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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의 실패, 반복하지 않으려면…"

 
[백년포럼] 1987년의 꿈과 2015년의 현실
성현석 기자 2015.10.31 09:39:36
 

 

1987년 6월 항쟁 당시 태어난 이들이 지금 28살이다. 취업준비생이거나 말단 사원인 그들이 보고 겪은 한국은 어떤 곳일까. 각종 통계가 입증한다. 부모 잘 만난 소수에겐 꽤 살만한 곳이다. 나머지 다수에겐 '헬조선'이다. 극심한 경쟁, 미래에 대한 불안, 파괴된 공동체, 약자에 대한 조롱….

민주화를 향한 싸움 속에서 숱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꿈꿨던 미래가 이런 것일 리는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민주화를 이끌었던 세대와 젊은이가 만나 머리를 맞대는 자리가 마련됐다. 새로운 백년을 모색하는 연구단체 사단법인 '다른백년' 창립준비위원회가 진행한 '백년포럼' 분과 창립포럼이다. 서울시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410호 강당에서 진행된 이날 포럼의 주제는 "민주화 세력은 왜 좌초하였나?-1987년의 꿈과 2015년의 현실"이었다. 이부영 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전 국회의원)과 권형택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부의장, 나유경 '청년연합 36.5' 대구경북위원장 등이 발제자로 참가했다. 

민주화 세력이 좌초했다고 단정 짓다니…. 지나친 자학이라는 지적도 있었다고 한다. 백년포럼 대표를 맡고 있는 박인규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이사장은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학이냐, 자부심이냐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진실 그 자체라는 것. 경제가 성장했지만 사회 구성원이 느끼는 절망감은 오히려 더 증폭됐다. OECD 1위를 기록한 자살률이 확인시켜준다. 이런 성장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런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다. 박 대표는 이날 포럼에서 사회를 맡았다. 

 

 

▲1987년 6월26일 부산에서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에 참가한 한 시민이 태극기 앞에서 윗옷을 벗고 시위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직선제 이후'에 대한 기획이 없었다"

세 명의 발제자는 연령대는 제각각이지만, 공통분모가 뚜렷했다. 현실의 문제를 정직하게 바라봤고,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이부영 전 상임의장ⓒ연합뉴스

이부영 전 상임의장은 과거 민주화 운동 세력의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1980년대 재야 운동의 지도부였으며,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의 지적은 울림이 컸다. 

직선제 개헌을 이룬 뒤에 대한 준비가 없었다는 점이 첫 번째 지적이었다. 과거의 정치사회 운동은 현실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함께 마련했다. 일제 강점기 신간회 운동, 해방 직전의 건국 동맹 등이 그렇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역시 미래 전망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했었다. 그러나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라는 도식적 틀에 갇혀서 생명력을 잃었다. 이 전 상임의장이 보기에 NL과 PD는 모두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이었다. 관념적인 전망에 갇힌 이론과 실천은 결국 운동권의 대대적인 체제 투항 및 전향으로 이어졌다. 

더 구체적으로는, 6월 항쟁으로 얻어낸 '직선제'를 어떻게 치러낼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이 전 상임의장은 '전두환 정권이 관리하는 선거가 어떻게 공정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탄식했다. 그는 "4월 혁명 뒤 허정 과도정부의 경우처럼 '전두환 퇴진-선거관리 과도정부 수립운동'이 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직선제 쟁취 다음 목표를 제시해서 민주화 세력이 흩어지는 걸 막고, 공정한 선거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세계사적 흐름에 대한 무관심

아울러 그는 세계사적 흐름에 대한 한국 민주화 세력의 무관심을 지적했다. 나라 안에서는 1970~80년대가 엄혹한 독재 체제였다. 하지만 나라 밖에선 냉전 체제가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른바 '데탕트(긴장 완화)' 흐름이다. 이 전 상임의장은 "데탕트의 도래가 한반도의 군부독재도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상 위에 로드맵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군부독재가 '6.29 직선제 수용'을 발표하자 그 한 가지 페인트 모션(기만술책)만으로 휘청거린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노태우 정권의 중국-러시아와의 수교,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와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비핵화선언 합의에 대해 공안탄압을 받으면서도 수동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라는 반성도 나왔다. 그는 "한반도 화해와 평화통일 의제가 야권과 재야민주화운동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했다"며 "(1980년대 이후)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남북문제에서 북측이 수세로 돌아선 것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야권과 재야의 냉정한 인식전환이 요청되던 시기"였다는 지적이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력이 세계사적인 '데탕트' 흐름에 둔감했던 근거로, 이 전 상임의장은 1985년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꼽았다. 당시 온 나라가 울음바다였다. 비록 전두환 군사독재 정부가 기획한 행사였으나, 그 뒤에 있는 에너지를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었다. 남북 화해를 염원하는 숨은 에너지를 똑바로 읽지 못한 건 당시 민주화 세력의 한계였다는 게 이 전 상임의장의 생각이다. 
 

▲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 ⓒ연합뉴스



양김 분열의 지독한 후유증

1980년대 민주화 운동가들의 진로는 다양하다. 일부는 계속 시민사회운동, 노동운동을 했다. 나머지 많은 수는 생업을 찾아 나섰고, 또 일부는 드라마틱한 전향을 했다. 이른바 '뉴라이트' 인사들 가운데 전직 운동권이 종종 있다. 나머지 가운데 또 일부가 제도 정치에 도전했다. 

지금 젊은이들이 1987년 세대를 불신하는 대표적인 이유가, 정치에 있다. 정치권에 뛰어든 범민주화 세력이 썩 신뢰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 "정치인은 다 똑같다"라는 정치 혐오와도 맞닿아 있다. 이날 포럼 참가자들이 한결같이 지적한 것도 이 대목이다. 치열한 민주화 투쟁을 거쳤음에도, 한국 민주주의는 왜 이 지경인가. 한국 정치는 왜 이 모양인가. 

참가자들이 내놓은 답은 대체로 일치했다.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른바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분열에서 비롯됐다는 것. 1987년 대선 당시 노골적인 관권, 부정선거가 진행됐음에도 노태우 당선자의 득표율은 36%에 불과했다.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단일화 했다면, 이길 수 있는 선거였다. 그들의 분열로 말미암아, 6월 항쟁으로 위기를 맞았던 수구 세력은 기운을 회복할 여유를 얻었다. 군부 세력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민주화 운동 대오는 뿔뿔이 흩어졌다. 민주 세력은 힘이 빠지고, 수구 세력은 오히려 더 견고한 진지를 마련했다. 그뿐 아니다. 숱한 목숨을 잃어가며 싸운 결과가 군부 세력의 승리였다는 패배감은 정치 및 사회 참여에 대한 환멸로 이어졌다.

 

 

노태우 정권 이후, 김영삼, 김대중 정부가 잇따라 들어섰지만, 이는 민주 세력의 독자 집권이 아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통해 수구 세력에게 투항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5.16 쿠데타 세력과 손잡고서야 집권할 수 있었다. 이런 구조에서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 실현, 남북 화해 등은 불가능했다. 198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의 출마를 정당화한 논리였던 '4자 후보 필승론'은 지역 구도를 고착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 상임의장은 "'4자 후보 필승론'을 재야민주화운동 출신들이 제안했다는 점은 통렬한 한계"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을 했던 이들이 "대선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대선에 따른 지역분열 후유증을 내다보지 못했을 리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 역사적 후유증을 지금까지 앓고 있다는 말도 곁들였다. 

권형택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부의장 역시 양김의 분열에 대해 깊은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주 진영이 겪은 패배가 낳은 후유증이 너무 큰 탓이다. 그는 당시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어떻게든 후보 단일화를 강제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권 전 부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당시 양 김 씨 중에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성서 속) 솔로몬 재판에 나오는 한 여인처럼 (…) 대통령 후보를 양보할 수는 없었을까? (…) 자신의 희생으로 대의를 이루는 큰 정치인이 이때 나왔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이익을 따라 이합집산하는 정치 풍토가 많이 나아졌을 것이고, 정치인을 바라보는 국민의 기대도 지금처럼 땅바닥에 추락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 1987년 10월 25일 고려대운동장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쟁취실천대회'에서 나란히 앉은 김대중, 김영삼. ⓒ 연합뉴스



"12년짜리 회사에 인생 걸라고요?"

1987년 당시,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과반수였다. 이들의 염원이 꺾인 후유증은 지금 젊은이들이 겪고 있다. 국민의 염원과 의회 정치가 따로 움직이는 구조가 정착하면서, 젊은이들의 절망감을 제도적으로 풀어낼 장치가 사라졌다. 1990년에 태어난 나유경 '청년연합 36.5' 대구경북위원장은 지금 젊은이들이 겪는 문제를 열정적으로 토로했다. 왜 청년은 정치와 멀어졌는가. 정치를 통해 자기 문제를 풀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물론 청년의 정치 참여 통로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한계가 명확하다. 나 위원장은 "출세 지향적인 소수의 청년에게만 통로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런(출세 지향적인) 청년을 이용만 하려는 기성세대 때문에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더 쌓여간다"고도 했다. 또래 젊은이들의 절망과 희망을 솔직하게 담아내는 통로는 아직 없다는 지적이다.

이어 나 위원장은 당장의 생존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대표적인 게 취업난이다. 일자리가 적다. 그래서 경쟁이 살인적이다. 또래 인간관계가 파괴된다. 이에 대해 기성세대는 '눈높이를 낮추라'라고만 한다. 하지만 이는 비현실적인 주문이다. 

나 위원장은 일본과 한국의 기업 수명을 비교하며, 기성세대의 주문을 반박했다. 

"일본은 1000년 이상 된 회사가 7개, 300년 이상 된 회사가 604개, 200년 이상 된 회사가 3113개, 100년 이상 된 회사가 2만2000여 개가 있다. 반면, 한국은 100년 이상 된 회사만 7개, 60년 이상 된 회사가 184개다. 더 충격적인 건 한국 중소기업의 평균 수명은 12년이라는 점이다. '눈높이'를 낮춰서 중소기업에 취업하라는 건, 12년짜리 회사에 인생을 걸라는 말이다."

12년을 못 넘기는 회사에, 20대 후반에 취업하면, 결혼해서 낳은 아이가 학교 갈 무렵에 관둬야 한다. 열악한 사회안전망을 고려하면, 미래가 끔찍해진다. 결혼과 출산이 두려워지는 게 당연하다. 

"일자리 줄어서 불안?일자리 나누는 법을 만들면 된다!"

 


30년 뒤,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해서도 나 위원장은 일자리 부족을 이야기했다. 자동화의 진전 등에 따라 좋은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옆에 있던 이부영 전 상임의장이 한마디 했다. "(젊은이들이) 국회에 들어가 법을 바꾸면 되지."

"(일자리가 줄어들면) 근로시간 줄여서 일자리를 나누는 법을 만들면 된다. 그게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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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복지, 재벌 문제를 주로 취재했습니다. 복지국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내려고 김용철 변호사의 원고를 정리했습니다. 과학자, 아니면 역사가가 되고 싶었는데, 기자가 됐습니다. 과학자와 역사가의 자세로 기사를 쓰고 싶은데, 갈 길이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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