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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여, ‘정치 중립성’이라는 기만을 깨라

[다시, 전교조다②]‘교육은 ‘성역’이 아니라 ‘공역’이다
박권일/칼럼니스트  |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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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7.07  08: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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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교조다. 전교조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판결이 내려지면서 전교조와 정부의 정면충돌이 빚어지는 상황이다. 지방선거에서 진보적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고 정권이 보수적 입장의 교육관료들을 전진배치하면서 갈등은 더욱 증폭될 전망이다. <미디어스>는 전교조를 둘러싼 논란을 다각도에서 짚어보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기획을 마련했다.

지난 3월, 민주노동당에 후원금을 냈다는 혐의로 기소된 정진후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등이 청구한 헌법소원심판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교육의 중립성 확보를 위해 정당가입을 금지한 것은 과잉금지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합헌 결정을 내렸다. 정당법 제22조는 공무원과 초/중등 교원은 정당의 발기인이나 당원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고, 국가공무원법 제65조는 공무원은 정당이나 정치단체 결성에 관여하거나 가입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다. 당시 전교조는 성명을 내고 “공무원과 교사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악법을 인정한 시대착오적 결정”이라면서 “공무원이 국가의 공무를 담당하는 직위에 있다는 이유로 개인의 사적인 삶은 희생돼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유지되는게 안타깝다”고 밝혔다.

헌법 제31조 4항에는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보장”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한국사회에서 교사를 포함한 공무원의 정치활동은 구체적 ‘의무’의 차원에서 금지되어 있다. 한국 공무원은 공직에서 뿐 아니라 사적 개인으로서도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므로 결국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헌법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영원히 고통 받는 존재가 되는 셈이다.

반면 독일에서는 헌법이 보장한 정치적 권리가 우선이다. 직무와 직결된 영역에서는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되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는 다른 시민과 똑같은 권리를 가진다. 연방공무원법 및 통일공무원법에는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하는 경우에 절제와 자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절제의무’(Mäßigungspflicht)가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구체적 의무나 내용적인 규제가 아니다. 단지 국민들이 보기에 품위 있고 객관적인 ‘태도’나 ‘포즈’를 보이라는 주문일 따름이다. 공무원이 내용상 정치활동이 제한되는 경우도 ‘헌법에 대한 충성의무’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 김정훈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이 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전교조 사무실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2차 교사선언 기자회견'에서 회견문을 읽고 있다. 이날 김 위원장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우리 제자들과 동료교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교육은 성역이어야 한다는 판타지

법 이론으로도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조항은 이미 여러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지나치게 협소한 이해, 공무원이 민주사회의 시민이기도 하다는 ‘이중적 지위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다.

우리 헌법상 규정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규정을 공무원의 정치적 침묵이나 정치적 무위를 강제하는 규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칫하면 중립성의 의미를 공무원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정치적 중립의 해석은 특히 기본권과의 조화로운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헌법학계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집권당의 영향으로부터의 독립과 정당에 대한 불간섭․불가담을 의미하는 소극적 중립”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주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헌법적 고찰, <한국자치행정학보> 제23권, 8쪽

전교조가 앞서 헌재 결정을 비판하긴 했지만 문제는 전교조와 진보진영 역시 일상의 차원에서 정치 중립성의 신화에 갇혀 모순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상당수 진보인사들, 심지어 일부 좌파조차 교사의 정당가입을 금지한 헌재를 비판하면서도 교육감이 정당의 일원으로 출마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이건 이상한 이야기다.

프레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교육이 정치적 영향을 회피해야한다는 식으로 사고하는 한, ‘정치적 중립성’이란 개념에서 탈출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교육의 공공성’은 어떤가. 교육의 공공성은 모두가 동의할만한 상위가치로 인정할만하지 않을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목표로서 교육의 공공성을 추구한다면,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에 매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진보적 가치와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독립성을 그 속에 포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민안전을 수익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싸워온 민주노총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공공성을 지켜내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격렬하게 싸워온 이들이 있는가?

공공성의 기반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다. 공공성은 도덕군자들이 깊은 수양과 공부 끝에 도출해낸 숭고하고 엄숙한 원리가 아니며, 탁월하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조화롭고 질서 잡힌 사회를 위해 만들어낸 규율도 아니다. 공공성이란 본래 시정잡배들이 저마다의 당파성을 존중받으며 공동체의 미래에 관해 제멋대로 지껄여대며 밀고 당기는 와중에 만들어지는 모자이크 같은 무엇이다. 요컨대 공공성의 요건은 중립성이 아니라 차라리 다양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야말로 공공성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많은 교사들은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하면서도 교육현장이 정치적으로 표백된 성역이어야한다고 믿는다. 많은 시민들 역시 자식들의 학교가 정치논리로 “오염”되지 않기를 바란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란 말로 치장된 이런 정치적 순결주의는 그저 판타지일 뿐이다. 그 무구한 판타지 속에서 학생들은 속수무책 교사에게 세뇌당할 수밖에 없는 백치로, 교사는 어떤 사회현안에도 침묵하며 그저 아이들의 교육에(=입시합격에) 매진하는 서비스 제공자로 존재한다. 이런 정치적 중립성은 결국 체제에 대한 복종과 순치만을 전염시킬 뿐이다. 

교육감 직선제의 아이러니

한국은 교육행정과 일반행정이 분리되어 있지만 여러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않다. 또 직선제가 아닌 임명제가 다수다. 영국에서 한국의 교육감에 해당하는 직책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임명하는 교육국장(director of children’s service)이다.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전통이 강한 나라여서 30개 아카데미(Academie)의 교육청장(Recteur)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다. 독일에서는 16개 연방주의 주지사가 각각의 교양문화부장관(Minister fur Kultur und Bildung)을 임명한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사정이 다르다. 선거를 하는 곳도 있고, 임명하는 곳도 있다. 교육선진국으로 잘 알려진 핀란드의 경우 교육정책의 개발과 입안, 재원의 확보 및 분배는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한편, 지자체장에게 임명된 교육국 국장과 교육문화서비스국 국장은 교육행정을 실제로 수행한다.

과거 교육감 직선제 도입 당시 정당-지자체와 교육계가 격렬히 대립한 사안이 바로 교육행정과 일반행정의 통합 혹은 분리 문제였다. 정당과 지차체는 다른 선진국처럼 교육행정과 일반행정을 통합하거나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교육계는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정치중립성을 들어 격렬하게 반대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진보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자 보수우파 일각에서는 교육감 직선제 폐지와 교육행정과 일반행정 통합을 강변하는 논리가 다시 불거져 나왔다. 선진국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정당화하지만, 사실 속내는 뻔했다. 진보교육감의 약진을 사전에 차단하고 싶은 것이다. 단순히 행정효율이란 관점에서 볼 때, 교육행정과 일반행정의 통합이나 연계강화는 확실히 선진적인 제도가 맞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교원들의 정치적 권리가 철저히 억압된 한국사회의 특수성 때문에 교육감 직선제는 그나마 현장에서 진보적 교육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최후의 방파제 혹은 마지막 숨구멍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된 셈이다.

   
▲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가운데)이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우면동 한국교총회관에서 안양옥 한국교총 회장(오른쪽), 유병열 서울교총 회장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진보교육감에 대한 ‘소비자 만족도’는 높으므로 교육감 직선제는 당분간 폐지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그런데 다시 강조하지만 정작 핵심적인 문제는 시민사회 일각, 그리고 교사들 스스로가 진보교육감을 정당화하는 관점과 태도에 놓여있다. 이들은 현실적 한계에 대한 명철한 인식을 통해 ‘진보교육감 이후’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당위로 인정해버린 다음에 이를 실현할 수단의 하나로 교육감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교육감이 늘 당선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보수단일후보가 출마할 경우, 그리고 혁신학교 등의 현장에서 트러블이 발생할 경우 ‘진보교육감 전성시대’는 언제든 ‘보수교육감 전성시대’로 역전될 수 있다.

스승 이전에 공민이어야

교육감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그에 비해 교육현장에서 실제 ‘선수’로 뛰고 있는 교사들의 조직인 전교조는 교육의 공공성을 지키는 일에 있어 교육감보다 훨씬 중요한 주체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자신을 노동자보다는 공무원, 혹은 특수한 직능인으로 여긴다면, 다시 말해 교육이라는 영역을 하나의 성역으로 특권화하는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다면 정치활동금지의무라는 위헌적 규정에도 적극적으로 맞서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노동자로서의 보편성보다 교사나 공무원이라는 지위의 특수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노동권 뿐 아니라 참교육으로 상징되는 교육의 공공성까지 실현하기 어려워지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전교조가 진보교육감 당선에 일희일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교육의 공공성을 관철하는 강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인식의 모순과 역설을 정면 돌파해야 한다.

한국에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정치활동금지 의무를 통해 실현되어왔다. 때문에 정치적 중립성이 어떤 아름다운 이상을 목표로 하든 상관없이 그것은 실제 교육현장에서 반정치적(anti-political) 태도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는 결정적 토대로 작동한다. 교육이 반정치화한다면, 결국 그 교육을 받은 세대도 반정치적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교육은 성역(聖域)이 아니라 공역(公共領域 public sphere)이다. 공교육 노동자는 훌륭한 스승 이전에 온전한 공민(citoyen)이어야 한다. 늘 그래왔듯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이 아니라 선생님의 삶을 보고 배운다. 그러므로 학생을 계몽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계몽되어야 한다. 다음의 글은 교육 노동자에게 공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중립성이란 타자규정성에 해방된 구체적 이익들이 공적인 의사형성과정에서 토론되고 그 결과들이 표결에 붙여질 때 담보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무원의 중립적 태도라는 것도 일방적으로 강요된 국가방침에의 복종을 통해서 담보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공민(公民)이기도 한 공무원이 관용과 토론의 자세를 통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스스로 담지 할 수 있을 때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정작 공무원 스스로는 정치적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에 대해 경험․실천하지도 못하면서, 그들을 민주공화국의 공무원으로 일하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겠는가.”

이계수, 공무원의 정치운동금지의무에 대한 비판적 고찰, <민주법학> 제29권(2005),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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