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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고승, 가림 없이 ‘없음’을 서로 묻고 답하다

세 명의 고승, 가림 없이 ‘없음’을 서로 묻고 답하다

2016. 03. 02
조회수 547 추천수 0
 
  혜국-아잔 간하-아잔 브람 스님 무차토론
 
사본(원)1-15.jpg» 무차토론을 벌이는 세기의 고승들. 왼쪽부터 사회를 본 각산 스님, 아잔 간하 스님, 아잔 브람스님, 혜국 스님.
 
 아무 것도 없다는 그놈은 지금 어디 있는지 찾는다
 그 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냥 그 답이 있을 뿐
 
 성적 욕구 갖고 있나? 없다면 왜 안 갖고 있나?
  참 깊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얼른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자
  나도 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깨달음이 없다면 공은 있나?
 있다면 공이 아니다
 공이 없다면 누가 공을 아는가?
 그 답을 내가 듣고 싶다
 
 내려놓는 방법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내려놓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바로 공성으로 가는 것
 내려놓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내려놓는 것
 
 고통이 없었다면 현대도 삼성도 없어, 고통에서 행복 온다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것에는 정신적 고통이 더 커
 마음에는 고통이 없다. 고통을 느낄 줄 아는 놈이 누구인가

 

 
역시 그들은 고승이었다. 평생 깨달음을 추구하며 수행한 고승의 언어는 사부대중을 감동시켰다. 그들의 가슴 깊숙한 것에서 나오는 언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며, 인간이 느끼는 고민과 번민을 무력하게 하기 충분했다. 그들은 ‘없음’을 강조했다. 모든 집착과 욕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지를 이야기했다. 그 경지에 가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말을 통해 그 경지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지난 26일 강원도 정선의 하이원리조트 컨벤션홀에서는 ‘세기의 무차(無遮)토론’이 벌어졌다. 무차토론은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한 불교의 독특한 토론방식이다. 수행을 오래한 고승들이 일갈을 하고, 그 일갈에 대해 사부대중이 의문이나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마치 오랜 검술 수련을 한 검객들이 중원에서 맞붙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전 아무런 각본도 없다. 누가 어떤 질문을, 어떤 공격을 할지 모른다. 사부대중은 자신들이 들어온 고승들의 수행 깊이를 직접 느낄 수 있다.
 이번 무차토론에는 모두 3명의 고승이 참여했다.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스님과 타이의 ‘살아있는 부처’로 불리는 왓 프레담마람 수도원장 아잔 간하 스님, 그리고 타이 수행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영국 출신 명상지도자 아잔 브람 스님이 함께 했다. 사회는 각산(참불선원 선원장) 스님이 보았다.
 세 가지 언어(한국어, 영어, 타이어)를 통해 토론하는 바람에 때로는 불편함이 있었다. 언어의 장벽을 쉽게 뛰어넘기는 어려웠다. 깊은 정신적 고뇌의 산물을 서로 다른 언어가 교통하긴 쉽지 않았다.
 또 수행방법도 달랐다. 혜국 스님은 해인사에서 10만배 정진을 마친 뒤, 오른쪽 손가락 세 개의 절반을 태우는 연비로 견성성불의 결연한 뜻을 세웠다. 또 태백산 도솔암에서 2년7개월 동안 솔잎과 쌀로 생식하며 정진했고, 성철, 구산 스님을 모시며 간화선으로 수십 안거를 지냈다. 
 아잔 간하 스님은 킹 코브라를 손길로 쓰다듬어 조용히 사라지게 한 일화로 타이 불자들에게  ‘루앙포야이(최고의 스님)’로 추앙을 받고 있고, 아잔 브람 스님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다 호주 최초 사찰을 세운 호주불교 개척자다. 유튜브에서 그의 명상수행법과 법문을 담은 동영상은 수백만명이 접속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다음은 고승들의 무차토론 내용이다.
 
사본(원)1-11.jpg» 혜국 스님.
사본(원)1-10.jpg» 아잔 간하 스님.
사본(원)1-2.jpg» 아잔 브람 스님.
 
 혜국 스님: 아무 것도 없다고 했는데, 간화선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그놈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찾는다.
 아잔 브람: 그 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냥 그 답이 있을 뿐이다.
 혜국 스님: 간화선과 남방불교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할 때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람이 있을 때만 그 말이 나온다. 간화선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위치에 가면 아무 것도 없는 언어가 나온다. 똑같은 제자를 두고 지장의 머리는 희고 혜회 머리는 검다고 마조가 말한 게 본보기이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간화선이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각산 스님: 아잔 간하에게 묻는다. 간화선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아잔 간하: 선불교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들었지만 관심을 둬 본 적이 없다. 법은 상좌부나 대승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마음 챙김과 지혜만 있다면 선불교나 상좌부 상관없이 진리에 이를 수 있다.
 혜국 스님: ‘주시한다’, ‘관찰한다’를 마음 챙김이라는데 간화선에서는 보이고 들리는 것 모두가 환영이라고 한다. 환영인줄 알고, 주시하고 마음 챙김을 하나? 인정을 않고 마음 챙김을 하는 것인가? 환영인줄 안다면 환영인줄 아는 그놈을 보는 것이 간화선이다. 이를 어떻게 지도하고 있나?
 아잔 간하: 자신의 몸과 말뜻(신구의)을 아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 지혜와 이해가 생긴다.
 아잔 브람: 나는 여행을 자주 한다. 공항에서 “화장실이 어디있나요?”라고 묻는다. 사람들은 내게 화장실이 쓰인 표지판을 가리키고 알려준다. 그러면 나는 그 표지판이 있는 화장실에 소변을 보는 시늉을 한다. 사람들은 내게 화장실은 안에 있는데 무엇하느냐고 한다. 그럼 나는 내게 언제 그렇게 말해줬느냐고 한다. 사람들이 논쟁을 할 때 결국 화장실에 가지 않고 화장실 문에 소변을 보는 행위와 같다. 화장실에 들어간다면 더 이상 논쟁이 없다.
 혜국 스님: 한국스님들의 간화선에 대한 신심은 세계적이다. 간화선을 중국불교라 말하지만 법을 모르는 소리다. 부처님은 연기법은 과거 미래에 영원하다고 했다. 중국선이다, 남방선이다 하는 것은 부처님 법을 구속시키는 것이다. 부처님 법이 한국에 살아있다고들 인정한다. 언어를 떠난 세계,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세계를 물었다. 그런데 언어의 장벽으로 질문이 전달되지 않고 있다. 다른 것을 질문해도 똑같은 결과일 것 같다.
 
개구리는 물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물을 안다
 
  청중 질문: 아잔 간하 스님, 실제로 코브라에게 어떻게 설법을 했는가?
 아잔 간하: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청중의 질문: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를 하는지?
 혜국 스님: 분명히 무아이다. 온 우주가 나와 하나가 돼있지 독립된 나는 없다. 나는 담배를 안 태운다. 그래서 담배 사러가는 법이 없다. 담뱃집에 태어날 일이 없다. 무아인줄 모르고 업을 따라가면 윤회이다. 무아인줄 안다면 존재 자체가 된다.
 
사본(원)1-8.jpg 
 
 아잔 간하: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말로 계속하는 것은 유용하지 않다. 말을 계속하면 사람들의 혼란만 가중시킨다. 우리가 직접 수행을 해서 직접 보는 것이 중요하다. 태국의 테라바다 전통에서는 “~을 하라”, “이해하라”가 아니라 “직접 알아봐라”, “발견하라”고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말하면 항상 오해가 생긴다.
 아잔 브람: 한 예를 들겠다. 연못에 올챙이가 살고 있었다. 올챙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화학을 배웠다. 물이 H₂0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의 화학성분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올챙이가 물이 어떤 것인지 진정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물고기는 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물속에서 태어났고 일생에서 물속에서 살았으니 물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동안 올챙이가 많은 공부를 했지만 물이 진짜 무엇인지 아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올챙이에게 팔과 다리가 생겨 개구리가 됐다. 개구리가 펄쩍 뛰어서 연못 밖을 나왔다. 이제야 개구리는 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이 다 사라진 다음에야 물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있는 자리를 놓아버릴 때 이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아잔 간하가 대답을 않는 것이다. 올챙이에게 물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화두를 타파하면 성욕도 사라지나
 
  각산 스님: 혜국 스님과 아잔 간하에게 질문한다. 화두를 타파하면 성욕도 사라지는가? 수행을 하면 어느 시점에 성욕이 사라지는가.
 아잔 간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깨달은 사람이. 알아차림과 지혜만 있어도 성욕이 없는데, 하물며 깨달은 사람에게 성욕이 있을 수 있는가. 여러분이 참 깊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아잔 브람: 성욕에서 자유로운 수행자를 봤다. 성욕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문화가 우리에게 부과한 것이다. 물리학을 전공해 지금도 관련 서적을 읽고 있다. 과학자들이 섹스 중인 커플의 뇌를 스캔했다. 그때 감각이 일어나는 뇌 부분은 통증이 일어나는 부분과 같았다. 성행위 시 느끼는 쾌감 부위와 고통을 느끼는 부위가 같다. 근데 우리는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 기사를 읽었을 때 부처님 말씀을 생각했다. 성적 즐거움이란 너의 인식을 왜곡하는 것이다. 실제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붓다의 말이다. 내가 런던에 있을 때 영국 맥주를 처음 마셨다. 맛이 형편없었다. 사람들이 왜 많은 시간과 돈을 맥주 마시는데 쓰는지 이해가 안 갔다. 펍(맥주집)을 들락날락한 지 3개월 만에 나는 맥주를 좋아하게 됐다. 동료들의 압박 같은 것이었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것과 같은. 지혜가 있는 사람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지혜로 판단할 때 성적 즐거움은 고통스러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혜국 스님: 성욕 이야기로 웃는 것 자체가 간화선에서는 웃을 일이 아니다. 간화선은 성욕과  물마시고 싶은 마음과 배고프면 밥 먹고 싶은 마음을 같게 본다. 세상 사람들이 중점을 둬서 성욕을 대단하다고 한다. 깨달음은 욕망이 공하다고 한 것을 보는 것이다. 성욕이 있지만 다만 끄달리지 않는 것이다. 욕망에 끄달리느냐, 욕망을 내가 활용하느냐의 차이이다. 일체 모든 욕망은 하나이다. 공한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욕망이 일어났을 때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공이다.
 아잔 브람: (혜국 스님에게) 성적 욕구를 갖고 계십니까? 없다면 왜 안 갖고 계십니까?
 혜국 스님: (웃으며) 얼른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자.
 아잔 브람: 나도 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혜국 스님: 그러면 스님도 보는 놈이 누구인지 말해 달라.  간화선이 그런 걸 모르고 어렵다는 것은 근본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잔 브람: 통역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나라면 누가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라고 하겠다.
 혜국 스님: 그건 아니다.
 
욕망의 차이는 없다, 다만 업의 차이만
 
  청중 질문: 간화선에서는 깨치면 부처라고 한다. 부처와 아라한의 차이는?
 아잔 간하: 아라한과 부처 사이에는 번뇌, 욕망의 차이는 없다. 다만 과거로부터 쌓아온 업의 차이만 있다. 아라한과 부처는 바라밀을 닦았다.
 혜국 스님: 업의 차이라고? 아라한은 업이 없다. 허공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부처님은 공성이다. 도를 깨달으면 아라한은 이름일 뿐 깨달음에는 차이가 없다.
 아잔 브람: 허공은 무상하다. 항상 여기 있지 않다. 이는 기본적인 물리학으로 증명된다. 빅뱅이 있기 전 허공도 없었다. 빅뱅이 있기 전 부처는 어디 있었나?
 혜국 스님: 이 허공은 스페이스가 아니다. 공성을 말한다.
 아잔 브람: 깨달음이 없다면 공은 있나?
 혜국 스님: 있다면 공이 아니다.
 아잔 브람: 공이 없다면 누가 공을 아는가?
 혜국 스님: 그 답을 내가 듣고 싶다. 말하고 보고 듣는 것은 내 안에 있지 않다. 공은 망에도 진에도 머물지 않는다. 전체가 진일 때가 공이다.
 아잔 브람: 무엇이 윤회하는가에 대한 내 답은 “어리석음이다”라고 하겠다. 어리석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어리석음이 윤회를 이끄는 것이다. 어리석음을 모두 없애면 더 이상 윤회는 없다.
 
질문할 것이 있다면 덜 떨어진 놈
 
  청중 질문: 지켜보는 자가 마음의 깨침을 이루는 것인가?
 아잔 브람: 아는 사람은 없지만 앎은 있다. 그래서 아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앎의 행위가 끝나면 멈춘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다른 앎이 일어난다. 그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다리 위에 서서 물을 바라본다. 매일 같은 물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제 있던 물은 오늘 없다. 강물은 어떤 과정이지 개체가 물체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앎의 흐름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는 자가 아니고 앎의 흐름이 있다고 했다.
 혜국 스님: 말을 할수록 그르친다는 것에 동감한다. 그런데 한국 젊은이에게 그렇게 말하면 통하지 않는다. 통역 문제가 심각하다. 석종사에도 외국인들이 제법 온다. 참선하면 기가 나온다고 하니까 맑은 기가 나온다는 말을 통역은 개스가 나온다고 통역하더라. 성철 스님도 일단 질문할 것이 있다면 덜 떨어진 놈이다고 했다. 자기가 답을 찾지 못하면서 왜 남의 답을 들으려고 하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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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잔 브람: 깨달음을 말하는 것보다 최고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기도 한다. 젊은이들의 최고의 행복이라는 말에 더 관심을 보인다. 우리 절에서는 행복을 판다. 내가 그 마케팅의 도구이다. 여러분이 많이 웃을수록 사람들이 절에 더 많이 찾아온다. 태국으로 출가하러 간 이유도 런던의 수많은 사찰 중 태국 스님들이 가장 많이 웃었다. 웃는 입을 나는 깨달음의 측정계라고 부른다. 입꼬리가 올라갈수록 더 많이 깨달은 것이다. 행복은 깨달은 사람의 일부이다. 한국의 스님들이 웃는 만큼 사람들이 더 많이 절을 찾을 것이다.
 청중의 질문: 내려놓음을 강조하는데?
 아잔 브람: 명상은 어떻게 하면 고요해질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생각이 없다. (물컵을 들어보이며) 컵 안의 물이 고요한가? 집중을 하겠다. 물이 고요한가? (청중: 아니요.)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명상을 하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물은 더 흔들린다.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컵을 내려놓으며) 내려놓으면 된다. 계속 들어보면서 고요해졌나 살펴보는 명상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내버려둔다. 이것이 바로 내려놓는 방법이다. 아주 단순하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아주 쉽다.
 혜국 스님: 간화선은 내려놓음을 강조하는 것 아니라 내려놓아져 있다고 말한다. 내려놓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바로 공성으로 가는 것, 내려놔야할 성질을 공성으로 부처로 만들어보자. 모를 뿐인 화두로 돌아가는 것이 방하착이다. 본래 없기 때문이다. 화두 일념만 하라고 한다.
 아잔 브람: 내려놓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노력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아가 있으면서 명상을 하면 욕망이 된다. 우리가 사라져야 한다. 때론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책에 있는 것들을 본인은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거기 있는 거 아잔 브람은 할 수 없다고 답한다. 스님은 정직해야 하니까. 아잔 브람이 먼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면 명상에서 나오는 멋진 체험과 깨달음이 일어난다. 내려놓으려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 몰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다이다.
 
모든 고통은 언제 이겨내도 이겨내야 할 짐
 
  청중 질문: 아잔 간하는 행복은 고통에서 온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아잔 간하: 고통이 일어나면 어떻게든 고통을 덜어낼 방법을 찾는다. 고통의 원인을 가진 사람은 법의 수행을 멈추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항상 알아차림과 지혜를 통해 고통을 극복하려고 할 것이다. 알아차림과 지혜를 통해서 고통을 극복할 수 있고 원인을 볼 수 있다. 여기 있는 모든 첨단기기(에어컨 카메라)들은 모두 고통에서 나왔다. 불편한 환경을 극복하려는 마음의 산물이다. 고통이 없었다면 현대도 삼성도 없었다. 고통에 감사해야 한다.
 청중 질문: 고통은 실재하는가?
 아잔 브람: 물론 고통은 존재한다.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여기 없을 것이다. 고통은 어리석음에서 약이 된다. 여러분이 우리 절에 와서 수행한다면 무릎이 아프면 움직이면 된다. 마루바닥에 앉을 수 없다면 의자에 앉으면 된다. 우리는 지금 느끼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혜국 스님 말씀처럼 깊은 명상에 들어간다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 몸이 사라져 버린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오직 남은 것은 마음이다. 이 지점에서 신체적 고통이 사라진다. 하지만 신체적 고통은 우리가 고통이라 부르는 것의 일부이다. 정신적 고통도 있다.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것에는 정신적 고통이 더 크다. 그런데 바로 이 정신적 고통에서 놓아버림이 효과가 크다.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몸과 마음이 있는데 이 둘은 분리돼 있다. 여러분은 몸을 놓아버리고 마음의 세계로 갈 수 있다. 마음의 세계로 들어간 후에는 다시 공의 세계로 갈 수 있다. 이런 발전이 일어날 때 사람들의 명상에 대한 관심은 커진다. 현재 서양에서는 알아차림 명상이 굉장히 인기가 있다. 이슬람교도도 명상을 한다. 이는 신체적 고통을 완화해주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도 증명이 됐다.
 
사본(원)1-13.jpg» 토론을 마친 뒤 아잔 브람 스님과 혜국 스님이 악수를 하고 있다.사본(원)1-13.jpg 
 
 혜국 스님: 그 고통을 언제 느끼나? 내 생각대로 안 될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선방에서처럼 가부좌 틀고 앉았더라면 편안했을 텐데, 지금은 의자에 앉아있으려니 고통스럽다. 간화선에서는 그 고통을 느끼는 것이 내 습관인지 마음도 느끼고 있는지 살핀다. 마음에는 고통이 없다. 고통을 느낄 줄 아는 놈이 누구인가? 이를 보여준 것이 화두이다. 일체의 모든 고통은 언제 이겨내도 이겨내야 할 짐이다. 화두공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고통 없는 자리를 보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는 그냥 차나 한 잔 마셔라
 
  청중 질문: 사회부조리 등이 많은데 명상과 참선을 해서 나만 바뀌면 돼나?
 아잔 브람: 일이 있을 때는 전념을 다해서 하고, 할 일이 없을 때는 그냥 내려놓아라. 영국군 4~5명이 2차대전 때 버마에서 일본군에 포위당했다. 포위를 뚫고 나가자고 생각했다. 그때 소대장이 차나 한 잔 마시자고 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어떻게 차를 끓여 마실 수 있나. 명령이니까 할 수밖에 없었다. 한 잔을 채 다 마시기 전에 누군가가 말할 때 “적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포위가 풀린 것이다. 첫번째 상황에서 나보다 많은 적을 맞서 싸운다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때가 내려놓을 때이다. 적군이 움직이면서 길이 열렸을 때가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때이다. 정치를 하든 회사에서 일을 하든 삶을 살다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있다. 그때는 그냥 차나 한 잔 마셔라. 그러나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는 전력을 다해야 한다. 오늘날 현대인은 기다리거나 내려놓거나 하는 것을 모른다. 삶의 성공은 이 두 가지 기술이 모두 필요하다.
 청중 질문: 생각은 어느 곳에서 나오는가?
 아잔 간하: 침묵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다. 살아있는 것에서 생각이나 두려움이 나온다. 죽으면 이것도 없다
 정선/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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