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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씨, "생이별 비극은 분단모순 때문"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9/24 06:54
  • 수정일
    2015/09/24 06:5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조국과 가족에 미안, 통일에 모든 것 바칠 것"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9/23 [19:4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탈북자라는 이름표를 낙인처럼 달고 가족을 만날 수 없는 여인이 있다. 조국과 아버지, 어머니, 딸, 남편 이야기만 하면 눈물이 자동으로 흐르는 여인, 고향 품으로 돌려 보내 줄 것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고, 조국 품으로 돌아 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 수면제를 먹고, 동맥을 자르며 죽음으로 송환을 요구한 평양 시민 김련희 씨다.

 

지난 22일 북측은 처음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관지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유인랍치 된 김련희를 돌려보내라’고 남측당국에 요구했다.

 

그런데 남측 당국은 아직은 돌려보낼 법적 근거가 없다며 거부했다. 김련희 씨는 인권과 자유를 말하는 한국 당국이 “왜 천륜을 끊느냐”고 항변했다.

 

그녀는 한국정부가 인권과 자유를 말한다면 자신은 물론 송환을 원하는 탈북자들을 전원 송환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일은 분단모순 때문이라며 통일의 절박함을 피력했다.

 

그녀는 처음 자신을 소개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출신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남도 북도 모두 조국이라고 이야기하고, 평양시민이자, 대구시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제 세상의 가장 비극적인 분단모순을 끝내고 민족이 하나 되는 통일을 위해 온 겨레가 나서야 한다고 호소한다. 탈북에서 통일을 이야기하는 김련희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탈북 브로커에게 속아 남으로 왔다며 북으로 송환을 요구해 온 김련희씨는 자신과 같은 비극을 끝장 내기 위해서는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 요즘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들을 의논하기 위해 여러 인권단체들과의 모임에 참여하고 영국의 BBC, 미국의 CNN 인터뷰로 서울에 올라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송환대책을 위해 보내다 보니 어제 회사에서 그만두라는 해고 통지가 왔네요.

 

- 어제는 북측에서 유인납치 된 김 선생을 돌려 보내달라고 촉구했고 남측에서는 법적인 문제를 들며 보낼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심경이 복잡할 텐데 지금 마음이 어떻습니까. 
  
▲ 어제 북측 조국에서 남측 조국에 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촉구하였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너무나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예요. 이렇듯 병든 자식을 더욱 껴않는 부모와 같은 나의 조국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 고통스럽고 지옥 같은 4년 세월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어요?
독감방의 철창 속에서 저의 온몸을 쇄사슬로 꽁꽁 묶어놓고 구둣발로 내리밟아도 매일같이 벽에 우리 공화국기를 그려 붙여 놓고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너무나 소중한 나의 조국이예요.
 남측에서 열백번을 다시 묶어놓는다 해도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저의 결심은 한치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 남측 정부 당국은 김 선생이 자유의사로 조선의 국적을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고 서약했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 김련희씨는 중국 친척 언니를 방문했다가 지병인 간경화를 치료하기 위한 치료비 때문에 남한까지 왔다고 과정을 설명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 남측에 도착한 순간부터 저는 속아서 잘못 온 것이니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고 강경하게 요구했죠. 하지만 국정원은 대한민국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쓰지 않으면 국정원에서 나갈 수 없으며 여기서 죽어도 그 누구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내가 여기서 그 누구도 모르게 죽으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두려운 생각에 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서약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 무엇 때문에 중국에 갔으며 남한행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 2011년6월에 중국에 살고 있는 사촌언니의 집에 여행을 가게 되죠. 그곳에서 저는 원래 앓고 있던 간경화가 심해져 치료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조국하고는 치료 체계가 너무 달랐어요. 조국에서는 돈 한 푼들이지 않고도 치료를 할 수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병원비가 너무 비싸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래서 사촌언니에게 치료비를 대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 내 자신이 치료비를 벌어 병치료를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달만 한국에 가서 일하면 많은 돈을 벌어 치료비를 해결할 수 있다는 브로커의 속임수에 넘어가 최악의 실수로 한국에 오게 된 것입니다.

 

 

- 김 선생은 강제로 남한에 왔다는데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강제로 협박하거나 납치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지는데 남한에 오기까지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 탈북브로커의 안내를 받아 심양에서 정주라는 곳에 가게 되죠, 그 곳에서 어느 한 건물에 다른 분들과 함께 갇혀있게 되요 그때 옆에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두달만에 중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 내가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알게 돼요.

 

그래서 저는 도망가려고 브로커에게 빼앗겼던 여권을 돌려달라고 항의하지만 여권이 벌써 자기 윗사람에게 가있다면서 돌려주지 않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남한행을 하게 됩니다

 

- 남한에 와서 바로 북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했다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겠다는 서약서를 쓴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또 다시 북으로 송환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 입국 첫 순간부터 돌려보내줄 것을 강경하게 요구하지만 전혀 받아들여주지 않고 서약서를 쓰지 않으면 절대로 여기서 나갈 수 없으며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그 누구도 모른다고 협박을 해요.

 

그때 탈북자들을 통해 사회에 나가면 6개월만 지나면 여권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당시 생각으로 사회에 나가면 여권을 받아서 가족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국정원의 압력을 받아 서약서를 쓰게 됐어요.

 

▲ 브로커에 속아 남한으로 왔다가 끊임없이 송환을 요구해 오고 있는 평양시민 김련희 씨가 가족들과 만날 수 있게 해달라며 이산가족상봉 신청서를 작성해 대한적십자자사에 제출했다.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 북으로 다시가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셨는지요

 

▲ 국정원에서 조국으로 돌려 보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1달 동안 단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식 투쟁이라는 말도 모른 채 밥을 먹지 않으면 나의 요구가 받아 들여 들여지리라 믿은 것이지요. 단식 당시에 국정원 직원들은 나에게 밥을 먹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이후 사회에 나오게 되었고 6개월 후 여권을 신청했으나 1년 동안 승인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국정원에 문의하니 “북으로 도망갈 수 있어 여권을 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답변을 듣고 합법적으로는 조국으로 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밀항을 시도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밀항을 위해서는 2천만원이라는 거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포기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인터넷에서 우연히 위조여권 싸이트를 알게 되어 위조 여권을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 약속했던 250만원이 아니라 500만원을 달라는 요구를 받고 중단하게 되었어요. 이 모든 노력들이 경찰들에게 알려지게 되어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과 공문서 위조 혐의로 조사를 받고 기소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조국에 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고 조국을 떠나서는 제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는 양심에 따라 많은양의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 했으나 경찰에 의해 발견되어 보름동안 병원 치료를 받고 생명을 부지 할 수 있었습니다. 병원을 퇴원한 다음날 또 다시 손맥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하게 되었으나 또 다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살아났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절대로 죽어서는 안되고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가자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조국과 가족에 대한 최소한 도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간첩이 되면 강제 추방 되어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탈북자 17명의 신상을 수집하여 휴대폰에 입력한 후 경찰에 북측에 전달하려고 하니 빨리 와서 나를 잡아가라고 신고를 하게 되었죠. 그러나 경찰은 이상하게도 열흘이 되도록 잡으로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열흘 후 다시 경찰에 전화를 하여 만나자고 요청을 했습니다. 전화 통화 후 대구 모 식당에서 경찰 두명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 저의 휴대폰을 보여 주며 내가 간첩 맞지 않느냐 이것이 증거다라고 말했지요. 이후 20여일이 지나 경찰이 가택 압수수색을 진행 한 후 간첩죄로 체포해 감옥에 넣었습니다.
      

▲ 김련희씨는 가족의 만남을 가로막는 것은 반인륜적이고 반인권적이라며 남한 당국이  자신을  조국과 가족에게 돌려모내야 한다고 강조하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 간첩혐의에 대한 재판이 진행 되었는데 어떻게 결과가 나왔나요.

 

▲ 검찰의 기소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재판부는 간첩이라는 것이 너무도 어이가 없었던지 징역2년에 집행유예 3년, 보호관찰 3년을 선고해 올해 4월 석방되었지요. 말그대로 집행유예 간첩이네요.
간첩이 이렇게 쉬운건지 너무 웃겨서 제가 수사관에게 물었답니다.“이 나라에서는 내가 살인자요 한다면 살인자가 되어 감옥에 들어가느냐고요. 살인자가 되려면 살인 동기나 과정, 증거물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요.”

 

- 북에 있는 가족과는 연락을 한 적이 있으시거나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 중국에 있는 사촌언니 집으로 부모님과 남편, 딸이 보낸 편지로 소식과 사진 등을받아 가족의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조국에 있는 가족들은 4년동안 돌아오지 않는 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며 애타게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도 부모님과 남편 딸을 생각하면 눈물만 납니다. 생이별의 아픔만큼 큰 것이 또 있을까 하는 마음입니다.(울음)

 

- 남쪽이나 서방 언론에서는 북의 인권이 참혹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탈북자들의 가족이나 탈북자 자신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온갖 고문을 한다던데 만약 송환이 이루어진다면 처벌이 두렵지는 않습니까.

 

▲ 저는 북에서 40여년간을 살면서 고문이나 수용소등은 알지도 못했고 들어 보지도  못 했어요. 다만 교양적 차원에서 노동 교화소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언론에 나와서 소위 탈북자의 이름을 쓰고 북의 인권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은 조국에서 그 누구보다도 배려를 많이 받으며 살다가 엄중한 죄를 짓고 죄 값을 치르기 싫어 배은망덕하게도 자기를 키워주고 공부시켜 내세워준 어머니조국을 배신하고 도망쳐 나온 반역자들이예요. 그런 범죄자들의 말도 안 되는 사기극을 이용하는 정부당국을 보면서 진실로 통일을 원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제가 조국에 돌아가면 조국이 관대하게 용서해준다 해도 저는 제 스스로 죄 값을 치를 것입니다.

 

▲ 김련희씨는 남쪽 조국에 와서 분단 모순을 절감하게 되었다며 조국통일을 위해 남은 생을 다바치겠다고 다짐하며 활짝 웃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 마지막으로 가족과 북측 당국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조국과 가족에게 죄송합니다.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순간의 실수로 조국과 가족에게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조국과 가족은 나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어요.

 

부모에게는 불효한 자식, 딸과 남편에게는 걱정을 끼치는 어머니, 아내가 되었습니다. 하루 빨리 돌아가 못 다한 자식노릇 부모 노릇, 아내 노릇, 조국의 딸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특히 나는 이번에 남쪽 조국에 와서 분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통일의 중요성도 더욱 실감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나는 죽는 날까지 남에 있건 북에 있건 조국통일에 모든 것을 깡그리 바칠 결심을 했어요. 한 핏줄인 우리민족, 한 맥을 잇고 있는 조국강토가 하나로 되어야 하는 것은 온겨레의 염원입니다. 왜 우리가 생이별을 하고 살아야 합니까. 남북해외동포 모두에게 절절히 호소합니다. 통일에 나서자고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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