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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 개처럼 끌려가던 그날 이후 40년, “동아일보는 죽었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3/17 09:27
  • 수정일
    2015/03/17 09:2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기자들 개처럼 끌려가던 그날 이후 40년, “동아일보는 죽었다”
동아투위 결성 40주년 해직기자들의 호통, “언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0명 쫓겨 나고 아무도 복직 안돼
 
입력 : 2015-03-16  17:29:11   노출 : 2015.03.16  18:38:18
 

조수경 기자 | jsk@mediatoday.co.kr 

 

1975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협회장 신호로 편집국 기자들은 물론 출판국과 방송국 사원 180여명이 편집국 한가운데로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외부의 간섭을 배제한다, 기관원 출입을 거부한다, 언론인 불법연행을 거부한다”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경영진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경고였다.  

동아일보 경영진들은 당시 완전히 박정희 정권에 기울어 있었다. 경영진은 이 선언을 외면하고 박정희 정권에 야합해 부당 인사를 내자 200여명이 동아일보 편집국을 점거하고 항의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경영진들은 1975년 3월 17일 폭력배와 용역을 동원해 이들을 강제로 밖으로 내쫓았다. 군대에서나 사용되는 탐조등을 비추면서 쇠망치와 몽둥이 등을 든 술 취한 폭력배들이 기자들을 시작으로 아나운서들까지 모두 끌어냈다. 

쫓겨난 언론인들은 강제해직에 굴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113명은 바로 “민중의 성원을 배신한 동아일보사는 오늘로 생명이 끝났다”, “자유언론 실천은 영원한 과제”라고 선언하면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그 이후 동아투위 결성 40년이 되는 2015년 3월 16일까지 오늘까지 단 한 명도 동아일보에 복직되지 못했다. 이들은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1987년 6월 항쟁을 비롯한 민주화와 말지 창간에 이어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 창간을 주도했다. 

박정희 정권의 동아일보 탄압과 동아투위 활동의 정당성에 대해 국가기관에서도 인정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동아일보에 “유신정권의 요구대로 언론자유수호 활동 기자들을 해고한 데 대해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 결정은 하지만 이후 법원에서 번번이 뒤집혔다. 동아일보가 진실화해위 결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내자 행정법원은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를 탄압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 뿐만 아니라 지난해 12월 대법원(신영철 대법관)은 동아일보 해직기자와 유가족 13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에서 14명에 대해서만 원고 자격을 인정하며 1·2심을 파기환송했다. 1·2심이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다“면서도 시효 소멸을 이유로 패소판결한 것보다 후퇴된 판결이었다.  

   
▲ 동아자유언론수호위원회가 결성 4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동아일보는 쓰레기다"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조수경 기자
 

동아투위 회원들이 16일 오후, 40년 전 쫓겨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사 앞에 모여 40주년 기념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은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지난 40년 세월에 대한 자부심과, 그럼에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 훼손된 언론자유와 동아일보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나왔다. 이들은 “언론이 살아야 나라와 민주주의가 산다”고 목소리 높였다. 

“전날 부인에게 ‘나하고 결혼해서 별 탈 없이 밥 굶지 않고 살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뭔 소리냐, 시집 잘 간지 알았더니 2년 만에 실업자 아내가 됐다’고 하더라. 새삼 40년이란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비록 펜과 마이크를 빼앗기고 길거리로 쫓겨났지만 자유언론의 초심만은 변치 않고 40년을 한결같이 싸웠다고 자부한다. 흔들리지 않고 권력에 빌붙지 않고 한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국민이 지켜봐주고 후배들이 성원한 결과다. 40년 세월은 결코 후회가 아니라 뿌듯함으로 다가오고 있다.”(정동익 전 동아투위 위원장)

“단식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폭력배들에 의해 축출될 거란 이야기가 있었다…오전 2시부터 불침번을 서고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2층에서 베란다로 빠지는 철문을 용접기로 잘라 (폭력배들이)들어왔다. 제가 맨 앞에 있었는데 개 끌려가듯 끌려서 밖에 내던져지는 순간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안경이 다 깨져 손바닥에 유리가 박혔다…그때 제가 자유언론 위한 싸움에 동참하지 않고 개인의 안위를 위해 제작에 참여하고 권력 굴종하는 삶을 선택했다면 아마도 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아이들과 역사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삶이 됐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싸움에 동참했고 이후 무수한 고통에 동참했던 것이 저로서는 다행이다.”(동아투위 막내인 정연주 전 KBS 사장)

현재 동아투위 위원 가운데 20명이 정보기관에서의 고문과 생활고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조민기·이의직·안종필·홍종민·김인한·홍선주·심재택·안병섭·우승룡·배동순·김성균·김덕렴·강정문·안성열·김두식·김진홍·이병주·이인철 ·성유보 위원이 유명을 달리했고, 지난 3일에는 송재원 위원이 눈을 감았다. 

   
▲ 동아일보 언론인들이 1974년 10월 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 (출처=동아투위)
 

동아투위가 40년 전 시작한 언론자유 수호 운동은 현재진행형의 운동이기도 했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은 16일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 신문발행 허가를 얻어 친일파 김성수가 국민주 신문을 사유화한 신문이다. 그 이후 온갖 아부를 다 해 마침내 전두환 정권에 굴종을 하다가 6월 항쟁으로 쫓아낸 이후에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만들기에 온 힘을 기울여 일본말로 찌라시라고 불리는 신문으로 전락했다”면서 “저희의 결론은 하나다. 자유언론, 공정방송이 실현되지 않는 한 민주화와 통일은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정동익 전 위원장도 “동아일보는 마침내 쓰레기 소리를 듣는, 언론도 아닌 쓰레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드시 해직언론인들의 진상을 규명하고 국민들과 해직언론인들에게 사죄하고 언론으로 거듭나는 날까지 싸울 것을 맹세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동아일보는 쓰레기다”란 구호는 외치기도 했다. 

민주화에 자신을 받쳐온 이해동 목사는 “심지가 없으면 촛불을 켤 수 없다. 동아투위는 언론의 심지고 불씨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 불씨가 우리나라를 온전한 참된 언론의 불길이 되는 큰 역할을 하리라 본다”고 말했다. 박석운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는 “주류언론, 조중동·종편은 쓰레기 수준을 넘어 일종의 범죄가 되고 있다. 언론환경을 올곧게 세우고 공정언론을 실천하는 일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서민들의 삶을 지키는 필수적인 선결 조건”이라고 말했다. 김동훈 전국언론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도 “동아투위의 한 분 두 분이 저희 곁을 떠나고 있다. 후배들의 손으로 동아일보 해직사태의 진상을 시급히 규명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기자회견문에서 “동아투위는 영원하다. 우리는 1974년 10월 24일에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체제’인 박근혜 정권에 맞서서 자유언론과 공정방송을 되살리기 위한 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현역 언론인들과 언제나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는 동아일보 기자들
 

한편, 기자회견 이후 열린 40주년 기념식에는 동아투위 위원들과 유족들, 함세웅 신부, 백기완 선생 등이 참석했다. 지난해 고인이 된 성유보 선생의 아들 성동모씨는 이 자리에서 기억은 안나지만 사진을 보면 내가 2살 때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있었더라면서 아버지 장례를 도와준 동아투위 위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아래는 동아투위 성명.

동아투위는 영원하다 동아일보는 죽고 있다

내일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가 결성된 지 4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75년 3월 17일 깊은 밤, 박정희 정권과 야합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편집국과 방송국에서 부당한 인사에 항의하며 단식을 하거나 농성을 벌이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113명을 폭력배들의 손을 빌려 거리로 쫓아냈습니다. 바로 그 113명은 그날 오후 “민중의 성원을 배신한 동아일보사는 오늘로 생명이 끝났다” “자유언론 실천은 영원한 과제”라고 선언하면서 동아투위를 결성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동아투위 위원들은 ‘자유언론’이라는 깃발을 단 한 순간도 내린 적이 없습니다. 강제해직과 투옥, 정보수사기관의 고문과 생존권 박탈 따위에 굴복하지 않고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의에 충실하게 이바지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지금까지 동아투위 위원 스무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자리에 누워 천수를 다한 이는 거의 없습니다. 감옥이나 생활전선에서 얻은 난치병, 고문 후유증, 정신적 압박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로 고통스런 죽음을 맞은 것입니다.

우리는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저절로 동아일보사에 복직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1979년 그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한 뒤, 이듬해 ‘서울의 봄’에 잠깐 동아투위의 눈치를 살피던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이른바 ‘신군부’가 5ㆍ17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자 아예 동아투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바라기처럼 권력을 추종하던 동아일보사는 2007년과 2012년 대선에서는 이명박ㆍ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습니다.

동아투위는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시기에 행정부와 국회가 복직과 명예회복, 그리고 배상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동아일보사는 노무현 정부 때 구성된 국가기구인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1975년 3월의 대량해직에 관해 2008년 10월에 내린 ‘결정’을 외면했습니다. 진실화해위는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광고탄압을 가했고,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들을 강제해직 하도록 압박했다는 사실을 여러 증거와 정황을 통해 밝혀낸 뒤 정부와 동아일보사에 대해 명예회복과 배상을 권고했으나 동아일보사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입니다.

후안무치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진실화해위 결정은 ‘허위’라고 주장하면서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다가 거듭 ‘각하’ 판결을 받은 끝에 2013년부터 행정소송 1심과 2심에서 ‘승소’한 뒤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합작’해서 113명을 폭력으로 추방한 사실은 지난 40년 동안 역사적 진실로 굳어져 있는데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사법정의와는 거리가 먼 재판부가 내린 승소 판결을 바탕으로 “동아투위는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우리는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동아투위가 아닙니다. 동아일보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1975년 당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그 어떤 매체도 근접할 수 없는 ‘자유언론의 보루’이자 광고와 판매에서도 가장 앞서가던 언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동아일보는 어떻습니까? 대표적인 보수신문들 가운데서 ‘3등’이라는 굴욕을 감수하면서, 채널A와 함께 대중이 믿을 수 있는 진실보다는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조작된 거짓을 전파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아일보 사장 김재호 씨를 비롯한 경영진에 경고합니다. 당신들은 초대 사주 김성수와 그 추종자들이 1920년 봄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라는 미명 아래 내준 신문발행권에 힘입어 ‘민족지’를 표방하면서 ‘국민주주’를 모집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김성수 일가는 ‘국민신문’을 교묘한 방식으로 사유화한 뒤 족벌언론으로 둔갑시켜버렸습니다. 김성수에서 아들 김상만, 손자 김병관, 증손자 김재호로 이어지는 세습 족벌체제는 조선일보사와 더불어 한국 언론 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경영진으로 기록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동아일보사는 노무현 정부 때의 법적 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에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것을 뒤엎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김성수의 친일매국 행각이 여러 쪽에 걸쳐 명기되어 있는데도 그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들고 있는 것입니다.

동아투위는 영원합니다, 우리는 1974년 10월 24일에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유신체제’인 박근혜 정권에 맞서서 자유언론과 공정방송을 되살리기 위한 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현역 언론인들과 언제나 함께 가겠습니다.

2015년 3월 16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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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이슬람의 변화

 
주원준 2015. 03. 16
조회수 102 추천수 0
 

 

 

우리가 이슬람 세계를 서술할 수 있을까 
- 이슬람의 변화와 우리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biblicum@icloud.com

*2015년 2월23일 격월간 공동선 원고

 

 

1. 들어가며
올해 세계는 샤를리 엡도 총격 사건(Charlie Hebdo shooting)으로 시작했다. 1월7일 오전 11시30분경, 쿠아쉬 형제는 자동화기로 50여발을 쏘고, ‘알라 후 아크라신은 크시다'고 외쳤다. 경찰관 2명을 포함하여 11명이 사망했다. 그들이 알 카에다(AlQaeda) 예멘 지부 소속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1월9일 프랑스 경찰 특공대가 두 명을 사살했다. 
사흘만에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세계가 들끓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당시 필자의 마음에는 ‘이슬람 세계가 크게 변화하는 과정’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느낌이 왔다. 그리고 서너가지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마침 공동선에서 그 생각을 서술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린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밝힐 것이 있다. 필자는 이슬람 전공자가 아니다. 구약학과 고대근동학을 공부한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다. 지금의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터키 등이 ‘헬레니즘화 - 그리스도교화 - 이슬람화’되기 이전의 문명과 언어를 공부했다. 이렇게 ‘공부하는 지역이 겹치는’ 인연으로, 나름대로 꾸준히 이 지역에 대해 읽고,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고, 이따금 토론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10년이 넘는 ‘관찰자의 시선’ 쯤으로 보아 주시면 좋겠다. 논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두런두런 이야기하듯이 적어 보려고 한다. 당연히 반론과 토론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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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을 받았던 날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 앞의 상황. AP/뉴시스


2. 도식과 눈치 
샤를리 엡도 총격 사건 이후, 솔직히 말하면 국내의 논쟁은 재미가 없었다. 거칠게 표현해도 된다면, 좌파는 도식적이었고 우파는 눈과 의지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일부 좌파 논객은 식민지 담론에 머물러 있었다. ‘유럽은 제국주의, 이슬람은 피지배자’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식민지를 경험한 민족으로서 이슬람의 울분에 공감하고, ‘윤봉길, 신채호, 김구 모두 무장론자였다’는 식의 옹호론이 나왔다. 
필자는 이런 비교가 정교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생각해 봐도, 윤봉길, 안중근 등을 쿠아쉬 형제와 비교할 수 없다. 첫째,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왕족이나 최고 권력자를 직접 겨누었다. 3류 풍자 잡지를 급습하고 만세를 외치지도, 도주하지도 않았다. 둘째, 쿠아쉬는 ‘동양평화론’ 등을 작성할 수준이 아니었다. 김구 등은 아시아의 미래를 위해 상당한 비젼과 철학을 제시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런 도식적 견해를 ‘투사projection)라고 느꼈다. 투사는 실재를 왜곡하는 안일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필자가 과문한지 몰라도, 우파 쪽에는 읽을 만한 글 자체가 없어 보였다. 가능한 많은 정보를 빨리 모아서 주판알을 튕기는 인상도 일부 받았다. 괜찮은 하드웨어를 갖춰놓고도 공격적으로 사용할 패기가 없는 기술자 같았다. 의지 없는 눈치. 미안하지만 그렇게 보였다. 


3. 이슬람을 주어로 말하기  
한국에서 읽은 글의 대부분은 이슬람을 주어로 말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샤를리 엡도를 주어로 문장을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테러리스트를 주어로 문장을 짓기도 쉽다. 대개 이런 문장이 나온다.

 

‘샤를리 엡도는 풍자가 지나쳤다.’ 등 
‘테러리스트의 폭력은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등

 

두 문장을 이어 복문을 만들기도 어렵지 않다. 대개 논쟁은 아래의 두 입장으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샤를리 엡도의 풍자는 지나쳤지만, 테러리스트의 방법은 절대 허용될 수 없다.’ 
‘테러리스트의 폭력은 허용될 수 없지만, 샤를리 엡도의 풍자는 분명 지나친 것이었다.’

 

국내의 논쟁은 이 두 복문의 조건절과 주절의 주어가 누구냐에 따라 줄세우는 듯 했다. 그러나 필자에게 두 문장은 거의 동어반복이고 지루했다. 주어를 그리스도교로 해 봐도 술어는 어렵지 않다. 한국인으로 해 봐도 쉽다. 
그런데 이슬람을 주어로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 샤르리 엡도 총격 사건 앞에서 ‘이슬람은 ... ...독자는 어떤 문장을 지으실 수 있으신가? 우리는 어떤 술어를 택해야 할까?
이슬람을 주어로 말한 글은 소설가 장정일이 유일한 것 같다. 그는 한겨레 신문 2월 4일자 “‘이슬람근본주의’와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에 대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반가운 견해다.

 

결코 이슬람은 약자가 아니다. ... 이슬람은 서구를 향해 자신을 아이 취급하고 예외로 다루어 달라고 더는 징징거리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이 진정 유서 깊은 역사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들이 길러온 문화의 힘으로 풍자와 조롱에 맞서야 한다.

 

앞으로는 이슬람을 주어로 말해야 할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독서와 토론이 늘지 않는다면, ‘도식파’와 ‘눈치파’의 글만 늘어갈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는 이슬람 세계의 상황과 실체를 정확히 보고 우리의 눈을 갖춰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생각이다.


4. 범이슬람 주의의 종말
이슬람 전문가인 이희수 교수는 다양한 인터뷰 등을 통해 이슬람 세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범이슬람주의는 사라졌다. 무슬림들은 개별 국가와 부족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경쟁한다.’ 필자는 이 관찰에 찬성한다. 
범이슬람주의는 없다. 전체 이슬람 세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 카에다, 탈레반, ISIL, 보코 하람(Boko Haram) 등 과격파 원리주의 단체가 ‘이슬람의 승리’를 위해 투쟁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무슬림을 대표하기는 커녕, 이슬람 세계의 골칫덩이다. 
필자의 눈을 끈 문장이 있었다. 올해 2월 3일, ISIL은 요르단 조종사 모아즈 알-카사스베(Moaz alKasaesbeh)를 화형하는 끔찍한 필름을 전세계에 보냈다.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는(Abdullah II) 즉시 보복했다. 그 때, 요르단군은 전투기에 실을 폭탄에 이런 구호를 썼다. “너희들은 이슬람이 아니다.” 
그렇다. 범이슬람 주의는 없다. 무슬림이 무슬림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 서로 옳은 신앙(orthodox)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이런 갈등은 시아와 순니를 넘나든다. 시리아 반군과 시아파 무슬림인 이란이 ISIL을 상대로 작전을 벌이고 있다. 이 세 당사자는 모두 무슬림들이다. ISIL을 무찌르는 작전에 가장 원리주의적인 사우디와 가장 세속화된 터키가 협조한다. 흥미롭게도 암암리에 미국과 이스라엘도 참여하고 있다. 각자의 생존을 향해 무한경쟁하는 가운데 비무슬림 국가와도 협력하고 교류하는 상황은 어쩌면 지구촌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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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국가(IS) 지도자 알 바그다디. 유튜브 동영상 캡쳐


5. 무슬림들의 경쟁
사실 무슬림들의 경쟁은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 이슬람의 음식 규정인 할랄(Halal)을 예로 들어 보자. 그 기원은 구약성경의 율법인데, 현재 유다인들은 코셰르(Kosher)라고 한다. 코셰르와 할랄의 기본적 개념은 동일하다. 거룩한 백성은 온전한 것만을 합당한 방식으로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본 개념 뿐 아니라 내용도 엇비슷하다. 쇠고기를 생산하는 경우, 대개 이런 내용이 포함된다. 송아지부터 합당한 환경에서 적절히 길러야 하고, 너무 어린 것을 잡아서도 안되고, 죽일 때는 고통을 최소화해야 하며, 피를 온전히 빼고 고기만을 취하고, 신에게 바치는 의례를 행하고, 내장 등 어떤 곳에서도 기형이 발견되면 안되고, 가장 위생적으로 처리하고, 유통과정에서도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점 등이다. 
할랄은 종교 규정이기도 하지만, 각국의 큰 산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큰 무역 장벽으로 기능한다. 한국의 식품이 이슬람 세계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할랄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이슬람 각국은 기후나 전통에 따라 조금씩 다른 할랄 규정을 갖고 있다. 이를 통합하여 국제 할랄 표준을 만들자는 기구가 있는데 The International Halal Integrity Alliance, 줄여서 IHI Alliance라고 한다. 만일 국제 할랄 표준이 정해지면, 그 경제적 효과는 막대하다. 이슬람 인구는 13억이나 되지 않는가. 현재 이슬람 각국은 자국의 전통과 산업에 유리하게 이 기준을 이끌려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 등 비무슬림 국가들까지 외교전에 참여한다. 막대한 이익이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랄 규정을 둘러싸고 정작 ‘종교’나 ‘믿음’은 부차적이 된 듯한 느낌이다. 이슬람 국가들의 무한 경쟁이다. 이 점이 나누고 싶은 둘째 생각이다.


6. 경전은 편집되었는가
이렇게 현대 세계에서 종교는 세속을 이끌기 보다 세속에 끌려다닌다.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기 보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공통적이다. 그런데 이슬람 신학은 아직 한참 뒤쳐진 듯 하다. 이런 현상은 큰 도전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선 경전만 놓고 보자. 
유일신 종교에서 경전은 큰 권위를 지닌다. 유일한 신이 역사에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계시revelation)라고 하는데, ‘드러내다reveal)는 의미다. 그런데 그 계시는 말을 통해 주어졌고 책에 쓰여있다. 그러므로 그 책은 거룩한 책, 곧 ‘성서聖書, Holy Scripture)다. 성서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말씀이므로, 한 글자 한 글자에 하느님의 숨결이 들어 있다. 누구라도 한 획도 손을 댈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성경(Bible)이나, 유다교의 토라(Torah)나, 이슬람의 쿠란(Quran)이나, 거룩한 책이요 절대적인 책이다. 
하지만 현재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주류 신학은 성서가 인간 역사에서 수없이 편집된 사실을 인정한다. 20세기에 교황청에서 나온 성서해석에 대한 문헌들은 이런 편집 사실을 적극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런 긍정은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성서 본문에 제한되던 눈을 더 크게 키운 것이다. 성서 본문의 모든 글자에 하느님의 숨결이 붙박혀 있지만, 수천년에 걸친 성서 본문의 발생과 전승과 해석 단계에서 하느님께서 다양하고 풍부한 방법으로 비범하게 일하셨음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더 큰 시각의 신학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신학과 상생한다.


성서가 편집되었다는 신학은 배타적 신학을 물리치는데 큰 효과를 발휘했다. 성서의 편집과 전승에 대한 다양한 가설과 추론이 가능해졌다. 성서의 일부 구절을 본래의 맥락에서 분리시키는 일도 가능하고, 새로운 맥락에서 성찰하고 해석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런 배경에서 도발적 질문도 이어졌다. 그리스도교의 시작은 예수일까 바오로일까. 유배 이전의 이스라엘인은 메시아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신학 수업 시간에 상상력과 토론을 자극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그리스도교와 유다교 내부에도 근본주의가 존재한다. 그들은 성서의 절대 권위를 배타적으로 해석한다. 성서가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개신교 일각에서 제기하는 ‘축자영감설' 곧 성경 한 자 한 자에 하느님의 영이 농축되어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성경의 한 획도 손을 댈 수 없고, 모든 낱말과 구절은 현재의 그 자리에 그 맥락에서만 읽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전제에서는 다채로운 신학이 피어나기 힘들다. 철학과 문학은 물론이고 자연과학도 성서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신학이 자리잡는다.
현재 이슬람의 쿠란 연구는 대개 이런 경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재 이슬람권의 분위기에서, 쿠란이 편집되었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 쿠란의 모든 구절은 본래의 그 문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도발적 질문이나 본래의 문맥에서 벗어난 해석은 금지된다. 배타적 신학이 자리잡기 좋은 조건이다.


7. 이슬람 신학의 발전
그러나 필자는 이슬람 신학의 발전에 퍽 긍정적이다. 역사를 길게 봤을 때, 이슬람 문명은 새로운 신학을 펼칠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새로운 이슬람 신학 창출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고 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들어 보겠다. 

 

첫째는 국가별 자유 경쟁의 분위기이다. 이슬람 국가들은 더이상 이슬람이라는 큰 세계의 하위 시스템이 아니라, 국가별로 고유한 시스템을 구축하여 무한 경쟁하는 주체다. 이는 국가별로 종교적 권위의 형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국가나 언어와 민족에 따라 새로운 신학적 사고가 형성되기 좋은 조건인 것이다.


둘째는 테러리스트들이 명분에 시급히 대응할 필요다. 사실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주장은 정말 형편없다. 테러에 참여해서 목숨을 잃으면 내세에 70명의 부인이 생길 것이라는 둥, 모든 여성들에게 글자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다는 둥, 중세적 칼리프 국가를 설립한다는 둥, 여성 전쟁 포로를 성적 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둥의 논리는 조악하고 저열하다. 그들은 세계 종교이자 인류의 문화적 자산인 이슬람의 정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이런 근본주의에 대응하는 신학적 노력은 이슬람 내부에서 이미 진행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국가와 부족에 따라 형편이 다르다. 전선을 맞대고 전쟁을 치르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조금 느긋하게 바라보는 쪽도 있다. 세속화된 지구촌 세계를 수용하여, 이슬람 세계의 개혁으로 연결시키려는 쪽이 있는가 하면, 전통을 더 강화시키는 쪽에서 문제를 이해하는 쪽도 있다. 유럽과 북미의 대학에 설치된 이슬람 학과에서도 점차 한 마디씩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른바 ‘서양 무슬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 속에서 불가피하게 종교의 자유, 타종교와의 대화, 세속화, 여성, 인권, 발전, 평등, 세계화 등의 낱말이 성찰되고 토론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견해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신학적 개혁 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종교나 종교적 격변은 피를 크게 불렀다. 필자는 이슬람 세계 내부의 격동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유럽의 예를 들자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독일은 30년 전쟁을 치렀다. 한 지역의 한 세대를 온전히 전쟁에 투입하고서야 일단락되는 일이었다. 그 결과는 유럽의 국민국가가 출현한 것이다. 그런 역사가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날 듯한 느낌이다. 우리는 긴 변화의 초입에 사

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나누고 싶었던 셋째 생각이다.


8. 나가며: 이슬람의 존중 
지금까지 간략하게 서술한 내용은 인문학적으로 거시적 안목을 요구한다. 13억의 문명권이 변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슬람은 이런 문제에 대해 충분히 자체적으로 대응할 충분한 역량을 축적한 문명이다. 물론 고통과 인내가 요구될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의 우리에게는 무엇이 요구될까? 필자는 우리에게도 인내와 꾸준한 공부가 요구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눈으로 관찰하고, 우리의 감으로 맥을 짚어서, 우리의 언어로 요약할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다. ‘13억의 현상’을 관조할 실력은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다수의 종교가 큰 탈 없이 살아온 땅이라고 자랑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참조사항이 될 수 없다. 서술어를 스스로 짓고, 문장을 쌓아 올려 참조할 수 있는 본문, 영감을 주는 대화를 작성해야 한다. 낡은 도식에 따르거나 남의 눈을 빌리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한다. 우리는 그 서술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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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준
가톨릭 학생회를 거쳐 평신도 신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근동학을 공부하고, 현재 그리스도교 원천 문헌 번역에 힘쓰는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며 서강대 종교학과와 신학대학원에 출강한다. 히브리 성경과 고대 근동 문헌을 읽으며 살고 있다. <우리 인간의 종교들> 번역에 참여했고, <구약성경과 신들>, <우가릿어 문법>, <우가릿어 사전>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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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전략적 모호성’? 옹색한 피난처에 갇힌 정부

 
미중 연신 견제 펀치, 그러자 몸 숨기고 옴짝달싹 안 하는 정부
 
육근성 | 2015-03-16 17:35:3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THAD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 문제를 놓고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이 팽팽하다. 평택 등을 세 곳에 사드를 배치하려는 미국과 어떻게든 이를 막으려는 중국이 한국정부를 압박하는 모양새가 점입가경이다.


미국과 중국 연신 견제 펀치 날려

미국과 중국이 박근혜 정부를 향해 연신 견제 펀치를 날리고 있다. 이런 신경전이 노골화된 건 지난해부터다. 작년 9월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이 미국을 방문한다. 중국과 마찰을 빚을 우려가 있으니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미국정부에게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이 “본국에 사드 한국 배치를 요청했다”는 한미연합사령관의 발언이 나오자 크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미국정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김 실장은 헤이글 국방장관은 물론 케리 국무장관과의 면담조차 하지 못한 채 귀국해야만 했다. 미국정부가 사드 배치를 적극 밀어붙이지 못하는 박근혜 정부에게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중국정부는 김 실장의 미국 방문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김 실장 방미 직후 중국 외교부는 주중 한국대사관에 “미국이 사드를 한반도에 배치할 경우 중국은 한국을 상대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며 “친한 노선과 경제협력 등에 대해서도 중국의 입장을 바꿀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워크 미 국방부 부장관은 “사드 배치와 관련해 한국정부와 협의 중”이라고 밝혀 이면 논의가 진행 중인 사실을 공개했다.

올해 들어 신경전은 더 불을 뿜는다. 미국은 사드 배치를 아예 기정사실화 하려들고, 중국은 사드 배치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며 반발 수위를 높인다. 그러자 한민구 국방장관이“사드 배치는 전략적 모호성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실토했고, 청와대도 이 개념을 한국정부의 입장으로 공식화했다.


‘전략적 모호성’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전략적 모호성’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지난해 가을 미국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시기를 무기한 연기해주는 대신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반대급부로 요구(워싱턴 한미연례안보회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작권 연기가 관철된 걸 보면 한국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미국의 요구에 대해 긍정적 사인을 줬다는 얘기가 된다. 청와대의 ‘전략적 모호성’은 사드 배치 반대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중국의 반발을 의식한 표정관리쯤으로 해석하면 맞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전략적 모호성’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미국 정부의 독촉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며, 조급증마저 보일 수도 있다. 중국정부의 반발이 갈수록 커져가는 판에 시간을 끌다가는 상황이 꼬일 수 있다는 불안감도 적지 않을 테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해 주한미군이 일방적으로 한반도에 사드를 배치할 수도 있다.

중국은 어떻게 나올까. 박근혜 정부가 사드 배치에 긍정적이라는 걸 모를 중국이 아니다. 또 미국이 한국정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터, 어떻게든 사드를 막겠다고 결기까지 내보인 중국으로서는 미국의 압박 강도에 비례해 반발 수위를 끌어올릴 게 분명하다. 사드가 한반도에 배치된다면 중국의 한국정부에 대한 경제제재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새누리당이 사드 문제에 적극 나서자 중국과 미국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16일 오전에는 류젠차오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가 이경수 외교부 차관보를 만나고, 17일에는 대니얼 러셀 미국국무부 차관보가 이 차관보와 면담을 갖는다. 사드 문제를 논의하기위해서다.


옹색한 피난처에 숨어 옴짝달싹 안 하는 정부

정부가 하는 짓이 한심하고 답답하다. 쉬쉬하며 공론화를 꺼린다.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비좁은 ‘임시 피난처’에서 옴짝달싹 안 하고 가만히 있으려 한다. 이게 상책이라니 기막힐 노릇이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우리가 잘 하고 있으니 딴말하지 마라’는 투다. 아무튼 ‘잘하는 척’은 참 잘하는 정부다. 우스개 얘기가 생각난다.

맡아 놓고 꼴찌를 하는 농구팀이 있었다. 코치가 선수들에게 소리쳤다. “우승했던 팀인 척 자신감을 가지고 시합에 임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독려했다. 하지만 실력이 형편없다보니 또 시합에서 졌다. 그러자 코치가 화가 나서 “왜 졌느냐”며 선수들을 다그쳤다. 그 때 한 선수가 코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팀이 이긴 척 하시지요!”

잘 하는 척하며 옹색한 피난처에 옴짝달싹하지 않고 있는 박 대통령이 묵상할 글귀가 있다. 3년 연속 국가조찬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니 성경에 나오는 일화를 소개하겠다.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었다. 딱한 과부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며 재판장을 찾아가 간청한다. 인성이 못된 재판장이 과부의 얘기를 들어줄 리 없었다. 하지만 과부는 계속 재판장을 찾아갔다. 그러자 재판장은 얘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계속 자신을 번거롭게 할 거라는 생각에 과부의 청을 들어주게 된다.


미국에 ‘불가’ 이유 설득해야, 못하면 덫에 갇힌 신세

과부처럼 재판장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 박 대통령이 나서 미국정부를 적극적으로 설득하라는 얘기다. 사드를 배치하면 한중 경제관계가 뿌리째 흔들릴 게 자명한데, 미국이라면 타국의 큰 이익과 자국의 무의미한 이익을 위해 나라 경제가 엉망이 되는 걸 감수하겠냐, 이런 식으로 계속 설득하란 얘기다.

사드는 완성품이 아니라 시제품에 가깝다. 1990년 개발에 착수했으나 수차례 실패와 시행착오로 2013년에야 비로소 미국정부가 록히드마틴과 도입 계약을 체결해 현재 3개 포대만 배치된 상태다. 단 한 차례도 실전에 사용된 적이 없는 ‘테스트용’에 불과하다. 한반도에 배치된다 해도 ‘완성된 무기체계’가 아니라 ‘실험용’일 수밖에 없다.

솔직하게 입장을 피력하며 성경 속 과부가 했던 것처럼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사드를 한반도 에 배치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도록 미국을 집요하게 설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미중 양국의 압박에 벗어나며 우리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길이다. ‘전략적 모호성’에 갇혀 덫에 걸린 신세가 돼서는 안 된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2&table=c_aujourdhui&uid=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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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대 중러의 견제와 협력구도 속 결단 요구받는 한국외교

 
강태호 2015. 03. 16
조회수 208 추천수 0
 

푸박1.jpg  

지난 2013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푸틴 박근혜 대통령 정상회담

 

 또 다른 결단이 요구되는 5월의 모스크바 전승절 행사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 체제) 배치와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참가 문제는 미, 중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안이다. 한국은 지금 이 서로 충돌하는 두 개의 현안을 놓고 결단을 요구받고 있다. 정부관계자는 “사드는 안보측면에서, AIIB는 경제실익 측면서 결정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둘다 내부적으로 검토를 끝내고 결정을 내렸으나 눈치를 보며 공식발표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애기도 나오고 있다.  이는 사드에 대한 중국의 반발을 AIIB 참가로 무마하려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그 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사안을 연계시키는 이런 결정은 자칫하면 미중 모두에게 ‘꼼수’로 비춰질 수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사드는 애초부터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군사적 조처라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쟁점은 중국이 제기하는 안보위협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입장을 보일 것인가다. 반면에 AIIB 참가는 지배구조, 의사결정의 투명성 등 문제라면  말 그대로 그런 문제가 해소될 수 있느냐의 문제다. 흥정하듯이 ’주고 받기’할 사안이 아닌 것이다. 

 이들 문제처럼 쟁점현안으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외교가 결단을 요구받고 있는 보다 더 근본적인 현안이 존재한다. 다가오는 5월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2차대전 승전 기념일(전승절) 행사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 위원장이 참석 의사를 밝혀 놓은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박 대통령의 전승절 행사 참가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진전과 남-북-러 삼각협력을 한 단계 진전시키기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한채 지난 7년여 뒷걸음질 치고 있는 남북관계의 극적인 전환도 기대해 볼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 정세의 분수령이 될 수 있는 사안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거 아닌가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통상 정상의 해외 방문은 보통 2달 전에는  조율되고 최소 한달 전에는 통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한러 경제협력의 한계와 잠재적 가능성
 
  우선 신범식 서울대 교수(러시아)가 지적하고 있듯이 임기 3년차(임기 내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를 맞는 박근혜 정부와 안팎의 위기를 맞으며 경제회생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푸틴 정부에게 2015년은 매우 중요한 시기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무시돼 왔지만 한국경제가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적 측면만 보더라도 러시아와의 협력은 전략적 의미가 있다. 
  정여천 대외경제정책 연구원에 따르면 수교 이래 25년의 대부분 기간 동안 한·러 간 경제교류는 빠르게 성장했으며, 러시아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의 무역상대국 순위에서 10위로까지 부상하였다.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던 한·러 간 무역은 국교 수립을 전후하여 급증하기 시작해  1990년대 중반에  30억 달러까지 성장했으며, 2011년에는 200억 달러를 넘어서 2014년에는 257억 달러를 기록했다. 수출의 측면에서 보면 러시아는 한국산 자동차 수출에서 2번째 시장이다.  수입의 측면에서 2000년대에 들어서 러시아로부터의 수입품 중에서 가장 중요해진 것은 원유이다. 러시아산 원유의 수입은 1990년대 말에 사할린에서 원유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시작되었는데, 오늘날 한국의 러시아로부터의 수입 품목 중에서 원유는 단일품목으로 금액 기준 4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대러시아 수출에서 자동차 및 관련 부품의 수출을 합친 비중과 유사한 수준이다. 러시아산 원유의 수입이 꾸준히 증가한 결과 최근까지 한국의 전체 원유 수입액 중에서 러시아산 원유의 비중은 약 5%까지 확대되었다. 2009년부터 러시아에서 액화천연가스(LNG) 수입도 시작됨에 따라 한국 경제의 러시아산 에너지자원에 대한 수입의존도는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무역규모만 보더라도 상대적인 순위가 아닌 절대액으로 보면 러시아는 한국의 핵심적인 무역상대국이 못된다.  한국의 총 무역규모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2% 내외에 머물고 있다.  실제 양국간 경제관계는 실제로 도달할 수 있는 잠재적인 수준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근에 수행된 한 연구 (정여천 외, 『전략적 동반자 시대의 한러 경제협력』, 2010,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는 2000년대에 기록되었던 한-러 간의 무역 규모가 당시의 두 나라의 경제적 조건을 토대로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규모의 40~50%에 불과했던 것으로 평가된 바 있다. 게다가 이런 경제교류마저도 최근 1~2년 사이에는 러시아 경제의 침체로 인해 증가 속도가 대폭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작년(2014년)의 경우, 한국의 대러시아 수출액은 전년 대비 9% 정도 감소했고 이로 인해 한국의 대러시아 무역수지 적자폭이 확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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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울란우데에서 열린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러-북 관계의 발전과 남-북-러 삼각협력의 가능성
 
  그에 반해  2011년 북러 정상회담 이후 최근 들어 두드러지고 있는  북러 협력관계는  전문가들 사이에 양국 관계의 르네상스 시기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신범식 교수는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기 몰리는 상황과 더불어 이런 러시아의 필요에 북중관계가 소원해진 데 따른 북의 필요가 서로 맞아 떨어지면서 양국관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지정학적 분석 보다는  이런 협력관계가 공유하는 전략적 이익을 바탕으로 중기적으로 상당한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에 입각해서 바라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북과 러가 미국이라는 비우호 세력을 상대해야 하며, 국제정치적 고립을 탈피해야 하는 동일한 모티브를 가지며,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지나친 영향력 확대에 대한 우려도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와 북한의 협력은 믿기 어려울 정도의 규모와 속도를 보여주고 있다.  두나라는 지난해 10월 250억달러 규모의 자원개발과 철도망 현대화를 연계시킨 ‘포베다(승리) 프로젝트’에 합의한 데 이어 북-러는 리수용 외무상,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그리고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로 최룡해 북한 정치국 최고회의 상무위원의 잇딴 러시아 방문을 통해 합동군사연습을 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 총참모장은 지난 1월30일(현지시간) 러시아 군사정책 방향을 밝히며 북러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전승절 행사가 열리는 5월 9일 김정은 제1위원장의 모스크바 방문을 예고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상호 이익이 되는 부분을 면밀히 검토하여, 무역 수준을 조속히 10억 달러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그 내용과 방식이다. 승리 프로젝트를 들여다보면  러시아가 북의 철도를 보수하고 희귀자원 광산을 개발하는 역할을 수행하면 북은 이에 희귀 광물로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이 1단계라면 러시아는 그 대금을 다시 북의 산업시설을 현대화하는 사업에 재투자하고, 이 현대화 사업의 파트너로 러시아 기업이 참여하는 사업 진행 구도를 진행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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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극동 코즈미노항의 원유저장 시설

 

  이를 통해 러시아는 자국 기업의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고, 북은 자국 내 산업 시설의 현대화를 진행시키는 윈-윈 협력이 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제협력을 위한 러시아연방 상공회의소 산하 ‘기업협의회’가 2월4일 발족했다.러시아 외무부, 경제개발부, 극동개발부, 주러 북한 대사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설립된 ‘기업협의회’의 주요과제는 러시아 기업 및 단체들이 북한 내 사업 파트너를 찾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또 기업협의회는 다양한 무역투자 프로젝트 개발과 사업 박람회 및 회담을 주관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2월 26일에는 러시아 극동개발부 알렉산드르 갈류슈카 장관과 북한 대외경제성 리용남 장관 주재하에 첫 번째 공식회담인 북러 경제협력위원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러시아 철도공사(Russian Railway) 철도 교량의 브릿지 그룹(Bridge Group), 러시아 수력발전기업 루스하이드로 (Rus Hydro)의 계열사인 라오 에스 보스톡(Rao Es Vostok), 극동지역 광산지질탐사기업 노던 마인즈(Northern Mines),러시아 자동차 제조업체 가즈그룹(Gazgroup), 생의약품 전문회사 나노렉(Nanolek), 제분회사 알타이 플로어 밀즈(Altai Flour Mills) 등 많은 러시아 기업이 참가했다고 <러시아 포커스>는 전했다.
이에 따르면 북한 철도 현대화 사업 포베다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남포를 잇는 철도구간의 설계 및 건설 준비 작업을 브릿지 그룹이 2015년 말까지 완료하기로 했으며,  러시아 상업용 차량 제조업체인 가즈그룹은  자사 4.5t 중형 트럭(Gaz 3309)을 북한에 공급하는 것과 북한 김책제철소 현대화에 대해서 협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올들어 두드러진게 동해권을 잇는 통합 전력망 계획이다. 러시아동부전력계통회사인 라오 에스 보스톡은 지난 1월22일 대북 전력공급 사업의 기술 경제적 타당성 조사를 맡을 기업의 입찰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르 아브라모프 극동연방대학교 자연대 수리경제학과 교수는 “러시아-한반도, 그리고 사할린-일본을 잇는 전력 연계망 건설로 동해를 둘러싼 ‘통합 전력 그리드’를 구축함으로써 이 지역의 에너지안보협력이 강화될 것”이며 “현재로선 석탄, 가스, 석유를 원료로 내다파는 것보다 전력을 파는 것이 나은 선택”이라고 지적했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동해를 위한 전략  
   
  박 대통령은 2013년 10월18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한국수출입은행,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공동 주최로 ‘유라시아 시대의 국제협력 컨퍼런스’에서의 기조연설을 통해 유라시아 지역 국가들의 동반 성장·번영을 위한 복합 물류 네트워크 구축을 강조했다. 이른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다. 박 대통령은 유럽과 아시아를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대륙으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남북한과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연결되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역내 전력망과 송유관 등의 연계와 국가 간 무역·투자 장벽 해소도 과제로 제시했다. 이  연설은 그해 9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하고, 11월의 푸틴 대통령 방한을 앞둔 시점에서 이뤄진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국가들과의 협력 강화를 통해 시베리아 극동연해주를 개발하겠다는 신동방정책을 추진해왔다. 신동방정책과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만난 것인데 2013년 11월 한러 정상회담에서는 무려 35개항의 합의문이 발표되었다. 박 대통령은 그 뒤 2014년 3월 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한반도 통일론과 연계시켰다. “한반도를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해 동아시아 전체의 성장 동력이자 번영의 불빛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제가 꿈꾸는 한반도 통일구상입니다.”
  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역사적 맥락과 한반도의 현실을 반영한 비전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동북아 역내 국가들과의 수출입 교역은 전체의 40%에 육박하며, 특히 한국의 대 중국 수출은 2013년 기준으로 전체의 26.1%에 달했다. 이는 미국(11.1%), EU(8.7%), 그리고 일본(6.2%)에 수출하는 물량을 합한 것보다 더많다.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은 그 잠재적 규모에서 현재 보다 2배 이상 확대될 여지가 있다.  
   엄구호 한양대학교 교수(러시아) 역시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대륙경제와의 경제적 통합을 통해 한국 경제에 새로운 모멘텀을 주고 북방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통한 국가간 신뢰제고로 한반도 안정은 물론 통일에 우호적 국제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현재의 남북관계를 보건데 북한의 직접적 변화를 통한 전략적 협력으로 나아가는 방식은 흡수통일이라는 북한의 반발로 인해 벽에 부닥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보다는 북한 변화를 유도하는 동북아 협력체제 형성이라는 우회적 접근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대북정책이 윈윈할 수 접점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러시아를 포함시키는 남북러 3각 협력 그리고 특히 에너지 협력은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핵심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구축된 경제관계에 대해서 북한은 실제로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한-러 사이에는 북한을 참여시키는 (또는 활용하는) 경제협력 사업들이 끊임없이 제안돼 왔으며, 이 중에서 상당수는 비록 아직까지 성공적인 결실을 맺은 것은 없었으나 실제로 시도됐다. 남한과 러시아의 극동지역 사이에 위치하는 북한의 지리적인 입지를 활용하자는 것이 이러한 제안들의 가장 주된 논거가 되었으며, 북한과 러시아 사이의 오랜 정치적, 외교적 우호관계나 남한과 북한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활용하자는 것도 이러한 제안들의 추가적인 근거가 되어왔다. TSR-TKR 철도 연결 사업이나 러시아 극동지역과 남한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 건설 사업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이밖에도 러시아와 한반도 사이의 송전망 건설 사업, 러시아 극동지역에서의 한·러 간 공동 개발사업에 대한 북한 노동자의 활용 방안, (북한 내 지역개발에 대한 한국과 러시아의 공동 협력 방안 북한의 나진항 개발과 관련된 러-북 간 협력 사업에 대한 한국의 참여 방안이 대표적이다) 과 같은 다양한 사업 방안들이 제안되었다. 소위 ‘남-북-러 3각 경제협력’으로 불리는 이와 같은 방안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유용한 지리적인 조건을 활용하여 이 지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남북한 간 대화와 협력을 촉진하고 한반도 주변의 안정에 기여한다는 정치적, 안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둘 중의 어느 의미에서든 이러한 ’3각협력‘의 실현은 한반도 전체와 러시아 사이의 경제관계를 한 단계 더 심화시키게 될 것이 분명하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나진항을 통한 러시아 석탄의 수송 말고는 박근혜 정부의 실크로드 익스프레스와 한러 협력은 제자리 걸음이다. 이제 정책은 더 이상 구호와 이름 붙이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분단으로 대륙과 단절됐음에도 남한이 중국과의 협력을 확대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서해를 통해서였다. 마찬가지로 이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해양과 대륙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동해를 시야에 넣는 환동해 네트워크를 통한 협력의 전략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한러 두나라가 장관급 전략대화 및 1.5트랙 미래비전 대화 등 공식 및 비공식 대화를 활성화하고 전략적 협력을 실현할 지혜를 모아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정상간의 만남을 통한 한-러, 남북러, 남북관계의 전환을 위한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강태호 선임기자 kank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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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리고 싶지 않은..."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

"사람 죽이곤 발로 꽉꽉...그날 이후 한동안 밥 못먹어"

[증언②] "떠올리고 싶지 않은..."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

15.03.16 19:30l최종 업데이트 15.03.16 19:3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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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대전 골령골 첫 학살 현장에서 대한청년단원으로 구덩이를 파고 학살과정을 목격했다고 밝힌 A씨. 그가 14일 오후 현장을 방문해 당시 자신이 직접 판 구덩이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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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여기 도랑까지 핏물로 바닥이 뻘겋었다고 해. 얼마나 죽였길래..."

골령골로 접어드는 길머리인 산내초등학교 후문 앞(대전 동구 낭월동). A씨(82. 대전광역시 동구)가 혀를 차며 말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대전 골령골에서는 최대 약 700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 A씨는 학살이 시작된 첫 날, 구덩이를 직접 파고, 시체가 쌓인 구덩이에 흙을 덮었다. 또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 당시 18살 때였다. 14일 오후 그는 자신이 겪은 65년 전 참혹한 현장 속으로 안내했다(관련기사 : 증언① "기자 양반이 봤다면 온정신으로 못 돌아다녔을겨").

1950년 여름 어느 날, 새벽 2시 "모여라"

1950년 여름 어느 날. 다급한 고함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2시쯤이었다. 대한청년단 마을 간부였다. 이 간부는 마을 대한청년단원이 있는 집을 일일이 돌며 괭이와 삽을 들고 모이라고 지시했다. 마을에서만 20명이 모였다. 다들 어디서 큰 사고가 나서 복구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대한청년단은?
대한청년단은 1948년 12월, 좌익계 청년단체에 맞서기 위해 결성된 우익청년단체였다. 출범 당시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을 절대 복종한다'는 선서문을 채택했다. 총재에 이승만, 최고 위원에 장택상, 유진산, 신성모 등을 추대, 200만 명에 달하는 단원을 규합했다. 

A씨는 청년단 가입 동기에 대해 "당시 만 17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로 미뤄 A씨의 경우 충분한 설명 없이 반강제로 가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한청년단은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설치법'이 공포되면서 방위군으로 편입되었다. A씨도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돼 3개월동안 배를 곯고 구타를 당하며 고생했다고 한다. 

첫 집결지는 마을에서 1km 남짓 떨어진 당시 산내초등학교였다. 초등학교의 한 교실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대충 200여 명은 돼 보였다. 골령골 인근 여러 마을에서 온 대한청년단원들이었다. 

뜬눈으로 기다리는 사이 동이 터오르기 시작했다. A씨는 그때를 새벽 5시 쯤으로 추정했다. 청년단 간부들이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이 골령골로 데려 갔다. 골령골은 산내초등학교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길가에 앉으라고 하더니 높은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 조금 기다리니 트럭 몇 대가 왔어. 군인과 경찰들이 타고 왔는데 군인들은 군복 입고 권총을 차고 있더라구. 높은 사람들 같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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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오후 대전 산내유가족들이 유해를 수습하기 전 추모제를 지내고 이다. 앞쪽에 보이는 것이 희생자의 유해다.
ⓒ 모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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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파라!..군소리하면 '쏴 죽이겠다' 협박.."

동원된 청년단원들은 다시 인근 산 아래 고구마 밭으로 모였다. 몇몇 경찰들은 산등성이에서 경계를 섰다. 

"산밑 아래에 밭에 고구마  줄기(양손을 30∼40cm 사이로 벌려 보이며)가 이만큼 커 있었어. 한 경찰 경위가 인원을 조별로 나누고 각 조별로 고구마 밭을 폭과 깊이를 각각 6자씩(1m80cm, 약 2m) 파라고 지시했어. 3개조 씩 땅 파는데 투여됐어. 나머지 3개 조는 교대조로 편성해서 교대했어"

아침도 못 먹어 배가 고팠다. 아픈 사람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미친 듯이 구덩이를 팠다. 

"군인과 경찰들이 군소리를 하거나 제대로 일을 안 하면 가차 없이 쏴 죽이겠다고 했어.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될 만큼 구덩이를 잘 팠어. 안 그러면 죽인다니께……." 

아침 10시쯤 됐을까? '그만 파라'는 호령이 떨어졌다. 아침 6시가 좀 안 돼 땅을 파기 시작했으니까 약 4∼5시간 동안 쉬지 않고 구덩이를 팠다. 그가 판 구덩이 위치는 지난달 말 전국 시민사회단체가 자원봉사로 파헤친 구덩이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시민사회단체는 지난달 23일 부터 지난 1일까지 일주일동안 가로 6m X 세로 7m 정도의 구덩이에서 약 20구 정도의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시간과 경제적 여건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는 유해와 구덩이를 확인하고도 되묻어야 했다. 이 구덩이의 전체 길이는 얼마나 되는 걸까?

"그때 판 구덩이 길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에서 저기까지..? 아니 저기서 저기까지인가? 지형이 많이 바뀌어서 어디에서 어디까지 팠는지 잘 모르겠네. (비닐 막사를 가리키며) 저기까지인 것은 확실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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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대전 골령골 첫 학살 현장에서 대한청년단원으로 구덩이를 파고 학살과정을 목격했다고 밝힌 A씨. 그가 판 구덩이는 지난 달부터 지난 1일까지 전국 시민사회단체가 발굴한 유해가 묻힌 곳과 같은 곳(사진 왼쪽 소나무 부근)이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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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민사회 발굴한 구덩이와 같은 곳...길이만  30∼70미터

그가 가늠한 구덩이 길이는 최소 30m에서 최대 70m쯤 됐다. 군인과 경찰들이 청년단원들에게 구덩이를 판 옆 골짜기로 가라고 했다. 구덩이에서 불과 100여 m 쯤 떨어져 있는 골짜기다. 군인과 경찰들이 청년단원들에게 소리쳤다. 

"골짜기에서 내려오지 마라!.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마라!. 지시를 어기면 가만 안 두겠다"

황량한 산기슭에는 소나무가 겨우 사람 키보다 약간 더 큰 정도로 우거져 있었다. 때문에 일부러 보려하지 않아도 고개만 들면 아래 상황이 내려다 보였다.  

"트럭이 계속 들어왔어. 트럭에서 형무소 간수와 퍼런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렸어. 죄수들은 두 사람씩 (양 팔목을 엇갈리게 해 보이며) 팔목을 묶어 놓았더라고. 대부분 죄수들인데 흰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여자들도 있었어. 민간인들은 모두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입고 있었어"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을 구덩이 쪽으로 향하게 쭉 세운 다음 다시 꿇어 앉혔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이날 끌려온 사람들이 대전형무소 죄수들 하고 전쟁 나고 서울쪽 형무소에서 풀려났던 죄수들이 다시 붙잡혀 온 거라고 하더라구. 보도연맹원들도 섞여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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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과 함께 미육군정보부에 제출된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 이도영 박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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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시간 동안 총소리...핏물로 '질컥 질컥'..." 

곧이어 헌병대가 도열했다. "거∼총! 사격 개시!"  구령이 떨어지자 총을 쐈다. 거의 총구가 사람들의 뒷머리와 한 뼘 정도로 맞닿아 있었다. 손으로는 총을 쏘면서 동시에 발로는 사람들을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끌려온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굉장했어. '나는 죄가 없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 '대한민국 만세!' 를 외치는 사람,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소리치는 사람….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골짜기가 뒤흔들렸지." 

희생자들을 실은 수십 대의 트럭이 길 가장자리를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트럭 한 대가 사람들을 내려놓고 빠지면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트럭이 들어섰다. 그렇게 총소리와 울부짖음이 이어졌다. 그러다 오후 1시 또는 2시 쯤 총소리가 멈췄다. 3∼4시간 동안 쉼 없이 총질을 한 것이다.

"각 동(마을)별로 2명씩 나오라고 해. 자기 동네로 가서 밥을 거둬오라는 거야. 군인과 경찰들은 자기들 먹을 걸 준비해 왔더라고. 동네에 가서 집집마다 돌며 우리네 먹을 걸 얻어다 지게다 짊어지고, 리어커에다 싣고 해서 가져왔지. 배는 고픈데 손이 벌벌 떨려서 밥을 못 먹겠더라고. 둘러 보니 다른 사람들도 죄 마찬가지야. 먹지를 못해."

이들에게 그 다음 주어진 일은 구덩이 앞에 쌓여 있는 흙으로 시신과 구덩이를 메우는 일이었다.

"말도 마. 파낸 흙을 구덩이 앞에 쌓아 놨었는데 가서 보니 흙이 전부 질컥질컥해. 장마철에 진흙길 걷는 것 마냥.. 비도 안 왔는데 왜 그런 줄 알아? 마른 흙이 피로 반죽이 돼서 그런 겨. 피 곤죽이 된 흙이 여기 무릎 아래까지 빠지더라고..아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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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일 시민사회단체가 발굴한 대전 골령골 현장 유해 중 일부. 6구정도의 유해가 엉켜 있어, 학살당시의 처참함을 보여준다. A씨는 이 곳이 자신이 판 구덩이와 같은 곳이라고 증언했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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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 장화 신은 경찰이 시체더미 밟고 꿈틀거리면 빵!빵!빵! 쐈어"

다시 정신없이 피 곤죽이 된 흙을 퍼다 구덩이 시신을 덮기 시작했다. A씨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가죽 장화를 신은 경찰(또는 군인)로 보이는 높은 놈이 구덩이에 들어가 시체더미를 발로 힘을 줘 꽉꽉 누르더라고. 그 때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소리를 내거나 꿈틀거리면 다시 시체 더미를 헤집고 권총을 빵빵빵 쐈어. 말도 마. 새우젓 담가 놓은 것하고 똑같았어."

일은 캄캄해서야 끝났다. 군인과 경찰들이 그때까지 미처 살해하지 못한 죄수들을 다시 트럭에 싣고 되돌아갔다. 

"그날 사람들을 트럭 40대에 싣고 왔는데 서른 트럭을 죽이고 열 트럭을 되싣고 갔다고 그랬어.  들은 얘긴데 그날 되돌아 가는 도중 트럭이 (길 아래쪽을 가리키며) 저기 오르막길에서 주춤하는 사이 죄수 한 명이 트럭에서 뛰어내려 도망갔다고 하대. 총을 쏘고 했는데 날이 어둡고 해 붙잡지 못했다고 했어. (도망간 사람은) 천운을 타고 난 게지."

그의 말대로라면 이 날만 최소 약 1000명(1트럭 당 30∼40명 추정) 남짓한 사람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전 구덩이를 판 흔적이 없는 것 등으로 미뤄 이 날을 골령골에서 첫 학살이 시작된 때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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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당시 촬영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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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지 않아.. 이런 난리 다시는 없어야 할 텐데..."

그는 그날 이후 두려움과 악몽으로 한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나마 나은 경우였지. 같은 마을에 사는 OO이라는 사람은 나보다 한살 더 많았는데 그 일로  놀래서  오랫동안 앓아 누웠어. 귀신이 붙었다고 무당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해서 겨우 살아났어"

그 날을 끝으로 그는 골령골 현장에 동원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의 골령골 소식이 전해져 왔다. 

"다음 날부터는 다른 동네 사람들이 구덩이를 파러 오고, 나중에는 청년방위대까지 동원돼 직접 구덩이 파고 총까지 쏘고 했다고 하더라구. 참 많이 죽였어. 그때 듣기로 한 20일 동안을 죽였다고 했으니께. 나중에 방위대원한테 시체 구덩이를 메울 새(시간)가 없어서 솔나무(소나무) 가지를 꺾어다 대충 덮고 말았다는 말도 들었어"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두 조르니 생각나는 그대로 얘기는 했지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러고 보니 동네에서 구덩이 파러 갔던 사람들이 나이 먹어 다 죽고 나만 아직 살아 있네 그려. 이런 난리는 다시는 없어야 할 텐데…."
 

대전 산내 골령골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한국전쟁유족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4·9통일평화재단, 포럼진실과정의,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과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대책위원회'(대전지역 19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달 23일부터 3월 1일까지 7일간 일정으로 산내 골령골(대전시 동구 낭월동 산 13-1번지)에서 7일간 한국전쟁 관련 유해를 발굴했다. 

이곳에서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재소자를 대상으로 대량 학살(1차 : 6월 28~30일 1400명, 2차 : 7월 3~5일 1800명, 3차 : 7월 6~17일 1700~3700명)이 벌어졌다. 당시 희생자들은 충남지구 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 하지만 유해 대부분이 방치돼 훼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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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AIIB, 한국은 미중(美中) 사이를 헤쳐갈 수 있을까

[고승우 칼럼] 사드·AIIB, 한국은 미중(美中) 사이를 헤쳐갈 수 있을까

 

한국 정부가 미국의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즉 사드의 한반도 배치 문제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의 창립 회원국 가입 문제에 어떤 결론을 내릴지 주목된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두 개의 제안 수락을 동시에 요구받고 있다.

두 문제는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에 따라 중장기적인 동북아 군사, 경제구도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커서, 두 초강대국이 한반도를 무대로 힘겨루기를 하는 형국이다. 한반도 평화통일 추진 등과 직결된 중대 사안에 대해 한국이 모두가 ‘윈윈’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사드 배치 기정사실화하는 미국, 강력 반대하는 중국

한국 정부는 사드 문제를 당정청이 머리를 맞대는 형식 등으로 고민하는 중이고, AIIB 창립 회원국 가입 여부는 이달중에 결론을 낼 방침이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15일 정책조정협의회를 갖고 최근 국내외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사드 배치 문제를 논의하지만, 청와대는 공론화 자체를 반대하는 등 혼란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드의 한반도 배치에 대해 중국, 러시아가 여러 방법으로 반대의 뜻을 밝혀, 아시아의 신냉전시대가 도래할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한미 두 나라가 공식적으로 사드의 한국 배치를 논의한 적이 없다고 밝힌 가운데 주한미군사령부가 부지 조사를 이미 마쳤다고 밝혀 논란의 수위를 급상승시키고 있다.

주한미군의 사드 관련 발표는 한국 정부의 고민을 배려하는 것으로 보기 어려운 돌발적인 것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주한 미 대사 피습 사건이후 한미동맹 강화를 강조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주한미군의 발표는 미국 정부의 사전 승인 절차를 밟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다음 달 중 미 국방장관과 국무장관의 방한이 예정돼 있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사드 고고도 방어 미사일 시험 발사 장면
사드 고고도 방어 미사일 시험 발사 장면ⓒ미국 국방부 미사일 방어국

주한미군이 사드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 내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에 큰 충격을 주는 태도를 취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중 ‘미국은 자국의 육·해·공군을 대한민국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비(配備)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대한민국은 이를 허락한다’는 조항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정부의 사전 동의 없이 군사력을 한국 영토와 주변에 배치할 수 있고 이는 사드에 대해서도 해당된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는 주한미군은 유사시 한반도에 전개되는 미군 증원전력에 수조 원대의 비용이 드는 사드를 포함시켜 미국 공군 대형 수송기로 수송할 계획을 이미 세워놓았다고 연합뉴스가 15일 보도하면서 간접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는 미국이 사드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만 결정치 않았지 주한미군에 이를 배치한다는 원칙은 이미 확정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미국은 북한의 핵 위협이 날로 증가하고 있어 사드의 한국 배치가 매우 긴요하다는 입장인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사드의 레이더가 반경 4000킬로미터까지 탐지가 가능하다며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어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금융 실크로드’ AIIB 놓고 미영 간에도 ‘갈등’

한편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 중국을 거점으로 현대판 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하는 ‘이다이이루’(一帶一路) 구상 실현을 위해 추진 중인 AIIB에 한국이 가입할 것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의 AIIB 가입 결정에 불만을 드러내는 등 견제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어 한국 정부를 고민스럽게 만들고 있다.

백악관은 영국이 최근 G7(주요 7개국) 국가로는 처음으로 AIIB에 참여하기로 하자 사전 협의가 없었다면서 “영국이 중국의 요구를 계속 수용하고 있다”며 이례적으로 비난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넷판이 15일 보도했다.

미국은 중국이 500억 달러 규모의 자본금으로 출범시킬 AIIB 설립은 세계은행 등 서방이 주도하는 기존 글로벌 금융시스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다른 우방들에 AIIB에 합류하지 말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미국의 이런 움직임은 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장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지난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장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뉴시스

AIIB 창립 회원국은 현재 중국을 포함해 모두 26개국으로 인도네시아, 몰디브, 뉴질랜드, 사우디아라비아, 타지키스탄 등이 참가할 뜻을 밝힌 상태다.

중국은 한국이 AIIB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하려면 이달 말까지 참여 여부를 밝혀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한국은 아직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류젠차오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와 대니얼 러셀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잇따라 방한하면서 사드와 AIID 등을 둘러싼 논의가 서울에서 불꽃을 튀길 전망이다.

 

 

 

한국이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매우 높은 상황에서, 중국이 반대하는 미국의 안보관련 요구를 받고 있는데 그 해법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외교전에서 중요한 해법의 하나는 모두가 윈윈하는 자주성의 원칙을 강조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탁월한 조정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국제 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한국이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 신세라는 처량한 신세가 될 지, 양쪽의 풀을 뜯는 소가 될 지가 판가름 날 중차대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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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출신 채용불가 논란, 왜 자꾸 나오나

전라도 출신 채용 탈락-일베인증, 더 끔찍한 일도
 
전라도 출신 채용불가 논란, 왜 자꾸 나오나
 
임병도 | 2015-03-16 08:52:2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일간베스트저장소라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취업 지원자가 전라도 출신이어서 서류 탈락시켰다’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쿠키뉴스에 따르면 1 일간베스트저장소 게시판에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서류 탈락시킨 인사 담당자’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목포가 고향’이라는 문장과 탈락 표시가 된 입사지원서, 그리고 일베 인증 손모양이 포함된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가 삭제됐다고 합니다.

쿠키뉴스도 별다른 취재 없이 일베에 올라온 사진과 글을 캡처해서 올렸기 때문에 이 내용이 진짜인지, 아니면 조작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만약 인사담당자가 특정 지역 출신이라 탈락시켰다면 분명 현행법률상 문제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고용정책 기본법>
제7조(취업기회의 균등한 보장) ① 사업주는 근로자를 모집·채용할 때에 합리적인 이유 없이성별, 신앙, 연령, 신체조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학력, 출신학교, 혼인·임신 또는 병력(病歷) 등(이하 “성별등”이라 한다)을 이유로 차별을 하여서는 아니 되며, 균등한 취업기회를 보장하여야 한다.
② 고용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는 그 업무를 수행할 때에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등을 이유로 구직자를 차별하여서는 아니 된다. ③ 직업능력개발훈련을 실시하는 자는 훈련대상자의 모집, 훈련의 실시 및 취업지원 등을 하는 경우에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등을 이유로 훈련생을 차별하여서는 아니 된다.


‘전라도 출신 채용불가 논란, 왜 자꾸 나오나’

일베라는 극우성향 사이트에서 인증 놀이가 유행한다고 모두 진실이라고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라도 출신 채용논란은 단순히 일베가 아닌 채용 사이트에서 논란이 됐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2014년 12월 안산의 한 중소기업이 채용사이트에 채용공고를 냈는데 '본적 외국인 X,전라도X 지원불가'라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인터넷과 SNS에서는 특정 지역 출신은 지원조차 할 수 없도록 채용공고를 낸 자체가 법을 위반했다며 많은 논란이 일었습니다.

어떤 네티즌은 국가인권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고, 한때는 해당 기업의 홈페이지가 마비되기도 했습니다.

해당 기업은 채용공고를 대행하는 직원의 단순 실수라고 해명하면서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온라인에서는 이 기업이 과거에도 전라도 출신을 채용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등록기준지로 바뀌었지만,2 얼마 전까지도 입사지원서에 '본적'이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본적은 호적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호적은 대부분 본가가 있는 고향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난 곳과 상관없는 지역인 경우가 많습니다.

호적을 표시한 이유는 말 그대로 그 사람의 부모가 어느 지역 출신인지를 알려고 하는 이상한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과거 연좌제의 한 부류처럼 특정 지역 출신을 배제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 기업에서 일부 임원이 전라도 출신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인터뷰 ⓒ MBC

호적제도가 폐지되면서 본적이 아닌 등록기준지 제도3가 시행됐습니다. 본적이 가진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기업에서는 ‘고향’이나 ‘출신지’ 등으로 말을 바꾸어 사용하고 있습니다.4
 
특정 지역 출신을 배제하는 자체가 ‘현대판 연좌제’입니다. 일부 기업이나 입사지원서에 아직도 이런 연좌제가 있다는 점은 일베의 전라도 출신 채용 배제 인증과 상관없이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 입사지원서에 부모 재산과 직업이 왜 필요하나요?’

어느 출신 지역이냐를 묻는 현대판 연좌제뿐만 아니라 부모의 직업과 재산을 적는 입사지원서도 문제입니다.

일부 기업에서는 가족의 월수입과 재산, 주거 형태를 상세하게 적어 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5 지원자의 능력을 봐야 할 기업이 부모의 재산과 직업까지 조사한다는 그 자체는 황당하기만 합니다.

만약 부모나 가족이 없거나 재산이 없다면 지원자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거나, 지원자를 보기보다는 그 배경을 중하게 여기는 한국 사회의 단면이 그대로 보이는 모습입니다.

▲ 100대 기업중 채용시 부모직업 기재하는 곳 ⓒ 서울신문

2009년 서울신문이 100대 기업을 조사한 결과 채용시 부모의 직업을 기재하는 곳이 무려 54개 업체나 됐습니다.6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100대 기업들조차 부모의 직업을 기재하도록 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한국의 취업 제도가 잘못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해외 어느 기업도 이력서나 입사지원서에 ‘가족 관계’를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도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작성하는 곳이 많습니다. 가족관계를 적는다는 자체가 우리가 말하는 ‘원만한 가족관계’에 있는 사람만 채용하겠다는 전제조건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적으라는 기업의 요구는 본인이 어쩔 수 없는 가족이라는 항목으로 지원자를 차별하는 행위입니다.


‘ 꼭 신체가 건강해야 입사할 수 있나요?’

한국의 이력서나 입사지원서를 보면 외국과 다르게 키와 시력, 심지어 혈액형까지 묻는 항목이 있습니다.

외국에서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에게 신체 사이즈를 묻는 자체는 굉장히 비매너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당당하게 공식적인 서류에 지원자의 신체 사이즈를 적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혈액형까지 묻기도 합니다. 무슨 군인이나 경비원 등 위험 직종에 지원하는 것도 아닌 단순 사무직에 지원하는데도 자세한 신체 현황을 요구합니다.
 
대기업이나 일부 기업에서는 채용 공고를 내면서 제출 서류에 건강진단서까지 요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신체사이즈를 적는 것을 넘어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고 인증 서류를 제출해야 합니다.

일부 기업에서 요구하는 건강진단서는 한 마디로 신체 건강한 사람만 채용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해외에서는 특정 직업 이외7에는 채용 전에 건강진단서를 제출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한국 기업에 취업하는 외국인들이 간혹 황당해 하는 경우가 입사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건강진단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입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현행 이력서 자체에 문제가 많아서, 고용노동부는 기존 이력서에서 ‘주민등록번호’,’학력사항’,’신체 사항’,’가족사항’,’재산내역'’등이 삭제된 입사지원서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학력을 묻는 그 자체는 기업의 판단에 맡길 수 있는 부분이지만8, 취업지원자의 신체나 가족관계 등을 묻거나 요구하는 행위는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미국은 회사에 지원하거나 채용하는 과정에서 요구되거나 얻어지는 정보는 그 지원자가 해당 직무에 적합한가를 결정하는 데 꼭 필요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하며, 인종, 성, 출신국, 나이, 종교와 관련한 정보는 이러한 결정 요소로 볼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9

일베의 전라도 출신이라 탈락시켰다는 인증샷 문제도 조사해볼 필요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 사회가 가진 차별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지속해서 개선해야 한다고 봅니다.

누구라도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상식이 만들어진다면 일베의 인증샷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 그 사회 스스로 인식하고 처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전라도 출신이어서 서류 탈락시켰다”… 특정 지역 차별+일베 인증 손모양 게시글 논란.쿠키뉴스 2015년 3월 15일. http://goo.gl/eBy0WT 
2. 2008년 호적제도가 폐지됐다.
3. 가족관계 사항에 대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기준이 되는 지역, 절차에 따라 변경할 수 있다. 
4. 서류가 아닌 일부 자기 소개서나 면접 질문에서 사용하기도 함 
5. 신영∙미래에셋 증권 ‘황당한 이력서’ 도마에' 컨슈머타임스 2012년 10월 10일http://goo.gl/HrhL9n 
6. ‘취업 연좌제’ 대기업 절반 입사지원서에 부모직업 기재요구. 서울신문 2009년 12월 23일.http://goo.gl/nNB7Z1
7. 의료직이나 해외 파견직 등 건강이나 감염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직종 등
8. 기업이 학력 사항을 기재하지 않는 일이 사라질 수 없다고 본다. 직무상 학력이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은 일부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안책은 장기적으로 필요하다.(학벌과 학력은 다르기 떄문) 
9. ‘스펙’과 몸무게가 빠진 지원서, 반갑다.들플넷,2013년 3월 11일.http://deulpul.net/3937146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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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새정치, 서울광장이 오토캠핑장인가"

 

"이완구 총리됐다고 기뻐하면 '멍청도' 된다"

 
허환주 기자 2015.03.15 13:26:09
 
봉은사 전 주지 명진 스님이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섰다. 15일 서울 성동청소년수련관에서 '명진스님팬클럽'이 주최한 법회에서였다. 그간 1년 넘게 대중 앞에서 법회를 열지 않았던 그였지만 거침없는 발언은 여전했다. 
 
명진 스님은 이날 법회를 시작하면서 "오늘 아침, 스님과 대화를 하면서 '명진 스님 하면 뭐가 떠오르느냐'고 묻자, 그 스님이 거침없이 '좌파요' 이렇게 말하더라"라며 "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 스님을 바라보자 미안한지, '강남좌파요'라고 덧붙이면서 '강남을 붙이면 좀 더 있어 보인다'라고 하더라"고 인사 대신 농을 던졌다. 
 
2010년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명진 스님은 봉은사를 조계종에서 직접 관리한다고 하자 이에 반발하며 당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의 밀착관계를 폭로하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명진 스님은 "사람에게 보이는 이미지는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축적되면서 나타나는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나는 '강남좌파'라는 이미지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그런 이미지가 살아가는 데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좌파라는 이미지가 어렵고 힘든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들을 위해 평등한 세상, 골고루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법회를 하고 있는 명진 스님. ⓒ프레시안(허환주)

▲ 법회를 하고 있는 명진 스님. ⓒ프레시안(허환주)  

 
 
"비리의 종합세트인 국무총리와 함께 눈물 흘리는 게 지금의 야당" 
 
자신이 몸담은 '국민모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국민모임이란 지난해 11월 출범한 각계각층의 진보 성향 인사들이 진보적 대중정치 복원과 정권교체를 위한 신당 추진모임이다. 김세균 전 서울대 교수와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영화감독 정지영 씨 등 사회 각 분야 인사 105명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정동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국민모임에 합류했다. 명진 스님은 '국민모임'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명진 스님은 자신이 국민모임 공동대표를 맡은 이유를 두고 현 야당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얼마 전 임명된 이완구 국무총리를 이야기하면서 "비리의 종합세트인 사람"이라며 "게다가 기자들을 앉혀 놓고 겁박까지 했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총리가 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내가 충청도 출신인데, 이완구가 충청도 출신이다. 그러면 우리 지역에서 총리가 나왔다고 기뻐해야 하나. 그렇게 되면 '멍청도'가 되는 것이다"라며 "이완구 총리가 된 거에 기뻐하면 충청도 양반이 아니라 충청도 '쌍놈'이 되는 것이다.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나쁜 짓 다한 사람을 우리 사람이라고 뽑는 문제부터 없애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야당의 역할론을 강조했다. 그는 "이완구가 총리될 때 야당은 뭐 했는가"라고 반문한 뒤 "적당히 반대한 뒤, 총리에 임명되자 눈물을 흘리며 반겼다. 그때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지금의 야당"이라고 질타했다.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지난 2월 24일 총리 임명 직후 이완구 국무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마음이 아팠다. 총리를 잘 도와주지 못해 마음이 아프고…"라며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우 원내대표를 이 총리는 등을 두들겨 주고 위로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을 훔치기도 했다. 
 
명진 스님은 "서민 삶은 내팽개치고 자기 기득권만 챙기고 적당히 정치나 하려고 한다. 자기 지역에 예산 좀 내려달라고 여당에 부탁하는 게 야당"이라며 "그래서 신당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광장이 오토캠핑장인가" 
 
비판은 계속됐다. 그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두고도 "이 사건으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구속됐다. 대통령 부정선거인 셈이다"라며 "이 문제를 가지고 야당은 치열하게 싸워야 하지만 문재인 대표는 대선 결과에 승복한다고 했다. 그러고도 야당이라고 할 수 있나"라고 질타했다.  
 
세월호 특별법 관련해서도 "두 번이나 여당이 만든 세월호 특별법안을 들고 와서 유가족을 설득만 하려 했다"며 "그렇게 유가족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한 게 야당"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과거 야당 시절 김대중-김영삼을 언급하며 "야당은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그들은 그렇게 했다"며 "서울광장에 나와 농성하다 다시 들어가고, 나오고를 반복만 해선 안 된다. 서울광장이 오토캠핑장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깨우치게 하는 게 우리 스님들이 할 일이기도 하다"며 "세상에 잘못된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꾸짖어야 한다"고 자신이 국민모임 공동대표를 맡은 배경을 설명했다. 
 
한편, 이날 법회에 참석한 정봉주 전 국회의원은 명진 스님과 종교협동조합인 '명진선언'을 9월께 출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 전 의원은 "4월 10일과 5월 둘째 주에 법회를 연 뒤, 동안 명진 스님은 동안거에 들어갈 예정"이라며 "'명진선언'은 그 이후에 출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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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진영, 단군릉서 ‘5.2 어천절 공동행사’ 추진

민족진영, 단군릉서 ‘5.2 어천절 공동행사’ 추진<광복 70주년 릴레이 인터뷰 ⑧> 윤승길 단통협 사무총장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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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16  0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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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승길 단통협 사무총장과 13일 광화문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단군릉에서 어천절 기념 천제를 공동으로 봉행한 뒤 구월산 삼성사를 참배하는 것을 희망한다.”

윤승길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단통협) 사무총장은 “음력 3월 15일, 오는 5월 2일은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 성왕께서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시고 돌아가신 어천절”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윤승길 사무총장은 13일 낮 광화문 한 카페에서 <통일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어천절(御天節) 남북해외 민족공동행사를 평양 단군릉과 구월산 삼성사에서 개최하는 방향으로 추진 중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1994년 평양 대박산 기슭에 대규모로 건립된 단군릉은 단군의 유골로 추정되는 유해가 안치된 곳으로서 단군이 ‘하늘로 오른’ 어천절 행사를 거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며,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황해도 구월산 소재 삼성사(三聖祠)는 세종대왕도 신하를 보내 단군께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는 뜻깊은 장소라고 설명했다.

   
▲ '단군릉 개건 20돌'을 맞아 지난해 개천절 민족공동행사가 남측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단군릉에서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윤승길 사무총장은 “북에서도 해마다 어천절에 구월산 삼성사에서 제를 지내고 예를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우리도 수년째 어천절 공동호소문 발표해왔다”며 “금년에는 어천절을 계기로 민족의 동질성 회복, 민족 단합의 첫 문을 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6.15남측위원회) 등이 추진 중인 6.15민족공동행사에 앞서 5월 2일 평양 단군릉과 구월산 삼성사에서 어천절 행사가 성사된다면 광복 70주년 첫 남북 공동행사가 될 공산이 크다.

윤 총장은 “북측에 실무접촉을 제안한 상태”라며 “북측과의 실무회담과 당국과의 협의를 거쳐 방북단 규모나 교통편이 결정될 것”이라고 전하고 “단군 관련 종단과 민족종교, 단군관련 단체, 학술단체, 단군 신봉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최하 100명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소감을 묻자 그는 “분단이라는 민족의 가장 큰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분단해소와 평화정착의 길을 열지 못한 자책이랄까, 자성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며 “현재 남쪽 정세가 너무 보수화돼 있고, 6.15정신을 살리기 굉장히 어려운 조건에서 분단 이전의 항일독립의 정신, 단군사상으로 길을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 2003년 단군릉에서 열린 개천절 민족공동행사. 남측 대표단 296명이 직항편으로 방북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올해 계획에 대해서는 “지난 3.1절에 서울과 평양 행사를 통해 공동호소문을 합의해냈다”며 “6.15남측위원회가 보다 폭넓은 공동행사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6.15공동선언 15주년 공동행사와 광복 70주년 공동행사를 추진하겠지만 광복 70주년 행사를 대비해 종교, 민족단체, 독립광복단체 3자 연대축을 만들고 있다”고 전했다.

민족진영은 ‘광복 70주년 3.1절, 광복절, 개천절 민족공동행사 준비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하기 위해 지난 2월 10일 첫 모임을 가졌고, 4월 초경 공식 발족할 예정이다.

윤 총장은 “6.15남측위원회가 주도하는 공동행사가 정세상 난관에 부딪힐 경우를 대비해서 민족진영의 외연을 확장해서 공동행사를 실현할 방안을 나름대로 모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2년과 2003년 대규모 대표단이 방북해 평양 단군릉에서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를 개최한 바 있고, 민간교류가 사실상 단절된 지난해에도 ‘단군릉 개건 20돌’을 맞아 36명의 방북단이 단군릉에서 공동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 윤승길 사무총장은 어천절과 광복절 공동행사를 중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윤 총장은 “북측 단통협(단군민족통일협의회)과 20년째 교류하고 있다”며 “금년 정세가 어려워도 단군릉 개천절 행사는 천제라는 민족 고유의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추진하면 가능하다고 본다”고 낙관했다.

이 외에도 개천절을 계기로 북측 고조선 유물을 반입해 발표회와 전시회를 개최하는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윤 총장은 “지난해 중앙역사박물관에 가서 고조선 유물 보고 왔다”며 “고조선은 오래돼 유물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부분은 북쪽에 있다. 작년에도 제안했고, 금년에도 다시 제안해 북쪽과 협의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또한 매헌윤봉길기념관과 독립유공자유족회, 민족단체들이 공동으로 ‘광복 70주년 항일독립운동 역사’ 전시회를, 대종교는 항일독립운동사의 언론 연재를 추진하고 있다.

윤 총장은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5천년 우리민족의 역사를 드러내고 우리 민족이 단합할 수 있는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민족진영이 어천절과 8.15를 계기로 정세를 돌파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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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밥값했는가'...지역서점의 촌철살인

 

[SNS 이슈] 경남 지역 서점 '진주문고' 개성 있는 진열대... "읽고 성찰하길"

15.03.15 22:48l최종 업데이트 15.03.15 22:4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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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문고가 홍준표 경남도지사에게 권하는 책 경남의 지역서점인 '진주문고'는 지난 14일 홍 지사를 위한 추천도서 9권을 따로 진열했다. 진열대에는 '친환경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걸어 서울시 첫 진보교육감으로 당선됐던 곽노현 전 교육감이 쓴 <징검다리 교육감>(메디치미디어) 등 총 9권이 놓였다.
ⓒ 진주문고 페이스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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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원리 수학1>
<밥값 했는가>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잡놈들 전성시대>
<또 다른 사회는 가능하다>

경남의 한 지역서점이 '무상급식 중단'을 선언한 홍준표 경남도지사에게 추천한 도서목록이 누리꾼 사이에 화제다. 

지난 14일 진주시 평거동에 위치한 '진주문고'가 운영하는 페이스북에는 홍 지사를 위해 마련한 진열대 사진이 올라왔다. 진열대에는 '친환경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걸어 서울시 첫 진보교육감으로 당선됐던 곽노현 전 교육감이 쓴 <징검다리 교육감>(메디치미디어)과 복지국가의 대명사인 노르웨이 사회의 이야기를 풀어낸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꾸리에) 등 총 9권이 놓였다. 진열대 한 가운데는 고등학생의 수학 학습 교재인 <개념원리 수학1>(개념원리수학연구소)이 자리잡았다.

진열대를 소개한 팻말도 눈에 띈다. A4용지 크기의 팻말에는 '경남도지사에게 권하는 책'이라는 문구와 함께 급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빈 식판 사진도 들어가 있다. 옆에는 지난 2013년에 폐업한 진주의료원을 상징하는 청진기도 있다. 하단에는 'Save a life'(목숨을 구하다)라는 문구를 쓴 뒤 'a life'(목숨)부분에 빨간 줄을 긋고 바로 아래 'Money'(돈)를 썼다. 홍 지사가 '사람' 대신 '돈'을 택했음을 꼬집는 것으로 읽힌다.

"홍 지사 행보 우려돼 기획... 손님들이 특히 <개념원리> 좋아 한다"

이를 기획한 정도선(34) 진주문고 기획지원팀장은 15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홍 지사가 취임한 후 공공의료기관인 진주의료원이 폐업되고, 무상급식이 중단됐다"며 "이런 우려되는 행보를 손님들과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다"고 전했다. 또한 "이 책들을 읽고 홍 지사가 성찰해보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손님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라고 한다. 정도선 팀장은 "웃으며 사진을 찍어가는 분이 많다"며 "특히 진열대 한가운데 놓인 <개념원리 수학1>의 인기가 좋다"고 전했다. 온라인에서도 비슷한 반응이다. 진주문고의 페이스북을 찾은 누리꾼들은 해당 글 밑에 "개념원리, 그 거 한권이면 되겠네요"(이**), "탁월한 진주문고의 책 선정"(조**), "(홍 지사가) 꼭 좀 보셨으면"(Jin*******) 등의 댓글을 달며 호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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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의시간> vs  진주문고는 지난 2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쓴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알에이치코리아)과 이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에 쓴 천문학적 비용을 고발하는 책 <MB의 비용>(알마)을 나란히 진열한 뒤 "판단은 당신의 몫"이라는 팻말을 걸어 누리꾼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 진주문고 페이스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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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점의 개성 있는 진열 방식은 이미 한 차례 입소문을 탄 바 있다. 지난달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쓴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알에이치코리아)과 이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에 쓴 천문학적 비용을 고발하는 책 <MB의 비용>(알마)을 나란히 진열한 뒤 "판단은 당신의 몫"이라는 팻말을 걸어 누리꾼의 호응을 얻었다. 또한 주말 사이 두 책이 얼마만큼 줄어들었는지 추가로 공개하기도 했다

한편 경남도는 경남도청과 18개 시·군청이 올해 학생들의 급식비 지원을 끊으면서 지난 2007년부터 진행된 무상급식이 오는 4월부터 중단될 예정이다. 지난 11일에는 홍 지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무상급식 중단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반박하며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써 논란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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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 팔아서만 3억 수익... "저는 게으른 농부입니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3/15 13:41
  • 수정일
    2015/03/15 13:4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 18] 서른세 살 약초 농부 강상우

15.03.15 10:15l최종 업데이트 15.03.15 10:1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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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우씨의 콩 밭. 지독한 가뭄을 만나서 콩이 타들어갈 때, 상우씨의 가슴도 까맣게 탔다. 곧 아기아빠가 되는 서른 살 가장은 콩밭에서 울었다.
ⓒ 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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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씨는 3년 전 콩밭에서 울었다. 9년간 연애하고 결혼한 아내와 곧 태어날 아기까지 있는 서른 살 가장은 주저앉아 울었다. 폐염전을 개간한 전북 군산 하제 땅 1만 평, 임대해서 콩을 심었다. 콩이 자라는 모습은 대견했다. 수확을 한 달 앞두고 지독한 가뭄을 만났다. 하루에 40만 원씩 주고 살수차를 빌려서 밭에 물을 퍼부었다. 콩은 다 타들어갔다. 불가항력이었다.

다음 해 여름에는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한꺼번에 파랗게 돋아나서 자라던 콩은 폭삭 주저앉았다. 그래도 상우씨는 콩 농사를 팽개치지 않았다. 지인에게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소개 받았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땅 1만 5천 평, 임대료는 없었다. 군산에서 전용 도로를 타고 쉬지 않고 오가면 왕복 4시간, 상우씨에게는 아득한 거리가 아니었다. 

"승합차에 같이 일할 동네 할머니들 여덟 명을 모시고 갔어요. 1톤 트럭에는 기계를 싣고요. 그렇게 차 두 대 움직이면 경비만 25만 원 들죠. 근데 콩 농사는 손이 많이 안 가요. 한 해 동안 용인에 많이 가야 10번, 250만 원 들어요. 군산에서는 더 작은 면적을 빌리는 데 임대료가 천만 원 넘었거든요. 용인은 농사도 잘됐어요. 몇 천만 원의 수익을 냈어요." 

스물다섯, 농부의 길을 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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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우씨와 할머니가 쑤어서 매단 메주.
ⓒ 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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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 농사를 짓는 상우씨, 할머니에게 메주 쑤어서 된장 담그는 법을 배웠다.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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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씨는 태어나 보니 군산 '회현 떡집'의 손자였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해야 하는 떡집의 고된 일. 할머니와 어머니가 맡아서 했다. 어린 상우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할머니 곁에서 일을 돕다가 학교에 갔다. 성인이 된 상우씨는 제대 후 호원대학교 전기학과에 복학하면서부터 농사를 직업으로 삼았다. 그때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힘들게 몸 쓰면서 일해도 불확실성이 큰 게 시골 일이니까. 상우씨는 "떡집 일이 없을 때는 콩 농사를 하면 돼요"하고 고집을 부렸다. 한 분야의 명인까지 되고 싶었던 상우씨는 할머니한테 메주 쑤어서 된장 담그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콩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씨 뿌리고 수확까지 5~6개월, 열흘 정도만 바짝 일하는 것도 콩 농사의 매력이었다.

스물일곱 살 상우씨, 순창에서 열린 농축산식품부의 장류 교육을 6개월간 받았다. 일본에 가서 쯔게모노(장아찌)와 미소 된장을 만드는 현장도 보았다. 그는 차츰 발효 식품과 발효 효소에 눈을 떠갔다. 농업기술원, 평생교육원, 임업진흥원에서 열리는 교육마다 찾아다녔다. 그의 동료는 50대나 60대, 그 속에서 상우씨는 각종 약초와 식품 관련 자격증 8개를 땄다.

상우씨가 농사 지은 지도 5년째, 자기 소유의 땅은 없었다. 집 옆에 딸린 텃밭이 전부였다. 동네 사람들은 떡집 손주가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여기 농사지을래?" 하면서 땅을 맡겨왔다. 상우씨는 군산시 회현면 일대 20여 군데의 땅에 농사짓게 됐다. 그는 씨가 발아해서 싹이 나고, 대공이 올라오고, 알이 맺히는 모습에 매료됐다. 보기만 해도 좋았다. 

"상우야, 이거 한 번 해보자!"

어느 날 충남 공주에서 와송을 보고 온 아버지가 말했다. 마침 맞게 약용 식물에 관심을 쏟고 있던 상우씨는 흔쾌하게 따랐다. 처음에는 땅 1백 평에 와송을 심기로 했다. 친척한테서 6백만 원을 빌려 종자 만 개를 사왔다. 첫해 농사에서는 심은 와송 중 50%만 살려도 성공이라고 본단다. 상우씨는 그 중 90%를 살려서 2천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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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우씨가 실험적으로 해 본 와송 공동농장
ⓒ 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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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대성공이었죠. 콩 농사를 몇 만 평 하는 것보다 와송이 훨씬 낫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도 고민이 따라왔어요. 저도 그렇고, 대다수의 농민도 빚을 안고 일을 하고 있어요. 근데 빚지고 농사를 짓다가는 정말 힘든 상황을 만나게 돼요. '이건 전망이 좋아' 하면서 무리를 하면, 농사는 순식간에 주저앉을 수가 있거든요. 태풍이나 가뭄 닥친 것처럼요."

고추, 콩, 와송... 그가 도전한 농사

상우씨는 콩 농사 전에 고추 농사를 지었다. 수확의 기쁨이 커서 땡볕에서 고추 따는 일은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고추는 일일이 사람 손이 닿아야 했다. 가격 변동은 예측조차 안 됐다. 그는 6년간 농사 지으며 성공과 실패 속에서 알았다. 식량 자원과 약용 식물, 단기 소득 작물(콩, 와송, 어성초)과 중장기 소득 작물(매실, 감, 구찌뽕, 산양삼)을 같이 해야 좋다는 것을.

자칭 '게으른 농부'인 상우씨는 콩처럼 손이 많이 안 가는 약초를 선호했다. 피를 맑게 해 주는 어성초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자소엽은 상우씨에게 딱 맞았다. 작물을 심어놓고 풀 관리만 두세 번 해 주면 수확 철이 왔다. 더구나 깻잎처럼 생긴 자소엽은 새순을 끊어서 거두고 뒤돌아서면, 또 새순이 올라왔다. 1년에 네다섯 번까지 수확할 수 있었다.  

작물 중에서 상우씨가 가장 힘을 쏟는 건 와송이다. 첫해는 1백 평, 지난해에는 2천 평에 와송을 심었다. 올해는 1만 5천 평에 70만 개의 와송을 심는다. 와송은 30~40cm까지 자라는 약용식물이다. 항암 효과가 있다. 또 해열, 지열, 간염, 아토피, 위와 장에 특효가 있다. 기와 위나 바위틈, 산과 밭에서 자란다. 1년 전부터 한약재뿐 아니라 식품으로 쓸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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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송 밭에 마사토를 뿌리는 작업
ⓒ 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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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 생산하는 건 일도 아니에요. 판매가 힘들죠. 사람들한테 이게 어디에 좋은지를 납득 시키기가 어렵죠. 그래서 한국바위솔(와송)협동조합에 가입했어요. 거기로 와송을 출하해요. 협동조합은 노지에서 재배한 와송만 받아줘요. 와송은 비를 많이 맞으면 주저앉아요. 근데 비닐하우스 거는 햇볕을 못 봐서 '제7의 영양소'라는 파이토케미칼 성분이 별로 없어요."

한편, 상우씨는 시험 재배를 해 봤다. 연습 삼아 전북 임실의 작은 땅에서 세 사람이 콩 농사를 짓고 똑같이 수익을 나눴다. 지난해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동 농장'을 꾸렸다. 약용 식물을 공부하는 동료 일곱 명과 함께. 공동 농장의 장점은 비용 부담을 던다는 것과 여러 사람이 모이니 지인 판매가 쉽다는 것. 다만 사는 지역이 제각각이라 한두 명만 농사를 짓게 된다는 게 단점이었다.

올해도 상우씨는 공동 농장을 계속한다. 와송 1주당 500원, 2만 주를 1천만 원에 분양했다. 투자자 일곱 명을 모아서 농사지을 땅을 임대했다. 밭을 뒤집고, 로터리를 치고, 퇴비를 갖다 넣고, 줄을 맞춰서 관리기로 고랑을 파고, 쇠스랑으로 북을 주는 일은 상우씨가 맡아서 한다. 그는 공동 농장 '밴드'에 날마다 작업 내용과 작물의 성장 모습을 올린다. 

"농사는 '3년에 한 번만 풍년이 들어도 돈 번다'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세 번 중 두 번은 실패를 할 수 있는 게 농사예요. 제가 투자자를 모아서 하는 공동 농장도 망할 수 있어요. 자연재해가 오면요. 지난해에 밭 상황을 공동 농장 하는 분들한테 날마다 알려줬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니 충분히 이해해 주더라고요. 모든 투자는 손실을 볼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 상우씨는 농부가 밭에서 일하며 콩이나 고추한테 말 건다는 의미를 몰랐다. 요새는 안다. 밭에 가면, "약성 좋게 잘 자라서 여러 사람한테 도움되어라"고 말한다. 옛날 사람들이 장 담그는 날짜를 받고 나서 목욕 재개를 하고, 장 항아리 앞에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했던 마음을 헤아린다. 그는 부정 탈까 봐 욕심을 품지 않는다. 잡생각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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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사람들은 장 담그는 날짜를 받고, 목욕재개를 하고, 장항아리 앞에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우씨는 부정 탈까 봐 장독대에서 욕심을 품지 않는다.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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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씨의 꿈

지난해 가을부터 '회현 떡집'에는 조부모님과 부모님, 상우씨 부부와 아기까지 4대가 함께 산다. 상우씨는 군산 미룡동의 한 아파트에서 출·퇴근하는 농부였다. 농사 규모가 커지자 그의 아내는 "시댁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상우씨는 부담을 느꼈다. 그는 젊다. "일찍 들어와라", "일찍 일어나라" 같은 잔소리를 듣는 게 싫었다. 도심에서 살고 싶었다. 

"어느 일요일이었어요. 부모님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놓으시는 거예요. 저희 아기를 계속 쳐다보고 계시려고요. 그 눈빛이 너무 마음에 걸렸어요. 제가 장손으로 자라서인지 늘 마음속에 책임감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파트 팔고 들어왔어요. 와송 농사도 만 평 이상 지어서 출·퇴근하는 게 점점 힘들어졌고요."  

지난해에 상우씨는 협동조합에 11톤 트럭 두 대 분의 와송을 납품했다. 올해는 약 50만 개를 조합에 보낼 예정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까지나 안정적으로 납품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와송을 사가는 큰 회사들은 순식간에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이윤을 따라가는 곳이니까. 상우씨는 고민했다. 당장 올해 농사지어서 생기는 잉여 와송 20만 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상우씨는 동갑내기 아내 박은하씨와 오랫동안 의논했다. 그는 공동 농장을 만들 때처럼, 와송과 어성초, 자소엽으로 뭐라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잉여 약초로 비누, 화장품, 모발 스프레이, 먹는 환과 가루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한테 "관절염에 좋아요. 탈모에도 좋고요. 아토피 같은 피부 질환도요"하면서 줬다.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이해를 못했다.

"상우야. 힘들게 농사지어서 그렇게 다 퍼주면, 너 거지 되겠다. 응?"
"걱정 마세요. 모르는 걸 어떻게 돈 주고 사요? 저부터도 안 사는데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한테 와송이랑 약초가 몸에 좋다는 걸 알려 줘야죠." 

상우씨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더딘 길을 택한 셈이다. 그가 만든 약초 제품들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하루 평균 50만~70만 원씩 주문 전화가 온다. 농사지은 지 7년째, 땅 임대하고 작물 사면서 진 2억 원의 빚도 줄고 있다. 올해는 와송으로 3억 원. 떡집과 약초 가공으로 1억 원의 수익을 예상한다. 그러나 태풍이나 가뭄을 만나면, 별수 없다는 그가 말했다. 

"농부는 1년 내내 일하지 않아요. 저같이 게으른 농부도 콩 농사지어서 논 1600평을 샀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평생 소원이 논을 갖는 거였거든요. 농사는 어떤 직업보다 메리트가 있어요. 체계적으로 하면요. 저는 사람들한테 약초나 발효 식품을 알리고 싶어요. 몸이 아프면, 사람들은 산으로 가잖아요. 그 분들이 산책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어요. 약초를 가공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요. 진정한 의미의 6차 산업, 그게 제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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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시 회현면 '회현 떡집'에는 상우씨네 식구 4대가 함께 살아간다.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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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매거진군산 3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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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두려워하라”...인사동 거리서 가면 행진

[영상] “국민을 두려워하라”...인사동 거리서 가면 행진

 


'민주주의와 민생 파괴를 걱정하는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민생 파괴를 걱정하는 시민들'이 주말 도심에서 박근혜 정권 규탄 행진을 벌였다.

14일 오후 40여명의 시민둘은 서울 청계광장에 모여 행진을 시작해 종로 ‘젊음의거리', 인사동을 지나 북인사마당까지 한시간 가량 침묵행진을 했다.

시민들은 모두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등장하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정부는 국민을 두려워하라'는 글씨가 적힌 검은 현수막이 대열의 앞에 섰고, 가면을 쓰고 손에 피켓을 든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피켓에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유신부활 박근혜 아웃”, “세월호 진실을 인양하라” 등 각자 외치고 싶은 구호가 적혀 있었다.

14일 오후 40여명의 시민둘이 서울 청계광장을 출발해 종로 ‘젊음의거리', 인사동을 지나 북인사마당까지 걷는 '박근혜 정권 규탄 행진'을 하고 있다.
14일 오후 40여명의 시민둘이 서울 청계광장을 출발해 종로 ‘젊음의거리', 인사동을 지나 북인사마당까지 걷는 '박근혜 정권 규탄 행진'을 하고 있다.ⓒ민중의소리

한 참가자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 비판 유인물 살포에 대한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비판하며 "시민들이 자기 얼굴을 내놓고 정부를 비판하는 것도 힘든 세상이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행진을 제안하고 참가 지침 등을 공유해 자발적으로 모였다.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직장인까지 젊은층의 참가가 많았다.

올해 고3이라고 밝힌 한 여학생은 "세월호 참사로 떠난 학생들과 동갑인데, 그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친구들도 살아있었다면 공부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오늘 학원 가는 날인데 학원 대신 여기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고려대에 재학 중이라는 한 학생은 “학생들도 정부의 어처구니 없는 독재적 발상과 행동에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용기있게 행동에 옮기지 못해 가만히 있는 것 뿐”이라며 “양심 있는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행진을 하는 것으로 그런 용기를 불러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행진이 인사동 거리를 지나자 주말 나들이를 나온 많은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호기심에 휴대폰을 꺼내들고 이들의 모습을 담느라 분주했다.

참가자들은 오후 5시경 종로구 북인사마당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민중의노래’를 합창하는 것으로 행진을 마감했다.

14일 오후 40여명의 시민둘이 서울 청계광장을 출발해 종로 ‘젊음의거리', 인사동을 지나 북인사마당까지 걷는 '박근혜 정권 규탄 행진'을 했다.
14일 오후 40여명의 시민둘이 서울 청계광장을 출발해 종로 ‘젊음의거리', 인사동을 지나 북인사마당까지 걷는 '박근혜 정권 규탄 행진'을 했다.ⓒ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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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강한 사람이지만, 문재인은 좋은 사람

등록 : 2015.03.13 19:02수정 : 2015.03.1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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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토요판] 박성민의 ‘2017 오디세이아’
(5)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려면
노무현은 강한 사람이지만, 문재인은 좋은 사람
정치인은 ‘배은망덕’의 숙명…결단의 시간 다가와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29%까지 떨어졌을 때, 왜 사람들은 “문재인이 됐으면 잘했을 텐데”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만약 2012년 대선에서 이겨 대통령이 된 문재인의 지지율이 그렇게 떨어졌다면 “박근혜가 됐으면 잘했을 텐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꽤 있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졌을 때도 박근혜나 이회창이 되었다면 더 잘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꽤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다. 어느 대통령이라도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다면 그 자리에 있었으면 더 잘했을 것 같은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고 그건 대체로 경선이나 본선에서 아깝게 패배한 사람의 몫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29%로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불과 3.53%의 근소한 차로 졌을 뿐만 아니라 대선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은 낙선자인 문재인은 왜 그런 평가를 받지 못했을까? 그뿐만 아니다. 제1야당의 대표이자 차기 대선 주자들 중에 지지율이 1위인데도 국민은(심지어 지지자들조차) 다음 대통령으로 문재인을 확신하지 못한다.

 

 

문재인은 무엇이 부족한가?

 

현직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졌을 때 국민이 ‘그 사람’이 대통령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누군가가 쉽게 떠오른다면 그건 아마도 그가 ‘대통령 자리’에 앉은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지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여전히 국민에게 ‘문재인 대통령’은 어색하다. 대통령에 안 어울릴 것 같은 정치인(군인)도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은 대통령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지지 여부와 상관없다) 어쨌든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의 이미지가 생긴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라틴계인 산토스 의원이 대통령에 도전하게 되는데 참모가 이런 말을 한다. “의원님은 다 좋은데 목소리는 대통령 목소리가 아니에요.” 가볍게 던진 참모의 이 한마디가 산토스 의원을 주눅 들게 한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슬쩍 물어본다. “정말 내 목소리가 대통령에 어울리지 않는가?” 그렇게 물어보니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목소리는 그렇죠”라고 말한다. 그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핵심 참모는 그에게 이렇게 소리 지른다. “대통령다운 목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대통령이 내면 대통령 목소리지.” 그렇다. 문재인도 대통령이 되었다면 대통령의 이미지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떨어졌을 때도 그런 이미지가 강한 정치인들(예컨대 김영삼, 김대중, 이회창)과 비교해 봤을 때 확실히 뭔가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게 뭘까? 나는 단언컨대 ‘지도자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은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니까 그런 이미지가 없다면 국민이 대통령으로 선택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지도자는 이끄는 사람이다. 문재인은 아직도 국민과 당을 이끌지 못하고 있다.

 

국민은 대통령을 뽑을 때 세 가지를 비교한다. 업적(과거)·비전(미래)·이미지(현재)가 그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와 문재인 모두 업적은 약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의 업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주의와 싸운 업적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청계천·버스중앙차로)를 바꾼 업적이 있다. 그에 비해 두 후보 모두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었지만 문재인은 더 없었다. 비전 역시 두 후보 모두 부족했다.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메가 이슈’가 없었다. 결국 승부는 이미지에서 갈렸다.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의 ‘참모’ 이미지는 퍼스트레이디와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박근혜의 ‘지도자’ 이미지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통령 후보와 야당의 대표를 맡고도 국민에게 지도자의 이미지를 심지 못한다면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 후보도 되기 어려울 것이다.

 

선거에 나서는 모든 후보는 세 가지 지위 중 하나에 속한다. 현역이거나 계승자이거나 아니면 도전자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단임이기 때문에 대선에서 현역은 없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계승자 지위를 갖게 될 것이고 야권의 유력 후보들은 모두 도전자의 지위로 대선 후보의 자격을 얻기 위해 경쟁하게 될 것이다. 도전자 포지션인 야권의 문재인·박원순·안철수는 캠페인에서 국민과 지지자에게 세 가지를 증명해야 한다. 첫째,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나라를 잘못 이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 둘째, 내가 대한민국을 이끌 더 나은 비전과 리더십이 있다. 셋째, 내가 더 경쟁력이 있다. 첫째는 세 후보 모두의 공통 과제지만 공격은 자기의 강점이 드러나는 방향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내용은 세 후보 모두 다를 수 있다. 둘째와 셋째 과제는 후보마다 차별이 분명히 드러나는 캠페인 목표인데 앞의 것은 국민을 상대로 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지지자를 상대로 한다는 차이가 있다. 문재인 대표의 지지율이 1위라는 것은 야권 지지자들이 현시점에서는 경쟁력을 평가한다는 의미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그 자리의 주인공이 박원순 서울시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직은 우열이 드러난 것은 아니다. 세 후보 간의 의미 있는 우열은 역대 대선 경선의 사례를 봤을 때 2016년 추석 이후에나 드러날 것이다. 아직은 세 후보 모두에게 기회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의 지지율 급락하는데도
왜 사람들은 “문재인이 됐으면
더 잘했을 텐데”라 말 안할까
대선에서 근소한 차로 진 그를
차기 대통령으로 확신 못 하나

 

정치 지도자는 민주적 리더십과
소통 중요하다는 말에 동의 못해
지도자는 카리스마로 결단하고
책임지는 ‘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로운 호칭이다

 

이회창의 길 갈 거라는 비관적 전망

 

문재인은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그의 경쟁력을 회의적으로 보는 야당의 비판자들은 그가 이회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야당의 후보는 될 것 같지만 이회창처럼 확장성의 한계로 근소하게 또 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야권 지지자는 외연 확대가 가능한 박원순 시장을 유력한 대안으로 생각한다.(실제로 한국리서치가 매달 하는 조사에서 박원순 시장은 여야 대선 후보 중에 호감도 대비 비호감도의 비율이 꾸준히 가장 낮게 나온다) 그들에게는 중도 이미지의 안철수도 여전히 살아 있는 카드다. 문재인의 경쟁력에 더 비관적인 사람들은 후보가 되기도 어렵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1987년 이후 메이저 정당에서 두 번 연속으로 출마한 후보는 김영삼·김대중·이회창 세 명이다. 이들과 문재인은 두 가지에서 차이가 있다. 세 사람 모두 대선 패배 후에도 여전히 대통령에 어울리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을 70% 이상 확실히 장악했다는 것이다. 김영삼은 3당 합당할 때는 소수파였지만 1992년 대선 경선 당시에는 이미 당을 70% 장악했다.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직접 창당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이회창도 한나라당을 70% 이상 장악했기 때문에 연속으로 도전할 수 있었다. 문재인도 그럴 수 있을까? 이회창은 1997년 대선 패배 후 1년도 지나지 않은 1998년 8월에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당에 복귀했는데 문재인은 대선 패배 후 2년 뒤 전당대회에서 불과 3.5%의 차이로 겨우 이겼다. 그것도 (권리)당원에서는 졌다. 호남의 대표적 정치지도자인 박지원과 정동영, 그리고 천정배는 호남을 배경으로 문재인에 맞선다. 호남에서는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대북송금 특검을 받아들인 것과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것, 그리고 호남 인사 불이익을 근거로 문재인에 대한 지지를 유보한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역학구도로는 당의 50%도 장악하기 힘겨워 보인다. 그런 조건에서 두 번 연속 출마가 허용될까? 지역주의에 맞섰던 노무현은 특유의 당당함으로 호남에서 경선 승리를 했는데 문재인은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인과 당원의 눈치를 여전히 살피고 있는 듯 보인다. 지도자는 유불리를 따지면 안 된다. 끌려다니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지도자는 이끌어야 한다.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인과는 싸워야 한다. 지도자의 이미지는 ‘용기’로 얻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지도자에게 민주적 리더십과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도자는 카리스마를 갖고 결단과 책임을 지는 ‘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로운 호칭이다. 나는 정치인과 기업인, 그리고 군인은 매일매일 ‘실존적 결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보다는 ‘강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강한 사람은 합목적적이고 좋은 사람은 합리적이다. 강한 사람은 단점이 많지만 강점도 많다. 좋은 사람은 장점이 많지만 약점도 많다. 좋은 사람은 훌륭한 학자, 종교인, 언론인, 법조인, 시민운동가가 될 수 있지만 위대한 정치인, 군인은 되기 어렵다. 노무현은 강한 사람이지만 문재인은 좋은 사람이다. 2012년 박근혜와 문재인이 맞붙었을 때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말한 두 종류의 권력이 떠올랐다. 그는 “죄의식이 없고, 귀족적 야수성을 가졌으며,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고, 깨끗한” ‘전사의 권력’과 “금욕적이고, 반성적이며, 죄의식적이고, 괴로워하고, 분개하는” ‘도덕적 권력’의 싸움으로 문명의 발전사를 봤다.

 

국민은 지도자의 정책이나 노선을 보고 지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국민은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먼저 본다. 결국 노선이 아니라 리더십이 중요한 것이다.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했을 때, 김대중이 김종필과 디제이피(DJP) 연대를 했을 때, 노무현이 재벌인 정몽준과 단일화를 했을 때, 박근혜가 경제민주화·복지 등 진보 의제를 수용했을 때도 지지자들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을 좋아했고 지도자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대중은 이슈보다는 이슈를 다루는 태도를 더 중요하게 보기 때문에 유불리 따지지 않고 앞서 싸우는 전사의 권력을 더 신뢰한다.

 

문재인은 과거의 대통령들이 가졌던 확실한 기반이 없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물리적 기반(총과 돈)이 없다. 김영삼·김대중의 역사적 기반(민주화를 이끌었다)도 없다. 노무현의 도덕적 기반(3김의 지역패권주의와 싸웠다)도 없다. 박근혜의 지역적 기반(그는 대구·경북과 충청 두 곳을 고향으로 인식시켰다)도 없다.

 

그는 김대중이 가졌던 사상가의 자질인 ‘통찰력’도 없다. 김영삼이 가졌던 정치가의 자질인 ‘결단력’도 없다. 박정희가 가졌던 경영가의 자질인 ‘추진력’도 없다. 노무현이 가졌던 운동가의 자질인 ‘설득력’도 없다. 그럼 문재인은 무엇으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가?

 

 

노무현과 김근태의 차이, 배은망덕의 숙명

 

정치캠페인의 전략적 목표는 ‘사적 욕망’을 ‘공적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만약 문재인이 친노의 사적 욕망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사적 이미지’에 머무르고 말 것이고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실존적 결단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강한 사람 노무현은 자기를 정치적으로 키워준 김영삼·김대중의 공보다는 과를 많이 보고 싸웠기 때문에 대통령이 됐다. 정치인은 배은망덕의 숙명을 타고났다. 좋은 사람 김근태는 김영삼·김대중의 공을 더 크게 봤기 때문에 그들을 극복하지 못했다. 문재인도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당내 지역주의와 싸워야 한다. ‘대한민국과 싸우는’ 세력과 결별하지 않고는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는’ 이미지의 보수를 이길 수 없다. 국민은 대통령을 뽑을 때는 국회의원이나 서울시장을 뽑을 때보다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한다. ‘시민’의 정체성에서 ‘국민’의 정체성으로 기준이 이동한다. 안보 이슈가 대선에서 중요한 이유다. 당을 위해 헌신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당이 희생해 달라는 정치인들과 결연히 맞서 싸우지 않으면 반대자들에게 조롱을 당할 것이다. 국민은 사자를 지도자로 선택한다. 대한민국을 반드시 경영해보겠다는 의지 없는 정치인을 지도자로 뽑지 않는다. 박정희·전두환·김영삼·김대중·박근혜 모두 강한 권력의지를 갖고 있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목숨까지 건 사람들이다. 노무현도 쉽지 않은 상대와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열렬한 지지층을 만들어냈다. 노무현은 1988년에 국회의원이 된 후 14년 뒤인 2002년에 대통령이 됐다. 이명박은 1992년에 국회의원이 된 후 15년 뒤인 2007년에 대통령이 됐다. 박근혜는 1998년 국회의원이 된 후 14년 뒤인 2012년에 대통령이 됐다. 15년쯤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을 지켜본 뒤 나라를 맡긴 것이다. 국민은 문재인의 공적 활동의 기점을 언제로 판단할까? 2012년 국회의원이 된 시점이라면 아직은 이르다고 볼 것이고 2003년으로 본다면 경쟁자들보다 유리할 수 있다. 그보다 먼저 문재인이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지도자가 되지 않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가?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다음 호에는 ‘그들은 어떻게 지도자가 되었나?’를 주제로 다룰 것이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1991년 설립한 ‘민(MIN) 컨설팅’ 대표. 30년간 정치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수많은 선거를 이끌었다. 전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승리를 위한 캠페인 방법을 몸으로 익혔다. 세계 최고의 전략컨설팅 회사를 꿈꾼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다. ‘힘든 일은 있어도 나쁜 일은 없다’는 인생관으로 버틴다. 책과 영화, 커피를 사랑하며 걷는 것을 즐긴다. ‘2017 오디세이아’를 통해 차기 대선을 향한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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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버스'의 부활... '이창근의 눈물' 통했다

 

[현장] 쌍용차 희망행동 1000여 명 참여... 2만6000개 자물쇠 첫 발

15.03.14 19:09l최종 업데이트 15.03.15 08:3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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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오후 이창근 쌍용차노조 기획실장이 92일째 굴똑농성중인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앞에서 희생자 26명 명예회복과 해고자 187명 복직을 응원하는 '3.14 쌍용차 희망행동' 행사가 전국각지의 투쟁사업장 노동자와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공장벽에 '우리 살자' '사랑해' 글씨가 비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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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자들이 굴뚝위 이창근 기획실장을 향해 휴대폰 불빛을 흔들며 함성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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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14일 오후 9시 3분]

"사랑해" "우리 살자" 

빛과 함성 소리는 철조망을 넘어 굴뚝에 닿았다. 굴뚝 아래 노동자들이 어두컴컴해진 쌍용차 공장 벽과 굴뚝으로 투사한 대형 빛 글자가 나타나자, 굴뚝 위 노동자도 "또 와요"라고 굴뚝에 새긴 글자에 손전등을 비춰 화답했다. 

'이창근의 눈물'이 통했을까? 14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 앞은 전국에서 모인 1000여 명의 노동자와 시민들로 가득 찼다. 쌍용차 굴뚝 농성 92일째를 맞아 전국에서 다시 '희망버스'가 출발한 것이다(관련 기사 : "우리가 앵벌이도 아닌데..." 쌍차 굴뚝농성 이창근의 눈물). 

지난 11일 김정욱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이 노사 교섭을 위해 내려오면서 굴뚝 위엔 이제 이창근 기획실장 혼자 남아있다. 쌍용차 희생자 26명의 명예 회복과 해고자 187명 의 복직을 응원하는 '3.14 쌍용차 희망행동'의 의미가 그만큼 더 절실해진 것이다. 이날 굴뚝을 에워싼 철조망엔 각양각색의 자물쇠들이 달려 홀로 남은 굴뚝 노동자를 응원했다. 당신은 외롭지 않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고.

전국서 모인 희망버스 "혼자 남았지만 외롭지 않다" 

이날 오후 쌍용차 천막 농성장이 있던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출발한 버스 5대를 비롯해 부산, 목포, 수원 등 전국 곳곳에서 출발한 '희망버스'가 굴뚝 앞으로 속속 도착했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참가자, '굴뚝신문' 배달부처럼 이창근 실장이나 쌍용차지부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을 직시하려고 멀리 독일에서 온 유학생, 캠퍼스를 벗어나 현실로 뛰어든 교수와 대학생, 희곡작가, 시인, 수녀까지 참가자들의 이력도 사연도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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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행동에 참여한 수녀들이 굴뚝농성중인 이창근씨를 향해 기도를 한 뒤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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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들이 쌍용자동차 공장 철망에 희생자와 해고자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희망 자물쇠'를 매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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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버스 4호차에 탑승한 한경화씨는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을 향하던 희망버스에서 처음 만난 이창근 실장을 떠올렸다. 한씨는 "한진 본사 앞에서 24시간 1인 시위를 벌일 때 이창근은 주변 모두를 채우는 힘을 보여줬다"면서 "이창근이 아프니 모두 아프다, 함께 그 아픔을 채우자"고 당부했다.

한 서울지하철 노동자는 "야만적인 사회에서 행동하는 사람을 응원하러 가는데 (오히려) 한진중공업(희망버스)처럼 위로 받고 올 수도 있다"면서 "이창근 실장이 <오마이뉴스> 팟짱과 인터뷰하며 우는 걸 보고 외롭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이들을 비롯해 희망행동 참가자들은 응원 메시지를 담은 편지를 준비했다. 김득중 쌍용차지부장과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 이형자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 총무는 이날 오후 대표로 쌍용차 공장 안으로 들어가 이 편지들을 이창근 실장에게 직접 전달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도 굴뚝을 찾았다. 아직 실종 상태인 단원고 학생 허다윤양 어머니 박윤미씨는 이날 만남의 행사에서 단상에 오르자마자 울먹였다. 박씨는 "쌍용차에서 희생당한 26분을 봤는데 가족을 잃은 아픔을 우리도 잘 안다"면서 "아직도 내 딸은 수학여행 가서 333일 동안 그 차가운 바다에 있다, 우리가 바라는 건 내 딸과 실종자 9명이 돌아와 (우리가) 유가족이 되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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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세 생일을 맞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에게 집회 참가자들이 "사랑합니다"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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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앞에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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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이곳에서 여든 세 번째 생일을 맞았다. 백 소장은 "쌍용차 문제 해법은 석 달 넘게 굴뚝에 있는 이창근을 내려오게 하고 박근혜가 저기 딱 1초만 올라가게 하는 것"이라면서 "박근혜와 인도 마힌드라 회장, 쌍용차 사장이 굴뚝 위에 올라가면 쌍용차 문제도, 전국 해고자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전국 투쟁 노동자들 한 자리에... '4월 총파업' 각오 다져 

이날 행사는 전국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준비한 각종 먹을거리와 전시 행사 등으로 시골 장터를 연상시켰다. 이창근과 쌍용차 노동자뿐 아니라 전국에서 투쟁 중인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이 서로 격려하고 연대의식을 다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굴뚝 노동자' 역시 이창근 실장만이 아니다.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 대표도 사측의 폐업에 맞서 지난해 5월 27일부터 경북 구미 스타케미칼 공장 굴뚝에 올라가 300일 가까이 굴뚝 농성을 벌이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101명 해고에 맞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동양시멘트 노조, 쌍용차 해고자 마음을 치유했던 계약직 '마음 치유사' 복직을 위해 투쟁 중인 마인드프리즘 노조, KTX 여승무원 노조 등 수백 수천 일씩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전국 사업장 노동자들이 저마다 선전전을 벌이는 한편 증언대회를 진행했다.

쌍용차지부장 출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도 비정규직, 해고자 문제 해결을 위해 '4월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이날 "이 땅의 수많은 이창근 동지, 당신들의 이름으로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당신이 맞선 겨울이 가고 봄이 만연한 4월에 이 땅에 두발로 서서 4월 총파업을 함께 하기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이날 오전 쌍용차 굴뚝이 바라다 보이는 철조망에 이창근씨 부인과 아들이 단 하트 모양 자물쇠를 시작으로, 자물쇠는 하나둘 늘어, 날이 저물 무렵엔 수십, 수백 개로 불어났다. '희망 자물쇠' 달기는 앞으로 쌍용차 희생자 26명을 상징하는 2만6000개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앞으로 쌍용차 문제가 해결되면 노사가 함께 만들 '분홍 도서관'에 상징물이기도 하다. 

남산 타워에 사랑의 징표로 자물쇠를 다는 연인들처럼 쌍용차 희생자와 해고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담았다. 이창근 실장은 전날 '팟짱' 전화 인터뷰에서 "열쇠를 버리지 말고 잘 간직하고 있다 쌍용차 문제가 해결되는 날 자물쇠를 풀어 분홍 도서관에 다시 달아 달라"며 울먹이기도 했다. 그 열쇠를 보면서 자신들을, 전국의 해고 노동자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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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근 기획실장 아내와 아들이 매달아 놓은 '희망 자물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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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통화로 연결된 이창근 기획실장이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하트'를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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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근 기획실장이 92일째 농성중인 굴뚝과 가까운 곳에서 '3.14 쌍용차 희망행동' 행사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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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근 실장은 이날 오후 7시 30분쯤 스마트폰 화상 통화로 참가자들과 '소통'했다. 이 실장은 "여러분은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우리도 당당히 싸우고 있고 당신만 힘든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러 온 것"이라면서 "모두가 서 있는 곳이 굴뚝이고 생존의 현장"이라고 참가자들을 오히려 격려했다. 

이 실장은 "함께 죽을 수 없다, 함께 살아야 한다"면서 "기다리고 인내하고 교섭하고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김득중 쌍용차지부장은 "2009년 이후 세 번째 고공 농성이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란 결기로 싸우고 있고 굴뚝 앞 집회도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란다"면서 "노사 교섭으로 이창근 동지가 내려오고 해고자들이 모두 공장에 돌아가는 봄을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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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위한 화해 방안이 ‘박정희 찬양?’

 
 
국민대통합 기획단장, 제주 4·3 토론회에서 박비어천가를 부르다
 
임병도 | 2015-03-14 09:31:0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3월 12일 제주에서 ‘화해와 상생을 위한 제주 4·3 도민 대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제주 4·3희생자 추념일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았으니, 토론회가 열릴 수 있지만, 이번 토론회는 시작부터 신기했습니다.

보통 토론회는 제주 시민단체나 유족회가 주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새누리당 제주도당이 주최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새누리당이 공식적으로 토론회나 행사를 주관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더욱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새누리당 제주도당이 주최하고, 4.3유족회와 경우회 도지부가 공동주관하여 진짜 제대로 된 토론회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4.3유족회와 경우회는 각자의 입장이 다른 단체이다. 4.3유족회는 민간인 희생자들이고, 경우회는 4.3사건당시 토벌에 앞장섰거나 무장대에 희생된 경찰들이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이 두 단체가 서로 입장이 달라 매번 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국민대통합 기획단장, 제주 4·3 토론회에서 박비어천가를 부르다’

새누리당 제주도당이 주최한 ‘화해와 상생을 위한 제주 4·3 도민 대토론회’는 유족과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하는 등 시작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첫 번째 주제 발표자로 나선 최홍재 대통령직속국민대통합위원회 기획단장의 ‘지금은 국민대통합시대’라는 발표에 황당하기만 했습니다.

▲최홍재 단장이 제주 4·3 토론회에 대통합 사례로 발표한 자료 ⓒ제주의 소리

최홍재 국민대통합 기획단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은 국민대통합 주요 사례’라고 하면서, 대통합 사례로 ‘잘 살아보자’와 ‘새마을운동’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최 단장은 “어두운 면도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빈곤에 허덕이던 196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해외로 나가 ‘우리나라에 고속도로를 뚫겠다’며 돈을 빌려왔다” 1면서 박정희라는 인물을 찬양하는 식으로 발언을 이어나갔습니다.

참석자들이 제주 4·3 도민 대토론회에 갑자기 새마을운동 이야기가 나오자 어리둥절했지만, 최 단장은“새마을 운동 당시에는 전국민이 다 같이 잘 살기 위해 하나 됐다”는 말도 언급했습니다.

최홍재 국민대통합 기획단장의 발표가 황당했는지 토론회 사회자였던 유철인 제주대 교수조차 “오늘 발표내용은 마치 정부 정책 홍보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 언급되지 않아 아쉬웠다. 자리에 함께 했다면 묻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최 단장이 주제 발표 이후 토론회는 참석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최홍재 국민통합 기획단장은 뉴라이트 계열 시대정신 편집위원과 MBC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거쳐,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은평갑 국회의원 후보로 나왔었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국민소통비서관실 선임 행정관으로 근무하다 국민대통합위원회 기획단장에 임명됐다.

 

‘국민대통합, 과연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국민대통합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었습니다. 인수위가 ‘특별위원회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설치했고, 지난 2013년 5월 '국민대통합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이 대통령령으로 제정됐습니다.

▲국민대통합위원회에 게재된 위촉위원과 정부위원, 정부위원은 모든 장관들이 망라되어 있다. ⓒ국민대통합위원회 홈페이지

현재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은 한광옥 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입니다. 위원회에는 위촉위원이라는 시민단체 위원과 정부위원이 있습니다.

위촉위원은 각계 인사이기 때문에 그만두고라도, 정부위원은 그냥 박근혜 정부 장관들을 모두 나열해놓고 있습니다.

과연 장관들은 자신들이 국민대통합위원회 정부위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대통합을 외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갈등이 더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또한 갈등을 조정하겠다는 갈등관리위원회는 축소되고만 있습니다. 2
 
국민대통합위원회는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강정 해군기지나 ‘밀양송전탑’, ‘쌍용차 사태’ 등은 쳐다도 보지 않고, 그저 용산 화상 경마장 시위 현장에 나가 마사회 입장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기도 했습니다.3
 
국민과의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는 이런 위원회가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갈등을 더 유발하는 대통령’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대통합을 위한 갈등 조정 능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정부는 갈등을 더 유발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제주 4·3을 말하면서 꼭 요구하는 일이 박근혜 대통령의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 참석입니다. 대통령이 자신이 제정한 국가 추념일에 참석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오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오는 일이 무슨 대단한 희망사항이라고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지난 수십 년 간 정부로부터 외면받았던 제주도민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제주 4·3 희생자추념일에 공식적으로 참석한다는 자체가 자신들의 고통과 갈등을 해결해주겠다는 강한 의지로 보고 있습니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를 방문해 사건 발생 55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은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자는 뜻”이라고 밝혔습니다.

화해와 상생을 말하면서 제주 4·3이 아닌 박정희와 새마을운동 찬양을 외치는 박근혜 정부의 모습으로는 절대 진정한 화해와 상생, 국민대통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제주 4·3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제주도는 이번 제주 4·3희생자 추념일에 박근혜 대통령이 오느냐 마느냐를 놓고 말들이 많습니다. 지금 제주도민에게 필요한 것은 ‘박정희와 새마을운동 찬양’이 아닌, 박근혜 대통령의 제주 4·3희생자 추념일 참석입니다.

간단한 일조차 하지 못하면서 국민대통합을 외치며 세금을 소모하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누가 갈등을 만들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 제주의소리. http://goo.gl/fSD2R7
2. 국민대통합 내건 박근혜 정부, 갈등관리 인원은 2명. 오마이뉴스 2014년 9월 22일.http://goo.gl/ytFlPZ 
3. 뉴스타파. http://newstapa.org/23648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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