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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선배'의 폭력, 교수 되고 싶어 참았다"

 
[인터뷰] '명문대 악마 선배' 사건 피해자 A씨
 
| 2016.03.10 07:29:51

'인분 교수', '악마 동기생'에 이어 이번엔 '명문대 악마 선배'가 대중의 공분을 사고 있다. 잘 나가는 교수 아버지를 둔 명문 사립대 대학원생이 교수 취업을 미끼로 3년 넘게 후배 대학원생에게 가혹 행위를 일삼은 것.

'악마 선배'가 저지른 행각들은 믿기 힘들 정도다. 귓바퀴 모양이 변형될 정도로 수십 차례에 걸쳐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골프채로 온몸을 두들겨 팼다. 변기에 머리를 박게 하고거나 심지어 변기 물까지 마시게 했다. 이러한 가혹 행위는 학교, 카페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떨어져 있을 땐 영상 통화를 통해 기합을 시키기도 했다. 

 

악마 동기생 사건에 이어 이번 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이유는, 가해자의 잔악한 수법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단, 상습적 폭행에도 피해자들이 입을 닫을 수밖에 없던 이유가 더욱 충격적이다. 바로 '취업' 때문이다.  

 

지난 9일, '명문대 악마 선배' 사건의 피해자 A 씨는 <프레시안>과 만나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는 "워낙 교수 되기가 어렵다 보니, 편한 길을 가고 싶었다"며,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했다. "내 바로 옆에 '금수저'가 있고, 그 사람이 잘 되면 내 자리도 챙겨준다고 하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던 그의 고백은, '취업 전쟁' 속에서 '을'의 처지도 마다 않는 지금 청년 세대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준다.

 

 

▲A씨가 대학원 선배B로부터 구타당한 흔적. ⓒA씨

 


"차라리 나한테 질병이 있었더라면..." 

 

프레시안 : 가해자라고 지목한 그 선배와는 언제 처음 알게 됐나.

A : 2009년 학부 전공 수업에서 조모임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건 내가 대학원 진학 관련 상담을 요청하면서였다. B 선배 아버지는 다른 학교에서 잘 나가는 교수였고, B 역시 애초부터 교수할 뜻이 있었던 걸 알았던 터라 이것저것 물어봤다.

일적으로 손발을 많이 맞췄다. 2010년엔 주식 투자하는 사업을 같이 하기도 했고, 대학원 와서는 같이 논문 작업을 했다. 대학원에서는 지도교수가 도와줘야 실적이 잘 나오는데, 내 경우는 지도교수님과 원하는 주제가 서로 달랐다. 게다가 나는 영어를 잘 못해서 지도교수님이 원하는 만큼 속도를 내질 못했다. 그러던 차에 B가 나에게 같이 논문을 쓰자는 제안을 해서 지도교수님 몰래 둘이 논문 작업을 했다. B는 영어를 잘해서 B가 주로 영문 작업을 하고, 나는 한글로 논문 작업을 하다 보니 속도가 빨라져서 실적이 좋았다. 그래서 점점 더 지도교수와의 작업 대신 이쪽 일에 더 몰두하게 됐다. 


프레시안 : 마찰이 시작된 계기는? 
 

▲반복된 폭행으로 부풀어오른 귀. ⓒA씨

A : 대학원에 가면 할 일이 많다. 수업도 듣고 지도교수 일도 거들어야 하고, 학회 일도 해야 하는데, 거기다가 우리끼리 논문도 따로 쓰기로 했으니 업무량이 어마어마했다. 하루 수면 시간이 서너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피곤해서 할 일을 제 때 못 맞춘다거나, 조는 일이 몇 번 생기자 그때부터 괴롭힘이 시작됐다.

한두 시간 푹 자는 것도 아니고, 2~3분 눈만 감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많이 존다고,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때렸다. 그게 2012년 9월 정도부터였다. 만나면 학교에서건 카페에서건 가리지 않고 얼굴이며 팔다리며 때렸다. 손으로 때리기도 하고 골프채로도 때렸다. 변기에 머리를 박게 하거나 변기 물을 마시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자꾸 내가 조니까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때린 거라고 하니, 차라리 '나한테 (잘 조는) 질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서로 떨어져 있을 땐 휴대폰 메신저를 통해 거의 5분 간격으로 지금 하는 작업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내용이 중복돼도 졸았냐고 하고, 내용이 적어도 졸았냐고 했다. 내가 잠깐이라도 답이 없으면 졸고 있느냐면서 바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영상통화 할 땐 주로 기합을 시켰다. 처음엔 같이 있을 때만 기합을 줬는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영상 통화로 벌을 주는 것이었다. 머리를 바닥에 박는 이른바 '원산폭격' 자세 하기. 변기에 머리 박기 등을 했다.

 


영상통화를 많이 하다 보니 휴대폰 요금이 많이 나왔다. 6개월 치 영상통화 요금만 53만 원이었다. 요금이 많이 나와 부모님께 죄송하니 영상통화 시간을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일부러 더 많이 걸었다. 

 

"골프채로 맞고도, 바빠서 아픈 걸 생각할 겨를 없었다"
 

ⓒA씨와 B씨의 휴대전화 메신저 내용. ⓒA씨

프레시안 : B가 그렇게까지 '갑질'을 한 이유는 뭔가.

: 그 사람이 나보다 3살 많은 선배이기도 했고, 또 사업을 할 때도 그 사람이 대표로 등록돼있었다. 그래서 뭘 하든 둘 사이에는 상하관계가 성립됐다. 위계 서열 의식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ROTC(학생군사교육단) 장교 경험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나를 마치 병사 다루듯이 대했다. 통화할 때도 군대식으로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 대답할 때 목소리도 작으면 안 됐다. 왜 해야 하는지 반문하는 것도 싫어했다. 무조건 "예"라고만 해야 했고, 명령에 불복종하면 맞았다.

프레시안 : 폭행을 당하고도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나.
 
A :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바빠서 아픈 걸 생각할 겨를도, 화를 낼 겨를도 없었다. 골프채로 맞고 온몸이 땡땡 부어도 쉴 틈 없이 바로 카페 가서 작업해야 했다.

그리고 반항을 하면 더 맞았다. 나중엔 너무 힘들어서 두세 번 정도 연락을 완전 끊었은 적이 있다. 처음엔 달래더니, 나중엔 더 심하게 보복했다. 엄청나게 맞다 보니 연락을 끊으면 안 된다는 걸 기계적으로 학습하게 됐다.

 

 

"'해외파' 아닌 내가 교수를 할 방법이 없었다" 

프레시안 : 보도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 대부분이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왜 당하고만 있었을까'다. 왜 그렇게까지 참아야 했나. 

A : B를 통해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좀만 참으면 될 거라고 믿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교수 시장은 해외파를 선호한다. 유학을 알아봤는데,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닫고 포기했다. 그럼 국내 박사가 될 나로선 교수하기는 사실상 힘든 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도교수님이랑은 잘 안 맞았다. 반면, 선배랑 하는 작업은 성과가 잘 나왔다. 결정적인 계기는 B의 아버지 C 교수다. 언젠가 스포츠 경영 수업을 들었는데 꽤 흥미가 붙어서, B와 함께 이쪽 논문을 같이 쓰기로 했다. 그러다가 체육학과 교수인 C의 도움을 받게 됐다. 자기 아들과 작업을 한다고 해서 그런지 내게도 잘 해줬다. 아무래도 교수가 지도를 해주니 일하는 속도가 더 붙었다. 실적이 더 오르면서 점점 희망이 생겼다. 

또, 교수가 되려면 강의 경력도 필요한데, 그것도 B와 C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수 임용에 필요한 강의 경력이 최소 1~2년인데, 강사 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데 B가 자기 아버지 C를 통해 쉽게 강의 자리를 얻었다. 그걸 보면서 '나도 나중에 저렇게 강사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B가 하루는 C네 학교 한 연구실 앞에 서서 '여기가 나중에 네가 들어갈 자리'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분명 B한테 맞고 감시당하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자꾸 희망이 보이니까, 좀만 참고 버티면 나도 강사도 되고, 교수도 될 줄 알았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잘못된 판단이었다.

 

 

▲피해자 A씨와 선배 B씨가 나눈 휴대전화 메신저 대화 내용. ⓒA씨

 

 

"친구에게 폭행 사실 말할 시간도 없었다" 

 

프레시안 : B로부터 업무와 상관 없는 사적인 일도 강요받은 적도 있나.

: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데 매주 교회에 나갔다. 거기서 예배는 드리지 않고, 지하 식당에서 B 가족들 점심 식사 준비를 했다. B 아버지와 논문 관련 미팅을 해야 하는데, 그분이 워낙 바쁜 분이라 만날 시간이 일요일밖에 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 교회 목사가 모 대학 총장을 했던 터라, B가 나에게 교회에 올 것을 종용했다. '나중에 연이 될 거니 잘하라'며 점심 식사 준비도 강요했다. 

프레시안 : 주변에서는 이런 사실들을 몰랐나. 

A : 아마 학교에서 자주 보는 사람들은 눈치를 챘을 거다. 맞은 다음 날이면 귀가 퉁퉁 부어있었으니까. 어딘가에 괴로움을 호소하고 싶어도, 친구들에게 사정을 일일이 말할 수 없었다. 업무가 많아지면서, 약속을 잡고 친구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밥 먹는 중에도 수시로 보고해야 하고, 전화도 계속 받아야 하니까 친구를 만날 수가 없었다. 새벽 2시 넘어서 퇴근하면 그때부턴 온전한 내 시간이었지만, 그때도 친구를 만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업무에 차질이 없으려면 집에서 쉬어야 한다며, B는 나한테 퇴근 후 집에서 누워 있는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프레시안 : 가족들은 폭행 사실을 언제 알게 됐나. 

A : 내가 선배한테 맞고 다닌 걸 가족들이 아주 모르진 않았다. 처음엔 남자 선후배들끼리 투닥거리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큰 상처를 달고 오니까 부모님이 직접 B에게 문자를 보내 꾸짖었다. 아버지는 '군대 악질 상관처럼 굴지 말라'고도 하셨다. 근데 B는 "잘 모르는 일"이라는 식으로 답하거나, "서로 교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식의 기만적인 답장을 보냈다. 우리 형은 심지어 내가 집에서 B와 영상통화하는 걸 직접 보기도 했다. 형이 빨리 연을 끊으라고 했지만, 나는 "이번 작업만 마치면 끝내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작년 9월, 카페에서 정신없이 일하던 중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난 당연히 B선배일 줄 알고 군대식으로 응답했는데, 알고 보니 형이었다. 형이 화를 내며 당장 일 그만두고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때부터 가족들에게 사실을 다 털어놓고, 고소 준비에 들어갔다.

 

 

▲B씨가 A씨 부모와 나눈 휴대전화 메시지 내용. ⓒA씨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6개월 진단에 귀 수술 예정" 

프레시안 : 그동안 받은 육체적‧정신적 상처가 컸겠다. 

A : 아직도 여전하다. 곧 귀 수술을 받기로 했다. 맞은 데를 또 맞은 탓에 귀에서 피를 자주 뽑아야 했다. 피를 하도 많이 뽑다 보니 이젠 자동으로 피가 고여서, 접합하는 수술을 하는 것이다. 정신과도 다닌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6개월 진단을 받았다. 요즘은 좀 나아진 편이지만, 5분 이상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리고 B에게 맞았던 장소 가까이 있는 곳은 다 가기 싫다. 내가 다니는 병원 한 곳이 하필 B의 집 가까이에 있는데, 병원에 가면 괜히 혼자 두리번거리게 된다. 

프레시안 : 경찰 조사가 끝났다. B가 잘못을 일부 시인한 걸로 알고 있다. 사과는 받았나.

A : B 아버지가 몇번 찾아오고 연락을 했지만, 내가 일부러 계속 피했다. 마음 약해질까 봐. 경찰 대질신문할 때 돼서야 B를 처음 봤는데, 말로는 진심으로 사죄 드린다고 했다. 그런데 경찰조차 '사죄하는 마음이 안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영혼이 없는 말이었다. 합의 명목으로 공탁금을 넣었던데, 받자마자 돌려줬다. 지금 제일 우려하는 건 벌금형으로 끝나는 것이다. 법대로 처벌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A씨의 정신과 진단서. ⓒA씨



프레시안 : 인분 교수, 악마 동기생 보도를 보면 남 일 같지 않았겠다.

: 작년 인분 교수 사태가 이슈가 됐을 땐 한창 바빴을 때였다. 기사 같은 걸 볼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워낙 화제였으니 B랑 같이 얘기했는데, "우린 그 정돈 아니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악마 동기생'의 경우는 내 사례랑 너무 비슷해서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성적 학대가 없었다는 점 빼곤 취업을 미끼로 했다는 점이나 상습 폭행, 수시 보고 등 행태가 비슷했다. 

이런 일들과 엮여 내 사례도 언론에 보도되며 화제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언론 인터뷰를 하면 신분 노출이 될까 우려도 되지만, 한편으론 잘 됐다고 생각한다. 그쪽 집안이 워낙 재력도 있고 인맥도 넓다 보니, 내 사건이 은폐될까 봐 걱정이었던 참이었다.

 

 

'갑을 관계' 청산... "교수 포기 후회 안 한다" 


프레시안 : B 씨와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면서 사실상 진로가 막힌 셈인데, 후회되진 않나. 

: 후회하지 않는다. 당시엔 바로 옆에 '금수저'가 있고, '금수저'가 있고, 그 사람이 잘 되면 내 자리도 챙겨준다고 하는 데다가 실제로 성과도 보여주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땐 워낙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했다. 내 행동이나 판단에 대해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보니 잘못된 길을 왔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 교수 되는 게 어렵다 보니, 편한 길을 가고 싶어서 요령을 피우다가 이런 일을 당한 것 같다.

프레시안 : 앞으로 계획은? 

A : 학업은 완전히 중단한 상태다. 학적상으론 아직 휴학 상태인데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갈 마음도 없다.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서, 하반기에 입대하고, 전역하고 나면 취업을 준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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