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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 & 촘스키 (고종석, 언어학카페, 6~7)

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2009.11.07, http://blog.jinbo.net/radix/?cid=12&pid=305, 여기서 이어지는 글

 

 

<6> CLG: 랑그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 (11/01일, 소쉬르 편)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1/h2009110121451086330.htm


[...] CLG 중간쯤에서, 소쉬르는 뒷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문장을 발설합니다: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La langue est une forme et non une substance)."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소쉬르는 이 점을 또렷하게 하기 위해 언어를 서양장기(체스)에 비유합니다. 동양장기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입니다. 이를테면, 장기말끼리의 상호관계(예컨대 포ㆍ砲는 포를 넘을 수 없다거나 졸ㆍ卒은 후진할 수 없다거나)를 통해 결정되는 각 장기말의 기능이나 가치(위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상(象)이 가는 길('상'의 가치)과 마(馬)가 가는 길('마'의 가치)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 대립합니다. 물론 규칙(그러니까 형식)만으로 장기를 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기를 두려면 장기판이나 정해진 수의 장기말 같은 물리적 실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실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기판이 크든 작든, 장기말이 나무로 만들어졌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든 상관없습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활동은 말소리라는 음향적 실체를 사용하지만, 소리 자체가 언어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리들이 생각과 결합해 만들어내는 기호들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한 기호의 가치는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를 통해, 주로 대립을 통해 생겨납니다. 그 대립이 낳는 가치들의 체계(그것을 소쉬르의 후배들은 '구조'라고 고쳐 불렀습니다)가 언어입니다.


[...] 이것이 대략 소쉬르의 설명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체스놀이가 상이한 말(馬)들의 결합 안에서 전적으로 이뤄지듯, 언어도 체계라는 특성이 있으며, 이 체계는 완전히 그 구체적 단위들의 대립에 바탕을 둔다." '상이하다' '대립' 같은 말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다름으로써 대립해야만 가치가 생산되고(그것이 소쉬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가치들의 집합, 그 가치들을 낳은 내적 관계들의 그물이 곧 형식이고 체계이고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 할 때의 '언어'가 일상용어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활동의 사회적 측면을 가리키는 소쉬르 특유의 '언어', 곧 '파롤'과 대립하는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뜻을 또렷이 하기 위해, 소쉬르의 저 유명한 선언을 "랑그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로 옮기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랑그'를 사용하는 개인적 행위인 '파롤'은 다분히 실체일 수밖에 없지요.


[...] CLG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더러 거론은 하겠지만, 이 책 자체를 소재로 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언어학 개론서로서 CLG가 그리 좋은 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낡은 책이고, 그 안에 수많은 모순을 담은 위태로운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동시에 고전이기도 합니다. 소쉬르는 CLG를 통해, 당대 언어학의 주류였고 그 자신 깊이 개입했던 비교문법과 결별함으로써, 언어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인식론적 단절이라 할 만한 것을 이뤄냈습니다.

 

 

<7> 촘스키 혁명: '보편문법' 수립 시도, 변형생성문법 (11/08일분)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1/h2009110822312686330.htm


촘스키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꽤 일렀습니다. 출세작 <통사구조론>(Syntactic Structuresㆍ1957)이 <변형생성문법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게 1966년입니다. 뒤이어 1971년에는 <데카르트 언어학>(Cartesian Linguisticsㆍ1966)이, 1975년에는 <통사이론의 양상>(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ㆍ1965)이 한국어판을 얻었습니다. <통사이론의 양상>은 흔히 '표준이론'(standard theory)이라 부르는 촘스키 초기언어학을 응집한 책입니다.


[...] 지식인의 책임을 거론하며 베트남전쟁을 매섭게 비판한 촘스키의 첫 정치서 <미국의 힘과 새 지배계급>(American Power and the New Mandarins)이 나온 게 1969년이었고, 그 세 해 뒤에는 두 번째 정치서 <아시아와 전쟁 중>(At War with Asia)이 출간됐는데 말이죠. 정치참여적 글쓰기는 촘스키가 언어학의 제위(帝位)를 얻고 나서야 손댄 장년 이후 호사취미가 아니었습니다. 촘스키 언어학은 그 시작부터 정치학과 나란했지요. 물론 촘스키가 '혁명'을 일으킨 것은 언어학 특히 통사론에서고, 그 혁명은 주로 언어학의 다른 분야나 심리학, 논리학, 인류학, 인지과학 같은 인접과학으로 수출됐습니다. 정치학은 촘스키 혁명의 핵심인 수학모델을 수입하기엔 너무 '무른' 과학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어로 소개된 촘스키가 오직 '언어학자'였다는 사실은 그 즈음 한국사회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게 합니다.

 

흔히 촘스키 언어학을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변형생성문법이란 뭘까요? 그리고 그것이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구조주의 언어학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다음 두 문장을 봅시다.

(1)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감격스럽게도 제게 꽃을 이만큼이나 보내 오셨어요.
(2) 존경하는 제자들이 기특하게도 선생님께 꽃을 이만큼이나 보내 왔어요.

촘스키는 이런 [두 문장의 동일한] 표면구조 '저 아래에 누워있는(underlie)' 또 하나의 구조를 가정합니다. 촘스키가 심층구조(deep structure)라고 부르는 이 층위에서는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의 구조가 서로 다릅니다. 심층구조에서 '존경하는 선생님'은 '선생님을 존경한다'입니다. 다시 말해 [NP 목적격표지 V-ㄴ다]의 구조를 지닌 S(문장)입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제자들'은 심층구조에서 '제자들이 존경한다'입니다. 다시 말해 [NP 주격표지 V-ㄴ다]의 구조를 지닌 S입니다. 즉 심층구조에서 '선생님'은 '존경하다'의 목적어인 데 비해, '제자들'은 '존경하다'의 주어입니다. 촘스키에 따르면 심층구조는 의미해석 정보를 지녔습니다. 서로 다른 심층구조를 지닌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이 동일한 표면구조를 지니게 되는 것은, [NP 목적격표지 V-ㄴ다] 구조의 문장과 [NP 주격표지 V-ㄴ다] 구조의 문장을 [V-는 NP]라는 동일한 NP(명사구)로 유도하는 규칙이 한국어에 있기 때문입니다. 심층구조에서 표면구조를 유도하는 과정을 '변형'이라 하고, 그 변형에 쓰인 규칙을 변형규칙이라 합니다. 촘스키 문법을 변형생성문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변형규칙이라는 장치를 사용하는 생성문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성문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한한 규칙들의 집합(구조)을 통해서 무한한 적격(well-formed) 문장들을 생성해내는 모국어 화자의 능력에 이 이론이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표면구조가 다른데 심층구조는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노무현이 바보라고 생각했어"와 "나는 노무현을 바보로 생각했어"는 표면구조가 다르지만 심층구조는 같습니다.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죠. "I believed Roh was an idiot"와 "I believed Roh (to be) an idiot"를 견줘보면 그렇습니다. 한국어에서고 영어에서고, 이 문장의 심층구조는 앞쪽 표면구조에 가깝습니다. 그 심층구조에 인상변형(Raising transformation)이라는 규칙이 적용되면 뒤쪽 표면구조가 유도됩니다. 또 능동문과 피동문도, 동일한 심층구조가 서로 다른 표면구조로 유도된 대표적 예입니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은 초기의 표준이론에서 확대표준이론(EST), 지배결속이론(GB), 최소주의프로그램(MP) 등으로 정교화하면서 한 세대 이상 세계 언어학계를 풍미했습니다. 영어권 학계만이 아니라 서유럽, 일본, 중국, 대만, 한국 등지에서 촘스키는 거의 동시에 읽혔습니다. 촘스키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은 이론(가)들도 촘스키를 준거로 삼은 다음에야 제 좌표를 확정할 수 있었지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정치팜플렛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레이코프(George Lakoff)의 생성의미론(generative semantics), 동사를 중심에 놓고 표준이론의 결함을 보완하려 한 필모어(Charles Fillmore)의 격문법(case grammar), 언어학 너머 형식논리학의 전통을 계승한 몬터규(Richard Montague)의 범주문법(categorial grammar) 따위가 다 그렇습니다. 촘스키 언어학이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 하나는 그 이론의 보편지향성에 있을 겁니다. 촘스키는 수많은 자연언어들의 문법이 표면구조에서는 달라도 심층구조에서는 같으리라 예상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두드러진 욕망 하나는 보편문법을 수립하는 것이었지요.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를, 일본어나 중국어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은 언어학자들이 촘스키 이론을 자신의 가장 익숙한 언어에 적용해보고 싶어했던 것이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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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1~5)

여성혁명가들을 통한 '외도'를 한참 했던 고종석이 유럽식 새 학년도의 시작과 더불어 다시 돌아와 자기의 주전공에 대한 '썰'(說)을 풀어나갈 모양이다. 한국일보에 월요일 아침마다 오른다는 썰의 장에 걸린 정식 문패는 '말들의 모험'이고 보조문패는 '언어학 카페'인 듯하다. 소쉬르, 촘스키, 야콥슨 등의 고전적 언어학자들을 딛고 고종석 특유의 친근한 숨결을 어떻게 딱딱할 언어학에 불어넣을 지가 상당히 기대된다. 막 세상을 떠난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주의의 개척자라면, 언어학의 대부인 소쉬르는 -고종석의 아래 인용 말처럼- "자신이 구조주의자인 줄 몰랐던 [최초의] 구조주의자"일 것이다. 이제 구조주의는 한물갔는지 모르겠지만, 소쉬르 언어학은 -오래전에 CLG를 잠시동안 맛뵈기 수준으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언어 속에 숨겨진 사실관계를 (구조적으로?) 누설하는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으므로 '한물 가고말고'와는 무관한 고전일 것이다. 따로 소쉬르나 언어학을 다시 공부할 여가(여력)가 내게 더는 없을 듯하니, 고종석의 '카페'를 가볍게(!) 따라가며 부족한 공부가 저절로(?) 되길 희망해 본다. [이 포스트에 링크는 계속 추가해 가겠지만 내용은 가능한한 더더 압축적 펌으로 이어갈듯... 사족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고종석이 '유럽통신'인가 어딘가에서 부드러운 글쓰기를 위하여 선택한 편짓글 문체가 나중에는 더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더라는 스스로의 술회를 어디선가 본 듯한데, 비슷하게 나도 이번 연재물의 싹싹한 서울식 대화체가 쫌 불편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내가 너무 촌놈이고 너무 오랫동안 삭막한 서술체에 익숙해진 탓이리라.]

 

연재, 고종석의 말들의 모험  

http://news.hankooki.com/hotissue/gi_sr_view.php?page=1&mode=sr&parent_id=414 

 

1. 호모 로쿠엔스… 오지랖 넓은 '말들의 수다'가 시작된다.
2. 말투·억양 달라도 소통 하는 건 머리 속 '개념 지도' 같기 때문
3. 번역 과정의 애씀이 그를 이해하는 과정
4. 어떤 번역어도 완벽할 수는 없어
5. 번역어는 보석상자 

 

 

<1> 연재를 시작하며

 
오늘부터 월요일 아침마다 독자를 찾을 '말들의 모험'은 말에 대한 수다입니다. 그 말은 한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같은, 인류가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쓰는 자연언어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로쿠엔스(말하는 인간)로 만든 언어, 사람을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만든 언어 말입니다. 에스페란토처럼 세계어를 지향해 특정한 개인이 만든 인공어나, 컴퓨터 언어처럼 의미를 정확히 연산하기 위해 수학자나 철학자들이 고안해낸 논리언어, 개미들의 화학적 언어나 벌들의 비행(飛行)언어처럼 인류 이외의 동물들이 의사를 주고받기 위해 쓰리라 짐작되는 유사언어는 우리 눈길을 받기 어려울 겁니다. 부제에 '언어학'이라는 말이 들어있으니, 일종의 언어학 에세이가 되겠지요. [...]

 

사람들이 언어에 지적 관심을 기울인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르지만, 언어학이 분과학문으로 자립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입니다. 그리고 이 학문은 20세기 들어 만개합니다. 특히 20세기 중엽에 구조주의라는 사조 또는 방법론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휩쓸면서, 언어학은 얼마동안 학문의 제왕으로까지 군림하게 됩니다. 구조주의의 발원지가 언어학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조주의'에서 '구조'(structure)는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라는 뜻입니다. 언어가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일반언어학강의>('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줄여서 CLGㆍ1916)라는 책이 출간되고부터입니다. CLG의 저자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라는 스위스 언어학자입니다. 꼼꼼한 독자라면, CLG의 발간년이 소쉬르의 몰년(沒年)보다 뒤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CLG는 소쉬르가 죽은 뒤에 나왔습니다. 소쉬르가 <일반언어학강의>라는 제목의 유고를 남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제네바대학에서 일반언어학을 가르쳤을 뿐입니다. 소쉬르는 이 대학에서 일반언어학 강의를 세 차례(세 학기)에 걸쳐 했습니다. 첫 번째 강의는 1907년 1월부터 그 해 7월까지, 두 번째 강의는 1908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세 번째 강의는 1910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진행됐습니다(일반언어학은 말 그대로 언어 일반에 대한 학문적 탐구를 가리킵니다. 이에 견주어 한국어학, 영어학, 일본어학처럼 특정 자연언어를 대상으로 삼는 학문은 개별언어학이라고 합니다. 소쉬르가 제네바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891년 겨울학기부터고 정교수가 된 것은 1896년입니다. 그는 제네바대학 초기에 산스크리트어학이나 프랑스어학 같은 개별언어학을 가르쳤습니다). CLG는 소쉬르의 이 세 차례 일반언어학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노트를 밑절미 삼아 샤를 발리와 알베르 세슈에라는 언어학자가 편집한 책입니다.

 

[...] 영향력을 기준으로 삼을 때, 19세기를 대표하는 언어학자가 소쉬르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언어학자가 노엄 촘스키(1928~)라는 데에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겁니다. 물론 20세기 사람 촘스키만이 아니라 19세기 사람 소쉬르 역시, 그 영향력이 행사된 시기는 20세기입니다. [...] 촘스키의 <통사구조론>('Syntactic Structures'ㆍ1957)에서 싹을 틔운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 줄여서 TG)은 20세기 언어이론에 말 그대로 혁명을 불러왔습니다. 이 혁명적 언어학을 촘스키는 같은 제목의 저서에서 '데카르트 언어학'(Cartesian linguistics)이라고 불렀습니다. 지식의 계보에서 촘스키가 과연 데카르트의 적통(嫡統)인지를 두고 지성사적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이 유대계 미국인이 합리주의와 심성주의(mentalism)의 실로 20세기 주류 언어학의 피륙을 짠 것은 확실합니다.

 

다시 소쉬르로 돌아가 봅시다. 소쉬르 언어학은 두 권의 책에 망라돼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CLG고, 다른 하나는 1922년 파리에서 간행된 <페르디낭 드 소쉬르 학술논문집>입니다. 이 논문집에는 21세의 소쉬르에게 학문적 명성을 안긴 '인도-유럽어 모음들의 원시체계에 관하여'(1878)를 포함해, 그 때까지 확인된 소쉬르의 글들이 모두 묶였습니다. 이 책은 소쉬르의 지적 조숙과 천재를 넉넉히 증명하지만, 그를 구조주의의 아버지로 만든 것은 제자들이 편집한 CLG입니다.언어가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라는 생각은 CLG에서 여러 차례 피력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구조'라는 말로 명시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체계'(systeme)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해 CLG에서 반복되는 '체계'라는 말은 20세기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조'와 거의 같은 뜻입니다. 조르주 무냉이라는 프랑스 언어학자가 소쉬르를 '자신이 구조주의자인 줄 몰랐던 구조주의자'라고 일컬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CLG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언어학의 유일하고 진정한 대상은, 그 자체로서 또 그 자체만을 위해 고찰되는 언어다." 언어학의 대상을 좁고 엄격하게 규정한 이 문장은 소쉬르 사상의 한 핵심으로 널리 인용돼 왔습니다. 그러나 CLG 독자들은 이 마지막 문장과 맞닥뜨리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CLG의 뒷부분은 지리언어학이나 언어인류학 같은, '그 자체로서 고찰되는 언어' 바깥에까지 눈길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뒷날 소쉬르 연구자들은 소쉬르 수강생들의 강의 노트에 이 구절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문장은 발리와 세슈에가 자의로 끼워 넣은 것입니다. 실상 이들은 소쉬르 만년에 이미 제네바대학 강사 노릇을 하고 있었던 터라, 스승의 일반언어학 강의 중 가장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라 할 세 번째 강의를 거의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쉬르의 생각은, 언어학이 언어와 관련된 모든 영역을 그 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로만 야콥슨(1896~1982)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소위 프라하학파를 이끈 이 러시아 출신 미국 언어학자는 1953년 인디애나대학에서 열린 언어학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언어학자다. 언어와 관련된 것 중 내게 무관한 것은 없다."(Linguista sum: linguistici nihil a me alienum puto.) '말들의 모험'도 야콥슨의 이 오지랖넓은 언어학과 친할 것 같습니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입력시간 : 2009/09/27 21:31:07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09/h2009092721310584330.htm

 

 

<2> 랑그의 언어학과 파롤의 언어학 (10/04일)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0421142986330.htm
[...] 소쉬르는 언어기호의 특징으로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첫째는 자의성(恣意性)이고 둘째는 선조성(線條性)입니다. 기호의 자의성이란 특정한 시니피앙과 특정한 시니피에의 결합에 아무런 내적 필연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牛'라는 시니피에가 한국어에서는 {s-o}(소)라는 시니피앙과 결합하지만, 독일어에서는 {o-k-s}(Ochs)라는 시니피앙과 결합합니다. 선조성은 기호 전체의 특성이 아니라 시니피앙의 특성입니다. 시니피앙은 그 청각적 본질 때문에 시간 속에서 전개되며 , 따라서 선(線)의 특성을 갖는다는 거지요.

 

<3> 번역이라는 고역(苦役) (上): 번역 과정의 애씀이 그를 이해하는 과정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1121405384330.htm

<4> 번역이라는 고역 <中>: 어떤 번역어도 완벽할 수는 없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1821382986330.htm

<5> 번역이라는 고역 <下>:  번역어는 보석상자 (10/25)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2521340086330.htm
새 번역어들이 주검 상태에서 생기를 얻는 과정을 야나부 아키라(柳父章)라는 일본인 번역학자는 '카세트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카세트'는 보석상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잠깐 들어볼까요? "새로 만든 말은 카세트를 닮았다. 그 말 자체가 매력이다. 그리고 속에 깊은 의미가 틀림없이 담겼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사람들을 끌어서 자꾸 그 말을 쓰도록 부추긴다. 빈약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 신조어는 그 반복 사용 과정을 통해 이윽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처음엔 단지 아름다움 때문에 보석상자를 찾던 사람들이 끝내 보석을 간수하는 데 그 상자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미나 역할이 아니라 말 자체에 매혹되는 첫 체험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결국 그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말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보석상자 같은 것이다."(<번역이란 무엇인가>)
[파롤(parole)의 번역어인] '화언'이 영원히 빈 카세트로 남게 된다 해도, 역자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번역의 역사에서 끝내 빈 카세트로 남게 된 말은 무수히 많으니까요. 오히려 그 번역의 시도를 상찬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습니다. 번역은 한 세상에 또 한 세상을 들여놓아 세상을 입체화하는 엄청난 일이니까요. [...]

 

# 이어짐: http://blog.jinbo.net/radix/?pid=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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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레비스트로스 타계

L'ethnologue Claude Lévi-Strauss est mort

Claude Levi-Strauss le 30 mars 2005.

Archéologue des totems et des mythes, musicien de l'esprit, l'anthropologue, père du structuralisme, est mort dans la nuit de samedi à dimanche à l'âge de 100 ans.

 

레비스트로스가 지난 토요일 밤에 10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정확히는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의 밤이라고 발표됐으니 아마도 11월 1일 일요일 이른 새벽)는 소식이 3일 저녁(현지시간)에 나왔다.

작년 11월 28일이 정확히 탄생 100돌 기념일이었는데, 100 이라는 숫자에 끝다리 더 안 붙이려고 생일 한 달을 남겨두고 급히 떠난 모양이다. Ah Dieu, Adieu... Claude Lévi-Strauss !

"프랑스의 모든 인류학자들은 그의 자식이다" ("Tous les anthropologues français sont ses enfants") 라는 말이, 구조주의의 선구자 또는 인류학의 개척자 라는 그를 위한 다른 어떤 수식어보다도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너무 오래 살아서 벌써 수많은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내기도 했겠지만, 아직도 이어질 추모의 행렬이 얼마나 장대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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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의 죽음이 언론에는 위와같이 3일 저녁에야 발표가 됐는데, 벌써 11월 2일 월요일에 장례식이 치뤄진 하루 다음 날이다. 지난 10월 30일 금요일에 일어난 그의 죽음을 밖에서는 아무도 몰랐다는 것. 유가족의 뜻에 따라 장례식은 가까운 친지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아주 조용히 마쳤다 함. 고로 그의 일기는 '1908/11/29~2009/10/30'이 되겠다 (아래 위키링크 참조).

[Publié le 03/11/2009 à 19:08 - Modifié le 03/11/2009 à 20:06 Le Point.fr // DISPARITION. Les obsèques de Claude Lévi-Strauss ont déjà eu lieu. AFP // Les obsèques de Claude Lévi-Strauss ont eu lieu lundi en toute intimité. L'annonce du décès a été décalé selon le désir de la famille, qui craignait d'être débordée par la médiatisation du décès et des obsèques de leur proche. " Il a été inhumé à Lignerolles en Côte-d'Or, a indiqué mardi le Pr Philippe Descola, qui lui a succédé à la tête du laboratoire d'anthropologie sociale au Collège de France. "Claude Lévi-Strauss a été enterré à Lignerolles, dans le Morvan, où il possédait une propriété. Il y a deux ans, il s'était cassé le col du fémur, il était depuis très fatigué, il est mort de grand âge", a-t-il dit. Selon Philippe Descola, Claude Lévi-Strauss est décédé vendredi. L'Académie française lui rendra un hommage privé lors de sa séance hebdomadaire, jeudi. Claude Lévi-Strauss fut le premier ethnologue à être admis à l'Académie française en 1973. Il avait succédé à l'écrivain Henry de Montherlant.]

 

L'ethnologue Claude Lévi-Strauss en 1973 lors de son intronisation à à l'Académie française.

 
- Lévi-Strauss par Lévi-Strauss, 이곳에서는 그의 민속학(ethnologie), 신화, 구조주의, '슬픈 열대' 와 관련하여 레비스트로스가 직접 설명하는 간단한 지난 동영상 모음을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 "Lévi-Strauss a su transformer ses expériences en systèmes de pensée" 

- Claude Lévi-Strauss, théoricien bigarré 

- Les 100 ans de Lévi-Strauss [유료 르몽드]

- "Lévi-Strauss nous a anticipés"

 

Claude Lévi-Strauss a 100 ans : [리베라씨옹] A l'occasion du centenaire de l'anthropologue, aujourd’hui, le musée parisien du Quai Branly organise une série de manifestations en son honneur.

- Lévi-Strauss, les œuvres : Auteur de Tristes Tropiques ou de La Pensée sauvage, Claude Lévi-Strauss a profondément renouvelé l'anthropologie et les sciences humaines.

- «Enfant, j'étais épris du passé et de la nature » : L'ethnologue, mort dans la nuit de samedi à dimanche, raconte l'écriture de «Tristes tropiques» dans cet extrait d'Apostrophes, en 1988. Avec l'INA.

 

[wiki] http://fr.wikipedia.org/wiki/Claude_L%C3%A9vi-Strau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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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 MAO's last revolution (1966~76)

"La Dernière Révolution de Mao. Histoire de la Révolution culturelle (1966-1976)", de Roderick MacFarquhar et Michael Schoenhals : autopsie de la Révolution culturelle
LE MONDE DES LIVRES | 24.09.09 | 11h31  •  Mis à jour le 24.09.09 | 11h31

 

Détails sur le produitLa dernière révolution de Mao : Histoire de la Révolution culturelle 1966-1976

LA DERNIÈRE RÉVOLUTION DE MAO. HISTOIRE DE LA RÉVOLUTION CULTURELLE (1966-1976) (MAO'S LAST REVOLUTION)  de Roderick MacFarquhar et Michael Schoenhals [The Belknap Press, 2006, 752 p.]. Traduit de l'anglais (Etats-Unis) par Pierre-Emmanuel Dauzat. Gallimard, "NRF essais", [le 10 sep. 2009], 808 p., 35 €.

From Publishers Weekly
Given the hostile biographies and debunking histories that have recently appeared, it's safe to say that Mao's long honeymoon is over. In this exhaustive critique, MacFarquhar (director of the Fairbank Center for East Asian Research at Harvard) and Schoenhals (lecturer on modern Chinese society at Sweden's Lund University) cover the terrifying 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 between 1966 and 1976, when Mao unleashed the Red Guards on his people. As the unceasing, pointless intrigues between Mao and his chief henchmen unfolded, the violence and denunciations, the staged humiliations and mass executions raged remorselessly out of control, and the country lurched into turmoil. Even today, no one knows the final death count of the Mao cult. In rural China alone, according to a conservative estimate, 36 million people were persecuted, of whom between 750,000 and 1.5 million were murdered, with roughly the same number permanently injured. In the end, the authors, ironically, take comfort from one of the chairman's favorite sayings: "Out of bad things can come good things." For out of that dreadful decade, the authors conclude, "has emerged a saner, more prosperous, and perhaps one day a democratic China." 57 b&w photos.
Copyright © Reed Business Information, a division of Reed Elsevier Inc. All rights reserved.

From The New Yorker
MacFarquhar and Schoenhals successfully synthesize the many plotlines of the Cultural Revolution in a narrative that shuttles from the endless micro-maneuvers of the Party elite to the marauding teens of the Red Guard; and from the Revolution's macro-economic fallout to such bizarre manifestations as the cannibalizing of counter-revolutionaries in Guangxi. Carefully orchestrating the pandemonium and fuelling it with his "deliberate opaqueness" is the figure of Mao Zedong. Utterly unfazed by violence—"China is such a populous nation, it is not as if we cannot do without a few people," he remarked—he hoped the Revolution would perpetuate his legacy. But the arbitrary brutality of the regime insured the opposite. One weary subject recalled that when Mao died, in 1976, "the news filled me with such euphoria that for an instant I was numb."
Copyright © 2006 Click here to subscribe to The New Yorker

 

Présentation de l'éditeur
On ne saurait comprendre la volonté aujourd'hui de la Chine communiste de devenir une superpuissance capitaliste sans en remonter à la source, traumatique : la Révolution culturelle. Lancée en 1966 par Mao Zedong, cette « guerre civile générale » visait à défaire « les éléments de la bourgeoisie infiltrés dans le Parti. le gouvernement, l'armée et la culture ». Ceux-ci auraient travaillé à renverser la dictature du prolétariat, à l'instar de Khrouchtchev en URSS et de sa révision du stalinisme. Mao incite à la rébellion tout particulièrement les lycéens, transformés en Gardes rouges. Elevée dans la violence répétée des campagnes de « luttes de classe », délivrée des freins familiaux et institutionnels, livrée à elle-même (« plus vous tuez de gens, plus vous êtes révolutionnaire »), la jeunesse instaure une première terreur contre des responsables de l'Etat et du Parti de 1966 à 1968. Mais en juillet 1968, Mao décide froidement de briser les activités révolutionnaires de la Garde rouge et d'endiguer l'effondrement de l'économie; il ordonne à l'armée de procéder au démantèlement expéditif des organisations, il contraint près de douze millions de jeunes à renoncer aux études pour travailler aux champs ou dans les usines. Le retour sanglant à l'ordre bureaucratique fit davantage de morts et de blessés que les agissements des Gardes rouges déchaînés en 1966-1967 ou les combats armés entre les « organisations de masse » rivales en 1967-1968. Il fut conduit par l'armée d'abord, puis par les nouvelles structures politiques qui remirent au pas les militaires grâce à la liquidation du maréchal Lin Biao en septembre 1971, quelques mois seulement après qu'il eut été proclamé le successeur de Mao. Cent millions de personnes ont été affectées par la Révolution culturelle, incluant les survivants estropiés à vie comme les familles dont l'existence a été simplement perturbée par les événements; le nombre de victimes directes, tuées, suicidées, voire dévorées puisque les cas de cannibalisme furent nombreux, serait d'un million. La dernière révolution lancée par Mao, afin de transformer les êtres, fut l'ultime tentative, par le refus de singer les étrangers (Occidentaux, puis Soviétiques), de perpétuer dans la modernité occidentale une essence proprement chinoise, rêvée depuis un siècle par les élites. La Révolution culturelle fut le baroud d'honneur du conservatisme chinois.

 

Biographie de l'auteur
Sinologues de réputation internationale, Roderick Mac Farquhar et Michael Schoenhals enseignent respectivement à Harvard et à l'université de Lund.

 

*

Deux des meilleurs spécialistes de la Chine populaire se sont associés pour écrire l'histoire la mieux documentée disponible, à ce jour, sur la Révolution culturelle : à partir de 1966, celle-ci a dressé la jeunesse citadine contre les dirigeants du Parti communiste, avant de dégénérer en guerre civile dès l'année suivante.

Coéditeur des derniers volumes de la Cambridge History of China consacrés à la Chine populaire, le chercheur britannique Roderick MacFarquhar est l'auteur d'une superbe trilogie sur les origines de la Révolution culturelle. Quant à son collègue suédois Michael Schoenhals, je doute qu'un seul sinologue occidental puisse se targuer d'avoir analysé autant de documents que lui sur la Révolution culturelle. C'est en grande partie à lui que nous devons l'extraordinaire masse de détails sur les intrigues, les alliances de circonstance et les retournements exposés dans ce livre. La richesse de la documentation n'empêche pas le récit de demeurer très vivant : le lecteur est tenu en haleine, dans l'attente de nouvelles péripéties ou simplement de la façon dont Mao pourra s'extirper du gâchis dans lequel il s'est fourré. Le malheur est qu'il y a plongé son peuple, qui n'en peut mais.

La première leçon (plutôt une confirmation) du livre, en effet, c'est l'écrasante responsabilité de Mao : sans lui, pas de Révolution culturelle. Il trompe, manipule, déclenche tortures et tueries afin de reconquérir un pouvoir que personne ne lui conteste. La facilité de sa "victoire" atteste que les lieutenants qu'il tient pour traîtres sont soumis et s'évertuent à "travailler en direction" du président. Autrement dit : essayer d'interpréter les sibyllins oracles du dictateur.

 

Caprices et manigances

A défaut de pouvoir, ce qui s'est érodé durant la décennie qui a précédé la Révolution culturelle, c'est le prestige de Mao ; non pas certes auprès des masses, qui ignoraient tout des discussions au sommet, mais parmi les quelques dizaines de dirigeants suprêmes. Certains s'étaient montrés réticents lorsqu'il avait lancé la campagne des Cent Fleurs (1957), tout en se gardant de triompher lorsque l'expérience (qui sollicitait les critiques des non-communistes) avait mal tourné. Mao avait été le principal responsable des erreurs du Grand Bond en avant (1958), une stratégie volontariste de développement accéléré. Mais, cette fois, la majorité des dirigeants avaient partagé ses illusions. Ils sauront du moins tirer la leçon de l'effroyable famine déclenchée par le Grand Bond, et tenteront d'y mettre fin, puis de faire redémarrer l'économie. Moins enclin à reconnaître ses erreurs, Mao s'entête et ne leur pardonne pas d'appliquer des mesures dictées par le pragmatisme et non par la doctrine. Il est difficile d'imputer d'autres torts à la principale victime de la Révolution culturelle, le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Liu Shaoqi.

Une des énigmes persistantes de la Révolution culturelle concerne précisément l'attitude des lieutenants du dictateur, victimes soumises ou collaborateurs empressés, comme si leur unique préoccupation était de s'ingénier à deviner ce que voulait vraiment leur chef sans jamais s'opposer à ses caprices et à ses manigances. Difficile d'imaginer qu'un Zhou Enlai ait en son for intérieur approuvé la voie qu'il a fidèlement suivie durant la dernière décennie de sa vie. L'essentiel à ses yeux n'était pas que cette voie fût bonne pour la révolution et le pays, mais qu'elle fût bien celle que le chef ouvrait, ce qui l'a amené à proférer sans sourciller des torrents d'inepties, à souscrire en en rajoutant aux condamnations aberrantes de ses compagnons et collaborateurs les plus éprouvés.

La conclusion du livre, qui évoque les étapes de la reconquête du pouvoir par Deng Xiaoping, est plutôt un épilogue, précédant de trop brèves pages de réflexion, qui laissent le lecteur sur sa faim. Les auteurs se bornent à dire que la Révolution culturelle est un tournant dans l'histoire de la Chine populaire, ce que nul ne conteste, et un tournant dans l'histoire chinoise moderne, ce qui peut se défendre, à condition qu'on en ajoute pas mal d'autres. Ils insistent en outre sur le caractère autochtone du mouvement.

Remarquable en son genre, ce livre reste essentiellement une histoire politique au sommet. Il se contente de sommaires aperçus sur la société, l'économie... et la culture, mise en exergue par la Révolution culturelle. On ne perçoit pas grand-chose des réactions de l'homme de la rue et de la façon dont il a traversé la tourmente. Modulons toutefois ce regret, car il va de soi que les "masses", censées se soulever au service des idéaux maoïstes, avaient encore moins de latitude pour agir de façon autonome (et étaient beaucoup moins bien informées) que les créatures de Mao. Autre regret : le livre aurait pu distinguer plus nettement la haute époque de la Révolution culturelle (1966-1969) de son interminable séquelle (1969-1976), qui traîne autant que la décrépitude de Mao. Dans cette seconde phase, il n'est plus possible de prétendre à un quelconque rôle des masses, même téléguidées - sauf en avril 1976, mais elles manifestent alors contre la Révolution culturelle et contre Mao.

 

Massacres et répression

L'historiographie officielle post-maoïste a accrédité cette extension de la Révolution culturelle à une décennie entière. Non sans raison, puisqu'elle marque les responsabilités de l'apprenti sorcier, dont il a fallu attendre le dernier souffle pour être enfin délivré du marasme. Il aurait cependant valu la peine de souligner les différences entre les deux périodes, au demeurant prises en compte par Schoenhals dans un ouvrage antérieur. Cela n'empêche pas de reconnaître que les massacres se sont allègrement poursuivis jusqu'en 1971, et que la répression officielle a même fait plus de morts entre 1968 et 1971 que les débordements de gardes rouges entre 1966 et 1968, ce que le livre montre fort bien.

Il est possible que certains lecteurs soient découragés par la masse de détails que renferme le livre. Ceux que l'abondance de noms chinois risque d'égarer disposent d'un appendice biographique aussi précis que succinct. Je ne formulerai que deux minuscules regrets concernant l'excellente traduction de Pierre-Emmanuel Dauzat : l'emploi occasionnel de "la garde rouge" (qui risque de suggérer une unité de commandement et d'action dont les gardes rouges étaient bien incapables) et la traduction par "deux armées" de la seconde partie d'un slogan assignant à l'armée deux tâches (formation et contrôle) qualifiées de "militaires" (entendons : extrêmement strictes). Sans doute le traducteur a-t-il rechigné à employer une expression maladroite et peu claire, mais tel était le jargon qui a enthousiasmé les jobards du monde entier.

Lucien Bianco /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5.09.09.

 

La matrice léniniste
Les auteurs voient dans la Révolution culturelle le "baroud d'honneur du conservatisme chinois", le dernier effort de Mao "pour vacciner son peuple contre la maladie soviétique, (...) pour perpétuer une essence proprement chinoise dans le monde moderne". C'est privilégier la culture et les responsabilités autochtones dans le déclenchement de la Révolution culturelle, au détriment du système communiste. Or Mao ne se révolte pas contre le modèle soviétique (il ne l'a que trop singé au cours de son règne et même avant), il s'en prend seulement au "révisionnisme" de Khrouchtchev, à ses yeux trahison d'un modèle qu'il ne remet guère en cause.
Du reste, il se peut que l'expression même de "révolution culturelle" soit empruntée à Staline. L'historienne chinoise He Qinglian a insisté sur les similitudes entre ces deux expériences, soviétique au tournant des années 1930, chinoise au milieu des années 1960. Elles ont propagé des thèmes semblables et partagé une commune inclination à faire des bureaucrates communistes les boucs émissaires des échecs du pouvoir. Mais l'essentiel est ailleurs : dans l'intime parenté entre deux régimes issus de la matrice léniniste, qui laisse les coudées franches au ty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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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urès / by Jacques Brel

 

http://www.humanite.fr/Zebda-l-hommage-a-Jaures / Zebda, l'hommage à Jaurès : Pour le 150ème anniversaire de la naissance du fondateur de l’Humanité, le groupe toulousain reprend "Jaurès", la chanson de Brel. Et offre à l’humanite.fr le clip musical réalisé pour cet anniversaire. Dans l’Humanité jeudi, nos pages spéciales. 오늘이 쟝 죠레스의 150 주년 생일이라는군 (Jean Jaures, 1859/9/3~1914/7/31). "왜 그들은 죠레스를 죽였는가"(Pourquoi ont-ils tué Jaurès ?)라는 후렴구가 간절한 쟈크 버렐(Jacques Brel, 1929~1978)의 노래를 '뤼마니떼'에서 생일축하곡으로 뽑아 두고 있기에 가져온다.

 

 

Jaurès / by Jacques Brel


Ils étaient usés à quinze ans
Ils finissaient en débutant
Les douze mois s'appelaient décembre
Quelle vie ont eu nos grand-parents
Entre l'absinthe et les grand-messes
Ils étaient vieux avant que d'être
Quinze heures par jour le corps en laisse
Laissent au visage un teint de cendres
Oui notre Monsieur, oui notre bon Maître

 

Pourquoi ont-ils tué Jaurès ?
Pourquoi ont-ils tué Jaurès ?

 

On ne peut pas dire qu'ils furent esclaves
De là à dire qu'ils ont vécu
Lorsque l'on part aussi vaincu
C'est dur de sortir de l'enclave
Et pourtant l'espoir fleurissait
Dans les rêves qui montaient aux cieux
Des quelques ceux qui refusaient
De ramper jusqu'à la vieillesse
Oui notre bon Maître, oui notre Monsieur

 

Pourquoi ont-ils tué Jaurès ?
Pourquoi ont-ils tué Jaurès ?

 

Si par malheur ils survivaient
C'était pour partir à la guerre
C'était pour finir à la guerre
Aux ordres de quelque sabreur
Qui exigeait du bout des lèvres
Qu'ils aillent ouvrir au champ d'horreur
Leurs vingt ans qui n'avaient pu naître
Et ils mouraient à pleine peur
Tout miséreux oui notre bon Maître
Couverts de prèles oui notre Monsieur
Demandez-vous belle jeunesse
Le temps de l'ombre d'un souvenir
Le temps de souffle d'un soupir

 

Pourquoi ont-ils tué Jaurès ?
Pourquoi ont-ils tué Jaurès ?

 

 

cf.) Jean Jaurès : une pensée toujours vivante, par Patrick Le Hyaric, directeur de l'Humanité 

쟝 죠레스 탄생 150주년 http://blog.jinbo.net/radix/?pid=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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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éline, Lettres à Albert Paraz 1947-1957

 
Céline (1894~1961), [Louis Ferdinand Céline (Auguste Destouches)]
Voyage au bout de la nuit, le premier roman de Céline, publié en 1932.
 

Lettres à Albert Paraz 1947-1957", de Céline : Céline, tempo d'enfer
LE MONDE DES LIVRES | 04.06.09 | 11h01  •  Mis à jour le 04.06.09 | 11h01

Extrait

"Meudon, le 4 août 1952
Mon cher JJ -
Tu vas joliment mieux, ces chiffres que tu me donnes font frétiller le vieux médecin que je suis. C'est beau. C'est des chiffres. Encore un ou deux ans et tu seras sur la rive - sauvé -
C'est des jeux de vanité toutes les littératures - ça mérite pas la corde - Quels vents ! Y a des styles des modes - C'est le Temps notre maître - tu trouves le truc du Temps - de l'actuel - tu baises tout le monde - c'est facile.
Je parle : la musique du Temps, pas les faits qui eux sont rien - chieribom pour Hebdomadaires, les extraordinaires histoires toujours si niaises - des redites d'un siècle à l'autre - mais la musique du Temps change et n'est jamais la même d'un siècle à l'autre - Seulement c'est la mort qui donne cette musique et elle seulement - il faut payer - c'est atroce et triste - Moi j'y tiens pas, moi si peinard, si anonyme, si retiré de nature et de destin - moi qui aime tant être rien - J'ai été doué tout de travers - Quant à tous ces bafouillants de littérature ils y comprennent absolument pouic - les plus versés - les plus enragés - C'est tout à côté tout de travers. Ils ressemblent aux gens qui goûtaient l'urine pour estimer la fièvre autrefois. C'est le thermomètre qu'il faut - Ils s'en doutent pas - ils en veulent pas - et que je te glougloute l'urine - ! la merde ! la radio ! la Sorbonne ! le Figaro ! tout -
A toi fils qui va mieux"

[Lettres à Albert Paraz 1947-1957 (p. 421).]

Le 13 mars 1951, sur le point de rentrer en France après six ans d'exil mouvementé et plus de 200 lettres à l'écrivain Albert Paraz, Céline lui fait cette confidence d'un genre rare : "J'aurais voulu m'offrir le chronographe Patek Philippe, le plus cher du monde, avec les heures qui sonnent, la lune, les jours - tout !" Dans cet émerveillement venu tout droit de l'enfance, émouvant désir de gosse, se lit aussi la sagesse instinctive de qui doit absolument reprendre la main sur le Temps, maudit fût-il. Posséder "un Temple et le Dieu du Temps dans sa poche" ? Pourquoi pas. Rappelons que c'est l'époque où Céline termine Féerie pour une autre fois qu'il songe à titrer La Bataille du Styx, voire Maudits soupirs pour une autre fois. Comme quoi, si "la seule catastrophe, c'est le Temps perdu", le salut consistera bien à le retrouver, en gloire, après avoir traversé l'Enfer en "fétichiste des secondes".

Emprisonné un an au Danemark en 1946 suite à une demande française d'extradition (1), puis hospitalisé mais toujours passible d'une condamnation à mort pour trahison, Céline est abrité avec sa femme, à partir de mai 1948, dans le cabanon de son avocat à Klarskovgaard. Là, il réattaque sa correspondance tous azimuts avec sa secrétaire (2), quelques amis, des éditeurs (3), le but étant de reprendre progressivement pied en France. Une stratégie dans laquelle Paraz, qui lui écrit dès juin 1947, va jouer un rôle important. D'abord réticent, Céline comprend vite le parti qu'il peut tirer de ce zélateur qui se démène comme un diable pour le faire absoudre et le défendra plus tard comme critique, n'hésitant pas, alors qu'il est complètement tabou, à publier ses lettres dans son Gala des vaches, fin 1948 - livre bientôt suivi d'un Valsez, saucisses intégrant le même procédé, deux ans plus tard. Instrumentalisation réciproque non dénuée d'arrière-pensées de part et d'autre ? Certes, mais qui fait néanmoins de Paraz le premier "éditeur" d'une correspondance célinienne et davantage encore.

 

"C'EST LE PAGEOT QUI COMPTE"

Car Céline a beau se plaindre de "bouffer du néant" en bord de Baltique, ses lettres le montrent surmené : affaires éditoriales d'avant-guerre à régler, textes à envoyer (extraits de Casse-Pipe à Paulhan, A l'agité du bocal en réponse aux attaques de Sartre), recherche d'éditeurs suisses ou belges pour rééditions, mais surtout, défense à organiser dans la perspective de son procès. Dans ces tâches, Paraz le soutient, lui communique des articles, le tient informé des rumeurs. Qualifié dans d'autres lettres de "brave garçon pas bien réveillé assez agaçant par sa manie de discutailler sur des points de bêtises", de "furieuse commère" ou de "bien gentil" mais "courageux", Paraz est parfois maladroit, trop empressé, gênant. Céline le rabroue alors et l'envoie bouler en l'appelant "grand benêt" !

Impossible de détailler ici l'ampleur des imbroglios, ragots et carambouilles en fusion auxquels Céline réagit dans ses célèbres rafales d'éructations. C'est un régal d'humour ravageur dont il faudrait presque tout citer. Il ne s'agit pas de "bonheurs d'expression", mais d'un incessant tourniquet à trouvailles où les pépites éclatent en geysers, rafales musicales d'une langue en rut : "Ils nous font chier avec l'argot on prend la langue qu'on peut on la tortille comme on peut elle jouit ou elle jouit pas... c'est le pageot qui compte, pas le dictionnaire ! Les mots ne sont rien s'ils ne sont pas notes d'une musique du tronc..."

D'ailleurs, suffisamment de temps ayant passé pour établir solidement son dossier et que nous sachions à quoi nous en tenir sur son cas idéologique, Céline passionne ici beaucoup moins par sa victimisation lassante, ses arguties douteuses, ses injures haineuses, que parce qu'il écrit de la littérature, de ses contemporains, du milieu littéraire. S'adressant à un autre écrivain, il se livre ici comme nulle part ailleurs sur son art, se définissant comme "lyrique comique" et poète - "c'est pas loin du vers mon tapin". Ses livres ? "Des grandes machines à voix et trompettes et tambours - avec ballets mêlés." Ce qu'il crée ? des "jardins d'harmonies". Ecrire ? "Du boulot d'âme." Ce qu'il est ? "Musicien du français", "langue royale" - il n'en démordra plus, et c'est magnifique : "Loin du "parler français" je meurs - il y a peu de Français ou semi-Français actuellement en France qui aient véritablement besoin du français ! musique."

Car il y a la langue qu'il forge, lui, "création vivante", et le français "raplati, mort" des traductions. D'où ses diatribes contre la littérature américaine qu'il trouve, de ce point de vue, complètement surestimée : "Les banlieusards veulent de l'américain, ne bandant qu'à l'américain... du moment que ça leur vient du Carthage atomique ! Ils avalent toutes les merdes pourvu qu'on leur présente en chewing-gums !" Lucidité prophétique de Céline ? C'est l'évidence. L'Histoire ? "On n'en sortira que robots", par insensibilité ("90% des individus ont des nerfs en zinc... réagissent plus guère qu'aux bombes..."). Les auteurs ? "Ne tiennent que par l'effet publicitaire... Après leur premier livre, ils s'éreintent à se survivre - mais au fond ils sont déjà morts pour le public..." Les éditeurs ? "On tire, on empoche et on s'en va ! Au suivant !" Le livre ? "Agonique... ce ne sont plus des livres, les romans actuels, ce sont des scénarios - le cinéma bouffe tout..."

Demeure la grâce de lire - Montluc, Tallemant des Réaux, Vauvenargues, Chamfort, Voltaire, Chateaubriand, etc. "Que je suis jaloux des classiques", s'exclame-t-il un jour. "Je travaille classique moi", déclare-t-il un autre. Son heure viendra et il le sait : "Ma vénération pour le Temps est absolue". Patek Philippe peut garder son platine, Céline fourbit ses lingots en Pléiade.

 

LETTRES À ALBERT PARAZ 1947-1957 de Céline. Nouvelle édition établie par Jean-Paul Louis. Cahiers de la NRF, Gallimard, 560 p., 36,50 €.

(1) Voir L'Affaire Louis-Ferdinand Céline, de David Alliot, Horay, 2007 et Un autre Céline, d'Henri Godard, Textuel, 2008.
(2) Voir Lettres à Marie Canavaggia 1936-1960, Gallimard, 2007.
(3) Voir Ferdinand furieux (avec 313 lettres inédites de L-F. Céline), de Pierre Monnier, L'Age d'Homme, 1979.

A noter également la parution de Céline, d'Yves Buin, Gallimard, "Folio biographies" inédit, 468 p., 8,60 €.

 

Cécile Guilbert,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05.06.09.
*
Louis Ferdinand Auguste Destouches, plus connu sous son nom de plume Louis-Ferdinand Céline (prénom de sa grand-mère et l'un des prénoms de sa mère), généralement abrégé en Céline (1894 – 1961), est un médecin et écrivain français, le plus traduit et diffusé dans le monde parmi ceux du XXe siècle après Marcel Proust.
Sa pensée nihiliste est teintée d'accents héroïcomiques et épiques. Controversé en raison de ses pamphlets antisémites, il n'en demeure pas moins un des plus grands écrivains de la littérature française du XXe siècle. Il est le créateur d'un style qui traduit toute la difficulté d'une époque à être et à se dire et qui exprime sa haine du monde moderne. Il est aujourd'hui considéré comme l'un des plus grands prosateurs de son temps, aux côtés d'autres connaisseurs de l'absurdité humaine comme Jean-Paul Sartre, Albert Camus et Samuel Beckett[1].
Œuvres de Louis-Ferdinand Céline
Romans
Pamphl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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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책] 에밀졸라와 드레퓌스

등잔밑이 어둡다고, 참세상에서 기획연재하는 [낡은책]이라는 제목도 친근한 코너를 오늘에야 발견했다. 내 블로그에서 직전에 만든 포스트가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 듣기용인데, 우연히도 며칠 전에 나온 [낡은책] 9편에서 드레퓌스에 관한 책, <드레퓌스>(1978)를 다루고 있다. 드레퓌스도 드레퓌스지만 그를 위해, 아니 진실을 위해 싸운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가 "나는 고발한다"로 유명한 에밀 졸라. 일단 서평의 일부와 "나는 고발한다"의 그림을 보자.

 

[낡은책9] 드레퓌스, 진실과 허위의 역사

진실을 뒤덮은 편견의 프랑스 (이정호 기자  / 참세상 2009년04월13일 16시34분)
드레퓌스-진실과 허위 그 대결의 역사 (니콜라스 할라즈, 황의방 번역, 한길사, 1978년, 327쪽
1894년 10월 31일 독일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프랑스의 육군 대위 드레퓌스가 체포된다. 프랑스는 그를 둘러싸고 이후 12년 동안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1906년 무죄가 밝혀지고 모든 것이 원 상태대로 돌아갔다. 드레퓌스 사건의 또다른 주역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를 변호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고 결국 영국으로 망명해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드레사건의 끝을 보지도 못한채 1902년 가을 가스중독으로 죽어갔다. 졸라는 1898년 1월13일자 끌레망스의 ‘로로르’지 1면에 ‘나는 고발한다’를 실었다. “진실은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원고지 80장 분량의 이 격문이 실린 로로르 지는 평소 발행부수의 10배가 넘는 30만부가 팔렸다. 졸라는 “광기, 어리석음, 기괴한 상상력, 비열한 경찰 근성, 종교 재판 식의 매도, 전체적인 폭압으로 뒤흔들렸고, 몇몇 장교와 장성들의 영달을 위해 국가 전체가 강철 군화에 짓밟혔으며,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국가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질식됐다”고 토로했다. (...) 31년된 책이지만 솜씨 있는 번역 덕분에 지금 읽어도 맛있게 읽을 수 있다. 오히려 이후에 번역한 책들이 현학적이라서 읽기에 더 버겁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2469

 

▲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가 게재된 1898년 1월 13일자 <로로르(여명)> 1면. 
http://www.oxygenee.com/images/J_Accuse-813KB.jpg  에밀 졸라

 

 

Alfred Dreyfus (Mulhouse, 9 octobre 1859 - Paris, 12 juillet 1935) était un officier français et alsacien d'origine et de religion juive. Accusé, puis condamné pour trahison avant d'être gracié, puis réhabilité, il fut au cœur d'un conflit social et politique majeur de la IIIe République, appelé l'Affaire Dreyfus qui a divisé l'opinion française en deux clans : les Dreyfusard et les Anti-Dreyfusards.

Émile Zola, né à Paris le 2 avril 1840, mort à Paris le 29 septembre 1902, est un écrivain, journaliste et homme public français, considéré comme le chef de file du naturalisme.

 

드레퓌스는 1859년생으로 쟝 죠레스, 베르크손과 동갑이고, 따지자면 올해가 그에게도 150주년 탄생 기념해이다 (뒤의 두 사람도 그 당시에는 드레퓌스를 위해 노력을 한 것으로 기억). 다른 친구들은 150주년 탄생 기념이라고 각종 행사의 대상이 되어 세상의 벅적임 속에서 다시 기억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이름만 세상에 빌려준 자의 슬픔같은 것이 드레퓌스에게는 느껴져서 왠지 약간은 씁쓸하고 미안하다 (참고: 쟝 죠레스 탄생 150주년 http://blog.jinbo.net/radix/?pid=149).

이하, [낡은책] 지난 기사 중에서 두개만 선정해다 링크건다.

 

[낡은책2] 진보와 그의 적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1083
 ‘세계적 석학’이란 수사 뒤에 숨은 궤변 ‘프랑스의 지성’ ‘세계적 석학’ ‘미래학자’라는 미사여구가 늘 붙어 다니는 기 소르망의 궤변... [이정호 기자] 2009.01.04

[낡은책3] 프랑스 민중을 위한 한 생애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1170
 인민의 아들 (모레스 토레즈, 연구사, 1987.9.10) 이 책은 1990-1964년까지 20세기 전반기를 알차게 살다 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레스 토레즈(Thorez, Maurice)의 자서전이다. 토레즈는 프랑스 공산당의 역사다...... [이정호 기자] 200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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쟝 죠레스 탄생 150주년

[추가] 4월 17일 열린 '죠레스  탄생 150주년' 기념 학술대회 보고서

 

Jaurès, de la Révolution à la transformation sociale (l'Humanite 기사인데 날짜가 없다. 2009/4/20 정도로 추정)

Vendredi dernier, historiens, philosophes, militants et responsables politiques ont longuement débattu de l’actualité, de la leçon du grand homme, à l’occasion d’un premier colloque organisé à Toulouse par l’Humanité, en partenariat avec la nouvelle municipalité de gauche.


Pourquoi et comment Jaurès «  [1] écrit-il entre 1898 et 1902 son grand livre historique l’Histoire socialist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 En quoi consiste l’originalité de sa lecture du passé révolutionnaire national ? Est-elle scientifique, est-elle nécessaire à l’élaboration du socialisme de son temps ? C’est en développant cette problématique que devant l’amphithéâtre archicomble de la salle du Sénéchal, qui ne désemplira pas jusqu’à tard dans la soirée, Michel Vovelle inaugure la première table ronde de la journée.

L’historien éminent qui présida le Bicentenair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en 1989 montre que la somme de Jaurès, trois mille pages publiées en fascicule, constitue essentiellement une grande histoire sociale de la révolution. « En contrepoint de la lecture de Michelet à Taine d’une “révolution de la misère”, celle du paysan exténué par les redevances et l’impôt, c’est une histoire sociale de l’avènement de la bourgeoisie. » En quoi une histoire « socialiste » ? Il cite Jaurès : « La Révolution française a préparé indirectement l’avènement du prolétariat. Elle a réalisé les conditions essentielles du socialisme : la démocratie et le capitalisme. » L’historien souligne la fécondité du travail de Jaurès sur l’avènement de la République. Et de lancer : « Cette histoire n’est pas close. »

 

Claude Mazauric, l’historien spécialiste de Babeuf notamment, évoque l’influence considérable de Jaurès sur l’historiographie ultérieur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et en souligne tout l’enjeu intellectuel et politique. Jaurès ne cesse en effet d’expliquer que les hommes écrivent cette histoire, lui donnent un sens qui n’est ni prévu à l’avance, ni prédéterminé dans ses formes. « Jaurès nous livre une histoire de la liberté ».

Raymond Huard, historien des partis politiques au XIXe siècle, explique ensuite comment Jaurès aborde le passé « toujours avec le souci d’en tirer des leçons pour l’action contemporaine des socialistes ». Il montre en particulier comment c’est autour de la force de la bourgeoisie, de sa capacité comme classe à coaguler d’autres forces dans « un bloc historique », que s’est joué l’avenir. Leçon décisive pour qui veut comprendre la tâche qui échoit à la classe ouvrière.

Enfin, Jean-Numa Ducange, historien et germaniste, montre la réception « complexe » par le mouvement ouvrier allemand de l’œuvre jaurésienne, plutôt « fraîchement accueillie », en raison de conceptions divergentes de la Révolution, particulièrement sensibles à la tradition étatiste qui culmine avec Bismarck.

À propos de l’épisode de la Terreur, évoqué au cours d’une riche discussion avec le public et qui conduisit à présenter quasi officiellement la Révolution dans les années 1980 comme la matrice de tous les totalitarismes, Claude Mazauric n’hésite pas à parler d’une véritable « contre-révolution philosophique, méthodologique » dont le premier pilote fut François Furet. Jaurès n’a pas du tout esquivé l’histoire de la Terreur. L’historien Rémi Cazals inaugure la seconde table ronde qui analyse le rapport de Jaurès au mouvement populaire. Ainsi cet épisode des ouvriers lainiers de Mazamet qui, à la différence de leurs voisins mineurs de Carmaux, sont nourris de catholicisme rural et forts conservateurs en politique. Ils finiront pourtant par s’engager en 1909 dans un puissant mouvement de grève en lien avec le syndicalisme révolutionnaire, en se fondant dans une CGT réunifiée.

 

Le philosophe Bruno Antonini montre comment Jaurès s’efforce toujours, dans ses textes et son comportement, d’articuler le politique au social et l’institutionnel à l’économique. Le socialisme est un mouvement de création continue par lequel la souveraineté populaire s’étend de l’ordre politique à l’ordre économique en articulant parlementarisme (avec la création d’une chambre du travail à la place du Sénat) et syndicalisme. L’historien Alain Boscus met en exergue les deux axes de la transformation sociale en ce début de XXe siècle, intervention politique socialiste et voie syndicale non partisane. En l’espace de trente années, les transformations du syndicalisme révolutionnaire recoupent, sans pour autant s’y identifier, l’évolution des propres idées jaurésiennes. À l’inverse de l’image pieuse que tentent d’accréditer aujourd’hui quelques historiens peu regardants aux faits, sa pensée s’inscrit de part en part dans « le social ».

Le tournant de 1906 met ainsi définitivement au cœur de sa réflexion politique, qui vise à transformer la société, « l’intervention active du prolétariat en lien étroit avec le suffrage universel ». C’est la même vision dialectique qui commande sa conception de la laïcité et de la question religieuse. La laïcité, montre l’historien Jean-Paul Scot, ne s’identifie pas à la tolérance, au laisser-faire, elle se définit par le respect total des individus et de la démocratie quelles que soient les croyances ou convictions de chacun. La liberté de conscience manifeste l’avancée historique de la liberté dans une société où les perspectives de progrès « se mesurent à la capacité d’assurer l’émancipation individuelle de chacun par l’éducation et l’accès à la connaissance ». Un programme plus actuel que jamais. (par Alain Raynal et Lucien Degoy)
Notes : [1] L’Année Jaurès », organisée à l’occasion du 150e anniversaire de sa naissance (le 3 septembre 1859), donnera lieu à de nombreuses initiatives publiques coordonnées par un comité scientifique, a rappelé Pierre Cohen, le député maire de Toulouse.

 


[이하 4월 10일 포스트]

 

올해가 쟝 죠레스 탄생 150주년 기념해라고 몇몇 행사들이 열리는 모양인데, 그 첫번째는 그가 재직했던 프랑스 남부의 뚤루즈 대학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이고, 다음주 금요일(4/17일)이라며 뤼마니떼(죠레스가 창간한)에서 초대장을 걸어뒀다. 그러고보면 우리 58년 개띠해가 어떻다느니 하는 것과 비슷하게, 150년 전인 1859년은 어떤 행운의 해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베르크손(H.Bergson)과 후설(Edmund Husserl, 8 avril 1859~1938)도 같은 해에 태어났으니... 다른 곳에서도 이미 언급한 듯한데, 죠레스와 베르크손은 또한 에꼴노르말(ENS) 동기이고, 죠레스가 수석, 베르크손이 차석으로 입학했었다는 사실은 이제 별 새로운 얘기도 아니겠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그저께가 바로 후설의 생일이었네...(참고로 J와B의 생일은 각각 9/3, 10/18일) [예전에 내가 전공을 때려치고 새로 철학에 입문할 때만 해도 후설철학이 최고고 비트겐슈타인이 2등 쯤인 줄로 알 정도였는데... 정치철학 할려는 놈에게는 당시만 해도 정치철학이라는 것은 용어도 생소했고, 뭘 하든 후설은 넘어야 할 귀찮은 벽!] 그제는 어떤 행사가 있었는지, 후설이 이제는 한물 갔는지, 어떤 처지인지 등이 약간(조사해볼 정도로 많이는 아니고) 궁금하기도 하다 (푸코와 들뢰즈의 등살에 밀려났을려나!). 쟝 죠레스를 위한 포스트에 괜히 쓸데없는 옛날얘기로 분위기만 산만해진 느낌이다. 그 많큼 후설에 맺힌 게 좀 있다는 말이고, 또 그 만큼이나 내가 늙어간다는 증거겠다. 그건그렇고, 앵비따씨옹(초대장-invitation)의 그림과 내용은 이렇다 :

 

 

Colloque Jean Jaurès à Toulouse / 2009, année Jaurès
L’Humanité s’associe à la décision prise par la municipalité de Toulouse de commémorer l’anniversaire de la naissance du fondateur du journal. Pour cette année Jaurès, premier événement avec un colloque à Toulouse le 17 avril. Par Patrick Le Hyaric, Directeur de l’Humani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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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umanité se fait un devoir de perpétuer par la publication de textes originaux, de colloques, de prises de position, d’ouvrages, la connaissance par le plus grand nombre des idées et de l’œuvre de son fondateur. Nous veillons tout autant à valoriser les travaux de recherche des historiens et des philosophes qui étudient et approfondissent sans cesse la pensée féconde et révolutionnaire de Jean Jaurès.

Dans ce but, nous nous félicitons pleinement de la décision prise par la municipalité de Toulouse de commémorer par un ensemble de manifestations, pour la plupart éducatives et culturelles, le 150ème anniversaire de la naissance de Jean Jaurès. Comme partenaire, « l’Humanité » s’associe pleinement à « Toulouse 2009 : Année Jaurès », en organisant plusieurs initiatives dont une première, le colloque du 17 avril prochain, salle du sénéchal à Toulouse. A partir du thème « Jean Jaurès, mouvements populaires et révolutions », des historiens de renom, spécialistes de l’œuvre considérable de Jean Jaurès feront part de leur travaux. Ouvertes au public, ces tables rondes se poursuivront par un débat sur l’actualité des idées développées par le grand penseur socialiste.

Ce colloque, ainsi que tous les autres moments forts programmés dans le cadre de l’Année Jaurès, apparaissent d’autant plus justifiés dans la période actuelle, que des provocations de l’extrême droite et de la droite extrême visent à salir la mémoire de Jean Jaurès. Ils cherchent à briser les acquis historiques du mouvement ouvrier et à brouiller les repères progressistes pour les nouvelles générations. Puis, et c’est essentiel, à l’heure où le système capitaliste connait une crise sans précédent dans son essence même, où la mondialisation est au service des seuls profits pour les nantis, où les va-en-guerre redoublent d’une dangereuse agitation, les idées et les combats pour l’émancipation humaine, la justice, la démocratie sociale et politique, la paix et le désarmement, pour la maîtrise collective des richesses, pour la laïcité et la culture, l’internationalisme, portés haut et fort par Jean Jaurès apparaissent d’une brulante actualité. Non pour être bêtement plaqués sur une réalité chamboulée en un siècle, mais comme contribution fort utile à la réflexion de tous ceux qui refusent de se laisser tromper par « une prétendue moralisation » du système, qui ne se résignent pas et veulent agir pour un autre possible, pour des transformations profondes de la société, et la révolution post-capitaliste du 21ème siècle qui sera démocratique, sociale, écologique.

 

 
Statue à Suresnes / Jean Jaurè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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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위키자료]
Jean Jaurès (1859~1914), de son nom d'état civil Auguste Marie Joseph Jean Léon Jaurès, est un homme politique socialiste français, né à Castres (Tarn) le 3 septembre 1859 et mort assassiné à Paris le 31 juillet 1914. Brillant élève, Jaurès bénéficie des chances de promotion sociale qu’offre la République, il fait ses études au lycée Louis-le-Grand. En 1878, il est reçu premier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de la rue d'Ulm en philosophie, devant Henri Bergson(*), puis troisième à l'agrégation de philosophie en 1881.
1/ Des « républicains modérés » au Parti socialiste
Jaurès n'a pas toujours été socialiste et marxiste. Quand la République s'installe pour de bon, après une décennie de tergiversations au sujet du régime (en 1870 le Second Empire s'effondre, la République est proclamée mais les monarchistes, divisés, dominent à la Chambre des députés), Jaurès n'a que vingt ans. Il s'engage en politique en 1885, devenant député du Tarn à 25 ans. Fils de 1789, il croit cependant au réformisme institutionnel et républicain, à l'alliance des ouvriers et de la bourgeoisie laborieuse pour le triomphe de la liberté, de l'égalité et de la fraternité. Jaurès reprend son enseignement à la faculté de Toulouse. Il est reçu docteur en philosophie en 1892 avec sa thèse principale De la réalité du monde sensible et sa thèse secondaire en latin, Des origines du socialisme allemand chez Luther, Kant, Fichte, et Hegel.  
2/  L'Humanité
Apres avoir Battu aux élections de 1898 (l'installation de la Verrerie ouvrière à Albi et son ardente défense de Dreyfus ont provoqué sa défaite), Jaurès devient directeur de La petite république. C'est dans les colonnes de ce journal qu'il publie Les preuves relatives à l’affaire Dreyfus. Il dirige une Histoire socialiste de la France contemporaine (Éditions Rouff) pour laquelle il rédige les volumes consacrés à la Révolution française (1901-1903). Jaurès, réélu député du Tarn en 1902, 1906, 1910 et 1914, fonde le quotidien L'Humanité en 1904. Il infléchit ses choix stratégiques et donne la priorité à l'unité socialiste. Celle-ci, sous pression de l’Internationale, se réalise au Congrès du Globe (avril 1905) avec la création de la 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ère (SFIO), unifiant les différentes sensibilités socialistes de France. 
3/ Hommages
Tombe de Jean Jaurès au Panthéon de Paris. En 1917, Léon Trotski écrit un éloge de Jean Jaurès qu'il conclut par ces mots : « Jaurès, athlète de l'idée, tomba sur l'arène en combattant le plus terrible fléau de l'humanité et du genre humain : la guerre. Et il restera dans la mémoire de la postérité comme le précurseur, le prototype de l'homme supérieur qui doit naître des souffrances et des chutes, des espoirs et de la lutte. »(Article de 1917 traduit en français dans le Bulletin communiste (organe de la SFIC), n⁰47, 22 novembre 1923 (réédité dans les Cahiers du mouvement ouvrier [archive], n⁰2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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쟝 조레스는 1859년 프랑스 남부 뚤루즈 근처인 까스트르라는 촌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우수한 학생으로 발탁되어 빠리의 소르본느 뒤에 있는 그랑제꼴 준비 고등학교인 '루이 르 그랑'을 거쳐, 1878년에 '빠리고등사범학교(에꼴노르말-그랑제꼴)' 철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881년에 '철학교사 자격시험(아그레가씨옹)'에 3등으로 합격했다함 (이번에도 베르크손이 같이 합격했는데, 여기서는 베르크손이 2등, 조레스는 3등 (1등은 누군지 모름)을 했다 함). 그리고 조레스는 1885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고향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 ; 국회의원에 당선이 안 될 적에는 뚤루즈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했고, 그 와중에 1892년에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했다 한다 (주논문:  "감성세계의 실재에 대하여(De la réalité du monde sensible)", 부논문(라틴어): "독일 사회주의의 기원: 루터, 칸트, 피히테, 헤겔 (Des origines du socialisme allemand chez Luther, Kant, Fichte, et Hegel)".
그리고 1904년에는 뤼마니떼(l'Humanité-지금은 거의 프랑스공산당(PCF) 기관지)를 창간, 나중에는 프랑스 사회당의 산파 역할, , 등등의 정치 활동을 함.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발발 3일 전인가에 암살 됨. 그리고 바로 10년 후인 1924년에 빵떼옹(Panthéon de Paris)에 모셔짐. 그러나 주의할 점은, 쟝 죠레스는 -현실 정치가 답게(!)- 계속 맑스주의를 고수하지는 않았고, 노동자계급과 근로부르조와계급의 연대를 통한 제도적-공화적 개혁을 주창했다고 위에 적혀있음. 나야 뭐, 이런 사실들 보다야 아래의 논문들에 더 관심이 가지만... 아직은, 아직도, 아직만...
(*) Henri Bergson (18 octobre 1859 à Paris - 4 janvier 1941) est un philosophe et un diplomate français. Surtout connu pour ses ouvrages Matière et mémoire et L'Évolution créatrice, son œuvre est étudiée dans différentes disciplines (cinéma, littérature, neuro-psychologie, etc). Il a obtenu le prix Nobel de littérature en 1927. Après quelques hésitations à propos de sa carrière, balançant entre les sciences et les humanités, il opta finalement pour ces dernières, et entra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l’année de ses dix-neuf ans dans la promotion d'Émile Durkheim, de Jean Jaurès et de son ami Pierre Janet. Il y obtint une licence en lettres, puis l’agrégation de philosophie en 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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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르까임(E.Durkheim), 150년 (+audio)

모르고 지나갔더니만, 작년이 뒤르까임*(Emile Durkheim, 1858~1917) 탄생 150년 기념해 였다는군. 그래서 작년 말에 빠리에서 어떤 학술 대회가 있었던 모양이고(2009/11/4~5), 그것을 녹음해서 아래의 '방송아카데미'(canal academie)라는 곳에서 들려준다(49분14초). '펌'은 안되는 듯하고, 함께 있는 텍스트와 링크만 옮겨온다. 녹음이 약간 늘어지는 부분도 있으나 듣는데 큰 지장은 없다. 찾아보니 국내기사로는, 역시나 뒤르까임 탄생 150 주년을 기념하는 민문홍의 지난 글(2008/1/29)이 교수신문에 있다. 기고자께서 뒤르까임의 <사회학과 철학>(1951)을 지금 번역 중이고, 거기서 뒤르까임의 "새로운 도덕적 이상의 탄생을 엿보"(제목)는 모양이다. 밑에 옮겨다 둔다.

(*) 아래의 민문홍 글에서는 "뒤르케임"으로 표기가 돼 있으나 나는 '뒤르까임'으로 한다. 물론 한글표기법에서는 'ㄲ' 류 보다는 'ㅋ' 류를 따른다고('빠리'보다는 '파리'를) 하는 모양인데, 나야 뭐, 이 블로그 내용이 출판될 것도 아니니 한글표기법 보다는 실재발음에 충실한 표기를 선택한다. Paris에서는 아무도 '빠리'를 '파리'라고 하는 사람은 없고, '뒤르까임'을 '뒤르케임'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단지 내게 문제는 '까임'이냐 '께임'이냐 였는데, 다시 아래 녹음물을 자세히 들어보니, 이건 '까임'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께임'도 아닌 중간 쯤인 것으로 들린다. 물론 이름 스펠링의 기억을 돕기 위해서는 '뒤르께임'이 낫겠으나, 살아있는 발음을 다시 확인해보니 '뒤르까임므'에 가까운 '뒤르까임' 이다. 

 

Emile Durkheim et les philosophes de son temps [뒤르까임과 당대의 철학자들] 

par Bertrand Saint-Sernin, de l’Acadé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A l’occasion du 150 ème anniversaire de l’un des plus grands sociologues français, Emile Durkheim, l’Acadé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a tenu un colloque à l’Institut de France, les 4 et 5 novembre 2008. Ecoutez ici le philosophe Bertrand Saint-Sernin qui s’attache à saisir le « métaphysicien » qui se cache derrière la figure du fondateur de la sociologie française, Émile Durkheim. Il le situe dans la philosophie de son temps.
Référence : col531; Date de mise en ligne : 25 janvier 2009
Adresse de cet article : http://www.canalacademie.com/Emile-Durkheim-et-les-philosophes.html
Emile Durkheim  
Le philosophe Saint-Sernin tente de comprendre les bouleversements qu’a connus la philosophie à la fin du XIXème siècle à partir de l’émergence de toutes les sciences humaines et sociales. Il décèle ainsi l’originalité de Durkheim qui place son analyse au cœur de sa nouvelle science des religions. La science selon ce dernier « doit prêter main forte à la philosophie », en sorte qu’il n’y a pas de « dissociation » entre les deux. Mais pour y réussir, il s’avère nécessaire pour le sociologue de travailler collectivement. Comment édifier une science du social ? Comment fonder une morale sans transcendance ? Telles sont les questions modernes qui préoccupent Durkheim. Mais d’un point de vue méthodologique Durkheim selon Saint-Sernin s’en remettrai à la lecture de Platon... En effet, la réalité « doit être découpée » comme le ferait un bon boucher.

Puis dans une deuxième partie, Bertrand Saint-Sernin s’interroge : Quelle fut la participation de Durkheim à la philosophie de son temps ? Durkheim en parle très peu, il évoque rarement ses contemporains philosophes. Cependant, il conseille aux écrivains de lire les philosophes afin de déceler les idéologies qu’ils véhiculent. Par ailleurs Durkheim a présidé le jury de l’agrégation de philosophie de 1895 et a fait partie de nombreux jurys de thèses. Il a même donné deux conférences à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participé au congrès de Bologne en avril 1911 avec Bergson et rendu compte de sa conférence. Enfin, dans une troisième partie, Bertrand Saint Sernin évoque plusieurs philosophes qui ont donné leur témoignage sur Durkheim : Gilson (qui fut son élève) dans Le Philosophe et la philosophie ; Bergson dans Les deux sources, Blondel, Lévy-Brühl et même l’historien des religions Loisy. Bertrand Saint-Sernin détaille donc la manière dont chacun d’eux a évoqué Durkheim, en positif ou en négatif. 

Ecoutez aussi sur Canal Académie :

- Emile Durkheim : comment il ne fut pas élu à l’Académie ! par Michel Albert
- Emile Durkheim et Friedrich Ratzel : frontières disciplinaires par Bernard Valade

 

참 재밌게도, 위의 글은 뒤르까임의 사회학이 얼마나 긴밀히 철학과의 연관 속에 있는지를, 결국 그 둘은 결코 분리될 수가 없다는 것을(노란 밑줄 부분), 그리고 뒤르까임은 사회학자이면서도 계속 철학자였다는 것을 말하는데; 반면, 아래 글은 뒤르까임을 통한 뭔가 새로운 사회학이 철학이 못한 부분을 대체하고, 나아가서는 "기존의 철학을 새롭게 갱신하고", 그 독보적 위상을 사회 속의 구체적 실천과정에서 확보할 수 있다는 듯하다. 글쎄, 판단은 독자의 몫!

 

 

새로운 도덕적 이상의 탄생을 엿보다 
[지금 번역중입니다] 에밀 뒤르케임의 Sociologie et philosophie(PUF, 1951) 
2008년 01월 29일 (화) 13:44:16 민문홍 / 서강대·사회학 ⓒ 교수신문

 

 
   

올해는 뒤르케임이 탄생한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같은 해에 또 다른 사회학의 거장 게오르그 짐멜이 태어났다. 올해에 필자가 번역을 준비하는 뒤르케임의 저서는 『사회학과 철학』이다. 뒤르케임을 읽는 사회학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책은 뒤르케임이 1898년부터 1906년 사이 출간한 몇 편의 논문들을 수제자인 소르본 대학의 정치사회학자 쎌레스텡 부글레가 그의 서문과 함께 새로 편집해 프랑스 대학출판사에서 1951년 출간한 책이다.
부글레가 뒤르케임의 사후 이 책을 출간한 이유 중 하나는, 프랑스 사회학사를 되돌아 볼 때,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학이 기존의 철학을 새롭게 갱신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는 같은 맥락에서 프랑스 3공화정 당시에 왜 철학보다 사회학이 중ㆍ고등학교에서 청소년의 가치관 정립과 관련해 더 큰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이 책에 선별된 뒤르케임의 논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뒤르케임이 이 책에 실린 자신의 논문들을 통해 일관성 있게 주창한 것은, 향후 사회학이 국민들의 정신을 계도할 학문으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계량적 연구에만 만족하지 않고 특수한 분야의 연구들을 다양하게 하고 그것을 종합함으로써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연구한 사회학 선구자들의 연구방식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뒤르케임이 첫 번째 착수한 작업은 도덕에 관한 과학적 연구였다. 뒤르케임은 이 당시 가톨릭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도덕에 대한 과학적 논의가 금기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과감하게 도덕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다루어야 하고, 기존 도덕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도덕성의 원리를 사회학이 새로운 학문의 이름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새로운 학문인 사회학이 다루는 주제는 다음의 몇 가지 항목들이었다. 도덕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이 사회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뒤르케임의 잠정적 해답은, 도덕은 사회의 열망을 해석하면서 해당 사회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방식을 일반 시민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평생을 통한 연구 프로젝트의 주제는 도덕사회학이다.

 

도덕을 신앙으로 보는 지적 풍토 비판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뒤르케임은 실증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을 주창했다. 특히 그가 1906년에 특별히 정성을 기울여 쓴 논문인 ‘도덕적 사실의 결정’은 1893년에 쓴 ‘사회분업론 서문’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논의를 정리한 글로, 뒤르케임의 도덕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커다란 학문적 의의를 지닌다. 이 논문에서 뒤르케임이 보여주는 학문적 관심은 도덕의 문제를 과학의 주제로 생각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신앙의 문제로만 여기는 당시의 지적 분위기를 비판하면서, 후기 기독교 시대에 어울리는 도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선행돼야 하는 작업은 도덕의 문제와 관련해 실증적 관찰에 의해 확립된 토대를, 더 이상 어려운 철학적 용어가 아닌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과학적 권위를 가진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이름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뒤르케임은 사회학이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 선행 조건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사회학이 자신의 실증적 연구업적뿐만 아니라, 이 새로 태어나는 학문의 원칙에 대한 성찰적 토론을 통해 왜 이 새로운 학문이 필요한지 다른 과학자들과 일반 시민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철학과 차별화된 문제제기를 함과 동시에, 사회학과 기존의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 방법의 차이점, 그리고 학문의 위계질서 등에 대한 체계적 성찰을 통해 전문가들과 시민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뒤르케임은 기존의 학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의식 및 이성이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인간의 이중성(인간의 인간다운 본성과 동물적인 본성)을 인간관으로 강조함으로써, 도덕교육의 핵심을 ‘인간 본성의 귀한 인간적 이상을 격려하고, 동물성을 훈련을 통해 억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도덕과학과 도덕교육의 기초를 확립했다.
한편, 뒤르케임이 여기에 쓴 논문들은 『사회학 방법의 규칙들』(1895)처럼 그의 사회학 방법론을 사회학주의(sociologism)라고 비판하는 논평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는 저작들이기도 하다. 뒤르케임은 새로 태어나는 학문의 일반 공중에 대한 설득력을 얻기 위해 곳곳에서 은유적ㆍ상징적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게다가 그의 사회학 이론은 종종 몇 가지 애매모호한 부분을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학문적 분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 비판들의 핵심은 뒤르케임을 유물론, 유기체론, 사회적 공리주의로 분류하고, 이러한 판단에 입각해서 그의 학문적 입장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의 비판자들은 이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앞뒤 맥락과 뒤르케임의 전체적 연구의도를 무시했다. 이들이 뒤르케임을 공격한 주된 대목은 그가 『사회학 방법의 규칙들』에서 “사회적 사실을 사물들로 다뤄야 한다”고 한 주장이었다.  

물론, 당시에 뒤르케임이 다양한 상징적 문구로 표현하기를 원했던 진정한 의도는, 특정 대상을 연구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모든 편견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특히 도덕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할 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과 자신의 감정 확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제도에 대한 연구가 자연과학이 사물을 연구하는 경우처럼 학문적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리적ㆍ주체적 반응을 고려하고, 모든 것을 외부의 요인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작은 단위인 개인들만으로 사회와 같은 특수하고 우월한 존재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개인의식-집단의식이 구성하는 문화에 주목해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뒤르케임은 슬그머니 오늘날 현대 사회학자들이 주목하는 문화사회학적 문제의식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사회는 무엇보다도 사상의 총합”이라는 표현이다. 뒤르케임이 살아 있었던 당시에는 문화라는 표현도 프랑스에서는 생소했다. 따라서 그는 그 대신에 ‘집단표상’ 또는 ‘집합적 가치의식(conscience collective)’이라는 표현을 맥락에 따라 자유롭게 바꿔 썼다. 그의 주장을 현대사회학식 용어로 표현하면, 사회학은 인간이 살고 있는 물질적 기반과 그 유형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심리, 영혼 및 정신 상태에 주목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도덕과학으로서 사회학의 핵심적 연구대상의 하나는 특정 사회의 여론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의식을 통해 서로 연결돼 있으며, 집단신앙은 모든 사회의 살아있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회학자들이 고려해야 할 특정한 연구대상은, 인간들의 정신과 의식의 만남이라는 생화학적 결합과 종합을 통해 원래의 개별적 인간 의식 속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들로서는 예측할 수도 없는 새로운 사회현상들의 우발적 탄생에 주목하는 것이다.

즉, 사회구성원들 간의 격렬한 만남을 통해 만들어진 집단표상은 일단 형성되면, 서로 결합되고 배척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정신적ㆍ심리학적 법칙을 지닌 전체를 만들어 낸다.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표현하면 문화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집단생활의 표상들은 인간 정신의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게 된다.

결국 뒤르케임에 의하면 집단표상으로서의 종교적 신앙과 과학 사상들은 그것이 활동하고 있는 사회의 단순하고 순수한 반영이 아니라, 자체만의 힘으로 존재하는 특별한 형식을 가지며, 인간의 공동체적 삶이 있는 곳에서 그 구성원의 속성을 뛰어넘는 종합적ㆍ창조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특정 사회의 도덕은 개인의식이 집단의식과 연결됨으로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사회는 조직과 기능체계가 아니라 도덕적 생활의 근원이다. 그리고 사회의 진정한 기능은 그 안에서 기존의 사회적 이상을 극복하는 새로운 이념을 찾아냄으로써 새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도덕적 이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칸트의 관점을 빌리면 사회는 개인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단체일 뿐만 아니라, 개인을 더 인간답게 고양시켜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집단생활이 개인들에게 강요하는 도덕적 훈련을 통해 개인의 영혼은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도덕적 훈련 없이 발전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의 도덕적 권위에 복종함으로써만 해방되는 것이다. 이때 집단표상으로서의 문화는 공동체 생활을 발전시키고, 인간을 더 인간답게 완성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다.

그리고 문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정신적 생활의 조건들을 준비하면서 인류의 장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사회학의 목표는 일부 학자들이 성급하게 비판한  조악한 형태학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과 방법론으로 세기말적 전환의 시점에 당시의 정신문명의 흐름들을 포착하고 분석할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그러한 작업을 하는 학문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비록 한 세기 전에 논의된 논문들이지만, 뒤르케임의 이러한 학문적 논의들은 오늘날 뒤르케임의 문화사회학에 관심을 갖는 사회학도들에게 커다란 시사점을 준다. 그가 세기말의 혼란한 시점에서 다양한 사회주의 이론과 혁명적 이론들이 조악한 방식으로 프랑스 사회의 문화적 대안을 마련하고 있을 때, 학자로서 차분하고도 냉정한 자세를 잃지 않으면서, 다양한 분야의 경험적 연구의 뒷받침을 받아 도덕사회학 작업을 완성함으로써 프랑스 사회의 새로운 정신문화적 기초를 마련하고, 새로운 학문인 사회학이 소명의식과 사회적 유용성을 인정받고 출범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것은 21세기 초반 탈냉전ㆍ세계화의 시대에 10여 년간 네오 마르크스주의을 부둥켜안고 한국사회의 문화적 대안을 마련하려 했던 지식인들과 그 와중에서 심각한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와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했던 한국의 시민들에게 작지만 소중한 이론적 발상의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민문홍,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대우교수·사회학 / 필자는 프랑스 소르본느대에서 ‘사회주의 운동, 노동조합운동, 카톨릭 사회운동을 보는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맏았다. 현재 국제 비교사회문화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학』, 『사회학과 도덕과학』 등의 저서가 있다.

 

[참고]

민문홍 :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Paris-Sorbonne(파리 4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대학원 강사, 서울 신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국제비교사회문화정책연구소 소장으로 인문사회학 분야의 저술 및 번역활동을 하고 있으며, 서강대 대우교수로 있다. 문화사회학회와 한국이론사회학회 이사로 있으며, 1998년부터 구세군 사관학교에서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회학과 도덕과학>, <한국인의 일상문화>가 있으며 역서로는 <무질서의 사회학적 위치>가 있다.

1. 사회학과 도덕과학, 민문홍 (지은이), 민영사, 1994년 10월, 10,000원

2.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학, 민문홍 (지은이) | 아카넷 | 2001년 7월, 20,000원 [이 책은 1988년 프랑스 쏘르본느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학위논문인 「사회주의 운동, 노동조합운동 카톨릭 사회운동을 보는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학」의 후속편이다. 필자는 이 학위논문의 중심이 되는 내용인 뒤르케임 사회학의 지성사적 맥락을 사회학과 도덕학에 소개한 바 있다. 그 이후 10여 년 간 필자는 프랑스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사회학 공동체에서 나온 뒤르케임의 사회학에 관한 연구작업들을 정리해서 한국의 사회학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본격적인 뒤르케임 연구서를 쓰고 싶어했다. 이러한 작업은 당연히 뒤르케임의 현대성론과 탈현대성론 그리고 동양사회론을 포함해야 했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데 10년 가까운 독서와 학문적 토론이 필요할 줄은 필자 자신도 몰랐다. - 민문홍(지은이)]

3. 유럽연합의 공무원연금제도 연구, 민문홍 (지은이) | 공무원연금관리공단 | 2005년 6월, 10,000원
4. 현대사회학과 한국 사회학의 위기 - 한국 사회의 인문사회학적 대안을 찾아서, 민문홍 (지은이) | 길 | 2008년 4월, 25,000원 [이 책은 다음의 세 가지 관심을 복합적으로 담고 있다. 첫째, 나는 30년 넘게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사회학도의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서 넓은 의미의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진단하고 해결해가는 방법을 검토해보았다. 둘째, 유럽의 중도 우파적 전통을 가진 대표적 사회학자의 이론을 소개한 후에 그 이론적.방법론적 시각을 중심으로 한국의 몇 가지 주요한 사회문제들을 분석해보았다. 셋째, 이러한 문제들을 중심으로 지금 한국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한국의 사회학자들이 중점을 두어서 탐구해야 할 전략적 연구 영역과 연구 주제의 이론적 틀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서문 | 21세기 한국 사회학은 어디까지 왔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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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 1 (탄생 100돌-2008/11/28)

1/3. 레비스트로스 탄생 100돌 ‘구조주의 학술 파티’

‘구조·탈구조와 우리’ 주제, 김형효·최용호 교수 등 인류·철학자들 논문 발표, “구조주의 영향 되짚을것”

 
대표작 <슬픈 열대>와 <야생의 사고>로 친숙한 프랑스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사진)가 28일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 신화·결혼규칙·요리체계 같은 사회문화적 현상의 심층에는 ‘형제와 자매’ ‘구운 것과 끓인 것’ ‘손님과 친족’ 같은 이원적 대립의 구조가 자리잡고 있음을 밝혀낸 레비스트로스는 언어학의 로만 야콥슨, 정신분석학의 자크 라캉과 함께 구조주의 시대를 열어 젖힌 20세기 지성계의 거목으로 꼽힌다. 인간의 의식이나 사회 제도가 생물학이나 개인 심리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의 관계망’ 속에서 구성된다는 구조주의의 발견에 대해 20세기 지성사는 “데카르트 이래 인류가 자부해 온 주체의 존엄성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든”(푸코) 혁명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93년 <보기 듣기 읽기>라는 비평집을 낸 뒤 모든 대외 활동을 접었던 까닭에 레비스트로스의 존재는 15년 가까이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다. 그사이 프랑스에서는 지난 5월 그의 저술 7편이 갈리마르출판사의 ‘플레이아드 총서’로 묶여 나온 것을 계기로 <누벨 옵세르바퇴르> 등의 매체가 ‘레비스트로스 특집’을 대대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100번째 생일을 일주일 남짓 앞둔 19일 현재까지도 프랑스를 제외한 서방 언론의 반응은 조용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주의의 변방’ 한국에서 그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열린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레비스트로스는 헤겔·하이데거로 상징되는 독일 철학과, 미드·래드클리프브라운 등의 영미 인류학에 밀려 변변한 학맥조차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기호학회가 22일 서울 덕성여대에서 ‘레비스트로스 탄생 100주년-구조·탈구조와 우리’라는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선 원로 학자인 김형효·임봉길 교수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10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최용호(한국외대)·박여성(제주대)·김기국(경희대)·윤성노(숭실대) 교수 등 인류학·철학·불문학·국문학계에서 구조주의 방법론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와 관계를 맺은 학자들이 총출동한다.

 

 

 » 1981년 10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한한 레비스트로스(오른쪽에서 두번째) 부부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해 전통 한옥구조를 둘러보고 있다. 한길사 제공 
  
사실 레비스트로스와 한국의 인연이라면, 그가 1981년 10월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한해 20일 가까이 머물며 경주와 통도사 등을 방문한 뒤 돌아갔다는 것 정도다. 그의 존재가 알려진 것도 1968년 방한한 프랑스 문학비평가 질베르 뒤랑이 강연을 통해 그의 이름을 언급한 뒤, 같은해 잡지 <사상계>에 3회에 걸쳐 ‘레비스트로스 기획’이 연재되면서부터다. 개인적 친분을 유지하는 학자도 그의 대표작 <신화학> 1·2권을 번역한 임봉길 강원대 교수가 유일하다. 임 교수는 프랑스 인류학의 대가 마르셀 모스 밑에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수학한 조르주 콩도미나스 교수에게서 인류학을 배웠다. 임 교수는 “3년 전 번역한 <신화학> 1권을 레비스트로스 교수에게 보냈더니 ‘표지 디자인이 좋다. 한글도 아름답다’는 내용의 친필 답장을 보내왔다”며 “지난해부터 기력이 쇠해져 파리의 집에서 칩거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89년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이라는 책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사상을 국내에 본격 소개한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구조주의의 ‘학문적 시민권’ 획득이 지연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프랑스어를 모르고, 또 구조주의 이론 자체가 워낙 난해하니까 철학이나 인류학 쪽에서는 제대로 소화를 못했다. 게다가 감정으로 모든 것을 결단내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선험적 구조’를 중시하는 구조주의가 설 자리가 있었겠는가.” 송효섭 기호학회장은 “포스트모던과 탈구조가 논의되는 21세기의 시점에서 그의 이론과 방법론은 아직도 달성해야 할 목표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며 “구조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내의 석학과 중진, 신진기예를 망라해 그의 탄생 100년이 던지는 의미와 공과를 짚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기사등록 : 2008-11-19 오후 07:36:24 ⓒ 한겨레)

 

 

2/3. 위의 기사에서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언급해준 덕분에 찾아보니 이런 게 있다.

Le centenaire de Lévi-Strauss : Un Indien dans le siècle

Nº2269 / SEMAINE DU JEUDI 01 Mai 2008 < Le Nouvel Observateur < Un Indien dans le siècle
Père tutélaire du structuralisme, à la fois philosophe et ethnologue, l'auteur de «Tristes Tropiques» va avoir 100 ans et entre en Pléiade. Il est l'auteur d'une oeuvre considérable dont la portée est universelle

 

Cent ans de solitude à travers un âge contemporain qu'il n'aura guère aimé. Cent ans d'une vie sereine et discrète, indifférente à tous les projets de récupération, à contre-courant de toutes les modes. Si Claude Lévi-Strauss a profondément marqué la pensée de son temps, jamais ce dernier n'a recueilli le moindre éloge de la part du grand ethnologue, qui lui a toujours préféré la compagnie des mythes bororo, des opéras de Wagner ou de la prose dix-huitiémiste de Rousseau, le seul maître-penseur qu'il se reconnut vraiment, à l'exception peut-être de l'auteur des «Mémoires d'outre-tombe».


«Il n'y a plus rien à faire : la civilisation n'est plus cette fleur fragile qu'on préservait, écrivait-il dans «Tristes Tropiques» en 1955, le livre unanimement salué par Bataille, Aron ou Blanchot, et qui le révélera au public. L'humanité s'installe dans la monoculture; elle s'apprête à produire la civilisation en masse, comme la betterave.» Emprise totale de l'homme sur une nature massacrée, destruction accélérée de toute diversité culturelle à travers le globe, ainsi le chercheur désenchanté, qui n'avait jamais envisagé sérieusement de transformer politiquement le monde, a-t-il aussi fini par renoncer à le sauvegarder. «Ce n'est pas pour perpétuer cette diversité que je lutte, déclarait-il ainsi dès 1967, à la parution du deuxième volume des «Mythologiques», mais pour en préserver le souvenir.»(*) Conserver la mémoire sensible d'une danse nambikwara ou le geste d'une main qui allume le feu, contre une barbarie technicienne et marchande en passe d'imposer partout sa paix blanche et de stériliser tout germe de création spirituelle à venir, c'est ainsi que Lévi-Strauss a modestement conçu son travail. Curieuse situation à cet égard que celle des ethnologues, qui ne doivent l'existence de leur discipline qu'à un colonialisme destructeur de «tout ce à quoi nous attachons du prix», soulignait-il lors de son premier cours au Collège de France en 1959. C'est sur le conseil de Paul Nizan que le jeune agrégé de philosophie affirmera avoir choisi cette voie, comme porte de sortie à l'enseignement. En 1935, à 27 ans, il se retrouve ainsi au Brésil, découvrant la vie d'«épuisement physique et mental constant» de l'ethnologue de terrain. Un certain absolutisme l'y poussera également. Avec la philosophie occidentale, il aurait eu l'impression de «s'arrêter à mi-chemin», dira-t-il, de se borner aux enceintes mentales bâties par la Grèce et par Rome, à cette civilisation à la fois très tardive et très circonscrite dans l'espace qui, depuis des milliers d'années, s'était servie de la pensée dite «primitive» comme d'un paillasson. Avec l'ethnologie, au contraire, il ambitionne d'embrasser la totalité des expériences humaines connues ou possibles, et ainsi d'«aller jusqu'à l'extrême limite de ce qui était le but même de la philosophie».

[대충 요약하면] 레비스트로스는 문화 다양성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가속화에 반감을 갖지만, 그렇다고 (거창하게 맑스처럼) '세계를 변혁하기'에 심각한 정치적 고려를 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는 말하길, "내가 투쟁하는 것은 문화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문화 다양성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기술과 상품이 갖는 야만의 (문화에) 대항하는 그런 기억 말이다. 아마도 이런 야만은 우리 모두를 가격에 옭아매게하는 파괴적 식민주의의 결과일 것이다. -하여튼 아주 겸손한 투쟁목표다, 이게 누군가에게는 더 거창한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A ce donquichottisme revendiqué, Lévi-Strauss, issu d'une lignée juive d'origine alsacienne, consentira parfois du bout des lèvres une autre explication. Comme tant d'autres, ce petit-fils de rabbin versaillais expérimente l'antisémitisme des années 1930. «On m'a traité de sale juif dès l'école communale...» Et encore au lycée, où il répond par le coup de poing. «Se découvrir subitement contesté par une communauté dont on croyait être partie intégrante peut conduire un jeune esprit à prendre quelque distance à l'égard de la réalité sociale, contraint qu'il est de la considérer simultanément du dedans où il se sent et du dehors où on le met.» Une situation qui, si elle le mènera d'une certaine façon au «regard éloigné» de l'ethnologue, ne le poussera jamais au rejet d'une identité française que Lévi-Strauss revendiqua toujours «intégralement et exclusivement». «Je me sens concerné par le sort d'Israël, affirmera-t-il des années plus tard, de la même façon qu'un Parisien conscient de ses origines bretonnes pourrait se sentir concerné par ce qui se passe en Irlande : ce sont des cousins éloignés...»

레비스트로스는 어릴 적부터 '나쁜 유대인'이라고 놀림과 배척을 당했고, 이런 경험이 그가  "동화-통섭-합류 / 배제-배타-거부" 등의 어휘를 인류학 연구에 꾸준히 적용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Revenu du Brésil, le jeune chercheur ne prend pas tout de suite la mesure du danger hitlérien. En septembre 1940, il a même la ferme intention d'occuper le poste au lycée Henri-IV où il vient d'être nommé. «Avec le nom que vous portez, aller à Paris ? Vous n'y pensez pas ?», l'avertit le fonctionnaire de Vichy chargé d'examiner son dossier. Ce sera donc l'embarquement sur un vieux rafiot pour New York, Lévi-Strauss bénéficiant du plan de sauvetage des savants européens menacés par les nazis initié par la Fondation Rockefeller. Arrivé sur place, son nom pose encore problème... mais cette fois c'est à cause des fameux blue-jeans. On lui conseille de le changer sans quoi les étudiants «would find it funny» -, et on lui confie sans tarder un cours de sociologie contemporaine de l'Amérique du Sud, dont il ignore alors presque tout.

 

Ces années new-yorkaises seront d'une fécondité exceptionnelle. C'est là qu'il s'attelle à la rédaction des «Structures élémentaires de la parenté», dépouillant des monographies ethnologiques du monde entier. C'est là aussi qu'il côtoie les surréalistes, Breton, Ernst ou encore Duchamp, qui lui communiqueront le goût des rapprochements abrupts et imprévus, procédé esthétique qu'il transformera en méthode d'analyse. «Nos soirées me faisaient penser, toutes proportions gardées, aux précieuses ou à l'Hôtel de Rambouillet», dira-t-il en 1985, au moment de la parution de «la Potière jalouse». C'est aussi à New York, pendant ces années de guerre, qu'il fera la rencontre intellectuelle décisive, celle du linguiste Roman Jakobson. «Je faisais du structuralisme sans le savoir. Jakobson m'a révélé l'existence d'un corps de doctrine déjà constitué.» C'est une illumination. Une dizaine d'années après son retour en France en 1945, Lévi-Strauss sera devenu la figure emblématique de ce mouvement aujourd'hui encore mal compris.


Le «structuralisme», pour dire les choses simplement, est avant tout une façon de ne pas se laisser duper par le sentiment de l'identité personnelle. A rebours de l'existentialisme sartrien, Lévi-Strauss entre en guerre contre le «sujet», «cet insupportable enfant gâté qui a trop longtemps occupé la scène philosophique, et empêché tout travail sérieux en réclamant une attention exclusive». Ainsi se place-t-il résolument du côté de la «rationalité sans sujet» contre les tenants du «sujet sans rationalité». Du marxisme, sa pensée hérite l'idée que toute conscience sociale est trompeuse et que l'existence pratique des hommes conditionne leurs productions psychiques. Du freudisme, celle que même les expression!s en apparence les plus arbitraires voire absurdes de l'esprit peuvent être déchiffrées. Ainsi Lévi-Strauss se lance-t-il dans un inlassable décryptage des invariants et tracés obligatoires qui se dissimulent derrière l'apparente infinité des mythes et autres faits culturels.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반대하여 주체에 대항(한겨레 기사의 푸코 발언 참조)하는 전쟁에 돌입하며 이렇게 말한다 : "이 참을수 없는 응석받이 아이(사르트르)가 너무 오랫동안 철학 무대를 장악했고, (실존주의에) 일종의 배타적 주목을 주창하며 모든 진지한 연구를 가로막았다."

 

Claude Lévi-Strauss / né en 1908, Claude Lévi-Strauss est le fondateur de la théorie structuraliste française. Philosophe de formation, il devient ethnologue au Brésil dans les années 1930. Elu en 1959 à la chaire d'anthropologie sociale du Collège de France, il y enseignera jusqu'en 1982. Académicien depuis 1973, il est notamment l'auteur de «Tristes Tropiques» (1955), de «l'Homme nu» (1971) et de «Regarder, écouter, lire» (1993), tous publiés chez Plon.

Aude Lancelin / Le Nouvel Observateur

  

 

3/3. 탄생 100 주년 기념 신문 기고문 3편


Lévi-Strauss depuis le temps / par DENIS KAMBOUCHNER

Le philosophe en rupture de philosophie et anthropologue aura 100 ans le 28 novembre

On dira «le siècle de Lévi-Strauss». Lui n’en croit rien. «Le siècle de…», quelle présomption ! Cela ressemble à tout ce qu’il faut fuir, formules, slogans et hyperboles. La moindre décence l’indiquera : un siècle n’est à personne. Et d’abord, quel siècle ? Quand on a commencé sa vie dans le Paris de Proust, avec ses restes de campagne et ses voitures à chevaux, et qu’on l’achève à l’âge d’Internet, cela fait bien trois siècles en un.

Et puis, songez à l’héritage : un monde si dévasté. Laideur industrielle, océans de déchets, espèces et cultures éteintes en nombre, et l’agressivité démultipliée par le numérique… Non, pas son siècle. Le siècle qui aura été le sien, de cœur, s’il y en eut un, c’était il y a longtemps, disons : pas après les années 60. La «civilisation mondiale» qu’annonçait la fin de Race et histoire, nous y sommes, et elle n’est, comme prévu, «civilisation» que par antiphrase.

Pas le sien, donc - et pourtant le siècle est là, qu’on ne franchit pas par hasard. Sans une rare endurance doublée d’un régime de chaque jour, impossible d’y compter. Était-ce un but ? A soi seul, non bien sûr. Regarder, écouter, persévérer dans sa propre veille, la parfaire encore, oui, si l’on veut, c’est là le but. Mais dans le cas de Lévi-Strauss, longueur de vue aura rimé avec longévité.

Lettres. Depuis longtemps, sans pose aucune, cet homme s’est installé dans une forme d’intemporalité. N’imaginez pas une absence. Retiré, oui, il l’est depuis longtemps, sortant fort peu, ne se mêlant à rien qu’il n’ait choisi. Mais le fait provient d’avant la retraite, et va de pair avec une merveille d’attention : à preuve ses lettres toujours si exactes, dans leur belle encre terre de Sienne. Tout est là, dans ce sens de la correspondance, ce juste emploi du temps et cette très ancienne courtoisie.

 

De même pour l’œuvre. Quand donc Lévi-Strauss s’est-il, à sa manière, installé dans l’intemporel ? Lui le sait peut-être, nous non. Mais on peut répondre : quand son style a été formé. Ce style se reconnaît, comme celui des plus grands, à quelques mots. Voyez le début des Structures élémentaires de la parenté (1947) : «De tous les principes avancés par les précurseurs de la sociologie, aucun n’a, sans doute, été répudié avec autant d’assurance…». Ou sur un autre registre celui, si fameux, de Tristes tropiques (1955) : «Je hais les voyages et les explorateurs. Et voici que je m’apprête à raconter mes expéditions. Mais que de temps pour m’y résoudre !» Rien ne fut jamais mieux frappé. C’était l’autorité d’un Descartes ou d’un Bergson (pour lui deux figures adverses), ou encore celle d’un Bach, d’un Poussin, d’un Montaigne, avec une extrême ouverture du champ, et le soin apporté à chaque nuance.

Masques. Grand style classique ? Bien sûr. Poli dans le solide lycée des années  20, mais surtout nourri de toutes sortes d’expériences : société, conversations, paysages, peinture, musique, littérature, philosophie, histoire et politique - action comprise, comme de rigueur à l’époque. Le fruit, en somme, d’une culture intensive et très tôt plurielle dans un esprit d’avance indépendant. De quoi nous renvoyer tous à notre éducation bancale, et à nos ignorances, qui sont légion. Pourquoi le nier ? L’œuvre de Lévi-Strauss a eu d’emblée quelque chose à voir avec le musée. Ainsi au départ de la Voie des masques (1979). Le musée : non simple collection publique ou privée, mais conservatoire d’une multiplicité rendue sensible et lisible. Pourtant, le musée n’est pas son espace : ce que cette œuvre donne à voir est tout en extérieur. Ouvrez au hasard le même livre : «Il n’est donc pas dépourvu de sens, ni de portée, qu’une version kwakiutl du mythe de l’amant-chien s’achève sur un repas de Scorpénidé rouge» (p. 212). Cette poésie du symbolique est partout, et avec elle toute une nature et toute une vie de peuples presque disparus. L’intemporel ne tient pas simplement ici au style ni à l’espace : tout autant à la substance, immémoriale, et au regard qui distingue tout.

Philosophe en rupture de philosophie («la pensée» s’enivre si souvent de son verbe…), Lévi-Strauss avait fait une exception pour Spinoza. De la connaissance la plus haute, Spinoza dit qu’elle est «éternelle». Et donc, quiconque a cultivé ce genre de connaissance, «la plus grande partie de son esprit est éternelle». L’idée a sa tradition, qui remonte aux Grecs. Ses objets étaient tout autres. N’empêche : aux prises avec une complexité chatoyante et condamnée, les grands livres de Lévi-Strauss, dont ses Mythologiques, réalisent quelque chose de cette éternité.

Lévi-Strauss, dernier stoïcien ? néoplatonicien dissident ? Non, s’il vous plaît, pas de formules. Et quant au «siècle», oui, il s’y est mesuré. Mais pour la profondeur du temps, c’est encore peu. (Liberation Culture 13 nov. 6h51)

 

 

Il nous a anticipés / par Patrice Maniglier 

Quand je suis entré à Normale-Sup, au début des années 1990, Lévi-Strauss était complètement absent du paysage philosophique. Il y avait un repli de la philosophie sur elle-même, et ceux qui, dans ma génération, s'intéressaient au monde contemporain, étaient nourris par des auteurs comme Deleuze, Foucault, Derrida, voire Wittgenstein. Le structuralisme passait pour une théorie des systèmes immobiles, que ces philosophes-là avaient dépassée en faveur d'une pensée du changement.

Or quand j'ai lu Lévi-Strauss, j'ai eu la surprise de découvrir un penseur fasciné par la variabilité des cultures humaines, et qui considére que rien n'a de sens sinon ce qui est en train de se transformer. Au moment des débats sur le pacs, et alors que certains utilisaient Lévi-Strauss pour justifier le refus d'accorder des droits aux couples de même sexe, j'ai eu l'impression que ses textes étaient au contraire un instrument propre à éclairer ce qui avait changé pour que le mariage ou l'adoption par des couples de même sexe deviennent soudain au moins pensables, alors qu'ils ne l'étaient pas vingt ans auparavant.

Dans un autre domaine, il permet de comprendre comment la philosophie peut se nourrir d'un film pour teenagers comme Matrix : non pas en proposant une interprétation profonde, mais en acceptant qu'un film hollywoodien, comme le mythe selon Lévi-Strauss, n'a pas un sens figé, et qu'il en produit en combinant des aspects de la culture très éloignés les uns des autres, la religion et la bande dessinée, le cinéma et la métaphysique. Bref, qu'on se veuille "post-moderne", "queer" ou "pop", Lévi-Strauss nous a anticipés, il nous a situés ; et il nous a justifiés mieux que nous ne l'avions fait.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6.11.08. LE MONDE | 25.11.08 | 10h28  •  Mis à jour le 27.11.08 | 10h03 / Patrice Maniglier est philosophe, professeur à l'université d'Essex (Grande-Bretagne). Propos recueillis par Jean Birnbaum)
  

 

L'absolue fragilité des sociétés / par Stéphane Breton   

Que découvre-t-on lorsqu'on lit Lévi-Strauss pour la première fois ? L'existence d'une chose que l'on a pourtant sous les yeux, "la société", que tout dans nos habitudes modernes conspire à dissimuler ou à juger scandaleuse, aliénante, contraire à notre frénésie d'émancipation. Et cette société, qu'on trouve aussi bien chez les Indiens du Mato Grosso que chez les habitants des pays industrialisés, en elle tout se tient, c'est cela qu'on lit dans Lévi-Strauss. Bouger une pièce change l'équilibre général.

C'est pourquoi elle est si fragile : pas tant sous le coup des crises que dans l'érosion désinvolte des habitudes et des valeurs qui vont de soi et sur lesquelles repose notre vie la plus simple. C'est cette éblouissante fragilité des sociétés lointaines ou proches qu'après être devenu ethnologue j'ai voulu peindre dans mes films documentaires : en recréant une totalité, en saisissant une atmosphère plus vaste que les personnages.

L'homme à la caméra et l'ethnologue ont au moins une chose en commun. Ils savent que ce qu'ils observent, ce ne sont pas seulement des "agents", mais une société. Ce n'est pas de manière neutre qu'ils voient ce qui leur est étranger, mais selon leurs propres habitudes de pensée. Ils savent aussi que lorsqu'ils regardent quelqu'un, celui-ci les regarde en retour, équipé de "sa" culture. C'est toujours une société qui en regarde une autre.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6.11.08. LE MONDE | 25.11.08 | 10h28 / Stéphane Breton est ethnologue et cinéaste au Musée du quai Branly, où il dirige la collection de films documentaires "L'usage du monde". Propos recueillis par Patrick Kéchichian)

 

 

[기타] 

Lévi-Strauss a 100 ans / A l'occasion du centenaire de l'anthropologue, aujourd’hui, le musée parisien du Quai Branly organise une série de manifestations en son honneur. DOMINIQUE POIRET, http://www.liberation.fr/culture/1101216-levi-strauss-a-100-ans:i-2 [사진모음] 

Lévi-Strauss, l'éternel retour / L’anthropologue et philosophe a cent ans aujourd’hui. L’Humanité de vendredi rend hommage avec quatre pages spéciales à l’inventeur du structuralisme, qui a parcouru les sociétés humaines pour en faire surgir les rationalités ancestrales. Avec entre autres un entretien avec Vincent Debaene, qui a coordonné et préfacé le volume des Œuvres de Claude Lévi-Strauss dans la Pléiade. Ainsi que des points de vue de Emmanuel Terray, Christian Bromberger, Marc Augé, http://www.humanite.fr/Levi-Strauss-l-eternel-retour [뤼마니떼에는 특집으로 신문 네 면을 할애했다는 말만 있고 내용은 아직 안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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