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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상태로 20대가 끝날까 봐 무섭다"

 

취업 걱정에 잠 못 드는 29.5세... '나이 제한' 없다지만, 서류 통과도 어려워14.07.08 09:55l최종 업데이트 14.07.08 09:55l손지은(93388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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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간선택제 일자리 채용박람회 현장에 모인 20대 구직자들.
ⓒ 박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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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때?"

몇 번을 망설이다 친구에게 물었다.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가까이 댔다가도 금세 그만두고, 괜히 카카오톡으로 시시한 농담만 주고받길 몇 차례. 전화를 걸어 빙빙 에두르다 조심스럽게 취업 이야기를 꺼내자 친구가 원망 섞인 탄성을 내질렀다. 우리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만큼 그에게 취업은 무거운 주제였다.

"월드컵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잠시 숨을 고른 친구 현정이(가명·29·여)가 헛헛하게 말했다. 국가대표팀이 16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대부분의 사람이 월드컵에 흥미를 거두었지만, 너만은 스포츠 기자 지망생답게 이 축제를 즐기고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에게 가장 괴로운 시간인 새벽녘에 무언가 집중할 것이 생긴 게 좋다고 했다. 이날도 친구는 오전 1시 아르헨티나와 벨기에의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례①] 29.5세 취업준비생 "이젠 서류통과도 힘들어졌다"

친구는 매일 오전 1시쯤 침대에 눕는다. 그러나 잠이 드는 건 3~5시. 고요한 시간, 어두운 방에 누우면 낮 동안 잠자고 있던 복잡한 잡생각이 한꺼번에 떠오른다고 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런 잡생각을 굳이 물리치지 않았다. 하지만 서른을 앞둔 올해는 이것조차 시간 낭비로 느껴진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팟캐스트를 듣는다. 논술 쓰는 데 도움이 되는 '김현정의 뉴스쇼' '이이제이' 등 시사 방송을 들으며 취업에 대한 불안감을 애써 잠재운다.

요즘 그를 가장 괴롭히는 건 '나이'다. 서른을 6개월 앞둔 '29.5세'. 지난해까지는 언론사 최종면접에도 갔지만 스물아홉 살이 된 이후 서류전형에서 탈락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스펙도, 자기소개서도 지난해 보다 나아졌는데 올해는 서류통과도 힘들어지니까 계속 나이 탓을 하게 된다, 이제는 '나이 강박증'이 생겼다"고 토로했다.

밤새워 뒤척이는 탓에 수면시간이 부족한 편이지만 친구는 오전 7시에 꼬박꼬박 집에서 나와 근처 체육관으로 간다. 그는 9개월째 수영 강습을 받고 있다. 중년 여성이 대부분인 수영장에서 유일한 20대인 그는 다른 수강생보다 체력과 습득력이 좋아 강사에게 칭찬을 자주 받는다. 친구는 "별것 아닌 이 칭찬이 요즘 내게 유일한 힘"이라고 말했다. 6개월째 주말마다 하는 봉사활동도 비슷한 이유로 시작했다. 지적장애인에게 책을 읽어주며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성취감을 느낀다고 전했다.

용돈은 떨어져 가는데, 나이 때문에 알바 구하기도 어려워

친구가 입사를 희망하는 스포츠신문은 2012년 이후 단 한 차례도 공채 모집 공고가 뜨지 않았다. 다른 스포츠 전문 인터넷 언론사에서 이따금 채용공고가 났지만 지원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최근에는 서류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지원하는 것도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수험생활이 길어지면서 용돈도 고민거리다. 전에는 답답한 도서관 대신 카페를 자주 이용했지만, 지금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도서관으로 직행한다. 무료한 수험생활을 달래고, 용돈 벌이도 할 겸 동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면접도 봤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며칠 후, 구인구직 사이트에 똑같은 내용의 구인공고가 다시 올라온 걸 보고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걸 알았다.

친구는 "카페에서 일한 경험도 있어서 무난히 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마도 나이 때문에 떨어진 거 같다"고 말했다. 그에겐 요즘 작은 도전도 부담이다. 괜히 내 나이만 확인하고 끝나는 것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덤덤한 목소리 끝이 떨렸다. 더는 물을 수 없었다.

[사례②] 뒤늦은 취업 도전... 주변에선 "그냥 시집이나 가라"

또 다른 친구 지연이(가명·여)도 '29.5'세 취준생(취업준비생)이다. 2011년 경기도의 한 전문대를 졸업한 친구는 최근까지 약국에서 처방전을 접수하고 계산하는 일을 했다. 졸업 직후 입사 지원을 하기에는 준비가 덜 됐다는 생각에 취업 준비를 하면서 용돈을 벌 요량으로 시작한 일이 길어졌다.

하지만 퇴근 후에 책을 펼치는 게 쉽지 않았다. 취업도 멀어지고, 월 120만 원 남짓 버는 아르바이트 생활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좀 더 전문적이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한 채 20대가 끝나버리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는 것도 쉽지 않았다. 꼬박 두 달을 고민했다. '워크넷' '사람인' 등 구직사이트를 살펴봐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29살 전문대 졸업생에게 기회를 주는 곳은 더욱 없었다. 친구는 "약국을 그만두기 일주일 전부터는 두려운 마음에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다가도 답답함을 느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가,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그는 "답답해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는데, 그래도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아 막막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회상했다.

신촌에 있는 어학학원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차근차근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그에게 좁은 취업문만큼 괴로운 것이 주변 사람들의 '눈'이다. 스물아홉에 다시 시작하려는 그에게 주변 시선은 관대하지 않다. '결혼해서 살림이나 하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이나, '얘는 끝났구나' 하는 동정의 시선이 그것이다. 친구는 "나는 아직 젊고,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하는데 주변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큰 벽 앞에 선 느낌"이라고 말했다.

[사례③] 3년째 공무원 시험 낙방... 나이 많아 일반 기업 취업도 힘들어

공무원 시험 준비생 희진(가명·여)이도 취업을 하지 못한 채로 29살의 절반을 보냈다. 그는 지난 6월 서울시 지방직공무원시험에 낙방했다. 올해로 3년째다. 2011년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노량진에서 공무원시험에 '올인'했다. 휴학을 할 당시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갈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지만, 다음 학기 복학을 앞두고 있다. 학교 교칙상 더는 휴학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3년 안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니 허무할 뿐"이라고 전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은 올해 모두 합격했다. 복학을 앞둔 그는 다음 해에도 시험을 봐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결국 계속 하기로 결정했다. 나이 때문에 일반 기업은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어차피 안 될 시험 봐서 무엇하냐"고 성화지만 그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지난 4월에는 부모님이 친구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아 결국 시험을 보러 가지 못했다. 그는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부모님이 원망스럽다.

다시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 그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잠도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적어도 서른 안에는 모든 게 갖춰져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때와 견주어 별반 달라지지 않은 처지를 생각하면 속이 탄다. 공무원 시험을 그만두고 맞선을 보라고 권하는 부모님을 피해 다시 노량진으로 갈 예정인 친구는
"시간을 딱 시험지 받기 전으로 되돌리고 싶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그때로 돌아간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하는 나이. 하지만, 취업 전선에 서 있는 친구들은 스스로를 '벼랑 끝'이라고 표현했다. 언론들은 연례행사처럼 명절 때마다 취업준비생들을 찾는다. '귀향 포기하고 도서관 택한 취업준비생들', '삼각김밥으로 끼니 때우는 수험생' 따위 기사가 그 예다.

대부분 한 컷짜리 단신뉴스로 처리되지만, 사진 속 피사체들이 느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내 주변 '29.5세'의 스트레스는 임계점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들은 "아무 직업도 갖지 못한 채 20대가 끝나버릴까 무섭다"고 했다. '노동'이 고픈 그들이 원하는 건 면접에 설 기회만이라도 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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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세계문화유산

 

[친절한 통일씨] 고구려고분군, 칠보산 그리고 아리랑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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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06  20: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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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이 '아리랑'을 유네스코(UNESCO) 아태무형유산센터에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그리고 칠보산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생물권보호지역에 등록됐다.

한국도 최근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북한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궁금증이 생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북한의 유산은 어떤 것이 있을까. 남북이 공동으로 등재하는 일은 요원할까.

북한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고구려고분군과 개성 역사유적지구 등 2개를 보유하고 있고, 생물권보존지역으로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칠보산 등 네 곳이 지정됐다.

북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① 고구려고분군

'고구려고분군'(The Complex of the Koguryo Tombs)은 2004년 7월 중국 장쑤성 쑤저우시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 제28차 총회에서 이사국 만장일치로 등재됐다.

북한은 2002년 1월 '고구려 고분군'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를 신청, 2002년 6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전문가 현지 심사를 받은 뒤, 2003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7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심의를 거쳤지만 일부 유적이 원형대로 보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등재가 보류된 바 있다.

   
▲ 동명왕릉.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무덤으로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동명왕릉을 이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고구려고분군'은 평양 부근에 있는 5개 지역 고분군 63기(벽화 고분 16기 포함)로, 평양시 역포구역 동명왕릉, 진파리 1호분 등 15기,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사신무덤 등 34기, 평양남도 대동군 덕화리 고분 3기,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 강서세무덤 3기, 안악3호분, 독립고분 8기 등이다.

유네스코는 고구려고분군을 △고분 벽화는 고구려 문화의 걸작이며, 고분 구조가 정교한 건축공법을 보여주고, △고구려 문화의 매장문화는 인근 국가에 영향을 끼쳤으며, △고구려 고분은 고대 매장 양식의 중요한 사례라고 꼽았다.

고구려 고분은 분묘 형태상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돌로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흙으로 덮은 봉토무덤이다. 이 중 평양 고구려 고분은 5~6세기 후기 고구려 유적으로, 대부분 봉토무덤 형식으로 벽화를 그린 무덤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들 고분군이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1905년부터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학자들에 의해 과학적인 연구와 기록이 이루어졌고, 1945년까지 정기적인 연구와 발굴이 진행됐다. 하지만 고분을 보존하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아 1946년 법적 조치가 마련된 이후부터 관리가 본격화됐다.

   
▲ 강서세무덤 전경도. 앞에 있는 강서대묘는 '현무' 그림으로 유명하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이 중 동명왕릉은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36호로,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함께 옮겨왔다고 전해지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무덤이다.

둘레 34x34m, 높이 11m의 가장 규모가 큰 이 왕릉 뒷쪽에는 10여 기의 고구려 무덤이 있고, 앞에 정릉사지가 있어 현재 전해지는 고구려 왕릉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능구역이다.

고구려 고분군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이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안악 3호분과 강서대묘이다.

   
▲ 안악3호에 그려진 벽화. 고구려 고국원왕으로 알려져있다. [출처-UNESCO]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위치한 안악3호분은 고구려 고국원왕릉으로 알려졌다. 이 무덤의 벽화에는 무악의장대, 주인공이 문무관을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장면, 시녀를 거느린 안주인, 외양간, 차고 등 생활지역 등이 그려져 있다.

특히, 회랑에는 왕으로 상징되는 '백라관'을 쓴 주인공이 수레를 타고 문무백관, 악대, 무사 등 250여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어, 고구려 당시 사회, 문화 등 고구려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평안남도 강서룬 삼묘리에 있는 강서세무덤 중 가장 큰 강서대묘는 북한 국보급 제3호로 지정, 다양한 동물이 그려져 있어 주목받는다.

여기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현무' 그림이 있다. 북쪽 벽에 그려진 현무는 거북과 뱀 모양을 한 상상의 동물로,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과 함께 북쪽을 상징하는 신이다.

   
▲ 강서세무덤 중 강서대묘에 그려져 있는 '현무도'. 북쪽을 상징하는 신으로 상상의 동물이다. [출처-UNESCO]

이들 벽화를 두고, 유네스코는 "풍부한 색채와 색조를 갖추고 있다. 벽화에 그려진 춤추는 여인, 훈련 중인 전사, 하늘의 새와 용, 강의 물고리, 숲의 짐승, 바람, 구름 등은 매우 현실적이고 생생하여 마치 그림 속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고구려 고분군이 주목받는 것은 고구려 고분의 특징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고구려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과의 관계 때문이다.

북한이 고구려고분군의 유네스코 등재 추진 당시, 중국은 2003년 1월 중국 지린성에 분포된 고구려 유적을 '고구려의 수도와 왕릉, 그리고 귀족의 무덤'이란 명칭으로 신청, 심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당시 남북 역사학계는 북한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것이 유네스코에 먼저 등재될 경우, 고구려가 옛 중국의 부속국가였다는 주장이 더 힘을 실릴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그래서 남북은 중국을 상대로 연합 외교전을 벌였고, 결국 유네스코에 먼저 등재됐다.

   
▲ 고구려 고분 내부. [출처-UNESCO]

유네스코는 이와 관련 "고구려의 범위는 오늘날 중국 동북부의 지린성에서부터 북한의 평양시까지 아우르고 있으므로, 양국의 역사 유적들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역사적 기원을 둘러싼 분쟁의 소재가 되었다"고 확인했다.

그리고 "북한이 역사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고구려가 한반도의 옛 왕국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의 역사가들은 고구려의 유물들이 지리적으로 중국 국경 안에 있으며, 중국이 소유하고 관리해왔다는 점에서,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해 왔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양국은 각자의 영토에 모두 속한 고구려의 유산을 별도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하는 것을 '비정치적'인 행위로 여기는 데 동의해고, 현재 유적을 보존하는 동시에 관광지나 연구 자원으로 활용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면서 북한과 중국이 각각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로 등재하는 것을 허용했다.

북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② 개성역사유적지구

개성역사유적지구(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는 2013년 6월 캄포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 제37차회의에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개성역사유적지구'는 10세기~14세기 동안 지속된 고려의 도읍지인 개성에 분포된 12개의 개별 유적을 하나로 묶은 것으로, 만월대, 개성 첨성대, 개성 성곽(5개구역), 개성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사, 왕건릉, 명릉, 공민왕릉 등이다.

   
▲ 개성 역사유적지구 중 하나인 고려 왕건릉. [자료사진-통일뉴스]

유네스코는 "건축물들은 불교 사상에서 유교 사상으로 정치사상이 전환되던 시기였던 고려가 통일 국가의 수도인 개성에서 발휘한 정치적, 문화적, 철학적, 정신적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며 "개성시와 궁궐 및 고분군의 풍수학적 입지, 성벽과 성문을 포함한 도시 방어 체계, 교육기관 등은 당시의 정신적 가치를 표현한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12개의 개별 유산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먼저 개성 성곽에 속한 5개 구역을 이어주는 '발어참성'은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9호로, 송악산, 부흥산, 도강봉, 용수산, 지네산 등을 연결, 개성을 보호하고 있다.

나머지 7개 개별 유산은 만월대 궁궐터, 천문 및 기상관측소인 개성 첨성대, 개성 내성 남문인 남대문, 고려 최고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 정몽주 집터에 세워진 유교교육기관 숭양서원, 정몽주가 피살된 선죽교와 표충사, 고려 태조의 무덤인 왕건릉, 공민왕릉, 7릉군, 명릉군 등이다.

유네스코는 △고려왕조 이전에 한반도에 있었던 여러 국가들의 문화적, 정신적, 정치적 가치의 동화를 보여주고, 5세기 이상 이웃국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된 증거를 보여주고, △동아시아 지역에서 불교 사상이 유교 사상으로 전환되던 시기인 통일국가 고려시대의 문명을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라고 등재 이유를 설명했다.

   
▲ 선죽교.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된 곳이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언제든지 유네스코는 이들 문화유산이 훼손될 경우, 등재목록에서 삭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별도의 지침을 제시, △건축물 고도 제한 구체적 명시, △개성시 옛 도로 복원, △건축물 형태 및 색채의 시가적 조화 관리, △유적지 인근 수로 배치와 유수량 통제, △조망 방해 구조물 및 시설 이전, △조림을 통한 자연경관 복원, △개성시내 공장건립 금지, △관광관리 및 해설계획 마련 등을 강조했다.

또한, 개별 유적과 풍수지리학적 관계가 있는 송악산, 지네산, 용수산, 부흥산, 도강봉, 자남산, 주작고개, 만수산, 아차봉 등을 보존하기 위해 신규 개발을 금지할 것을 권고했다.

이를 위해 북한은 '문화유물보호법'(1994), 환경보호법(1986), 산림법(1992), 토지법(1977), 도시경영법(1992)에 따라 개성시 역사문화유적지구를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개성시문화유산보존위원회'를 설치, 관리를 총괄하며, 개성시 인민위원회 문화보존총국이 개별 유산 관리를, 인민위원회 산하 문화재관리사무소 및 왕건릉 관리사무소가 관리계획 시행을 책임진다.

개성역사유적지구 관리계획은 '문화유물보호법'에 의거해 설치된 '문화보존총국'의 위임을 받은 조선문화보존센터가 마련, 개성시인민위원회와 개성시협동농장관리위원회 협의로 작성됐고, 2011년 1월 공식 승인됐다.

5개년, 10개년 목표로 설정된 관리계획에서 제일 먼저 주목되는 것은 바로 만월대 궁궐터 발굴.복원이다.

   
▲ 개성 남대문. [자료사진-통일뉴스]

이를 위해 남북은 지난 2007년부터 공동발굴조사사업을 시작, 2010년 5.24조치 발표때까지 진행됐다. 그러다 2011년 재개됐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중단됐다.

그리고 남북은 지난달부터 남북공동발굴조사사업을 재개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정부는 해당 사업에 약 15억 원의 남북협력기금을 지원한 바 있다.

이와 별도로 남북은 개성 자남동과 북안동 일대에 있는 한옥마을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개성 한옥마을은 약 3백 채 가량이 보존, 실제 주민이 살고 있다는 특징을 지녀, 중국 리지앙 고대마을(1997), 베트남 호이안 고대 도시(1999)와 같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 고려 성균관. [자료사진-통일뉴스]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백두산, 구월산, 묘향산, 칠보산

유네스코는 1971년 보전의 가치가 있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과학적 지식, 기술, 인간의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개념으로 생물권보존지역을 정립했다.

이들은 △유전자원, 자연지역과 멸종위기에 처한 종, 생태계 및 경관 등을 보전하는 기능, △사회.문화적이고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촉진하는 기능, △보전과 발전에 관한 지역적, 국가적, 세계적 이슈와 관련된 시범사업, 정보교환, 환경교육, 연구 등 자연자원과 보전지역 관리의 효율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모든 지원 활동을 중심으로 '생물권보존지역'을 선정한다.

   
▲ 백두산.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1989년 등재됐다. [자료사진-통일뉴스]

1976년 처음 지정된 이후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미라마레해양공원, 북동그린란드 국립공원 등이 있으며, 한국은 설악산(1982), 제주도(2002), 전남 신안 다도해(2009) 등이 있다.

북한에는 백두산(1989), 구월산(2004), 묘향산(2009)이 있고, 최근 칠보산이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선정됐다.

이중 칠보산은 북한이 '함북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명산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칠보산을 두고 "우리나라의 5대 명산으로 이름난 산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 칠보산은 명산 중의 명산"이라고 추켜세웠다.

사시사철 풍경도 달라 봄에는 꽃동산, 여름에는 녹음산, 가을에는 홍화산, 겨울에는 설백산이라고 불리는 칠보산은 주봉인 상매봉, 천불동 주변인 내칠보, 바다에 인접한 해칠보, 외칠보로 이뤄져 있다. 대표적인 유적지는 개심사이다.

 

   
▲ 칠보산은 최근 최근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에 등재됐다. 절경대에서 바라본 외칠보. [자료사진-통일뉴스]

남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공동 등재는 요원한가

세계는 가히 문화전쟁이다. 국제기구인 유네스코가 공식 인정한 세계문화유산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를 두고 각국은 치열한 문화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 인류문화의 다양성과 차별성을 보존한다는 취지가 무색하게 전 세계는 세계문화유산 보유 숫자놀음이 한창이다. 한국도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11개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고 자랑한다.

여기에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판소리, 김장문화 등 16개의 인류무형문화유산, 훈민정음,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새마을운동 기록물 등 11개의 세계기록유산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면서 북한은 고작 2개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나라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 개성 역사유적지구 중 공민왕릉. [자료사진-통일뉴스]

남북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동질성을 강조하면서 유네스코에 공동 등재하기란 어려운 일일까.

표면적으로 보면 세계문화유산은 해당 국가지역에 있는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남북 공동등재는 어렵다. 남북이 공통적으로 보유하고 관리하는 문화유산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무형문화유산은 이야기가 다르다. 남쪽에서만 김장을 담그고 아리랑을 부르는 게 아니라, 북쪽에서도 똑같이 김장을 담그고 아리랑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리랑 등재에서 보듯, 남북 공동 등재는 요원해 보인다.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당시, 외교부는 "국제사회에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문화국가로서의 위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된 것"이라며 "한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이자 국가 브랜드로서 아리랑의 위상과 가치 제고는 물론 국민의 아리랑으로서 세대를 거쳐 재창조되고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는 아리랑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이 증가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아리랑은 영어로 '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 즉, '아리랑, 한국의 서정 민요'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유네스코는 아리랑 등재를 두고, "한민족의 대표적인 민요로서 공동체의 정체성과 단결을 제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도 "아리랑 등재가 남북간 대화와 교류 증진 등 전세계 한민족간의 유대 강화에도 기여할 것"이라면서 북한의 아리랑을 염두에 뒀다. 아리랑을 남북 공동의 유산이 아닌 한국만의 유산으로 등재한 것에 대해 유네스코가 아쉬움을 드러낸 대목이다.

   
▲ 북한이 연구, 공개한 아리랑 악보. 1985년 1월 김련실이 부른 노래를 채보한 것이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남북이 함께 등재시키지 못한 아리랑은 최근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리랑 민요'(Arirang Folk song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등재를 신청했다. 여기에 중국도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 아리랑을 부른다는 이유로, 2011년 '조선족의 아리랑'을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추진 중이다.

물론, 정부는 아리랑의 공동등재를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론은 한국만의 단독 아리랑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북한이 별도의 아리랑 등재를 신청하고 있어, 사실상 중국도 아리랑을 등재신청할 경우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민족동질성 회복을 외치고 남북이 함께 모이면 '아리랑'을 불러대지만, 정작 외부인의 시각에서 아리랑은 남한의 것, 북한의 것이 다르고, 중국에서도 아리랑을 부르는구나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결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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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유가족 인터뷰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4/07/08 10:11
  • 수정일
    2014/07/08 10:1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 단원고 2학년 5반 박성호 군 어머니 정혜숙님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4/07/08 [01:59]  최종편집: ⓒ 자주민보 


위의 동영상은 6월27일 주권방송에서 진행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인 정혜숙님과 인터뷰이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5반 고 박성호 군의 어머니인 정혜숙님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가족대책위 활동을 하고 있으며 진실을 알려 나가기 위한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정혜숙 님의 위 동영상 증언을 보면 초기부터 해경은 전혀 학생들 구조 의지가 없었으며 대규모 사복형사들을 풀어 학부모들을 집요하게 감시하고 학부모들의 단결을 막기 위해 온갖 비열한 행동을 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대체 왜 학생들 구조를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구조 과정에 뭔가 밝혀지면 안 될 심각한 문제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이 그리도 두려워 학부모들을 이렇게 집요하게 감시하는 것이며 진실을 찾으려는 유가족들의 활동을 이다지도 각방으로 방해하는 것일까. 특히 단결을 하지 못하게 와해하려는 시도를 지금도 집요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학부모들의 주장이다.

정부가 세월호와 관련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고 떳떳하다면 이럴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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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직원 발각되자 이병기에 건네진 메시지는?

북풍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무능한 국정원장 후보자
 
임병도 | 2014-07-08 08:27: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7월 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 직원이 '일시 취재'라는 명찰을 달고 회의장에 있다가 야당 의원에게 발견돼, 한때 인사청문회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새누리당은 국정원이 정식 공문을 보내 협조를 요청했고, 국회가 허락했으니 별로 중요한 사안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야당 의원들은 "출입기자 등록 내규는 기자에 관한 것이고, 정보기관이 이것을 근거로 이 자리에 와 있는 걸 인정할 수 없다"며 반발했습니다. 
 

 

 

 

 

국정원 직원이 발각된 후 이병기 후보자에게 수첩으로 건네진 메시지에는 '기록 남기기 위해'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국정원 역사 기록을 위해 사진 촬영을 했고, 야당 의원 사찰은 전혀 아니었다는 주장과도 비슷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은 국정원이 사전에 야당 의원에게 충분히 양해를 구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발각된 국정원 직원 또한 새정치연합 박지원 의원이 출입증을 보자고 하는데도 출입증을 뺏길 수 없다는 식으로 저리 완강하게 버틸 필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 국정원이 그동안 얼마나 우리에게 불신의 대상이 됐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신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국정원 스스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휴대폰 감청이 당연하다는 국정원장' 

이상한 일이 벌어져 본질이 흐려졌지만 1,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사안이 맞물려 있었습니다.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도중 새누리당 서상기 의원이 대표발의한 '휴대전화 감청 허용'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의 처리를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사찰이 아니라 범죄를 잡고 대공수사를 하기 위해 휴대전화 감청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의 말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국정원장 자격에 대한 문제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의 국내 정치 및 선거 개입을 방지하기 위한 국정원 개혁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공 수사권 폐지 또는 검찰이나 경찰로 이관'입니다. 

대공수사를 명분으로 국내 정치에 자꾸 개입하는 국정원의 정치공작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정원이 대공수사권을 갖고 있지 않게 된다면 그들이 국내 정치에 개입할 여지는 많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폐지해야 하는 국정원 개혁안이 필요한 시기에, 국정원장 후보자가 오히려 대공수사를 이유로 휴대전화 감청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켜달라는 주장은 여전히 국정원이 개혁될 가망성이 적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북풍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무능한 국정원장 후보자'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는 1997년 15대 대선에서 북풍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북풍 사건은 김대중 후보에게 북한이 자금을 제공했다는 재미사업가 윤홍준의 폭로 기자 회견 공작을 안기부가 벌여, 김대중 후보를 빨갱이로 몰아 대선에 패배하게 하려는 전형적인 선거개입이었습니다.

 

 

 

안기부가 벌인 대선개입 북풍 공작에 대해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는 "자신은 북풍 사건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병기 후보는 "북풍과 관련해서 당시 1년간 출국금지를 당해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를 당하지도 않았고 재판을 받지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믿고 당시 수사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1998년 5월 서울지검 공안1부가 '북풍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첨부했던 북풍 공작 관련 안기부 조직도를 보면, 북풍 공작 기자회견에 관여했던 인물 대부분이 203실 요원들입니다. 

안기부 203실이라 불리는 해외조사실은 안기부 2차장 휘하에 있는 조직이며, 당시 안기부 2차장이 바로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입니다. 

이병기 후보자의 말처럼 그는 사법처리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대성 203 실장으로 윤홍준 기자회견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는 보고만 받았다는 주장을 사법부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이병기 후보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1. 이병기는 자기 부하가 정치 공작을 벌여도 몰랐을 정도로 무능한 안기부 2차장이었다.
2. 이병기는 나중에 국정원 직원이 정치 공작을 벌여도, 나는 몰랐다고 말할 수 있다. 

대선에 개입한 국정원 직원들의 정치공작이 '개인적 일탈'로 만들어져 국정원 개혁을 외치는 시기에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의 '나는 몰랐다'는 이런 모습은 우리가 바라는 국정원장 후보자의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정치권력자들과 살아온 정치참모의 달인 이병기' 

국정원장에 제대로 된 사람이 와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국정원장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권력자들과 삶을 같이 했던 인물입니다. 
 

 

 

이병기 후보자는 노태우의 최측근으로 3당 합당에 관여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대통령 최측근이자 문고리 권력으로 살았습니다. 

김현철 등 경복고 인맥으로 김영삼 정권에서 안기부 2차장으로 임명된 이병기는 북풍 공작을 벌여 김대중 후보를 막으려다 패배, 일본으로 도망치듯 떠납니다. 

2002년 대선을 위해 이회창이 움직이자 다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특보 및 대통령 후보 특별보좌역으로 차떼기와 정치자금을 통한 정치 협잡을 하다 걸려 1000만원의 벌금을 받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병기를 국정원장에 임명한 가장 큰 이유가 그가 여의도연구소 상임고문으로 그녀의 고문그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아온 길은 언제나 정치권력자들과 함께였으며, 늘 정치권력을 탄생시키는 일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별다른 문제 없이 통과될 듯 보입니다. 과연 그가 제대로 국정원 개혁을 이끌 인물이냐는 질문에 아이엠피터는 그의 과거를 본다면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정원 직원윤리헌장을 보면 "우리는 언제나 정의와 진리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국정원은 한 번도 정의와 진리, 그리고 국민의 편에서 일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국가 권력을 쥔 정치인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국정원장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국정원 내부의 갈등이라도 바라봐야 조금은 속이 시원해질 듯합니다. 2


1.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에게 쏟아지는 재산 문제 등은 거론할 필요가 없다. 박근혜정권에서 그런 문제는 그냥 당연한 기본이 됐기 때문이다.

2. 앞으로 국정원 내부의 갈등은 어느 정도 생길 전망이며, 그 부분을 파고 들어야 국정원 문제점을 표면에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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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홀대한 세계적 ‘옥수수 박사’, 중국이 냉큼 채갔다

 

등록 : 2014.07.07 18:55수정 : 2014.07.07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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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박사’ 김순권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은 1998년부터 59차례나 북한을 방문해 식량난 해결을 돕고자 옥수수 생산 증대 농법을 전수해왔으나 보수정권 이래 남북교류가 막혀 누구보다 애를 태우고 있다. 사진은 9차 방북 때 평남 마옥 옥수수시험장 현장지도 모습. 사진 국제옥수수재단 제공

중국에 육종 연구 터 마련한 김순권 박사

그는 미국이 55년간 연구해 만들어낸 옥수수 교잡종(하이브리드)을 5년 만에 개발해냈다. 개발도상국에선 개발이 불가능하다던, 그리고 개발한 뒤에도 한국 땅에선 안 된다며 국내 관료들과 수입업자들마저 재배를 반대했던 그의 발명품 ‘수원 19호’는 강원도 옥수수 농사를 완전히 바꿔 놓았고, 아프리카·아시아·중남미에 충격파를 던졌다. 아프리카 농업을 폐농 지경으로 몰아간 악마의 풀 스트라이가(Striga)와 위축바이러스(MSV)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농업혁명’을 일으켰다는 찬사와 함께 노벨평화·생리학상 후보에도 여러 차례 올랐다. 그는 옥수수를 통해 남북관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 옥수수농업 발전에도 중대한 기여를 했다.

 

옥수수 육종학의 세계적 권위자 김순권(69·사진) 박사.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이요 한동대 석좌교수, 벤처기업 ‘닥터콘’의 대표인 그는 중국에서 전화를 받았다.

 

‘수원19호’로 강원도 옥수수 혁명 
중 정부가 자립도 높이려 모셔가 
1년 대부분 전세계 돌며 육종

 

“한국, 사료용 옥수수 자급도 0.8% 
관료 등 수입 이권 챙기기만 급급”

 

“동북3성의 지린·창춘·단둥 등에 있는 모두 1만5천평 규모의 육종연구단지들을 둘러보고, 6월 말 개막한 베이징 경제엑스포에도 가봤다. 지난해 처음 중국 곡물 생산량 1위 자리를 옥수수가 차지했다. 연간 8억~9억톤에 이르는 세계 옥수수 생산량의 25%씩을 미국과 중국이 각각 차지하고 있다. 동북3성은 경작지의 80%를 옥수수가 뒤덮고 있다. 나머지는 도로와 마을이 각각 10%씩이다.”

 

그는 10일 일단 귀국했다가 14일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한달가량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중국 정부가 그를 외국인 우수과학자로 지정한 덕에 아파트와 연구비, 왕복 비행기삯까지 지원받는다. 중국에는 그가 연구자금 마련을 위해 2005년 설립한 벤처기업 ‘닥터콘’ 현지법인도 있다. “중국엔 옥수수 종자기업들이 6천개나 있다. 웬만한 외국 업체들은 맥도 못 춘다. 닥터콘을 중국 내 5위 안에 올려놓을 자신이 있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열정적이고 힘이 넘쳤다. “1년의 약 3분의 2를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육종을 하고 있다”는 그는 정작 국내에서는 찬밥 신세다.

 

“정부는 내 연구를 딱 3년간 지원해주곤 중단시켰다. 심지어 가축을 건강하게 키우는 기능성 사료용 옥수수의 생체 수량이 수입종보다 30% 이상 높은 육종 연구마저 중단시켰다. 연구에 성공하면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이득이 되는지 뻔히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말했다. “연간 1천만톤의 옥수수를 수입해 70%를 가축 사료로 이용하는 대한민국에서 사료용 옥수수 자급도는 0.8%다. 육종 연구만 잘하면 남아도는 논에 사료용, 바이오 연료용 옥수수를 심어 상당량의 수입 대체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가능한 일이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관피아’를 입에 올리면서, 김 박사는 수입규모 연간 1천만톤, 50억달러로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의 옥수수 수입국인 우리나라 관료와 정치인, 학자들이 그 막대한 옥수수 수입 관련 이권 챙기기에만 골몰하며 나라 전체, 나아가 남북 민족 전체의 이익은 외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옥수수의 최대 수입처가 바로 농협’이고, 교수들마저 거들어 ‘교피아’라는 말도 나온다.

 

그는 최근 자신과 가족, 그리고 47년째 옥수수 육종 역사를 돌아보는 자서전 <하루하루가 기적이다>(상상나무 펴냄)를 냈다.

 

그가 3년 남짓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수원 시리즈’ 옥수수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1970년대 중반, 타이 방콕에서 열린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ESCAP)에 참석한 그의 옥수수 관련 발표를 듣고자 당시 중국과 소련, 베트남 등 미수교 사회주의권에서도 대표단을 보냈다. 79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17년을 머물 때도 계속 그의 연구에 관심을 쏟았던 중국은 84~85년 그를 특별초청했다. “열흘간 베이징과 난징, 광저우 등 4곳을 돌며 옥수수 세미나를 열고 200종의 원종 하이브리드 종자를 나눠주고 시험재배를 하게 했다. 그때 그들은 내가 농촌진흥청에 있으면서 개발한 신품종 ‘KS-5’를 자신들의 재래종과 교배해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었는데, 응애가 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때 하얼빈 등 동북3성 지역에서는 수수와 조가 주곡이어서 옥수수 생산량이 미미했다.” 지금도 중국은 미국의 65%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자국산 옥수수의 단위 생산량을 높이고자 그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90% 가까이 끌어올릴 수 있다. 닥터콘은 5천만톤 증산을 목표로 삼고 있다.”

 

중국은 그의 옥수수 줄기를 이용한 에탄올 생산 연구도 주시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해마다 옥수수 알곡 1억톤을 에탄올 생산에 투입하고 있다. 최근 세계 식량파동이 일어 3년 사이 옥수수 값이 3배나 뛴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포스코의 지원을 받아 알곡이 아니라 옥수수 줄기(대)를 에탄올 원료로 이용하는 방안을 3년째 연구하고 있다. 알곡과 거의 같은 에탄올 성분을 함유한 줄기를 지닌 옥수수를 개발해 알곡은 알곡대로 거두고 줄기는 에탄올 생산에 이용하는 것인데, 지금 70~80% 정도는 성공했다.”

 

그는 이미 농약이 필요 없는 찰옥수수와 꿀옥수수 등 신품종들을 상품화했고, 캄보디아 옥수수 농사를 망쳐 온 노균병 문제도 해결했다. 러시아 남부나 몽골, 북에서 잘 자라는 냉해에 강한 품종도 개발 중이다. “특히 북한은 종자와 비료 문제만 해결되면 천혜의 옥수수 천국이 될 수 있다.” 98년부터 59차례나 찾아간 북한과의 교류·협력이 파탄나고 굶주리는 북녘 동포들을 위한 옥수수 협력 또한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 현실을 그는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한승동 기자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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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국정원장 청문회…국정원 직원 야당 무단 촬영 파문

 
국정원 직원 야당 의원 질문지 촬영 적발돼 파행...이병기 정치관여 후회하겠다고 했는데
 
입력 : 2014-07-07  11:01:07   노출 : 2014.07.07  11:15:55
 

이병기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 직원이 야당 국회의원의 질문 내용을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하다 적발돼 파행을 빚었다.

7일 오전 10시부터 국회 245호실에서 인사청문회가 진행됐다. 하지만 10시 30분경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제 뒤에서 자꾸 자료를 찍고 있어서 확인해보니 국정원에서 나온 직원이라고 한다"며 "국정원 직원 카메라가 인사 청문회에서 들어 올 수 있느냐"고 말했다.

박 의원은 "당장 퇴청 명령을 내려달라, 국정원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느냐, 국정원 직원이 카메라로 야당 자료를 찍는 일은 심각한 일"이라며 "여기 명찰은 정보위원회 명찰을 달았는데 누가 만들어줬느냐, 왜 여기 와서 이런 행동을 하느냐, 국정원은 댓글 사건, 간첩 조작 사건 하는 곳인데 청문회 와서 정보위원회 명찰 달고 와서 국회의원을 감시하느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이병기 후보는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고 답했고, 새누리당은 우선 사실확인이 우선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박지원, 신경민, 박영선 의원이 사진 촬영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국정원 직원에 대해 신분을 요청하는 상황으로 확산됐다. 

   
▲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이병기 국정원장 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문지를 촬영하다 적발돼 파행을 빚었다. 국정원 직원이 청문회장을 빠져나가려다 제지를 당하고 있다.
 

 

   
▲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명찰 확인을 요구하자 거부하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박지원 의원은 "국정원 직원 맞느냐"며 재차 확인을 요구했지만 국정원 추정 직원은 "밖에 나가서 확인해주겠다. 국회 사무처에서 명찰(출입증)을 발급해줬다"고 버텼다. 이에 박영선 의원은 "명찰을 발급한 것도 국회 사무처에서 조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정원 직원이 차고 있었던 출입증은 '일시 취재', '정보위원회'라고 적혀 있었다.

인사청문회에서 보통 후보자 뒷 좌석에 기관 관계자들이 앉아 후보자 인사 청문를 도울 수 있지만 야당 의원들 사이로 질문지를 찍는 행위는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공식 인사청문회팀이 아니라 국정원 일반 직원이 정보 수집 차원에서 진행한 일이라면 의원 사찰 행위가 될 수 있다.

이병기 국정원장은 모두 발언에서 "두번 다시는 제 머릿 속에 정치 관여, 정치 개입을 잊어버리고 살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청문회 자리에서부터 직원이 야당 의원의 자료를 수집하면서 논란에 휩싸인 모습이다.

오전 10시 50분 현재 국정원 직원의 '사찰' 행위로 정보위원회는 정회를 한 상태이다. 야당 의원들은 국정원 직원의 신분 확인과 출입 발급 경위, 청문회 자료 촬영 경위 등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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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진 기자 | jinpress@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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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여, ‘정치 중립성’이라는 기만을 깨라

[다시, 전교조다②]‘교육은 ‘성역’이 아니라 ‘공역’이다
박권일/칼럼니스트  |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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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7.07  08: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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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교조다. 전교조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판결이 내려지면서 전교조와 정부의 정면충돌이 빚어지는 상황이다. 지방선거에서 진보적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고 정권이 보수적 입장의 교육관료들을 전진배치하면서 갈등은 더욱 증폭될 전망이다. <미디어스>는 전교조를 둘러싼 논란을 다각도에서 짚어보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기획을 마련했다.

지난 3월, 민주노동당에 후원금을 냈다는 혐의로 기소된 정진후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등이 청구한 헌법소원심판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교육의 중립성 확보를 위해 정당가입을 금지한 것은 과잉금지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합헌 결정을 내렸다. 정당법 제22조는 공무원과 초/중등 교원은 정당의 발기인이나 당원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고, 국가공무원법 제65조는 공무원은 정당이나 정치단체 결성에 관여하거나 가입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다. 당시 전교조는 성명을 내고 “공무원과 교사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악법을 인정한 시대착오적 결정”이라면서 “공무원이 국가의 공무를 담당하는 직위에 있다는 이유로 개인의 사적인 삶은 희생돼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유지되는게 안타깝다”고 밝혔다.

헌법 제31조 4항에는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보장”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한국사회에서 교사를 포함한 공무원의 정치활동은 구체적 ‘의무’의 차원에서 금지되어 있다. 한국 공무원은 공직에서 뿐 아니라 사적 개인으로서도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므로 결국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헌법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영원히 고통 받는 존재가 되는 셈이다.

반면 독일에서는 헌법이 보장한 정치적 권리가 우선이다. 직무와 직결된 영역에서는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되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는 다른 시민과 똑같은 권리를 가진다. 연방공무원법 및 통일공무원법에는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하는 경우에 절제와 자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절제의무’(Mäßigungspflicht)가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구체적 의무나 내용적인 규제가 아니다. 단지 국민들이 보기에 품위 있고 객관적인 ‘태도’나 ‘포즈’를 보이라는 주문일 따름이다. 공무원이 내용상 정치활동이 제한되는 경우도 ‘헌법에 대한 충성의무’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 김정훈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이 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전교조 사무실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2차 교사선언 기자회견'에서 회견문을 읽고 있다. 이날 김 위원장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우리 제자들과 동료교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교육은 성역이어야 한다는 판타지

법 이론으로도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조항은 이미 여러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지나치게 협소한 이해, 공무원이 민주사회의 시민이기도 하다는 ‘이중적 지위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다.

우리 헌법상 규정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규정을 공무원의 정치적 침묵이나 정치적 무위를 강제하는 규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칫하면 중립성의 의미를 공무원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정치적 중립의 해석은 특히 기본권과의 조화로운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헌법학계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집권당의 영향으로부터의 독립과 정당에 대한 불간섭․불가담을 의미하는 소극적 중립”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주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헌법적 고찰, <한국자치행정학보> 제23권, 8쪽

전교조가 앞서 헌재 결정을 비판하긴 했지만 문제는 전교조와 진보진영 역시 일상의 차원에서 정치 중립성의 신화에 갇혀 모순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상당수 진보인사들, 심지어 일부 좌파조차 교사의 정당가입을 금지한 헌재를 비판하면서도 교육감이 정당의 일원으로 출마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이건 이상한 이야기다.

프레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교육이 정치적 영향을 회피해야한다는 식으로 사고하는 한, ‘정치적 중립성’이란 개념에서 탈출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교육의 공공성’은 어떤가. 교육의 공공성은 모두가 동의할만한 상위가치로 인정할만하지 않을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목표로서 교육의 공공성을 추구한다면,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에 매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진보적 가치와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독립성을 그 속에 포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민안전을 수익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싸워온 민주노총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공공성을 지켜내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격렬하게 싸워온 이들이 있는가?

공공성의 기반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다. 공공성은 도덕군자들이 깊은 수양과 공부 끝에 도출해낸 숭고하고 엄숙한 원리가 아니며, 탁월하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조화롭고 질서 잡힌 사회를 위해 만들어낸 규율도 아니다. 공공성이란 본래 시정잡배들이 저마다의 당파성을 존중받으며 공동체의 미래에 관해 제멋대로 지껄여대며 밀고 당기는 와중에 만들어지는 모자이크 같은 무엇이다. 요컨대 공공성의 요건은 중립성이 아니라 차라리 다양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야말로 공공성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많은 교사들은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하면서도 교육현장이 정치적으로 표백된 성역이어야한다고 믿는다. 많은 시민들 역시 자식들의 학교가 정치논리로 “오염”되지 않기를 바란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란 말로 치장된 이런 정치적 순결주의는 그저 판타지일 뿐이다. 그 무구한 판타지 속에서 학생들은 속수무책 교사에게 세뇌당할 수밖에 없는 백치로, 교사는 어떤 사회현안에도 침묵하며 그저 아이들의 교육에(=입시합격에) 매진하는 서비스 제공자로 존재한다. 이런 정치적 중립성은 결국 체제에 대한 복종과 순치만을 전염시킬 뿐이다. 

교육감 직선제의 아이러니

한국은 교육행정과 일반행정이 분리되어 있지만 여러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않다. 또 직선제가 아닌 임명제가 다수다. 영국에서 한국의 교육감에 해당하는 직책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임명하는 교육국장(director of children’s service)이다.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전통이 강한 나라여서 30개 아카데미(Academie)의 교육청장(Recteur)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다. 독일에서는 16개 연방주의 주지사가 각각의 교양문화부장관(Minister fur Kultur und Bildung)을 임명한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사정이 다르다. 선거를 하는 곳도 있고, 임명하는 곳도 있다. 교육선진국으로 잘 알려진 핀란드의 경우 교육정책의 개발과 입안, 재원의 확보 및 분배는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한편, 지자체장에게 임명된 교육국 국장과 교육문화서비스국 국장은 교육행정을 실제로 수행한다.

과거 교육감 직선제 도입 당시 정당-지자체와 교육계가 격렬히 대립한 사안이 바로 교육행정과 일반행정의 통합 혹은 분리 문제였다. 정당과 지차체는 다른 선진국처럼 교육행정과 일반행정을 통합하거나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교육계는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정치중립성을 들어 격렬하게 반대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진보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자 보수우파 일각에서는 교육감 직선제 폐지와 교육행정과 일반행정 통합을 강변하는 논리가 다시 불거져 나왔다. 선진국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정당화하지만, 사실 속내는 뻔했다. 진보교육감의 약진을 사전에 차단하고 싶은 것이다. 단순히 행정효율이란 관점에서 볼 때, 교육행정과 일반행정의 통합이나 연계강화는 확실히 선진적인 제도가 맞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교원들의 정치적 권리가 철저히 억압된 한국사회의 특수성 때문에 교육감 직선제는 그나마 현장에서 진보적 교육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최후의 방파제 혹은 마지막 숨구멍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된 셈이다.

   
▲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가운데)이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우면동 한국교총회관에서 안양옥 한국교총 회장(오른쪽), 유병열 서울교총 회장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진보교육감에 대한 ‘소비자 만족도’는 높으므로 교육감 직선제는 당분간 폐지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그런데 다시 강조하지만 정작 핵심적인 문제는 시민사회 일각, 그리고 교사들 스스로가 진보교육감을 정당화하는 관점과 태도에 놓여있다. 이들은 현실적 한계에 대한 명철한 인식을 통해 ‘진보교육감 이후’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당위로 인정해버린 다음에 이를 실현할 수단의 하나로 교육감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교육감이 늘 당선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보수단일후보가 출마할 경우, 그리고 혁신학교 등의 현장에서 트러블이 발생할 경우 ‘진보교육감 전성시대’는 언제든 ‘보수교육감 전성시대’로 역전될 수 있다.

스승 이전에 공민이어야

교육감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그에 비해 교육현장에서 실제 ‘선수’로 뛰고 있는 교사들의 조직인 전교조는 교육의 공공성을 지키는 일에 있어 교육감보다 훨씬 중요한 주체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자신을 노동자보다는 공무원, 혹은 특수한 직능인으로 여긴다면, 다시 말해 교육이라는 영역을 하나의 성역으로 특권화하는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다면 정치활동금지의무라는 위헌적 규정에도 적극적으로 맞서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노동자로서의 보편성보다 교사나 공무원이라는 지위의 특수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노동권 뿐 아니라 참교육으로 상징되는 교육의 공공성까지 실현하기 어려워지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전교조가 진보교육감 당선에 일희일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교육의 공공성을 관철하는 강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인식의 모순과 역설을 정면 돌파해야 한다.

한국에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정치활동금지 의무를 통해 실현되어왔다. 때문에 정치적 중립성이 어떤 아름다운 이상을 목표로 하든 상관없이 그것은 실제 교육현장에서 반정치적(anti-political) 태도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는 결정적 토대로 작동한다. 교육이 반정치화한다면, 결국 그 교육을 받은 세대도 반정치적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교육은 성역(聖域)이 아니라 공역(公共領域 public sphere)이다. 공교육 노동자는 훌륭한 스승 이전에 온전한 공민(citoyen)이어야 한다. 늘 그래왔듯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이 아니라 선생님의 삶을 보고 배운다. 그러므로 학생을 계몽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계몽되어야 한다. 다음의 글은 교육 노동자에게 공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중립성이란 타자규정성에 해방된 구체적 이익들이 공적인 의사형성과정에서 토론되고 그 결과들이 표결에 붙여질 때 담보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무원의 중립적 태도라는 것도 일방적으로 강요된 국가방침에의 복종을 통해서 담보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공민(公民)이기도 한 공무원이 관용과 토론의 자세를 통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스스로 담지 할 수 있을 때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정작 공무원 스스로는 정치적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에 대해 경험․실천하지도 못하면서, 그들을 민주공화국의 공무원으로 일하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겠는가.”

이계수, 공무원의 정치운동금지의무에 대한 비판적 고찰, <민주법학> 제29권(2005),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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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당국 '공화국 정부성명'으로 북남관계 개선촉구

북 당국 '공화국 정부성명'으로 북남관계 개선촉구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0  

 

북 당국은 7일 '공화국 정부성명'으로 북남관계 개선과 관련하여 4개항(1.대결상태 종식하고 화해단합, 2.외세의존 배격하고 우리민족끼리 해결, 3.합리적인 통일방향, 4.북남관계 개선의 유리한 분위기 조성)을 통해 전환적 계기를 열어나가자고 촉구하는 한편 이를 위해 남측 당국이 호응해 나서리라는 것을 기대한다고 발표해 그 귀추가 주목된다. 북측은 또한 지난 6월30일 국방위원회 명의로 남측을 향해 '특별제안'을 통해 상호 군사적 적대행위 중단을 제안하면서 7.4남북공동성명 발표 42주년과 김일성주석의 7.7최후 친필 20주년을 계기로 북남관계 개선을 호소한바 있다. 이번 북측 정부성명의 전문을 아래에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성명 (전문)
 

절세의 애국자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국통일과 관련한 력사적문건에 생애의 마지막친필을 남기신 때로부터 20년이 된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시기부터 민족분렬을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시며 우리 민족에게 통일된 조국을 안겨주시려고 한평생 로고와 심혈을 바치시여 자주통일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시였다.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자주적인 통일로선과 방안들을 조국통일3대헌장으로 정립하시고 두차례의 북남수뇌상봉을 마련하시여 우리 민족끼리의 리념밑에 전진하는 자주통일의 새시대,6.15통일시대를 펼쳐주시였다.


위대한 대원수님들께서 제시하신 조국통일로선과 정책,방안과 방도들은 가장 정확하고 공명정대한것으로 하여 오늘도 온 겨레의 지지를 받고있으며 통일의 앞길을 환히 밝혀주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높은 뜻을 받들어 조국통일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기 위한 우리 인민과 온 민족의 투쟁을 정력적으로 령도하고계신다.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통일유훈관철을 최대의 숭고한 사명으로 내세우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령도따라 북남관계개선과 조국통일의 새로운 전환의 시대를 열어나가려는것은 우리 공화국정부의 확고한 의지이다.


오늘 우리 민족의 조국통일위업은 내외반통일세력의 악랄한 도전과 방해책동으로 커다란 난관과 시련을 겪고있다.


남조선에 보수《정권》이 들어선 이후 6.15시대의 모든 성과들이 무참히 유린당하고 북남관계는 최악의 파국상태에 처하였으며 조선반도에서 핵전쟁위험이 날로 높아가고있다.
미국의 패권주의적인 대아시아전략으로 새로운 랭전구도가 형성되고있는 동북아시아지역정세는 복잡다단하다.


렬강들의 첨예한 갈등과 패권경쟁이 조선반도를 둘러싸고 격화되고있는 오늘 이 땅의 주인인 북과 남이 백해무익한 대결을 지속한다면 통일은 고사하고 민족의 운명은 외세에게 롱락당하게 될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북과 남이 민족의 존엄과 명예를 걸고 겨레의 운명과 미래를 책임적으로 개척해나가야 할 중대한 시기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현시기 민족앞에 가로놓인 난국을 타개하고 북남관계를 개선하며 자주통일의 새로운 전환적국면을 열어나가려는 애국애족의 일념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 북과 남은 무모한 적대와 대결상태를 끝장내고 화해와 단합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


지금 조선반도에는 적대와 대결이 극도에 달하여 사소한 언행이나 소소한 마찰도 위험한 충돌과 민족적파멸로 이어질수 있는 엄중한 정세가 지속되고있다.
민족공동의 위업을 위해 온 겨레가 힘과 지혜를 합쳐야 할 중대한 시기에 동족끼리 소모적인 정쟁으로 민족의 참화를 불러오는 비극적사태를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북과 남은 민족의 운명을 위해 새로운 관점,새로운 립장에서 관계개선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


사상과 제도가 다르면 덮어놓고 적대시하던 랭전시대의 관념에서 결단코 벗어날 때가 되였다.
각이한 사상과 제도를 가진 민족과 나라들이 서로 협력하며 공존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사상과 제도의 차이가 서로 적대시하고 싸워야 할 그 어떤 리유로도 되지 않는다.
남조선당국은 시대착오적인 적대관념을 버리고 동족대결정책을 련북화해정책으로 바꿀 대용단을 내려야 한다.


동족에 대한 적대시정책의 집중적산물인 외세와 야합한 각종 북침전쟁연습을 전면중지하여야 한다.
통일을 위한 온 겨레의 헌신과 투쟁의 귀중한 열매인 북남합의들을 존중하고 리행하는것은 화해와 단합을 위한 기본요구이다.
남조선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족공동의 합의들이 부정당하고 대결에 악용되는 비정상적인 관행은 반드시 종식되여야 한다.
남조선당국이 진정으로 북남관계를 개선할 의사가 있다면 북남수뇌분들에 의하여 마련된 6.15,10.4선언을 비롯하여 북남공동의 합의들을 존중하고 리행하는 길로 나와야 한다.

 

2. 북과 남은 외세의존을 반대하고 모든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해결해나가야 한다.


천년만년이 가도 외세는 우리 민족의 념원과 리익을 대변해줄수 없다.
이것은 사대로 망국을 강요당했던 우리 민족의 과거사와 오늘 외세개입으로 내전과 혼란에 빠진 여러 나라들의 참혹한 현실이 보여주는 심각한 교훈이다.
북과 남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 나라의 분렬을 통해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외세의 희생물이 되여서는 안된다.


북과 남은 민족우선,민족중시,민족단합의 립장에서 모든 문제를 민족공동의 리익에 맞게 우리 민족끼리 풀어나가야 한다.
민족내부문제를 외부에 들고나가 《지지》를 청탁하고 동족을 모해하는 《제재》와 《공조》를 구걸하는것은 민족의 운명을 외세의 롱락물로 내맡기는 수치스러운 사대매국행위이다.


우리의 핵은 통일의 장애도,북남관계개선의 걸림돌도 아니며 공화국의 핵무력은 외세의 침략야망을 억제하고 자주통일과 민족만대의 평화와 안전,번영을 위한 확고한 담보이다.
남조선당국은 우리의 핵문제를 거들며 외부에 나가 《공조》를 청탁하는 무모한 행위를 그만두어야 한다.


북과 남은 민족내부문제에 간섭하려는 외세의 부당한 행위를 일체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그에 공동으로 맞서나가야 한다.
우리 민족이 뜻을 모으고 힘을 합치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것이 없다.


우리는 북남관계문제,나라의 통일문제를 민족의 지향과 념원에 맞게 풀어나가려는 립장에 선다면 남조선당국을 포함한 그 누구와도 손잡고 나갈것이다.

 

3. 북과 남은 온 겨레가 지지하고 민족의 공동번영을 담보하는 합리적인 통일방안을 지향해나가야 한다.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존재하는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 련방제방식으로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겨레의 지향과 요구는 날로 높아가고있다.
남조선의 보수세력들이 《신뢰프로세스》니,《드레즈덴선언》이니 하는 허울을 쓰고 《제도통일》,《흡수통일》을 추구하고있는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반민족적행위이다.
북과 남에 근 70년동안이나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존재하고 서로가 자기의 체제를 고수하고있는 조건에서 체제통일은 곧 전쟁의 길을 의미한다.


동족이 장구한 기간 갈라져 살아온것만도 가슴터지는 일인데 북과 남이 자기의 제도만을 고집하여 전쟁의 화를 불러들인다면 그처럼 수치스러운 자멸행위는 없을것이다.
북과 남은 6.15공동선언에서 북측의 낮은 단계의 련방제안과 남측의 련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합의하였다.
북과 남은 련방련합제방식의 통일방안을 구체화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공존,공영,공리를 적극 도모해나가야 한다.

 

4. 북과 남은 관계개선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해나가야 한다.


현시기 화해와 단합의 유리한 분위기를 적극 조성해나가는것은 극도로 악화된 북남관계를 개선해나가기 위한 필수적전제이다.
동족사이에 오해와 불신을 조장하는 온갖 비방중상부터 종식시켜야 한다.


북남사이의 혈연적뉴대와 동포애의 정을 가로막고있는 법적,제도적조치들을 해제하고 접촉과 래왕,협력과 대화의 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
남조선에서 《종북척결》소동으로 각계각층의 통일열망이 유린당하고 반공화국적대의식이 고취되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하루속히 중지되여야 한다.
우리는 당면하여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민족단합의 분위기를 마련하기 위해 남조선의 인천에서 진행되는 제17차 아시아경기대회에 우리 선수단과 함께 응원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이번 성의있는 조치는 랭각된 북남관계를 민족적화해의 열기로 녹이고 전체 조선민족의 통일의지를 내외에 과시하게 될것이다.


우와 같은 우리의 원칙적립장들과 선의의 조치가 실현된다면 악화된 북남관계를 정상화하고 조선반도정세를 완화하며 민족적화해와 단합을 이룩하는데서 전환적계기가 마련되게 될것이다.


우리는 북남관계와 자주통일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나가려는 숭고한 책임감에서 출발한 공화국정부의 원칙적립장을 온 겨레가 적극 지지하고 남조선당국이 그에 호응해나서리라는 기대를 표명한다.

 

주체103(2014)년 7월 7일
평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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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배 공천 배제가 새정치인가?

[복지국가SOCIETY] 새정치연합, 구태정치 반복하나?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제주대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7.07 10:58:34

 

 

 

 

 

 

오는 7월 30일 치러지는 재보궐 선거의 공천을 놓고 여야 정당들이 시끄럽고 분주하다. 전국 15곳에서 선거가 치러지니 가히 '미니 총선'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번 재보궐 선거의 공식 선거 운동은 7월 17일부터 개시된다. 이를 위해 7월 10일과 11일 양일 동안 후보자 등록을 해야 한다. 그런데 후보자 등록 4일 전인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선거구에서 후보자가 결정되지 않고 있다. 지금 여러 편의 구태정치 드라마가 여야 정당에서 펼쳐지고 있고, 이 때문에 후보자 결정이 지연되고 있다.
 
구태 정치를 반복하는 잘못된 공천 과정
 
새정치연합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상황 전개인데, 이는 대다수의 전문가들과 상식을 갖춘 보통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새정치연합이 광주 광산을 지역구에 공천 신청한 천정배 전 장관을 원천적으로 공천에서 배제하기로 한 결정이 그것이다. 천정배 전 장관이 자신의 전략 공천을 요구한 것도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민주적 절차에 따른 공정한 경선을 요구했을 뿐이다. 
 
그런데 새정치연합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는 천정배 전 장관을 경선에서 배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광주 광산을 지역구에서 천정배 전 장관과 경합하고 있던 기동민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빼서 서울 동작을 지역구에 전략 공천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서울 동작을 지역구에서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예비 후보들은 갑자기 날벼락을 맞았다. 새정치연합은 그러면서 광주 광산을 지역구를 전략 공천 지역구로 결정해 버렸다. (☞ 관련 기사 : 천정배 "광주 전략공천 반대, 즉각 경선해야" 반발)
 
이는 전형적인 구태 정치다. 서울 동작을 선거구에서 전략 공천을 받은 기동민 전 부시장은 아예 이곳에 예비 후보로 등록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는 광주 광산을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고 선거 운동을 위한 사무실 개소식까지 마친 상태였다. 광산을 지역구의 경우, 전략 공천 이야기는 처음부터 없었다. 당연히 경선할 것이란 전제 하에 천정배 전 장관과 기동민 전 부시장 등의 후보자들이 예비 후보로 활동을 개시했었다. 그리고 이들은 중앙당에 와서 공천 면접 심사까지 마쳤고, 이 장면이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이번 공천 파동을 보면 새정치연합에는 아무런 원칙도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국가와 정당의 발전이라는 공익적 기준과 판단보다는 어떤 공학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사람을 심겠다는 정치적 욕심만 넘쳐난다. 적어도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당이라면 선거를 둘러싼 절차와 과정도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생략되고, 어느 날 갑자기 전략 공천을 결정하여 힘으로 내리누른다. 납득할 만한 이유도 설명도 없다. '선당후사'라고 강변할 뿐이다. 이러한 패권적 행태가 백주에 버젓이 자행되는 정당이 어떻게 민주적 수권 정당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 7.30 광주 광산을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한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 3일 비를 맞고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 ⓒ천정배 블로그

▲ 7.30 광주 광산을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한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 3일 비를 맞고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 ⓒ천정배 블로그

 
천정배 공천 배제 결정은 잘못된 것이다
 
새정치연합 지도부는 천정배 전 장관을 광주 광산을 지역구 공천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이를 언론에 발표했다. 이로 인해 천정배 전 장관은 정치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부당하다. 공천에서 누구를 배제하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후보자가 국가와 정치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든지, 당의 가치와 노선에 부합하지 않는다든지, 직간접적으로 범죄나 부패에 연루되었다든지, 무능하다든지, 이러한 종류의 뚜렷한 이유를 제시하는 게 마땅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당 지도부가 공천하고 싶은 새 인물이 탁월하게 우수하고 정치적으로도 필요한 인물이라는 설명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광산을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자 공천 과정에서 천정배 전 장관을 배제하는 일련의 정치적 과정은 이와는 전혀 무관했다. 천정배 전 장관은 호남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에 수석합격했을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다. 졸업 후에도 인권 변호사로 사회 발전에 기여했으며, 4선의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흠집 없는 유능한 정치인으로 평가받아 왔다. 또 노무현 정부 시기에는 법무부 장관도 지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가 사랑하고 지켜왔던 정당으로부터 원천적 공천 배제라는 부당한 모욕을 당하고 있다. 
 
천정배 전 장관에게 경선 참여 기회를 주는 게 옳다
 
새정치연합 지도부는 이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일부 당 지도부의 정치적 욕심이 개입된 그릇된 판단 때문에 경륜과 비전을 갖춘 한 유능한 정치인의 정치 생명에 심각하게 모욕과 타격을 가하는 파렴치한 구태정치이기 때문이다. 만약, 새정치연합 지도부가 천정배 전 장관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면서까지 전략적으로 공천하고 싶은 유능하고 새로운 인물이 있다면 사전에 천정배 전 장관에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경선'이라는 민주적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런데 지난 과정에서 합당하게 이해될 만한 그 어떤 절차도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현재까지 광주 광산을 전략 공천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들은 천정배 전 장관을 희생시켜야 할 만큼 그렇게 탁월해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지금이라도 새정치연합 지도부가 광주 광산을 지역구에서 전략공천 방침을 철회하고 '민주적인 경선'을 실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 공천 후보자로 천정배 전 장관을 선택하든 배제하든, 이에 대한 결정은 광산을 지역구의 주민 또는 당원들이 최종적으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만약 새정치연합 지도부가 끝까지 민주적인 경선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천정배 전 장관은 매우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는 원천적 배제 방침을 수용하든지, 새정치연합을 탈당하여 새로운 도전을 하든지, 이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정배의 <정의로운 복지국가> 꿈은?
 
지금도 새정치연합의 당헌에는 '복지국가'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박혀있다. 그리고 지난 2012년 대선 시기, 야권의 문재인 대선 후보는 '보편적 복지국가' 노선과 정책으로 대선을 치렀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정당 정치뿐만 아니라 제1야당에서도 사실상 '복지국가' 논의가 실종되어 버렸다.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 구호였던 '한국형 복지국가'가 집권 이후 사실상 철회되면서 제1야당의 '복지국가' 노선도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 사회의 기대와 열망으로 떠올랐던 복지국가 논의, 즉 보편적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양대 축으로 하는 보편주의 복지국가가 지난 대선 이후 서서히 정치 의제에서 사라진 데는 국민의 기대를 배반하고 복지국가 공약을 폐기한 박근혜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런데 야당에게도 상당한 정도의 책임이 있다. 김한길 지도부의 중도 우파 성향과 리더십 부족, 이에 더해 친노 세력의 연이은 정치 공학적 실책이 겹치면서 민주당은 박근혜 정부의 '복지국가' 공약 철회와 <줄·푸·세> 노선의 부활을 공세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다. 그러면서 우리사회의 '복지국가'를 향한 꿈도 함께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만 것이다.  
 
▲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연합뉴스

▲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연합뉴스

 
결국, 대선 이후 지금까지 시민사회의 줄기찬 공론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한길 대표의 민주당은 '복지국가' 논의를 정치의 전면으로 부상시켜 내지 못했다. 그런데 민주당이 새정치연합으로 바뀌면서 복지국가와 관련하여 상황은 더 나빠졌다. 새누리당의 노선에 근접한 중도우파 성향의 안철수 세력이 합류하면서 제1야당의 정치적 성향이 전반적으로 우 클릭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안철수 공동 대표가 복지 공약을 파기한 박근혜 정부의 기초연금 방안(기초연금 지급금액을 국민연금 가입 기간에 연계하는 방안)을 그대로 수용했던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났다.
 
새정치연합이 내세운 '복지국가' 노선이 정치적으로 구현되길 바란다면 새정치연합 지도부는 천정배 전 장관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 알다시피, 천정배 전 장관은 경기도 안산에서 내리 4선을 했다. 2012년 4월 총선 때는 '사지'에 출마해달라는 당의 요구를 수용하여 강남구에 출마한 정동영 전 장관과 함께 서울의 '강남 3구'에 해당하는 송파구에 출마했다. 기적에 가까운 높은 득표에도 불구하고 결국 낙선했다. 고심 끝에, 그는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호남 출신이지만 호남에서 정치적 자산을 축적하지 못했고, 호남인들로부터 정치적 이방인 취급을 받는 상황을 돌파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제1야당의 '혁신과 변화' 바람을 호남에서부터 일으키길 희망했다. 그 바람이 향하는 곳은 바로 '복지국가'였다. 2010년 9월, 천정배 전 장관은 <정의로운 복지국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합의제 민주주의, 민주적 시장경제, 보편적 복지, 한반도 평화, 그리고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위한 9개 개혁 과제까지 제시했다.
 
천정배 전 장관의 <정의로운 복지국가> 건설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는 경기도 안산에서 4선 의원을 지냈음에도 호남에 대한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호남과 함께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기 위해 광주로 갔다. 결국 어떤 경우든, 새정치연합을 떠나는 일은 그에게는 엄청난 고통일 것이다. 새정치연합 지도부가 그에게 <정의로운 복지국가>의 꿈에 도전할 기회를 주는 게 옳다. 그가 광주에서부터 혁신의 바람을 일으켜 야권을 더 강하게 만들 기회를 주는 것이 덧셈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는 호남과 <정의로운 복지국가> 건설의 꿈을 위해 고독한 결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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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뒤에 다시 찾아온 ‘운명적인 7월’

 
한호석의 개벽예감 <120>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4/07/07 [12:13]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사진 1>이 사진은 1972년 5월 4일 0시 15분 김일성 주석이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접견하는 장면이다. 이후락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사로 1972년 5월 2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도착하여 3박4일 체류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을 자신의 특사로 파견하면서 북측과의 회담에서 평화통일원칙에 대해서만 합의하라고 지시하였으나, 김일성 주석은 이후락 특사를 몸소 두 차례나 접견하면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제시하였고 그 원칙을 명시한 7.4 공동성명을 발표하도록 이끌었다.     © 자주민보


왜 2014년 7월을 ‘운명적인 7월’이라고 하였을까? 
   

북측 국방위원회는 지난 6월 30일 남측 정부에게 보내는 ‘특별제안’을 발표하였다. ‘특별제안’의 제목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틀어쥐고 북남관계개선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자’라고 되어 있다. ‘특별제안’에서 북측 국방위원회는 남과 북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따라 민족공동이익에 맞게 남북관계개선을 추진하자고 남측 정부에게 제안하였다. 

그런데 남측 정부는 북측 국방위원회의 ‘특별제안’을 즉각 거부하였다. 요즈음 남측 정부가 대북적대감을 표출하며 북을 자극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이 북측 국방위원회의 ‘특별제안’을 “얼토당토(하지) 않은 주장과 진실성이 결여된 제안”이라고 받아치며 거부한 것은 뜻밖의 일로 보이지 않는다. 정작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남측 정부가 북측 국방위원회의 ‘특별제안’을 거부한 행동이 아니라 북측 국방위원회가 남측 정부에게 ‘특별제안’을 보낸 행동이다. 북측 국방위원회는 남측 정부가 거부할 것이 뻔한 ‘특별제안’을 왜 이 시점에 보낸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아래와 같은 사실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특별제안’에 나오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은 1972년 7월 4일 남과 북이 분단 이후 최초로 합의, 발표한 7.4 공동성명에 명시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이다. 7.4 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전격적으로 발표되었던 42년 전 그 날, 이 민족의 통일열망은 그야말로 열화처럼 끓어올랐으며 국제사회로부터도 적극적인 지지와 찬동을 받았는데, 특히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7.4 공동성명을 지지하는, ‘코리아문제에 관한 합의’라는 제목의 성명을 1973년 11월 21일에 채택한 바 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40여 년 전에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였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는 진보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으며, 국민들에게 ‘멸공통일사상’을 주입하며 대북적대감을 고취하고 있었다. 그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었지만, <사진 1>이 말해주는 것처럼, 당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반대할 수 없어 그 원칙을 인정하였고, 그에 따라 7.4 공동성명이 합의, 발표되었던 것이다. 

해마다 7월 4일이 오면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따라 남북관계를 개선하자고 제의하는 내용의 대남성명을 발표해왔는데, 특별히 올해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아니라 북의 국정최고기관인 국방위원회가 ‘특별제안’이라는 전례 없는 발표형식으로 남측 정부에게 그 3대 원칙에 따라 남북관계개선에 나서자고 제안한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북측 국방위원회가 이번에 발표한 ‘특별제안’은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대남성명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북의 최고영도자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의사가 ‘특별제안’에 담겼음을 직감할 수 있다. 

주목하는 것은, ‘특별제안’의 마지막 문장이 “운명적인 7월이 남조선당국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 2014년 7월을 ‘운명적인 7월’이라고 하였을까?

시간흐름을 꽤 거슬러 올라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에 펼쳐졌던 복잡한 정세를 되짚어보면, 남과 북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합의하고 7.4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던 1972년 7월도 이 민족에게 ‘운명적인 7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72년 7월이 이 민족에게 ‘운명적인 7월’이었기에, 남과 북은 분단 이후 최초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천명한 7.4 공동성명을 발표한 역사적 사변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1972년 7월이 이 민족에게 ‘운명적인 7월’이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 <사진 2> 7.4 공동성명이 발표되기 약 넉 달 전인 1972년 2월 21일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이 사진은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가 베이징에서 닉슨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1972년 2월 28일 상하이에서 역사적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국제정세가 격동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음을 알려주는 놀라운 사변이었다.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중국은 북이 1971년 4월 12일에 발표한 '조선의 평화적 통일에 관한 8개항'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명시하였다. 7.4 공동성명 발표는 '상하이 공동성명' 발표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격히 변화되는 격동기에 남과 북이 공동으로, 주체적으로 대응한 역사적 사변이었다.     © 자주민보

 
‘상하이 공동성명’과 ‘파리평화합의’, 그리고 7,4 공동성명    

역사적인 7.4 공동성명이 발표되기 약 넉 달 전에 또 다른 역사적인 공동성명이 발표되어 세상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1972년 2월 28일 미국과 중국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당시 미국 대통령은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1972년 2월 21일부터 28일까지 중국을 방문하였고, 그의 중국 방문 중에 ‘상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도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미국과 중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개선을 추진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도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목하는 것은, ‘상하이 공동성명’이 미중관계개선에 대해서만 밝힌 것이 아니라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는 점이다. 관련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중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71년 4월 12일에 발표한 조선의 평화적 통일에 관한 8개항을 확고히 지지하며,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철폐를 요구하는 조선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중국이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힌 ‘조선의 평화적 통일에 관한 8개항’이란, 허담 당시 북측 외무상이 1971년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발표한 조국통일방침인데, 그 내용을 원문 그대로 축약,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남조선에서 미제침략군을 철거시키는 것”

둘째, “미제침략군이 물러간 다음 남북조선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는 것”

셋째,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일조약>을 비롯하여 남조선 괴뢰정권이 민족의 리익에 배치되게 외국과 체결한 모든 매국적이며 예속적인 조약들과 협정들을 폐기하며 무효로 선포하는 것”

넷째,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적인 중앙정부를 세우는 것”

다섯째,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위하여 남조선 전지역에서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며, 남조선에서 체포, 투옥된 모든 정치범들과 애국자들을 무조건 석방하는 것”

여섯째, “현재와 같은 남북의 각이한 사회제도를 그냥 두고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조선련방제를 실시하는 것”

일곱째, “남북 간의 통상과 경제적 협조, 과학, 문화, 예술, 체육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호상교류와 협조를 실현하며 남북 간의 편지거래와 인사래왕을 실현하는 것”

여덟째, “이상의 과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 정당, 사회단체들과 인민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서 남북조선정치협상회의를 진행하는 것”

미국은 위에 열거한 8개항을 거부하였다. 1971년 10월 22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와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당시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담록을 읽어보면, 저우언라이 총리는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북이 발표한 ‘조선의 평화적 통일에 관한 8개항’ 전문을 읽어주었는데, 키신저는 그 8개항이 발표된 것조차 알지 못하였으며, 8개항에 나오는 ‘남조선 괴뢰정권’이라는 용어를 지적하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은 ‘조선의 평화적 통일에 관한 8개항’을 적극 지지하였고, 미국은 그것을 전면 거부하였으니, 그 두 나라가 발표한 공동성명에는 한반도 문제에 관한 어떤 합의도 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상하이 공동성명’은 중국과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별도항목으로 병기한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힌 부분을 원문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와 대한민국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것이며,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남북교류증대를 추구하는 대한민국의 노력을 지지할 것이다.”

1971년 10월 22일에 진행된 저우언라이-키신저 회담에서 저우언라이 총리가 지적한 것처럼, 당시 미국과 중국이 상호관계개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3대 문제는 베트남 문제, 대만 문제, 한반도 문제였는데, 미국과 중국은 1972년 2월 28일에 발표한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베트남 문제와 대만 문제는 해결하였으나, 한반도 문제는 미해결로 남겨두었다. 
 
▲ <사진 3> 1973년 1월 23일 레 둑 토 당시 베트남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장이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제회의센터에서 진행된 회담에서 헨리 키신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나 협상하고 회담장을 떠나면서 주위에 모여든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과 격렬하게 맞붙은 20년 전쟁에서 북베트남이 승리하였다는 자주적 베트남민족의 신심을 그의 당당한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국주의 미국의 패전과 자주적 베트남민족의 승리를 알린 파리평화합의는 긴 협상 끝에 1973년 1월 27일에 발표되었다. 그리하여 미국군은 1973년 3월 29일까지 남베트남에서 철군하였고, 그로부터 2년 뒤 남베트남 친미예속정권은 북베트남에게 항복하였고, 베트남전쟁의 종식과 베트남의 통일이 실현되었다.     © 자주민보


당시 미국과 중국이 상호관계개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베트남 문제와 대만 문제를 각각 해결한 방식은 종전과 철군이었다. 그에 따라, 미국과 북베트남은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베트남전쟁 종식과 베트남에서의 평화회복에 관한 합의’(파리평화합의)를 발표함으로써 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동안 지속된 베트남전쟁을 끝냈고, 미국은 대만에 주둔시켜온 미국군을 1973년 8월 26일부터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주목하는 것은, 1972년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1973년 1월 27일 ‘파리평화합의’가 발표되고, 1973년 8월 26일 대만 주둔 미국군 철군이 시작된 대격동기에 7.4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7.4 공동성명 발표는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미중관계개선, 베트남전쟁 종식, 대만 주둔 미국군 철군으로 이어진 동아시아의 격동적인 정세변화에 남과 북이 공동으로, 주체적으로 대응한 역사적 사변인 것이다. 동아시아의 격동적인 정세변화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던 1972년에 만일 남과 북이 공동으로, 주체적으로 대응한 7.4 공동성명을 발표하지 못한 채 맥을 놓고 방관하였더라면, 이 민족은 동아시아 정세변화의 구석으로 밀려나 자괴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이 공동으로, 주체적으로 동아시아의 격동적인 정세변화에 대응하여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합의하고 역사적인 7.4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으니, 1972년 7월을 어찌 ‘운명적인 7월’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국과 중국이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한 격동적인 사변은 미중관계개선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 격동적인 사변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의 결과였으며, 동시에 동아시아 정세에 미증유의 위험이 임박하였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가 한반도 정세에 충격을 안겨주는 것은 불가피하였으며, 거기에 더하여 동아시아에 임박한 미증유의 위험이 한반도에 파급되리라는 것도 명백하였다. 이처럼 한반도 정세가 거대한 변화와 임박한 미증유의 위험으로부터 각각 충격과 동요를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1972년의 7월은 이 민족에게 그야말로 ‘운명적인 7월’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남과 북은 한반도 정세변화를 민족공동이익에 맞게 추동하기 위한 공동지침을 시급히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이 바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이었으며, 남과 북이 그 3대 원칙을 공동으로 천명한 역사적인 합의가 바로 7.4 공동성명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중국봉쇄전략 파탄과 일본의 무력증강책동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절정에 올랐던 미국의 대중관계개선 움직임은 이미 1970년 하반기부터 조용히 준비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1970년 11월 10일 야히아 칸(Yaya Khan)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이 닉슨의 친서를 들고 중국을 방문하였고, 1970년 12월 18일 마오쩌뚱(毛澤東)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일찍이 중국혁명을 서방에 알린 저명한 미국인 문필가 에드가 스노우(Edgar P. Snow)와 회견하는 자리에서 닉슨의 중국방문을 환영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었다. 그에 화답하여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1971년 4월 14일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를 완화하고 중국과의 인사교류를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긴 새로운 중국정책을 발표하였고, 이틀 뒤인 4월 16일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과의 국교수립이 미국의 목표라고 언급하면서 중국을 방문하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1970년에 자기의 중국정책을 급전환하여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정치적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었다. 

1971년 6월 13일 <뉴욕 타임스>는 ‘베트남 기록문서: 30년 동안의 미국의 개입을 추적한 펜타곤의 연구(Vietnam Archive: Pentagon Study Traces Three Decades of Growing US Involvement)’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미국 현대사에 ‘펜타곤 문서(Pentagon Paper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충격적인 문서는 존슨 행정부 시기에 로벗 맥나마라(Robert McNamara) 당시 국방장관의 특별지시로 1967년 6월 17일 미국 국방부에 설치된 실무진이 작성한 비밀문서다. 그 비밀문서가 언론에 유출, 공개됨으로써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도발한 목적이 중국을 봉쇄하려는 데 있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미국 언론에 유출, 공개된 ‘펜타곤 문서’를 일고 커다란 충격을 받은 미국의 각계각층은 베트남전쟁을 즉각 중지하고 미국군을 철군하라는 반전여론으로 더욱 들끓게 되었다.
 
▲ <사진 4> 1975년 4월 30일 오전 덩 반 민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은 라디오특별방송을 통해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항복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항복선언이 발표된 직후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북베트남군 전차가 남베트남 대통령궁 정문을 부수고 진입하여 북베트남 국기를 게양하였다. 미국은 20년 동안 지속된 베트남전쟁에서 50,000명이 넘는 병력을 잃고 패하였다.     © 자주민보

 
‘펜타곤 문서’에 따르면, 미국의 중국봉쇄전략은 일본-한국 전선, 인도-파키스탄 전선, 동남아시아 전선을 반원형으로 구축하여 중국 포위망을 치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 중국과 격돌하고 있었던 소련까지 대중포위망에 끌어들여 중국을 세계적 범위에서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포위망을 치려던 미국의 봉쇄전략은 결국 완전히 파탄되고 말았다. <사진 4>에서 보는 것처럼,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장장 20년 동안이나 지속된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패하여 퇴각함으로써 미국이 구축해오던 중국봉쇄포위망이 찢어지고 말았다. 더욱이 중국을 포위하려던 미국의 중국봉쇄전략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결정적으로 파탄시킨 놀라운 사변은, 1971년 9월 중국이 사거리가 15,000km에 이르는 첫 자국산 대륙간탄도미사일 둥펑(東風)-5호를 시험발사한 것이었다. 이미 1970년 4월 24일 첫 자국산 인공위성(東方紅-1호)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였고, 1971년 3월 3일 두 번째 자국산 인공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였던 중국은 1971년 9월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시험발사함으로써 마침내 핵강국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는 그 나라의 국제적 지위를 단번에 격상시켰으니, 1971년 10월 25일 유엔총회 제26차 본회의에서는 대만을 유엔에서 추방하고 중국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영입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핵강국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한 중국이 대만을 밀어내고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영입된 1971년에 미국은 결국 자기의 중국정책을 급전환하여 중국봉쇄를 포기하고 중국과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길로 떠밀려 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일련의 사변들이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였던 것이다. 

그러면 1972년의 동아시아에 임박하였던 미증유의 위험은 무엇인가? ‘상하이 공동성명’에는 그 문제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중국은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대외팽창을 강하게 반대하며,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평화롭고 중립적인 일본을 건설하려는 일본 인민들의 열망을 확고히 지지한다.” 여기에 인용한 ‘상하이 공동성명’의 관련문장에 따르면,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대외팽창이 1972년 동아시아에 임박하였던 미증유의 위험이었던 것이다. 

1971년 7월 1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저우언라이-키신저 회담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우리의 견해에 따르면, 일본 군국주의는 현재 되살아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은 미국과 일본이 1969년에 발표한 공동성명에 의해 촉진되고, 뒷받침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가 언급한, 1969년에 발표된 미일공동성명은 1969년 11월 21일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 일본 총리가 워싱턴 디씨에서 진행한 미일정상회담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을 뜻한다. 

주목하는 것은, 그 공동성명에 이런 구절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미국 대통령은 극동국가들이 지역의 안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기대하면서, 미국이 극동에서 자기의 방위공약의무를 존중함으로써 극동의 평화와 안전을 계속 유지하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 이 문장에 따르면, 미국은 앞으로 동아시아의 안전문제를 일본에게 맡기고 자기는 미일상호방위조약의 의무를 이행(implement)하는 게 아니라 존중(honor)하겠다는 것이다. 1969년에 발표된 미일공동성명을 읽어보면,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력이 이전보다 약화되면서 재기한 일본 군국주의세력이 동아시아를 위협하게 될 가능성이야말로 당시 중국이 우려한, 동아시아에 임박한 미증유의 위험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그러한 우려는, 저우언라이-키신저 회담에 키신저의 특별보좌관으로 배석한 윈스턴 로드(Winston Lord)가 작성하여 키신저에게 제출한, 저우언라이-키신저 1971년 7월 29일 회담록에서 더 뚜렷이 나타났는데, 그 회담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일본의 국력이 강화된 판국에 미국이 극동에서 철군하는 것은, 미국의 목적이 일본을 강화시켜 다른 아시아 나라들을 지배하는 데서 일본을 미국의 전위대(vanguard)로 내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당시 중국이 심히 우려하였던 것은, 미국군이 동아시아에서 철군하는 경우 무력증강을 다그치고 있는 일본 자위대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위험요인으로 등장하게 되리라는 점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은 특히 한반도와 대만에 대해 우려하였는데, 1971년 10월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저우언라이-키신저 회담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한반도 문제는 “오늘날 새로운 위기를 발생시키는 문제”라고 하면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조선과 대만을 자기들의 대외팽창을 위한 도약대로 삼았는데, 이것은 세상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고 지적하고 “중국은 미국이 대만 주둔 미국군을 일본 자위대로 대체하는 것을 반대하고, 남조선 주둔 미국군을 일본 자위대로 대체하는 것도 반대한다. 만일 미국이 남조선의 군사력을 전례 없이 증강시켜놓고 철군한다면, 미국군이 철군한 이후 더욱 심각한 무력충돌이 일어날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극동에서 긴장완화를 크게 저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에 인용한 각종 역사자료들은 1970년대 초 베트남전쟁에서 패하여 퇴각을 앞둔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력이 이전보다 상당히 약화되었고, 그 틈을 노린 일본이 무력증강을 다그쳐 미국의 돌격대로 변신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복잡하고 위험한 정세에 처해 있었던 남과 북이 민족공동이익에 맞게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할 긴급한 상황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1972년 7월은 ‘운명적인 7월’이었다. 
   
▲ <사진 5> 일본 자위대가 발족한지 60주년이 된 2014년 7월 1일 일본 육상자위대가 사상 처음으로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에 참가하여 상륙전연습을 벌이고 있었던 시각 상륙전연습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미국 국방부 산하 아시아태평양연구소에서 미국, 일본, 한국의 합참의장들이 3자 군사회담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같은 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끄는 극우내각은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에 관한 헌법해석을 변경하는 조치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일본이 재한일본인 보호라는 구실을 내걸고 미국의 지휘에 따라 일본 자위대를 이 땅에 출병시켜 미국의 대북전쟁 돌격대로 나서겠다는 한반도 재침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 자주민보


지금‘운명적인 7월’에 얼마나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가?     

베트남전쟁에서 패하여 퇴각을 앞둔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력이 이전보다 상당히 약화되었고, 그 틈을 노린 일본은 무력증강을 다그쳐 미국의 돌격대로 변신하고 있었던 1972년의 ‘운명적인 7월’로부터 어느덧 42년 세월이 흘러 2014년 7월이 되었다. 그 7월을 하루 앞둔 지난 6월 30일 북측 국방위원회는 남측 정부에게 보낸 ‘특별제안’에서 “운명적인 7월이 남조선당국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북측 국방위원회가 ‘특별제안’에서 2014년 7월을 ‘운명적인 7월’이라고 한 까닭은, 42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 또 다시 ‘운명적인 7월’을 맞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펼쳐지고 있는 정세변화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북측 국방위원회가 ‘특별제안’을 발표하기 나흘 전인 지난 6월 26일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RIMPAC)’이 하와이 인근해역에서 시작되었다. 수상전함 47척, 잠수함 6척, 각종 작전기 200여 대, 병력 25,000명이 참가한 세계 최대 규모의 해군훈련이다. 미국은 항공모함 1척, 순양함 4척, 구축함 4척, 호위함 2척, 공격잠수함 3척, 수륙양용공격함 1척, 상륙함 1척, 연안전투함 1척, 긴급전투지원함 1척, 보급함 2척, 구난함 1척, 예인선 1척, 병원선 1척, 연안경비함 1척으로 편성된 대규모 해군무력을 참가시켰다. 

그런데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지난 7월 1일 미국과 일본은 매우 이례적으로 몇 가지 움직임을 한꺼번에 연출하여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하와이 카네오헤만(Kaneohe Bay)에 있는 미국 해병대기지에서 일본 육상자위대 서부방면연대 소속부대가 상륙전연습을 실시한 것이다. 일본 자위대 중에서 육상자위대가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에 참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처럼 일본 육상자위대가 사상 처음으로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에 참가하여 상륙전연습을 벌이고 있었던 시각, 그 상륙전연습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미국 국방부 산하 아시아태평양안보연구소(APCSS)에서는 미국, 일본, 한국의 합참의장들이 3자 군사회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진 5>에서 보는 것처럼, 최윤희 한국군 합참의장, 마틴 뎀프시(Martin E. Dempsey) 미국군 합참의장, 이와사키 시게루(岩崎茂) 일본 자위대 통합막료장이 한 자리에 모인 3자 합참의장 군사회담은 이번에 사상 처음으로 열렸다. 

하와이에서 일본 육상자위대가 상륙전연습을 실시하고, 미국, 일본, 한국의 합참의장들이 3자 군사회담을 진행하였던 지난 7월 1일은 일본 자위대가 발족한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는데, 일본 도쿄에서는 바로 그 날 아베 신조(安培晋三)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에 관한 헌법해석을 변경하는 조치를 결정하였다.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에 관한 헌법해석을 변경하는 조치는 아베 내각이 단독으로 추진한 게 아니다. 집단자위권 행사로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길을 터놓은 일본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이미 50년 전에도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기를 바랐던 ‘전과’가 있다. 2013년 11월 30일 기밀해제된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1964년 6월 30일 로벗 맥나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워싱턴 디씨를 방문한 후쿠다 도쿠야스(福田篤泰) 당시 일본 방위청 장관과 회담하면서 “일본에서 헌법 9조를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은 이 움직임이 일본의 경제력에 비해 최소한의 조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후쿠다 방위청 장관은 “헌법 9조는 일본을 약체로 만들려는 점령정책의 유산이다. 경찰예비대, 보안대, 자위대 등의 단계를 거치며 실질적으로는 (헌법 9조를) 변경하고 있다. 여론조사에서도 개헌을 찬성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꼭 50년이 지난 2014년 7월 1일 일본 자위대는 재한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한반도에 출병하여 미국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한국군과 대북합동작전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7월 1일 하와이와 도쿄에서 일어난, 마치 치밀하게 짜인 각본에 따라 움직인 것 같이 보이는 일련의 맞물린 사건들을 살펴보면, 북측 국방위원회가 6월 30일에 발표한 ‘특별제안’에서 2014년 7월을 왜 ‘운명적인 7월’이라고 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1972년의 ‘운명적인 7월’에 그러했던 것처럼, 2014년의 ‘운명적인 7월’에도 미국은 일본을 돌격대로 앞세워 동아시아에서 차츰 쇠퇴하는 자기의 지배력을 유지해보려고 획책하는 중이고, 그 틈을 노린 일본은 집단자위권을 틀어쥐고 무력증강을 다그치면서 한반도 출병기회를 노리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정세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와 무력증강책동이 중일전쟁 가능성에 대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판이다. 미국군이 본진으로 출전하고, 일본 자위대가 돌격대로 앞장서고, 한국군이 선견대로 동원되는 ‘미일한 3자 군사동맹’의 1차적인 공격대상은 중국이 아니라 북이다. 미국과 일본에게 중국은 공격대상이 아니라 견제대상이다. 댜오위다오 주변해역에서 중국과 일본의 영유권 분쟁이 국지적 무력충돌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지만, 중일전쟁의 가능성은 없다. 

중국와 달리, 북은 미국과 일본에게 있어서 견제대상이 아니라 공격대상이다. 2004년 12월 12일 <아사히신붕> 보도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 유사시에 대처하는 ‘작전계획 5055’를 2002년에 공동으로 작성하였고, 일본이 2004년 12월 10일 채택한 ‘신방위계획대강’은 ‘작전계획 5055’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고 한다. 미국과 일본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대북전쟁계획을 세워놓았고, 전시에 한반도에 출병할 미국군을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하고 일본 자위대의 무력증강을 추진하면서, 2자로 변형된 ‘미일한 3자 합동전쟁연습’을 끊임없이 벌여오더니 이번에 결국 일본이 집단자위권이라는 위장명칭을 달아놓은 대외침략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대중군사준비태세는 중국과 전면전으로 맞붙지 않고 견제하는 데서 멈추기 때문에 중국 유사시에 대처할 작전계획이 필요하지 않으나, 북을 전면적으로 침공할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유사시에 대처할 ‘작전계획 5055’를 이미 12년 전에 만들어놓고 그 동안 무력증강과 전쟁연습을 계속해오면서 집단자위권을 틀어쥘 기회를 이제껏 기다려온 것이다. 지난날 한반도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청산을 거부한 일본의 극우정권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그들이 재한일본인 보호라는 구실을 내걸고 미국의 지휘에 따라 일본 자위대를 이 땅에 출병시켜 미국의 대북전쟁 돌격대로 나서겠다는 한반도 재침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지금 일본의 극우정권이 주장하는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것은 1880년대에 ‘미개한 조선을 정벌하자’고 떠들어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망령을 무덤에서 불러낸 것이며, 1960년대에 ‘평화헌법 개정, 군국주의 부활, 핵무기 개발’을 노렸던 1급 전범 출신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 집단자위권 행사를 결정한 아베 신조의 사상적 원류는 후쿠자와 유키치에게서 시작되었고, 그의 정치적 스승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다. 

2014년 7월에 들어오면서 전개되기 시작한 위와 같은 심각한 사태는,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넘어 침략만행을 노리는 흉악한 전범국가로 회귀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일본의 재침위험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운명적인 7월’에 벌어진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지난 7월 3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평양을 먼저 방문하였던 외교관행을 변경하여 황급히 서울에 가서 박근혜 정부에게 중국과 한국의 대일공조를 제안하였겠는가. 

그러나 “운명적인 7월이 남조선당국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북측 국방위원회의 충고도 청와대의 ‘불통 대통령’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북측 국방위원회가 발표한 ‘특별제안’을 즉각 거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중한대일공조’ 제안도 거부하였다. 박근혜 정부는 자기에게 모처럼 찾아온 정책적 방향전환의 기회를 모두 내던지고 ‘운명적인 7월’에 성큼 들어선 것이다. 미국이 장악, 주도하는 ‘미일한 3자 전쟁체제’에 깊숙이 끌려들어가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에 편입되려는 박근혜 정부가 그 ‘전쟁체제의 늪지대’에서 자기 몸을 빼내 남북관계개선과 ‘중한대일공조’를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42년 뒤에 다시 찾아온 ‘운명적인 7월’에 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일련의 언행은 일본이 미국의 계략에 따라 한반도를 향해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게 된 사태의 위험성을 간과한 채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파는 자멸행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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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가족 호소 "아이들 죽음 전 국민이 목격자인데"

 
안산문화광장 세월호 가족대책위 집회 정치권 불신 드러내고 특별법 동참 호소
 
입력 : 2014-07-05  22:18:14   노출 : 2014.07.06  10:10:56
이재진 기자 | jinpress@mediatoday.co.kr  
 

"우리 아이들은 자기들이 왜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저희 부모들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다. 저희들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TV를 통해서 생중계로 모두가 목격하셨다. 대한민국 전 국민이 세월호 사건의 목격자들이다."(故 박성호 군의 어머니 정혜숙씨)
 
5일 안산문화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가족들과 시민 2000여명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100일 약속, 천만의 행동'을 개최했다.

세월호 참사 81일째, 국회에서 특별위원회가 꾸려져 활동을 하고 있지만 불성실한 태도와 유족에 대한 막말로 무리를 일으키는 등 진상규명의 길이 요원한 상황에서 세월호 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하는 자리이다.

故 박성호 군의 어머니 정혜숙씨는 "여러분들이 국정조사를 보고 알고 계실 것이다. 석달이 다 되어가도록 무엇 하나 밝혀진게 없다. 조사를 하라 그러면 사건의 진상을 자료로 제공해야 하는 정부 기관들이 자료를 내지 않고 있다"며 "저희는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그것만은 밝히고 싶다. 여러분 전 국민이 목격자이기 때문에 모두가 함게 해주시고 모두 함께 행동해달라. 국조 끝나고 청문회 열리고 특별법 제정돼서 사건 진상 밝혀질 때까지 여러분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목격자 역할을 제대로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세월호 가족들이 전국민 서명을 받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은 진상규명을 하고 있는 정치권을 믿을 수 없다는 배경에서 시작됐다. 국민의 힘을 바탕으로  국회를 압박해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성역없이 조사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제2의 세월호 참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가족들의 주장이다.

현재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은 310만명을 넘어섰고, 오는 24일 세월호 참사 100일까지 1000만명이 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세월호 가족과 시민 2000여명이 5일 안산문화광장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집회를 열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는 "성역없는 조사, 그 조사에는 분명히 들어가야 할 게 대통령까지 조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러면 독립적 조사기관이 있어야 한다"며 "단순 진상규명이 돼서는 안된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근본적 대책까지 만들 수 있는 특별기구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법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집회에서는 6. 4 지방선거 이후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정치권에 대한 분노가 어느 때보다 높음을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했다.

무대에 선 남성은 세월호 참사를 소회하는 형식의 상징의식을 통해 "희생자 300명쯤이야 별거 아니다. 보상금 받으려고 저런다. 그렇게 막말하는 자들 일면수심의 자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들, 그런 그들이 어느 날 비오는 거리에 나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을 구해달라고요. 그래서 자기한테 표를 달라고요. 단 한명도 구하지 않은 그 자들이 세월호 특별법 서명에 제이름 석자 올릴 줄 모르는 그 작자들이 박근혜 대통령 그 한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을 난 다 보았다"고 말했다.

매주 세월호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정재훈씨(32. 서울 대흥동)는 미디어오늘과 만나 "4월 16일 이후 80일 동안 6. 4 지방선거, 월드컵을 지나면서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낮아진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도 6. 4 지방선거 전에 모든 걸 바꿔주겠다고 눈물을 흘리고 대국민담화까지 했는데 선거 끝나고 나니까 뒤집었다. 대통령부터 그러니 국회의원들도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진상규명에 소극적"이라며 "진상규명이 제대로 될 것 같지 않다. 국정조사도 유족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냐. 의원들을 믿고 갈 수 없다. 특검을 도입해서 진상규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집회 참가자
 
 
   
▲ 세월호 집회에 참석한 한 가족의 모습.
   
▲ 세월호 집회 참가자가 진상규명을 밝혀야 내용을 담은 전단지를 보고 있다.
 
   
故 박성호군의 어머니 정혜숙씨가 특별법 제정 동참을 호소했다.
 
 

故 박성호군의 누나인 박보나씨는 "유가족들에게 세월호가 로또냐, 시체장사한다 이런 욕을 하기도 한다. 친구 버리고 살아나서 좋나 이런 말들을 생존자 학생들에게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말 듣고 보고 너무나 상처받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면서 "사실 이런 욕보다는 이제 그만해라, 지겹다 언제까지 세월호 타령이냐 수학여행 가다가 사고로 죽었는데 왜 이렇게 유난떠나라는 말이 더 힘들고 아프다"고 울먹였다.

박씨는 이어 "너희들이 이 세상에 빛을 내고 갔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제발 이 세상이 우리 아이들을 수학여행 갔다가 불쌍하게 죽은 아이들이 아닌, 이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고 움직이게 한 아이들로 기억됐으면 좋겠다"며 "살려달라 외쳤던 그 아이들 절대 잊지 말아주시고 이 땅에, 이 나라에 다시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여러분 모두가 함께 해주셨음 좋겠다"고 말했다.

   
▲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세월호 집회에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교복을 빨고 너는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향해 '돌아와 달라'는 호소와 함께 '슬픈 제삿상'을 차려 추모하는 상징의식도 진행됐다.

"내 눈 앞에 돌아와라. 말 안듣는 아들, 심술 많은 딸로 그냥 돌아와라, 어제처럼 웃으며 돌아와라."

"2학년 1반 조은화, 2학년 2반 허다윤, 2학년 3반 한지연, 2학년 6반 남현철, 박영인, 아이들과 함께 계신 양승진, 고창석 선생님, 이영숙, 권재근, 권혁구님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아오세요. 꼭 돌아오세요."

제삿상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탄산음료와 피자, 라면, 바나나가 차려졌고 병풍 대신 아이들이 입었던 교복이 걸렸다.

상징의식을 본 지켜본 장지선(80, 안산 본오2동)는 "아직까지도 아이들이 못나와서 애탄다. 정말로 아이고...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마음은 똑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전국 각지에서 세월호 버스를 타고 돌며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고 있는 세월호 가족대책위는 오는 12일 청계광장에 모여 다시 한번 서명운동 동참을 호소할 예정이다. 이어 대책위는 23일 팽목항에 모여 세월호 실종자 기원제를 진행하고 세월호 참사 100일째인 24일 서울에서 집회를 개최한다. 

   
▲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집회 참가자가 "미안하다 잊지 않을께, 진실을 밝힐께"라는 문구 아래 희생된 안산단원고 학생들의 증명사진을 보고 있다.
 
   
▲ 세월호 집회가 열린 안산문화광장의 노란리본을 형성화한 설치물에서 아이가 노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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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매매 당한 뒤 매일 밤 울면서 미군을 받았다”

 

등록 : 2014.07.04 20:55수정 : 2014.07.0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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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지촌에는 인신매매되어 오게 된 미성년 여성들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는 이런 상황에 눈을 감았다. ‘미군에게 접대 잘해달라’는 교육만 진행했다. 교육에 나선 공무원들은 기지촌 여성들을 ‘달러를 벌어들이는 산업역군’이라 치켜세웠다. 1970년대 동두천의 기지촌 풍경.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커버스토리
기지촌 여성 김정자의 증언

▶ ‘우리가 괜히 나섰다가 일본 우익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닐까?’ 미군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할 때 가장 큰 고민이 이거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부가 미군을 위한 위안시설과 여성들을 관리했다고 폭로하고 나섰습니다. 국가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 몰랐던 미군 기지촌의 불편한 비밀들. 김정자씨의 증언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김정자(가명)입니다. 올해 예순넷입니다. 큰 지병은 없지만 요즘 무릎관절이 좀 아픕니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오늘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이렇게 인터뷰에 나섰습니다. 저는 미군 위안부였습니다. 기지촌으로 인신매매되어 평생을 미군한테 당하면서 억울하게 살아왔지만 아무도 저와 제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일한 거 아니냐는 색안경만 끼었어요.

 

우리가 미군한테서 벌어들인 달러로 나라를 이렇게 일으켜 세웠는데, 그때는 우리더러 ‘애국자’라 그러더니 국가는 우리의 존재를 모른 척하고 있어요. 우리는 늙고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언니들(기지촌 동료)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더는 못 보겠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왜 국가에 이런 싸움을 시작하는지 저의 인생을 통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송에 참여한 여성 122명이 다 김정자씨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피해의 구조가 비슷한 여성들이 상당하다. 김정자씨의 증언을 대표적으로 살펴보되, 기지촌에서의 경험은 여성마다 다르다는 점을 밝힌다.

 

미군 기지촌에서 미군과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은 미군 위안부, 기지촌 여성, 특수업태부, 양공주 등으로 불려왔다. 정부는 위안부와 특수업태부를 혼용해 사용해왔다. 1957년 제정된 ‘전염병 예방법 시행령’ 제4조에서 규정한 ‘위안부’는 1969년의 개정 법률에서 그대로 사용되다가 1977년 개정 시 삭제된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까지도 시·군 공무원들은 미군 기지촌 여성들을 한국 남성과 성매매를 하는 윤락여성과 구분해 위안부라고 불렀다.(<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39쪽)

 

 

1950년대 전쟁통에 아버지 잃고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하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 꾐에 
열여섯에 집을 나와 찾아간 
그곳에서 지옥은 시작되었다 

“그 시절에도 성매매는 불법 
미군 기지촌만 합법이었어요 
공무원들은 한달에 한번씩 
‘미군한테 서비스 잘하라’며 
애국자라 치켜세워줬어요”

 

 

스무살로 위장시키는 포주…하루 서너명씩 받아

 

“저는 1950년 1월에 태어났습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어렸을 때 천안에서 살았어요. 친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전쟁통에 저를 보러 왔다가 탈영병이 되어서 헌병한테 잡혀갔어요. 그냥 맞아서 죽었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재혼했어요.

 

제가 열두살 때쯤부터인가 제 의붓아버지는 어머니만 없으면 저를 겁탈했어요. 의붓오빠들도 저를 건드렸어요. 그걸 어머니께 말도 못 하고 꾹 참다가 열여섯살 때(1965년께) 집을 나와버렸어요. 제 초등학교 친구가 있었어요.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방직공장이라고 했어요. 걔를 따라 서울역까지 기차 타고 왔어요.

 

서울역에서 친구 따라 또 어딘가로 갔는데 뭔가 이상한 거예요. 방직공장은 안 보이고 미군들만 길에서 ‘쌀라쌀라’ 거리면서 돌아다니더라고요. 어떤 집으로 들어갔는데 집에 ‘남바’가 붙어 있었어요. 1호실, 2호실, 3호실 이렇게. 저는 여관인 줄 알고 잤어요. 제 친구는 다음날 잠깐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하더니 안 왔어요.

 

(50대로 보이는) 어떤 아줌마가 나타났어요. 나보고 따라오래요. 공장에 데려다 주려나 보다 싶어 따라갔어요. 그런데 저더러 하는 얘기가 ‘네 친구가 빚을 안 갚고 도망갔으니 네가 갚아라’고 하는 거예요. 얼마인지는 얘기도 안 해주고, 친구 대신 돈을 갚아야 제가 나갈 수 있다고 했어요. 어떻게 돈을 버냐고 물었어요. 밤에 언니들 따라가 보면 안다고 했어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제가 간 곳은 파주 용주골(연풍리)이라는 데였어요. 미군기지 주변에서 여자들이 몸 파는 곳이었어요. 제 친구가 빚을 갚지 못해 저를 팔아넘긴 거였어요.”

 

김정자씨는 인신매매를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하기에는 김정자씨의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렸다. 친구의 행동이 원망스러웠지만 김씨는 하는 수 없이 친구의 빚을 갚기로 결심했다.

 

“아줌마(포주)는 저더러 클럽 나가서 손님(미군) 데려오라고 했어요. 저는 3일인가 있다가 그 포주집에서 도망갔어요. 근데 골목에서 잡혀버렸어요. ‘뒤지게’ 맞았어요. 한번만 더 도망가면 섬으로 끌고 가서 죽여버린다고 했어요.

 

(포주가) 파스 갖다 붙여주고 세코날(진정제)을 줬어요. 기분 좋게 해주는 거라면서 줬어요. 하나 먹으면 (중독되어서) 두개 먹어야 하고, 세개 먹으면 네개 먹게 돼요. 손님 데리고 오라고 내보내면 제가 무서워서 말을 못 붙였어요. 맨정신으로는 창피해서 손님 못 끌어요. 저는 그 약이 뭔지도 모르고 계속 먹었어요.”

 

김씨는 나중에 이것이 마약인 것을 알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약을 먹어야만 히파리(호객행위)를 하러 나갈 수 있었다. 김씨가 미군을 데리고 올 때까지 집(숙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한두달 일하면 빚을 갚을 줄 알고 김씨는 그냥 눈을 질끈 감고 기지촌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거기서 헤어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빚은 계속 늘었어요. 방값이랑 화장품·미장원비랑 세코날비랑 내야 하는데 아무리 일해도 못 갚는 거예요. 이자는 계속 붙었어요.”

 

보통 기지촌에는 위안부 여성들의 자치조직이 있다. 자매회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기지촌에서 일을 하려면 이곳의 회원으로 등록해야 한다. 자매회에서는 뻔히 미성년자인 것을 알면서 회원증을 주고 검진증(성병에 걸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증)을 발급해 주었다는 기지촌 여성들의 증언이 많다. 보통 포주들은 십대 아이들에게 스무살이라고 말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김정자씨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다. 보통 기지촌 여성들은 하룻밤에 미군을 서너명씩 받아야 하는 경우가 예사였다.

 

“그러면 거기(음부)가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긴밤·짧은밤(성매매 시간 단위) 아무리 해도 끝이 없었어요. 긴밤은 제 방에서 밤새 자고 아침에 일찍 가는 거고 10달러 받아요. 짧은밤은 제 방에서 30분에서 1시간 있다 가는 거예요. 돈은 모두 아줌마가 가져가 버려요. 제가 직접 못 받아요. 아줌마는 한달 계산해 준다면서 다 뺏었어요. 1~2개월이면 빚 다 갚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돼요.”

 

기지촌의 10대 아이들은 셈법에 밝지 못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포주는 공포의 대상이라, 장부에 무엇이 어떻게 기록되는지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여성들은, 아니 10대의 아이들은, 밤새 울고 밤새 미군의 노리개가 되어 고통의 몸부림을 쳤다.

 

“도망을 갈 수가 없었어요. 일하러 갈 때 늘 남자(포주집에서 일하는 건달)들을 붙여 감시해요. 목욕을 가면 자기네(포주집)에서 제일 오래 있는 년, 주인한테 아부하는 년이랑 같이 목욕을 보내요.

 

경찰한테 신고할 수도 없어요. 주인집에 경찰이 낮에 놀러 와요. 주인아줌마한테 누나라 그러면서 들어와요. 그러면 아줌마는 담배도 싸서 주고 그래요. 처음에 저는 아줌마 남동생인 줄 알았는데 옆의 언니들이 형사라고 귓속말해주는 거예요. 주인이 다 돈 먹이는 거라고. ‘경찰에 신고해도 내가 못 나가는구나’ 그걸 알게 되는 거죠. 내가 죽어서야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한국전쟁은 이 땅의 여성들에게도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 122명은 국가를 상대로 피해배상 소송을 하기로 했다.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건물 4층에서 열린 소송 기자회견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왜 그토록 미군과 결혼하려고 했는가

 

“한번은 그래도 용기를 내어서 도망갔어요. 용주골에 인신매매되고 몇개월 뒤였어요. 파출소로 들어갔어요. 40대쯤 되어 보이는 경찰이 ‘왜 남의 빚 져놓고 도망가냐. 안 갚으면 영창 간다’고 하는 거예요. 포주들이 경찰서에 다 돈을 집어주던 시대였어요. 하는 수 없이 다시 포주집으로 돌아갔지요. 골방에 갇혀 또 뒤지게 맞았어요.”

 

김정자씨는 죽어서 절대 산에 묻히고 싶지 않다. 그가 산에서 겪은 고통스런 경험 때문이다.

 

“산에 가서 미군을 받아야 할 때가 제일 무서웠어요. 부대에서 훈련을 나가면 저희도 따라가야 했어요. 밤에 컴컴해지면 담요 하나 들고 아줌마 따라서 가요. 아줌마가 보초 서는 미군이랑 솰라솰라 말해요. 그럼 훈련 장소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총 들고 서 있던 놈들이 막사에 가서 여자들하고 잘 사람 나오라고 말해요. 이식스, 세븐(E-6는 하사, E-7은 중사)들도 다 했어요. 장교들은 특별히 막사 안에서 해요. 일반 병사들은 훈련장 안에 나무 있는 데에 담요 깔아놓고 하거나 구덩이를 파놓고 해요. 미군들이 파놓은 구덩이지요.”

 

기지촌 여성들은 그렇게 훈련장에까지 불려 가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담요로 삼고’ 미군을 받았다. 제대로 씻을 시간도 없었다. 돈을 벌어서 내려가야만 포주가 혼을 내지 않는다. 어떤 미군은 돈 대신 자신들이 먹는 말라붙은 밥을 던져주어 여성들을 애타게 했다. 여성들은 한번 훈련장에 가면 그곳에서 새벽까지 보내다 돌아왔다고 한다.

 

안전한 성관계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보장되기 어려웠다. “어떤 미군은 콘돔을 안 끼고 해요. 우리는 거절을 못 해요. 그래서 낙태도 참 많이 했어요. 뗀 애만 열일곱이에요.”

 

보건소는 포주들이 끌고 갔다. 강제로 낙태시키는 것이다. 창자까지 다 빠져나오는 고통을 견디며 여성들은 낙태 수술을 견뎠다. 낙태 이후에는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도 또 일하러 가야 했다. 포주들은 낙태 수술로 상한 몸을 보살필 시간도 주지 않았다. 약과 찬물 한컵 정도 들이켜고 다시 일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루 그냥 쉬면 빚이 얼마나 늘어날지 알 수 없었다.

 

“이러고 살아야 하니 죽고 싶은 생각만 들지요. 기지촌에서는 한달이면 두세번은 장례를 치러야 했어요. 철길로도 뛰어들고 연탄불 피워놓고 그 가스도 먹고. 저도 세번 죽으려고 시도했어요. 그런데 무슨 놈의 팔자인지 다 깨어났어요.”

 

김정자씨는 죽으려 해도 죽지 못했다. 공동묘지에서 자살을 기도하면 묘지 관리인이 발견하고, 집에서 동맥을 끊으면 자신을 보러 온 미군이 발견하곤 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왜 죽으려 하느냐’고 묻곤 했다. 김씨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왜 우리들이 미군하고 그렇게 기를 쓰고 결혼하려 했는지 알아요? 그게 아니면 여기를 탈출할 방법이 없었어요. 빚을 갚을 방법이 없어요. 도망가려 해도 경찰 누구도 안 도와주고. 우리에겐 국가가 없었어요.”

 

아니, 국가는 있었다. 미군한테 성접대 잘하라고 교육하는 국가는 있었다. 자매회 회의가 한달에 한번씩 열리면 여성들은 참석해서 교육받아야 했다. 안 그러면 영업을 못 했다. 회의에 가면 헌병, 시아이디(C.I.D. 미군부대 범죄수사과), 보건소 직원, 경찰서장, 군청 공무원들이 모두 와 있있다. 미군은 슬라이드(필름)를 이용해 성병에 대해 설명했다. 여기까지는 그들의 할 일이라고 이해할 법하다.

 

 

파주 용주골에 팔려간 뒤 
동두천·군산·평택 전전 
40대 중반에 기지촌 빠져나와 
도망가고 싶어도 붙잡힐까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미군부대에서 훈련 나가면 
저희도 산에 따라가야 했어요 
그때가 가장 무서웠어요 
산에서 안한다고 반항하다가 
죽은 아가씨들도 있어요”

 

 

‘토벌’당한 성병 의심자들, 언덕 위 하얀 집으로

 

하지만 공무원들은 이상한 교육을 더 했다.

 

“나와서 늘 하는 말이 이거예요. ‘아가씨들이 서비스 좀 많이 해주십시오. 미군한테 절대 욕하지 마십시오. 바이 미 드링크(Buy me drink. 술 사주세요) 하세요. 그래야 동두천에 미군들이 많이 옵니다. 우리나라도 부자로 한번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수는 저희더러 달러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웠어요. 그러면 저희는 그래야 되나 보다 하는 거예요.”

 

일종의 정신교육 같은 것이었다. 여성들은 왜 이런 교육을 받아야 되는가 싶었지만 국가가 노후를 책임져준다고 하니까 그런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턱걸이(동두천시 광암동 일대)에다가 공장을 짓고 아래층에는 가발공장, 위에는 기숙사로 만든다고 공무원들이 설명했어요. 나이 먹으면 여기에 우리가 살 수 있다고 군수가 그랬어요. 땅을 다 사뒀다고. 그러니 열심히 달러 벌라고. 우리는 늙어도 갈 데가 있구나 하고 그렇게 믿었어요.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진 건 하나도 없지요. 포주들은 저희가 벌어온 돈으로 집도 사고 땅도 샀는데. 어떤 악명 높은 포주는 나중에 경기도의원이 되더군요.”

 

경찰은 인신매매되어 팔려온 아이들을 구출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성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가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잡아가는 것도 비인간적이었다.

 

“성병 걸린 미군이 찾아와 칸택(contact·미군 성병환자에게 성병을 감염시켰을 것으로 의심되는 여성을 찍는 것)을 하면 그냥 끌려가요. 찍히면 가는 거예요. 그 미군이 어디서 성병 옮아갖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그걸 토벌당한다고 불렀어요.”

 

‘토벌당해’ 파출소에 끌려가면 유치장에서 머문 뒤 곧바로 낙검자 수용소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성병이 있거나 없거나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병이 있다 하더라도 그냥 환자일 뿐인데 죄인처럼 다루어졌다.

 

“하얀 집(동두천시 소요산 아래 낙검자 수용소를 기지촌 여성들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고 불렀다.) 가면 운동장이 크게 있는데 토벌당한 여자들 실려 오면 (건물 문을) 철커덕 잠그고 꼭 교도소 같았어요. 나갈 수 없어요. 화장실만 갈 수 있게 했어요. 유치장 같은 데서 다섯명씩 자야 해요. 바깥 창문은 쇠창살이 설치돼 있고 면회 와도 쇠창살 사이로 얼굴 보면서 얘기해야 했어요. 아니, 우리가 죄인이에요? 환자를 왜 죄인 취급했는지 이해가 안 돼요.”

 

성병에 걸린 미군에게 무슨 조처를 했는지는 여성들에게 통보되지 않는다. 오로지 국가는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의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비쳤다.

 

“우리는 페니실린을 맞았어요. 그거 맞고 쇼크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어요. 맞으면 걸음을 못 걸어요. 엉덩이 근육이 뭉치고 다리가 끊어져 나가는 거 같아요. 그걸 이틀에 한번 맞아요. 괴로운 언니들은 옥상에 올라가 떨어져 죽거나 반병신 되고 그랬어요. 저는 하얀 집에 (1982년께) 2주 동안 붙잡혀 있다 나왔어요.”

 

김정자씨는 (1965년께) 파주 용주골에 팔려 간 뒤 동두천, 용산, 군산, 평택과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40대 중반(1990년대 중반)에야 기지촌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스물다섯 때(1974년께) 기지촌에서 한번 도망 나왔지만 다시 동두천 기지촌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어디를 도망가더라도 깡패를 보내 저를 잡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어디 공장에 취직하려면 제 신분증을 제출해야 하는데 제가 동사무소 가서 주민등록증 발급받으면 포주집에 진 빚 때문에 경찰이 저를 잡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김씨는 ‘스스로 기지촌에서 살아온 여성들을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니네들이 좋아서 (기지촌 생활) 했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들어요. 한국 정부가 미국 안 끌어들였으면 우리가 이렇게 되었겠어요? 알고 봤더니 그 시절에도 성매매 행위는 법으로 금지돼 있었더라고요. 미군 기지촌만 성매매가 합법이었어요. 박정희 정부가 왜 그런 법을 만든 걸까요. 저는 잘 모르지만 미군 붙잡아 두려고 그렇게 한 거 아니겠어요? 우리더러 달러 벌게 하려고.”

 

미군 기지촌의 형성 과정에 국가의 어떤 정책이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옳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스무살도 안 된 소녀들이 기지촌에 팔려 오고,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국가가 계속 방치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 없이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김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믿는다.

 

 

‘식모 자리’ 알아봐준다고 따라가면 기지촌

 

“억울해 죽겠어요. 저같이 거기 인신매매되어 간 사람이 너무 많아요. 직업소개소에서 식모 자리 알아봐준다고 해 따라가고, 밥 준다고 따라가고 해서 가 보니 기지촌인 경우들이 너무 많았어요. 미군 위안부로 살 줄 알았다면 누가 거기 따라갔겠어요.

 

일본군 위안부도 인신매매되어 간 사람이 많다고 들었어요. 일본군 위안부는 피해자로 인정하는데 왜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국가가 눈감고 있는 건가요. 당한 사람은 있는데 왜 책임지는 사람이 없냐고요. 당신 딸들이 붙잡혀 간 거라면 가만히 있겠어요? 언니들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어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다가 벌써 세분이나 돌아가셨어요. 저는 사과를 원해요. 늙고 병든 우리 몸뚱어리를 국가에서 책임져주기를 바라요. 그게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어요.

 

하늘에 있는 우리 (기지촌) 언니들을 위해서 제가 이렇게 나섰어요. 누군가는 증언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용기를 냈어요.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어요. 제발 잘 좀 보도해 주세요.”

 

김정자씨는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기까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지난달 20일 약 4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할 때 그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30분 증언하다 10분 울고, 30분 증언하다 다시 10분 우는 것이 반복됐다. 낙검자 수용소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고백할 때는 구토를 하기도 했다.

 

인생 전체가 국가가 간섭한 성폭력으로 얼룩져 있던 그에게 이번 인터뷰는 그렇게 힘든 과정이었다. 따라서 인터뷰 때 자세한 내용을 묻지 않고 최소한의 질문만 하려고 노력했다. 대신 김씨와 진행한 인터뷰와 그의 증언록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2013)의 내용을 종합해 이 글을 썼다.

 

김정자씨는 인터뷰 뒤 바닷가로 가 새움터(기지촌 여성 지원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다음날까지 통곡했다고 한다. 힘든 인터뷰를 결심해준 김씨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김정자씨는 현재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최소한의 생활비를 번다. 그를 부양하는 가족은 없다. 대신 새움터의 도움을 받고 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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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군 차기 전투기 F-35, 문제없나?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4/07/06 11:49
  • 수정일
    2014/07/06 11:4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게시됨: 업데이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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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35

F-35 한국 공군 차기 전투기는 문제없나?

7월 5일 KBS 뉴스는 "한국 공군의 차기 전투기 후보로 단독 선정된 F-35가 또 논쟁에 휩싸였다"고 보도했다.

F-35는 지난 6월 23일 플로리다에 위치한 에글린 공군기지에서 이륙 도중 꼬리날개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조종사는 부상 없이 탈출했지만 기체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현재 미국방부는 F-35 비행을 전면 중단한 상태다.

사고의 원인은?

KBS가 인용보도한 7월 2일자 로이터의 뉴스에 따르면 "F-35의 엔진은, 전투기 주변 활주로에서 발견돼 수거된 6피트 길이(180cm)의 파편과 함께 팜비치에 있는 P&W(프랫앤휘트니)공장으로 이송됐고 자세한 조사가 이뤄질 예정"이다.

180cm의 파편은 대체 어떻게 떨어져 나온 걸까. KBS는 이것이 엔진의 문제라고 보도했다.

국내 항공전문가인 A씨는 "항공기 동체에서 1미터 이상 길이가 되는 부품이 몇 개 안되는데, 대체로 엔진 관련 부품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말했다. A씨는 "미국 내 전투기 엔지니어들의 말을 종합해본 결과, 이번 사고는 과열된 엔진을 강제 냉각시키는 시스템이 오작동을 일으켜서 발생한 것으로 보는 분석이 우세하다"고 말했다. A씨는 "기존 전투기의 단발엔진 출력이 보통 3만 파운드 정도인데 비해, F-35는 스텔스 기능을 살리려다 보니 무려 4만 파운드 출력에 이른다. 스텔스 기능을 고려하다보니 폭탄이나 미사일을 내부 무장창에 넣어야 되고 그러다보니 덩치가 커지게 되고, 엔진 출력이 높아지고 연료도 많이 든다. 그렇게 되면 기체의 빈공간에 연료를 많이 탑재하게 되는데, 결국 화재 위험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A씨는 "미국내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도, 당장 엔진 쪽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는 우려를 하고 있었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라면서 "다행히 실전 배치되기 전에 사고가 터졌으니 고치면 된다.라는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7월 5일 KBS 뉴스

 
 

f35

록히드 마틴사가 제조한 F-35는 미국의 5세대 전투기로, F-15를 대체하는 F-22 랩터와는 달리 좀 더 저렴하게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전투 겸 공격기다.

하지만 F-35는 끊임없이 설계 결함 논쟁에 시달려 온 기종이기도 하다. MBC 뉴스에 따르면 올해 6월 13일에도 "미국방부는 해병대가 보유한 F35B 전투기 엔진에서 기름이 새는 사고가 일어나자 전수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F-35가 기체 결함으로 기종 전체 운용이 정지된 것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0년 3월 전기 시스템 오작동으로 비행이 금지된 이래, 소프트웨어 이상과 조종적 전력공급 장치 이상, 비상탈출용 낙하산 이상, 엔진결함 등으로 F-35는 무려 8번이나 결함으로 비행기 금지된 바 있다.

7월 4일 한겨레신문은 "미군은 내년부터 해병대를 시작으로 F-35의 실전 배치에 나선다는 구상 아래 100여 대를 시험 비행하고 있지만, 시험 비행 과정에서 불거진 기술적 문제에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할 경우 실전 배치는 더욱 늦춰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미국도 F-35의 실전 배치에 아직 자신감이 없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F-35를 구매할 예정인 한국 정부의 실전 배치 계획도 늦춰지게 된다.

F-35는 한국 공군의 '3차 FX 사업'을 통해 차기 전투기 단독후보로 선정됐으며, 2018년부터 총 40대를 도입한다. 원래 한국 공군의 목표는 F-35 60대 구매였으나 가격이 크게 오르는 바람에 40대를 먼저 구매하게 됐다.

아직 기술결함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F-35를 40대 구매하는 데 드는 비용은, 총 7조 4천억 원이다.

f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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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철, 국정조사에서 밝혀야할 세월호 열가지 의혹

 
 
조준규 PD 
기사입력: 2014/07/05 [21:34]  최종편집: ⓒ 자주민보
 
 
 



세월호 사고 당시 레이더 영상이 공개 되면서, 세월호 궤적 부근에 보이는 괴물체의 정체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주에는 신상철 서프라이즈대표와 함께 새롭게 드러난 사실들과 침몰원인에 대한 새로운 추론, 그리고 괴물체의 정체, 또한 국조특위에서 꼭 밝혀야할 10가지 의혹에 관해서 이야기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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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 끌려가 손발 묶여 뺨 맞고... 무서운 병원

 
최근 장성요양병원 화재참사로 요양병원의 안전과 더불어 요양시설에서의 강제구금, 폭행, 성폭행, 환자길들이기, 국가재정의 횡령 등의 총체적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요양병원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다시는 이같은 사건으로 또다른 피해자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요양병원의 문제점과 개선점을 제안하고자 한다. - 기자말

홈리스행동 등 '요양병원 대응 및 홈리스(노숙인) 의료지원체계 개선팀'은 최근 인천 소재 ㅂ요양병원의 불법·반인권적 행위를 포착하고 이에 대한 복지부의 현지조사 등 철저한 실상 파악과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노숙인을 상대로 한 요양병원들의 '영업' 행위가 임계점에 달했고, ㅂ병원이 해당 행위를 가장 노골적으로 진행해왔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새정치민주연합 최동익 의원(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이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으로 ㅂ병원 입원자의 42%(188명)가 노숙인인 것으로 드러났다(전체 입원환자(건강보험+의료급여) 447명). 더 놀라운 것은 해당 병원의 건강보험 진료비 청구액의 81.5%가 노숙인 치료 명목이었다는 사실이다. 

'노숙인'이라는 것은 복지부 노숙인정보시스템에 등록된 이를 일컫는다. 여기에는 노숙인 지원기관 이용자 중 상담을 거친 이만 포함되므로 ㅂ병원의 실제 노숙인 환자 입원 및 진료비 청구액은 훨씬 더 클 것으로 보인다. B병원에는 2014년 현재 124명의 노숙인 입원환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숙인은 말 그대로 일정한 거처가 없는 이들이다. 환자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노인성 질환자가 있어야 할 요양병원에 들어앉아 있을까.

요양병원의 노숙인 모시기,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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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광장의 야외 노숙인들의 모습. 그들끼리 의지하며 술로 외로움을 달랜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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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서울역 등 주요 노숙 장소에 요양병원 차량이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하나같이 저 멀리 지방에서 올라온 차량들로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온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이유는 환자 모시기다.

주지하듯, 요양병원은 환자의 숫자가 곧 수익으로 연결되는 '일당정액제'라는 수가체계를 적용받는다. 그러나 작은 지역사회에서 그만한 환자를 다 채우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먼 원정길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돈 한 푼 없는 노숙인을 데려간다고 수익이 날까? 건강보험이나 의료급여기금으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을까? 노숙인 모시기를 포함해 일반적으로 자행되는 아래 몇 가지 경우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우선, 건강보험미가입자나 6개월 이상 장기체납자인 경우다. 그렇다하더라도 공단은 보험급여를 병원 측에 지급하고 가입자에게 이후 구상권을 청구하게 된다. 따라서 병원은 전체 진료비의 80%에 달하는 건강보험 공단부담금을 받아낼 수 있다. 

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 부담금을 낸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병원 입장에서는 80%만 받더라도 수익이 충분하므로 환자의 본인부담금과 보험료 한 달분을 면제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는 의료법(27조 3항) 위반행위다. 드물지만 건강보험이 살아있는 경우는 보험료 대납 절차도 필요없이 바로 수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둘째, 의료급여수급자일 경우다. 해당 환자의 경우 전액 정부 지원이므로 역시나 병원 측에서 따로 신경 쓸 일이 없다. 한편, 일부 병원은 병원 주소지로 수급권을 신청하기도 한다. 입원된 환자 사례를 볼 때 (소득인정액기준이나 부양의무자기준 상) 수급자로 지정될 수 없는 경우임에도 수급자로 선정된 부정수급 사례가 목격되기도 하였다. 

그동안 정부가 부정수급자에 대한 조사를 벌여온 결과, 개인이 아닌 기관 측의 부정이 대부분이었다. 병원과 지역사회의 유착 관계가 부정수급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요양병원 입장에서는 누구든 가릴 필요가 없다. 건강보험 미가입자든, 연체자든, 수급자든 할 것 없이 정부로부터 진료비를 충분히 받아낼 수 있기 때문에 환자로 대환영인 것이다.

요양병원을 도피처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노숙인들

하루가 멀다하고 주요 노숙 밀집 지역에는 요양병원의 차량이 항시 대기 중이다. 다만 얼마 전 시사프로그램에서 요양병원의 환자 유인행위가 보도되자 잠시 주춤할 뿐이다. 환자를 모셔가는 행위가 문제 있나? 그렇다. 이는 엄연한 불법행위다. 

의료법 27조 3항은 "불특정 다수인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행위 등 영리를 목적으로 환자를 의료기관이나 의료인에게 소개·알선·유인하는 행위 및 이를 사주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 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벌칙도 정하고 있다. 

병원은 비영리 기구이기에 상업시설과 같이 호객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부 요양병원들은 이를 간단히 무시하고 노숙인을 대상으로 꾸준히 호객행위를 해 왔다. 그만큼 호객에 따른 성과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거리 노숙인들이 요양병원 차에 오르고, 입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병원을 선택했을까?

노숙인에게 제공되는 일자리인 특별자활근로는 고작 500명에 불과하다. 이 또한 월 평균 규모일 뿐 여름철에는 그 수가 대폭 감소한다. 또한 노숙인에게 월세를 지원하는 임시주거지원 역시 연간 350명 규모에 불과하다. 노숙인 복지를 통해 거리를 벗어나기에는 제공되는 자원이 너무도 부족하다. 이렇듯 복지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노숙인들의 욕구를 요양병원들이 파고들어 이윤추구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사회적 입원'이라 부른다. 의료적 필요도가 낮음에도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입원하는 현상 말이다. 복지로 풀어야 할 일을 의료 민간시설에 전가하는 행위, 현재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 상당 부분 요양병원에 넘어가 있다. 얼마나 많은 노숙인들이 요양병원을 도피처로 삼고 있는지는 따져봐야 하겠지만 그 범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래도 노숙인들이 거리를 벗어나 있으니 다행 아닌가?'라는 물음도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요양병원 생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 안에서의 생활은 안정을 취하고 육체, 정신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것보다 건강을 해치는 데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노숙인 보호? 질병을 만드는 요양병원

지난 4월, 앞서 언급한 반인권적 ㅂ요양병원에 대한 복지부의 현지 조사 요구 등의 이유로 환자 진술작업을 하던 중 만난 이아무개씨의 사례를 보자. 그는 지난해 11월 서울역 광장에서 동료들과 있던 중 평소 면식이 있던 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이씨에게 소주를 1~2병 사 주면서 병원에 가자고 설득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곧 진단서를 제출해야 했던 이씨는 퇴원 후 진단서를 발부받을 요량으로 병원 차에 올랐다. 그가 사준 소주는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마셨다.

병원에 환자를 유인하는 이를 '픽업자'라 불린다. 이들은 알코올 의존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술을 사줘 판단력을 흐리게 하거나,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게 해 준다고 현혹하여 실적을 올린다. 질병이 있는 이는 병을 중하게 만들고, 건강한 이들은 없는 병을 지어내어 입원을 시키는 것이다.

병원 생활에서도 믿기 힘든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 병원에 있던 다른 진술자 김아무개씨에 따르면, 입원 중 다른 여성과 말다룸을 했다는 이유로 보호사 두 명이 김씨를 독방으로 끌고 가 뺨을 여러 차례 때리며 양 손과 발을 묶었다고 한다. 앞서 말한 이씨 역시 입원 중에 새로 온 입원환자가 독방으로 끌려가 10분에 한 번 꼴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형법으로 금지된 폭행이 병원 안에서 버젓이 자행되는 것. 또한 생명유지 장치 제거 등과 같은 위험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신체 억제대'를 환자 길들이기를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일은 요양병원에서 관행화 돼 있다. 이에 복지부는 지난해 말, '요양병원용 신체 억제대 사용감소를 위한 지침'을 마련하였다. 이 지침에 따르면, 신체 억제대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야 하며, 사용 시 환자나 보호자의 동의를 받게 돼 있다. 그러나 이를 지키지 않은 병원은 많고, 복수의 진술에 따르면 ㅂ병원도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구멍 뚫린 복지... 열쇠는 보건복지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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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한 쪽방촌.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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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병원의 이같은 불법·반인권적 행위는 철저히 조사되고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유사 행위를 하고 있는 병원들에 대한 일제조사 역시 반드시 이뤄져 노숙인을 상대로 한 영리행위를 금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요양병원들의 생존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에서 처벌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허울뿐인 '인증제'와 같은 면피용 대책이 아니라 요양병원에 대한 구조적 수술을 단행해야 하는 이유다.

물론 요양병원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만으로 노숙인을 이용한 약취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노숙인 복지가 여전히 잔여적 지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비록 사회적 입원 문제는 해결될지라도 또 다른 형태의 노숙인의 사회적 도피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복지가 책임질 부분을 확실히 책임지는 것이 노숙인을 이윤추구 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장성병원, ㅂ병원 문제 등 최근 발생한 요양병원 문제에 대한 대책은 요양병원에 대한 철저한 개혁과 더불어 사회적 입원 계층에 대한 복지 개혁이라는 두 축으로 이뤄져야 한다. 보건과 복지 두 축 말이다. 열쇠가 보건복지부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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