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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 맞은 6.15민족공동위원회

부침겪은 '상설적 전민족적 통일운동연대기구'<친절한 통일씨> 10주년 맞은 6.15민족공동위원회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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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08  23:5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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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이 만들어낸 '감격시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발표는 한반도 분단지형을 크게 뒤흔들었다. 남북정상회담의 여파는 곧바로 민간으로도 파급돼 2001년 6월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발표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가 열렸다.

   
▲ 2001년 금강산에서 열린 6.15민족통일대토론회 한 장면. '감격시대'가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남측은 7대종단과 민화협, 통일연대 등으로 구성돼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1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가, 북측은 ‘6.15-8.15 민족통일촉진운동을 위한 북측준비위원회가’ 구성돼 6.15대토론회를 공동주최했으며, 남북해외 대표단은 상봉의 감격을 누렸다. 이른바 '감격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남측 정부의 일부 대표단에 대한 ‘선별 방북 불허’ 조치가 시작됐다.

처음으로 평양에서 열린 8.15민족통일대축전은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의 행사를 불허한 남측 당국의 지침으로 갈지자를 걸었고, 보수 언론들은 강정구 교수의 만경대 방명록 서명문구를 문제삼는 등 파행으로 얼룩져, 결국 7명의 대표단이 구속되고 임동원 통일부장관이 물러나야 했다.

이후, 2002~2004년 꾸준히 6.15, 8.15공동행사 등이 추진됐고, 청년학생, 여성, 노동, 농민 등 부문별 교류가 확대됐다. 특히 2003년 ‘3.1민족대회’는 처음으로 북측 대표단이 방남해 서울 워커힐에서 행사가 열렸다.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와 부산 아시안게임에 북측 선수단과 응원단이 참석해 바람을 일으켰고, 2004년 6.15우리민족대회는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인천에서 개최됐으며, 통상적인 공동행사추진본부에 더하여 인천지역 종교, 시민사회단체와 인천시까지 포괄하는 대회조직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했다.

난산 끝에 탄생한 옥동자, 6.15공동위원회

이러한 민간교류의 확대, 심화 과정을 거쳐 2004년 11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해외 통일단체 대표회의에서 6.15공동행사준비위원회 결성이 합의됐고, 이에 따라 12월 6.15북측준비위와 2005년 1월 6.15남측준비위원회, 3월 6.15해외측준비위원회가 결성돼 마침내 2005년 3월 4일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 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이하 6.15공동위원회)가 탄생했다.

   
▲ 2005년 3월 4일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6.15공동위원회' 결성식 모습. 왼쪽부터 백낙청 6.15남측위 상임대표, 안경호 6.15북측위 위원장, 곽동의 6.15해외측위 위원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6.15공동위원회 결성식은 6.15해외측위원회 위원장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6.15남측위원회 백낙청 상임대표와 6.15북측위원회 안경호 위원장, 6.15해외측위원회 곽동의.문동환 공동위원장 4인이 공동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봉합됐다. 또한 이규재 범민련남측본부 의장과 한총련 대표 등도 방북을 승인받아 ‘선별 방북 불허’ 문제에 진전이 있었다.

6.15공동위원회는 결성선언문에서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 해외 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공동선언에 기초하여 나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분열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 해외의 각 계층, 정당, 단체, 인사들을 가장 폭넓게 망라하여 결성된 상설적인 전민족적 통일운동연대기구”라고 밝혔다.

<6.15공동위원회 조직도>

 

 

 

6.15민족공동위원회 회의

 

 

 

 

 

 

 

 

 

 

 

 

 

 

공동위원장 회의

 

 

 

 

 

 

 

 

 

 

 

 

 

 

실무 회의

 

 

 

 

 

 

 

 

 

 

 

공동사무국

(사무국장, 사무부국장)

 

 

 

 

 

 

 

 

 

 

 

 

 

 

 

 

6.15북측위원회

(명예공동위원장, 위원장, 부위원장, 위원, 사무국장, 사무부국장)

 

6.15남측위원회

(고문, 상임고문, 명예대표, 상임대표, 공동대표, 운영위원, 공동집행위원장, 사무처장, 협동사무처장)

 

6.15해외측위원회

(명예위원장, 위원장, 부위원장, 위원, 사무국장, 사무부국장)

 

 

 

 

 

 

 

 

12부문 분과위

 

9부문 본부, 13지역 본부

 

7지역 위원회

(자료출처 - 김치관,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공동행사에 관한 연구, 2006. 수정)

6.15공동위원회 결성을 전후로 6.15남측위원회 산하에 여성, 농민, 교육, 체육, 학술, 언론, 노동, 문예본부 등 9개 부문본부와 전북, 부산, 대전충남, 인천, 대구경북, 경기, 충북, 경남, 제주, 울산, 서울, 광주전남, 강원 등 13개 지역본부가 조직됐다. 6.15북측위원회도 12개 부문별 분과위원회가 구성됐다. 6.15해외측위원회는 7개 지역위원회가 결성됐다.

6.15민족공동위, ‘제2의 6.15 시대’를 열다

조직적 준비를 마친 6.15공동위원회는 2005년 6.15통일대축전을 10만 평양시민의 열기 속에 평양에서 개최했고, 여기에 처음으로 남북 정부의 당국 대표단이 함께 참여했다. 특히 이 기회에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특사자격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갖고 경색된 남북관계를 타개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 남북 당국 대표단이 처음으로 참석한 가운데 10만 평양시민들의 환호 속에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2005년 6.15민족통일대축전. '제2의 6.15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6.15공동위원회가 처음으로 주관한 2005년 6.15통일대축전은 ‘선별 방북 불허’가 사라지고 당국 대표단이 참가하는 등 전 민족적 통일축제로 치러져 이른바 ‘제2의 6.15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광복 60년, 분단 60년에 서울에서 열린 2005년 8.15민족대축전은 남북통일축구로 관심을 모았고, 김기남 노동당 비서 등 북측 당국과 민간 대표단이 국립현충원을 참배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열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부문별 통일선봉대를 뛰어넘어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백두한라민족통일대행진단’이 전국을 누비며 자주평화통일 의지를 나누기도 했다.

6.15공동위원회는 2005년 12월 중국에서 심양에서 회의를 갖고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이하 6.15민족공동위원회)로 개칭하고, 6.15민족공동위원회 회의와 공동위원장 회의, 실무 회의 등 3개의 회의체계를 두기로 했다.

광주에서 열린 2006년 6.15민족통일대축전은 6.15남측위원회와 광주지역 단체들이 함께 행사위원회를 결성해 주관했으며, 목포에서 예술공연을 진행하는 등 인천에 이어 민족공동행사의 지방 개최를 현실화했다. 그러나 6.15해외측위원회 대표단 일부의 ‘입국 거부’라는 문제점도 발생했다. 이후 8.15공동행사는 북한지역의 수해 발생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강요된 '분산개최 시대', 언제 끝날까
 

   
▲ 마지막 민족공동행사로 기록된 금강산에서 열린 2008년 6.15민족통일대회.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북한의 핵실험 여파 등으로 평양에서 열린 2007년 6.15민족통일대축전은 남측 당국 대표단이 참석하지 않았고, 한나라당 의원의 주석단 배치 문제로 파행을 겪었다. 2차 남북정상회담이 예고된 가운데 8.15공동행사를 부산에서 치르기 위해 준비했지만 해외 대표단 ‘입국 거부’ 전례와 한미합동군사연습 등으로 무산되고 분산 개최됐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남북관계는 일반적 전망과는 달리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2008년 금강산에서 개최된 6.15민족통일대회는 당국 대표단 참석은커녕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등 명맥만 유지했고, 그 이후에는 공동행사다운 공동행사는 열리지 못했다.

이후 남과 북, 해외는 6.15, 8.15행사를 각각 분산 개최했고, 실무 회의나 공동위원장 회의조차 남측 정부는 거의 불허했다. 심지어 2013년 7월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채 베이징에서 열린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 결과 통일부는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등에게 과태료를 부과하기도 했다.

   
▲ 20013년 7월 베이징에서 열린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단 회의 모습. 왼쪽부터 김완수 6.15북측위 위원장,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곽동의 6.15해외측위 위원장.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참석한 이창복 의장은 정부로부터 과태료를 부과받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남측의 정권교체와 이후 2010년 5.24조치 등으로 민간교류가 가로막히자 6.15민족공동위원회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고, 6.15남측위원회 역시 남측에서 분산 개최되는 6.15, 8.15행사 등을 관례적으로 주관하는 것 외에 특별한 활동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6.15남.북.해외측위원회는 6.15민족공동위원회 결성 10주년을 맞은 지난 4일 공동결의문을 발표, “6.15남북공동선언 발표 15돌과 조국해방 70돌에 남과 북, 해외의 각계층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공동의 통일대축전들을 성대히 개최하고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 언론인, 종교인을 비롯한 계층별, 부문별, 지역별 단체들 사이의 왕래와 접촉, 통일회합과 협력교류를 활발히 벌여 나갈 것”이라고 결의했지만 실제 민족공동행사가 성사될 수 있을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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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우물 파기'와 '버티기'

 
김인숙 수녀 2015. 03. 07
조회수 58 추천수 0
 

 

 

네가 할 수 있는 그걸 꽉, 잡아

 

 

 

 

글의 주인공 청소년들은 살레시오 남녀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마자렐로센터>와 <살레시오 청소년센터>에 현재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법원에서 ‘6호처분’이라는 재판을 받았습니다. '6호 처분’이란 소년법 제32조에 의한 보호처분을 말합니다. 비행성이 다소 심화되어 재비행의 우려가 있는 청소년을 교육을 통해 개선하기 위한 법입니다. 센터에 머무는 법정기간은 6개월이며 퇴소 후 집으로 돌아갑니다.

주인공 청소년들 가슴에는 대부분 아픈 가정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 인생의 산전수전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이 글은 유혹과 열정, 막무가내 용기로 살았던 자신들의 경험을 진솔하게 들려주면서 그것을 통해 같은 청소년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을 전하는 또래 멘토들의 이야기입니다.     

 

 

 

 

센터 생활 1년을 마치고 퇴소하던 날, 왠지 슬펐다. 밖에 나가서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아빠랑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어 어색하면 어떡하지? 엄마는 별거상태. 이런저런 걱정에 다시 센터로 들어가야 하나? 그런 생각까지 스쳤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이 평범한 자유를 다시는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1년 전, 나는 분류심사원에서 센터로 옮겨와, 이곳에서 6호처분 기간인 6개월을 무사히 마쳐서 그때 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업이 악화된 아빠의 권유를 받아들여 다시 6개월을 연장했던 것이다. 센터에 왔을 때 난 16살에 초졸이었으나 고등학교 입학 자격증인 고입검정고시 하나를 따고 나왔다.


센터를 퇴소한 나는 아빠가 살고 있는 서울 지역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다시 아빠를 따라 여주로 전학을 갔다. 학교 적응은 쉽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것은 친구 관계였다. 나는 나랑 성적이 비슷한, 그러니까 거의 뒤에서 노는 아이들끼리 어울렸다. 그러나 그 아이들과도 나는 뭔가가 달랐다. 방황하고 놀던 센터 아이들하고는 대화도 잘 통하고 또 그게 정상인 줄 알고 살았는데, 학교 친구들은 대화의 내용도 차이가 났다. ‘내가 많이 미흡하구나.’를 절감했다.


아빠는 평범한 학생의 길을 가고 있는 나에게, 네가 이렇게 잘 할 줄 몰랐다며 여기까지 온 것을 칭찬해 주었다. 내 또래라면 당연한 학교생활을 말이다. 그래서 나도 '여기서 무너지면 이때까지 한 것이 허무하다' 이러면서 마음을 잡았다.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일단 고등학교는 졸업하고 보자 다짐했다. 중학교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듣는 고등학교 수업은 너무 멍했다. 전혀 모르면서 앉아 있는 시간이 정말 아까웠다.

어느 날 국어시간이었다. 못 알아들으면서 멍 때리고 있는 게 싫어서 핸드폰만 만지고 있을 때 선생님이 물었다. 


  “너 뭐하냐?” 
  “핸드폰 만지는데요?”
  “수업 시간에 왜 그렇게 하는데?”
  “수업 재미없어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수업 끝나고 얘기하자.”

 

교무실에 불러간 나는 선생님께 솔직히 말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줄 모르겠고, 선생님이 학생 가르치시는 건 맞는데 왜 잘 하는 아이들 기준으로 가르치냐고,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럼 복습, 예습을 잘 하라 했다. 할 말이 없었다. 짜증도 났으나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교무실을 나오기 전 나는 선생님께 아이들 앞에서 반항해서 죄송하다고 사과드렸다.

 

study.jpg

 

*수업시간 모습. 영화 <써니> 중에서

 

 

얼마 뒤 난 또 다른 선생님이랑 부딪쳤다. 그 분은 나에게 '너는 머리도 나쁘고'로 시작하여 나의 가정사까지 들먹이며 비수를 꽂았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분을 향해 실실 웃으며 비꼬았다.  
  “그래요? 난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너, 잘 하는 거 아무것도 없어. 딴 얘들을 봐라. 아무리 공부는 못해도 하는 시늉은 한다. 넌 겉으로 보면 학생이냐 학생이 아니냐?”


기분이 무척 나빴으나 맞는 말 같았다. '교복만 입으면 학생인 줄 알지만 넌 껍데기일 뿐이야' 이런 뜻으로 들렸다. 사실 우리 학교는 전통있는 학교였다. 그런 학교를 내가 운 좋게 들어온 것이다. 나는 선생님께 야단맞은 적도 많았으며 그때마다 자주 반항하고 대들곤 했다. 그러나 예전과 확실히 달라진 점은 선생님을 대할 때는 ‘선생님’으로 생각하고 대했다. 그래서 실수를 한 후에는 죄송하다고 말했다. 예전처럼, 내가 왜 기를 눕혀야 되느냐 는 식으로 힘을 부리지 않았다.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을 뿐더러, 결과적으로 그런 행동은 내 자신만 더 불리한 자존심 세우기임을 나는 이제 알고도 남았다. 

 

정말 부끄러운 얘기 하나 하겠다. 이 학교에 갓 전학을 오던 고 1때였다. 아이들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학 온 나에 대해 무척 알고 싶어 했다. “너 왜,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온 거야?” 하면서 내 곁으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다니던 나의 과거 얘기를 했다. 그게 나한테는 자부심, 자랑거리였으며 또 '나는 세다' 이런 걸 아이들 사이에 은근히 알리는 기회로 잡았다. 내 얘기를 들은 아이들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무슨 시나리오를 듣는 것처럼 '와, 대단하다, 신기하다'면서 나의 기대보다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런 얘길 해서 그런지 아이들은 나를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그래서 편하게는 지냈다. 그러나 나의 허세는 중학생일 때나 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센터를 퇴소하면서 ‘아, 나는 이제 충분히 성숙해졌어’ 이러고 나왔는데……. 학생이 술 먹고, 담배 피웠던 일을 무슨 자랑거리마냥 떠벌렸던 그 자체가 너무 철없고 정말 숨고 싶었다. 아니 그냥 가만히나 있으면 되잖아?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니었잖아? 지금 생각해도 진짜 쪽팔리고 숨고 싶다. 나는 그때 그 일로해서 과거는 과정이라고만 생각해야지 자랑거리는 절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고사성어의 '구밀복검'처럼 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앞모습과 뒷모습은 달랐던 것이다. 

 

나는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학교에 적응이 되어가는 것 같았으나 왠지 마음 한편에서는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거 맞아? 이렇게 학교 다니는 거 맞아?'하고 의심이 들었다. 이런 심정을 친구한테 얘기 했더니 고맙게도 그 친구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공부 못해도 그냥 학교 다니는 거 당연한 거야. 대학교까지는 우리가 해야 되는 임무 아냐?"
친구의 대답에 나는 '아, 당연한 것이구나' 하면서 받아들였다. 학교다니는 아이들과 지내다보니 학교 아이들의 환경에 적응하게 되면서 걔네들의 기준에 맞추려고 나는 노력했다. 그런데도 뭔가 내가 많이 뒤쳐진다는 자격지심을 느끼고 그런 것 때문에 친구랑 싸운 적도 많았다.

학교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건 한문밖에 없었다. 어느 날 과학시간이었다. 정말 나가고 싶었으나 나가면 혼나니까 난 갑자기 선생님을 향하여 크게 소리쳤다.


  “선생님, 저 한문하면 안 돼요?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선생님은 수업 끝나고 얘기하자 했다. 나는 선생님께 내가 한문 자격증을 딸 건데 수업 방해 안 되게 한문이라도 공부하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알겠다, 수업에 피해만 안 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난 과학시간에 한자 외우기를 계속했다. 이 사실이 다른 선생님께도 알려졌다. 아마 과학선생님이 내 얘기를 하신 것 같았다. 
  “네가 한자 공부하는 이선화냐. 내 수업도 듣기 어려우면 그렇게 해라. 잘 할 수 있어.”
하시며 나를 도와주셨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이 안 좋으셨을까. 내가 한자 하나라도 잘 하니까 얘들도 그것을 인정해 주었다.

 

나에게 한자는 그림 같았다. 그래서 한자를 영상 시켜서 외우는 게 나만의 한자 암기력 방법이다. 나는 한자를 혼자 공부하여 8급에서부터 계속 올라가 고 3때 2급까지 땄다. 3급 때는 진짜 때려 치려다가 견뎠다. 그 고비를 넘기고 2급 따고 나니까 아. 나도 할 수 있네. 자신감이 생겼다. 한자 때문에 나는 중국어를 쉽게 할 수 있었고 우리 말 단어 뜻을 어림짐작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1급도 도전하려고 했는데 교재를 펴보니 중국책 보는 것처럼 막막했다. 그래도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아빠가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해서 일단 중지했다. 한자는 또한 나를 테스트 하는 도구였다. 오늘 이것만 외우고 놀자. 하면서 하루 외울 수 있는 분량을 내 스스로 정했다. 한 30자 정도였다.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나는 계속 들락날락하면서 외웠다. 바람 쐬고 들어오면 또 하고자 하는 새로운 마음이 생겼다.

 

 

 

 

'난 할 수 없어' 좌절하는 너에게

 

사랑하는 친구야!


고등학교에 입학 한 나는 항상 생각을 하고 살았어. 생각 안 할 수가 없었지.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자극주지.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지. 또 포기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 줄 것은 뻔하지…. 진짜 학교에서 무시받고 그럴 땐 다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었으나 그것도 임시방편 같았어. 앞으로 내가 80년을 산다면 나는 지금 10대 인데, 이제 시작인데 여기서 힘들다고 돌아서면 정말 내 미래는 초라할 것 같았어. 

 

그래서 너무 힘들 때는 내 자신부터 닦아야 될 것 같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일주일 동안 집에 있기도 하고, 그래도 힘들면 학교에 와서 ‘리클래스’에 혼자 있거나 선생님이랑 같이 있기도 했어. 거기서 독서하고 상담도 했어. 그러면 출석체크가 되었어. 수업시간에 잠이 오면 자고, 잠도 안 오고 심심하면 한자를 외웠어.

 

친구야!
난 진짜 많이 수업을 빠졌어. 무단으로도 빠지고 아이들이랑 재미로도 빠졌어. 하지만 학교 규칙 한도 내에서 놀고 도망 다녔어. 학교를 벗어나지 않고도 충분히 놀 수 있었어. 학교 다니면서 즐거웠던 일은 교복입고 아이들이랑 손잡고 군것질 하는 그런 사소한 게 좋았어. 여학생들은 옷에 예민하고 그게 자존심인데 교복을 입으니 옷 걱정 없는 것도 좋았어. 학교에서 밥 주지, 잠이 오면 책상에 엎어져 자면 되었어.

 

친구야
나는 '고등학교 졸업장은 따야지' 이 하나의 타이틀을 붙잡고 다녔는데 막상 고3 끝날 때 즈음 되니 너무 막연했어. 고3 선생님이, “선화 너도, 원서 한 번 넣어봐라. 고등학교도 이렇게 잘 견뎠는데 대학가서도 잘 해봐” 했으나 솔직히 두려웠어. 그래서 대학은 안 가려 했는데 나랑 같이 다니던 꼴통 아이들도 다 대학을 알아보고 있는 거야. 그래서 그런 분위기에 나는 또 물 흐르듯이 따라서 수시 2차 때 대학 원서를 넣었어.

 

친구야!
현재 나는 이렇게 대학생이고 이 생활을 정말 즐기고 있어. 나의 전공은 비즈니스과야. 아빠가 옷 유통 서비스 일을 하고 계셔서 도와드리고 싶어서 이 과를 선택했는데 앞으로 내 꿈은 좀 더 두고 볼 계획이야. 대학에서는 자기 꿈이 명확해지고 좁혀져. 1학년 학점은 3.5학점 받았어. F는 하나도 없어. 
 
친구야! 
어떻게 한자 공부를 하게 되었냐고? 센터에서부터 시작했어. 검정고시 시험이 끝나면 이해력이 바닥인 우리에게 한자를 조금씩 가르쳤어. 그 외에도 컴퓨터, 미용 등 자격증 딸 수 있는 기회가 참 많았으나 엄청 꼴통이고 게을렀던 나는 센터에서 1년 사는 동안 고입검정고시 하나 합격하고 선, '세월아 가거라, 난 퇴소하면 된다' 이러면서 시간을 보냈어. 그래도 한자는 하루에 몇 개씩은 외우면서 말이야. 난 그 한자 외우는 습관을 고등학교 3년 다니는 동안에도 계속 한 거야. 그래서 난 너에게 이걸 권하고 싶어. 뭔가 네가 할 수 있는 거면 놓치지 말고 꼭 한 번 시도는 해보라고. '난 할 수 없어'하면서 자기를 부정적으 보지 마.

어느 날 저녁이었어. 옷장 서랍을 정리하다가 센터 생활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어. 다시 읽어보니 진짜 나는 생각하는 게 다 부정적이었어. 내 자신을 진짜 싫어하고 남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만 너무 컸어.

 

친구야. 
난 대학에 들어와 자격증 따는 동아리에 들었어. 센터에서 못 딴 미련 때문에 말이야. 자격증은 끈기를 보여주는 거야. 유통과 회계 자격증을 따고 싶은데 일단은 계회부터 하려고 해. 떨어지면 한자 공부처럼 계속 할 거야.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할 수 있는 그걸 꽉, 잡아.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물고 가봐. 그러면 그거 하나가 다른 것까지 다 좋게 연결돼. 정말이야. 
아 참, 하나 더 얘기 할 게. 난 지금도 식당엘 가면 나도 모르게 냅킨을 예쁘게 개고 있어. 센터에서 하던 좋은 습관이야. 한자 공부도, 냅킨 접는 것도 습관이란 게 정말 무서운 거였어.  

 

 

                       
장미는 
자신의 화려함과 함께하는 가시를 거부하지 않고
국화는 
진한 향기를 위해 견뎌야하는 찬서리를 물리치지 않는다.

 

모든 인내의 시간은 기쁨의 꽃을 피우고
사랑 때문에 나를 내어주었던 어제는
오늘 내게 ‘성숙’과 ‘자랑스러움’을 선물한다.

 

주님!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가능성을 품고 세상에 뿌려졌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의 최선은 
결국, 나를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꽃피게 할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묵묵히 이 한걸음을 또 걷게 하소서.
오롯이!

 

남민영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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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옥, ‘박종철 고문’ 부실수사 정황 더 뚜렷해져

등록 : 2015.03.07 01:13수정 : 2015.03.0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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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공무원노동조합과 새사회연대, 법인권사회연구소 등으로 구성된 민주적 사법개혁 실현을 위한 연석회의가 지난 2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대법원장은 논란이 있는 박상옥 후보자를 임명제청해 국민적인 사법 불신을 초래한 책임을 지고 국민에게 사과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수사기록·공판조서 살펴보니

수사 주도 안했다는 여당 말과 달리
사건 주요 고문경찰관 수사 전담
현장검증도 않고 비공개 실황조사
사퇴 요구 받아온 박 후보 입지 악화
박 후보 “잘못 해석…사실과 다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1차 수사기록과 항소심 공판조서에는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가 부실 수사를 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대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야당 등의 사퇴 요구를 받아온 박 후보자의 입지가 더 좁아졌다.

 

박 후보자에 대해 새누리당은 “당시 수사팀 막내검사로서 수사를 주도할 위치도 아니었고 권한도 없었다”며 두둔하지만, 1차 수사기록 등에는 박 후보자가 주요 고문 경찰관에 대한 수사를 전담한 사실도 드러난다.

 

1차 수사기록을 보면, 박 후보자는 1987년 1월20일·23일 구속된 강진규 경사를 직접 조사했다. 1월23일에는 2차 수사 때에야 고문 가담 사실이 드러난 반금곤·황정웅 경장을 조사했지만, 이들은 당시 범행 가담 사실을 잡아뗐다. 그해 5월에 착수한 2차 수사 결과 모두 5명인 것으로 드러난 고문 경찰관들 중 3명을 1차 수사 때 박 후보자가 조사한 것이다.

 

항소심 공판조서에서 강 경사의 진술을 보면, 박 후보자는 1차 수사 때부터 반 경장과 황 경장 역시 고문에 가담했다고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사팀은 강 경사와 조한경 경위만 서둘러 기소했다. 조 경위는 2월27일 구치소에서 안상수 검사(현 창원시장)에게 공범이 3명 더 있다고 자백한 인물이다.

 

공판조서로 드러난 문제점은 또 있다. 조 경위의 변호인이 “그러한 범행(물고문)이 두 사람으로 충분합니까”라고 묻자, 조 경위는 “두 명이 할 수가 없지요. 저나 강진규나 몸이 왜소하기 때문에 둘이서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당시 수사팀은 현장검증을 생략하고, 1987년 1월23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경찰관들을 참여시키지 않은 채 비공개 ‘실황조사’만 진행했다. 실황조사 보고서에는 “박종철같이 키가 170센티미터인 사람을 욕조 앞에 구부리게 하여본바 무릎을 굽히지 않고 선 자세로는 머리가 욕조턱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며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몸을 뒤로 뺀즉 목이 욕조턱에 걸렸음”이라고 적혀 있다. 같은 날 박 후보자는 강 경사를 조사하면서 “저는 박종철의 뒤에서 박종철의 양팔을 저의 양어깨 위에 뻗게 하고 제 팔을 박종철의 겨드랑이 사이로 빼 팔과 손으로 어깨에 올려놓고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는 진술을 받았다. 무릎을 꿇은 박종철씨 뒤에서 강 경사가 이런 자세로 물고문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박 후보자가 1차 수사 때 부실 수사를 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지만, 양승태 대법원장은 3일 정의화 국회의장에게 친서를 보내 박 후보자의 임명동의절차를 조속히 진행할 것을 요청했다. 박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야당 반대로 열리지 못하고 있다.

 

박 후보자는 강 경사의 법정 증언을 바탕으로 한 부실 수사 의혹에 대해 대법원을 통해 “기록의 일부 맥락을 잘못 해석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과 다르다”고 답변했다. 또 “상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수사기록 및 공판조서 등 자료를 토대로 청문위원의 질의가 있으면 성실하게 답변하겠다”고 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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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위해 죽자'는 이가 민족의 스승?


교육부, 최규동 초대 교총회장 선정 논란

[발굴]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하더니... "친일행위자 홍보"

15.03.07 15:50l최종 업데이트 15.03.07 15:5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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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부가 정부 세종청사 안에 세워놓은 최규동 홍보 입간판.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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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장관 황우여)가 일제강점기 당시 "죽음으로써 임금(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다"라는 논문을 쓴 최규동(1882~1950)씨를 '이달의 스승' 1순위로 뽑아 전국 학생들과 국민들을 대상으로 홍보전에 나서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1순위 '민족사표'로 내세운 최규동, 살펴보니...  

7일 교육부에 따르면, 교육부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아래 교총)와 함께 교총 전신인 조선교육연합회(1947년 창립) 최규동 초대 회장 등 12명을 '이달의 스승'으로 뽑은 뒤, 홍보활동에 뛰어들었다. 교육부는 월별 '이달의 스승'을 선정해 지난 2월 발표했다. 이 사업의 홍보 예산은 모두 3억5000여만 원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지난해 8월 황우여 장관의 지시로 교총과 함께 국민의 존경을 받는 분들을 '이달의 스승'으로 선정하는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라고 설명했다. 

우선 교육부는 올해 3월부터 '이달의 스승' 1순위로 최규동씨를 선정한 뒤 전국 1만2000여 개의 초·중·고교에 포스터 두 장씩을 일제히 보냈다. 정부세종청사에도 최규동씨 홍보 입간판을 내걸었다. 또 교육부는 전국 학교에 동영상, 계기 교육자료 등도 제공한다. 교총은 최규동씨 등에 대한 대국민 홍보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역사정의실천연대 분석 결과, 교육부가 뽑은 '이달의 스승' 가운데에는 일제강점기 친일 전력이 있는 이들이 두세 명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최규동씨의 경우 일제 침략전쟁 시기인 1942년, 일제관변잡지에 일왕(천황)과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논문을 쓴 사실이 처음 발굴됐다. 

최규동 "(황)군 복무야말로 황국신민교육의 완성"

교육부는 최규동씨를 '이달의 스승'으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일제강점기 교장을 맡으며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자제를 교육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조회 때마다 우리말로 훈시했다"라면서 "민족의 사표, 조선의 페스탈로치로 불린 분"이라고 홍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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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교의 조선> 1942년 6월호에 실린 최규동의 글.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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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규동씨는 일제관변잡지인 <문교의조선> 1942년 6월호에 실명으로 "죽음으로써 임금(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다"라는 제목의 논문(번역 전문은 기사 하단 참고)을 일본어로 게재했다. 

이 논문에서 최규동씨는 "조선동포에 대한 병역법 실시가 확정돼 반도 2400만 민중도 마침내 쇼와 19년부터 병역에 복무하는 영예를 짊어지게 됐다"라면서 "역대 천황은 반도의 민초들에게 갓난아기처럼 애무육성하심으로써 오늘의 영예를 반도 민중에게 짊어지게 하신 성스러운 배려에 감격한다"라고 적었다. 

이어 그는 "반도동포는 남녀노소 한결같이 이 광영에 감읍해 한 번 죽음으로써 임금(천황)의 은혜에 보답해드리는 결의를 새로이 해야 한다"라면서 "군무에 복무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황국신민교육의 최후의 마무리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최규동씨는 일제감정기 황국신민교육의 최후 목적을 '황군에 복무하는 것'으로 삼은 것이다.

최규동씨의 친일 행적은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조선신궁(천황신사)의 중일전쟁 기원제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임전보국단 결성 당시 평의원에도 이름을 올렸다. 또 그는 징병제 실시 축하연에도 참석했다. 이는 1937년 이후부터 해방 전까지 발간된 <매일신보> 보도를 기반으로 역사정의실천연대가 분석한 내용이다. 

이준식 역사정의실천연대 정책위원장은 "최규동씨는 친일인명사전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친일행적이 명백한 인물"이라면서 "교육부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최규동씨를 뽑았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친일행위자를 홍보하려고 시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뒤늦게 최규동 집어넣은 교육부 "친일행적 몰랐다"

교육부는 보도자료 등을 통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훌륭한 스승을 추천받았다'고 밝혔지만, 최규동씨는 이 추천자 명단에 없었다는 사실도 새로 드러났다. 교육부가 자체 추천위원회를 열고 뒤늦게 끼어 넣은 것이다. 추천위원은 교총과 퇴직교장들의 모임인 삼락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등 모두 9명이었다.  

교육부 관계자는 "이달의 스승 선정 과정에서 친일행위자를 배제하기 위해 심사기준에도 이를 넣고 친일인명사전까지 살펴보는 등 많은 노력을 했는데 당황스럽다"라면서 "최규동씨의 경우 지난해 12월 한 신문에서 '민족의 사표'로 보도되기도 했고, 1968년에는 건국훈장까지 받은 분이라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라고 해명했다. 

교육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자신들이 직접 1∼3 종류의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국정교과서 제도를 검토, 추진하고 있다.

아래는 최규동씨가 <문교의 조선> 1942년 6월호에 실은 논문 번역본이다. 번역은 황진도 번역가가 맡았다.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다 - 경성중동학교장 최규동

오래도록 기다리고 바라던 조선동포에 대한 병역법 실시가 확정되어 반도 2400만 민중도 마침내 쇼와 19년부터 병역에 복무하는 영예를 짊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동포가 내선일체의 이념에 눈을 뜨고 실로 국체의 본의(본래의 의의)에 귀일하여 진충봉공의 적성(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을 피력해온 결과로써 폐하의 고굉(임금이 가장 믿는 중요한 신하)임에 족한 자질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며, 공사를 불문하고 감사와 환희는 더 이상 여기에 비할 바가 없다. 

생각컨대 시정 이래로 30여 년 역대 천황은 항상 일시동인(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함)의 감사한 대어심(大御心)을 반도의 민초들에게 베푸시고 갓난아기처럼 애무육성하심으로써 오늘의 영예를 반도 민중에게 짊어지게 하신 성려(임금의 염려)의 광대무변한 진실로 공구감격에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반도동포는 남녀노소 한결같이 이 광영에 감읍하여 한 번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해드리는 결의를 새로이 하고 더욱더 자애분기하여 스스로가 자질향상을 도모하고 더욱 더 충혼으로써 성지에 부응하여 받들어야 한다.

사람은 의무를 지고 의무를 다함으로써 그 이상 더 없는 명예와 만족을 얻는 존재이다. 국방의 책무를 맡는 것은 국민의 당연한 의무이며 또한 남아최고의 영예를 이루는 것이다. 이 숭고한 의무, 이 영예가 조선동포에게 부여되어 그 젊은 청년들이 용약하여 국방의 제일선에 달려 나가 참여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자칫하면 반도청년들 사이에, 병역에 복무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인입사안, 저미 등의 소극성이 보였지만, 이러한 경향도 이번의 획기적 시책인 징병제도 실시결정에 의해 활연불식되어, 문자 그대로 발랄한 의기와 자신감을 갖고 문무의 수련에 정진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 것이어서, 황국신민연성교육상 일대 추진력이 더해지고 촉진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상황에 직면하여 군무에 복무하고 군인정신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황국신민교육의 최후의 마무리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반도의 젊은 국민이 영광스러운 제국군인으로서 빛나는 황군의 전통을 이어받아 훈련받고 군인에게 내려주신 칙유를 받들어 전진훈을 일상행동의 규범으로서 실천궁행하고, 생사지경에 재빨리 몸으로 군인정신을 체득해 나간다면 과거 수백 년 간에 걸친 문약의 폐풍에 기인하는 바의 책임 관념의 결핍, 근기의 박약 등 여러 가지 바람직스럽지 못한 경향도 일소되고, 본래의 소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고, 그때야 말로 참으로 내선 양 민족이 형식상으로나 내용상으로 일체가 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징병제도 실시가 2개년 후의 가까운 장래에 절박해서 오늘 특히 교육에 종사하는 우리들은 참으로 마음을 크게 다잡아 분발하여 대처하고 밤낮으로 청소년학도를 지도함에 강고한 신념과 군인혼의 연성에 일로매진해야 한다.

[용어 설명]
공구(恐懼) : 몹시 두려움 
분기(奮起) : 분기, 분발 
진충봉공(盡忠奉公) : 충성을 다하고 공을 위해 힘써 일함 
용약(勇躍) : 용감하게 뜀 
인입사안(引込思案) : 끌려 들어가는 걱정 
저미(低迷) : 헤어나지 못하여 헤맴 
활연(豁然) : 환하게 트여 시원하게 
칙유(勅諭) : 天皇(てんのう)가 친히 내린 고유(告諭). 훈시적·특정적인 뜻을 포함하는 점에서 칙유(勅語, ちょくご)와는 구별된다 
실천궁행(實踐躬行) : 어떤 일을 실제로 몸소 행함 
전진훈(戰陣訓) :1941년(昭和, しょうわ16) 東条英機(とうじょうひでき) 육군대신(陸相, りくしょう)의 이름으로 전 육군에 하달된, 전시 하에서의 장병의 마음가짐. '生いきて虜囚りょしゅうの辱はずかしめを受うけず,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입지 않는다'라는 구(句)가 알려져 있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교육희망>(news.eduhope.net)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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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사 피습, ‘종북몰이’ 시작

미 대사 피습, ‘종북몰이’ 시작
 
耽讀  | 등록:2015-03-07 10:34:59 | 최종:2015-03-07 10:36:1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에게 흉기를 휘두른 뒤 현장에서 검거된 김기종 우리마당독도지킴이 대표가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운동 종로경찰서에서 수사받던 중 골절상 치료를 위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며 “한미 전쟁 훈련을 중단하라”고 외치고 있다<한겨레>

“이제까지 밝혀진 테러 행위자의 과거 행적이나 오늘 구호 등을 봐서 친북 내지 종북 성향의 사람임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 사회의 이런 종북 좌파들이 동맹국 대사한테 해를 가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충격적인 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지난 5일 우리마당 대표 김기종 씨가 미 대사 마크 리퍼트를 칼로 공격한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는 앞서 최고위원회의에서도 “테러행위자가 ‘전쟁반대’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는 점도 정말 충격적”이라며 “한미연합 훈련을 진행 중인데, 종북 좌파 세력들이 주장하듯이 전쟁연습으로 규정하고 이런 테러행위를 저질렀다면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청와대 “종북 행적 여부 철저 조사”
 
김기종 씨가 키리조블 훈련을 반대하면 미 대사를 공격하고, 전력이 전쟁반대와 북한을 방문(6회)한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청와대도 즉각 반응했습니다. 같은 날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의 후 브리핑을 통해 “정부는 이번 사건을 자행한 범인의 지금까지의 반미, 종북 행적 여부 및 활동에 대한 철저한 조사 및 배후세력 존재 여부 등 수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고, 법에 따른 엄정한 조치를 취하는 한편, 우리 사회의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세력 등에 의한 이와 같은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나가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새누리당은 리퍼트 대사 피습을 ‘종북몰이’로 몰아가고 있다. 새누리당 최고위원회 모습

친박계 핵심인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도 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긴급 간담회에서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 것 같으냐, 제가 보기에는 북한”이라며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북한을 도와주는 테러이자 한미 동맹과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방식”이라며 종북몰이에 나섰습니다.
 
특히 그는 “입으로는 통일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대한민국을 해치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북한이 앞으로 대대적인 선동전을 시작할 것”이라며 “북한이 아마 평양에서 웃고 있을 것”이라며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규정했습니다.
 
같은 당 김영우 의원 역시 “이 사건이 단순히 정신착란이라든지 개인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김씨는 꾸준하게 종북좌파 활동을 해온 이력이 있다”며 “김씨는 여섯 번이나 북한을 방문했고, 국회를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각종 토론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해왔다. 이 인물이 미국 대사에 대해 백주에 테러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라며 종북몰이에 나섰습니다.


나경원 “김기종, 종북주의자 분명”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은 6일 SBS라디오 ‘한수진의 SBS전망대’에 출연해 “김기종씨 개인은 종북주의자인 것은 분명하다”며 “여러가지 전력, 현장에서의 활동 및 구호 등을 보면 종북주의자임은 분명하다”며 종북몰이에 동참했습니다. 

<조선일보> 6일 자 2면 머리기사

채널A는 5일 <시사 인사이드> 패널로 출연한 백기종 전 수서경찰서 강력팀장은 이때 나눠준 유인물에 키 리졸브 훈련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을 들어 “개인적으로 볼 때 굉장히 종북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며 “우리마당 대표로서가 아니라 결국 북한을 이롭게 하는 형태의 피습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조선> “한미동맹 찌른 종북테러”
 
<TV조선>은 같은 날 <뉴스특보>에서도 “김기종은 1960년생으로 자신을 시민운동가라고 소개하고 다녔다고 한다. 우리마당 간사를 지냈다”며 “(우리마당)은 진보 성향 NL 계열로 알려지고 있다”며 “키 리졸브 훈련을 반대하는 등 김기종의 주장을 보면 북한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조선일보>는 6일 자 2면 머리기사 제목을 ‘한미동맹 찌른 종북테러’로 달았습니다. <조선일보>는 “종북 인사 황선씨가 현재 이사로 있는 주권방송 창립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김씨는 노무현 정부시절인 2006년 1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민족화합운동연합’이라는 단체의 일원으로 8차례 방북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노무현 대통령까지 끌어들였습니다.

<매일경제>는 5일 인터넷판 ‘종북주의자의 사상초유 美대사 백주 테러’ 제목 기사에서 “미국을 대표해 우리나라에 주재하고 있는 주한 미국대사가 종북 성향의 문화단체 대표에게서 기습 공격을 받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향후 한·미 관계가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고 보도했습니다.


표창원 “색칠하지 말아아…’좋은테러’ 없어”
 
이른 바 종북몰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종북몰이에 나선 이들에게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한 번은 읽어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김기종의 경우 어디에 해당할까요? 저는 세 번 째, 반사회성 폭력에 가장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인정욕구와 과시욕구가 중심 범행동기이구요. 힘들고 외롭게 살아 온, 자존감 낮은 한 남자가 사람들에게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를 채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관심갖는 반일, 통일, 반미 같은 이슈를 쫓아다니며 과격한 주장과 행동을 통해 주목받고 관심받으며 존재의의를 찾아 온 것이 아닌가 의심가는 행적이 발견되고 있구요. 특히, 경찰과 검찰의 전력을 다한 수사를 통해서도 공범이나 조직적 연계 등을 찾지 못한다면, 더더욱 이런 설명은 설득력을 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종홀과 민화협, 주최 장소와 주최측의 보안 및 안전조치 미비, 그 배경에 깔린 만연한 안전 불감증이 멍청하고, 허술하고, 망상적 사고를 가진 한 이상한 인간이 사회 전체를 뒤흔들도록 방치, 방조한 게 아닌가 전 생각합니다.

너무 이 사건, 과장하고 포장하고, 색칠하지 맙시다. 반대로, 교묘한 논리 내세우며 우리 독립투사들과 비교하거나, ‘좋은 테러’가 있다는 황당한 궤변을, 마치 비오는 날 공장폐수 쏟아내듯 밀어내지 맙시다. 혼란과 충격 속에서도 중심을 잡아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언론 방송과 지식인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3638&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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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공안몰이 맞서 자주통일 세상 열자

양심수 후원회 제27회 총회 “6.15공동선언이행 위해 투쟁”결의

이정섭 

기사입력: 2015/03/07 [17:01]  최종편집: ⓒ 자주일보

 

▲  양심수 후원회 주요 회원들이 27차 정기총회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 자주일보 이정섭 기자

 

양심수들의 벗으로 국가보안법철폐와 민족통일,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양심수후원회(회장 안병길. 명예회장 권오헌)가 반생명. 반민주. 반북대결에 맞서 국가보안법과 양심수 없는 자주통일세상을 열어 갈 것을 결의했다.

 


양심수후원회는 7일 오후 3시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제27차 정기총회를 열어 민주주의 압살과 종북. 공안몰이에 맞서 싸울 것과 한반도 전쟁을 불러 올 외세공조 동족대결 북침전쟁연습의 즉각 중단을 위해 투쟁 할 것을 약속했다.
 
양희철 선생은 초대말을 통해 “2014년은 웃음보다 눈물이 많았던 한해였다.”면서 “식민시대와 분단세월이 끝나 않는 한 양심수는 존재할 것이다. 양심수후원회는 조국통일 그날 까지 양심세력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 6.15 합창단이 임진강을 비롯한 축하공연으로 통일을 기원했다.     © 자주일보 이용섭 기자


 
총회 참가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민범식(96세) 선생은 “전 세계적으로 분단된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며 “단군 겨레의 한 핏줄로 한강토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우리민족이 갈라져 살 이유가 없다.”고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민범식 선생은 “지금 남을 제외하면 중국을 거쳐 유러시아로 향하는 철도가 개통되어 운행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원선을 복원하겠다고 하는데 경의선도 복원하여야 한다.”며 “광복 70년을 맞이하고 있는 시기에 모든 민족이 하나로 힘을 합쳐 반드시 통일을 이루자.”고 강조했다. 
 
범민련 이규재 의장은 복역 당시 양심수후원회가 보여준 후원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양심수에 대한 인권단체들의 노력은 인권신장을 이룰 것”이라며 불교에서 3가지 보시 중 가장 높은 단계가 무예보시(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라는 것을 언급하며 양심수후원회가 가장 높은 단계의 보시를 하고 있다며 감사를 거듭 표했다.
 
남경남 전철협의장은 “건설재벌의 탐욕으로 생존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용산 주민들을 위해 일하가 5년간의 옥살이를 했다.”며 “지금도 교도소는 양심수하면 인정한다. 후원회 소식지와 영치금을 받을 때면 어깨가 으쓱했다. 통일세상 민중세상을 위해 청춘을 빼앗기고도 활동을 멈추지 않는 장기수 선생들을 볼 때 희망을 가졌다. 양심수후원회 관계자들과 민가협 어머니와 가족 분들에게 감사를 전하다.”고 연대의 인사를 보냈다. 
 

▲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이 200여명의 참석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참석자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 자주일보 이정섭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박근혜 정권이 민주주의와 통일이 파괴되었는데 우리가 양심수후원회에 보답하는 길은 제2의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미국과 최후 대결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라며 투쟁해 갈 것을 피력했다.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은 “한평생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일하다 고통 받고 계시는 장기수 어르신들과 양심수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 주신 민가협 후원회에 감사드린다.”며 “박근혜 정권 2년은 참담했다.”며 “노동자들의 민생을 파탄내고 남북관계를 파탄 낸 박근혜 정권을 가만 들 수 없어 4월 총파업을 결의했다. 이시기에 노동자 민중들이 싸움을 결의했다. 조직화 된 노동자들의 단체인 민주노총이 바근혜 정권의 미친 행보를 저지하고 민주주의 회복, 민중생존권 사수, 조국통일 성취를 위해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공안탄압저지를 위해 농성 중인 이상훈 대표는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농성을 전개하고 있다.”며 “박근혜 정권은 또 다른 공안탄압을 계획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끌려갈 때 까지 투쟁을 전개 할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 진보연대 한충목 상임대표가 미국과의 결전에서 승리를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 자주일보 이정섭


 
총회 참가자들은 총회 결의문을 통해 “조국광복 70년이다. 오욕의 분단 70년을 맞고 있는 오늘 우리는 다시 27년전 군부독재와 야만적 반인권에 맞섰던 자세로 인권의 존엄과 가치, 정의와 평화, 민주주의와 인권, 자주평화통일의 역사적 과제를 안고 이 자리에 섰다.”고 서문을 열었다.
 
총회 결의문은 “생명보다 돈가 이윤 추구가 앞서는 사회, 국가재난 초비상상태에서 해경도 해군도 해수부도 안전행정부도 청와대도 청와대도 단한사람을 구조하지 못하고 황금 시간을 놓쳐버린 대한민국호의 침몰 모습이었다.”고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비판했다.
 
결의문은 이석기 내란음모사건 통합진보당사건, 범민련 남측본부, 자주민보 등에 대한 탄압사건과 통일이야기 공연의 황선 신은미 사건, 애기봉 등탑 반대 사건을 주도하다 공안탄압을 받고 있는 민통선 평화교회 이적 목사와 코리아연대 회원을 열거하면서 박근혜 정권의 공안탄압을 정면 비난했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 부당정리해고, 노조탄압, 기아임금에 맞선 고공농성 투쟁, 제주해군기지 반대 투쟁가들의 눈물겨운 투쟁 소식과 이들을 탄압하는 정부를 비난하며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고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주통일 시대를 열기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 양심수후원회 회원들이 총회 결의에서 자주. 민주. 통일. 민생을 위한 정권과의 투쟁을 선언했다.     © 자주일보 이정섭



그들은 결의 내용으로 ▲민주주의 압살과 종북몰이에 대한 투쟁 ▲ 6.15공동선언 이행 등 자주통일위해 투쟁 할 것 ▲전쟁을 불러 올 외세공조 동족대결 북침 전쟁연습 중단을 위해 투쟁 할 것 ▲ 국가보안법. 보안관찰법 보호관찰법 등 반민주 악법 철폐를 위해 투쟁 할 것 ▲ 모든 양심수의 조건 없는 석방과 사면 복권을 위해 투쟁 할 것 ▲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노조파괴, 강제철거 등 민중생존권 투쟁에 연대할 것을 택했다.
 
한편 이날 총회에서는 그동안 양심수들을 위해 노력해 온 공로자들에게 감사장이 전달되었으며 6.15합창단의 공연이 펼쳐져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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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사 피습 사건, 그 배경을 파헤친다

[기획-1]미국대사 피습사건, 그 배경을 파헤친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60  

 

 [사진]문화운동 단체인 '우리마당'의 김기종대표

 

조국반도는 지금 전쟁이냐 평화냐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한 미국대사인 마크 리퍼트(42)에게 가해진 공격사태는 코리아반도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방송과 신문들도 이 사건을 대서특필로 다뤘다. 특히 미국 테레비죤 방송들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급보로 이 사태를 보도해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 이 사건의 배경을 하나씩 파헤쳐본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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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미국대사를 공격하고 연행되면서 '통일''군사훈련 반대'를 외쳤던 김기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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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면도날로 공격받고 피를 흘리는 주한미국대사 마크 리퍼트(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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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외치며 일본대사관 앞서 시위하는 김기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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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남북긴장을 조장하는 전단살포의 배후 미국을 규탄하는 김기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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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반도 긴장을 조장하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반대하는 김기종 대표


 

[기획-1]미국대사 피습사건, 그 배경을 파헤친다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주한 미국대사인 마크 리퍼트(42)에게 가해진 공격사태는 코리아반도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방송과 신문들도 이 사건을 대서특필로 다뤘다. 특히 미국 테레비죤 방송들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급보로 이 사태를 보도해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

 

서방언론들과 미국언론들은 대부분 공격, 혹은 피습(Attack)이라는 정도로 보도해 왔는데 남녘 언론들은 이 사건을 두고 대부분 테러(Terror), 살인미수, 여기에 국가보안법까지 들먹이고 있는 요란한 상황이다.

 

한층 더 웃기는 현상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과 같은 극우보수족벌 언론들은 이 사건의 배후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용의자로 알려진 김기종 대표(55. 우리마당)를 억지로 북과 연계시키려고 어설픈 자세를 보이고 있어 조소를 금치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극우보수언론들은 김기종 대표가 북을 7~8차례 방문했다고 소개하면서 그의 주장들(조국통일, 한미합동군사훈련 반대, 이산가족 상봉)이 북측과 유사하다고 강조하면서 마치도 그의 활동의 배후가 북측인것처럼 몰아 가고 있는 유치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의 몇차례 방북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시대에 누구든지 갈 수 있었던 시기에 합법적으로 이뤄진 것들이다. 그 시기에는 고려민항이 김포공항, 인천공항에 오고,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이 평양순안 공항을 오고가는 등 남북교류화 화해협력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남측의 보수언론들은 또한 이 사건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의 본질과 내용들을 진단하고 분석하지는 않고 그렇게 많이 우려먹던 색깔논쟁, 종북몰이를 또다시 악용하려고 억지를 쓰고 있는 추한 모습들이다.

 

이 사건의 형태는 용의자가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면도날 같은 흉기로 주한미국 대사를 공격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이 터지자 이 충격적 보도들은 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물리적 가해자인 김기종 대표를 무조건 질타하고 주한미국대사를 동정하는 반응들이 있는가 하면  이같은 사건들이 무엇때문에 일어났는가를 꼼꼼히 따진 바탕에서 우러나온 반응들 가운데에는 물리적으로 공격한 것은 찬성할 수 없으나 가해자가 외쳤던 구호들과 염원들은 우리민족 온 겨레가 바라고 있는 소원들을 가해자가 모두를 대신하여 국내외에 널리 외쳐주었다는 반응들이다. 또한 일부는 김기종 대표를 윤봉길의사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열렬 애국자로 칭송하는 경우들도 있었고, 그리고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지만 그것으로 아무리 노력하여도 되지 않는 경우에는 마지막 수단으로서는 어쩔수 없다는 의견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상 조국반도의 정세는 요즘들어 전쟁직전까지 치닫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북과 미국간의 관계는 전면대결로 맞서고 있다. 미국은 남측 군력을 끌어들여 키 리졸브훈련과 독수리훈련을 벌이며 북침을 위한 핵전쟁 훈련을 진행중에 있고, 북조선은 이에 맞서 통일성전을 준비하고 있는 구체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그 귀추에 초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다음에 계속~) 

  

 

 
 
*가해자인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 활동약력:


-1959년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쌍덕리에서 태어나 광주광역시에서 성장. 

-1978년 금호고등학교1984년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통일정책대학원에서

 남한사회 통일문화운동의 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의 외래교수 역임 


-1980년대에 국악모임 ‘한가락’, 극회 ‘벽돌’ 등을 창립하며 문화계에서 활동.


- 1985년에는 도서출판 ‘우리마당’을 창간.

--1988년 우리마당이 남북공동행사인 ‘통일문화큰잔치(문익환 위원장)’를 준비하던 도중 괴한들이 사무실을 습격하고 여학생을 성폭행 당하는 이른바 '우리마당' 사건이 발생했으나 아직도 그것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 고심해 왔음.

-위 사건으로 2007년 10월 19일 청와대 앞에서 그 진실규명을 외치며 분신시도했으나 실패.

-2010년 7월에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주한일본대사 초청 특별강연회 도중 시게이에 대사에게 지름 약 10㎝와 7㎝의 콘크리트 덩어리 2개를 던진 혐의(외국사절 폭행)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음.(당시 ‘동북아 평화를 위해 한일이 공동으로 대응하자’는 시게이에 대사의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며 “일본이 동북아 평화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북한을 제외한 한일 공동 대응으로 동북아 평화가 이뤄질 수 있는가”라고 항변하며 미리 준비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던진 사건) 

-그 이후  한미군사훈련을 ‘전쟁상태를 불러오는 위험천만한 행동’이라고 규정하며 훈련중단을 요청하는 1인 시위.

- 김대중정부시기인 2001년 민주평화통일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됐으며,2002년에는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으로 활동.

- 2013년 3월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수호 각계 사회단체 긴급 기자회견’에도 참석했는데, 당시 참석자들은 “전쟁을 부르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중단을 호소한다”, “이 땅을 전쟁전야로 만든 미국은 연례적인 방어연습이라는 기만을 거둬라” 등의 주장을 펼처며 시위.

-‘우리마당 독도지킴이’라는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반대하는 활동도 진행해 온 인물.
 
-2014년 8월 ‘독도 38 예술제’를 통해 자신이 집필한 책 ‘독도와 우리, 그리고 2010년’의 출판 경과를 보고했다.해당 책에는 지난 2010년 주한일본대사에게 콘크리트를 던진 것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음. 
-일본대사를 습격한 이날 새벽에는 ‘독도사랑 독도지킴이’라는 인터넷카페에 올린 글을 통해 민간재단법인 ‘동북아역사재단’의 독도연구소가 발간한 ‘독도 바로알기’라는 제목의 교과서에 실린 독도의 사진에 오류가 있다며 해당 재단의 법인허가 취소를 촉구.

-2015년 3월5일 주한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 공격해 연행중 조사받고 있음

 

 

독자들에게 요망사항:

이번 사건은 우리민족의 생사존망과 연관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핵전쟁을 시도하고 있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반대하는 목소리와 함께 조국의 자주적 통일, 한국의 기본주권인 전시작전지휘권을 반환하라는 요구를 외치며 활동해 온 한 인물이 주한미국대사를 가격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제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기득권 세력인 보수정치인들과 보수언론들은 정치적으로 악용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며 우리민족의 가야할 방향을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하여 애독자 여러분의 의견들을 아래 댓글란에 올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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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 빛 잃을라

 
조홍섭 2015. 03. 06
조회수 4037 추천수 0
 

1~3월 바이칼 호수엔 '얼음판 고속도로' 열려, 4균구동 승합차가 관광객 실어날라

늦게 어는 거대 호수가 빚은 기묘한 얼음구조물 장관, 기후변화로 얼음길 개통기간 줄어

 

sb0.jpg» 알혼섬으로 얼음길 고속도로가 시작되는 사휴르타 선착장 모습. 바이칼 호의 서쪽 중앙쯤에 위치한다.


‘얼음판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넓고 규모가 컸다. 도로 경계 표시와 함께 ‘중량 한계 5t, 최고 속도 시속 10㎞, 일방통행, 차간거리 200m, 추월 금지’ 따위를 적은 교통 표지판이 서 있었다. 기운 채 얼음 위에 서 있는 낡은 선박이 없었다면 호수 위로 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한겨레 주주·독자 등 30여명과 함께 2월22~3월1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이르쿠츠쿠로 가 겨울 바이칼호를 탐방했다. 세계에서 가장 깊고 오래 된 호수로 ‘살아있는 진화 교과서’라는 평가를 받는 바이칼호는 50㎝가 넘는 두꺼운 얼음 밑에서 겨울 잠에 빠져 있었다.

 

sb2.jpg» 얼음길로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4륜 구동 소형 승합차. 스노타이어를 달아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

 

sb4.jpg» 샤마니즘의 신성한 장소인 알혼섬 불한 바위 옆을 탐방객 차량이 지나고 있다.
 

스노타이어를 장착한 4륜구동 승합차로 옮겨 타고 이 호수 최대의 섬인 알혼섬으로 향했다. 덩치 큰 현지 주민 운전사는 포구를 벗어나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아대기 시작했다.

 

“괜찮아, 꼭 잡아.” 표정으로 볼 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매끄러운 얼음판 위에서 차는 덜컹거리지도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로 오는 비포장길보다 오히려 편했다. 발밑이 끝없이 깊은 호수라는 점만 뺀다면.
 

sb13_Kmusser_예니세이강 유역도.jpg» 바이칼 호 위치 및 하천도. 가장 큰 유입하천이 셀렝가 강이고 유일한 유출하천인 앙가라강은 예니셰이 강이 돼 북극해로 들어간다. 그림=Kmusser, 위키미디어 코먼스

 

sb0-1_Benutzer Sansculotte_.jpg» 맑고 깊은 물이 드러난 여름의 바이칼 호 동쪽 연안. 사진=Benutzer Sansculotte, 위키미디어 코먼스 

 

바이칼 호에 빠지면 안 되는 여러 이유가 있다. 이 호수는 가장 깊은 곳이 1642m이고 평균 깊이도 744m나 된다. 황해의 평균수심은 45m다.

 

바이칼 호는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40m 바닥의 수초가 훤히 보인다.

 

그만큼 영양분이 적기 때문에서 세계에서 이곳에만 사는 갑각류들은 유기물 분자 하나라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호수에 빠져 실종되면 1달 뒤엔 주검 회수를 포기한다. 모두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sb7.jpg» 황갈색 지의류가 덮인 절벽을 얼어붙은 파도가 둘러싸고 있다. 호수가 늦게 얼어 생기는 현상이다.
 

알혼섬에서 하보이곶으로 향하는 얼음판은 전날과 달랐다. 얼음판은 깨졌다 다시 언 얼음으로 울퉁불퉁했고 유리공장 폐기물 더미를 지나듯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운 얼음장이 빽빽하게 일어선 곳도 지나야 했다.

 

해안 절벽은 북극해를 떠올리게 했다. 바다로 흘러드는 빙하처럼 거대한 얼음덩이가 절벽 가장자리를 둘러쌌고 천장에선 사람 키를 넘는 고드름이 늘어져 있다. 호수 가운데에도 두께가 20㎝는 되는 두꺼운 얼음장이 깨어진 채 포개지고 일어서 있어 북극해의 빙산을 떠올리게 했다.

 

sb6.jpg» 두께 20㎝인 두꺼운 얼음이 호수가 미처 얼어붙기 전 불어닥친 풍랑에 깨져 포개져 있다.
 

겨울 바이칼 호의 볼거리는 바로 얼음이 연출하는 이런 기기묘묘한 모습인데,  이 호수의 독특한 자연조건이 빚어낸 것이다. 이 호수의 물은 세계의 얼지 않은 담수의 20%를 차지한다. 바이칼을 비우고 세계의 모든 강과 하천 물을 이리로 돌려도 다 채우려면 1년이 걸릴 만큼 거대한 용량이다.

 

이 때문에 겨울이 시작돼 영하 20도의 날씨가 계속돼도 바이칼 호의 물은 꿋끗하게 얼지 않고 버틴다. 1월 중순이 돼야 호수가 모두 언다.

 

sb5.jpg» 파도가 절벽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생긴 장관이 바이칼의 겨울철 볼거리이다.

 

그러나 호수가 완전히 얼어붙기 전 절벽을 때린 파도는 그대로 얼어붙는다. 또 폭풍에 조각난 얼음장이 포개지거나 일어서 절경을 만든다.
 

호수의 얼음은 5월 중순이 돼야 모두 녹지만 얼음판 고속도로는 3월하순이면 중단된다. 바이칼 호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비케이투어 박대일 대표는 “호숫길이 열리는 시기가 전에는 1월 중순이었는데 요즘엔 2월 중순으로 늦춰졌다”며 “10년쯤 지나면 얼음위 바이칼 관광이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기후변화는 북극에 가까울수록 심하다.

 

sb3.jpg» 한겨레 테마 기행 참가자들이 얼어붙은 바이칼 호에서 포즈를 취했다.

 

sb1.jpg» 참가자들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75시간 동안 여행해 이르쿠츠크에서 내려 바이칼로 향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동력은 전기이지만 난방은 역에서 공급하는 석탄으로 한다.

 

탐방객은 이 호수 특산어종인 오물을 곁들여 점심식사를 했다. 청어처럼 생겼지만 한때 북극해를 오가다가 호수에 고립해 진화한 연어의 일종이다.

 

오물처럼 상업어종은 아니지만 세계에서 이곳에만 사는 골로미얀카는 매우 독특하고 생태적으로 중요한 물고기다. 투명한 몸의 30%가 기름이고 비타민이 풍부해 원주민이 양초 대용으로 쓰거나 약용으로 이용했다. 이 호수의 최상위 포식자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민물에 서식하는 바이칼물범의 주요 먹이이기도 하다.

 

sb12_Per Harald Olsen -nerpa.jpg» 바이칼물범. 200만년 전부터 바이칼에 적응해 진화한 특산종이다. 8만~10만마리가 호수에 서식한다. 사진=Per Harald Olsen, 위키미디어 코먼스

 

호수가 두꺼운 얼음으로 덮이면 물범은 어떻게 살아갈까. 아직 헤엄을 치지 못하는 새끼를 얼음위에서 기르는 물범에게 얼음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물고기를 잡아야 하고 천적으로부터 피하려면 물속으로 갈 수 있어야 한다. 바이칼물범은 얼음이 완전히 얼기 전 은신처를 만들고 그 속에서 물속으로 들락날락하면서 얼지 않는 통로를 만들어 둔다고 한다.

 

Baykalsk Pulp and Paper Mill.jpg» 바이칼 호의 초청정수를 이용해 군용 항공기용 셀룰로스를 만들기 위해 1966년 호숫가에 건설된 대규모 펄프 및 제지공장. 2013년 문을 닫기까지 염소가 포함된 다량의 폐수를 호수로 쏟아부었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언덕 이쪽은 남성, 저쪽은 여성”,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호수의 무한한 자정능력을 믿는 것은 이곳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그 주역은 ‘에피슈라’라는 새우 비슷한 갑각류를 포함한 동물플랑크톤으로 호수 생물량의 80~90%를 차지한다. 바이칼호 연안인 바이칼스크에 대규모 펄프 및 제지공장을 지었을 때 공산당 내부에서조차 반대가 심했지만 당시 공산당서기장 흐루쇼프가 “바이칼도 노동해야 한다”며 강행한 근거도 이것이었다.

 

sb11.jpg» 바이칼의 특산 갑각류인 에피슈라. 작은 새우 크기로 생물량이 워낙 많아 바이칼 수질을 정화시켜 주는 주역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러나 ‘완벽하다’던 호수도 오염과 교란이 계속되면서 심상치 않은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바이칼스크 제지·펄프 공장은 마침내 2013년 문을 닫았지만 40년 가까이 다이옥신이 포함된 유해폐수를 호수로 흘려보냈다.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바이칼물범이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북해 물범과 비슷한 난분해성 물질로 오염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바이칼호의 유일한 유출구인 앙가라 강에는 대규모 수력발전이 세워져 호수의 수위를 1m나 높여놓았고, 대규모 공장지대에서 배출된 배기가스는 편서풍을 타고 고스란히 호수에 떨어지고 있다.

 

sb9.jpg» 이르쿠츠크 시를 흐르는 앙가라 강. 물살이 세 겨울에도 부분적으로 얼지 않는 이 강은 바이칼 호의 유일한 출구로 대규모 댐이 설치돼 있고 주변에 중화학 공업단지가 위치한다.

 

호수의 가장 중요한 지류인 셀렝가강은  몽골의 도심과 광산을 지나면서 수은과 생활하수로 오염된 물을 호수에 풀어놓고 있다. 최근엔 대규모 수력발전소가 이 강에 건설될 예정이어서 호수의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셀렝가 강 하구의 거대한 삼각주에는 대규모 갈대밭이 있는 등 생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월동하는 가창오리의 번식지이기도 하다. 이곳도 댐 건설과 대규모 농경지 개발로 위협받고 있다.

 

sb10.jpg» 바이칼 호 유입수의 절반을 담당하는 셀렝가 강 하구의 모습. 이 강의 수질오염과 함께 몽골이 대규모 댐을 건설할 계획이어서 우려를 낳고 있다. 사진=미 국립항공우주국(NASA)

 

유네스코는 1996년 바이칼 호를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했다. 이 기구는 최근 보고서에서 러시아 당국에 댐과 관광 개발이 호수의 환경에 끼칠 악영향을 신중하게 검토할 것을 촉구했다. 주요 우려 대상은 셀렝가 강의 댐 건설, 최근 호수 심층에서 발견된 가스하이드레이트 채굴, 관광을 위한 바이칼 항구 개발과 특별경제구역 조성 등이다.
 

알혼 섬에는 겨울인데도 핀란드, 중국, 독일 등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 찾고 있었다. ‘기념품’ 등 한글로 된 안내문도 눈에 띄었다.

 

바이칼 호는 동해가 열려 일본이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가던 즈음인 약 2500만년 전 생겼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이 호수는 다윈이 갈라파고스가 아닌 이곳을 탐사했다면 훨씬 쉽게 진화론을 발견했을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독특한 자연을 갖췄다. 그러나 이대로 놔두면 '시베리아의 보석'은 머지않아 빛을 잃을지도 모른다.
 
러시아 바이칼 호/ 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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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소작농으로 변해가는 ‘제주도’

 
 
국공유지를 중국 자본에 그대로 넘겨주는 제주도
 
임병도 | 2015-03-07 10:15:0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설날 연휴 제주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이 6만여 명이 넘는다며, 대형 크루즈 중국 관광객들이 제주에서 엄청나게 쇼핑을 하고 갈 것처럼 방송에서는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크루즈를 타고 온 중국 관광객들은 요금이 무료인 관광지만 방문하고, 대부분 면세점에서만 쇼핑하고 떠났습니다.

한라일보의 ‘하선 후 3시간 반 만에 일정 뚝딱’라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를 방문한 대부분의 크루즈 요유커들은 제주 관광보다는 오로지 면세점 쇼핑에만 열을 올립니다. 면세점은 재벌이 운영하면서 수입 대부분은 제주도외로 반출되는 형태로, 제주 지역 상권이나 경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주에 중국인들이 많이 몰린다고 수십억 원의 세금을 들여 크루즈 접안 시설이며 편의시설 공사를 하지만 실제 그 혜택을 제주도민들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을 위해 제주도민들의 호주머니만 털고 있습니다.


‘제주의 알짜배기 땅, 중국인들 앞다퉈 사들여’

중국인들이 제주에 몰리면서 제주의 땅을 중국인들이 대거 사들인다는 얘기는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사는 땅이 그리 많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규모로 본다면 중국인들이 사는 땅의 규모가 제주를 위협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잘나가는 땅만큼은 중국인들이 대거 사들인다는 점입니다. 중국인들은 그냥 마구 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알짜배기 땅을 대거 매입하고 있습니다.

제주에서 제일 상권이 좋은 곳은 노형동과 신시가지로 불리는 연동입니다. 지난 2010년부터 연동, 노형동의 토지를 취득한 외국인들을 조사해보니, 중국인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2014년(8월까지)에만 중국인들은 연동 지역 땅 3,025 ㎡을 사들였습니다. 면적은 별로 크지 않지만, 상업지구의 땅을 중국인들이 활발하게 매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애월, 한림읍 지역은 전원주택이나 관광지 상권 등의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입니다. 중국인들은 2014년에만 (8월까지) 한림읍 지역의 땅 378,504㎡를 매입했습니다. 토지 취득 건수만 803건으로 얼마나 중국인들이 활발하게 한림읍 지역 땅을 매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연동 바오젠거리, 임대료 1년 새 5배나 올라’

중국인들이 연동과 노형동, 한림읍 지역의 땅을 집중적으로 매입하는 이유는 그 지역의 땅이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동은 바오젠 거리라는 중국인 요우커들이 자주 가는 제주 속 명동입니다.

중국인들이 대거 몰리는 상권이 형성되자, 바오젠거리의 임대료는 1년새 5배가 넘게 올랐습니다. 10평짜리 화장품 매장의 임대료가 1년 전 2천만 원에서 1억원으로 올랐고, 권리금도 4~6천만 원에서 1억 가까이 줘야 됩니다.

임대료가 오르는 이유 중의 하나가 중국인들이 일반적인 시세보다 훨씬 더 많은 웃돈을 주고 무조건 매입을 하는 ‘묻지마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은 10~20억 짜리 건물이나 토지가 나오면 그 두 배를 주고라도 구입합니다. 이렇게 고가의 돈을 주고 건물을 매입하니 임대료를 올리게 되고, 임대료가 비싸다고 항의하면 세입자를 내보내고 직영으로 중국인 대상 가게를 운영하기도 합니다.


‘국공유지를 중국 자본에 그대로 넘겨주는 제주도’

국공유지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 정부의 땅입니다. 자연을 보전하거나 나중에 꼭 필요한 공공시설을 짓기 위해 보유한 땅으로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 함부로 팔거나 매매해서는 안 되는 땅입니다.

보광그룹은 제주 성산포 일대에 관광개발사업을 한다며 국공유지를 싼 값에 매입했습니다. 이후 보광그룹은 싸게 매입한 국공유지 일부를 중국계 자본에 매각해 수십억 원의 시세차익을 얻었습니다.

제주도가 보존해야 할 땅이 고스란히 중국 투기 자본에 넘겨져 마구잡이로 파헤쳐 개발되고 있습니다.

제주도에 중국인들이 온다고 해서 제주가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언론이나 제주도는 경제 효과가 엄청나다고 떠들지만, 실제 검증된 자료는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주도내 중국계 자본 투자 현황 ⓒ한국경제

옛날 소작농들은 처음부터 소작농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기 땅을 갖고 있지만, 그 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거나 웃돈을 준다는 말에 팔고, 나중에는 그만큼의 돈으로 땅을 살 수가 없어 할 수없이 소작농으로 변했습니다.

지금 제주도의 모습을 보면 이런 소작농으로 변하는 모습과 너무 흡사합니다. 중국인들이 시세보다 더 많이 준다는 말에 땅과 건물을 마구 매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이득을 보는 것 같지만, 나중에 그만큼의 땅을 지금 받은 돈으로 살 수 있을까요?

제주의 중국자본에 대한 우려와 걱정, 많은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는 어떤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게 대응하는 모습은커녕, 국공유지를 중국에 팔아도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있습니다.

제주도를 보면 그저 중국인들이 오니 좋다고 ‘허허’ 웃다가 경제력은 물론이고 토지까지 몽땅 뺏기는 소작농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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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대로 박정권 공안탄압 불법정권 만 천하에 알릴 것”

이적 목사, 현정권과 미국에 저항하기 위해 농성
 
"국제연대로 박정권 공안탄압 불법정권 만 천하에 알릴 것”
 
이정섭 
기사입력: 2015/03/07 [00:14]  최종편집: ⓒ 자주일보
 
 

 

▲     © 자주일보 이정섭

 


민통선 평화교회 담임 목사인 이적목사는 남북이 화해와 용서로 평화와 단합을 이루고 민족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하나로 해마다 남북 갈등의 원인의 하나로 되고 있는 애기봉 등탑 점등을 반대하는 운동과 포탄까지 넘나드는 위험을 야기한 대북전단 살포 반대 운동을 평화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이다.
 
상식과 법치가 통하고 민족의 비극을 끝내고 통일을 끝내야 한다는 온겨레의 염원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이구동성으로 이적 목사와 같은 양심적 평화통일 운동가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적 목사는 지난해 12월 22일 국가공권력에 의해 집과 사회복지시설인 공부방, 그리고 과거 독재 정권에서도 감히 할 수 없었던 교회 예배당을 압수수색 당했으며 더욱이 십자가와 설교 강단까지 해체 당하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당했다. 결국 이적목사는 자신은 물론 예배당까지 피난을 당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적목사와 함께 지역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지역 주민들과 단체들 역시 공권력의 압수수색과 소환을 당하자 기독교교회협의회 건물에서 부당한 공권력에 항의해 농성을 벌이고 있다.
 
거의 두달여를 차가운 건물 복도에서 지내며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이적 목사를 피난 교회에서 만나 농성이유와 최근 근황, 그리고 앞으로 계획을 들어 보았다.
 

▲ 국가보안법피해자 증언대회에서의 이적목사     © 자주일보 이정섭



 
- 기독교협의회에서 농성을 시작하게 된 경위는 무엇입니까 
 
▲ 박근혜 공안정권은 불법정권의 실정을 덮기 위하여 공안몰이로 사태해결을 하려 한다 . 애기봉평화운동과 애기봉등탑및 전단살포 반대 발언은 신앙인으로서 문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이며 마땅히 양심에 따라 쓴 글이다.
 
이를 이적표현물 작성 배포, 북한 동조 죄 등으로 몰아 부치며 탄압 하는 것은 공권력이 할 짓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법 공권력을 거부한 것이며 그 거부의 일환으로 기독교회관에 들어갔으며 이를 배후 조종 하는 미국과 박근혜 정권에 저항을 하는 것이다
 
- 지금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은 어떤 분들이십니까?
 
▲ 그동안 민통선평화교회와연대하여 대북심리전 반대운동에 참여한 단체들이 많습니다 코리아 연대, 진보연대, 전단살포 애기봉등탑 반대 주민대책위원회와 목회자단체 등 이들 전부가 연대 농성하고 있습니다. 민통선평화교회와 코리아 연대 ,목회자단체, 김포시민운동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 농성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 약 두달 간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농성장을 떠나라는 압력이 많이 들어옵니다. 심지어는 날짜까지 명시해서 3월26일날 경찰에 들어가라고 압력을 넣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심한 압력도 있습니다. 오늘은 경찰을 불러서라도 농성단을 잡아넣게 하고 나는 옷을 벗겠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공안들 하고 내통하며 공작전이 아니라면 이런 발언은 할 수 없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언젠가는 그분의 이름을 밝힐 날이 올 겁니다. 
 

▲     © 자주일보 이정섭



- 지금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당국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까.
 
▲ 현재 서울경찰청 소속 보안1,2,3수사대에서 소환장 3번을 발부한 상황이며 다음주부터 지명수배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 일부에서는 떳떳하다면 경찰이나 검찰에 가서 당당하게 밝히면 되지 않느냐는 입장도 있는데요.
 
▲ 대북 전단 살포와 애기봉등탑 반대운동이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저들의 의도는 평화운동 자체를 친북운동으로 몰아가려 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예배당까지 침탈 했고 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울청장이 우리가 아닌 딴 곳을 찾아가 사과까지 했습니다. 우리의 농성은 참뜻은 우리가 잡혀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박근혜정권이 국민을 만만하게 보고 무조건 공안몰이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저항 하는 것입니다 잡혀 들어가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감옥에 갇혀서 공안검찰의 각본에 맞서 자기변론 하는 거 외엔 뭐가 있습니까. 우리는 공안의 피해자로서 이정권의 불법성을 짚고 박근혜 불법정권 퇴진을 요구하기 위하여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     © 자주일보 이정섭


 
- 민통선 평화 교회가 피난을 왔다고 들었습니다.
 
▲ 교회 피난은 전대미문의 사건인 것 같은데 피난 이유는 담임목사를 구속 하려 하고 목사사모까지 소환을 요구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인들까지 출입초소에서 특별관리 통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민통선에서 예배를 드릴 처지가 아니어서 교회문을 폐쇄하고 농성장으로 예배당을 임시로 옮긴 것입니다 이마져도 제가 구속되면 예배드리기가 힘들어지겠지요. 
 
- 민통선 평화교회 역시 성전 침탈과 십자가를 내리는 탄압을 받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 군사정권 시대에도 없던 일이다 예배당 침탈도 큰 사건인데 강대상과 십자가를 뗀 것은 더 큰 사건 아닌가. 이는 나치시대에도 없던 종교탄압이다 청와대에서는 사과를 한다고 해놓고 딸랑 서울지방경찰청장만 보내고 말았다. 책임자 처벌도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한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없다 기독교계를 달래기 위한 임시 방책일 뿐이다
 
-이번 민통선 평화교회와 농성자들에 대한 탄압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2014년 대북전단 살포와 애기봉 가짜트리를 막아낸 것에 대한 보복행위이며 진보당 해체이후의 공안몰이로 정권위기를 막으려는 술책으로 우리를 쳤다 우리다음에 양심운동단체를 계속 칠 것이다. 이것이 박근혜정권의 본질이다.
 
- 박근혜 대통령도 통일 대박이라며 통일준비위원회까지 내왔다. 그럼에도 평화와 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탄압을 가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통일대박과 통일 준비위는 국민들에 대한 여론 호도용이다 저들은 소위 동맹이라는 명분으로 미국과 스텝을 같이 하기 때문에 미국에 반하는 통일정책을 마음대로 세울 수 없다
 
통일주장은 겉모습이며 속으로는 통일에 대한 관심이 추호도 없는 세력들이다 명목적 반공이데올로기로 미국과 손잡고 권력만 유지하는 것이 저들의 욕심이다 진정한 통일애국세력을 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 농성자들의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 그냥 앉아서 농성만 하려고 여기 들어온 것이 아니다 박근혜정권의 공안탄압과 불법정권임을 만 천하에 알리는 일들을 계속 할 것이다 그래서 공안탄압 피해자 대회도 하고 피해자 연대단체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중요정치현안이 생길 때마다 우리 의견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수시로 한다. 앞으로는 국제 양심세력과 연대한 국제대회에도 참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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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에게 세금 도둑?"

 

[인터뷰] 이석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장, 진도 사고현장 방문

15.03.06 22:01l최종 업데이트 15.03.06 22:0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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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현장에 헌화하는 이석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장 이석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장이 6일 권영빈·박종운 상임위원과 함께 전날 임명장을 받은 후 첫 공식 일정으로 진도 팽목항을 찾았다. 앞서 안산 합동분향소을 방문한 이들은 이날 오후 5시께 유가족·실종자 가족들과 약 1시간 동안 배를 타고 사고현장을 찾아 헌화를 하기도 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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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진실 규명을 위한 유일한 열쇠다. 조속한 인양을 정부에 요청한다."

5일 이완구 국무총리로부터 박근혜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받은 이석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장은 6일 오후,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인 맹골수도에 도착해 준비한 국화 한 다발을 바다에 내려놓았다. 그는 바다 위에 둥둥 떠 흘러가는 꽃다발을 보며 잠시 동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이날 사고현장을 오간 배 위에서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 위원장은 "세월호를 직접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이번 사고현장 방문으로) 특조위 직무의 엄중성을 자각할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날 세월호 유가족·실종자 가족, 권영빈·박종운 특조위 상임위원 등과 함께 사고현장을 찾은 그는 "세월호와 관련된 어떤 현장보다 중요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며 "머지않아 다른 위원들도 사고현장에 오도록 의견을 구하겠다"고 강조했다. "실종자 아홉 분, 어서 돌아오세요"라고 외치며 배 위에서 눈물을 흘린 유가족·실종자 가족들을 향해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진실을 규명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의 말을 건넸다.

실종자 조은화(단원고)양의 아버지는 이 위원장을 향해 "언제까지 실종가 가족들이 사고현장에 와야하는 건가"라며 "진상규명도, 실종자 수습도 모두 배를 끌어올려야 가능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해에 비해 정부도 (인양과 관련해선) 전향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것 같고 어제 임명장을 받으며 국무총리에게도 단단히 부탁했다"고 답했다.

세월호 침몰사고로 희생된 고 문지성(단원고)양의 어버지는 "고난의 길이고, 힘든 길이지만 (세월호 진상 규명이라는) 꽃이 그냥 피겠나"라며 "대놓고 부탁드려서 죄송하지만 죽을 각오로 해줄 것을 부탁드리겠다"고 이 위원장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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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 피우는 이석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장 이 위원장이 팽목항 분향소에서 향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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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태 위원장이 사고현장에 던진 국화 한 다발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에 던진 이 위원장의 꽃다발이 바다 위에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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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조위, 지금은 내부 갈등 없어"

이 위원장은 특조위 준비 과정에서 있었던 새누리당 추천 위원들과의 갈등(관련기사 : 공무원 철수시킨 조대환, 이번엔 누더기 예산안 내놔)을 두고 "설립준비 과정에서 특조위 구성을 두고 견해 차이가 있었지만, 현재는 특조위원 사이의 큰 이견은 없다"며 "특조위 활동을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위원장은 "세금 도둑"에 이어 최근 특조위를 향해 "탐욕의 결정체"라 비난한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과 관련해선 "좀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관련기사 :김재원, '세금도둑' 이어 "세월호 특위, 탐욕의 결정체"). 그는 "예산·직제·기구 등이 포함된 계획안은 특조위원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만든 것"이라며 "유가족, 대한변협, 대법원, 여야 추천에 의해 구성되고,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에게 탐욕의 결정체라고 하면…"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김 의원이) 정치인이니까 (자신의) 생각을 자극적으로 표현해야 관심을 끌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런 말을 한 것 같다"며 "세금의 관점이 아니라 특조위가 왜 생겼는지,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이런 적극적인 관점으로 봤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 위원장은 법무법인 '덕수'의 대표변호사로,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참여연대 공동대표, 환경운동연합 상임집행위원 등을 역임했다. 지난해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로부터 '투표자 243명 중 242명의 지지'를 받아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장에 내정됐다가 지난 5일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받았다.

아래는 이 위원장과 한 인터뷰의 일문일답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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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현장에 헌화하는 세월호 특조위원 이 위원장과 함께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을 찾은 권영빈·박종운 상임위원이 헌화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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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드시 진상을 규명..." 이 위원장은 팽목항 분향소에 들러 방명록에 "세월호 참사 진상을 반드시 규명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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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현장 처음 와... 특조위 엄중성 자각"

- 사고 해역을 찾은 건 처음인가.
"진도 팽목항을 찾은 건 세 번째이지만, 사고현장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 직접 와서 보니 어떤가.
"부표 외에는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파도도 심하지 않았다. 여기서 (세월호 참사와 같은)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해역 자체의 현상보단 여기가 사고 해역이라는 점, 또 부표 밑에 비극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세월호가 있다는 점에서 직접 세월호를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특조위 직무의 엄중성을 자각할 수 있었다."

- 오늘은 위원장을 포함 특조위원 3명만 현장을 찾았는데...
"머지않아 다른 위원들도 올 것이다. 사고 현장에 올 수 있도록 의견을 구할 생각이다. 현장을 와 봐야 여기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체감할 수 있다. 특조위원들에게 그 책임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다짐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세월호와 관련된 어떤 현장보다 중요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 출범 과정에서 부침이 조금 있었다. 새누리당 추천 특조위원인 조대환 부위원장이 파견 공무원을 철수시키는 등 문제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설립준비 과정에서 특조위 구성을 두고 견해 차이가 있었다. 현재 특조위원 사이의 큰 이견은 없다. 특조위 활동 역시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다."

- 5일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은 받았으나 특조위 설립준비단이 정부에 제출한 계획안이 아직 미승인 상태다.
"우리가 2월 중순, 그동안 논의한 것을 정리해 예산·직제·기구 등의 계획을 정부에 제출한 상황이다. 아직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라는) 소식이 없는데 하루 빨리 우리가 제시한 것대로 정부가 받아들였으면 한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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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종자 아홉 분, 꼭 돌아오세요" 이 위원장과 함께 사고현장을 찾은 한 유가족이 사고현장을 향해 헌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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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목항 떠나 사고현장으로... 이 위원장과 함께 사고현장으로 향하는 배 위에 오른 실종자 허다윤(단원고)양 아버지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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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의원, 정치인이다 보니 자극적인 표현"

-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의 "세금도둑", "탐욕의 결정체" 발언 등 특조위 향한 공격이 여전한데.
"김 의원 개인적인 의견과 우리가 제시한 안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여러 차례 의견을 밝혔다. 다시 말하지만, 특조위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만든 것이다. 특조위원들은 특정 단체에 소속돼 있지 않다. 유가족, 대한변협, 대법원, 여야 추천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이고,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한테 이걸 탐욕의 결정체라고 하면…. 정치인이니까 (자신의) 생각을 보다 자극적으로 표현해야 관심을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좀 안타깝다.

세금 관점에서 볼 게 아니라 특조위가 왜 생겼는지,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이런 적극적인 관점으로 봤으면 한다. 국민을 납득시키고, 유가족을 납득시키고, 정부도 납득하는, 그래서 어떻게 세월호 참사를 지혜롭게 전환점으로 삼을지 생각해야 한다. 정부에게도 좋은 기회다. 어떤 국가든 큰 사고가 일어날 순 있다. 좋은 정부는 사고 이후 수습책을 잘 마련해서 전환점으로 삼는 정부다. 그런데 지금 정부가 그런 좋은 정부이냐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 특조위에서 인양 논의도 적극적으로 할 예정인가.
"유일한 진상규명의 열쇠이자, 실체이자, 물적 증거라 할 수 있는 세월호는 빨리 인양돼야 한다. (특조위) 활동기간 내 인양이 돼서 진상 규명과 실종자 수습 문제가 해결되길 간곡히 희망하고, 하루라도 빨리 세월호를 인양할 것을 정부에 요청한다."

- 정부는 인양에 다소 소극적인 상황인데.
"내 생각엔 지난해에 비해 정부의 관점이 조금은 바뀌었다고 본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대체로 정부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보면 인양을 해야한다는 의견으로 들린다." 

- 특조위 활동 기간은 1년이고, 사정에 따라 한 번 연장(6개월)할 수 있다. 이 기간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1년 안에 최선을 다해 어떻게든 마무리하려고 한다."

- 세월호 유가족·실종자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난해 누구도 예상하치 못한 비극적인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여전히 침몰한 배가 가라앉아 있다는 점과 아직도 가족들 품에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를 생각하면 비통하기 그지없다. 이제 (특조위가) 공식 일정을 시작하는데 출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앞으론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사고로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고, 하루 빨리 실종자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오도록 기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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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현장에서 오열하는 '지성 아빠' 이 위원장과 함께 사고현장을 찾은 고 문지성(단원고)양 아버지가 오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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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에 남은 꽃잎 이 위원장과 세월호 유가족·실종자 가족 등의 헌화 이후 배 위에 꽃잎이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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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가 몸에 좋다는데 왜 엄마만 나쁘다고 해?"

[민들레] 돌봄·① 금쪽같은 내 새끼

이현주 주부 2015.03.06 18:07:38
 
올해 여덟 살이 된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는 공교육에서 학교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아이의 공교육 경험은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됐다. 다섯 살이 끝날 무렵까지 집에 있다가, 그 이후 집 앞에 새로 생긴 병설유치원에 다녔다.  
 
애초에 아이를 기관에 일찍, 오래 맡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 어린이집에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내 아이'가 다닐 '더 좋은 기관'에 대한 궁리는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세 살이 됐을 무렵, 내 나름 대안이라고 할 만한 기관들을 그나마 집 가까운 곳으로 어렵게 찾아내 전화를 했는데 무척 비쌌다. 우리 경제 상황으로는 접근이 어려운 정도였다. 그런데도 욕심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망설이고 있는데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이야기는 참 차가웠다.  
 
"어차피 대기자가 너무 많아서 다니실 수 없습니다. 지금은 대기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전화로 접근했던 몇몇 기관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영어유치원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내 자식만 위하는 부모의 욕망'을 이용해서 장사하는 곳들이었다. 당시 세상을 보는 내 빈약한 가치 척도에 걸맞게 찾아낸 곳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래도 참 아쉬웠다. 아이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주지 못하니,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기가 어려웠다. 한창 예쁜 아이의 모습을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날들이었다.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데도 쉽게 대안 유아기관들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지 못하니,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 지난 2일 부산의 한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연합뉴스

▲ 지난 2일 부산의 한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연합뉴스

 
 
그런데 그런 걱정들로 시간을 오래 낭비하지 않고 내가 '지금 여기'로 다시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아이 덕분이었다. 나의 고민과 상관없이 둘은 언제나 웃었고 함께 있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놓치고 있던 중요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금쪽같은 내 새끼'를 위해서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평생 부모라는 역할을 내 정체성의 일부로 삼으면서도 한편 극복해야 할 욕망의 일부로 인정하고 있는 내게 '내 새끼를 위하는 마음'은 사실 참 불편한 내면의 자아이기도 하다. 
 
이때부터였나 보다. 내 자식을 위한 욕망이 아닐까 염려될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기준으로 '이것이 주변의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인가?' 묻기로 한 것이. 그렇게 생각하니 주변의 일반 어린이집도 치르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그곳에서는 온갖 사교육 프로그램을 '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원비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소비를 최대한 줄이는 방식의 삶을 결정한 후 우리 부부는 선택이 조금 쉬워졌다. 가족이 최대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아이도 가장 친근한 사람들과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어서 즐거워했다.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 다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자 함께 사는 시부모님이 손자의 기관 생활(공교육)이 늦어진다고 염려했다. 우리 부부는 아이의 공동 보호자인 어른들의 손자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의 충족에 따른 행복도 충분히 고려해야 했다. 마침 그해 봄에 첫아이는 형이 됐고 나름대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동생 맞이도 잘 해나갔던 터라, 유치원에 갈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 운이 좋게도 집 앞 초등학교에 병설유치원이 생겼고 아이는 첫 기관 생활을 그곳에서 시작했다.  
 
우리 가족에겐 병설유치원이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교육비가 안 들었고, 게다가 일찍 끝났다. 오후 1시가 되면 모든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적응이 쉽지만은 않았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한 날도 많았고, 유치원 문 앞에서 엄마와 떨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는 천천히 적응해 나갔고,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질 때면 엄마인 내가 아이를 잘 돕고 있는 건지 고민했다. 공교육 내 초등학교와 연계되어 있어서 아이들에 대한 통제와 훈계의 강도가 높고 때론 부당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와 부모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아이에게서 경쟁심과 복종의 흔적을 확인할 때마다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다양한 어른들과 친구들을 경험하는 것이 다른 지적 학습보다 더 큰 배움'일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걱정의 한복판에서도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은 그나마 다른 기관 보다 일찍 끝난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엄마가 늘 제 곁에 있고 외부 기관에는 짧게 노출되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고 서둘러 고민을 접어버렸다. 너무 내 아이 생각만 하는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부모 모두 일을 다니는 경우도 많고 엄마 혼자 아이를 돌보느라 고생하는 가정도 많은데, 대가족 속에서 여러 어른들의 돌봄을 받는 우리 아이에 대한 고민을 오래 하는 내가 너무 욕심쟁이 같이 느껴졌다.   
 
학원에 보내 달라 조르는 아이  
 
아이는 일곱 살이 된 어느 날부터 친구들이 유치원 끝나자마자 태권도 차를 타고 사라지자, "엄마, 태권도 보내줘!"라고 했다. 요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 친구들이 없어서 학원에 따라 간다더니, 내 아이도 그랬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다. 자꾸만 조르는 아이를 보며 흔들리던 찰나, 미용실 건물에 있던 태권도장을 지나치다가 깜짝 놀랐다. 학원 앞에 커다란 장난감을 전시해 놨는데, 그걸 가져갈 자격은 '태권도장 선생님 말을 잘 들으면 나눠주는 스티커 개수로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유치원의 영향으로 집에서도 칭찬 스티커를 달라고 조르던 참이었다. 자기가 말 잘 들으면 보상으로 스티커를 주고 그게 다 모아지면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는 걸 당치도 않은 이야기라고 못 박아 뒀는데, 태권도장에서도 똑같은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고민은 사라졌다. 보내지 않는 걸로. 게다가 다달이 들어갈 십여만 원의 학원비도 부담스러웠다. 비용도 부담스러운데다 아이의 가치관에 혼란을 줄 문화도 탐탁지 않았고 무엇보다 또 다른 복종관계를 맺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언가 시간에 얽매이는 것은 유치원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주었다. 
 
▲ 할아버지 손은 약손. 어른들의 돌봄을 받고 자라는 아이. ⓒ민들레

▲ 할아버지 손은 약손. 어른들의 돌봄을 받고 자라는 아이. ⓒ민들레  

 
 
그러자 이번엔 또 다른 유혹이 찾아왔다. 아이가 자기는 그림을 못 그려서 주말 동안 있었던 일을 그림으로 그리는 월요일엔 유치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떼를 썼다. 선생님 말씀으론 또래보다 유난히 못 그리는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아이 욕심이 너무 큰 것 같았다. 유치원을 오가며 다른 엄마들 조언을 들으니, "학원을 보내서 자기가 잘 그린다고 생각하는 수준으로 올려주라"고 했다. 마침 동네에 놀이처럼 미술을 즐기게 한다는 학원이 생겨서 상담을 해보니, 선생님도 마음에 들었다.  
 
'어쩌나….' 또 생각했다. 남편과 상의하자 "못하면 다 학원에서 배우게 할 거야? 그냥 둬"라고 했다. "그러네." 이렇게 나는 자주 흔들린다. 다행히도 남편이 중심을 잡아줘서 아이에게 "잘 못해도 되고 조금 더 기다리면 잘 그릴 수도 있게 될 거다"라고 설명하며 기다리자고 했다. 유치원 선생님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격려를 많이 받았다. 그 사이에 발달과정을 훌쩍 뛰어넘은 것인지, 아이는 한두 주 사이에 갑자기 스스로 그림을 잘 그린다고 말하게 됐다. 그 일로 사교육의 도움을 받고 싶은 욕구는 아이의 보챔과 자연스런 발달을 기다리지 못하는 부모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유치원 아이에게 수십만 원씩 사교육비가 들어가는 건 어느 특별한 집 이야기가 아니다. 한 가지를 시작하게 되면 그 다음은 쉽다. 태권도로 시작해서 미술·피아노·글짓기로 이어지는데, 이렇게만 해도 적게 잡아 한 달에 삼십만 원 남짓이다.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크지만, 과연 돈으로 산 그 시간이 정말 아이의 필요에 의한 것인지 물어야 될 것 같았다. 적어도 내게는 아이의 시간을 지켜주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요즘에도 여전히 아이는 따지듯 묻는다. "엄마는 왜 다른 엄마들이랑 달라?" 처음엔 당황스러웠다가 점차 이 질문이 아이와 나를 아주 건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에겐 무언가에 대해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니 건강한 질문이고, 나에겐 끊임없이 '내가 사람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묻게 하는 질문이어서 건강하다. 미완의 존재인 우리는 모두 나의 생각이 진짜 나의 생각인지 의심하며 진리를 찾기 위해 애쓰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우유가 몸에 좋다고 하는데 왜 엄마만 나쁘다고 해?"라는 아이의 질문에 "엄마는 책에서 우유가 몸에 나쁠 수도 있다는 걸 알았고, 우유는 건강에 좋지 않다는 판단을 선택했어. 지금은 네가 엄마 보살핌 아래 있기 때문에 엄마의 방식을 따르겠지만, 너도 책을 읽게 되면 두 가지 이야기를 잘 읽어보고 네가 선택하면 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대답을 마련하는 동안 나 스스로도 한걸음 성장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집 근처에 혁신초등학교가 있다. 오랜 시간 대안교육에 대한 짝사랑으로 살아온 내겐 마음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으니, 아이를 그곳에 보내고 싶어 마음이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가만히 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니, 그 역시 '내 아이를 특별히 키우고 싶은 욕망'이라는 이야기가 내면에서 들려왔다. 게다가 주소 이전 을 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위장전입'이라는 사실에 다다르자 혁신학교에 대한 욕망이 깨끗이 사라졌다. 
  
다시 떠올려 봤다. '어떤 아이들이나 다 선택할 수 있는 곳에서 평화로워지는 방법을 찾아보자던 예전 나만의 약속을. 단순하지만 잘 잊게 되는 기준을 잊지 말아야지. 돈으로 아이의 시간을 빼앗지 말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배움의 과정을 돈으로 생략하지 않기를. 아이는 돈으로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어른들의 사랑으로 키워진 다는 고루하고 따분한 진리를 잊지 않기'를 나 스스로 다짐해본다.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의 방학은 길다. 아이는 내내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었다. 텔레비전 못 보게 하는 엄마를 견디면서, 어린 동생과 티격태격하면서, 할머니께서 엄마 몰래 주시는 단 간식들을 먹으면서, 그림 그리고 글자 쓰고 색칠 놀이도 하고, 도서관에도 가며 느리고 심심하게 지내고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도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학교는 더 일찍 끝날 것이고 우리는 모두의 시간이 온전히 지켜질 수 있도록 애쓸 것이며, 그 안에서 갈등과 화해와 배움이 일어날 것이다.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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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성인 동강 수달 대낮에도 거침없이 사냥

 
윤순영 2015. 03. 05
조회수 11724 추천수 0
 

수생 생태계 1인자...멸종위기종 1급으로 수질 환경 지표종

처음엔 ‘침입자’ 경계해 이빨 드러내다 곧 자맥질하며 ‘재롱

 

2.jpg» 물속에서 잡은 혼인색 물든 참갈겨니 수컷을 먹고 있는 동강 수달.



지난 1월 동강계곡에서 수달을 볼 수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하천의 최상위 포식자인 수달은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지정된 희귀동물로 낮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팔당댐 인근에서 하던 흰꼬리수리와 참수리 관찰을 잠시 접고 동강으로 향했다. 저녁 늦게 동강계곡에 도착하니 인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펜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숙박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가능하다고 하였다. 식사할 곳이 있냐고 물었다. 20여분쯤 걸리는 정선읍까지 가야 한다고 한다. 저녁도 먹을 겸 수달을 관찰 할 때까지 머물려면 먹을거리를 사다놔둘 수밖에 없었다.

 

YSJ_9371.jpg» 동강에서 먹을 찾는 검은등할미새.

 

YS1_5356.jpg» 잠수해 물고기를 잘 잡는 비오리 무리.

 

다음 날 아침 수달을 보기 위해 제보가 들어온 장소를 찾았다. 수달이 나올만한 계곡을 살펴보았다.

 

동강의 겨울은 물소리만 들릴 뿐 한적하기만 하다. 가끔 바위에 앉은 검은등할미새가 까불대고 물이 고인 곳엔 비오리가 한가로이 노닌다. 수달은 보이지 않았다.

 

야행성인 수달을 대낮에 관찰한다는 것이 무리다. 동네 분을 만나 수달을 볼 수 있는 장소를 자세히 물어보았다.

 

야간 낚시를 할 때 옆에서 수달이 사냥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고 한다.  우선 그 장소를 찾아보았다.

 

DSC_0929.jpg» 수달이 살기 좋은 환경조건을 품고 있는 동강계곡.

 

YSY_6100.jpg» 유리알처럼 바닥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맑은 물.

 

여울이 없이 물이 고여 물고기들이 쉬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강 중간에 드문드문 위치한 작은 바위와 모래섬이 있다.

 

자세히 살펴봤다. 혹시 그 위에 배설물이 남아 있지 않을까? 다행히 바위 위에는 희끗 희끗 말라있는 물고기 뼈 등 먹이의 잔해가 많이 남아 있다.

 

YSY_6125.jpg» 바위 위 가운데 검게 보이는 것이 수달의 배설물이다.

 

배설물이라도 봤으니 맘이 설렌다. 상류 쪽으로 옮겨가자 여기저기 배설물이 눈에 띈다.

 

기다려보기로 했다. 해가 지기 시작한다. 겨울 해는 짧지만 계곡의 해는 더 짧다. 오후 8시가 되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야간에 관찰은 할 수 있겠지만 촬영은 어렵다. 그래서 아예 무모하지만 낮에 만날 기회를 기다렸다.

 

DSC_0916.jpg» 수달이 사냥 도중 또는 마친 뒤 물밖으로 나와 숨을 쉬고 먹이를 먹기에 적합한 자리이다.

 

 

다음날 아침 수달 사냥터로 다시 향했다. 바위 위에 배설물들을 살펴보았다. 마르기 않은 배설물이 보인다. 밤에 왔다 간 것이 틀림없다.

 

수달은 일정한 장소에 배설을 하는 습성이 있고 생활터전에서 이동경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루 종일 기다린 보람도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YSJ_9621.jpg» 얼음 위를 바쁘게 걸어가는 수달.

 

YSJ_0183.jpg» 갈 길을 재촉하려면 물길이 얼음 위보다 낫다.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 이동하는 수달.

 

 

3일째 되던 날도 아침 일찍 수달 사냥터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다. 지루함을 달래려고 강 상류와 하류 쪽을 살펴보았다.

 

오후 4시께 수달의 사냥터로 돌아 올 무렵 멀리 얼음 위에 동물형체가 보인다. 물로 향한다. 수면위에 물줄기가 둘로 갈라지는 광경이 들어 왔다.

 

수달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자리를 비운 사이 수달이 나타나 사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를 쫓아갔다.

 

YSJ_9811.jpg»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도 민첩한 행동을 보이는 수달,

 

YSJ_9647.jpg» 낯선 사람이 영역에 나타나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는 수달.

 

이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물속에서 올라온 수달과 얼굴이 바로 마주쳤다.

 

수달은 자기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가 못마땅했는지 이빨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수달의 움직임은 이곳 환경을 훤히 꿰고 있는 듯했다. 당황하거나 겁내는 모습은 전혀 없고 오히려 당당하다.

 

YSJ_0024.jpg» 참갈겨니 사냥에 성공하여 흡족한 표정을 짓는 수달.

 

YSJ_9980.jpg» 게걸스럽게 먹이를 먹는 수달의 모습이 야무지게 보인다.

  

YSJ_900.jpg» 순식간에 물고기 한 마리를 다 먹어치웠다.

 

 

나이도 들어 보이고 노련한 모습이다. 이곳 동강의 터줏대감인가.

 

처음과는 달리 경계를 하지 않고 사냥에만 열중한다. 피하려는 기색도 없다.

 

조금 전에는 텃세를 했던 모양이다. 물속과 물 밖으로 들락거리며 제법 사냥 솜씨를 뽐내며 민첩하게 잡은 물고기를 다루고 게걸스럽게 뜯어먹는다.

 

YSJ_9870.jpg» 사냥을 위해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 수달.

 

YSJ_9905.jpg» 미끄러지듯 물속으로 들어간다.

 

YSJ_9907.jpg» 작은 물방울을 남기고 수달이 물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은 수달을 모습을 돌이켜 봤다. 수달은 족제비 무리 중 물에 적응한 동물이다.

 

수달은 납작하고 둥근 머리, 개와 비슷한 둥근 코와 작은 귓바퀴, 눈은 작은 편이고 둥글고 망막도 있다.

 

물속에서 먹이를 찾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입 주변에 안테나 노릇을 하는 흰 수염이 뻣뻣하게 많이 나있어 유난히 눈에 더 띤다. 먹이를 먹을 때마다 치아 중 송곳니가 무척 날카롭게 돋보인다.

 

YSJ_0134.jpg» 사냥에 성공한 수달. 

 

 

YSJ_0135.jpg» 몸부림치는 참갈겨니 수컷.

 

몸 전체에 짧은 털이 빽빽하게 나있고, 몸은 가늘고 다리는 짧고 몸길이의 2/3에 이르는 꼬리는 둥글며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꼬리가 매우 길다. 먹이를 먹을 때 이빨을 드러내면 암팡스레 보이기도 하지만 귀여운 얼굴에 장난끼 있는 영특함이 돋보인다.

 

YSJ_9652.jpg» 물속에서 나오면 항상 주변부터 살핀다.

 

YSJ_9656.jpg»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수달이 무심한 눈빛으로 필자를 바라본다. 코에 생채기가 있어 다음에 만나도 알아 볼 것 같다.

 

다른 어느 동물보다도 성질이 온순한 것 같다. 빤히 쳐다보다가 물속으로 잠수하여 이곳저곳에서 나타나서 재롱을 떠는 느낌이 온다. 그다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친숙한 동물인 것 같다.

 

얼음 위를 걸어가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등을 활처럼 굽혀 머리가 땅을 향하여 걷고 뛰는 모습도 다른 동물과 차이가 난다.

 

YSJ_9721.jpg» 미끄러운 얼음 위를 힘차게 달리는 수달.

 

YSJ_9722.jpg» 날카로운 발톱과 물갈퀴가 있는 발바닥이 얼음 면에 밀착되고 짧은 다리가 미끄럼을 방지하는 것 같다.

 

물에서 나오면 곧바로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낸다. 수달의 털은 바깥과 안쪽에 이중으로 나 있어 잠수할 때 방수 효과와 체온 유지에 뛰어난 기능을 한다.

 

몸은 유선형이고 수영을 할 때는 머리의 윗부분과 몸 뒤쪽 일부분을 물 밖으로 내어 놓고 발가락 물갈퀴가 있는 앞발은 헤엄을 칠 때는 배에 붙인다.

 

YSJ_0196.jpg» 뒷다리와 몸과 꼬리를 사용하여 헤엄을 쳐 물결에 굴곡이 생긴다.

 

뒷다리에도 물갈퀴가 있어 물을 휘젓는다. 몸과 꼬리는 좌우로 흔든다.

 

앞발을 사용하지 않고 수영을 해서인지 헤엄치는 모양은 마치 뱀장어와 같다. 유연한 몸과 굵고 긴 꼬리는 물속을 헤엄칠 때 물의 저항을 줄인다.

 

YSJ_0105.jpg» 사냥에 실패하고 물 밖에서 물기를 털어내는 수달.

 

YSJ_9996.jpg» 사냥감이 없어서인지 몇 번 실패하자 자리를 옮기려는 수달.

 

YSJ_9805.jpg» 다른 사냥터로 이동하는 수달.

 

걸어 다닐 때는 발가락 전부가 땅에 닿아 땅위에서는 동작이 느리다. 방향을 잡거나, 몸을 세울 때는 뒷발을 사용한다.

 

물 밖으로 나올 때는 먼저 머리를 물 밖으로 살짝 내밀어 시각, 후각을 이용해 주변 상황을 이리 저리 살핀다. 수달은 발톱이 약하기 때문에 땅을 파서 보금자리를 만들지는 못한다.

 

YSJ_9849.jpg» 물속에서 나와 항상 주변을 살피는 수달.

 

야행성이어서 낮에는 보금자리에서 쉰다. 그렇지만 갑자기 위험 상태에 놓이면 물속으로 잠복한다.

 

외부감각이 발달해 밤낮으로 잘 보며, 작은 소리도 잘 들을 수 있다. 후각으로 물고기의 존재, 천적의 습격 등을 감지하는 예민한 동물이다.

 

DSC_0915.jpg» 동강 계곡에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은 수달의 이동길목이다.

 

사냥터와 잠자리를 오가는 사이에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다리 세울 때는 눈치를 살피며 상당히 불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물길이 막히지는 않아서 이동이 가능하다. 다리를 지나 사냥을 끝내고 상류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며 사라진다.

 

 

YSJ_0013.jpg» 사냥을 마친 수달.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 계곡의 작은 바위와 모래톱이 수달에게는 배변 터가 되고 먹이를 먹는 장소가 된다. 무심코 인간이 자연에게 행한 행위가 자연계를 살아가는 동물들에게 생존을 위협하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이 있는 환경을 가장 좋아하는 수달은 수생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정점에 있으며, 해당 지역 환경의 건강성을 가늠하는 지표종이다. 생태계의 질서, 즉 먹이사슬을 균형 있게 조절해 주는 핵심적인 일을 한다.

 

YSJ_0241.jpg» 땅과 물을 이동 수단으로 삼는 수달은 필요에 따라 땅과 물을 이용한다.

 

YSJ_0254.jpg» 사냥터를 떠나 잠자리로 이동하는 수달이 어두운 바위틈으로 자취를 감춘다.

 

 

수달이란 어떤 동물?

 

보통 단독생활을 하며, 하루에 750~1500g의 먹이를 필요로 한다. 야행성이지만 낮에 활동하기도 한다. 강이나 바다 등 물가를 따라 서식하며 갈대로 만든 둥지나 바위틈, 굴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휴식처의 입구는 대부분 물 쪽을 향해 있으며, 땅 위로 공기구멍이 나 있다.

 

수달은 늦은 겨울~이른 봄에 짝짓기를 하며 임신기간은 63∼70일이고, 4~5월에 출산한다. 새끼는 평균 2 마리 정도 낳는다. 암컷은 새끼를 낳은 후 50일이 지나야 비로소 물속으로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는다. 새끼들은 6개월간 어미수달과 같이 지낸다.

 

몸 길이 63∼75㎝, 꼬리 길이 41∼55㎝, 어른 수달의 몸무게는 5.8∼10㎏ 이다. 먹이는 주로 어류이고, 비늘이 있는 것보다 없거나 작은  메기·가물치·미꾸리 등을 즐겨 잡아먹는다. 개구리와 게도 잘 먹는다.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에 널리 분포한다. 한국의 경우 과거에는 전국적으로 볼 수 있었으나 모피를 얻기 위해 남획하고 하천을 개발하면서 그 수가 줄었다. 1982년 11월16일 천연기념물 제330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 5월31일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한겨레 물바람숲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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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과 전단 살포

박근혜 정권과 전단 살포
 
전단은 그 내용을 떠나 민심 표출의 한 형태인 것이다
 
정운현 | 2015-03-06 11:09:4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달 25일로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2주년을 맞았다. 박근혜 정권 집권 초반기인 지난 2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다고 할 수 있다. 총리, 장관 등 고위급 인사들의 잇따른 청문회 낙마를 비롯해 국정원 사건 수사 및 남북대화록 공개 파문, 그리고 지난해 세월호 참사 등 대형 사건·사고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박 정권은 납득할만한 해결책이나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미봉책과 무능으로 일관했다. 이에 대해 국민들의 분노와 저항이 터져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이승만 정권 때 민주당이 제작한 ‘못살겠다 갈아보자’ 선거포스터가 문득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취임 2주년을 기점으로 최근 서울 도심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규탄하는 내용을 담은 전단이 잇따라 뿌려지고 있다. 지난달 25일 청와대와 신촌 로터리, 26일에는 강남대로, 그리고 27일 명동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전단이 뿌려졌다. 28일 오후 2시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렸는데 이날도 어김없이 전단이 등장했다.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이 ‘박근혜는 물러나라’ 플래카드를 들고 시청으로 행진하는 도중 서울 중구 한국은행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 명의로 된 전단 4,000부 가량이 뿌려진 것으로 보도됐다.

▲26일 오전 서울 강남역 인근에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는 내용의 전단이 뿌려졌다. ⓒ 사진공동취재

박근혜 대통령 비방 전단은 비단 서울만이 아니었다. 부산 북구에 사는 윤아무개 씨는 지난달 12일 부산의 번화가인 서면과 시청 인근에서 기모노를 입은 박 대통령이 그려진 전단 8천여 장을 뿌렸다. 전단에는 한자로 ‘경국지색’(傾國之色·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이라는 문구 등이 쓰여 있었는데 윤 씨는 인터넷상에 떠돌던 그림을 구해 인쇄했다고 한다. 이 전단이 SNS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자 새누리당 부산시당은 14일 성명을 내 “철저히 조사해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급기야 전단 문제는 국회로까지 비화됐다. 27일 국회에서 열린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 질의에서 이완구 국무총리는 박 대통령 취임 2주년을 전후로 전국에서 잇따르고 있는 정부비방 전단 살포에 대해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총리로서 이를 방관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겠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대책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총리로서도 뾰족한 해결책이 있을 리 없다. 현행법상 이 같은 전단 살포는 경범죄처벌법과 명예훼손에 저촉될 수 있다. 그런데 명예훼손은 경우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을 경우 죄를 물을 수 없는 ‘반의사 불벌죄’이며, 경범죄처벌법 위반이라면 기껏해야 ‘쓰레기 무단투기’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전단 살포를 경범죄처벌법으로 다스리는 것도 논란의 소지가 많다. 논란이 됐던 보수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두고 당국은 ‘표현의 자유’ 운운하며 묵인 내지 비호해왔다. 그런데 내용만 다를 뿐 다 같은 전단인데 박 대통령 비방 전단 살포자를 처벌한다면 법 적용의 형평성 문제로 논란이 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서울 도심에서 전단 살포가 잇따르자 경찰은 해당 장소 인근의 CCTV 분석 결과를 토대로 수사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한 누리꾼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쓰레기 무단투기 단속은 구청이 할 일이지 경찰이 나설 일이 아니”라며 경찰의 전단 수사를 비꼬기도 했다.

전단은 그 내용을 떠나 민심 표출의 한 형태인 것이다. 전단은 과거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때도 있었다. 당시 권력자들은 공권력을 동원해 이를 탄압했지만 민심의 바닥까지를 다스릴 순 없었다. 게다가 요즘 전단은 길거리에 뿌려지는 형태만이 아니다. SNS 등 사이버 공간에서 집단으로 뿌려지는 형태가 훨씬 더 파급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처벌할 마땅한 법규도 없거니와 만약 이것까지 법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결국 전단 살포를 근원적으로 막는 길은 한 가지 방법뿐이다. 박근혜 정권이 합리적인 권한 행사와 소통의 정치를 통해 올바른 국정을 펴는 길 밖에 없다고 본다. 하늘을 가리키는 손은 눈감은 채 손 끝만 바라본다면 내일 또 서울 도심 어디에선가 전단이 살포될 것이며, 이는 결국 박 정권의 명을 재촉하게 될 것이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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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트 대사 흉기 습격 김기종은?]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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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5/03/06 13:08
  • 수정일
    2015/03/06 13:08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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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06 08:47수정 : 2015.03.06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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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트 대사 흉기 습격 김기종은?]
2007년 1인 시위 도중 온몸에 화상
2010년 일본 대사 공격으로 징역형
작년엔 박원순 시장 행사에서 난동
서울시 “경찰이 요주의 인물 관리”
EXO 팬들과 다투다가 공무원 폭행

독도 수호 관련 ‘반일 운동’ 해오다
최근엔 키리졸브 비판 등 ‘반미 운동’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에게 흉기를 휘두른 뒤 현장에서 검거된 김기종 우리마당독도지킴이 대표가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운동 종로경찰서에서 수사받던 중 골절상 치료를 위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며 “한미 전쟁 훈련을 중단하라”고 외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흉기로 공격한 김기종씨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비판하는 활동을 꾸준히 해온 반일 성향의 문화운동가다. 몇년 전부터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비판을 함께 해왔는데, 최근에는 3월2일부터 4월24일까지 실시되는 키 리졸브 및 독수리 한·미 연합훈련이 남북관계를 망친다며 훈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김씨는 최근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듯한 잦은 폭행 사건으로 경찰서를 드나들어야 했다. 지난 1월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에서 진행된 아이돌 그룹 ‘엑소’(EXO) 공연을 앞두고 팬클럽이 붙인 포스터 문제로 팬클럽 회원들과 시비가 붙었다. 그는 공연 점검을 나온 구청 공무원과도 실랑이를 벌이다 공무원을 폭행한 뒤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어 시내버스를 막아섰다가 승객과도 싸움이 불었다. 결국 공무집행방해와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됐다.

 

김씨의 돌출적 행동은 또 있다. 지난해 1월 서울시청 시민청 개청식 행사장에서 박원순 시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고성을 질렀다. 그는 ‘독도 관련 토론회에 시민청 공간 미대여 비판’ 등의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배포하려다 제지당한 뒤에도 여러 차례 청사 진입을 시도하다 강제퇴거당했다.

 

한달 뒤에는 신촌 연세로 대중교통전용지구 지정을 앞두고 박 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설명회장에서 고성을 지르며 행사를 방해하기도 했다. 김씨는 한 참석자의 뺨을 때려 재판에 넘겨졌고, 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시 쪽은 “서울시장을 경호하는 경찰이 김씨를 요주의 인물로 관리해왔다”고 했다.

 

지난해 5월에는 일본대사관에 일본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규탄 항의서한을 전달하려다 제지당하자 경찰에게 신발과 달걀을 투척해 입건됐다.

 

김기종(오른쪽)씨가 2010년 7월7일 저녁 7시30분께 서울 중구 한국언론회관에서 강연을 마치고 질문을 받으려던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 대사를 향해 한 차례 돌을 던진 뒤 시게이에 대사가 이를 피하자 다시 돌을 던지려 하고 있다. 화면 갈무리
1984년 ‘우리마당통일문화연구소’(우리마당)를 세워 이후 독도 수호 활동 등을 해온 김씨는 2006년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자 동료 6명과 함께 본적을 경북 울릉군 독도리 38번지로 옮기기도 했다. 2010년 7월 서울 프레스센터에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대사의 특별강연장에서 ‘독도를 왜 다케시마라고 하느냐’는 자신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게이에 대사에게 미리 준비한 콘크리트 조각 2개를 집어던졌다. 김씨는 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변호를 맡은 박찬종 변호사는 “김씨는 일본에서의 반한 시위 등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리퍼트 대사 사건은 그 취지나 방법, 결과가 그때와 다른 것 같다”고 했다.

 

주변인들은 김씨가 극단적 언행을 자주 해왔다고 했다. 특히 김씨는 2007년에는 1988년에 발생한 ‘우리마당 습격사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다 분신을 시도해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개최를 주장하던 우리마당 사무실을 괴한 4명이 습격해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을 두고, 당시 야당은 군 정보사령부에 의해 저질러진 정치 테러라고 주장했다. 김씨의 거듭된 수사 요구에도 아직까지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정신건강 문제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씨는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마당 사무실이 입주한 서울 창천동 건물의 주인 김아무개씨는 “김씨가 기초수급대상자인 것으로 안다. 60만원인 월세도 4~5개월째 밀렸다. 사정이 딱해 월세도 깎아줬다”고 했다. 우리마당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김씨는 각종 공과금마저 제때 납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승훈 김선식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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