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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여관방에서 혁이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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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동환(혁이)님. 2009년 3월 당시 찍은 사진.
ⓒ 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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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이'(활동명, 본명 오동환)가 죽었다. 혁이를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는 한낱(?) 건설일용노동자였다. 죽기 전까지는 연로한 어머니를 따라 고물을 주우러 다니거나 거리 노점을 하며 살았다. 그는 스무살 초반에 일찍 결혼했지만 곧 이혼하고 두 아들과 함께 살았다. 아니 두 아들은 노모와 동생들이 건사해 줬다.

지난해 11월이었던가 보다. 오랜만에 전화가 와서는 "열심히 노점을 하며 살고 있다"라고 했다. 그런데, 가끔 하혈을 한다고 했다. '병원에 다시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물었더니, "아직은 견딜 만하다"라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 그는 "감 장사를 해보고 싶은데 감이 많이 나는 충북 영동에 아는 사람을 소개해주면 좋겠다"라고 했다. 나는 아는 이 한둘을 소개시켜 줬다. 나중에 들어보니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단다. 전북 남원에 '인드라망'이라는 사회연대 무료쉼터가 있으니 가서 요양을 좀 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우선은 벌이를 해야 만성혈전증 약이라도 사 먹는다"라고 답했다.

그는 1964년생, 쉰 하나. 어느 신문에서는 65세를 노인이라 불러야 하는지 아닌지를 묻는 설문을 조사했단다. 그는 아직 창창한 나이였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장례식장에 가서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왔던 '여름비'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이야기였다. 어제(7월 12일) 오후 7시께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그는 허름한 여관방을 빌려 생활하고 있었는데 여관비가 밀려 쫓겨날 형편이라고, 돈을 조금만 부쳐 달라는 전화였다. 전화도 없어 여관주인 휴대전화를 빌려 건 전화였다.

그가 "오후 9시 반까지는 하루 치라도 내야 한다"라고 해서 여름비는 우선 10만 원을 부쳐줬다고 했다. 경찰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그날 오후 10시 20분께. 그는 인사불성으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여름비는 "빨리 병원으로 옮겨 달라"라고 했고, 홀어머니께도 연락을 해뒀다. 하지만, 그날 오후 11시께 그가 운명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가 여름비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여름비가 지혜롭게 어머님 전화번호를 그날 따놓지 않았다면, 어떤 행려병자처럼 우리 곁을 떠나거나 간신히 연락을 받은 가족들만의 쓸쓸한 장례가 되고 말았을 터였다.

'하늘까치' '한서정' '일권' '요요천사' '주먹이운다' '호위무사' '홍반장' 등등 이름보다는 닉네임으로 통하는 촛불시민들이 와 있었다. '학현이'는 온다는데 소식이 없고, '초심'은 늦게야 온다고 했단다. 늘 거리에서 보는 사람들.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혁이의 아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결혼을 하게 될 때,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이였냐고 물을 때 그래도 조금은 상처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우리가 함께 지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혁이의 아이들이 다시 아이들을 낳았을 때, 조금은 부끄럽지 않게 혁이를 그 아이들에게 소개할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그를 마석모란공원 납골당에라도 모시자고 했다.

궂은일 도맡았던 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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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10월 15일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앞에서 열린 기륭전자 노조 농성장 강제철거 규탄 결의대회. 집회 참가자들이 비정규직 차별 대우 철폐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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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쩍 마른 혁이를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때였다. 화상이 남은 얼굴과 손, 병약한 몸 그러나 눈빛과 말만은 늘 기운과 신념에 차 있었다. 당시 혁이는 광우병 촛불항쟁에 열성적으로 함께한 이후였고, 여타 촛불시민들과 달리 비정규직 투쟁에 촛불시민들이 함께 해야 한다며 자발적으로 기륭 농성장을 찾았다.

농성장에서 만난 시민·학생·노동자들이 모여 '함께맞는비'라는 이름의 기륭네티즌 연대를 꾸리고, 또 하나의 기륭대책위가 돼 일을 할 때 혁이도 적극적으로 함께했다. 당시 네티즌 연대로 함께했던 이들 중 베자스와 이재명·구영탄은 지금도 기륭조합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 동안 우리는 매일을 농성장에서 함께 살았다. 기륭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륭농성장을 거점으로 해서 뉴코아이랜드 투쟁 현장으로, 코스콤 비정규직 투쟁 현장으로, KTX여승무원 투쟁으로, 강남성모병원 비정규직 투쟁 현장으로 우리는 한 패거리가 돼 몰려다니곤 했었다.

건설일용노동자 출신인 혁이는 늘 궂은일 당번이었지만 단 한 번도 생기를 잃어본 적이 없었던 듯하다. 당시 혁이와 함께 네티즌 연대를 꾸려가던 씨니 부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리는, 부엉이는, 곰탱이는, 라이카는 어디에 있는지, 중견소설가 티를 단 한번도 내지 않던 고양이(송경아) 동지는 잘 있는지.

생계 때문에 다시 공공노조 어디로 갔다는 신현원은 어떻게 지내는지. 그런 과정에서 만나 이젠 작은 아이를 낳고 사는 원수와 가리봉 감독은 잘 지내는지. 이젠 진보논객이 돼 가끔 지면을 통해 보는 한윤형도 '함께 맞는 비'로 만났었던 기억이다. 아참, 그 뒤로 지금껏 모든 현장에 연대하는 루시아가 있긴 하다. 그들 사이에서조차 늘 헌신적이던 혁이는 연대의 모범이었다.

두 번의 고공농성과 두 번의 국회의사당 점거농성 그리고 94일에 이르던 집단무기한 단식에 이어 마지막 망루 투쟁을 할 때. 한 단 한 단 아시바(발판)를 쌓아 올라가던 혁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경찰과 용역들과 구사대가 3각 편대가 돼 에워싸오던 숨막히던 현장이었다. 어떤 이들은 공장 안으로 끌려들어가 이가 깨지고, 얼굴이 공처럼 붓도록 얻어터지던 날이었다.

경찰에게 항의를 하다 눈을 얻어맞은 안티MB 까페지기 '윤활유'가 한쪽 눈을 실명당하기도 했던 날이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당시 처음 만났던 홍반장이 "만날 우리만 얻어터질 거냐"며 "우리도 물리력을 준비하자"고 안타깝게 얘기하던 날이기도 했다. 나도 결국 표적 연행됐던 날이기도 했다.

그런 날이었기에 당시 누구도 경찰 카메라들 앞에서 버젓이 망루를 쌓는 일을 선뜻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 혁이가 보였고, 혁에게 그 일을 부탁했다. "건설일을 해본 당신이 적임자"라고,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던 다급했던 시간이 생각난다. 후일 그 일로 경찰조사를 받고 왔다고 자랑스러워하던 혁이의 얼굴이 선하다. 그는 늘 바쁘게, 기민하게 움직이던 사람이었다. 그때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아 윗니·아랫니 두 개인가가 빠져 있었는데, 매번 '치이라도 함께해 줘야 할 텐데' 서로 미안해하고 걱정하던 기억이 난다. 지난 일이지만 나 역시 하루하루 차비 걱정을 하며 살 때였다.

비정규직 투쟁에 함께해야 한다던 그

우리는 용산참사 현장에도 함께 갔었다. 혁이는 기륭 네티즌연대와 함께한 이후 자연스레 2008년 광우병 촛불항쟁 당시 나왔던 수많은 촛불시민들과 함께했다. 그들 모두는 이름이 없었지만 어떤 진보적인 단체나 조직의 성원들보다 열성적이었다. 용산 철거민학살 투쟁의 큰 축의 하나도 이들, 이름 없는 촛불시민들이었다. 공안탄압 분위기에 밀려 용산참사 투쟁이 도심지에서 밀려 용산4가 현장으로 퇴각해 들어올 때 '현장 스쾃'(점유운동) 운동에 결합할 단위들을 기존 사회운동 단위에서 찾아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어려운 가운데 현장을 점거하고 지켰던 것은 용산범국민대책위 상황실과 파견미술팀, '조약골'과 '채은' '도영' 등 독립미디어센터 활동을 했던 팀 그리고 문정현 신부님과 평화바람 사람들뿐이었다. 그 외 유일한 단위가 당시 2008년 광우병촛불항쟁 이후 여러 인터넷 카페모임 등으로 남아있던 이들이 모여 만든 '촛불시민연석회의' 사람들이었다.

촛불 시민운동은 수직적인 체계의 대표자를 두지 않는다는 뜻에 따라 촛불연석회의는 책임일꾼이라는 이름으로 실무책임자들을 뒀다. 당시 혁이와 여름비도 실무책임자 중 핵심들이었던 기억이다. 우리는 다시 만나 매주말 도심 가두시위를 쫓아다니곤 했다. 어느 날이던가. 민주당사를 찾아가는 당산동 어느 도로에서 경찰의 습격을 받아 다시 연행될 때 경찰차 문 앞에서 끝까지 나를 구해 주려고 하던 이들 중 한 명도 혁이였다.

용산4가에 둥지를 틀고 살던 그들은 용산투쟁을 축으로 끊임없이 사회연대운동에 몸을 바쳤다. 그해 5월, 고 노무현 대통령 대한문 분향소를 경찰들과 싸우면서 세우고 끝까지 지켰던 이들도 이들 이름 없는 '촛불시민연석회의' 사람들이었다. 나만 해도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생전의 평가가 달라 분향조차도 맘을 내기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순정하기만 했다.

가끔 시민분향소에 가서 혁이를 만나면 그 역시 고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에 밀어붙였던 비정규직 확산법안 통과나 이라크 파병,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확장, 한미FTA 등 반노동자·민중적 정책들에는 동의하지 못하지만, (고 노무현 대통령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를 죽음으로 몰아부친 이명박 정권은 용서할 수 없다고 겸연쩍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그곳에서 전체 자원봉사단 단장 역할을 맡아 단 한시도 분향소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어떤 권력과 자본의 떡고물조차도 얻어본 적 없는, 이름 없는 건설일용노동자 출신일 뿐이었는데…. 왜 그런 그가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날 "싸워야 한다"라며 방송차를 끌고 나가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어야 했을까.

그는 쌍용자동차 77일 파업 현장에도 함께했었다. 잠깐 연대하고 오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도 천막을 세우고 현장을 지키다 무자비한 공권력 폭력에 의해 농성장이 싹쓸이될 때 함께 끌려 나와야 했다.

몇 년이 지나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일구는 주축이 됐던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일도 혁이와 함께했었던 기억이다. 그는 건설일용노조를 통해 노동운동을 배웠던 이였기에 여러 촛불시민들과는 다르게 무엇보다 비정규직 투쟁에는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는 애정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간절히 바랐다... 그의 삶이 조금은 넉넉해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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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동환(혁이)님의 사진. 2009년 12월 촛불송년회 당시 찍은 사진.
ⓒ 블로그 '파랑새울다' 토란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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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또 그 스스로가 이름 없는 노동자고 시민이었기에, 이름 없는 촛불시민들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고 그들의 즉자적인 분노나 저항의 정서를 잘 이해하고 존중하며 함께할 줄 알았다.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씨니와 함께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전국 자전거 투어'를 하고 돌아왔던 그의 얼굴이 선하다. 자전거 투어의 마지막 장소였던 재능교육 혜화동 본사 앞에서 결국 그도 경찰들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혁이는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도 함께했다. 1차 희망버스 당시 재능교육 농성장 앞에 모였을 때 진행자 표식이었던 '깔깔깔' 모자를 쓰고 있던 그가 기억난다. 2차 희망버스 이후 나는 수배 생활 탓에 나머지 버스는 타지 못했는데, 여름비를 만나 들어보니 혁이는 다섯 번의 희망버스를 모두 탔다고 한다. 그때마다 촛불시민버스를 만들어 함께했었다고 한다.

2009년 말, 혁이는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혈전증 등에 대해 '위독 판정'을 받고 병원에 실려 들어갔다 나온 뒤 끊이지 않는 투약과 투병 생활을 해나가던 중이었다. 생각해 보니 당시 여름비가 병원비 모금 관련 글을 쓰라고 해서 함께했던 기억도 난다. 혁이는 당시 흩어져 있던 촛불시민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촛불 1주년 송년회' 준비책임자였는데 치료 시기를 넘겨버려 폐기능까지 악화돼 여러 번의 긴급 시술을 받아야 했다. 그가 여러 촛불투쟁의 책임을 지고 수배 생활을 하던 때이기도 하다.

최근 2~3년 사이에는 혁이와 간간이 집회 현장에서 마주치거나, 전화 통화만을 했던 기억이다. 여름비에게는 몇 번이나 너무 힘들다며 급전 요청도 했다는데, 내겐 주로 누구를 소개해 달라는 전화를 했다. 혁이는 지역에 내려와서도 이런저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활동 근황만큼은 빼놓지 않았다. 여름비만큼 내가 편하지는 않았던가 보다.

하지만 그를 잊어본 적은 없다. 나 역시 아무것도 없이 천대만 받던 깡 건설일용노동자로 출발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런 나의 계급을, 나의 상처를, 나의 분노를 잊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왠지 모를 연대감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가 몇 년째 해 넣지 못하고 있던 빈 치아 틈새만 생각하면 한없이 쓸쓸해지기도 했다. 하혈을 자주 해 아이들용 기저귀를 하곤 노점일을 한다는 혁이의 아픔이 가슴을 후벼 팠다. 싼 감을 떼어다 팔아보고 싶다는 그의 설움이 내 눈에 덮이곤 했었다. 굳이 활동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무슨 도적질을 해서라도 그의 삶이 조금은 평온해지고 넉넉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는 한낱(?) 건설일용노동자 출신에, 두 아들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못난 아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해방을 위해, 최선을 다해 민주주의 투쟁에 함께했다. 지역운동 외에도 몇 년을 거리에서, 여기저기 농성장에서 살면서도 단 한 번도 힘들다는 소리를 해보지 않았던 이였다.

어떤 그럴싸한 단체나 조직의 상층에 있는 이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온갖 투쟁에 앞장서고 연대하며 헌신적으로 살았다면, 이미 무슨 배지라도 하나 달 수 있을 삼삼한 경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존경받으며 여기저기 강연이나 참석 요청에 바빠지기도 했을 것이다. '명예'라는 것도 생겼을 것이다. 그가 이를 해 넣을 충분한 돈이 있었다면, 하혈을 막을 치료비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 것이다.

'혁이'가 남기고 간 최고의 선물

하지만 그는 그 무엇도 챙기지 않았다. 이 세상 전체가 그에게는 마지막 생을 내려놨던 허름한 여관방처럼 깃들 곳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리고 우리가 겪어봤건대, 그는 마지막까지도 이 세상이 조금은 더 아름답고 정겨운 곳이 되기를, 모두가 조금은 더 행복한 곳이 되기를 바라는 선한 마음을 내려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왔던 노동운동의 길을, 열혈 촛불시민의 길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최고의 선물은 그런 믿음이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지난 12일 긴급히 연락을 받고 모인 이들끼리 마음을 모아, 마석모란공원 언덕배기 저 위에 있는 납골당에라도 그의 작은 집을 마련해 주자고 했다. 화장해서 저 산 어디에 뿌리고 말겠다던 어머님도, 원망뿐일 두 아들도 마음을 열어주셨다.

꼭 혁이만을 기억하자는 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처럼 이름 없이 오늘도 이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 모두를 기억하자는 뜻일 것이라고 서로 생각했다. 광우병 촛불항쟁 이후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던 이름 없는 촛불시민들의 운동을 기억하자는 뜻일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진정한 연대는 사회적 주목이 이뤄지는 무슨 전선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닐 것이라는, 함께했던 이들 중 누군가가 가장 힘들어할 때 그때 벗이 돼주는 최소한의 인간미와 동지애들이 살아있을 때, 조금씩 우리 공동체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이다.

혁이가 죽었다. 동이 터오고 있는데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언제라도 그가 다시 전화를 해올 것 같다. 이번엔 배를 조금 받아다 팔아보고 싶은데, 나주 어디에 아는 사람이 있냐고. 우린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우리 모두는 조금은 가난하지만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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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동환님 민주동지장 웹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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