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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의 경제학 (시대를 읽는 문학/박혜영)

거의 1년이 지나도록 단 한번도 내 눈길을 끌지 못했던 한겨레의 특별코너를 오늘에서야 발견했다. '시대를 읽는 문학'이라는 타이틀 아래 영문학자 박혜영(45) 교수라는 분이 풀어주는, 제목 그대로의, 험한 시대(주로 자본주의, 물질만능, 등등)를 문학적 요소와 함께 얽어 상당히 재미있게 엮어가는 시평으로 보인다. 무턱대고 자본주의와 반민주주의를 외부의 악마로 설정하고는 싸워나가길 권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모르게 숨어든 내 속의 자본주의적 순응인자들을 들춰내고 나도모르게 길들여진 내 일상의 반민주주의적 요소들을 확인하는 과정을 돕는 것이 -좀 과장하여 말하자면- '시대를 읽는 문학'에서의 문학이 맡은 역할로 필자는 설정하고 있다고 감히 상상해 본다. 한마디로 유익하고 흥미롭다. 이하, 관심가는 몇 개의 제목을 모아두고 맛보기용 한 편을 옮겨온다.

 

 
경쟁은 ‘생존의 법칙’ 아닌 ‘죽음의 법칙’  / 박혜영


영시에서 죽음의 신은 들판에서 풀을 베는 농부처럼 때때로 한 손에 어른 키만 한 긴 ‘낫’(scythe)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허리춤까지 자란 풀을 긴 낫으로 추수하는 풍경에서 옛사람들이 죽음을 떠올린 것은 풀이 농부의 낫질을 피해갈 수 없듯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이 공평하게 보내주는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삶의 시작은 비록 불공평해도 신의 뜻으로 그 끝은 언제나 평등하게 마무리되기에 영국인들은 사는 동안 생긴 불평등을 ‘평평하게 해주는 것’(Leveller)이 죽음이라고 보았다.

영국 최초의 시민혁명이었던 청교도혁명에서 의회파 지도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은 의회파 내에서도 급진적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을 ‘수평파’(levellers)라고 비하했는데, 그것은 런던의 가내수공업자와 의회군 내의 하급 사병으로 이루어진 이들이 마치 낫을 든 죽음의 신처럼 혁명을 통해 모든 것을 평평하게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평파들은 공화제와 보통선거, 토지의 균등한 재분배와 같은 급진적인 평등을 통해 진정한 신의 왕국을 영국에 구현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부르주아 상인계급과 부농으로 이루어진 대다수 의회파로서는 이런 요구가 전제왕정을 옹호한 왕당파 못지않게 두려운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당연히 수평파 지도자들은 왕당파를 꺾은 직후 모두 반역죄로 처형되는데, 그것은 신의 지상낙원을 구현하려는 이들의 급진적 평등사상이 크롬웰과 같은 청교도주의자들의 개혁논리로도 용인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청교도혁명의 유토피아정신은 정치적, 경제적 현실논리 속에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영국에 지상낙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부르주아 의회주의자들이 떠받들던 평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평등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흔히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말하는 능력에 따른 기회의 평등이 아닌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의 평등이었다.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천국의 모습에 대한 유명한 성경 구절을 들어 영국이 지향해야 할 사회를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른 아침에 장터로 나간 하늘나라의 포도밭 주인은 하루에 1데나리우스를 주기로 합의하고 몇 명의 일꾼들을 포도밭으로 보낸다. 정오쯤에도 장터에 나간 주인은 여전히 빈둥거리고 있던 몇 명의 일꾼들에게도 같은 품삯을 주기로 하고 모두 포도밭으로 보낸다. 오후 늦게 다시 장터에 나간 주인은 또 빈둥거리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품삯을 주기로 하고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윽고 저녁이 되자 주인은 일꾼들을 모두 불러 모아 품삯을 나눠주는데, 오후 늦게부터 일한 일꾼이건 맨 먼저 도착하여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이건 모두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이다. 당연히 맨 먼저 온 일꾼들이 불평을 하자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를 받기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에서는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러스킨 경제사상의 정수를 의미하는 이 우화는 경제적 평등에 관한 전혀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다분히 종교적이자 윤리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농부가 땅의 모든 생명을 돌보듯 신은 만인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기에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각자의 능력과 무관하게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고 잘 존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포도밭 주인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건, 일을 적게 한 사람이건 누구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같은 품삯이 필요하기에 같은 품삯을 준 것이다. 러스킨은 경제의 본질이란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명을 돌보고, 공동체의 삶을 존속시키는 데 있다고 보았기에 평등한 생명의 가치를 돌볼 새로운 평등의 경제학을 꿈꾼 것이다.

이처럼 능력이 아닌 필요에 따라 인간의 삶을 공평하게 돌보아주는 것이 하늘나라 포도밭의 경제학이며, 그런 신의 뜻이 살아서 구현되는 곳이 바로 지상낙원일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평등한 만큼 삶도 평등해야 한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셈법으로는 유토피아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평등은 남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더 많이 할수록 더 많은 품삯을 주는 것이지 그 일이 얼마나 사람의 생명을 돌보고, 공동체의 삶을 존속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로 품삯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학으로는 생명을 돌보는 농부의 일이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들어 공동체를 파탄에 빠뜨리는 금융전문가의 일보다 언제나 더 하찮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학은 공기나 햇살, 혹은 우정이나 신뢰처럼 생명에 유익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모두 하찮게 만들기 때문이다. 탐욕과 과시, 경쟁과 이기심에 토대를 둔 경제를 가지고는 그 어느 공동체도 생명을 돌볼 수 없을 것이다. 곳곳이 오직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가 될 뿐이다. 그래서 러스킨도 “협력은 모든 사물에서 생명의 법칙이고, 경쟁은 죽음의 법칙이다”라고 하였다.

공동체는 어떤 평등의 원칙을 따를 때 지속가능할 것인가? 낭만주의 시인인 블레이크“사자와 소에게 같은 법을 적용하는 것은 압제다”라고 하였다. 흔히 더 많은 경제성장이 더 많은 평등을 보장해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때의 평등은 다분히 기계적, 산술적인 평등이다. 사자와 소가 서로 한자리에서 싸울 수 있도록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억압이지 평등이 아니다. 포도밭의 경제학으로는 농부는 농부의 삶을, 노동자는 노동자의 삶을, 학자는 학자의 삶을 살면서도 서로 평등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이윤만 추구하는 경제적 동물로 살기 시작하면 삶의 곳곳을 전쟁터로 만들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타인을 억압할 만큼의 부를 축적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이 다른 존재를 억압하고,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렇게 신이 만든 경이로운 포도밭의 경제학을 잃어버리는 순간일 것이다. 아일랜드의 시인인 브렌던 커넬리는 다른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무슨 짓이든 다 할 수가 있고, 따라서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옥이란 모든 경이로움이 발가벗겨져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이 내 눈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내가 우정을 당연히 여긴 적이 언제던가?

내가 죽인다는 생각에 익숙하던 적이 언제던가?

내 육체가 더 이상 감탄스럽지 않던 적이 언제던가?

내 정신이 늙어 덤덤해진 적이 언제던가?

나는 안다, 이런 순간이면 언제나

내가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음을.

내 안에서 경이로움이 사라질 때 권력은 생겨나리니.

세상도 바꿀 수 있으리, 내가 더 이상 푸른 하늘을 꿈꾸지 않을 때면.

신도 배신할 수 있으리, 내가 길거리에 퍼지는 소녀의 노랫가락과

수수밭에 내리는 햇살의 은총을 듣지 못할 때면.


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기사등록 : 2009-09-11 오후 07:02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76282.html

 

 

시대를 읽는 문학 / 박혜영
첫회)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가벼운 목숨, 기사등록 : 2009-01-23 오후 06:25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5090.html
2) 쫓겨난 교사들과 거룩한 바보들
3) ‘필요’만 허용되는 헐벗은 삶이여
4) 작가여, 누구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
5) ‘닫힌 귀’에 불복종할 양심
6) 풀·달·여치한테 인간의 길을 묻다
7) 사람을 먹는 자본…빈곤을 낳는 풍요
8) 경쟁은 ‘생존의 법칙’ 아닌 ‘죽음의 법칙’ [펌]
9) ‘물질적 풍요’ 앞에 늑대가 된 인간, 기사등록 : 2009-10-09 오후 06:59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81117.html
10) ‘자본의 애완견’ 민주주의에 바치는 추도사, 기사등록 : 2009-11-06 오후 08:01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86342.html

* 박혜영(45) 교수가 ‘에세이’ 면의 새로운 필자로 참여합니다. 박 교수는 영국 글래스고 대학에서 낭만주의 영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지금 인하대에서 영시와 영미문화비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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