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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15
    세계무역의 폭력 & 에너지 혁명
    tnffo
  2. 2009/07/15
    이란에 대한 좌파담론의 비극 ("반동좌파" 라는데...)(1)
    tnffo

세계무역의 폭력 & 에너지 혁명

아래에 옮겨오는 레디앙 기고글의 작자인 장성열이 누구인지, 그의 진단이 얼마나 가능하고 정당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지 내가 좋아하는 말씀들을 담고 있기에(내 생각과 비슷하기에) 모셔다 둔다. "에너지 혁명"과 -내가 한 1주일 노느라고 바빠 모르던 사이에 타결되고만- '한·EU FTA'를 비롯한 각종 자유무역이 갖는 맹점을 잘 짚어주는 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 않는 사람도 많겠지만, 마치 <<[발췌] 무능한진보 vs 농업정치 http://blog.jinbo.net/radix/?pid=85>> 포스트의 댓글러처럼!). 이하 펌글 전문이다.

 


[독자 투고] 유럽-맑스-공업-세계무역의 폭력 : “에너지혁명은 무의미하다”  
  
"독일의 마르틴 예니케 교수에 따르면, 스마트 성장은 생태적 현대화를 통한 지식 집약적이고 자연 절약적인 생산을 하자는 뜻이며 대체 에너지를 의미하는 에너지 혁명을 뜻한다. 즉 스마트 성장이란 숫자상으로 드러나는 성장률은 작더라도 실제 혁신의 비율은 높은 상태를 말합니다. 노동생산성은 줄어들지만, 자원생산성은 더 높아지는 상태이다. 제 3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친환경 경제가 단순히 에너지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정치구조까지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지금 세계를 흔들고 있는 식량위기는 미국 주도의 세계무역체제의 궁극적인 결과이다. 예를 들어 독립 당시에는 식량을 수출했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지금은 전체적으로 식량의 30% 정도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부채에 고통 받는 나라들에 대한 IMF와 세계은행의 은행관리이다.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색채를 강화한 이 두 조직은 세계에 선진국형 공업을 모델로 한 농업을 강제하여 대규모 농지에 수출용 환금작물의 재배를 장려했다. 게다가 GATT 체제하의 농산물 무역자유화 때문에 정부의 원조를 받은 값싼 구미의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와, 지역에서 가족농업에 종사하는 자작농민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IMF와 세계은행의 경제전문가들은 농업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가족농업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식량위기는 그저 식량 확보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엘리트들의 세계무역의 논리와 민중의 지역적 자급의 논리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농을 대체한 식량위기

이런 갈등은, 1995년 창설된 WTO(세계무역기구)의 도하라운드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대립으로 완전히 교착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WTO의 목표는 관세의 전세계적인 일괄인하였는데, 제네바에서 열린 153 개국 가맹국의 교섭은 완전히 결렬되어 재개될 전망조차 불투명하다. 결렬의 최대 원인은 정부원조를 받은 선진국의 과잉 농산물이 대량으로 유입되면 자국의 영세농민들에게 타격을 입힌다는 이유로 인도가 긴급수입제한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브라질도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무역에서 북측의 선진국이 남측의 개발도상국에 제멋대로 규칙을 강요하는 시대는 완전히 끝이 났다. IMF와 세계은행의 신자유주의는 자유무역은 약육강식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고, 그것이 WTO를 좌절시킨 원인이 되었다.

개발도상국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것이 1992년 온두라스에 본부를 두고 창설된 비아캄페시나(Via Campesina, 농민의 길)이다. 비아캄페시나는 세계 각지의 자작농, 선주민, 농촌여성, 어민들로 된 백 개 이상의 조직이 연합한, 회원 수가 1억 5천만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민간조직이며, 창설된 지 얼마 안되지만 이미 국제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종래의 식량안보 대신에 비아캄페시나가 주장하는 식량주권원칙을 헌법조항으로 삼는 나라도 생겼다. 식량주권이란 국제시장에 좌우되지 않고 인민이 자신의 먹을거리나 농업방식을 스스로 정의하는 권리다. 농산물을 단지 상품으로 유통시키는 무역자유화나 현지 자작농의 존속을 곤란하게 만드는 식량원조 등은 주권 침해에 해당된다. 나아가서 그것은 식량과 관련하여 국토나 식문화의 존재방식에까지 걸친, 자신의 독자적인 생활양식을 선택하고 지킬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활 양식을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세계무역에 대한 근원적인 반대인 것이다.

 

“식량원조도 주권침해다”

비아캄페시나의 요구는 자급에 국한되지 않고 농민 이외의 지역주민들도 인간다운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원과 물자를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요체는 선거의 유무와 경제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활양식에 관련한 지역주민의 자치에 있다. 따라서 무역과 자급을 둘러싼 논의는 최종적으로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시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진보신당에서 또는 진보당에서의 유럽 사민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자칫 근본적인 민주주의 위기를 가져 올 수 있다. 유럽 사민주의 국가들의 富의 원천은 아직까지 남쪽 신흥개발국으로 부터의 약탈에 근본을 두고 있음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제는 과거와 같은 남쪽 나라로부터의 약탈은 더 이상 쉽지 않을 전망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는 유럽과 자유무혁협정을 맺었다. 앞으로 자유무혁협정은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콜럼버스가 우연히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인도의 향신료와 일본의 황금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인들에 의한 신세계 아메리카의 약탈과 식민지화였다. 아즈텍과 잉카의 막대한 금은의 약탈은 유럽의 통화유통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맑스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부른 것의 실체가 바로 이 약탈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담배나 설탕 등 아메리카 산물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생기는 한편, 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은 종래의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한 물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무한히 시장이 확대되었다. 시장의 거대한 수요를 생산하기 위해 카리브해 지역의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흑인들의 노예노동이 필요로 했다. 풍부한 자본, 무한히 확대된 시장, 싼 노동력이라는 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위한 조건이 이렇게 갖춰졌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제무역의 약탈을 통해서 생겨났고, 그 뒤에 유럽의 강력한 국가들이 존재했었고, 유럽의 국가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무한한 자원과 싼 노동력을 약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민주의, 맑스, 유럽

무역은 전통적 생활양식에서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런 끊임없는 창조적 파괴가 오늘날 세계무역의 원리가 되었다. 이는 세계무역이 상호간의 필요한 물자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무한한 확대에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이는 자본의 유통과정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생산과정(플랜테이션 경영)까지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세계무역은 식민주의 폭력의 모태로 태어났고, 이에 종사하는 자의 막대한 이익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화나 흑인노예의 결과이다. 이는 곧 지역 간의 대등한 교역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대등한 교환을 위장한 항시적 약탈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가 곧 유럽의 자유 평등을 기반으로 한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와 같은 때였다. 따라서 유럽 근대 국가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자원수탈과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인 무역은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인이 중심이 되었고, 그것이 상대국의 생산까지 지배하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무역을 통한 식민지화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또 전통적인 무역에서의 서민들은 변함없이 지역적인 자급에 기초하여 생활 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근대국가가 이런 이유로 탄생이 되고, 신세계로 이주한 이주자들 역시 토지와 생산 수단을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었다. 존 로크의 ‘시민정부론’의 사회계약은 바로 새로운 이주자들이 약탈한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대가로 국가의 창설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신세계의 약탈 무역을 기반으로 해서 유럽과 신대륙에 근대국가가 탄생되는 것이다. 영국은 세계무역을 통하여 대상업제국을 만들었지만, 영국이 경험한 시행착오를 의식적으로 계획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오늘날 세계무역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설계하고, 그것을 세계에 강제한 것이다.

 

근대국가와 무역전쟁

미국이 1, 2 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중심의 세계적인 무역체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이는 제2차 대전 이후 IMF, 세계은행, GATT에 의해 보완되는 브레튼우즈체제로 실현되었다. IMF나 세계은행의 역할은 외환시장의 안정과 후진국 원조가 아니라 미국식 경제성장의 논리에 세계를 편입시켜서 성장조건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런 결과로, 오로지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각 나라의 균형잡힌 국토개발과 경제 방식이 왜곡되어 버렸다. 그 결과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공업용 자원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능가하는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거의 자급자족하던 식량과 원유에 대해 세계적인 수입국이 되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식량과 원유의 가격 상승은,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미국에 의한 왜곡된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들의 번영에 종말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신흥 독립국이다. 미국은 자국에서만 통용되는 경제성장 논리를 그들 나라에 강제해 왔다. 근대화를 위한 자본이나 기술이 없는 나라들은 IMF 융자나 세계은행의 원조에 의지하여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구미형 경제성장을 위한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나라들에서 그런 융자나 원조가 결실을 거두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극히 이례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한국이고, 일본의 경우는 식민지가 아니고 오히려 제국주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 올 징후가 뚜렷하다. 그리하여 남쪽의 신흥 독립국의 세계는 부채에 늘 시달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미국과의 자유무혁협정에 못지않게 유럽과 그 어느 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도 반대해야 하지만 다른 나라와의 그것도 역시 반대해야 한다. 이 모든 무역의 국제질서는 대량소비와 대량 생산에 기초한다. 그 동안 선진국은 후진국을 착취함으로써 그들 나라의 소비와 생산을 유지해 왔다. 우리나라 또한 다른 나라와의 자유무역 협정을 맺으면서 착취하거나 착취당하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마르틴 예니케 교수는 다음 과 같이 이야기 했다. "제 3의 산업혁명은 혁신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성장률에 촛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또한 각 나라별로 기술 이전이 아닌 기술협력을 통한 혁신이어야 한다고 했다. 예니케 교수의 스마트 성장의 핵심은 대체 에너지 기술 혁신을 통한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의 혁명을 뜻한다.

 

과연, 기술혁신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러나, 설사 예니케 교수의 말대로 에너지에 대한 기술 혁신이 일어난다고 해서 바뀌어지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지금까지 누려 온 소비의 형태를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기득권층의 富는 절대적인 아성일 것이다. 에너지 혁명을 통해서 이것이 바뀌어질까? 아니, 에너지 혁명을 시도한 것은, 스스로 이런 소비와 부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만약, 대량 소비와 부에 대한 폭력성을 획기적으로 개혁할 의지가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화석 연료 사용 감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에너지보다 다른 것에 있다. 소비는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를 만족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만족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찾아왔다. 그래서 새로운 설명이 필요했다. 바로 과학이라는 형태로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분업과 노동생산물의 분배를 해결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정치경제학에 의하면, "분업과 분업을 통한 생산물의 향유(소비)는 수요와 공급에, 자본, 임차료,임금,가치,이윤에, 즉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경제 활동을 지배하는 불변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많은 서적과 강연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 결과 불균형은 점점 증가했다. 어떤 사람(나라)들은 일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나라)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지금까지의 산업혁명은 생산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 3차 산업혁명은 에너지의 효율과 생태에 대한 것들이다. 산업혁명이 사회전반의 변화를 야기했는데, 제 3차 산업혁명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이런 식의 대량 소비와 부의 불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에너지 혁명은 자칫하면 이런 사회구조를 더욱 확고히 할 수도 있다. 유럽의 사민주의가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했듯이. 다른 나라의 불행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에너지 혁명은 부질없는 짓이다. 기존의 성장의 경제는 이런 것들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1000조를 100조로 줄이자”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은, 1000조 달러를 1100조 달러로 성장해서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성장을 할수록 분배가 더 어려워진다) 1000조 달러를 100조 달러로 감소시켜 분배하는 것이다.(성장이 감소할 수록 분배는 쉬워진다) 스마트 성장은 성장률에서는 관심이 없지만 자의든 타의든 기존의 경제구조(대량소비, 왜곡된 부)를 유지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런 불손한 목적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 성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성장은 더욱 감소해야 한다. 그럴수록 분배는 더욱 원활해진다. 성장할수록 분배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야기 하나. 부모가 3000만원 전셋돈을 남기고 간 형제는 웃으면서 나누어 갖지만, 부모가 30억 땅을 남기고 간 자식들은 원수가 될 확률이 높다)

예니케 교수 또는 일부 생태주의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생태가 단순한 녹색만을 이야기 하는 줄 안다. 그러나 생태적인 철학의 기본은 관계이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 그 관계가 평등해야 한다는 데서 생태주의는 출발한다. 따라서, 생태적 해결 없이는 민주주의도 요원하다. 에너지 혁명보다 에코(생태)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들의 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에너지 혁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제 성장을 대폭 줄이는 일이다. 불교에 中道라는 말이 있다. 불교는 정신적 해탈을 중요시 여기지만, 물질 또한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그 물질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디앙 2009년 07월 15일 (수) 11:35:49 장성열)

 

 

cf.) 사하라에 태양열발전소 ‘데저텍’ 건설… 유럽에 전력 공급 
독일 20개 대기업 컨소시엄… 사상 최대 4천억유로 투자

한국에너지신문 2009년 06월 19일 (금) 09:36:10 김경란 독일 주재기자
독일 대기업 20개가 뭉쳐 독일 신재생에너지 역사상 최대 규모인 4000억 유로를 북 아프리카 지역 사하라 사막에 투자해 태양열 발전소를 짓고 생산된 전력을 유럽으로 공급한다는 프로젝트가 드디어 현실화된다. 900만m²의 면적, 바위, 모래, 돌로 형성되어 있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사하라는 독일 면적의 20배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큰 사막이다. 북대서양과 적해 사이에서 빛나는 태양은 여름엔 50~60℃까지 올라가는 뜨거운 에너지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에너지는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었다. 수년전부터 많은 과학자들은 사하라 사막에 태양열 발전소를 세우면 유럽에 ‘솔라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히고 이 꿈이 실현되길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오는 7월 13일 20개의 독일 대기업들은 뮌헨에 모여서 정식으로 사하라 프로젝트 컨소시엄을 구성한다. [...]  http://www.koenerg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544

 

cf.2) 관련 그림: http://blog.paran.com/blog/detail/postBoard.kth?pmcId=blue5191&blogDataId=33032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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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 대한 좌파담론의 비극 (&quot;반동좌파&quot; 라는데...)

나는 지난 6월 13일 포스트(http://blog.jinbo.net/radix/?cid=4&pid=219)에서 이란 상황을 보는 좌파의 입장이 애매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때로는 모순적일 수도 많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적-과정적 이해 대상이라는 것)을 힘겹게 언급했었다. 역시나 그런 난감한 입장을 해소하기 위하여(아마도) 레디앙의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인 장석준은 어떤 이란계 카나다 좌파 정치학자의 글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수고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좌파가 어떻게 "반동적 성직자 체제를 무작정 옹호" 할 수가 있겠냐는 비판적 동기에서 찾아낸 듯한 아래의 글이 작금의 이란 상황을 이해하고 정리하고자 하는 특히 좌파들의 "시각을 교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역자는 말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별로 "큰 도움"은 안 되는 듯하고, 그래도 몇몇 난 좌파 분들의 시각이 비판의 도마에 올라오니 참고삼아 옮겨다 둔다.

혹여 어떤 좌파가 이란 보수 정권을 지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무작정"의 옹호는 분명 아닐 것이며, 명색이 좌파가 반-미-제국주의라는 임박한 이란적 요청에 눈이 멀어 -본문에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언급하는- "여성, 청년, 노조 운동가들, 지식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의 주장이 갖는 민주적 성격을 외면하자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열거된 반-보수적 외침의 주체들이 갖는 주장 내용의 민주성이 곧바로 그들의 좌파성(참 민주주의)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며, 어쩌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혹은 미국식 민주주의)로 전락할 농후한(내 생각에) 가능성이 더 심각할 수도 있다는 것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런 측면에서, 아래의 글에서 글쓴이는 자기 혼자만이 상황을 꿰뚫고 있고 남들은 편협되고 무지한 시각을 갖는다고 말하지만, 그의 시각도 아주 객관적으로도, 상황에 충실하게도 안보이고, 그의 결론도 당연한 말씀 이상의 무슨 엄청난 혜안의 산물은 별로 아닌 듯하다. 이하 펌글.

 

[역자(장석준) 주] 이슬람 성직자 독재에 맞선 이란 민중의 투쟁이 한창이다. 그런데 전 세계 좌파 사이에서도 이 투쟁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한창이다. 혹자는 ‘이란 이슬람 체제 대 미 제국주의’라는 대립관계만을 중심에 놓고서 반동적 성직자 체제를 무작정 옹호하기까지 한다. ‘좌파’의 이름으로 말이다. 아래 소개하는 이란 출신 좌파 정치학자 사이드 라네마(캐나다 요크대학 정치학 교수)의 글은 이러한 시각을 교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지난 7월 10일 미국의 진보적 웹사이트 에 발표한 글이다. 

 

 

이란 근본주의 집권세력을 옹호하는 좌파 담론의 비극 : “모든 이슬람 분파는 자본주의자다”
글, 사이드 라네마(캐나다 요크대학 정치학 교수); 번역, 장석준
 
서방 언론은, 좌파든 우파든, 이란에서 벌어진 선거 쿠데타와 그에 뒤이은 반대파 투표자들의 봉기 및 그 억압에 자극받아 온갖 종류의 분석들을 쏟아내었다. 주로 네오콘 이데올로기와 반동적 관점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우파는 왕정복고를 꿈꾼다. 그들은 불만을 품은 이란 대중들 사이에서 친미/친이스라엘 동맹군을 찾고, 동유럽 식 벨벳 혁명을 추구한다. 이러한 분석들은 내용이 별로 없기 때문에 비판할 가치조차 없다. 그들이 복잡한 이란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겠다.

 

그런데 서방 좌파의 경우에도 심각한 혼돈이 나타나고 있다. 진보 좌파는 처음부터 이란 시민사회 운동을 분명히 지지했다. ,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캠페인>, <불렛(총탄)> 그리고 여타 언론은 복잡한 이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올바른 분석을 제공했다. 어떤 지식인들은 이란 동지들과 함께 선언서에 서명한 반면 또 다른 일부는 계속 침묵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하지만, 마치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무비판적으로 반제국주의의 주역으로 칭송받는 가자나 레바논 상황처럼, 아마디네자드가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외관상 강경한 언사를 내뱉었다고 해서 좌파의 일부 논자들이 그를 반제국주의의 주역으로 떠받드는 걱정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혹자는 조잡한 계급 분석에 기반해서, 아마디네자드가 부유층에 맞서는 캠페인을 벌였다며 마치 그가 가난한 노동 대중을 지원한 것처럼 상상하면서 노골적으로든 은연 중에든 그를 칭송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석들 역시 생동하는 이란 시민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참된 운동을 무시하며, 민주주의와 정치적 개인적 자유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서방 정치 선전에 부화뇌동하는 중간계급의 관심 정도로 폄하해버린다. 이것은 바로 하메네이, 아마디네자드와 그 지지자들이 갖고 있는 시각이기도 하다.

 

가장 기괴한 사례는 <먼슬리 리뷰>의 자매지인 온라인 저널 이다. 이 저널은 어떤 때는 바시즈(이란의 이슬람 민병대)의 무뢰한과 범죄자들의 정치 선전을 실어주기까지 했다. 이 웹사이트는 친이슬람주의 필자들에게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해왔다. 이들은 결코 좌파라고 할 수 없는 위인들이지만, 이 사이트를 운영하는 좌파들은 이들의 주장을 높이 평가한다. 한 필자는 이란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복지 개혁과 사적 소유권” 사이의 투쟁이며 아마디네자드는 “이란 재계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자 계급을 격분케 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아마디네자드는 “이란의 금융 보수파 후보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이 필자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 안의 아마디네자드 파벌과 그를 지지하는 보수 성직자 세력이 장악한 또 다른 만만치 않은 “재계 이해”에 대해서는 언급도 안 하는 편의적 태도를 취한다. 아마디네자드가 국가 소유 주식을 자신의 패거리에게 넘겨주는 등 “사유화” 정책을 충실히 따른다는 점 역시 언급하지 않는다.

 

1979년 혁명기에, 지금은 사라진 투데당(과거 이란 공산당-역자)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이슬람 체제의 요소들 속에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과 “사회주의적 지향”을 추구하는 “비자본주의자들”을 찾으려고 헛된 노력을 계속했다. 이제는 저널이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희귀 생물종을 찾으려고 새로운 탐사 작업에 나선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슬람 체제의 모든 분파는 항상 철저한 자본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에 전재된 “이란: 대안적 독해”라는 글에서 아즈미 비샤라(이스라엘 안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이해를 대변하여 의회에 진출하기도 했던 저명한 진보파 아랍-그리스도교계 정치인-역자)는 이란의 전체주의 통치 시스템은 다른 전체주의 시스템들과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이란의 시스템은 '지배 질서와 그 이데올로기 안에 참으로 높은 수준의, 헌법에 명문화된 민주적 경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비샤라는 이러한 '경쟁'이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며, 온건파 무슬림이나 광범한 세속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좌파 등 다른 세력은 이슬람 체제의 반민주적 기구에 의해 배제당하는 현실은 설명하지 않는다. 비샤라가 제시하는 두 번째 차이점은 '통치 기구에 스며들어 있는 공식 이데올로기가 압도적 다수의 인민이 받아들이는 진짜 종교'라는 점이다. 다수 이란인들이 무슬림이고 시아파라는 점에서는 그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 하지만 모든 이란인들이 종교적이라거나 집권자들이 신봉하는 것 같은 반계몽적인 근본주의 신조를 따른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또한 그는 이란에 상당수의 비종교 인구가 존재하며, 그 비중이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들 중에서 가장 높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이란에 존재하는 '정치적 다양성에 대한 상당한 관용', '비판의 허용' 그리고 '권력의 평화적 교체'를 칭송한다. 이쯤 되면 우리의 저명한 팔레스타인 정치가가 진짜 이란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상상 속의 이란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인지 헛갈릴 만도 하다.

비샤라는 수천 명의 정치범 학살, 지식인들을 목 졸라 죽인 참극, 그리고 이 나라 안에서 가장 유능하고 진보적인 목소리들이 침묵을 강요받아온 것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는 말인가? 그는 12명의 비선출직으로 이뤄진 보수파 기구(혁명 수호 평의회)가 소수의 믿을 만한 사람들만 대통령이나 의회에 출마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그리고 진짜 ‘권력’인 최고 지도자는 교체되지 않으며 성직자 총회에서 지명되기만 하면 종신 집권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선출되지 않은 지도자가 억압적 국가 기구를 주도하며, 1993년부터는 신속한 억압 행사를 위해 최고 지도자 직속의 '벨라야트 특공대'(NOPO)까지 거느리고 있다. 참으로 엄청난 관용이고 민주주의다.

비샤라는 참된 대중 개혁 운동을 무시하며, “개혁파 집권의 기대는 … 아마디네자드에 반대하는 서방 및 비서방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샤라는 글을 쓰기 전에 우선 다수의 여성 조직, 청년, 교사 그리고 일부 노동자 집단이 주도하는 대중 캠페인에 대해 배웠어야만 했다. 그는 우리에게 '엘리트주의'와 '거만한 계급적 우월감'을 갖는 것에 대해 경고하면서, 이러한 운동들이 '중간계급적인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젊은이들 중 다수가 아니라 특정 계급에 속한 젊은이들 중 다수”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가 빈곤층 젊은이들 중 대다수가 아마디네자드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가장 충격적인 글들 중 하나는 명망 있는 좌파 논객이자 학자인 제임스 페트라스의 것이다. 그는 '이란 대선 : ‘부정 선거’라는 장난질'이라는 글에서, 이란 대선에서 아무런 부정도 없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아무런 신뢰성도 전문성도 없으면서, 몇몇 이란 소도시 투표 결과의 통계학적 묘사를 통해 이런 확신에 도달한다. 엄청난 선거 부정의 증거들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페트라스의 증거와 ‘정보들’을 반박하려고 시간 낭비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의 분석에 집중하겠다. 페트라스 글의 기절초풍할 측면은 자신들이 속았음을 깨닫자마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발적으로 거리에 뛰쳐나와 참으로 열정적으로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부르짖은 용감한 여성, 청년, 교사, 공무원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한 공감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다는 점이다. 대신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안락한 상류 계급의 은신처”, “잘 차려입고 영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젊은이들 운운하는 돌발적인 언급들이다.

여성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없으며, 공개 체형, 일부다처제 그리고 합법적인 성 차별 같은 참으로 반계몽적인 정책들에 맞선 여성들의 놀라운 투쟁에 대해서는 어떠한 인식도 없다. 현재 다수가 투옥 상태인 노동조합 운동가들, 작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대신 페트라스가 강조하는 것은 조잡한 계급 분석에 따른 주장들이다. “투표 결과 통계는 고소득층, 자유시장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지지자들과, 종교 계율에 따라 고리대와 이윤 추구를 제한하는 ‘도덕 경제’의 지역사회 지지자들, 노동계급, 저소득층이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진정한 계급 양극화를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보다 더 엉뚱하고 잘못된 해석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통적인 계급 갈등 패러다임에 아주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상상 속의 저 이슬람 경제학까지 더한다면 더더욱!). 하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보수파, 개혁파 양편의 고위 성직자들 모두 “시장 지향 자본가들”이며, 이슬람 수비대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기업을 경영하고 무역을 독점적으로 통제하며 주요 부동산 개발자들이다.

노동자들 역시 양편에 나뉘어 있다. 경제 정책의 실패, 30%로 치솟은 물가인상률, 실업난 그리고 노동조합 탄압 때문에 다수의 노동자들이 아마디네자드로부터 등을 돌렸다. 정부의 가혹한 방침에 맞선 이란 자동차 회사 노동자들의 성명서, 테헤란 공공운수 회사 노동자들의 장기 파업과 거리 충돌 그리고 선거 직후의 봉기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 이 모두가 아마디네자드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 사례들이다. 또한 이슬람주의자들의 ‘도덕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단견이다. 보수파, 개혁파 양편 모두 횡령과 부패에 연루돼왔고, 이 사건들 중 상당수는 이들 사이의 말싸움 과정에서 폭로돼버렸다. 서로 상대방의 부패를 폭로했던 것이다.

페트라스는 상황에 대한 자신의 제한된 이해를 바탕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반대파의 패배를 낳은 엄청난 표차를 보면, 이들이 인민의 핵심 관심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다른 많은 이들처럼 페트라스 역시 이 “반대파”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집단과 범주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더 고약한 것은 그가 이란 여성, 청년, 노조 운동가들, 지식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에게, 정치적 개인적 자유, 인권, 민주주의, 성 평등 그리고 노동권에 대한 그들의 요구와 “관심”들은 “핵심”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란 좌파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로파가(동지들), 당신들이 고문받고 감옥에서 썩는다 하더라도, 당신들의 책이 불타고 직장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오. “노동계급”은 정부로부터 보조금과 구호 물품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오.” 페트라스 교수와 그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유와 특권이 문제가 된다면 이렇게 관용하는 자세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좌파는 역사적으로 진보 운동들과의 연대에 뿌리를 내렸다. 여성과 노동조합의 권리와 그 외침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의 요구였다. 그런데 비극적이게도, 오늘날 좌파의 일부로부터 나오는 외침은 반동적이다(진보적이 아니라).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서 그들이 반제국주의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이라는 잘못된 가정 아래 역사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것은 반동 좌파다. 진보 좌파는 이와 다르다. 진보 좌파는 항상 진보하는 세력들 편에 서왔다.

 

지젝 역시 중요한 점을 놓치다 / 신좌파의 저명한 대변자 슬라보이 지젝은 훨씬 더 존경할 만하고 널리 읽힌 글에서 이란 사태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했다.지젝은 “무사비 지지자들이 … 자신들의 행동을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의 반복으로, 이후 부패해버린 혁명의 만회를 위해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바라본다”고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호메이니 혁명의 기만당한 지지자들의 참된 대중적 궐기”를, “호메이니 혁명의 ‘억압된 것의 귀환’”을 목도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지젝은 1979년 혁명 당시의 “호메이니 지지자들”과 자유주의적이든 좌파적이든 비종교적 세속적인 요소들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후자는 실제로 혁명을 처음 시작한 세력이며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호메이니의 지도력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때로 절망스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커다란 오류다.

그 연장선에서 지젝은 오늘날의 모든 운동이 무사비 지지 입장인 것으로 잘못 규정한다. “무사비는 … 호메이니 혁명을 떠받치던 대중의 꿈의 참된 부활을 상징한다.” 자신의 주장을 실증하기 위해 지젝은 “혁명 첫 해의 믿기 힘든 활기(‘끓어오름’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역자)”에 대해 언급한다. 사실 혁명 첫 해 혹은 미 대사관 인질 억류 이전의 ‘활기’는 호메이니를 지지하지 않은 세력들의 행동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 쿠르디스탄과 곤바드에서 벌어진 페다이스(Fedais. 이슬람 체제 등장 전부터 무장 혁명 투쟁을 벌이던 맑스-레닌주의 조직. 현재는 망명 상태에서 이슬람 체제 전복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독일 좌파당과 긴밀한 연대를 맺고 있다-역자)와 여타 좌파 조직들의 무장 투쟁, 여성과 대학가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당시는 호메이니와 그 지지자들이 아직 권력을 공고히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인질 억류 위기와 이란-이라크 전쟁 개전 이후에야 “이슬람 체제”가 상황을 장악한다.이 때문에 지젝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슬람 안에 참된 해방적 잠재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지젝은 무사비가 보수적 이슬람주의자이며 따라서 그를 이러한 “해방적 잠재력”의 사례로 들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새로운 종류의 무슬림 지식인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정교분리를 신봉하는 모하메드 샤베스타리(호메이니의 옛 동료 중 한 명이지만 정교분리와 이슬람의 현대적 재해석을 주장하는 이란의 신학자, 철학자-역자), 모센 카디바르(시아파 성직자로서 이슬람주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개혁운동의 이론가로 앞장섬-역자), 레자 알리자니 그리고 핫산 에쉬케바리(이 두 사람은 개혁파 연합인 ‘민족주의 종교 운동’의 지도자들-역자) 같은 이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러한 해방적 잠재력의 주역이 될 수는 있지만, 호메이니와 무사비 같은 자들은 분명 아니다.

이란의 1979년 혁명이 미완성의 과업이며 그 주된 요구, 즉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 그리고 사회적 평등이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호메이니의 요구들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요구들 역시 무사비의 것은 아니다.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30년간 반계몽적인 폭압적 종교 지배로 좌절을 겪어온 인민이 비록 선거 부정으로 촉발되기는 했지만 사실은 보다 실질적인 요구들에 기반해서 일으킨 자생적이며 독창적이고 자주적인 봉기다. 성직자 체제와 나라 안팎의 그 지지자들에 너무도 실망한, 팽창 일로의 이란 시민사회는 선거로 열린 기회를 단호히 장악해 역사의 완강한 전진을 밀어붙였다. 이들은 이슬람주의 체제나 자신들의 역량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의 전략은 이슬람주의 체제와 그 헤게모니를 점진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세속 민주 체제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며 신중을 요하고 장기적인 투쟁이다. 이 과정에서 이런 시민사회가 서방 좌파로부터 광범하고 효과적인 지지를 받는 게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이들이 좌파는 민주주의와 시민 자유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오해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 <주간 진보신당>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레디앙, 2009년 07월 13일 (월) 09:43:33 번역 / 장석준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4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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