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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 & 촘스키 (고종석, 언어학카페, 6~7)

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2009.11.07, http://blog.jinbo.net/radix/?cid=12&pid=305, 여기서 이어지는 글

 

 

<6> CLG: 랑그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 (11/01일, 소쉬르 편)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1/h2009110121451086330.htm


[...] CLG 중간쯤에서, 소쉬르는 뒷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문장을 발설합니다: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La langue est une forme et non une substance)."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소쉬르는 이 점을 또렷하게 하기 위해 언어를 서양장기(체스)에 비유합니다. 동양장기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입니다. 이를테면, 장기말끼리의 상호관계(예컨대 포ㆍ砲는 포를 넘을 수 없다거나 졸ㆍ卒은 후진할 수 없다거나)를 통해 결정되는 각 장기말의 기능이나 가치(위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상(象)이 가는 길('상'의 가치)과 마(馬)가 가는 길('마'의 가치)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 대립합니다. 물론 규칙(그러니까 형식)만으로 장기를 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기를 두려면 장기판이나 정해진 수의 장기말 같은 물리적 실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실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기판이 크든 작든, 장기말이 나무로 만들어졌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든 상관없습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활동은 말소리라는 음향적 실체를 사용하지만, 소리 자체가 언어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리들이 생각과 결합해 만들어내는 기호들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한 기호의 가치는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를 통해, 주로 대립을 통해 생겨납니다. 그 대립이 낳는 가치들의 체계(그것을 소쉬르의 후배들은 '구조'라고 고쳐 불렀습니다)가 언어입니다.


[...] 이것이 대략 소쉬르의 설명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체스놀이가 상이한 말(馬)들의 결합 안에서 전적으로 이뤄지듯, 언어도 체계라는 특성이 있으며, 이 체계는 완전히 그 구체적 단위들의 대립에 바탕을 둔다." '상이하다' '대립' 같은 말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다름으로써 대립해야만 가치가 생산되고(그것이 소쉬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가치들의 집합, 그 가치들을 낳은 내적 관계들의 그물이 곧 형식이고 체계이고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 할 때의 '언어'가 일상용어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활동의 사회적 측면을 가리키는 소쉬르 특유의 '언어', 곧 '파롤'과 대립하는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뜻을 또렷이 하기 위해, 소쉬르의 저 유명한 선언을 "랑그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로 옮기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랑그'를 사용하는 개인적 행위인 '파롤'은 다분히 실체일 수밖에 없지요.


[...] CLG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더러 거론은 하겠지만, 이 책 자체를 소재로 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언어학 개론서로서 CLG가 그리 좋은 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낡은 책이고, 그 안에 수많은 모순을 담은 위태로운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동시에 고전이기도 합니다. 소쉬르는 CLG를 통해, 당대 언어학의 주류였고 그 자신 깊이 개입했던 비교문법과 결별함으로써, 언어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인식론적 단절이라 할 만한 것을 이뤄냈습니다.

 

 

<7> 촘스키 혁명: '보편문법' 수립 시도, 변형생성문법 (11/08일분)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1/h2009110822312686330.htm


촘스키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꽤 일렀습니다. 출세작 <통사구조론>(Syntactic Structuresㆍ1957)이 <변형생성문법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게 1966년입니다. 뒤이어 1971년에는 <데카르트 언어학>(Cartesian Linguisticsㆍ1966)이, 1975년에는 <통사이론의 양상>(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ㆍ1965)이 한국어판을 얻었습니다. <통사이론의 양상>은 흔히 '표준이론'(standard theory)이라 부르는 촘스키 초기언어학을 응집한 책입니다.


[...] 지식인의 책임을 거론하며 베트남전쟁을 매섭게 비판한 촘스키의 첫 정치서 <미국의 힘과 새 지배계급>(American Power and the New Mandarins)이 나온 게 1969년이었고, 그 세 해 뒤에는 두 번째 정치서 <아시아와 전쟁 중>(At War with Asia)이 출간됐는데 말이죠. 정치참여적 글쓰기는 촘스키가 언어학의 제위(帝位)를 얻고 나서야 손댄 장년 이후 호사취미가 아니었습니다. 촘스키 언어학은 그 시작부터 정치학과 나란했지요. 물론 촘스키가 '혁명'을 일으킨 것은 언어학 특히 통사론에서고, 그 혁명은 주로 언어학의 다른 분야나 심리학, 논리학, 인류학, 인지과학 같은 인접과학으로 수출됐습니다. 정치학은 촘스키 혁명의 핵심인 수학모델을 수입하기엔 너무 '무른' 과학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어로 소개된 촘스키가 오직 '언어학자'였다는 사실은 그 즈음 한국사회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게 합니다.

 

흔히 촘스키 언어학을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변형생성문법이란 뭘까요? 그리고 그것이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구조주의 언어학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다음 두 문장을 봅시다.

(1)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감격스럽게도 제게 꽃을 이만큼이나 보내 오셨어요.
(2) 존경하는 제자들이 기특하게도 선생님께 꽃을 이만큼이나 보내 왔어요.

촘스키는 이런 [두 문장의 동일한] 표면구조 '저 아래에 누워있는(underlie)' 또 하나의 구조를 가정합니다. 촘스키가 심층구조(deep structure)라고 부르는 이 층위에서는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의 구조가 서로 다릅니다. 심층구조에서 '존경하는 선생님'은 '선생님을 존경한다'입니다. 다시 말해 [NP 목적격표지 V-ㄴ다]의 구조를 지닌 S(문장)입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제자들'은 심층구조에서 '제자들이 존경한다'입니다. 다시 말해 [NP 주격표지 V-ㄴ다]의 구조를 지닌 S입니다. 즉 심층구조에서 '선생님'은 '존경하다'의 목적어인 데 비해, '제자들'은 '존경하다'의 주어입니다. 촘스키에 따르면 심층구조는 의미해석 정보를 지녔습니다. 서로 다른 심층구조를 지닌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이 동일한 표면구조를 지니게 되는 것은, [NP 목적격표지 V-ㄴ다] 구조의 문장과 [NP 주격표지 V-ㄴ다] 구조의 문장을 [V-는 NP]라는 동일한 NP(명사구)로 유도하는 규칙이 한국어에 있기 때문입니다. 심층구조에서 표면구조를 유도하는 과정을 '변형'이라 하고, 그 변형에 쓰인 규칙을 변형규칙이라 합니다. 촘스키 문법을 변형생성문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변형규칙이라는 장치를 사용하는 생성문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성문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한한 규칙들의 집합(구조)을 통해서 무한한 적격(well-formed) 문장들을 생성해내는 모국어 화자의 능력에 이 이론이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표면구조가 다른데 심층구조는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노무현이 바보라고 생각했어"와 "나는 노무현을 바보로 생각했어"는 표면구조가 다르지만 심층구조는 같습니다.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죠. "I believed Roh was an idiot"와 "I believed Roh (to be) an idiot"를 견줘보면 그렇습니다. 한국어에서고 영어에서고, 이 문장의 심층구조는 앞쪽 표면구조에 가깝습니다. 그 심층구조에 인상변형(Raising transformation)이라는 규칙이 적용되면 뒤쪽 표면구조가 유도됩니다. 또 능동문과 피동문도, 동일한 심층구조가 서로 다른 표면구조로 유도된 대표적 예입니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은 초기의 표준이론에서 확대표준이론(EST), 지배결속이론(GB), 최소주의프로그램(MP) 등으로 정교화하면서 한 세대 이상 세계 언어학계를 풍미했습니다. 영어권 학계만이 아니라 서유럽, 일본, 중국, 대만, 한국 등지에서 촘스키는 거의 동시에 읽혔습니다. 촘스키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은 이론(가)들도 촘스키를 준거로 삼은 다음에야 제 좌표를 확정할 수 있었지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정치팜플렛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레이코프(George Lakoff)의 생성의미론(generative semantics), 동사를 중심에 놓고 표준이론의 결함을 보완하려 한 필모어(Charles Fillmore)의 격문법(case grammar), 언어학 너머 형식논리학의 전통을 계승한 몬터규(Richard Montague)의 범주문법(categorial grammar) 따위가 다 그렇습니다. 촘스키 언어학이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 하나는 그 이론의 보편지향성에 있을 겁니다. 촘스키는 수많은 자연언어들의 문법이 표면구조에서는 달라도 심층구조에서는 같으리라 예상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두드러진 욕망 하나는 보편문법을 수립하는 것이었지요.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를, 일본어나 중국어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은 언어학자들이 촘스키 이론을 자신의 가장 익숙한 언어에 적용해보고 싶어했던 것이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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