오년에 되짚는 동학농민전쟁

강응천 문사철 주간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10 오전 7:57:00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한국생활사박물관>,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 <민음 한국사> 등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다. 여기서 다른 수단이란 무력을 말한다. 그러니까 전쟁은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시정잡배들의 패싸움과는 달리 정치 세력 간의 무력 대결을 필수 요소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1894년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을 청일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그 전쟁에는 조선도 주체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청과 일본의 군대는 정부군이고 조선의 군대는 농민 집단이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동학농민군은 목적이 뚜렷한 정치 세력의 무력 조직이었다. 그전까지 민중이 이처럼 거대한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예는 아마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흔히 청일전쟁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은 바로 동학농민군을 핵심 주체로 하는 '1894년 동아시아 전쟁'으로 불려 마땅하다.

1894년 동아시아 전쟁의 배경에는 갑신정변 실패 뒤의 '잃어버린 10년'이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당은 죽거나 망명하고 김홍집, 박정양 등 온건 개화파는 사대당 정권과 협력하며 숨죽인 채 지내야 했다. 역사의 시계추를 거꾸로 돌리는 이 같은 상황은 호시탐탐 이권을 노리는 열강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우선 갑신정변을 진압한 여세를 몰아 조선에 대한 종주국 지위를 굳히려는 청의 압박이 거세졌다. 1887년에는 조선이 일본과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청의 속국인 조선은 외교도 청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갑신정변 때 체면을 구긴 일본도 조선을 개항시킨 자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청과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한 신경전은 각종 특권과 시장 개방의 요구로 이어졌다. 일본이 싼값으로 곡식을 사 가는 바람에 조선 백성이 먹을 곡식이 모자랄 지경에 이르자,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일본으로 곡식이 반출되는 것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리기도 했다.

러시아도 이권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동해안의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던 러시아에 조선은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었다. 그러자 동아시아와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와 신경전을 벌이던 영국이 선제공격을 가해 왔다. 여수 앞바다에 있는 거문도를 점령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한 것이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이 같은 영국과 러시아의 일촉즉발의 신경전은 청의 중재로 봉합되었다. 주권 국가인 조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 민 씨 정권의 관료들과 아전들의 가렴주구는 더욱 심해졌다. 서양과 일본에서 들어온 값싼 공산품이 조선의 산업을 억누르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전신주가 세워지고 전깃불이 들어오며 전차와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지만, 이러한 근대 문물이 일반 백성에게는 거의 아무런 희망도 주지 않았다.

청일전쟁이 아니라 1894년 동아시아 전쟁이다

그때 소리 소문 없이 백성들 사이로 스며들어 간 것이 동학(東學)이었다.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서학(西學)인 천주교에 맞선 '민족 종교'인 동시에, 성리학에 맞서 인간 평등을 고취하는 '민중 종교'였다. 호서(충청도)와 호남(전라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던 동학은 1892년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최제우는 사악한 가르침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1864년에 잡혀 죽었는데, 수천 명의 동학교도가 모여 교조의 신원(伸寃)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한 것이다. 이들의 요구는 이듬해 '척왜양(斥倭洋)'이라는 반외세 구호로 확대되었다. 바야흐로 개항 이후 쌓이고 쌓인 모순이 밑바닥 민심에서 폭발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894년이 왔다. 그해 1월 10일(음력) 전라도 고부에서 작은 민란(民亂)이 일어났다. 민란이라고 하니까 절차도 질서도 없는 농투성이들의 난장판일 것 같지만, 사실은 오늘날 노동자들의 파업만큼이나 공공연한 의사 표현의 수단이었다. 1892년 부임한 고부 군수 조병갑은 저수지인 만석보를 건설하는 노역에 농민들을 동원해 놓고 대가도 주지 않는가 하면, 저수지가 생겼다고 고을 백성에게서 무거운 물세를 거둬들였다. 참다못한 고부 양반들이 향회(鄕會)를 열어 시정을 촉구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회(都會)라는 백성들의 집회를 통해 다시 요구 사항을 밝혔다. 그래도 안 되자 여러 명이 한꺼번에 상소하는 등소(等訴)를 하지만, 조병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지도자인 전봉준을 잡아 가뒀다.

이런 단계를 거쳐 마침내 전봉준이 고을 백성과 함께 관아로 쳐들어가 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아를 점령한 것이 고부 민란이었다. 그러자 조정은 장흥 부사로 있던 이용태를 안핵사(按覈使)로 보내 사태를 수습하게 했다. 그런데 이용태는 탐관오리들의 비리를 규명하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는커녕 그 책임을 민란 지도자들에게 뒤집어씌웠다. 꼼짝없이 죽게 된 전봉준은 일단 몸을 피했고, 민란 정도로는 썩어 빠진 조선 사회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월이 되자 전봉준은 주변 지역에 사발통문을 돌려 세를 규합했다. 전라도 각 지역에서 동학 접주들이 호응해 농민군과 함께 모여들자, 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무장(지금의 전북 고창)에서 봉기를 선포했다. 이들 농민군이 백산(지금의 전북 부안)으로 근거지를 옮겼을 때는 그 인원이 8000명을 넘었다. 여기서 전봉준은 농민군의 4대 강령을 발표했다.

첫째,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하라.
셋째,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혀라.
넷째,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모두 멸하라.


셋째와 넷째 조항을 보면 농민군이 봉기한 목적이 정확히 드러난다. 농민군은 이미 전라도에 국한해 폐정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꾸려고 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공격 대상에는 '권귀'라고 표현한 양반 집권층뿐 아니라 개항 이후 이 나라에 들어와 이권을 챙기고 백성을 궁핍으로 몰아가던 일본인까지 명시돼 있었다.

이처럼 명확한 목적을 가진 동학 농민군은 4월 들어 전라도 관군을 황토현에서 격파하고 그 위세를 만천하에 떨쳤다. 깜짝 놀란 조정은 대포와 기관총을 갖춘 중앙군을 내려보냈지만, 이들조차 황룡촌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관군의 총포를 막아내기 위해 '장태'(대나무를 원통형으로 엮고 속에 짚을 넣어 만든 것)를 굴리며 전진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4월 27일,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성이 동학 농민군의 손에 들어갔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민 씨 정권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다. 제 나라 백성을 죽이라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다. 청은 옳다구나 하고 군대를 보냈고, 일본도 청과 맺은 톈진 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했다. 톈진 조약은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청과 일본이 맺은 조약으로, 어느 한쪽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 다른 한쪽도 자국민 보호를 위해 파병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외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농민군은 이들이 간섭할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관군과 전주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비워 주었다. 그리고 전라 감사 김학진과 협력하면서 각지에 '집강소'라는 자치 기구와 '도소'라는 지도 본부를 두고 폐정 개혁을 추진했다. 이로써 내전이었던 동학농민전쟁은 국제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렇게 절반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 황룡 전투 부조. 황룡전적지(전남 장성) 소재. ⓒ강응천


백성 죽이라고 청군 끌어들인 왕실, 일본군 몰아내려 일어선 농민군

하지만 전주 화약은 동학농민군의 오판이었다. 전주 화약이 이루어지자 청군은 일본 진영에 함께 철군하자는 신호를 보냈으나 일본군은 철수를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이번이야말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확실히 제거하고 자국의 이익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였다. 일본군은 6월 21일 명성황후의 맞수이던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가 민 씨 정권을 무너뜨렸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영토를 탐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약속을 구실로 우선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며느리를 낙마시키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경복궁을 장악한 지 이틀 만에 일본군은 서해안의 풍도에서 청군에 선제공격을 가해 청일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그 이틀 후 경복궁에서는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내세우고 김홍집, 박정양 등으로 온건개화파 내각을 꾸려 갑오개혁을 시작했다. 조선의 독자적 개국 기원을 사용해 청에 대한 사대 관계를 청산하게 하고, 의정부와 8아문의 기능을 확대해 국왕의 인사권, 군사권 등을 빼앗거나 축소시켰다. 문벌과 반상(班常)의 차별을 폐지하고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며 과부의 재혼도 허가했다. 10년 전 갑신정변에서 실시하려던 개혁이 대부분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갑신정변이 어느 정도 자주적 성격을 지녔던 반면 갑오개혁은 철저한 일본의 감시와 보호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진입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재현한 우키요에. ⓒ문사철 제공


뒤통수를 세게 맞은 동학농민군은 일단 자신들의 세력권에서 집강소를 중심으로 폐정 개혁을 추진하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농민군이 지켜본 것 중 하나는 흥선대원군의 행보였다. 훗날 체포된 전봉준은 자신들과 흥선대원군 세력의 조직적 연계 가능성을 완강히 부인했고, 실제로도 두 세력의 정치적 목적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정부군과 협상을 할 때마다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을 복귀시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흥선대원군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동학농민군을 이용하려 했다. 당시 정국에서 상징적인 의미에서나마 민중의 신뢰를 얻고 있던 정치인은 '늙고 이빨 빠진 호랑이' 흥선대원군 한 명뿐이었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청일전쟁의 추이에 따라 동학농민군을 움직여 일본 세력을 제압하고 일거에 정권을 잡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강인한 권력 의지와 당시의 좁은 입지를 감안하면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8월에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청군은 일본군에 참패하고 승기를 내주고 말았다. 3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평양전투가 일본군에 안겨준 좌절이 이번엔 청군에 밀려든 것이다.

국내에서 일본이 세력을 굳혀 가는 것과 동학농민군이 다시금 들썩이는 것은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일어났다. 일본이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순수 친일 내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시작하던 10월, 동학농민군도 남원, 삼례 등에서 재봉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적은 단순명료했다. 일본군이었다. 서세동점의 대리인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낡은 세력인 청,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력인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이중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은 1894년 동아시아 전쟁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학농민군은 전국적으로 20만 명에 달했지만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동학농민군의 주력인 전봉준의 군대는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나흘간의 혈전을 벌인 끝에 궤멸되었다. 청군은 랴오둥반도까지 밀려난 끝에 뤼순과 다롄을 점령당하고 벼랑 끝으로 몰렸다. 그해 12월 2일 체포된 전봉준은 이듬해 4월 24일 갑오개혁의 근대적 법 개정에 따른 최초의 사형수가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보다 조금 앞선 3월 23일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청일전쟁을 승리로 마감했다.
 

▲ 청일전쟁을 공식 종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을 재현한 우키요에. ⓒ문사철 제공


동학농민전쟁은 근대와 무관하다? 가소로운 얘기

동학농민군은 1894년 동아시아 전쟁에 참여한 세력 가운데 가장 전력이 약했지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그때까지 동학농민군에 비견될 만한 민중 세력이 이토록 강력하게 역사의 전면에 대두한 적이 없다. 그들은 민족 해방, 민중 해방을 부르짖으며 20세기 세계사를 장식하게 될 수많은 민중의 군대를 예고하고 선도한 세력이었다.

1894년 동아시아 전쟁에 참여한 일본 침략군, 청군, 조선 정부군은 모두 역사의 냉혹한 심판을 받고 사라져 갔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 정신이 살아 있는 것은 아직 역사에서 현실화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동학농민군의 강령을 볼 때 그들의 전쟁은 근대를 여는 혁명이 아니라 왕정을 옹호하는 근왕적 농민 봉기였다고 평가절하한다. 가소로운 얘기다. 당시의 근대화, 이른바 개화가 무엇인가? 갑오개혁 때 이뤄진 '외세 의존적 근대화'가 아닌가? 개화파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긴 동학농민군이 그런 근대화를 뭐가 좋다고 따랐겠는가? 그들이 내세운 '제세안민'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내던져 버린 조선의 이상이었다. 자기모멸로 치닫던 왕과 사대부들이 그 목소리를 외면하고 동학농민군을 짓밟았을 때 그 이상은 조선을 넘어서고 근대마저 넘어서는 미래의 이상으로 전변했다.

2014년 갑오년을 맞아 동아시아의 정세가 1894년 갑오년의 정세를 연상시킨다는 분석이 많다. 이 소란스러운 정세에 끼어들어 춤추는 것들 중에는 이미 심판 받은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까지 있다. 그들은 망령에 불과하지만 이 땅에는 살아 숨 쉬는 동학농민군의 후예들이 있다. 정의와 민주주의에 그 누구보다 민감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이야말로 1894년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2014년 동아시아의 위기를 평정할 유일한 세력이 아닐까?

*주: 조선은 1896년부터 지금과 같은 태양력을 공식으로 채택했다. 따라서 이 글에서 1894년과 1895년의 날짜를 표기할 때는 당시의 공식 역법인 태음력에 따랐다.

 
 
 

 

     

/강응천 문사철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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