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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애국운동? 박정희에게서 퍼올린 유신의 영감

 
 
유신독재 ‘애국놀음’ 지켜본 박근혜가 애국 강조하는 이유
 
육근성 | 2015-02-24 15:02:4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집권 3년 차. 아직 반환점도 돌지 않았는데 벌써 레임덕 얘기가 나온다. 대통령 지지율은 30% 초반에 머물고 있고, 여당 지지율도 크게 내려앉았다.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국정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지율이 최소한 30%는 넘어야 하지만 이 마지노선마저 언제 깨질지 모른다.


대통령에겐 옛 국기하강식 장면이 강렬한 임팩트?

영화의 한 장면이 위기에 처한 박 대통령의 뇌리를 강타했던 모양이다. 영화 ‘국제시장’에 등장하는 국기 하강식 장면에서 얼마나 강렬한 임팩트를 받았는지 핵심국정과제 점검회의석 상에서 그 장면을 거푸 입에 담았다.

“애국가에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런 가사가 있지 않습니까.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 사랑해야 하고...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싸움 하다가도 애국가 들리니까 국기배례를 하고… 우리가 이렇게 해야 소중한 우리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 아닌가.”

무조건 나라, 애국가, 국기를 사랑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단다. 누구와 꼭 닮았다. 박정희는 자신을 향한 비판과 저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국가주의를 내세워 유신체제를 옹위하는 방패로 활용했다. 애국가와 국기의 반열에 자신의 사진을 나란히 배치해 놓고 국민들에게 충성과 숭배를 강요하면서,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숭배가 곧 자신을 향한 충성심으로 표출되도록 광란의 질주를 벌인 독재자다.

정부부처 ‘애국운동’에 팔 걷어붙여

대통령이 애국심을 강조하자 정부가 움직였다. 행자부를 비롯해 10개 부처가 이 ‘애국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태극기 달기 운동, 민간 건물 국기 게양대 설치 의무화, 학생들에게 태극기 게양 인증샷 제출 요구,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 부활, 방송을 동원한 태극기 애국주의 홍보와 기업 참여 유도, 유치원생 대상 국기교육 등이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이 되자 행자부가 해명을 내놓았다.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건 맞지만 의무화가 아닌 권장 형태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말장난에 불과하다.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관공서나 공공기관, 각급학교 등은 권장사항일지라도 의무이행 사항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아무튼 유신독재 시절 행해졌던 광기어린 ‘애국놀음’을 재현하고자하는 의도가 박 대통령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된 셈이다.

박정희는 유신독재 헌법을 제정하면서 이와 맞물려 ‘태극기와 애국가’를 앞세운 애국주의를 국가적 총동원사업으로 추진했다. 1972년 문교부는 충남도 교육청이 실시하고 있던 ‘국기에 대한 맹세’의 내용을 고쳐 ‘무조건 충성’ 조항을 부각시킨 맹세문을 전국에 배포하고 강제 암송하라고 지시한다.

유신 시절 국기 경례 거부하면 ‘반국가적 사상범’

하지만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일이 전국 여러 곳에서 벌어졌다. 교회 등 종교단체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가 일제의 신사참배와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국기 모독 혐의로 많은 학생들이 제적을 당하고 교사가 구속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중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1972년 당시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에는 교회가 하나 있었다. 그 교회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약 100명의 아이들이 ‘오사교회’에 모여 주일학교 교사인 양영례(당시 27세)씨와 찬송가도 부르고 밭일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진월중앙초) 교실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진다.

학교 측이 화들짝 놀라 교회에 해명을 요구했지만 교회 목사는 어린 학생들일지라도 신앙의 자유와 양심이 있으니 경례를 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은 경찰이 나서 아이들을 추궁했고 아이들은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매를 맞아야 했다. 경찰은 결국 주일학교 교사 양씨를 ‘중대한 반국가적 사범’으로 몰아 구속시켰다. 사상범 취급을 받은 까닭에 면회도 허용되지 않은 채 독방신세를 져야 했다.

<1972년 당시 전남 광양 오사교회 / 출처: 한겨레>

유신정권의 ‘애국놀음’

종교적 이유로 국민의례를 거부한 학생들을 무더기 제적시키거나 그들의 입학을 불허하는 일이 다수 벌어졌다. 학부모들이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학생은 학칙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이유로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헌법보다 학칙이 우선이라는 이런 황당한 판결이 가능했던 것은 유신독재의 서슬 때문이었다.

1971년에는 극장에서 애국가 상영이 의무화된다. 이렇게 시작된 강압적인 애국심 고취는 박 정권 말기에 접어들며 극에 달한다. 1978년 ‘오후6시 국기하강식’을 전국적으로 거행하라는 지시를 내려 관례처럼 행해지던 하강식을 의무화한다. 이 의무화 조치로 인해 모든 국민은 오후 6시만 되면 그 자리에서 서서 차렷 자세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해야만 했다. 당시 경향신문은 ‘1분 멈춤 거리의 조국애’라는 사회면 톱기사에서 하강식 장면을 묘사하며 “거리는 삽시간에 고요한 광장으로 변했다”고 기술했다.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은 1989년 이후 사라졌다. 또 모든 건물에 국기게양대를 설치해야 하는 의무조항도 1999년 폐지됐다. 2007년부터는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문구를 “정의와 진실로서”로 바꾼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사용되고 있다. 이마저도 ‘파쇼의 잔재’라는 지적이 많다.

<국기 하강식 장면(1978) / 출처: 경향신문>

<극장 애국가 상영 때 기립 예의 갖추지 않으면 처벌받았다(경향신문 1971.3.15>

박 대통령과 유신의 영감

국가와 국기 등 상징물을 내세워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강요하는 수법은 독재국가나 전체국가에서 민중을 탄압하는 유용한 도구로 활용돼 왔다. 하지만 과거지사다. 북한을 빼면 어디에도 이런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

낡고 낡은 수법을 다시 재현하려는 박 대통령의 의중이 뭘까. 보고 들은 게 무섭긴 무섭다. 과거 ‘유신의 퍼스트레이디’ 시절 아버지 박정희 옆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고스란히 떠올렸나 보다. 맹목적인 애국심을 강요해서라도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건 유신적 발상이다. 끔찍할 뿐이다.

유신의 영감에 푹 빠져 있는 박 대통령. 대체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몸은 현재지만 마음과 정신은 유신의 그때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 정말 나라가 걱정된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2&table=c_aujourdhui&uid=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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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일자리 수당·연금 2배 준다더니…담뱃값만 2배”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2/25 08:41
  • 수정일
    2015/02/25 08:41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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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24 20:36수정 : 2015.02.25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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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2년 진단 ③ 복지·교육
78살 노인의 하소연
“약속 안 지키고 설명도 없어”

건보 재정 13조 흑자 냈어도
4대 질환 전액 지원 안 지키고
병원 영리사업은 길 터줘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지 벌써 2년이 됐잖아요. 대통령 선거 때 한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지 못했으면 남은 3년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국민한테 설명을 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아요.”

 

김병국(78)씨가 박근혜 정부 2년을 평가하는 열쇳말은 ‘지키지 않은 약속’이다. 차상위계층인 김씨는 2년 전까지만 해도 박 대통령한테 기대가 컸다. 박 대통령의 노인 공약인 ‘노인일자리 수당 2배 인상’에 솔깃했다. 정부는 각 지역의 학교·병원·경로당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노인한테 1년에 최대 9개월간 월 20만원씩 수당을 주는데, 2012년 대선 때 박 대통령은 2014년부터 그 수당을 최대 4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껏 노인일자리 수당 인상 소식이 없다. 김씨는 24일 “박 대통령이 취임하면 기초연금이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일자리 수당도 20만원에서 40만원으로 올라 형편이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담뱃값만 2배 가까이 올랐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기초연금이 10만원 올랐어도 담뱃값 인상분을 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화체육 활성화를 위한 기업인 오찬에 앞서 참석자들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 엘지(LG)그룹 회장, 박 대통령,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현 메세나협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 손경식 씨제이(CJ)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 청와대사진기자단
‘지키지 않은 약속’은 박근혜 정부가 주요 성과로 꼽는 기초연금에도 해당한다. 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모든 노인한테 월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지난해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기초연금법을 통과시켜 이를 현실화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대선 공약과 사뭇 달랐다. 시행 과정에서 ‘모든 노인’은 ‘소득 하위 70% 노인’으로, ‘월 20만원’은 ‘국민연금 가입 기간에 따라 월 10만~20만원 차등지급’으로 각각 바뀌었다. ‘기초연금 사각지대 발생’도 문제로 불거졌다. 기초연금은 소득 하위 70% 노인한테 지급되는데, 가장 형편이 어려운 기초생활수급 노인은 사실상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정부가 지급하는 기초연금이 ‘소득’에 포함되는 탓에, 기초생활보장제에 따른 생계급여가 기초연금만큼 깎인다. ‘(기초수급 노인한테) 줬다 뺏는 기초연금’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이상호 빈곤노인기초연금연대 사무국장은 “기초연금제도를 도입해 노인을 위한 공적연금의 틀을 만든 것은 바람직했는데, 제도가 후퇴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소득 상위 30%는 물론 134만여명의 기초생활수급자 가운데 기초연금 대상자인 39만여명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짚었다.

 

박 대통령의 당선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 복지공약 가운데 대선 이후 수정·폐기된 사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암·심혈관·뇌혈관·희귀난치성 질환 같은 ‘4대 중증질환’에 국민건강보험(건강보험)을 100% 적용하겠다던 공약도 쪼그라들었다. 지난 3일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건강보험 중기보장성 강화 계획’을 보면, 4대 중증질환의 건강보험 보장률은 박근혜 정부 임기가 끝나는 2018년이 돼도 80% 중반대에 머물 전망이다. 병원이 진료비로 100만원을 청구하면 이 가운데 80만원은 건강보험 재정에서 부담한다는 뜻이다. ‘임기 내 100% 보장’ 약속에 한참 못 미친다.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는 ‘돈’이 아닌 ‘선택’의 문제다. 김종명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건강보험팀장은 “건강보험 흑자가 13조원이나 쌓여 있는데도 박근혜 정부는 4대 중증질환 외에는 환자들한테 의미있게 다가올 보장성 확대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4대 중증질환 외의 다른 질환은 건강보험 보장 비율이 60%대 초반이다. 건강보험 재정이 역대 최대 흑자를 기록한 건 병원비가 걱정돼 아파도 병원을 찾지 못하는 환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2돌을 하루 앞둔 24일 ‘민주수호 서울시민 1000인 원탁회의’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박 대통령 재임 중 일어난 주요 사건 내용이 담긴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와 더불어 현 정부가 국정과제로 추진해온 건강보험료(건보료) 부과체계 개편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갈팡질팡 행보도 불신을 키운다. 현행 건보료 부과체계는 지역가입자나 직장 은퇴자 등에 대한 보험료 부과 방식이 직장가입자와 달라 형평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는 이를 손보겠다며 2013년 7월 복지부에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기획단’을 꾸려 제도 개선을 추진해왔다. 그런데 연말정산 파동 등이 이어지자 지난달 말 하루아침에 이를 백지화한다고 발표했다. 부과체계 개편으로 보험료가 오르는 고소득층 45만명의 반발을 의식한 선택이다. 정부는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결국 당정 협의를 거쳐 재추진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빚어진 정책 혼선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국민연금 100% 지원한다더니…‘잊혀진 공약’

 

한달 임금 130만원 미만 200만명
‘고용보험 전액 국가부담’ 약속 외면
‘의료 상업화’는 졸속 밀어붙이다
부적격 중국계 병원 승인 망신도

 

아예 ‘잊혀진 약속’도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사회보험 적용 확대’ 공약이 그 하나다.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직전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보험 및 국민연금 보험료를 정부가 100%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선 공약집을 보면, 그 대상은 한달 임금이 130만원에 미치지 못하는(2013년 기준) 비정규직 노동자로, 200여만명에 이른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보험·국민연금 등 사회보험 가입률은 40% 수준으로 사회안전망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저소득 노동자가 내는 고용보험·국민연금 보험료의 절반을 정부가 지원하는) 두루누리 사업으로 10인 미만 사업장의 월급여 125만원 이하 노동자한테 사회보험료 일부를 정부가 지원해주고 있으나 아직도 미가입률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다. 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2년이 됐지만, 정부는 이 공약을 실천하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유독 브레이크 없는 질주로 사고 위험을 키우는 분야가 있다. ‘창조경제 활성화, 서비스 분야 투자 활성화’의 모토 아래 추진되는 의료 상업화다. 병원이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자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지난해 6월부터 병원이 영리자법인(영리자회사)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보건의료단체와 야당 쪽이 병원의 영리 추구 행위를 법률(의료법)이 금지하는 만큼 위법하다고 반발하자, 정부는 성실공익법인에 한정해 자회사 설립이 가능하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꼼수를 부렸다. 성실공익법인이라는 기본 요건을 채우지 못한 두 곳의 의료법인에 지난해 12월 서둘러 ‘조건부 자회사 설립’을 허용한 것이다. 복지부가 실적을 과시하려는 청와대나 기획재정부 등의 압력에 밀려 스스로 만든 가이드라인마저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제주도 외국 영리병원 승인 추진은, 정부가 졸속으로 의료 상업화를 몰아붙이다 망신을 당한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는 지난해 8월 제주도에 첫 외국 영리병원을 신청한 중국계 산얼병원을 승인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산얼병원에 투자하는 모기업의 대표가 사기 혐의로 중국 공안에 구속되는 등 투자자 자격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라는 사실이 언론 취재로 알려지자 결국 지난해 9월에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김양중 의료전문기자, 최성진 기자 himtra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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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마지막 인터뷰 이명박과 얽힌 여러 악연

 

[창간 15주년] 오마이뉴스를 만든 100대 기사·사건④

15.02.24 21:09l최종 업데이트 15.02.24 22:02l

 

 

언론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2월 22일로 창간 15주년을 맞이합니다. 돌이켜보면, 오마이뉴스가 헤쳐온 길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사다난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오마이뉴스 15년의 역사를 100대 기사와 사건으로 풀어 5회에 걸쳐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61] 남양유업 '살인적 밀어넣기'로 급성장? (2005. 11. 10)

시대의 징후를 포착한 특종이 당대에는 정당한 값어치를 받지 못하기도 한다.

2005년 11월 초 대리점 업주의 제보로 시작된 이승훈 기자의 남양유업 '밀어내기' 보도가 그랬다(http://omn.kr/bl4c). 보도 이후 남양유업은 대외적으로는 "불공정 관행을 시정하겠다"고 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제보자를 색출하고 밀어내기를 은폐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주 시스템을 변경하려 했다.

남양유업 사태는 영업사원의 '욕설' 녹취록 공개 등으로 '갑의 횡포'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른 2013년 5월에야 뒤늦게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남양유업은 뒤늦게 사과 기자회견을 했지만, 회사를 기다린 것은 공정거래위원회의 1123억 과징금 부과와 검찰 수사였다.

[62] 황우석 사건 연속보도 (2005. 11. 21~2006.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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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월 12일 오전 황우석 교수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연구원들을 참여시킨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대 조사위원회 최종 조사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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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건은 "다수의 믿음이 객관적인 사실과는 다를 수 있다"는 교훈을 안겨줬다는 면에서 언론은 물론 사회 각계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세계 최초 환자맞춤형 줄기세포 논문의 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MBC <PD수첩> 제작진에 대해 황우석 박사 측은 <PD수첩>의 취재윤리를 이슈화 시키며 검증을 회피했다. 황 박사를 옹호하는 여론은 '<PD수첩> 광고 취소'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분출됐고,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이 논문 검증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논문게재 사진의 복제 등의 새로운 정황이 뒤늦게 드러나며 황 박사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

당시 서명숙 편집국장은 "연구원의 난자 제공이 있었다는 그동안의 의혹 제기가 사실로 확인된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보도한 언론에 쏟아지는 비난과 공격은 더 충격이었다"며 황우석 옹호 여론에 비판적인 기조를 유지했다. 12월 2일의 '황 교수팀이 답해야 할 '줄기세포 미스터리'(http://omn.kr/4xd0)가 대표적인 사례였지만, <PD수첩>의 취재 윤리를 몰아세운 칼럼('황우석 몰아세운 일그러진 진보주의', 12월 5일)들도 실렸다.

물론 사건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황우석 팀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사를 써줄 만한 언론사를 선호하면서 독자들에게 정확한 판단을 하는 데 충분한 정보를 주지 못한 점은 반성해야 할 지점으로 남는다.

[63] 소프트뱅크의 110억 투자 유치 (2006. 2. 14)

오연호 대표가 일본 도쿄에서 손정의 소프트뱅크 대표를 만나 총 110억 원 규모의 투자계약을 체결했다(http://omn.kr/1ogb). 한국의 언론사 가운데 외자를 유치하고, 그 모델이 다른 나라에 직접 수출된 것은 오마이뉴스가 처음이었다. 그해 8월 28일 손 대표는 자신의 자본으로 설립된 오마이뉴스 재팬에 시민기자로 가입해 '총리 직선제'를 주장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64] 서명숙 국장의 조직개편 단행 (2006. 4. 14)

3월 28일 기자회원 게시판에 한 시민기자가 취재 중인 사안을 상근기자가 인지하고도 별도 취재를 통해 먼저 기사를 출고하는 일이 있었다. 오마이뉴스와 해당 상근기자는 취재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게시판에서는 시민기자제 운용에서 드러난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들이 끊이지 않았다.

오마이뉴스는 4월 6일 시민기자 오프라인 간담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한 뒤 17일 '생나무 클리닉 오픈' 등 수습책을 내놓았다. 생나무 클리닉을 통해 시민기자는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이유 등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이와는 별도로 서명숙 편집국장은 4월 14일 정치·경제·사회 중심의 상근기자 출입처 취재를 없애고 기동취재팀과 소편집장제로 통폐합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서 국장의 개편안은 창사 이래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담았지만, 조직이 안정화되지 못하면서 8월 25일 정치·경제·사회팀을 부활시키는 방향으로 환원된다. 

[65]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함께 취재한 만취경관 폭행 사건 (2006. 5. 27)

5월 26일 밤 서울 남대문경찰서 아무개 경사가 만취 상태에서 시민들과 출동 경관을 폭행하고, 경찰 간부가 나서서 보도를 무마하려는 정황이 포착됐다(http://omn.kr/bmpl). 시민기자의 취재 지원을 위해 상근기자가 당일 현장에 출동했고, 둘의 협업으로 생생한 현장 기사와 함께 후속 취재가 이루어졌다. 오마이뉴스의 취재편집 시스템에 대한 시민기자들의 앙금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양자간 갈등의 골을 메운 사건으로 기억된다.

[66] "내가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번역" (2006. 10. 11)

유명인을 내세운 대리번역은 베스트셀러 사재기와 함께 출판계의 오래된 폐습이었다.

구영식 기자는 정지영 아나운서가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의 실제 번역자라고 밝힌 김아무개씨를 인터뷰했다(http://omn.kr/bkav). 기사가 나가자 출판사는 "스타 마케팅 차원에서 정 아나운서에게 번역을 의뢰해 놓고, 번역이 처음이라 불안해 김씨에게 이중으로 번역을 의뢰했다"고 실토했다. 논란이 커지자 정씨는 방송 일을 한동안 접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는 당시 한국기자협회에 가입하지 않아, 단독 보도를 하고도 '이달의 기자상'은 타사에게 돌아갔다. 오마이뉴스의 기자협회 가입은 2010년 10월에야 실현됐다.

[67] 한일 시민친구 만들기 (2006. 12. 1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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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6년 오마이뉴스 재팬 창간을 계기로 '한국·일본 시민 친구만들기' 행사가 15일부터 17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 윤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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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오마이뉴스 재팬 창간을 계기로 '한국·일본 시민 친구만들기' 행사가 15일부터 17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http://omn.kr/bpd5). 1회 행사에는 한국의 시민기자 25명과 일본 <오마이뉴스 재팬> 시민기자 25명 등 한·일 시민 1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주부, 대학생, 스포츠 등 6개 분야로 조를 나눠 일본의 현장을 직접 방문, 취재했다. 2회 행사는 이듬해 강화도 오마이스쿨(11월 30일~12월2일)에서 열렸다.

[68] 오마이뉴스와 '문국현 바람' (2007.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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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7년 5월 21일 범여권의 잠재적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은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리는 기후변화포럼 창립총회에 참석해 기념강연을 가졌다. 문국현 사장과 천정배 의원등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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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호 대표의 '선택 2007 리포트'는 그해 대선에서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http://omn.kr/bkdm). 리포트 1편과 2편에서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의 대선 출마와 성공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이후 여권에 '문국현 대안론'이 부상했다.

독자의 반응도 뜨거웠다. 시민기자들이 쓴 기사에도 문 후보에 대한 경계보다는 그를 응원하는 내용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0월 26일에나 거취를 결정하겠다던 문 사장도 출마 선언을 두 달이나 앞당겼다.

하지만 회사 안팎에서 문 후보 기사가 너무 많다는 우려가 나왔다. 급기야 9월 3일 노조 공정보도위원회가 토론회를 열었고, 의견은 '특정후보 띄우기로 보일 수 있다'는 우려와 '이미 존재하는 현상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는 반론이 충돌했다.

막상 대선 일정이 시작되고 문 후보에 비판적인 기사들이 함께 나오자 이번에는 문국현 캠프로부터 "오마이뉴스가 이럴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 나왔다. 문 후보는 12월 19일 대선에서 4위(5.8%)를 기록했다.

[69] 노무현 대통령 마지막 인터뷰 (2007.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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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7년 9월 2일 청와대 관저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인터뷰중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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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호 대표는 2007년 9월과 10월 청와대에서 3일간 13시간에 걸쳐 노무현 대통령을 심층 인터뷰했다(http://omn.kr/bpdq).

노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노무현 지지자여서 구박받는 게 제일 미안하다", "한나라당에 연정을 제안하면 당황할 줄 알았는데, 우리 진영에서 수류탄이 터져버렸다", "청와대에서 고개 들고 나가고 싶어 검찰과 절대 손잡지 않았다"는 등의 발언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6회로 연재를 중단한 '마지막 인터뷰'는 대통령 퇴임 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느 정도 합의된 시점에 재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2009년 5월 23일 노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책으로 나왔다. 

[70] 이명박 후보 '마사지걸' 발언 논란 (2007. 9. 12)

인연으로 따지면, 오마이뉴스와 이명박 대통령은 '악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6월 13일 그가 서울시장에 당선된 지 3주 만에 오마이뉴스는 '수도서울 봉헌' 발언(7월 1일)과 아들과 사위가 히딩크 당시 월드컵 축구팀 감독과 기념사진을 찍은 사건(7월 3일)을 연달아 보도했다.

대선 기간에는 신문사 편집국장 만찬에서 나온 '마사지걸' 발언을 보도했다(http://omn.kr/bke1). "예쁜 여자는 많은 손님들을 받았겠지만 예쁘지 않은 여자들은 자신을 선택해준 게 고마워 성심성의껏 서비스를 하게 된다"는 후보자의 '인생 경험담'은  여성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명박 캠프 사람들은 후보자의 이미지를 해치는 기사의 확산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했다. 특히 미디어담당 간사였던 진성호씨는 9월 21일 뉴스콘텐츠저작권자협의회 간담회에서 "(마사지걸 보도 관련) 네이버는 평정된 것 같은데, 다음은 아직 폭탄이어서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해 큰 논란을 낳았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에도 오마이뉴스는 "촛불집회 배후는 주사파 친북 세력"(2008. 6. 7) 등의 문제 발언들을 계속 보도했고, 집권 5년 내내 오마이뉴스와 이명박 정부의 긴장 관계는 계속됐다.

[71] 강화도 오마이스쿨 개교 (2007. 11. 24)

폐교가 된 강화도의 신성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시민교육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이 '강화도 오마이스쿨'이다. 매년 시민기자 학교, 어린이·청소년 기자학교 등 저널리즘 교육이 이곳에서 열린다.

[72] 광화문에서 상암동으로 이사 (2007. 12. 25)

오마이뉴스는 8년 만에 '광화문 시대'를 접었다(http://omn.kr/bl0g).

상당수 직원들이 기존 사무실보다 1.6 배 넓은 공간, 휴일 등에도 냉난방 가능, 옥상정원 등의 조건들에 매료돼 이사에 찬성했다. 2008년 1월 11일에는 뉴스게릴라 시상식을 겸해 조촐한 오픈하우스 행사도 했다.

그러나 경기도 분당·용인 등 거주 직원들은 "출퇴근 거리가 너무 멀어진다"고 불편을 호소했다. 특히 기자들 사이에서는 "한국사회에서 취재의 중심지는 여전히 서울 광화문"이라며 신중론도 강했다.

그런 우려는 이듬해 4월 광우병 촛불시위로 현실화됐다. 편집국에서는 "광화문에 회사가 있었다면 문만 나서도 거리의 열기를 느낄 대형 사건이 터졌는데, 취재 현장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는 탄식이 나왔다.

[73] 특별기획: 미국 쇠고기와 광우병 논란 (2008.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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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8년 6월 1일 새벽 서울 경복궁역 부근에서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스크럼을 짠 채 경찰 살수차(물대포)를 맞으며 버티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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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한미 쇠고기 협상 타결 후 국민건강권을 고려하지 않은 졸속 협상을 질타하는 여론은 서울 광화문의 대규모 촛불집회로 이어졌다(http://omn.kr/bipr). 비판 여론에 놀란 정부가 서둘러 미국과의 추가협상에 나설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다.

오마이뉴스는 '72시간 연속 동영상 생중계' 등으로 집중보도했고, 약 4만 명이 오마이TV의 '자발적 시청료 주기'에 참여했다. 6월 29일 새벽까지 이어진 촛불집회에서는 오마이TV 김호중 기자가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 등 온 몸을 가격 당해 병원에 응급후송됐고, 안홍기 기자(경찰 쪽에서 날아온 보도블럭에 맞음)와 권우성 사진팀장(경찰이 휘두른 방패에 수차례 가격)이 부상을 당했다.

[74] 제1회 '나홀로 입학생에게 친구를' 개최 (2008. 7. 21)

2008년 짝궁 없이 홀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이들의 수가 130명을 넘었고, 이들 대부분은 농어촌 지역 분교에 다니고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아름다운 재단'과 함께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동기생을 찾아주는 행사를 열었다(http://omn.kr/bjmz). 38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행사에는 배우 한혜진씨가 일일교사로 참여해 자신의 어린시절과 라오스 봉사 경험 등을 나눴다. '나홀로 입학생'은 8회(2014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75] 청와대 인터넷기자들 들고 일어나다 (2008. 12. 29)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은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을 설명하는 언론사 초청 대통령 간담회에 인터넷 매체들의 참여를 매번 배제했다. 정부 출범 직후부터 인터넷매체 기자들의 자리를 일방적으로 철거했다. "곧 시정하겠다", "추후 조치를 취하겠다"는 식의 의례적인 답변에 1년 가까이 상황을 지켜보던 인터넷 기자들의 불만이 폭발했다(http://omn.kr/78xt).

청와대를 출입하는 7개 인터넷매체 기자들은 "청와대 대변인실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출입하고 있는 인터넷 언론사에 대해 '공식적이고도 명백한 차별'을 가하고 있다"며 일련의 조치를 '인터넷 언론 대못질'로 규정했다. 이 공동성명에는 평소 이명박 정부를 우호적으로 보도한 보수 성향 매체(<데일리안>과 <뉴데일리>)들도 동참했다.

이 수석이 이끄는 청와대 홍보라인은 오마이뉴스가 이 수석과 두 대변인의 내부암투를 보도(2010.7.06)한 지 7일 만에 전원 경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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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 시상식'에서 '2008 특별상'을 받은 윤근혁 기자(왼쪽)가 수상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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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오마이뉴스 최다 특종 시민기자 윤근혁 (2009. 2. 6)

초등학교 교사이면서 교육 전문지 <교육희망> 기자인 윤근혁씨는 2000년 4월 30일 '우리 마음을 멍들게 하는 촌지'라는 사는 이야기 기사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데뷔했다.

이후 꾸준히 기사를 썼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가장 많은 특종을 터트렸다. '올해의 뉴스게릴라'에 2002, 2004, 2011, 2013년 4차례 선정됐고, 2008년에는 특별상을 받았다. 서울교총의 '이회창 지지' 공문(2002.11.28)과 2008년 촛불집회를 용공으로 모는 경찰의 안보동영상(2011.11.04), 공정택 전 서울교육감의 비리 의혹에 대한 연속보도 등이 주목 받았다.

[77] 임금 삭감의 한파 (2009. 4. 7)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부의 '광고탄압'의 여파는 오마이뉴스에도 밀어닥쳤다. 여타 진보매체들도 비슷했다.

2009년 3월23~25일 노사 협상에서 직원 20%, 팀장급 30%, 대표 포함 경영진 40%의 임금삭감안이 마련됐다. 임금삭감과 함께 전 직원들은 '1개월 휴직'을 했고, 직원 10여 명이 1년 동안 퇴사하는 등 구조조정을 감내해야 했다.

[78]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2009.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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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6월 8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민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앞에 오마이뉴스 이종필 시민기자의 기사 <그들은 '제2의 노무현' 탄생이 싫었다>가 현수막으로 제작되어 내걸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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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정국은 요동쳤다.

이틀 뒤 오연호 대표는 '이명박의 정치보복이 노무현을 죽였다(http://omn.kr/bkp7)' 제목의 기사를, 시민기자 이종필은 '그들은 제2의 노무현 탄생이 싫었다(http://omn.kr/bmpp)'는 기사를 각각 썼다. 721만 7000원의 좋은 기사 원고료가 붙은 이종필 시민기자의 기사는 익명의 시민에 의해 광화문 대한문 분향소 근처에 현수막으로 내걸리기도 했다.

오 대표의 글에 대해서는 청와대가 '댓글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보수 성향 시민단체 바른민주개혁시민회의 의장이던 윤희구씨는 2011년 4월 11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실 행정관의 부탁으로 지인들과 함께 해당 기사에 노 전 대통령과 오 대표를 비방하는 내용의 댓글을 달았다"고 폭로했다.

[79] '10만인클럽' 회원 모집 시작 (2009. 7. 8)

월 1만 원을 내는 자발적 유료독자 10만 명을 모은다는 목표로 '10만인 클럽'을 시작했다(http://omn.kr/bkiu). 독자와 콘텐츠에 기반한 수익 구조를 만드는 또 다른 실험이었다.

[80] 오마이뉴스 공식 트위터 운영 시작 (2009. 7. 16)

2009년부터 뉴스의 새로운 유통채널로 SNS 서비스들이 각광받았다. 특히 140자의 짧은 단문으로 이용자간 의견을 주고받는 트위터는 단축 URL 서비스와 연동되며 큰 인기를 모았다.

오마이뉴스는 이러한 흐름에 신속히 대응해 7월 15일 트위터(@Ohmynews_Korea)를 시작했다. 오마이뉴스 트위터는 국내 언론사 중 <시사인>과 <경향신문>에 이어 3번째로 많은 24만 명에 가까운 팔로어를 두고 있다. 이듬해 10월 13일에는 공식 페이스북 운영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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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반대국민행동, 한미 군사연습·대북 전단살포 중단 촉구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2/25 08:18
  • 수정일
    2015/02/25 08:1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3월 말까지 평화촛불·군사연습 현장 집중 평화행동 돌입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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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24  16:4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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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이 24일 오전 서울 광화문 미국대사관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날부터 3월 말까지 30일간 전국적 규모의 평화행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다음달 초부터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한미연합 '키 리졸브·독수리'연습을 앞두고 민주노총, 한국노총, 한국진보연대 등 40여개 단체로 구성된 자주·평화운동 단체인 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이 24일 오전 서울 광화문 미국대사관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날부터 3월 말까지 30일간 전국적 규모의 평화행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국민행동은 다음달 초부터 진행될 한미연합 '키 리졸브·독수리'연습은 작전계획 5027(전면전), 5029(북한내 급변사태 대응)에 기반해 진행되는 전쟁연습이라고 지적하고 지난 1992년 북미간 고위급회담을 앞두고 '팀스프리트'훈련을 중단했던 것처럼, 한미 당국은 평화를 위해 전쟁연습을 중단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행동은 이 훈련이 연례적인 방어연습이라고 주장하는 한미 당국의 주장과 달리 '북한 점령'과 '북한군 궤멸'을 목표로 세계 최대 규모의 병력이 동원되는 공격적, 적대적 연습이라고 단정했다.

국민행동은 또한 2월말~3월초 대규모 전단 및 영화 '인터뷰'가 담긴 DVD 등을 북으로 살포하겠다고 예고한 자유북한운동연합 등이 무인기인 '드론'까지 동원하겠다고 거론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대규모 군사연습으로 긴장이 고조된 시기에 이같은 행동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군사충돌을 유도하는 자살행위에 다름아니라고 비판했다.

   
▲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키 리졸브·독수리'연습은 한미 당국의 주장처럼 연례적일 수는 있지만 그 성격과 실제 진행상황으로 보아 결코 방어적이지 않으며, 북 정권 붕괴를 노리는 공격적 전쟁연습이라고 비판했다. 왼쪽부터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향린교회 담임목사인 조헌정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 위원장, 박성민 민주노총 통일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규탄연설에서 '키 리졸브·독수리'연습을 연례적이고 방어적이라고 하는 한미 당국의 주장에 대해 "연례적이라는 말은 끊임없이, 또 한해도 빠짐없이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맞는 말"이지만, "북이라는 정권을 없애버리려는 최종 목표를 위해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어적'이라는 표현은 틀렸다"고 말했다.

또 "해외주둔 미군을 포함해 많게는 20만명의 병력이 동원된다"며, "세계적으로도 이런 대규모적인 군사연습은 없다"고 덧붙였다.

박성민 민주노총 통일위원장은 "키 리졸브·독수리 연습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병력이 동원되고 가장 긴 기간동안 가장 공격적인 내용으로 진행되는, 한반도 전체 평화에 역행하는 전쟁연습"이라며, "전개양상 역시 북의 핵이나 미사일에 대한 선제타격, 평양점령을 목표로 한 상륙작전, 북의 지도부를 체포하는 공격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북 역시 해마다 한미합동군사연습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는 당연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위기의 심각성을 드러냈다.

특히 올해 훈련은 지난해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결정한 '맞춤형억제전략'을 적용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한미연합사 주도로 4월에 새로운 미국의 한반도 전략계획을 수립하려는 목표가 추가돼 있으며, 그간 대북전략이었던 한미연합연습을 중국까지를 포함하는 대중전략으로 확대하기 위해 올해 1월 창설된 한미연합사단이 처음으로 주도하는 훈련으로 예년과 달리 대북심리전 등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박 위원장은 폭로했다.

이어서 박 위원장은 일부 탈북단체들이 그동안 대북전단을 날리면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급기야는 총격전까지 벌어진 사태가 빚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을 넘어서 이른바 '전단탄' 개발을 계속 진행해 올해 방위사업청이 신형 전단탄을 개발했다는 발표가 나온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이날 국민행동은 기자회견에서 다음달 말까지 미국대사관과 부산, 진해, 포항 등 훈련이 진행되는 곳을 중심으로 평화촛불, 평화행진 등을 집중적으로 벌이겠다며 구체적인 평화행동계획을 발표했다.

평화행동계획에 따르면, 먼저 이날부터 27일까지 낮 12~1시에는 미 대사관 앞에서 평화캠페인을, 오후 7~8시에는 인근 청계광장에서 미 대사관까지 평화행진을 진행하고 토요일인 28일 오후 2시에 서울역에서 '민생파탄, 민주파괴, 평화위협 박근혜 규탄 범국민대회'를 개최한다.

또 훈련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다음 달 2일 오전에는 각계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4일부터 매주 수요일 미 대사관 앞에서 평화촛불을 밝힐 예정이다.

상륙훈련이 벌어지는 3월 말 부산, 진해, 포항, 왜관, 의정부, 군산 등에는 전국에서 평화버스로 이동해 현장집중 평화행동을 전개하며,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대북전단 살포 단체가 공언한대로 이 기간동안 전단살포를 강행할 경우 적극 저지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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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학살 ‘대량매장 추정지 대상’ 유해 발굴 시작


2월 23일 개토제 후 첫삽.. “65년 만에 아버지 유골이라도...”
대전=임재근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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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23  17:2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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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산내학살사건 유해발굴 개토제가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굴현장에서 진행되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통신원]

“아버지... 아버지......”

대전 산내 골령골(낭월동 산 13-1번지 일대)에서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아버지를 애타게 찾으며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골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과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동대책위)는 23일 산내 골령골에서 산내 민간인 학살사건 대량매장 추정지를 대상으로 유해발굴에 들어갔다.

   
▲ 개토제에서 한 유가족이 주저앉아 “아버지~”를 부르며 울부짖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통신원]

유해발굴에 앞서 오전 10시부터 유해발굴 현장에서 개토제가 진행되었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김종현 회장은 고유문을 통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선량한 사람들이 백주대낮에 군인과 경찰들에게 학살됐다”며 “영령들의 혼은 억울함을 풀지 못해 구천을 떠돌고,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은 연좌제의 굴레에서 고통 받았고,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수십 년을 지내야만 했다”고 밝혔다.

이어 “2011년 정부가 산내 골령골 학살을 국가의 불법행위에 따른 희생으로 공식 인정했음에도 제대로 된 사과 한번 받지 못했다”고, “영령들의 유해는 여전히 쓰레기처럼 방치돼 훼손되고 있다”며 “쪼개지고 부서진 유해일망정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공동대책위를 대표하여 인사말에 나선 도인호 목사(대전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는 “전쟁범죄로 인해 죽었던 유족들이 국가로부터 사과받고 배상받았으면 좋겠다”며 “이번 민간차원의 시범유해발굴을 통해 추후 전체적인 유해발굴로 발전되기를 희망하고, 국가가 진실을 밝히는 일에 발 벗고 나서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 추도사를 낭독하며, 위령제지원조례 제정을 약속하는 김경훈 대전시의원.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통신원]

대전시의회 운영위원장인 김경훈 의원도 추도사를 통해 “오늘은 전국 각지 정의로운 여러분과 대전지역 시민들이 정부를 꾸짖는 날”이라며, “대전시를 비롯 지방자치단체를 부끄럽게 하는 날”이라 말했다.

이어 “비록 부분적인 유해발굴이지만 이를 계기로 영령들의 억울한 누명과 맺힌 한을 풀어드리는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유해발굴에 나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대전시의회 동료 의원들과 함께 위령제지원조례를 발의하여 제정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날 개토제에는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원과 한국전쟁유족회 회원, 공동대책위 소속 단체 임원과 대전광역시의회 김경훈, 김동섭, 전문학 의원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이번 시범발굴지는 약 40㎡정도로, 2월 23일부터 3월 1일까지 일주일간 진행된다.

   
▲ 발굴단장인 박선주 교수가 유해 발굴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통신원]
   
▲ 시삽식 후 약 40㎡정도에 해당하는 구역에 대해 유해발굴이 시작되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통신원]

공동조사단 발굴단장인 박선주 교수(충북대 명예교수)는 “산내 학살 사건은 군, 경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번 발굴을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산내 학살사건은 한국전쟁기 최대 7천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희생된 사건으로, 이번 유해발굴은 지난 해 2월 진주 유해발굴에 이어 민간차원의 공동조사단에 의한 2차 유해발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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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국수도 없는 국민들만 불쌍하다

 
[뉴스해설] 저급한 언어유희를 즐기는 대통령과 언론이 경제를 죽인다
 
임두만 | 2015-02-24 09:51:3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설날 연휴를 지난 첫 월요일, 박근혜 대통령이 또 뉴스메이커가 되었다. 현재의 우리 경제를 ‘퉁퉁 불은 국수’로 표현한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23일 자신이 주재한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모두 발언에서 “우리 경제를 생각하면 저는 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경제를 진단하는 말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부동산 3법도 작년에 어렵게 통과가 됐는데 비유하자면 퉁퉁 불어터진 국수”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걸 먹고도 우리 경제가, 부동산이 힘을 좀 내서 꿈틀꿈틀 움직이면서 활성화되고 집 거래도 많이 늘어났다”고 진단했다.

그리고는 “불어터지지 않고 좋은 상태에서 먹었다면 얼마나 힘이 났겠느냐”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뒤 “그래서 우리 경제가 참 불쌍하다. 불어터진 국수를 먹고도 힘을 차리는구나. 그래서 앞으로는 제때 그런 것을 먹일 수 있도록 중요한 경제 활성화 법안들도 통과돼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제공>

지난 정기국회에 제출된 주택법 등 부동산 거래활성화 3법을 야당이 발목을 잡아 늦게 처리되므로 경제 활성화가 늦어졌다는 박 대통령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진단도 틀렸지만 경제정책에 대한 인식 자체가 틀렸다. 그래서 이 같은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곧바로 한국은행의 발표에 의해 엉뚱한 인식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한국은행은 23일 가계신용대출이 역대 최대인 1천90조 원에 육박하면서 국민 1인당 가계 빚 2천만 원을 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자료를 보면 지난해에만 은행과 비은행권이 가계에 빌려준 돈이 64조 원 넘게 늘었다. 이 가운데 주택담보대출이 80%를 차지했다. 한국은행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제출한 업무현황 자료에 나타난 실상이다.

시중은행, 저축은행, 상호신용금고 등 비은행권의 가계대출 총액이 지난 해 64조3천억 원 늘었으며. 이중 은행권이 37조3천억 원, 비은행권이 27조 원 증가했다. 더구나 여기에는 결제 전 카드 사용금액(판매신용), 보험사, 대부업체, 공적금융기관 등의 가계대출은 빠져 있다.

그렇다면 카드사, 보험사, 대부업체까지 모두 합하면 이미 1천 2~3백조가 넘었을 수도 있다. 은행권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이 채무자라는 대부업계의 대출금만 현재 추계로 약 10조 원에 이르고 있으므로 카드사와 보험대출을 포함할 경우 이는 거의 현실적 액수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 명인 점을 고려하면 국민 1인당 2천100만 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는데, 이중 빚이 없이 현금을 은행에 맡기고 있는 20%의 부자들을 제외하면 4천만 명 정도인 중산층과 서민들의 1인당 평균 빚은 3천만 원이 넘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이런 가계 빛 증가세는 주택담보대출이 주도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부동산 3법이 원인이랄 수 있는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부동산금융 규제가 완화된데다 이를 위해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친 기준금리가 인하되면서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2014년 1분기 1조2천억 원, 2분기 5조5천억 원, 3분기 10조6천억 원, 4분기 20조4천억 원으로 보면 확인된다. 부동산 3법의 효과로 주택매매가 늘었다는 4분기에 가계대출이 1분기에 비해 무려 스무 배 가까운 큰 폭으로 늘었다. 원흉이 주택담보대출이란 증거다. 박근혜 대통령이 ‘은행에서 돈 빌려 집 사라’는 법이 늦어진 관계로 경제활성화가 늦다고 말했는데, 결국 국민들 빚쟁이를 더 빨리 만들지 못해서 경제가 살지 못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지난 해 취업을 포기한 ‘구직단념자’가 50만 명에 육박하면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통계청은 21일 지난달 구직단념자는 49만2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25만5000명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역대 최대다. 2010년 2월 20만 명대를 기록한 뒤 지난해 3월 30만 명, 5월 부터 40만 명대를 유지하다 지난 달 50만 명에 육박하면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설 연휴 뉴스로도 확인된다. 설 연휴에 우리 국민들을 슬프게 했던 뉴스 중 단연 톱은 경남 거제의 한 자동차 안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일가족 5명의 소식이었다. 경찰은 빚에 허덕인 가장이 설을 쇠러 가려고 잡을 나선 뒤 차 안에서 아내와 자식들 3명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외에도 밀린 월세를 내기 위해 절도를 하다 적발된 사람 등 생계형 범죄와 사망사건 등이 뉴스의 초점이었다. 실태가 이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모든 문제를 야당의 발목잡기로 돌리면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한다. 따라서 조만간 대출금 이자 때문에 벌어질지도 모를 생계형 범죄엔 또 뭐라고 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가 내놓은 공직 후보자들의 불법 백태를 떠나 그들이 인식하는 정국의 현황은 한심하기가 그지없다. 지난 해 연말 나라를 강타한 담배세 인상을 필두로 유리지갑이라는 직장인들의 연말정산 파동, 그러함에도 이를 두고 예산 부족을 이유로 선별복지를 주장하는 여권의 입들에 힘입어 “증세는 국민배신”이라고 말하는 대통령이다.

담배세가 인상되어 성인 50%라는 흡연 인구의 담세 비율이 높아졌으며, 3개월 분할 납부를 여야 정치권이 합의할 정도로 이미 추가로 세금을 내야 할 직장인이 많아진 것은 확실한 증세임에도 증세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정부다. 이것은 결국 ‘증세-법인세’ 또는 ‘증세-부자세’라는 인식 때문에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더 걷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결국 경제가 어렵고, 세원이 부족하고, 정국이 불안하며, 정부와 대통령의 인기가 없는 것은 모두 박근혜 대통령 자신을 비롯한 박근혜 이너서클의 잘못이다. 그런데 이를 엉뚱하게 야당에 떠넘기려고 ‘퉁퉁 불은 국수’운운하는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대통령의 저급함… 이를 지적하지도 않고 나팔수처럼 전파하는 언론들… 설날을 보낸 첫날의 모습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해 연말부터 지지율이 30% 밑으로 빠졌다. 집권 2년차도 안 돼 30% 밑으로 빠진 것이다, 때문에 덩달아 여당의 지지율이 야당 지지율 밑으로 빠질까봐서 지금 여당의 국회의원들까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본인만 독야청청이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주택담보대출이 늘면서 가계 빚은 계속 늘지만 정부가 원하는 집값상승을 통한 부동산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있다. 매매건수가 늘었어도 오름세는 없다. 매수 희망자는 급매물 등 시가에 비해 저렴하지 않으면 입질을 하지 않는다. 결국 박 대통령이 말한 시장경기 회복세는 수치상 매매건수가 늘어난 것뿐이다.

집값 상승 예측률이 최소한 은행 금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대출금으로 집을 사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전세 기간 2년마다 이사를 해도 2년 후 전세 원금에서 손해는 없다. 전세금을 대출로 충당해도 이자 외엔 손실이 없다. 최악의 경우 이사 비용과 중개 수수료까지만 손실로 보면 된다.

반면 주택을 구입했을 경우 은행 이자에다 필요할 때 현금화의 불투명, 집값 하락에 따른 원금 손실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더구나 전세 보증금은 만기에 환금에 대한 위험성이 없다. 반면 매매는 필요한 시점에 팔린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필요 시 환금 보장도 되지 않는다.

결국 이익보다 손실이 더 가까운 주택 구입은 필요할 때 현금화도 어려운 이중 고초를 주고 있다는 현실이 주택 매수에 대한 의욕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싼 이자에 돈 빌려줘서 집을 구입하게 하는 법안 등을 경제활성화에 대한 특효약 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대통령의 경제 지식도 문제지만 그가 사용한 ‘퉁퉁 불은 국수’라는 언어가 더 역겹다는 말이다. 왜? 지금 국민들은 퉁퉁 불은 국수도 먹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이런 저급한 인식을 가진 대통령과 정부 아래에서 ‘퉁퉁 불은 국수’도 못 먹는 국민들만 불쌍하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모두 대통령 자신 때문인데 이를 엉뚱하게 부동산 3법 통과가 늦어진 때문이라는 인식… 그런 대통령의 인식과 진단을 비판도 없이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언론, 이런 세상에서 사는 국민들이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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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국수도 없는 국민들만 불쌍하다

 
[뉴스해설] 저급한 언어유희를 즐기는 대통령과 언론이 경제를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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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연휴를 지난 첫 월요일, 박근혜 대통령이 또 뉴스메이커가 되었다. 현재의 우리 경제를 ‘퉁퉁 불은 국수’로 표현한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23일 자신이 주재한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모두 발언에서 “우리 경제를 생각하면 저는 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경제를 진단하는 말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부동산 3법도 작년에 어렵게 통과가 됐는데 비유하자면 퉁퉁 불어터진 국수”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걸 먹고도 우리 경제가, 부동산이 힘을 좀 내서 꿈틀꿈틀 움직이면서 활성화되고 집 거래도 많이 늘어났다”고 진단했다.

그리고는 “불어터지지 않고 좋은 상태에서 먹었다면 얼마나 힘이 났겠느냐”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뒤 “그래서 우리 경제가 참 불쌍하다. 불어터진 국수를 먹고도 힘을 차리는구나. 그래서 앞으로는 제때 그런 것을 먹일 수 있도록 중요한 경제 활성화 법안들도 통과돼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제공>

지난 정기국회에 제출된 주택법 등 부동산 거래활성화 3법을 야당이 발목을 잡아 늦게 처리되므로 경제 활성화가 늦어졌다는 박 대통령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진단도 틀렸지만 경제정책에 대한 인식 자체가 틀렸다. 그래서 이 같은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곧바로 한국은행의 발표에 의해 엉뚱한 인식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한국은행은 23일 가계신용대출이 역대 최대인 1천90조 원에 육박하면서 국민 1인당 가계 빚 2천만 원을 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자료를 보면 지난해에만 은행과 비은행권이 가계에 빌려준 돈이 64조 원 넘게 늘었다. 이 가운데 주택담보대출이 80%를 차지했다. 한국은행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제출한 업무현황 자료에 나타난 실상이다.

시중은행, 저축은행, 상호신용금고 등 비은행권의 가계대출 총액이 지난 해 64조3천억 원 늘었으며. 이중 은행권이 37조3천억 원, 비은행권이 27조 원 증가했다. 더구나 여기에는 결제 전 카드 사용금액(판매신용), 보험사, 대부업체, 공적금융기관 등의 가계대출은 빠져 있다.

그렇다면 카드사, 보험사, 대부업체까지 모두 합하면 이미 1천 2~3백조가 넘었을 수도 있다. 은행권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이 채무자라는 대부업계의 대출금만 현재 추계로 약 10조 원에 이르고 있으므로 카드사와 보험대출을 포함할 경우 이는 거의 현실적 액수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 명인 점을 고려하면 국민 1인당 2천100만 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는데, 이중 빚이 없이 현금을 은행에 맡기고 있는 20%의 부자들을 제외하면 4천만 명 정도인 중산층과 서민들의 1인당 평균 빚은 3천만 원이 넘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이런 가계 빛 증가세는 주택담보대출이 주도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부동산 3법이 원인이랄 수 있는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부동산금융 규제가 완화된데다 이를 위해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친 기준금리가 인하되면서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2014년 1분기 1조2천억 원, 2분기 5조5천억 원, 3분기 10조6천억 원, 4분기 20조4천억 원으로 보면 확인된다. 부동산 3법의 효과로 주택매매가 늘었다는 4분기에 가계대출이 1분기에 비해 무려 스무 배 가까운 큰 폭으로 늘었다. 원흉이 주택담보대출이란 증거다. 박근혜 대통령이 ‘은행에서 돈 빌려 집 사라’는 법이 늦어진 관계로 경제활성화가 늦다고 말했는데, 결국 국민들 빚쟁이를 더 빨리 만들지 못해서 경제가 살지 못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지난 해 취업을 포기한 ‘구직단념자’가 50만 명에 육박하면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통계청은 21일 지난달 구직단념자는 49만2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25만5000명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역대 최대다. 2010년 2월 20만 명대를 기록한 뒤 지난해 3월 30만 명, 5월 부터 40만 명대를 유지하다 지난 달 50만 명에 육박하면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설 연휴 뉴스로도 확인된다. 설 연휴에 우리 국민들을 슬프게 했던 뉴스 중 단연 톱은 경남 거제의 한 자동차 안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일가족 5명의 소식이었다. 경찰은 빚에 허덕인 가장이 설을 쇠러 가려고 잡을 나선 뒤 차 안에서 아내와 자식들 3명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외에도 밀린 월세를 내기 위해 절도를 하다 적발된 사람 등 생계형 범죄와 사망사건 등이 뉴스의 초점이었다. 실태가 이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모든 문제를 야당의 발목잡기로 돌리면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한다. 따라서 조만간 대출금 이자 때문에 벌어질지도 모를 생계형 범죄엔 또 뭐라고 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가 내놓은 공직 후보자들의 불법 백태를 떠나 그들이 인식하는 정국의 현황은 한심하기가 그지없다. 지난 해 연말 나라를 강타한 담배세 인상을 필두로 유리지갑이라는 직장인들의 연말정산 파동, 그러함에도 이를 두고 예산 부족을 이유로 선별복지를 주장하는 여권의 입들에 힘입어 “증세는 국민배신”이라고 말하는 대통령이다.

담배세가 인상되어 성인 50%라는 흡연 인구의 담세 비율이 높아졌으며, 3개월 분할 납부를 여야 정치권이 합의할 정도로 이미 추가로 세금을 내야 할 직장인이 많아진 것은 확실한 증세임에도 증세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정부다. 이것은 결국 ‘증세-법인세’ 또는 ‘증세-부자세’라는 인식 때문에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더 걷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결국 경제가 어렵고, 세원이 부족하고, 정국이 불안하며, 정부와 대통령의 인기가 없는 것은 모두 박근혜 대통령 자신을 비롯한 박근혜 이너서클의 잘못이다. 그런데 이를 엉뚱하게 야당에 떠넘기려고 ‘퉁퉁 불은 국수’운운하는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대통령의 저급함… 이를 지적하지도 않고 나팔수처럼 전파하는 언론들… 설날을 보낸 첫날의 모습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해 연말부터 지지율이 30% 밑으로 빠졌다. 집권 2년차도 안 돼 30% 밑으로 빠진 것이다, 때문에 덩달아 여당의 지지율이 야당 지지율 밑으로 빠질까봐서 지금 여당의 국회의원들까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본인만 독야청청이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주택담보대출이 늘면서 가계 빚은 계속 늘지만 정부가 원하는 집값상승을 통한 부동산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있다. 매매건수가 늘었어도 오름세는 없다. 매수 희망자는 급매물 등 시가에 비해 저렴하지 않으면 입질을 하지 않는다. 결국 박 대통령이 말한 시장경기 회복세는 수치상 매매건수가 늘어난 것뿐이다.

집값 상승 예측률이 최소한 은행 금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대출금으로 집을 사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전세 기간 2년마다 이사를 해도 2년 후 전세 원금에서 손해는 없다. 전세금을 대출로 충당해도 이자 외엔 손실이 없다. 최악의 경우 이사 비용과 중개 수수료까지만 손실로 보면 된다.

반면 주택을 구입했을 경우 은행 이자에다 필요할 때 현금화의 불투명, 집값 하락에 따른 원금 손실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더구나 전세 보증금은 만기에 환금에 대한 위험성이 없다. 반면 매매는 필요한 시점에 팔린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필요 시 환금 보장도 되지 않는다.

결국 이익보다 손실이 더 가까운 주택 구입은 필요할 때 현금화도 어려운 이중 고초를 주고 있다는 현실이 주택 매수에 대한 의욕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싼 이자에 돈 빌려줘서 집을 구입하게 하는 법안 등을 경제활성화에 대한 특효약 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대통령의 경제 지식도 문제지만 그가 사용한 ‘퉁퉁 불은 국수’라는 언어가 더 역겹다는 말이다. 왜? 지금 국민들은 퉁퉁 불은 국수도 먹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이런 저급한 인식을 가진 대통령과 정부 아래에서 ‘퉁퉁 불은 국수’도 못 먹는 국민들만 불쌍하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모두 대통령 자신 때문인데 이를 엉뚱하게 부동산 3법 통과가 늦어진 때문이라는 인식… 그런 대통령의 인식과 진단을 비판도 없이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언론, 이런 세상에서 사는 국민들이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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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국수도 없는 국민들만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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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연휴를 지난 첫 월요일, 박근혜 대통령이 또 뉴스메이커가 되었다. 현재의 우리 경제를 ‘퉁퉁 불은 국수’로 표현한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23일 자신이 주재한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모두 발언에서 “우리 경제를 생각하면 저는 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경제를 진단하는 말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부동산 3법도 작년에 어렵게 통과가 됐는데 비유하자면 퉁퉁 불어터진 국수”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걸 먹고도 우리 경제가, 부동산이 힘을 좀 내서 꿈틀꿈틀 움직이면서 활성화되고 집 거래도 많이 늘어났다”고 진단했다.

그리고는 “불어터지지 않고 좋은 상태에서 먹었다면 얼마나 힘이 났겠느냐”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뒤 “그래서 우리 경제가 참 불쌍하다. 불어터진 국수를 먹고도 힘을 차리는구나. 그래서 앞으로는 제때 그런 것을 먹일 수 있도록 중요한 경제 활성화 법안들도 통과돼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제공>

지난 정기국회에 제출된 주택법 등 부동산 거래활성화 3법을 야당이 발목을 잡아 늦게 처리되므로 경제 활성화가 늦어졌다는 박 대통령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진단도 틀렸지만 경제정책에 대한 인식 자체가 틀렸다. 그래서 이 같은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곧바로 한국은행의 발표에 의해 엉뚱한 인식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한국은행은 23일 가계신용대출이 역대 최대인 1천90조 원에 육박하면서 국민 1인당 가계 빚 2천만 원을 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자료를 보면 지난해에만 은행과 비은행권이 가계에 빌려준 돈이 64조 원 넘게 늘었다. 이 가운데 주택담보대출이 80%를 차지했다. 한국은행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제출한 업무현황 자료에 나타난 실상이다.

시중은행, 저축은행, 상호신용금고 등 비은행권의 가계대출 총액이 지난 해 64조3천억 원 늘었으며. 이중 은행권이 37조3천억 원, 비은행권이 27조 원 증가했다. 더구나 여기에는 결제 전 카드 사용금액(판매신용), 보험사, 대부업체, 공적금융기관 등의 가계대출은 빠져 있다.

그렇다면 카드사, 보험사, 대부업체까지 모두 합하면 이미 1천 2~3백조가 넘었을 수도 있다. 은행권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이 채무자라는 대부업계의 대출금만 현재 추계로 약 10조 원에 이르고 있으므로 카드사와 보험대출을 포함할 경우 이는 거의 현실적 액수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 명인 점을 고려하면 국민 1인당 2천100만 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는데, 이중 빚이 없이 현금을 은행에 맡기고 있는 20%의 부자들을 제외하면 4천만 명 정도인 중산층과 서민들의 1인당 평균 빚은 3천만 원이 넘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이런 가계 빛 증가세는 주택담보대출이 주도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부동산 3법이 원인이랄 수 있는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부동산금융 규제가 완화된데다 이를 위해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친 기준금리가 인하되면서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2014년 1분기 1조2천억 원, 2분기 5조5천억 원, 3분기 10조6천억 원, 4분기 20조4천억 원으로 보면 확인된다. 부동산 3법의 효과로 주택매매가 늘었다는 4분기에 가계대출이 1분기에 비해 무려 스무 배 가까운 큰 폭으로 늘었다. 원흉이 주택담보대출이란 증거다. 박근혜 대통령이 ‘은행에서 돈 빌려 집 사라’는 법이 늦어진 관계로 경제활성화가 늦다고 말했는데, 결국 국민들 빚쟁이를 더 빨리 만들지 못해서 경제가 살지 못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지난 해 취업을 포기한 ‘구직단념자’가 50만 명에 육박하면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통계청은 21일 지난달 구직단념자는 49만2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25만5000명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역대 최대다. 2010년 2월 20만 명대를 기록한 뒤 지난해 3월 30만 명, 5월 부터 40만 명대를 유지하다 지난 달 50만 명에 육박하면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설 연휴 뉴스로도 확인된다. 설 연휴에 우리 국민들을 슬프게 했던 뉴스 중 단연 톱은 경남 거제의 한 자동차 안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일가족 5명의 소식이었다. 경찰은 빚에 허덕인 가장이 설을 쇠러 가려고 잡을 나선 뒤 차 안에서 아내와 자식들 3명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외에도 밀린 월세를 내기 위해 절도를 하다 적발된 사람 등 생계형 범죄와 사망사건 등이 뉴스의 초점이었다. 실태가 이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모든 문제를 야당의 발목잡기로 돌리면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한다. 따라서 조만간 대출금 이자 때문에 벌어질지도 모를 생계형 범죄엔 또 뭐라고 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가 내놓은 공직 후보자들의 불법 백태를 떠나 그들이 인식하는 정국의 현황은 한심하기가 그지없다. 지난 해 연말 나라를 강타한 담배세 인상을 필두로 유리지갑이라는 직장인들의 연말정산 파동, 그러함에도 이를 두고 예산 부족을 이유로 선별복지를 주장하는 여권의 입들에 힘입어 “증세는 국민배신”이라고 말하는 대통령이다.

담배세가 인상되어 성인 50%라는 흡연 인구의 담세 비율이 높아졌으며, 3개월 분할 납부를 여야 정치권이 합의할 정도로 이미 추가로 세금을 내야 할 직장인이 많아진 것은 확실한 증세임에도 증세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정부다. 이것은 결국 ‘증세-법인세’ 또는 ‘증세-부자세’라는 인식 때문에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더 걷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결국 경제가 어렵고, 세원이 부족하고, 정국이 불안하며, 정부와 대통령의 인기가 없는 것은 모두 박근혜 대통령 자신을 비롯한 박근혜 이너서클의 잘못이다. 그런데 이를 엉뚱하게 야당에 떠넘기려고 ‘퉁퉁 불은 국수’운운하는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대통령의 저급함… 이를 지적하지도 않고 나팔수처럼 전파하는 언론들… 설날을 보낸 첫날의 모습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해 연말부터 지지율이 30% 밑으로 빠졌다. 집권 2년차도 안 돼 30% 밑으로 빠진 것이다, 때문에 덩달아 여당의 지지율이 야당 지지율 밑으로 빠질까봐서 지금 여당의 국회의원들까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본인만 독야청청이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주택담보대출이 늘면서 가계 빚은 계속 늘지만 정부가 원하는 집값상승을 통한 부동산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있다. 매매건수가 늘었어도 오름세는 없다. 매수 희망자는 급매물 등 시가에 비해 저렴하지 않으면 입질을 하지 않는다. 결국 박 대통령이 말한 시장경기 회복세는 수치상 매매건수가 늘어난 것뿐이다.

집값 상승 예측률이 최소한 은행 금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대출금으로 집을 사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전세 기간 2년마다 이사를 해도 2년 후 전세 원금에서 손해는 없다. 전세금을 대출로 충당해도 이자 외엔 손실이 없다. 최악의 경우 이사 비용과 중개 수수료까지만 손실로 보면 된다.

반면 주택을 구입했을 경우 은행 이자에다 필요할 때 현금화의 불투명, 집값 하락에 따른 원금 손실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더구나 전세 보증금은 만기에 환금에 대한 위험성이 없다. 반면 매매는 필요한 시점에 팔린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필요 시 환금 보장도 되지 않는다.

결국 이익보다 손실이 더 가까운 주택 구입은 필요할 때 현금화도 어려운 이중 고초를 주고 있다는 현실이 주택 매수에 대한 의욕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싼 이자에 돈 빌려줘서 집을 구입하게 하는 법안 등을 경제활성화에 대한 특효약 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대통령의 경제 지식도 문제지만 그가 사용한 ‘퉁퉁 불은 국수’라는 언어가 더 역겹다는 말이다. 왜? 지금 국민들은 퉁퉁 불은 국수도 먹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이런 저급한 인식을 가진 대통령과 정부 아래에서 ‘퉁퉁 불은 국수’도 못 먹는 국민들만 불쌍하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모두 대통령 자신 때문인데 이를 엉뚱하게 부동산 3법 통과가 늦어진 때문이라는 인식… 그런 대통령의 인식과 진단을 비판도 없이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언론, 이런 세상에서 사는 국민들이 불쌍하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8&table=c_flower911&uid=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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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해방 70년 한일 두나라 지식인의 현실진단과 방향 모색

 
강태호 2015.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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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다우어.jpg

 

 미국의 저명한 일본 현대사 연구자인 존  다우어(John Dower) MIT 명예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 미-일-중 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The Asia-Pacific Journal, Vol. 12, Issue 8, No. 2http://japanfocus.org/-John_W_-Dower/4079 2014년 2월)에서 한중일간의 역사문제 영토분쟁 등 ‘동아시아의 불화’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남긴 부의 유산이 일본과 주변국과의 갈등과 불화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불화의 근원인 샌프란시스코 체제

 

  여기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8일 체결된 두 개의 조약으로 성립된 동아시아에서의 팍스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평화) 체제다. 두 조약 가운데 하나는 2차대전 때 맞서 싸웠던 일본과 48개 ‘연합국’ 간에 맺어진 다자간 평화조약이다. 이를 바탕으로 2차대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됐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일본 양자 간 안보조약이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에 “일본 및 인근 지역에 군사력을 보유할” 권리를 허용했으며,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하고 촉구했다. 두 조약은 1952년 4월28일 발효됐으며 이날을 기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 미일 안보조약은 평화헌법과 끊임없이 충돌했으며, 연합국과 일본간의 다자간 평화조약 역시 이후 외교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 협상에 핵심 당사자인 남북한과 중국을 초청하지 않았고, 소련은 비준을 거부했으며, 영토 문제를 비롯해 보상 배상문제 등 국교정상화의 핵심 문제를 덮어둠으로써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아시아 국가들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미일안보조약.jpg

  1951년 9월 미일안보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

 

 다우어 교수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그 시작부터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잉태했다. 그는  이 체제의 부정적 유산을  △오키나와와 ‘2개의 일본’  △일본과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의 영토분쟁 △일본 내 미군 기지 △일본의 재무장 △‘역사 문제들’ △ (미국의) ‘핵우산’ △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로부터의 이탈 △일본의 ‘예속적 독립’ 등 8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 다우어가 지적하는 '오키나와와 2개의 일본'이라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3조에서 오키나와현이 포함된 류큐 제도를 신탁 통치하에 두기로 했으며, 미국이 행정·입법·사법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했지만,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오키나와를 일본과 분리시켜 미군기지화한 결정은 미군 병사들의 범죄, 소음 공해, 그리고 환경파괴 등 오늘날의 오키나와 문제의 근원이 됐다.  
 또 예컨대 다우어는 영토 분쟁에 대해  2012년 <아사히 신문>과의 한 인터뷰에서 “미국은 의도적으로 평화조약에서 영유권을 애매한 상태로 남겨두거나 이미 공산화된 중국의 영유권 요구는 무시했다”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도(다케시마), 댜오위타이(센카쿠) 문제 모두 1951년에 해결됐어야만 하는 문제였다. 아무런 변화 없이 60년이 지난 게 이상하다. 북방영토에 대해서도 1950년대에 시게미쓰 마모루 당시 일본 외상이 구소련과 교섭해 2개 섬 반환에 합의에 이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소련과 합의하면 오키나와 반환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위협해 기회를 잃었다. 종속적인 대미관계 탓에 일본이 전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예가 여기에도 있다.”
 그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체제 위에서 미국은 아태지역에서는 누구도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전략적 우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과 함께 2010년을 전후해 이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정적 유산들이 ‘불길한 방식’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베 정부에서 중국 견제를 위해 가속화되고 있는 일본의 군사화는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는 또한 이러한 중일 갈등의 근원에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내재한 ‘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 이탈’ 그리고 미국에 대한 일본의 ‘예속적 독립’이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일본의 ‘예속적 독립’은  외교 안보 군사에 그치지 않는다. 다우어는  일본은 어떻게 패전을 넘어 경제 대국으로 도약했는가를 규명한 <패배를 껴안고>(2009년 민음사)라는 역저에서 ‘일본 모델’이라고 하는 것은 미국과의 교배형이라는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전후 일본의 성장을 가져온 관료제와 자민당 1당 지배체제 및 천황제 그리고 평화헌법 등 이른바 “일본모델은 사실  ‘스캐파니즈 모델(a SCAPanese model, 미 군정 총사령부와 일본인의 합작에 의한 모델)’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패배를 껴안고.jpg

존 다우어 교수의 역저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아베의 대미 종속 외교

 

  지난 2월14일 일본의 나가사키대학(다문화사회학부)에서는  한신대 평화와 공공성 센터와 나가사키 대학 동아시공생프로젝트팀이 공동으로 주최한 제 4회 한일지식인 워크숍이 열렸다. 원아시아재단의 후원으로 열린 이 워크숍의 큰 주제는 아시아의 상생을 위한 역사 기억에 대한 재평가였다. 워크숍 오후 세션의 주제는 ‘아시아의 지역구상에 대한 시선-21세기 국가의 과제’였으며, 사토 유키오(佐藤幸男) 도야마(富山)대학 명예교수와 동국대 박순성 교수(북한학과)가 각각 분단과 해방 70주년을 맞아 오늘의 일본과 한국이 직면한 현실을 다뤘다. 

한일 두 지식인의 각자 현실에 대한 진단은 동맹의 강화 속에 진행되는 냉전적인 대결구도와 민주주의의 후퇴로 요약된다. 특히 사토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로서 아시아와 일본외교’라는 발표에서 다우어 교수의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일본의 예속적 독립’이라는 인식에 바탕해 아베 정부의 행보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일본의 ‘전후’는 패전과 평화헌법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냉전구조에 구속을 받아 왔다.  “미국에 의한 평화(팍스 아메리카나)가 압도적인 군사 정치적인 우위를 배경으로 일본의 ‘전후’와 그 산물로서의 ‘아시아’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아베 정부의 등장은 이 가운데 패전과 평화헌법을 위협하고 있다.  사토 교수는 다우어가 지적한 샌프란시스코의 부정적 유산이 현재 동아시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가로막고 있다면서 이를 뛰어넘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움직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저항시인’윤동주의 사후 7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이웃나라의 젊은이의 미래를 빼앗은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반성하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새롭게 하는 시비건립운동이 후쿠오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계를 뛰어넘는 동아시아의 시작을 향한 작은 출발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또 일본에서 시라이 사토시(白井聰)의 <영속패전론>과 같은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을 아베 정부의 ‘전후체제 탈피론’에 맞선 움직임으로 평가한다.  사회사상사 연구자인 시라이는 <영속패전론>이라는 책에서  “1945년 8월 15일은 ‘종전의 날’일 뿐이며, 천황이 남긴 종전조서(終戰詔書, 종전을 선언한 천황의 문서)에도  항복이나 패전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슬쩍 바꿔 넣은 것에서부터 일본의 전후는 시작됐다”며 이런 일본이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난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왔다. 그래야 올바른 역사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토 교수는 나아가 일본외교의 자발적인 대미종속이라는 불편한 사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사상적 요소로서 ‘오키나와 독립론’과 오키나와적 불복종 운동에 새롭게 관심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

아베 야스쿠니.jpg

2013년 12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아베 총리

 

 분단체제의 강화와 동맹정치

 

 

 

  박순성 교수는 2014년 말 헌법재판소에 의한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을 중심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분단체제 강화와 억압정치의 부활을 분석하고 있다. 박 교수는 ‘한반도 분단체제와 동맹정치’라는 발표를 통해  “1987년 이래 남한 사회 내 민주·진보진영이 이끌었던 분단체제 극복의 사회동학은 해체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던 분단체제의 반격에 직면하였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반격은 세 방향에서 나타났다. 첫째, 남한 사회 내부에서 분단체제 해체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반격에 나섰다. 둘째, 남북관계의 발전과 어긋난 북한과 미국 사이의 군사적 갈등이 분단체제 해체 과정에 제동을 걸었다.  셋째, 2008년 남한에서의 보수정권 등장은 결정적으로 분단체제 해체를 중단시키고 분단체제를 재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민주주의의 후퇴와 분단체제의 강화는 한국 사회내부에 이제 과거 독재정권의 억압적 통치와는 다른 방식의 일종의 ‘동맹 정치’가 작동하도록 만들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동맹 정치’는 다음과 같은 현실을 낳는다. “권력차원에서는 동맹세력의 동원을 위해 현실적인 사회·경제 문제보다는 정치적 이념(더 정확하게는 정체성)의 문제가 주요한 정치적 의제로 제기되고, 시민사회에서는 탈정치화와 과잉정치화가 동시에 일어난다. 또 민주정부 하에서 작동하던 남남갈등은 보수정권 하에서는 이제 상대편을 억압하는 이념 공세의 형태로 전환된다. 국가는 모든 판단의 최종심판자가 되고, 합리적 문제제기는 추방되고 공론장은 폐쇄된다. 천안함 사건과 관련한 시민사회의 문제제기는 반국가적 행위로 낙인이 찍히고,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대북정책은 ‘종북정책’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 동맹정치가 “민주주의, 특히 헌정주의의 외양을 띠고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한 것이 바로 한국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선고”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는 않는데 그건 새로운 대안적 흐름이 뚜렷이 부각되지 못한 우리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남한 내부에서 새로운 억압적 질서로서의 동맹 정치가 강화될수록 한미동맹, 한미일 삼각동맹이 강화되고 이는 동북아에서 군사동맹에 바탕을 둔 냉전질서를 새롭게 부활시킬 가능성이 높다”며 동북아시아의 불안한 미래를 우려하고 있다. 
 
 

 

  비정부 민간네트워크와 평화 도시의 비전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분출하고 있는 이러한 국가간 대립과 갈등을 넘어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다우어 교수는 “민족주의와 역사 문제의 결합은 중국과 일본 모두에서 ‘기억’을 선전선동으로, ‘역사 문제’를 역사전쟁으로 바꿔 놓았으며 현재까지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셔널리즘과 애국주의로 표출되는 이런 극단주의와 비이성의 목소리를 물리칠 수 있을까? 그에 따르면 “덜 대결적인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아시아 협조 체제(Concert of Asia)’ ‘태평양 공동체’ ‘팍스 퍼시피카(Pax Pacifica: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비되는 평화)’ 등의 새로운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면서, 그 바탕에는 ’권력 분점’의 정신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비정부 민간 네트워크의 확장’ 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이 비정부 민간네트워크의 확장은 시민 단체(NGO)와 다국적기업, 그리고 관광과 대중문화와 같은 문화 및 교육 분야의 교류를 포괄한다.  그는 “이들이야말로 풀뿌리 차원의 협력과 통합의 기반이자, 극단적 민족주의와 호전적 대립을 치유하는 해독제”다. 왜냐하면 이들 민간네트워크의 핵심에는 진정한 상호의존과 상호 이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번 한일 지식인 워크숍을 조직한 한신대 평화와 공공성센터 소장인 이기호 교수는 그와 같은 맥락에서  평화 도시네트워크가  민족국가간 대립을 넘어선 새로운 질서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모색한다. 그는 이번 워크숍의 첫세션에서 ’평화 도시 네트워크 구상을 위한 대학간 협력’을 발표했다. 
 이 교수의 문제의식은  민족주의가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 형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그보다는 “ 어쩌면 일국 안에서 공존하는 ‘민족’의 다양성이 아시아인의 구성요소로 재조명되는 것이 ‘국가’에 포섭되고 위탁됨으로서 특정 민족으로 융합되는 국가형성의 과정보다 훨씬 더 다양성과 포용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아시아’를 구성하는 원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도시에 주목한다. 물론 그 도시(지역자치체) 또한 자율적 성장이 위협받고 있다. “우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더욱 강제적으로 병합된 오키나와, 특별자치도시로 인정받았지만 정치적 불임상태에 있는 홍콩, 남북간에 새로운 협력도시로 탄생한 개성 등은 모두 ‘국가’라는 공룡에 의해 도시의 생기와 활력은 물론 그 자율적 성장이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은 도시라는 구체적인 삶의 공간 안에서 획득되는 삶의 자아와 민족 개별 국가를 넘어서는 보편적 자아를 획득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동시에 서구에 대응하는 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 아시아가 아니라 아시아의 다양성 그 자체가 존중되는 문화적 다원주의로서 정체성”이 될 수 있다.  
 그는 특히 “21세기에는 도시의 성장과 확대로 인하여 도시 자체가 공동체의 핵심적인 ‘단위(유니트)’로 부각”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도시의 가능성에 더 다가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민족국가 혹은 근대국가가 ‘전쟁 수행능력’을 핵심 기능으로 당연시하는 패러다임 속에 있다면,  상대적으로 도시는 ‘무력을 통하지 않고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속성을 핵심적 구성요소로 하는 ‘평화도시’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는  적어도 이러한 도시간 평화 네트워크가 국가가 무력에 의지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을 외교적 수단으로 선택하고 평화를 추구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 평화 도시네트워크의 모멘텀을 만들어내는데 대학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대학을 하나의 교육기관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거대한 NGO로서 바라본다면 대학은 위에서 언급한 평화도시의 바탕을 이루는 요소로서 매우 풍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워크숍은 그 자체로 이 교수가 말한대로 대학이 중심이 돼 평화도시 네트워크가 어떻게 국가를 포위하고, 국가의 발전방향을 평화로 나아가게 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것인가를 찾아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워크숍에 참여한 일본의 와세다 대학 평화학연구소는 ‘서브 리전(sub-region)의 창출을 통한 동아시아 구상’을 모색해왔으며, 도야마 대학은 “동아시아 공생을 위한 학제적 융합연구”를,그리고 나가사키대학은 동아시아공생프로젝트 팀을 통해 “지속가능한 동아시아 교류권의 구상을 위한 인문사회학의 학제간 교류(크로스 오버)” 등을 연구해왔다. 
 한신대의 평화와 공공성센터는 와세다 대학, 도야마대학, 나가사키 국립대학 등이 그동안 개별적으로 추진해왔던 동아시아의 평화공간 창출을 위한 이런 지적협력의 네트워크를  중국, 대만, 몽골, 홍콩,나아가 북한 등으로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평화와 공공성센터의 동의를 얻어 지난 14일 나가사키 워크숍에서 발표한 사토 유키오 도야마대 명예교수, 박순성 동국대 교수, 이기호 소장의 발제문을 간추려 게재한다.

강태호 한겨레 선임기자 kank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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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댓글, 대통령이 책임지는 방법은 퇴진"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 206]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5.02.23 18:00l최종 업데이트 15.02.23 18:01l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나라 최대명절인 추석과 설이 지나고 계절이 4번 바뀌어 다시 그들이 떠났던 봄의 길목에 와 있다. 지난해 11월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연말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아래 세월호 특위)의 위원 추천이 끝났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도록 세월호 특위는 출범조차 못하고 있다. 애초 1월말쯤 출범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의 '세금도둑' 발언과 파견 공무원 철수 등으로 출범이 지연되고 있다.

현재 어떤 상태인지 궁금해 세월호 특위 유가족 추천 위원인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설 연휴 전날인 지난 17일 서강대 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이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했다.

새누리당 추천 위원들의 발언 "세월호 특위 힘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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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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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특위 유가족 추천 위원으로 활동하시는데 현재 어떤 상황인가요?
"지난해 12월 위원 추천이 완료됐잖아요. 원래 예상은 1월말 정도 세월호 특위가 출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직도 출범하지 못하는 상황이죠. 새누리당 쪽에서 추천한 5명의 위원들이 '설립 준비 활동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식으로 억지를 부리고 직제나 예산에 대해 계속 비합리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면서 준비 작업이 상당히 지연되는 상황이에요." 

- 늦어져서 발생하는 문제는 뭔가요?
"진상조사는 빨리할수록 좋아요. 여러 가지 증거라든지 관련자들의 진술 등을 빨리 조사해서 진실규명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진상조사는 그만큼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죠."

- 그럼 언제쯤 출범할 것으로 예상하세요?
"시행령 직제안과 예산안이 지난 12일 세월호 특위 위원 전체 간담회에서 확정되었습니다. 이제 할 일은 시행령과 예산안을 가지고 정부와 협의를 진행해야 합니다. 특히 시행령을 제정하는데 입법예고나 관계부처와 협의 등 몇 가지 절차가 있어요. 때문에 실제 위원회가 제대로 출범해서 활동하는 건 이르면 3월 말~4월 초로 예상됩니다. 더 늦어질 가능성이 있어요."

- 유가족을 돕고 있는 민변의 박주민 변호사는 활동 기간에 대해 "위원회의 구성을 마친 시점부터 1년이고 부족하면 6개월 연장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보도를 보면 시간을 까먹고 있다는 식이던데 활동 기간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현재 특별법상 위원회의 활동은 위원회 구성을 마친 날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사실 지금 준비 단계잖아요. 준비 절차가 늦어진다고 해서 위원회의 활동기간이 단축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진상조사를 빨리 시작하고 정확한 진실을 규명하자는 것이 유가족과 국민들의 요청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들이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서 지연 시키는 게 문제죠."

- 말씀하신 대로 세월호 특위의 직제와 예산이 확정됐어요, 직제는 그대로지만 예산은 축소되었는데 어떻게 평가하세요?
"예산이 축소되었죠. 설립 준비단에서 초창기 때 잡은 예산은 240억 규모였는데 그날 회의에서는 200억 정도의 예산안이 결정되었습니다. 홍보비가 일부 축소되고 사업비가 약간 조정된 면은 있지만 기본적인 사업비 예산은 그대로 유지한 것입니다. 다만 출범이 늦어지게 되니까 그만큼 인건비같은 게 줄어들 수밖에 없어 예산이 줄어든 것입니다. 

처음 예산을 짤 때는 2월부터 출범할 것으로 예상해서 2015년 1년치 인건비를 책정한 거예요. 그러나 아직 출범하지 못하고 있는 거고, 출범이 두 달 정도 지연되는 상황이잖아요. 그만큼 인건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걸 빼서 예산이 줄어드는 결과가 됐어요."

- 지난달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의 '세금도둑' 발언과 새누리당 추천 위원들의 발언 등이 논란인데요.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도 조대현 부위원장 예정자가 설립준비단에서 만든 예산안과 직제안을 임의로, 김재원 당시 새누리당 원내수석 부대표에게 위원장도 전혀 모르게 보고를 한 거예요. 사실상 내부 문건을 빼돌린 거죠. 김 원내 부대표는 그 문건을 보고 '세금도둑'이란 식으로 여론몰이를 했죠. 그러면서 마치 세금을 굉장히 많이 쓰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새누리당 의원이 위원회 예산에 대해 '세금도둑'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 자체가 위원회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행태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그 예산안은 당시 내부의 초안일 뿐 확정된 것도 아니었거든요. 더 심각한 건 예산안을 설립 준비단에서 정하면 그걸 가지고 기재부와 협의를 해야 하는데 김 원내 부대표 같은 새누리당 실세 의원이 세금도둑 발언을 함으로써, 사실상 기재부 공무원들에게 '예산을 삭감하라'는 가이드라인을 던져준 꼴이거든요. 그럼 점에서도 김 원내 부대표의 발언은 대단히 부적절한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 원인이 뭐라고 보세요?
"결국 세월호 특위 힘빼기 아닌가 싶어요. 진상조사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세력들이 특별법에 근거해 조사위가 출범한다고 했을 때 위원회의 조직 규모도 축소하고 예산도 축소하려고 함으로써 위원회가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압박을 하는 거라고 볼 수밖에 없죠." 

"청와대나 새누리당의 대변자 같은 행동, 대단히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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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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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난항을 겪고 있어서 세월호 특위가 취지대로 잘 돌아갈지 우려스럽기도 한데 어떻게 전망하세요?
"걱정이죠. 예상을 했던 것이긴 하지만 새누리당 쪽 위원들이 마치 정부나 새누리당에서 파견된 공무원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특별조사 위원회라는 것은 정부와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적인 기구잖아요. 독립적인 위원회로서 비록 새누리당 추천을 받았지만 위원들은 어디서 추천 받았는지와 상관없이 국민들을 대표해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는 의무를 띠고 위원이 된 것이라고 봐야죠. 

그러나 새누리당에서 추천을 받은 5명의 위원들은 마치 청와대나 새누리당의 대변자 같은 식의 행동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제대로 하려고 위원이 된 게 아니라 오히려 진실규명을 방해하려고 위원으로 들어온 사람들인 것처럼 그런 식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는 게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특위가 앞으로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렇지만 세월호 특위는 '세월호 참사의 정확한 진상을 규명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사회를 만들자'는 국민들의 열망이 모아져서 출범하는 것입니다. 국민들과 함께 가는 조사위원회가 된다면 앞으로 세월호 특위가 진상조사 활동을 충분히 적극적으로 열심히 할 수 있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세월호 특위가 마치면 특검 문제가 대두될텐데 특검은 어떻게 전망하세요?
"세월호 특위는 특별법에 의해서 특검 수사를 두 차례 요청할 수 있습니다. 진상조사 활동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의혹들이 어느 정도 규명된다면 처벌이 필요한 사람들이 나오겠죠. 그러면 그걸 기초로 해서 국회에 특검 임명을 요청하는 절차를 밟게 될 것입니다. 특검이 정치적인 독립성을 가지고 제대로 수사를 할 수 있느냐도 중요한 문제잖아요. 어렵지만 앞으로 특검을 분명히 요청하게 될 겁니다. 그 과정에서도 특검이 정치적 독립성을 가지고 제대로 수사할 수 있도록 국민들의 감시와 압박 등의 뒷받침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 세월호 참사 300일이 지나 1주기가 두 달 남았어요. 하지만 대한민국은 진영 논리로 갈라져 있어서 참사 전이나 달라지지 않았는데.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모든 국민들이 함께 울었고 분노했어요. 모두가 나서서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모든 국민들이 똑같은 마음으로 분노하고 슬퍼했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새누리당 의원들이나 일부 언론에서 마치 유가족들이 의사자 지정이니 대학특례입학 등 특혜를 바란다는 식으로 왜곡하는 행태를 보였죠. 그 다음엔 마치 '세월호 참사 때문에 경제가 안 좋아진다'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며 '이제 그만 하자'고도 했습니다. 또 그러면서 세월호 참사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 대해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몰고 가는 행태를 보이는데, 우리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모든 국민이 했는데 그 마음을 계속 간직해야 합니다. 진실규명이 앞으로 얼마가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세월호 특위 활동에서 모든 진실이 낱낱이 밝혀질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무엇이고 참사의 진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힐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먼저 간 희생자들 앞에서 고개 숙여 최선을 다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참사에는 단순히 청해진해운의 탐욕만이 아니라 그것을 방조한 정부의 책임도 매우 큽니다. 규제완화, 민영화 정책 등으로 우리 사회에 위험 요소들을 도처에 방치하고 비용절감이라는 명목으로 국민들의 안전을 도외시하면서 돈벌이에 혈안이 되도록 만든 정부의 책임 또한 매우 무겁지요. 그런 책임들을 분명히 밝히고 우리가 다시는 이런 참사를 겪지 않도록, 그래서 우리 사회가 안전하고 행복하며 건강하게 일과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기틀을 만드는 것이 진실규명이고 세월호 특위의 역할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거듭나야 합니다. 여기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보수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국민들이 힘을 합쳐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그리고 안전 사회의 기틀을 만듦으로써 우리 사회가 사람의 생명과 존엄이 존중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 시대의 역사적인 사명이 아닌가 싶어요." 

"3·15부정선거 버금가는 불법 관권선거... 책임지는 방법은 퇴진"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시잖아요. 지난 9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판결에 대해 "2012년 대선이 관권 선거였음이 분명해졌다. 정치적 책임을 피하지 못할 상황"이라고 하셨어요. 정치적 책임의 의미는 뭔가요?
"원세훈 전 원장에 대한 항소심 판결에서 국정원법 위반뿐만 아니라 공직선거법 위반이 확인됐죠. 단순히 국정원법 위반 즉 정치개입을 금지하고 있는 국정원법 위반을 넘어서서 공직선거법상의 불법선거운동이 인정됐다는 것은 정부와 여당이 권력기관인 국정원을 이용해서 불법적인 선거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온라인 상에서 댓글을 단 걸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매우 중대한 불법선거입니다.

오프라인으로 비교하자면, 국정원 직원들이 집집마다 방문을 하면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여러 가지 치적을 홍보하고 야당 후보를 깎아내리는 식으로 말하고 다녔다고 해보세요. 이건 3·15부정선거에 버금가는 불법적인 관권선거인데 그런 짓을 한 겁니다. 이렇게 불법적인 관권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면 정치적인 정당성을 의심 받을 수밖에 없죠. 여기에 대해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은 퇴진이죠." 

-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은 대선 불복 프레임에 갇혀서 사과만 요구하는데.
"여러 가지 정치적 계산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여야의 정치적인 타협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당당히 요구해야 할 문제라고 봐요. 만약 이 문제에 대해 대통령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선거 때 국정원, 군대, 경찰 등 권력기관을 불법적으로 동원해서 선거를 해놓고 나중에 발각되면 관련자들 몇 명 처벌 받게 하고 대통령은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 행태가 반복될 수 있잖아요. 이건 우리나라 민주주의에서 굉장히 불행한 상황이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선거의 민주성과 정당성을 침해하는 행위는 민주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대단히 중대한 범죄행위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최소한 대통령으로서 집권여당의 당시 후보로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 하지만 한편에서는 '지금 대법원 판결이 안 나왔는데 퇴진을 요구하면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줘서 무죄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하던데.
"물론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항소심 판결에서 사실 관계는 다 나왔습니다. 대법원에 가서 뒤집힐 우려도 있지만 저는 법해석상 상식을 가진 법관들이라면 공직선거법 위반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봐요. 명백한 불법행위를 했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한 건데 여기에 대해 선거법 위반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 대법관들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뒤집힐 가능성도 없고 뒤집혀져서도 안 되요. 법리해석상 공직선거법 위반은 당연히 인정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영광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영광의 언론, 그리고 방송이야기'(http://blog.daum.net/lightsorikwan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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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우 교수의 『한반도 평화경제론』

한반도가 동북아의 여의주가 되려면<서평> 이찬우 교수의 『한반도 평화경제론』
정영철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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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23  09: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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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철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세계를 시야에 넣고,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는 책사(策士)되기’

1970년 11월 13일 청계시장 한 복판에서 한 청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기고 분신하였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이었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채로 독학으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 쓰러졌다. 그가 했다는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고 있었다면....’이라는 말은 배우지 못한 채 홀로 독학을 하며 어려운 법조문을 한 자 한 자 읽어가야 했던 자신을 책망하는 말이자, 세상의 지식인을 향한 의미심장한 경종의 외침이라 할 수 있다. 전태일의 분신에는 사회적 약자에게로 향하지 못했던 지식인도 절반쯤은 책임이 있지 않았을까?

시대를 거슬러 1910년 8월 29일, 비록 고종황제가 끝내 승인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한 경술국치에는 어땠을까? 당시 열강의 한반도 침략이 하루가 다르게 이리저리 형세를 바꾸어가며 진행되던 시기, 세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를 둘러싼 각 국의 이해관계를 냉철하게 분석하여 대책을 세웠던 이가 있었을까?

고종도 아마 ‘나에게 세계를 독해할 수 있는 책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하는 회한을 품었을 법하다. 경술국치 역시 힘없는 국력의 결과이지만, 거기에 단단히 한몫 했던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지 않을까? 요즘에야 그러한 지식인의 분열을 ‘당쟁’이라 부르기도 하고,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친중파 등등으로 이름하지만, 국제적인 시야를 상실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민감했던 속 좁은 사익 추구란 측면에서 공통적이라 하겠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보면 고종이 느꼈을 것 같은 감정과 유사한 느낌을 받게 된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북한은 무엇을 꿈꾸고 있고, 우리를 둘러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는 어떤 생각으로 한반도에 발을 걸치고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아직까지 속시원한 해명과 분석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계속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일 것이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것이 끝나지 않는 지식인의 책무가 아닐까 한다.

물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야가 한반도에 갇혀있어서는 안되고, 더욱이 한반도 남단의 좁은 울타리에서 이편저편의 편협한 정치적 이익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특히 지식인은 툭하면 뱉어내는 외국어로 된 화려한 개념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정치적 이해관계의 틀에 가두어놓고 한반도를 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이러한 사고방식에 아주 익숙했다.

분단선에 갇힌 섬나라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대륙적 사고는 고사하고, 한반도 전체를 시야에 넣고 철학과 역사를 논하지 못해왔다. 세계사는 잘 알았지만 한반도 북단까지를 포함하는 우리의 역사와 철학 탐구, 전한반도적 사고, 전체로서의 관점은 부재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이나 일본의 눈을 통해 특히, 미국의 눈을 통해 한반도를 바라보고, 한반도의 미래를 설계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상상해왔다. 이래서는 고종이 갈망했을지도 모를 ‘세계를 시야에 넣고, 우리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던 책사되기’는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너무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사실에 가까운 ‘현실’이 아닌가 한다.

한반도가 중심이 돼 동북아 정세 흐름을 주도할 수 있을까?

한 권의 서평에 이렇게 긴 서두를 앞뒤 문맥도 없이 갖다 붙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책 속의 내용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설명하는 서평을 쓰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온 감상이기 때문이다.
 

   
▲ 『이찬우 교수의 한반도 평화경제론 -동북아의 심장을 누가 쥘 것인가』(역사인) 표지.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찬우 교수가 펴낸 『동북아의 심장을 누가 쥘 것인가』는 어려운 이론도 없고, 요란한 각주도 없이 마치 동북아시아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여기에 한반도의 이러 저러한 사회 현상을 뜯어보면서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용’, ‘여의주’, ‘등골’, ‘숨통’ 등의 용어를 통해 각 국가의 이해관계와 우리의 과제를 서술하고 있다. 책의 내용도 마지막 대담을 합쳐 대략 270페이지 내외 밖에 되지 않는다. 중간 중간 이해를 돕는 지도와 도표와 그림이 있어서 하루 몇 시간만 투자하면 끝을 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단순한 책에서 너무 거창한 감상과 무거운 주제를 뽑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소 내 스스로도 그렇지만, 우리의 지식인들이 세계를 논하면서도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이데올로기적 해석이나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북한을 포함한 우리의 문제를 너무 지나치게 북한의 ‘운명’(북한의 붕괴, 변화 등)으로 귀착시켜 사고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느끼는 문제점 때문에 더욱 위와 같은 감상을 무겁게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자인 이찬우 교수는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지금은 일본 테이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지난 25년 동안 멀리 몽골부터 중국 동북3성, 일본, 그리고 한국을 수 없이 오고갔다. 이러한 답사와 연구를 통해 이 교수가 주장하는 핵심은 지극히 단순하다.

오늘날 중국의 부상에서 볼 수 있듯이, 동북아시아 지역은 세계 경제의 핵심 발전지역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의 지역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앞으로 더 강화될 것이다. 여기에 일본은 미국 편으로 확실히 기울어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그런 미국을 견제하고 있고, 우리는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 편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중국과 북한은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고, 러시아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 흐름은 한반도에 그리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단지 강대국에 의한 남북한의 의존적 관계의 지속이자, 그 틀에 갇히는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우리가 이니셔티브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표현이라면, 여의주가 되기 위해서는, 나아가서는 숨통을 쥐기 위해서는) 남북의 평화 및 경제협력이 필수적이다. 남북의 협력은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넘어, 자주적 권리의 회복이자 동시에 지역협력의 올바른 추진이라는 것이다. 이게 한반도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 주장에 등장하는 키워드는 평화(peace), 발전(development), 자주(independence), 지역협력(regionalization)이다. 오늘날 동북아시아를 표현하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발전이라 할 것이다. 전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중동 지역과 더불어 가장 긴장도가 높은 지역이지만, 한편으로는 지역 협력체가 존재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그런데 발전의 결과 오늘날 중국은 세계를 미국과 더불어 지도하는 대국의 지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여전히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일본이 존재하고 있으며, 자원부국으로 새롭게 강한 러시아를 표방하는 러시아 극동이 자리하고 있고, 또 다른 자원부국이지만 아직은 힘에 부친 몽골이 있다. 또한 지리적인 범주를 벗어나 동북아시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미국이다. 여기에 동북아시아의 가장 뜨거운 감자라 할 한반도가 위치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이 동북아시아 지역에 한반도는 마치 용의 여의주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런데 한반도가 ‘용의 여의주’가 되기 위해서는 남북의 협력이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북아 각 국의 책략과 이해관계 분석

이 책의 제1부는 주로 현재의 동북아시아 각 국가의 이해관계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중국의 부상으로부터 시작하여, 러시아의 극동지역, 한반도와 몽골, 그리고 일본까지 여기에 앞으로의 중국의 책략과 미국의 책략을 덧붙이면서, 이 상황에서 남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결론은 남북한의 경제가 균형성장하는 것, 혹은 남북의 경제협력과 공동 번영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담보하고, 지역 협력도 올바르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길임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한반도가 역동적인 동북아시아에서 ‘여의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정치적 화해와 경제공동체 구축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 시절의 남북관계의 악화와 겨우 숨통만 붙어있는 개성공단의 현실은 이러한 동북아시아의 역동성에 정확히 역행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의 박근혜 정부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고 있는 이 구조는 미국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며, 이들의 궁극적인 혹은 최선의 시나리오인 한반도 분단의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것이다.

현재 이러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일본이다.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으로 완전히 경사된 일본의 오늘날은 결국 자주적이지도, 평화지향적이지도,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에 기여하지도 못하며, 퇴행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미래를 예고한다고 한다.

제1부가 주로 현재의 동북아시아 지형에 대한 분석이라면, 제2부는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2011년 합의된 중국과 북한의 공동 경제특구 개발 즉, 일구양도(一區兩島) 구상 등에서 볼 수 있는 중국과 북한의 경제전략에 대한 설명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해석인 북한의 중국 ‘동북4성’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주고 있다. 역시 북한이 의욕적으로 추구했던 신의주 특구개발의 좌절은 북-중간의 협력이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치열한 국가 이익이라는 냉철한 논리가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을 통해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크게 3가지의 관계 즉, 당 대 당의 관계, 국가 대 국가의 관계, 그리고 지정학적인 접경지역의 관계로 보아야하며, 이 중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당 대 당의 관계’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복합적인 관계를 종합적으로 보아야하며, 동시에 오늘날의 기본적인 관계를 봐야만 북-중간의 기본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제2부는 이처럼 북-중관계를 기본적으로 살펴보면서, 오늘날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 그리고 동북공정에 대한 시론적 생각 등을 담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마지막 대담을 통해서 오늘날 북한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경제 개선 조치와 현상에 대해 검토한 대목이다. 사실, 제2부에서의 서술은 우리가 바라보는 북-중관계에 대한 일면적 분석에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 중심 내용으로 다가온다. 보수가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예를 들면, 북-중의 당 대 당 관계), 아니면 보수가 쳐놓은 울타리에 스스로가 갇혀있거나(예를 들면, 북한 경제의 중국 의존론, 일명 중국 역할론 vs 중국견제론: 중국 역할론은 대체로 보수의 입장이며, 중국 견제론은 진보의 입장이다) 하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북한이 중국의 기업에 토지 사용 50년 임대권을 주었을 때, 이를 우리는 북한 경제의 중국 종속화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우리 기업이 중국으로부터 토지 50년 임대권을 얻는다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예를 통해 우리가 북한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북-중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지극히 남한 중심적이거나 북한에 대한 우월적 시각이거나 주관적 희망(흔히 말하는 wishful thinking)에 사로잡힌 시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지금도 우리는 북-중 관계를 한번도 대등한 관계로 인식한 적이 없다. 물론 이것은 국력의 대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대등함이다.

이 책은 대체로 2012-13년까지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북-중간의 경제협력에서도 마치 금방 진행될 것 같았던 나진-선봉(라선시), 황금평, 위화도에 대한 공동 개발과 관리가 아직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오히려 최근에는 북한과 러시아 간의 경제협력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중국을 제치고 러시아가 북한과의 협력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변화를 주도하는 형국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국제관계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는 당연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지금’의 상황까지는 담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이 주장하는 동북아의 기본 틀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중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과 일본, 여기에 한반도가 놓여있고, 이들이 만들어 가는 구조적 관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동북아 정세인식의 기본틀과 사고의 전환

우리는 한반도 특히 북한과 관련된 현상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극히 민감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러한 민감함은 대체로 주관적 희망이 투영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북한과 중국의 관계 소원–북한 경제의 어려움–북한의 고립화 심화–북한의 도발적 행동 혹은 양보’ 등과 같은 우리 자체의 시나리오를 그리거나 혹은 ‘북-중관계의 소원–북한의 위기–중국의 대북한 압박 강화(한중 관계 강화를 통해)-북한의 변화’ 등을 상정한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시나리오는 한반도 실현된 적도 없지만, 북한과 중국의 생각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오히려 우리의 외교적 고립이나 역량 약화만을 초래했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한미동맹 우선, 대북 강경책 등이 한중관계의 약화를 초래했고, 남북관계를 망가뜨렸으며, 결국 한반도에서의 우리의 발언권을 약화시켰던 것을 기억하면 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익숙한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 시야를 동북아시아로 넓혀 한반도를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시기적으로 ‘지금 이 시간’까지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구조와 관점에서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70여 년간 대륙과 해양을 넘나들며 한반도의 위치를 사고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서는 익숙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반도에 갇힌 사고이거나 아니면 미국의 시각(혹은 서구의 시각)으로 한반도를 바라봐 왔다. 이제는 이러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또한, 한반도만의 국가주의적(혹은 편협한 민족주의적) 사고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세계를 시야에 넣고, 동북아시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을 고민하는 지식인의 책무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며, 특별한 이론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동북아시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 문제를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저자 자신의 남북 화해와 협력, 평화와 지역공동체의 발전이라는 바람이 담겨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동북아시아를 시야에 넣고 한반도를 그려보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그리고 남북의 화해를 바라는 일반 독자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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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공격에 궤멸된 미육군 극동공군과 미해군 2개 함대

 
 
한호석의 진보담론 <150>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5/02/23 [11:24]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사진 1> 필리핀 바탄반도에 고립되어 혹심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미국-필리핀연합군 76,000명은 1942년 4월 9일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미국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친 뒤로 마지막 지탱점인 커리지도어 지하기지에 남아서 승산 없는 전투를 지휘하던 미국-필리핀연합군 사령관 조너던 웨인롸이트도 1942년 5월 6일 휘하병력 13,000명과 함께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필리핀에 주둔하던 미군군은 '세계 최강'이 아니라 오합지졸이었다.     © 자주민보

 

 

오합지졸로 전락한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

 

미국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스런 역사 가운데는 1941년 12월부터 1942년 5월까지 필리핀과 하와이에서 일본과 격돌하며 겪었던 패전경험도 있다. <사진 1> 당시 일본군은 필리핀과 하와이를 선제공격하여 그 두 지역에 주둔하던 미국군을 거의 궤멸시켰다. 당시 일본은 선제공격으로 대승을 거두었으나, 군사전략적 한계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미국으로부터 반격을 받고 결국 패망하였다. 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지속된 태평양전쟁은 미국의 반격을 받은 일본이 3년 9개월 만에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격돌한 미국과 일본은 명실상부한 제국주의국가들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본만 제국주의국가였다고 생각하고, 당시 미국은 제국주의국가가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오다. 명백하게도, 태평양전쟁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영토확장을 위한 무력침공을 노리던 두 제국주의국가들이 충돌한 식민지쟁탈전이었다. 태평양전쟁의 배경과 원인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조선을 침공하여 갑오농민전쟁(1894년)과 항일의병전쟁(1895-1909)을 살육무력으로 진압하였고, 1910년에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하였으며, 조선을 발판으로 삼고 아시아대륙을 침략할 기회를 노렸다. 그에 뒤질세라 미국도 1898년 하와이왕국을 병합하였고, 필리핀-미국전쟁(1899-1902)이 막판에 들어선 1900년에는 서둘러 필리핀을 식민지로 강점한 뒤에, 필리핀을 발판으로 삼고 아시아대륙을 침략할 기회를 노렸다. 당시 미국이 식민지로 강점한 필리핀에 주둔하면서 중국침공을 노린 침략선견대의 역할을 수행한 무력이 바로 미해군 아시아함대(Asiatic Fleet)다.


1899년부터 1900년까지 기간에 ‘중국문호개방(Open Door in China)’이라는 미국판 아시아침략정책의 설계자는 제37대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 1838-1905)였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일본판 아시아침략정책의 설계자는 제34대 내각총리대신 고모에 후미마로(近衛文麿, 1891-1945)였다.   
1905년 7월 27일 일본 도쿄에 나타난 미국 전쟁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 1857-1930)와 일본 내각총리대신 가츠라 다로(桂 太郞, 1848-1913)가 합의한 밀약에서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강점하고,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하기로 이미 합의한 바 있었으나, 미국의 아시아침략정책과 일본의 아시아침략정책은 중국을 누가 강점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중국강점문제를 놓고 두 제국주의국가의 상호대립이 차츰 격화되는 가운데,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한 뒤 북진을 계속하여 1934년에 만주국을 세우고 1937년에는 중국을 침공하였다. 미국이 눈독을 드린 중국을 일본이 먼저 침공하자 미일관계는 적대적으로 돌변하였다. 미국은 강력한 경제제재와 외교고립의 고삐를 틀어쥐고 일본을 압박하였다.


일본의 숨통을 조이려는 미국의 압박공세는 석유수출중단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은 석유수요량의 80%를 미국에서 수입하였으니, 미국의 석유수출중단이 유발한 일본의 유류난은 일본의 산업가동률과 전쟁수행력을 급속히 저하시켰을 뿐 아니라, 차츰 일본의 국가적 생존마저 위협할 지경이었다. 그런 생사존망의 갈림길에서 일본의 선택은 동남아시아 유전지대를 강점하여 석유자원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동남아시아 유전지대를 강점한다고 해도, 미해군 아시아함대와 태평양함대가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오가는 해상수송로를 차단해버리는 경우 동남아시아에서 약탈한 석유를 수송할 방도가 없었다. 동남아시아 유전지대를 강점하려던 일본은 미해군 아시아함대와 태평양함대부터 무력화시켜야 하였다. 당시 일본은 필리핀에 주둔하는 미해군 아시아함대와 하와이에 주둔하는 미해군 태평양함대를 힘껏 밀어붙이면 그 두 함대가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로 퇴각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오가는 해상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한편, 북태평양의 해양패권까지 장악하게 되리라고 타산하고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그로써 태평양전쟁은 불가피해졌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겉으로는 압박공세로 일본에게 호령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일본과 막후협상을 벌여 전쟁을 피해보려고 하였다.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자국의 오래된 외교문서를 인용한 <아사히신붕> 2013년 3월 7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군이 필리핀과 하와이를 동시에 공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인 1941년 12월 7일(일본 현지 날짜) 정오에 일왕에게 보내는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미국 대통령의 친서가 도쿄중앙전신국으로 타전되었는데, 그 친서에는 전쟁을 피하자는 제안이 담겼다고 한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41년 당시 미국은 공군을 별도의 군종으로 창설하지 못했고, 육군 산하에 공군부대를 두었다. 미육군 극동공군(Far East Air Force) 산하에는 제5공군, 제7공군, 제13공군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제5공군과 제13공군은 필리핀에 전진배치되었고, 제7공군은 하와이에 배치되었다.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는 필리핀에 주둔하는 미육군 극동공군 주력부대였다. 1941년 12월 8일 오후 12시 40분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96식 육상공격기’ 27대로 편성된 폭격편대가 당시 일본의 점령 하에 있던 대만에서 이륙하였다. 그 폭격편대는 필리핀 루손섬(Luzon Island)에 있는 미육군 극동공군 클락비행장(Clark Airfield)을 기습폭격으로 파괴하였고, 거의 동시에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1식 육상공격기’ 54대로 편성된 폭격편대의 공습이 필리핀 아이바비행장(Iba Airfield)을 강타했다. 잠시 후,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1식 육상공격기’ 26대로 편성된 폭격편대가 2차 폭격으로 클락비행장을 또 다시 파괴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공습에 사용된 폭격기는 전범기업 미쯔비시(三菱)가 생산한 두 종류의 프로펠라형 단엽기였다. ‘96식 육상공격기’는 최고비행속도가 시속 375km이고, 항속거리는 4,400km이며, 폭탄 800kg을 실었다. ‘1식 육상공격기’는 최고비행속도가 시속 428km이고, 항속거리는 2,852km이며, 폭탄 800kg을 실었다.


1941년 12월 8일 오후 약 45분 동안 계속된 일본해군항공대 폭격편대의 두 차례 기습폭격을 받은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은 전투기와 폭격기 절반을 잃었고, 그 이후 이틀 동안 계속된 일본해군항공대의 추가폭격으로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기습폭격 개시일로부터 사흘째 되던 12월 11일 미육군 극동공군은 필리핀 방어를 포기하였고, 간신히 살아남은 프로펠라형 중폭격기 B-17 14대를 챙겨 오스트레일리아로 황급히 달아났다.


일본해군항공대가 클락비행장과 아이바비행장을 맹폭하던 시각, 일본육군 제14군 보병부대는 루손섬에서 북쪽으로 190km 떨어진 바탄섬(Batan Island)에 상륙하였다. 필리핀에서 벌어진 미일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선제공격을 받고 정신을 잃은 미국에게는 연속퇴각과 집단투항의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커리지도어(Corregidor)지하기지로 피신했던 당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1942년 3월 12일 자기 아내를 비롯한 측근 몇 사람을 어뢰정 4척에 태우고 탈출하여 필리핀 남쪽 민다나오(Mindanao)로 줄행랑을 쳤고, 거기서 폭격기 B-17로 갈아타고 4,000km나 떨어진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쳤다. 극동군 총사령관이 저 혼자 살겠다고 다른 나라로 멀리 도망쳐버렸으니, 그 휘하의 군대가 집단투항으로 궤멸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필리핀 바탄반도(Bataan Peninsula)에 고립되어 혹심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미국-필리핀연합군 76,000명은 1942년 4월 9일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맥아더가 도망친 뒤로 마지막 지탱점인 커리지도어 지하기지에 남아서 승산 없는 전투를 지휘하던 미국-필리핀연합군 사령관 조너던 웨인롸이트(Jonathan M. Wainwright)는 1942년 5월 6일 휘하 병력 13,000명과 함께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였다. 그 날 일본군에게 사로잡힌 웨인롸이트는 필리핀, 대만, 만주의 포로수용소들로 끌려다니다가 만주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8월 16일 소련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필리핀 주둔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이 궤멸되는 바람에 항공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필리핀 주둔 미해군 아시아함대의 운명도 처참하였다. 미해군 아시아함대는 개전 나흘 뒤인 1941년 12월 12일 인도네시아 자바(Java)로 황급히 퇴각하였는데,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한 일본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당시 미해군 아시아함대 소속 전투함선들 가운데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격침되거나 파손된 전투함선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미해군 최초의 항공모함  랭글리호(USS Langley),  중순양함 휴스턴호(USS Houston), 구축함들인 엣설호(USS Edsall), 포프호(USS Pope), 피어리호(USS Peary), 필스베리호(USS Pillsbury), 포함들인 애쉬빌호(USS Asheville)와 오하우호(USS Oahu), 군수보급함 페코스호(USS Pecos)가 격침되었다. 구축함들인 스투어트호(USS Stewart)와 패럿호(USS Parrott), 잠수함모함 캐노퍼스호(USS Canopus)는 대파되었다. 치욕스러운 참패를 당한 미해군 아시아함대는 1942년 2월에 결국 해산되었다. 

 

▲ <사진 2> 이 사진은 1941년 5월 8일 필리핀 주둔 미국군이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커리지도어 지하기지가 함락되어 일본군에게 집단투항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필리핀에서 벌어진 5개월 동안의 미일전쟁에서 미국은 전사자 25,000명, 부상자 21,000명, 포로 100,000명을 내고 패퇴하였다.     © 자주민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벌어진 150일 동안의 격전에서 미국군 전사자는 25,000명, 부상자는 21,000명, 포로는 100,000명이었고, 일본군 전사자는 9,000명, 부상자는 13,200명, 실종자는 500명이었다. 150일 동안의 전투에서 미국군이 100,000명이나 포로로 붙잡힌 것은 그들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 오합지졸이었음을 말해준다. <사진 2>


미국군과 일본군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벌인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주목하는 것은,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의 무력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싸운 일본군보다 훨씬 더 우세했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대패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확인하는 것은, 현대전의 승패가 우세한 무력보다 선제공격 성공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 <사진 3> 1941년 12월 7일 미국 하와이 힉컴공군기지에 주기된 미육군 제7극동공군 소속 전투기들이 일본해군항공대 폭격편대의 선제공격을 받고 파괴된 모습이다. 하와이에 주둔하던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는 선제공격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 자주민보

 

 

선제공격에 궤멸된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0분 일본해군 항공모함 6척에서 일제히 이륙한 쌍발함상폭격기 189대가 미국 하와이를 동시다발기습공격으로 파괴하였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쌍발함상폭격기 161대의 2차 공습이 하와이를 또 다시 강타했다. 


태평양전쟁에 등장한 일본의 폭격기는 항공모함에 이착륙하는 함상폭격기와 육상비행장에 이착륙하는 육상공격기로 대별되는데, 그 종류는 12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빠른 폭격기는 최고속도 시속 660km로 비행하는, 태평양전쟁 후반부에 자폭공격에 내몰린 ‘영식 함상전투기’였고, 가장 먼 거리를 날아가는 폭격기는 항속거리 5,370km를 비행하는 ‘15식 폭격기’였고, 가장 많은 폭탄을 실은 폭격기는 폭탄 2,900kg을 적재한 ‘4식 폭격기’였다.


일본의 육상공격기는 중국침공에 동원되었고, 일본의 함상폭격기는 필리핀-하와이침공에 동원되었다. 일본이 필리핀-하와이침공에 동원한 함상폭격기에는 항공어뢰(areal torpedo)가 1발씩 실렸다.


일본산 ‘93식 항공어뢰’는 미국산 어뢰 ‘마크(Mark) 14’보다 성능이 훨씬 더 우세하였다. ‘마크 14’의 최장사거리는 7km밖에 되지 않았는데, ‘93식 항공어뢰’의 최장사거리는 36km나 되었고, 폭약도 ‘마크 14’보다 두 배나 더 많이 내장되었다. 함상폭격기가 타격목표 2km 전방에서 투하한 항공어뢰는 해수면 위 7m의 저고도까지 내려가 타격목표를 향해 돌진하였다. 


1941년 12월 7일에 2시간 20분 동안 계속된 일본해군항공대의 하와이 선제공습으로 진주항 해군기지(Pearl Harbor Naval Base), 캐너해군항공기지(Kaneohe Naval Air Station), 윌러공군기지(Wheeler Air Force Base), 이와공군기지(Ewa Air Force Base)가 파괴되었다. 당시 미육군 제7극동공군의 각종 전투기 402대 가운데 155대가 이륙하지도 못하고 공습을 받았다. 402대 가운데 188대는 지상에서 완파되거나 공중에서 격추되었고, 159대는 지상에서 반파되거나 공중에서 격상되었다. 그에 비해, 선제공습에 동원된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함재기 414대 가운데 29대가 격추되었는데 첫 번째 공습에서 9대, 두 번째 공습에서 20대를 잃었을 뿐이다. 지상포화를 맞고 격상된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함재기는 74대였다. <사진 3>


미육군 제7공군은 일본해군항공대의 선제공습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현대전의 승패가 무력우세보다 선제공격 성공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미국 하와이의 진주항 해군기지에 주둔하는 미해군 태평양함대에 대한 일본군의 선제공격은 기습폭격과 어뢰공격을 배합한 공중-수중동시공격이었다. 당시 일본해군 지휘부는 ‘어뢰특공대’의 어뢰공격으로 미해군 태평양함대를 타격하기로 결정하고, 작전명을 ‘하와이작전’으로 정했다.


그런데 진주항 해군기지의 수심이 너무 얕아 일본해군의 3,500t급 잠수함은 그 해군기지 안으로 수중침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해군 지휘부는 46t급으로 특수제작한 초소형 2인승 침투잠수정을 3,500t급 잠수함에 싣고 하와이 인근해역으로 가서 내려놓으면, 초소형 잠수정이 진주항 해군기지 안으로 수중침투하여 전함들을 어뢰로 파괴하는 어뢰특공전법을 생각해냈다. ‘하와이작전’에 동원된 일본해군 잠수함대는 2인승 침투잠수정을 각각 1척씩 실은 3,500t급 잠수함 5척으로 편성되었다.

 

▲ <사진 4> 이 사진은 진주항 해군기지 앞바다 수심 365m 해저에서 2002년에 발견된 일본해군 잠수정 잔해를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에 나타난 2인승 침투잠수정 잔해는 1941년 12월 7일 진주항해군기지를 기습하기 위해 진주항 앞바다에 들어가 수중매복하고 있었던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침투잠수정 5척 가운데 하나다. 이 침투잠수정은 일본해군항공대 소속 함상폭격기들이 진주항해군기지를 공습하기 직전 진주항 앞바다를 순찰하던 미해군 태평양함대 소속 소해정에게 해수면 위로 내놓은 전망탑 상층부가 포착되는 바람에 매복위치가 노출되어 미해군 구축함 워드호의 폭뢰공격으로 격침되었다.     © 자주민보


1941년 11월 19일 새벽 2시 15분 ‘어뢰특공대’를 실은 일본해군 잠수함 5척이 일본 히로시마(廣島)현 쿠레(吳市)항에서 비밀리에 출항하여 하와이로 향했다. 12월 7일 진주항 해군기지에서 약 10~20km 떨어진 바다밑으로 접근한 그 잠수함들에서 침투잠수정 5척이 일제히 분리배출되었다. 그 침투잠수정들에는 어뢰가 2발씩 실렸다. <사진 4>


태평양전쟁에 등장한 일본의 ‘95식 어뢰’는 사거리가 12km이고, 무게 405kg의 고폭탄두를 장착하였고, 최저속도 시속 83km, 최고속도 시속 94km로 타격목표를 향해 돌진하였는데, 그런 어뢰를 척당 2발씩 탑재한 잠수정 5척은 공중-수중동시공격시각을 대기하며 수중매복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어뢰공격이 개시되었을 때, 작전능력이 뒤떨어진 침투잠수정들은 공격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일본해군 ‘어뢰특공대’ 소속 침투잠수정 5척 가운데 4척은 격침되었고, 1척은 좌초되는 바람에 미해군에게 나포되었다. 5척 침투잠수정 가운데 단 1척만 어뢰 2발을 쏘고 격침되었는데, 1발은 31,000t급 전함 애리조나호(USS Arizona)에 명중하였고, 다른 1발은 33,000t급 전함 웨스트버지니아호(USS West Virginia)에 명중하였다. 
어뢰 1발과 폭탄 4발을 맞은 애리조나호는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였고, 어뢰 1발, 폭탄 2발, 항공어뢰 6발을 맞은 웨스트버지니아호도 침몰하였다.  

 

▲ <사진 5>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항 해군기지에 정박해 있던 미해군 태평양함대 소속 31,000t급 전함 애리조나호는 일본해군항공대 폭격편대가 투하한 폭탄 4발과 일본해군 침투잠수정이 발사한 어뢰 1발을 맞고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였다. 그날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은 하와이 주둔 미국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 자주민보


그것만이 아니었다. 33,000t급 전함 테네씨호(USS Tennessee)가 파손되었고, 32,000t급 전함 캘리포니아호(USS California)가 침몰하였고, 32,000t급 전함 매릴랜드호(USS Maryland)와 31,000t급 전함 펜실배니아호(USS Pennsylvania)가 각각 파손되었고, 27,000t급 전함 오클라호마호(USS Oklahoma)는 전복되었고, 27,000t급 전함 네바다호(USS Nevada)와 23,000t급 퇴역전함 유타호(USS Utah)는 각각 좌초되었다. 경순양함들인 헬레나호(USS Helena)와 랠레이호(USS Raleigh), 구축함들인 쇼우호(USS Shaw)와 캐씬호(USS Cassin)가 각각 파손되었고, 구축함 다운스호(USS Downes)는 곁에 있던 피격 구축함들에서 불이 옮겨 붙었다. 기뢰부설함 오글라라호(USS Oglala)는 좌초되었고, 정비함 비스틀호(USS Vestal)는 불탔고, 항공지원함 커티쓰호(USS Curtiss)는 파손되었다. 그 전투에서 미국은 사망자가 2,403명, 부상자가 1,178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사진 5>


미국군과 일본군이 하와이에서 벌인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주목하는 것은,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의 무력이 하와이를 공격한 일본군보다 훨씬 더 우세했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대패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확인하는 것은, 현대전의 승패가 우세한 무력보다 선제공격 성공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 <사진 6> 1942년 9월 15일 미해군 19,000t급 최신형 항공모함 와스프호가 일본해군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 6발을 맞고 화염에 휩싸여 침몰하고 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항공모함도 잠수함 어뢰공격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 자주민보

 

 

전반부에 대승을 거둔 일본은 후반부에 왜 항복하였을까?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필리핀과 하와이를 강타한 일본군의 동시선제공격은 ‘세계 최강’이라던 미국군에게 치욕스러운 참패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후반부에 가서 일본군은 미국군의 거센 반격을 받고 패배를 거듭하다가 결국 항복의 백기를 들었다.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대승을 거두었던 일본군은 왜 후반부에 전세가 역전당하여 항복하였을까? 일본군의 패인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군의 패인은 전략적 실수에 있었다.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일본군은 필리핀에 주둔한 미육군 제5, 제13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 하와이에 주둔한 미육군 제7극동공군과 미해군 태평양함대를 거의 궤멸시켰으나, 미해군 함대의 주력을 제거하지 않고 철수해버린 실수를 저질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미해군 함대의 주력은 항공모함이다. 미해군 항공모함을 격침시켜야 태평양전쟁에서 완승할 수 있었으므로 일본의 대미공격은 무엇보다도 항모공격에 집중되었어야 하였다. 1941년 12월 당시 하와이에 배치된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모함들은 25,000t급 엔터프라이즈호(USS Enterprise), 36,000t급들인 렉싱턴호(USS Lexington)와 쌔라토가호(USS Saratoga) 3척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하기 이틀 전에 항공모함 렉싱턴호는 그 해군기지에서 출항하여 서쪽으로 항해하였는데, 일본군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할 때, 그 항공모함은 하와이에서 2,100km 떨어진 미드웨이섬(Midway Island)에서 동남쪽으로 930km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 일본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할 때, 항공모함 쌔라토가호는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의 최남단 쌘디에고(San Diego) 해군기지에 입항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이 진주항 해군기지를 공격할 때, 하와이 인근에 남아있었던 항공모함은 엔터프라이즈호밖에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일본해군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추적하여 공격해야 하였으나, 그들은 항모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일본해군이 항모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한 것은, 태평양전쟁 전반부에 패하였던 미해군이 전투력을 차츰 복원하여 반격에 나설 수 있게 허용한 전략적 실수였다. <사진 6>


둘째, 일본군의 패인은 미국군이 하와이에 건설한 대형조선소, 선박수리시설, 유류저장시설을 파괴하지 않고 철수한 것에 있었다. 당시 ‘하와이작전’에 참가한 일본해군항공대 지휘관들은 3차 공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기했는데도, 일본해군제독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1887-1944)는 3차 공습을 명령하지 않았다. 그들이 대형조선소, 선박수리시설, 유류저장시설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미해군이 나중에 하와이를 거점으로 전투력을 차츰 복원하여 반격에 나설 수 있게 허용한 전략적인 실수였다.


셋째, 일본군의 패인은 미국 본토를 공격할 능력이 없었다는 데 있다. 필리핀과 하와이는 미육군 극동공군과 미해군 아시아함대 및 태평양함대의 전략거점들이지만, 미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전진배치거점들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완승하려면, 전진배치거점들은 물론 미국 본토까지 공격해야 하였다. 만일 당시에 일본군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장거리타격력을 갖고 있었다면, 전세는 일본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에게는 미국 본토를 공격할 타격수단이 전혀 없었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사용한 가장 위력적인 타격수단은 폭탄과 어뢰였고, 그것의 운반수단은 항속거리가 짧아 미국 본토의 심장부까지 날아가지 못하는 쌍발폭격기였다. 당시 일본해군의 잠수함은 미국 본토 해안까지 접근할 수는 있었으나, 수중에서 어뢰를 발사하는 대함공격력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폭탄과 어뢰는 미국 본토의 심장부를 공격할 타격수단이 아니었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력을 갖지 못한 일본군의 군사전략적 한계가 미국의 반격과 일본의 패망을 불러온 결정적 요인으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이 보유한 최강의 무기는 노래다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미국의 팔과 다리만 공격하고 급소는 공격하지 못한 채 미국의 반격을 받고 패망하였다. 태평양전쟁이 그런 식으로 끝난 때로부터 어느덧 70년 세월이 흐른 오늘, 미국은 자기의 명줄을 쥐고 흔드는 새로운 강적을 만났다. 그 강적은 미국에게 이미 최후결전을 선포해놓고 총공격명령을 기다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조선이 미국에게 선포한 최후결전은 70여 년 전 일본군의 원시적인 폭탄-어뢰공격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최첨단 공중-수중동시공격으로 전개될 것이다. 조선인민군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은 조선이 선포한 최후결전에서 최첨단 공중-수중동시공격이 전개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을 과대망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선인민군은 미국군에게 참패를 안겨주기에 충분한 선제공격력을 갖추었다. 조선이 말하는 선제공격력이란 전술핵탄과 정밀타격수단의 결합을 뜻한다. <로동신문> 2013년 5월 21일 보도에서 밝혀진 것처럼, 조선은 핵탄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정밀화를 완성하였다. 공격징후를 노출하지 않는 조선의 지하발사기지들 안에서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정밀화된 전술핵탄이 정밀타격수단과 결합되어 24시간 격발대기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전술핵탄미사일들에는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을 뚫고 들어가는 각개조준다핵탄두(Multiple Independently Targetable Nuclear Warheads)가 장착되었다.


조선이 공격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군사전략거점들을 동시기습하기에 충분한 선제공격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지난 2월 16일 <자주민보>에 실린 나의 글 ‘조선의 대미핵공격력과 미국의 대북전쟁기획자들’에서 상세히 논한 바 있다.
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9384


물론 미국도 조선을 선제공격하기 위한 전쟁계획을 작성해놓고, 그 전쟁계획에 의거하여 다양한 실전연습을 실시해왔다. 하지만 미국이 언제가도 해결하지 못할 난제는 그들이 조선을 선제공격하기 전에 조선이 그들의 공격징후를 먼저 포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하군사기지들 안에서 최후결전의 총공격명령을 대기하는 조선인민군은 공격징후를 노출하지 않은 동시다발 초탄발사로 교전상대의 급소를 기습타격할 빨찌산식 핵전법을 연습하는데, 그런 그들을 상대할 미국군은 항모타격단(CSG) 같은 방대한 무력을 시차별로 동원하는 정규군식 핵전법밖에 모른다. 정규군식 핵전법은 공격징후를 노출할 수밖에 없으며, 현대전에서 공격징후노출은 선제공격을 자초하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된다.

   
둘째, 조선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군사전략거점들을 파괴할 선제공격력만 보유한 게 아니라, 조선의 대미선제공격에 뒤따라올 미국의 보복핵공격을 억제하기에 충분한 전략핵무력도 보유하였다. 미국의 심장부를 파괴할 대미핵공격력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밖에도 더 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3종의 탄도미사일과 3종의 발사장비가 바로 그러한 전략핵무력의 실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은 수직갱발사대에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로이동식 8축16륜 자행발사대(TEL)에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 4,000t급 공격잠수함에 탑재한 수중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비롯한 충분한 핵억지력을 보유한 것이다.


조선이 위와 같은 전략핵무력을 보유함으로써 대미핵공격력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대해 미국은 자기들이 파악한 비밀정보를 통해 진작부터 알았으면서도, 그와 관련된 민감한 군사정보를 외부에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대북군사정보은폐는 조선의 핵무력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소평가를 유발하였다.


그런데 아시아태평양지역 군사전략거점들에 대한 조선의 선제공격을 받은 미국이 만일 상황을 오판하여 조선에게 보복핵공격을 감행하는 경우, 조선은 위에 열거한 강력한 전략핵탄들을 발사하여 미국 본토를 그야말로 ‘불바다’로 만들 것으로 보인다. 이미 조선은 자기 영토에 불꽃 한 점이라도 떨어지면 미국 본토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한 바 있는데, 그것을 허풍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선의 핵무력과 핵사용의지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소평가가 유발한 착각이다.


조선이 미국의 보복핵공격을 억제하기에 충분한 핵공격력을 갖추었으므로,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산재한 자기의 군사전략거점들이 조선인민군의 빨찌산식 핵전법으로 파괴되어도 발만 동동 구를 뿐 감히 반격에 나서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것이 조선의 최후결전이 초단기속결전으로 될 것이라는 나의 거듭되는 주장의 논거다.  


셋째, 이전에 각종 자료를 분석하여 쓴 나의 글들에서 여러 차례 지적한 것처럼, 지금 조선은 전쟁의 격렬화, 장기화를 피하고 매우 짧은 시간에 ‘순간충격전법’으로 전쟁을 끝내면서 전쟁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해 초단기속결전의 준비와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다. 조선에서는 이것을 ‘싸움준비 완성’이라 하는데, 조선인민군은 이미 자기의 싸움준비를 완성하였다. 지난해부터 그들은 “싸움준비를 더욱 완성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 <사진 7> 조선인민군의 특징은 '노래하는 군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조국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들의 정신세계가 '최후결전의 노래' 속에 응축되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인민군의 '최후결전'에 등장할 최강의 무기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될 것이다. 이 사진은 2014년 3월 11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관람하는 가운데 진행된 조선인민군 제1차 예술선전대경연의 한 장면이다.     © 자주민보


넷째, 조선인민군의 특징은 ‘노래하는 군대’라고 할 수 있다. <사진 7> 물론 다른 나라 군대들도 군가나 유행가를 부르지만, 다른 나라들에서 군대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일상적인 군사복무생활이 아니라 특별한 계기에만 주어진다. 그런데 조선에서 나온 관련자료들을 보면, 조선인민군 각급 단위들에서는 군인예술선전대의 순회노래공연과 병사들의 화면반주음악 노래부르기가 일상화되었을 뿐 아니라, 군인들, 군인가족들, 후방가족들이 일상생활에서 ‘일심단결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불타는 포연 속에서도 ‘화선공연’을 열고 ‘승리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심지어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순간에도 ‘신념의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에서 노래는 음악애호활동의 일부가 아니라 전군, 전민의 사상정신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되었다.


다른 나라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조선은 그들이 말하는 최후결전에서 자기들이 부를 노래가 핵탄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정신적 폭발력을 분출시킬 것으로 믿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조국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들의 정신세계가 ‘최후결전의 노래’ 속에 응축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무기의 대결 이전에 사상정신의 대결이라고 보는 것이 조선에서 말하는 독특한 전쟁관이며, 사상정신의 대결에서 이겨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조선에서 말하는 전승의 비결이다. 조선인민군의 ‘최후결전’에 등장할 최강의 무기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세계 최강’의 자아도취에 빠진 미국의 극동공군, 아시아함대, 태평양함대는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연속퇴각과 집단투항으로 궤멸되었지만, 오늘날 아시아태평양지역 곳곳에 배치된 미국군이 조선인민군의 상상을 초월한 선제공격을 받는 경우 연속퇴각과 집단투항이 아니라 무조건 항복으로 내몰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미국은 선제공격에 궤멸된 치욕스런 과거경험을 망각하고 오늘도 여전히 ‘세계 최강’의 자아도취에 빠져있다. 그런 까닭에 미국은 자기들이 북침전쟁연습을 강행하면 조선의 최후결전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후결전을 선포한 조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세계 위에 군림하는 아메리카제국은 그런 착각 위에 세워진 거대한 모래집으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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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이곳 학교는 완전 달랐다

산만한 학생에게 "약 먹이세요"
서울과 이곳 학교는 완전 달랐다

[창간 15주년 기획 - 행복한 학교③]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

15.02.22 21:31l최종 업데이트 15.02.23 08:12l

 

 

<오마이뉴스>는 올해 창간 1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2000년 2월 22일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창간한 뒤, 보수일변도의 언론지형에서 '열린 진보'의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습니다. 여기 <오마이뉴스>와 나이가 같은 닮은꼴이 있습니다. 바로 혁신학교입니다. 2000년 남한산초등학교에서 시작된 학교 개혁 운동은 2009년 혁신학교이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된 뒤, 전국으로 확산됐습니다. 혁신학교는 무너진 공교육을 되살리는 행복한 학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을 행복한 학교에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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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열린 제68회 졸업식장에 졸업생이 선생님에게 쓴 감사의 편지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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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열린 제68회 졸업식장에 졸업생이 쓴 감사의 편지가 걸려있다. 글을 쓴 학생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 학생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주신 선생님에게 감사하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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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도 많이 치고 장난도 많이 치고 양심도 없었지만,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난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 졸업식장. 이곳에 졸업생 52명의 편지가 내걸렸다. 그 중에서 김정민(13, 가명)군이 쓴 편지가 눈에 띄었다. 정민군의 어머니 최미진(42)씨는 "이 편지에 저도 감동을 받았다"라면서 "아이가 조현초에서 보낸 시간은 인생의 큰 디딤돌이자 큰 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민군은 2학년 때인 2010년 서울에서 이곳으로 왔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 정민군의 서울 학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수업시간에 앉아 있지 못하고 산만한 행동을 보이자, 교사들은 정민군에게 고함을 치거나 무시로 일관했다. 최미진씨는 "학교에서 매일 전화가 왔다"라면서 "선생님은 부모 책임이라며, 아이에게 약을 먹이라고 했다"라고 말했다. 

반면, 조현초 교사들은 정민군에게 약을 끊으라고 했다. 정민군은 "제가 산만한 행동을 하면, 선생님들은 수업을 멈추고 저에게 신경을 써주셨다"라고 말했다. 교사들은 주말에도 정민군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최미진씨는 "선생님들이 제 수고의 절반을 짊어졌다"라면서 "결국 아이는 약을 끊었고 자기 조절이 가능할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라고 전했다. 

담임인 김성환 교사는 "약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정민이는 더 많은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어 과잉행동을 한 것이다,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줬더니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최미진씨는 "다른 아이들도 서울에서는 아팠는데, 이곳에서 좋아졌다"라면서 "조현초야말로 진정한 혁신학교"라고 강조했다.

졸업생 입에서 나온 말, 행복·존중·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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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열린 제68회 졸업식에서 졸업하는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다가와 포옹하자, 선생님이 제자를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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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열린 제68회 졸업식에서 졸업하는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다가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포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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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열린 제68회 졸업식에서 선생님들이 졸업생 52명 학생을 일일이 안아주며 진학을 축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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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5학년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과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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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초 졸업식의 주인공은 졸업생이다. 졸업식장에는 졸업생들의 편지가 내걸렸다. 모든 졸업생들은 한 명씩 단상에 올라 졸업장과 상장을 받았다. 이때 담임교사는 졸업생의 학교생활과 꿈을 일일이 소개했다. 이후 모든 졸업생들은 마이크를 잡고 교사, 학부모,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송채린양은 "이 세상에 조현초보다 행복하고 참된 사람의 자세를 배울 수 있는 학교는 없다, 조현초 선생님은 제 인생 최고의 선생님이었다"라며 "이곳에서 느낀 행복은 제가 힘들 때 딛고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됐다"라고 흐느꼈다. 정유진양은 "선생님은 감사, 존중 등 여러 가지를 알려주셨고,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셨다"라고 전했다. 

졸업식에 참석한 김주식 양평군학교운영위원회 연합회장은 "모든 학생들이 꿈을 가지고 있는 모습에 상당히 놀랐다, 큰 희망을 느꼈다"라면서 "'누가 누가 잘하나'보다 모든 학생들이 함께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교육철학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배려를 배운 것 같다"라고 말했다. 

졸업식이 끝나자, 졸업생들은 차례로 단상 밑으로 내려왔다. 교사들이 한 줄로 서서 졸업생을 맞았다. 졸업생들은 교사들을 와락 껴안았다. 졸업생과 교사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봄방학을 맞는 다른 학년 교실도 '눈물바다'였다. 5학년 3반 교실 앞에서는 학생들이 담임인 최탁 교사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 최 교사의 손을 꼭 잡고 계단을 걸어내려온 김지은(12)양은 "6학년 올라가면 자주 못 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라고 말했다.  

학생수 3배 이상 늘어난 시골학교...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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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오마이뉴스> 기자를 향해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조현초등학교는 학생들이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고 더불어 나누는 삶의 자세,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가르치는 것을 교육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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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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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졸업식을 마친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 담임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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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조현초등학교에서 졸업식을 마친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 그동안 함께했던 친구들과 헤어지기 아쉬워하며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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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에는 새로운 교육을 찾는 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곳에는 세월·수입·정배초등학교 등 많은 혁신학교가 있다. 양평에는 폐교 위기의 작은 시골 학교를 살려보자는 교사들의 노력이 있었고, 현재는 혁신교육의 중심지가 됐다. 그중에서도 조현초는 가장 주목받는 학교다. 

2007년 98명이었던 이 학교의 학생수는 지난해 345명으로 늘었다. 최근 매년 20~60명의 전학생이 오고 있다. 시골 학교 학생수가 단기간에 3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교실이 부족해지자, 최영식 교장은 냉난방이 안 되는 간이 건물로 교장실을 옮겼다. 이 학교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7년 3월 이 학교에 부임한 박성만 교사는 충격을 받았다. 박 교사는 "이곳에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월말고사가 있었다, 또한 중학교 반 배치고사에서 이 학교 졸업생들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도록 교사들은 오후 9시까지 학생들을 공부시켰다, 학생들은 겨울방학 때도 나와 문제집을 풀었다"라고 말했다. 

2007년 9월 평교사 출신의 이중현 교장이 교장공모제를 통해 이 학교에 부임한 뒤, 변화가 시작됐다. 이 교장은 교사들에게 조현초를 농촌지역의 공교육 모델로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교사들과 머리를 맞댔다. 

이중현 교장과 교사들은 밤늦도록 회의를 이어가기 일쑤였다. 2008년 이중현 당시 교장의 요청에 평교사로 이 학교에 첫발을 내디딘 최영식 교장은 "'시골 학생들은 기가 많이 죽어있으니, 이 지역에 어울리고 아이들의 삶과 연결되는 교육과정을 만들어 배움의 열의를 불러일으켜보자'고 결정했고, 교육과정을 재구성했다"라고 전했다. 

양평에는 도시와 달리 사교육이나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 교사들은 수업 과정을 이들 학생들에게 맞추는 디딤돌 학습 등 아홉 가지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이후 기초 학력 미달 학생이 크게 줄었다. 최 교장은 "모든 학생들에게 잠재적인 재능을 발현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생태학습 등을 진행했더니, 학교에 활력이 돌았다"라고 밝혔다.

학생들의 자치 활동을 뜻하는 어울마당은 학교가 자랑하는 교육과정이다. 박성만 교사는 "학생들은 지난해 학급·학년·학교 어울마당에서 '수업시간에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말자'고 정했고, 그 후 이를 어기는 학생은 없었다"라면서 "교사가 개입하거나 통제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스스로 결정할 때 효과가 크다"라고 설명했다.

학교, 마을교육공동체의 중심에 서다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은 2009년 보궐선거에서 남한산초·조현초 등을 모델로 한 혁신학교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다. 그해 처음으로 지정된 혁신학교에 조현초가 포함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학부모가 학교 문을 두드렸다. 현재 학생의 다수는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다. 이는 적잖은 문제를 야기했다. 원주민과 이주민이 잘 어울리지 못한 것이다. 

박성만 교사는 "이주민이 늘자, 마을의 구심점이었던 학교가 마을과 따로 떨어진 섬이 됐다"라고 지적했다. 교사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마을공동체를 복원하기로 했다. 먼저 학생들이 벼농사, 양평시장 체험, 마을탐사 수업, 마을 어르신 인터뷰 등을 통해 마을과 더욱 가까워지도록 했다. 

교사들은 학부모들의 융합에 큰 신경을 썼다. 학부모 체육대회를 열었다. 이주민들의 시골 생활을 돕는 강좌를 열었다. 또한 이주민들은 학교가 임대한 논에 농사를 지었고, 이는 원주민들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들은 또한 자신의 재능을 살려, 학교가 파한 뒤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두레교육'에 나섰다. 조현초는 어느새 마을교육공동체의 중심에 섰다. 학부모들은 협동조합을 꾸려, 방과 후 수업 강사로 나설 예정이다.

조현초 구성원들에게 고민이 있다. 조현초에 자녀를 보내려는 이주민이 늘면서, 이곳 집값·전셋값이 치솟은 것이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원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밀려났다. 또한 학교 주변에 전원주택이 지어지면서, 숲이 파헤쳐졌다. 최탁 교사는 "다른 지역에도 혁신학교가 자리를 잡아, 이곳에 오지 않고도 혁신학교의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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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초등학교 주변에 신축한 단독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교사와 학부모, 주민들은 학교가 대외적으로 알려지자, 학교 주변에 이주민과 전원주택이 늘면서 집값이 치솟는 점을 걱정했다. 주택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원주민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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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창간 15주년 기획 : 행복한 학교]

[①-1 남한산초] "대학 안 가고 하고 싶은 일 하니 행복해요"
[①-2 남한산초] 무허가 사설 강습소, 혁신학교의 시작이었다 
[② 선사고] 졸업식장에 조폭이...학교가 '완전'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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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정권의 ‘실상’을 보고 대화하라


<칼럼>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 원장
전현준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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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23  08: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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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준(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 원장)


2015년 2월 현재 한반도 통일기상도는 매우 흐림이다. 이미 예견된 것이기는 하지만 마음이 우울하다. 그 이유는 우울한 전망이 틀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자연의 날씨는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인간의 날씨는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것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등장 이전부터 수많은 ‘맑은 날씨’를 예보하였다. 박근혜 후보와 정부를 지지한 사람이나 반대한 사람이나 모두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점점 절망으로 변하고 있다. ‘맑은 날씨’는 고사하고 먹구름이 일어나며 뇌성이 울리고 있다. 곧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질 기세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벼락’이다. ‘인간의 벼락’은 인간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인간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의 여하에 따라 벼락이 치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여기에서 왜 ‘인간벼락’이 박근혜 정부만의 책임이냐라는 반문이 일어날 수 있다. 옳다. 모든 것이 박근혜 정부만의 책임은 아니다.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등도 일면 책임이 있다. 북한핵 문제가 정말 사활적인 문제라면 관련 정상들이 모든 것을 작파하고 북한핵에 매달려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관련국들이 북핵 문제가 다급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핵문제를 이유로 북한과의 모든 대화를 끊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여기에서는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쥐어야 할 박근혜 정부가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판단 하에 김정은 정권의 실상을 규명해 보고 왜 박근혜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해보려 한다.

첫째, 박근혜 정부는 북한에 대해 ‘갑’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늘 남북관계의 비정상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북한을 혼내주고”, “남과 북의 갑을관계를 바로 잡았다”라고 자랑했다. 박 대통령도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논리가 그 증거이다. ‘끌려다니지 않았다’면 ‘끌고 다녀야’하지 않을까? 이제 이명박 전 대통령 말대로 ‘갑’이 되었으면 ‘갑’답게 ‘을’을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슬슬 피하면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갑다운’ 행동은 아니다.

그렇다고 ‘을’을 윽박지르는 것만이 ‘갑다운’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제사회로부터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처럼 비난받기 십상이다. 정상적인 ‘갑을 간’ 거래를 하라는 의미이다. 모든 협상은 ‘주고받기’라는 것은 상식이다. ‘밀고당기는’ 협상을 함에 있어서 ‘주는 것’을 패배로 여기고 끌려 다녔다고 인식하는 것은 협상의 기본을 모르는 것이다. 어차피 남북 문제도 협상에 의해 해결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준 만큼 받으면 될 일이다.

둘째, 김정은 정권의 변화 때문이다. 북한의 변화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그러나 적어도 김정은 등장 이후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김정일과는 다르게 개방적이고 주민들의 생활양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수령독재는 지속되고 있지만 최소한 ‘절차적 독재’를 수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군을 약화시키고 노동당에 의한 통치를 강화하고 있다. 이것은 김정일 때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지난 18일에도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김정은 등장 이후 세 번째로 열렸다. 김정은은 이 자리에서 정치사상 공세 강화, 유일적 영도체계 옹호고수, 세도.관료주의 및 부정부패행위 타파 등 3대 과제를 내세웠다. 부정부패 문제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강조한 것은 그만큼 관료부패가 심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시인할 것은 시인하자는 입장이다. 김정은도 관료부패를 청산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을 것임을 안 것이다. 김정은은 장성택을 ‘종파와 부패수괴’로 몰아 처형하여 주민들의 환심을 샀으나 아직도 부패가 만연해 있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이란 것을 간파한 것이다.

북한은 지난 1월 미국과의 싱가포르 접촉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해 (훈련은 인정하되) 훈련 강도를 약화시킬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의 ‘교시’없이 일개 대표가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정은 나름대로 큰 변화를 한 것이다. 북한은 자신이 남한에 비해 못산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김정은은 남한처럼 잘살기 위해 ‘포전제’를 개선하고 “잘살아 보세!”를 외치고 있다. 김정은은 이미 19개의 지방급 경제개발구를 만들고 외부투자를 원하고 있다.

한편으로 김정은 등장 이후 북한 주민들의 생활도 놀랍게 달라지고 있다.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고 부동산 중개업을 필두로 전당포, 계주 등 자본주의식 다양한 직업이 생기고 있다. 주민들의 의식은 이미 자본주의 초입에 들어서 있다. 박근혜 정부가 정말 북한을 변화시킬 생각이 있다면 이러한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김정은 정권은 점점 안정화되어 가고 있고 장기집권기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도 장기적인 포석과 전략하에 김정은 정권을 상대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일은 반드시 보수성향의 박근혜 정부가 해야 하고 시간은 금년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는 일부 탈북자가 전하는 북한의 허상이 아닌 실상을 보고 정책을 펴야 한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 원장) 
 
   
 
1953년생으로서 전남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북한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통일연구원에서 22년간 재직한 북한전문가이다. 
2006년 북한연구학회장 재직 시 북한연구의 총결산서인 ‘북한학총서’ 10권을 발간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 동안 통일부 자문위원, NSC자문위원, 민주평통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민화협, 경실련 등 시민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현재는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김정일 리더쉽 연구」, 「김정일 정권의 통치엘리트」, 「북한 체제의 내구력 평가」, 『북한이해의 길잡이』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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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공무원 47명이 말하는 ‘국정운영’

등록 : 2015.02.22 21:37수정 : 2015.02.2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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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월 1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새해 기자회견에서 “장관들과 독대 또는 대면보고 자리를 늘릴 의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배석한 국무위원들을 돌아보고 있다. 뒤쪽으로 김기춘 비서실장이 앉아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고위공무원 47명이 말하는 ‘국정운영’
“청와대 가면 부처 인사·정책 뒤집혀…이유는 몰라”
“지시만 있고 토론 없어, 뭐든지 ‘그분’ 말씀 따라야”

[박근혜 정부 2년 진단] ① 국정운영

 

 

 

 

<한겨레>는 박근혜 정부 출범 2년을 앞두고 정부 주요 부처 공무원 47명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평가해달라는 질문을 던졌다. 공직사회가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국정운영 방식에 가장 민감한 집단이라는 점을 고려해 이를 통해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을 평가해보자는 이유에서다. 대상은 주로 국장급 고위공무원이었지만 일부 과장급 공무원과 사정기관 간부들도 포함됐다.

 

편집자

 

 

 

<한겨레>가 박근혜 정부 출범 2년을 계기로 정부 주요 부처 고위 공무원 47명에게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평가하는 질문을 던져 22일 취합한 결과를 보면, 박근혜 정부가 공직사회를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박근혜 정부 들어 잦은 정책 혼선과 번복 등 공직사회가 갑자기 왜 이렇게 무능해졌는지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지난 2년 국정에서 무엇이 가장 큰 문제였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44명 중 15명이 ‘인사 실패’를 꼽았다. ‘소통과 조율 부족’이 12명으로 그다음이었고, 이어 ‘권위주의적 국정운영’과 ‘정책적 유연성 부족’이 각각 7명, ‘단기 성과 집착’ 3명 등의 차례였다. 그동안 민심과 일반 여론의 지적과 거의 차이가 없다. 공무원들의 답변 중에는 “생동감이나 활력이 사라졌다. 손을 놓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무기력과 위기감을 토로하는 경우가 특히 많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부각된 ‘관피아’ 논란에 대한 불만도 컸고, 정권의 인사 무능과 불통뿐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통치 행태를 꼬집는 구체적인 답변들도 이어졌다.

 

■ 과도한 인사 개입, 늑장 인사…“이해할 수 없는 인사, 예측 불가”

 

공무원들이 비판하는 인사상의 문제들은, 통상 언론이 자주 언급했던 ‘수첩 인사’나 ‘밀실 인사’ 등과는 다소 결이 달랐다. 주로 고위 공직자들이 답변을 했기 때문인지, 각 부처 인사에 대한 청와대의 과도한 간섭과 개입을 비판하는 이들(7명)이 많았다. 상습적인 늑장·지연 인사로 업무 공백을 호소한 이들(4명)도 있었고, 인사 방향이나 내용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는 지적(3명)도 나왔다.

 

전직 장관급 인사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인사 개입과 늑장 인사 사례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산하기관장 인사 때 청와대에서 온 명단은 대부분 충성하겠다는, ‘말이 안 되는’ 인사들뿐이었다. (인사안이) 청와대에 올라가면 (확정하는 데) 두 달 이상 걸리는데, 빨리 되는 게 있다. (특정 인사가 찾아와) 인사 청탁을 해서 안 받아줬더니 (청와대) 비서실장 통해서 얘기하겠다고 하더라. 다음날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검찰 등 권력기관 내부 인사도 마찬가지다. 검찰의 검사장급(차관급) 간부는 “(인사를) 몇몇이 좌지우지한다는 느낌이 들긴 한다. 실무진에서 뭘 어떻게 결정해서 올려도 그냥 블랙홀처럼 삼켜버리고 마니까 인사 작업이 안 된다”고 말했다. 세종시에서 근무하는 한 고위 공무원도 “우리 부처에서도 (청와대 3인방의) ‘문고리 권력’에 의해 인사가 좌우되는 걸 봤다. 부처 내부에서 결정한 인사를 가지고 청와대를 다녀오더니, 내용이 확 달라지더라. ‘(청와대가) 이렇게까지 일일이 간섭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 정부 들어 인사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문화체육관광부는 내부 직원들이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의 유명한 인사 문제 사례가 즐비하다. 지난해 말 국외 문화원장으로 내정된 인사가 외교관 비자를 받고 송별회까지 했는데, 엉뚱한 산하기관으로 발령이 나고 대신 외부 인사가 낙점됐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 인사는 역량평가 기준에 미달하는 바람에 해당 문화원장 자리는 현재도 1년 이상 장기 공석 상태다.

 

늑장 인사로 인한 업무 공백과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경제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인사 속도가 너무 늦다. 책임장관제 하겠다면서 부처 인사나 공기업 인사를 청와대가 꽉 쥐고 있다. (청와대에서) 오래 걸리다 보니 1년 이상 공석인 경우도 있었다. 업무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정부 초기 장관이나 총리 인선 때 ‘밀봉 인사’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예측하기 어려웠던 청와대의 인사 결정 방식이 청와대가 개입하는 개별 부처 인사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다. 사회 분야 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이 정부 인사는 정말 알 수 없다. 99% 결과를 확신해도 또 달라질 수 있어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현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던 한 인사는 “자신이 경질 대상인지, 왜 경질되는지도 모른 채 기분 나쁘게 나가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일하는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회 분야 부처의 또다른 공무원도 “관료들은 적임자가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자리에 가는 예측 가능한 인사를 해야 자신의 진로를 계획하며 조직에 충성할 수 있는데, 이 당연한 생리를 지금 정부가 너무 모른다. 단순한 선입관이나 왜곡된 정보만 믿고 부처의 세세한 인사까지 챙기려다 난맥상이 도지고 있다고 본다”고 꼬집었다.

 

 

“청와대 부속실서 하라면 하고 
말 없으면 그저 기다려”

 

장관발언 무시·수석대표 교체
통일부 상실·자괴감 가장 심해
교육·복지·기재부도 유사경험
“컨트롤타워 부재·실력부족 탓”

 

상명하복·권위주의 시대 온 듯
“종편 자막 고쳐라” 주문하고
윗분 눈치에 장관 인터뷰 불방
대검·공안부에도 간섭 많아져

 

 

■ 소통과 조율 부재…“불통 원인은 무능?”

 

정부 부처 중 통일부는 청와대와의 ‘소통 부재’로 인한 상실감과 자괴감이 가장 심한 곳으로 꼽힌다. 정부 초기부터 장관의 발언이 청와대에서 뒤집히는 일이 잦더니, 2013년엔 남북실무회담 3차 회담 중 수석대표가 전격 교체되고 지난해엔 청와대 안보전략비서관으로 임명된 통일부 핵심 인사가 8일 만에 교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지금도 우리는 당시 수석대표와 비서관이 교체된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이제는 청와대 지시 없이는 통일부 자체(판단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청와대의 정확한 지침을 받고서야 일을 시작한다. 당연히 대응이 늦을 수밖에 없다”고 답답해했다.

 

교육부나 보건복지부도 지난 2년 비슷한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다. 지난해 11월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시·도교육감들에게 ‘누리과정 예산 5000여억원 국고 지원’을 약속했다가 친박근혜계 여당 지도부의 반대로 단박에 없던 일이 됐고, 기초연금과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편을 준비했던 복지부의 의견이 청와대에서 뒤집힌 것도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기획재정부의 한 공무원도 “지난해 2월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발표 때 초안을 만들어 기자들에게 배포까지 했는데,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바꿔 혼란이 가중됐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인데, 공무원 사기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직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사기’ 문제와 상관없이 ‘지시’받은 일 외에는 하지 않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불통의 원인을 컨트롤타워 부재와 능력 부족 탓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경제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증세나 복지, 구조개혁 이런 논의를 하면서 정확한 진단 없이 너무 막연하게 이야기한다. 증세라고 하더라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영업자, 근로소득자 다 제각각이어서 그걸 다 정밀하게 분석하고 유형화한 다음에 논의해야 하는데 그런 게 잘 안된다”고 지적했다. 사회 분야 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컨트롤타워 부재를 지적하며 “정부 3.0의 취지대로 부처 간 협업, 소통·개방 등을 하라고 해놓고 (정책 관련 정보를) 공개해서 국회나 언론이 지적하면 책임을 따지고 혼내니, 추진이 제대로 안된다. 열심히 하자는 분위기가 안 생긴다”고 진단했다.

 

외교안보 분야 공무원들의 답변 중엔 현 정부의 ‘불통’이 박 대통령 특유의 ‘원칙주의’와 이에 따른 유연성 부족에서 비롯됐다는 의견도 나왔다. “물밑 접촉을 통해 합의를 해야 남북관계에 물꼬를 틀 수 있는데, 대통령은 정당한 절차가 아니라는 생각이 워낙 강하다. 이 때문에 관료들도 (더이상)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외교안보 분야의 또다른 공무원도 “원칙도 좋은데 한번 정해지면 그냥 고집불통이다. 대북전단은 표현의 자유고, 청와대 상공의 삐라는 안 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이중잣대라는 생각을 안 한다”고 답답해했다.

 

■ 지시만 있고 토론은 없다…“권위주의 회귀, 가만히 있을 수밖에”

 

현 정부에서 장관급 직책을 맡았던 한 인사는 “세월호 참사 이후 권위주의적인 방식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예를 들어 해양경찰청 해체 같은 결정도 사전 논의가 전혀 없었다. (박 대통령이) 보고서를 보다가 궁금한 게 있어야 전화를 하니, 토론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수석들이 직접 보고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보고서를 부속실을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한다. 부속실에서 ‘그대로 하세요’ 하면 진행하는 거고, 반응이 곧바로 오지 않으면 하염없이 기다리는 구조”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지시와 이행’만 있을 뿐 ‘설명과 토론’이 없는 권위주의적 국정과 피드백이 상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구조가 굳어지면서, 국정과제를 추진하는 정부 부처에도 연쇄적인 여파를 미치고 있다. 중앙부처의 한 국장급 인사는 “부처에서 올린 안이 청와대에 올라가서 바뀌어서 내려왔는데, 왜 바뀌었는지 부처에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경제부처의 국장급 공무원도 “공무원들이 정책 전문가이고 가장 많은 자료가 있으니 위에서 내려온 지시에 대한 상식과 판단이 있다. 하지만 그런 상식과 판단에 근거한 의견 수렴의 여지가 없다. 오직 오더, 주문만 성립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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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들의 답변 중엔 이처럼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나 가능했던 상명하복식 국정운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의외로 컸다. 세종시에서 근무하는 한 고위 공무원은 “지난 (이명박) 정부가 지나치게 임기응변으로 일관했다면, 이번 정부는 상명하복과 규율이 너무 강해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사안에 대해 지나치게 원칙적·교조적으로 접근하고, ‘그분’ 말씀에만 따라야 한다. 뭐든 문제가 없이 하려니까 시기를 놓쳐 국민의 기대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편 보도를 보고 청와대에서 연락이 많이 온다. 기사 관련해 보도 자막을 고쳐달라는 건데, 옛날처럼 언론에 ‘올려라, 내려라’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언론 환경이 많이 바뀌어 옛날처럼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을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일하는 한 공무원이 전한 말이다. ‘시대착오적 언론관’으로 비판받으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렀던 이완구 국무총리의 식사 자리 발언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한 고위 공무원은 사회문화 분야 한 장관의 방송 인터뷰가 불방된 사례를 전하기도 했다. 해당 장관이 방송과 인터뷰까지 했는데, 당시 청와대 내부 분위기가 인터뷰 내용과 달라 방송사에 방송을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실제 인터뷰는 방송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분야 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우리 부처 업무 관련 발표도 청와대에서 미리 얘기하지 말라고 한다. 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털어놨다. 김기춘 비서실장 체제 이후 ‘보안’을 강조하며 정보를 통제하는 청와대의 분위기가 각 부처에도 그대로 반영됐던 셈이다. 검찰의 한 간부도 “예전에 비해 검찰 조직의 총의를 모아가는 방식이 더 강화됐다. 특수부는 대검에 중수부가 사라지면서 시시콜콜 간섭이 많은 편이고, 공안 쪽도 법무부 쪽의 그립이 꽤 강해졌다”고 전했다.

 

세종시의 한 고위 공무원도 “업무와 인사, 두 분야 모두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일을 열심히 잘해도 청와대 등 위에서 보는 방향과 엇나가면 물을 먹는다. 청와대 시각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고, 많은 직원과 간부들이 어떻게 일해야 잘하는 건지 혼란스러워한다”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청와대의 일방통행식 정책 추진을 날 선 어조로 비판하던 한 국장급 공무원은 “이렇게 말하는 게 사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부처에서는 ‘(위에서) 계속 밀고 내려오니 어쩔 수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석진환 기자, 편집국 종합 soulfat@hani.co.kr

 

 


 

“원칙주의·사심 없음” 긍정평가도

 

“미·중 외교 안정적으로 풀어가
복지공약 지키려 그래도 노력”

 

박근혜 정부 출범 2년을 맞아 고위 공직자들을 상대로 한 22일 <한겨레>의 조사 결과(47명 대상)를 보면, 응답한 공무원들 가운데 10명이 ‘2년 동안 원칙을 유지하며 꾸준히 정책을 추진했다’며 비교적 좋은 점수를 줬다. 경제·복지 분야의 공무원 6명은 ‘복지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는 평가를 내놨다. 5명은 남북관계나 외교 분야에서 ‘안정감’을 준 점을 높이 평가했으며, 외부 전문가를 수혈하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도 있었다.

 

세종시에 근무하는 한 고위 공무원은 “원칙이 많이 강조되고, 본인이 정한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간다. 증세 논란도 그렇고, 말한 것을 반드시 지키려고 한다”며 “현 정부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세우고 공기업 개혁이나 공무원연금 개혁 등 필요한 일을 종합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 정부는 4대강과 자원외교만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경제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도 “대통령이 사심이 없는 것 같다”며 “지난 정부 때는 대통령과 친한 이들이 금융권을 장악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고 외부의 압력도 없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대기업들이 후원하는 지역별 혁신센터 개소식에 매번 직접 참석하며 ‘창조경제’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혁신센터 업무를 맡고 있는 한 공무원은 “처음엔 좌초되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까지 있었지만, 의지를 갖고 계속 협업을 하니 여러 생태계가 조성되면서 이렇게 성과가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안정감’을 꼽은 이들은 외교안보 분야의 ‘원칙’에 주목했다. “북한에 대해 단호하게 대북 정책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잘하는 것 같다”, “대북 메시지에 일관성이 있고, 안보 관련해선 중심을 잘 잡는 것 같다”, “미·중 관계를 잘 풀어가고 있다” 등의 평가가 외교안보 분야 고위 공무원들 사이에서 일부 나왔다.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많은 상황에서도, 지금껏 추진해온 기초연금이나 4대 중증질환 보장성 강화 등 복지 정책에 후한 점수를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복지분야 업무를 맡고 있는 한 공무원은 “보수 정권이지만, 복지 부분은 어느 정부보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초연금 등 일정 부분 후퇴가 있었지만, 그래도 역대 어느 정권도 이 정도까지 밀어붙이진 못했다”고 말했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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