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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1~5)

여성혁명가들을 통한 '외도'를 한참 했던 고종석이 유럽식 새 학년도의 시작과 더불어 다시 돌아와 자기의 주전공에 대한 '썰'(說)을 풀어나갈 모양이다. 한국일보에 월요일 아침마다 오른다는 썰의 장에 걸린 정식 문패는 '말들의 모험'이고 보조문패는 '언어학 카페'인 듯하다. 소쉬르, 촘스키, 야콥슨 등의 고전적 언어학자들을 딛고 고종석 특유의 친근한 숨결을 어떻게 딱딱할 언어학에 불어넣을 지가 상당히 기대된다. 막 세상을 떠난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주의의 개척자라면, 언어학의 대부인 소쉬르는 -고종석의 아래 인용 말처럼- "자신이 구조주의자인 줄 몰랐던 [최초의] 구조주의자"일 것이다. 이제 구조주의는 한물갔는지 모르겠지만, 소쉬르 언어학은 -오래전에 CLG를 잠시동안 맛뵈기 수준으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언어 속에 숨겨진 사실관계를 (구조적으로?) 누설하는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으므로 '한물 가고말고'와는 무관한 고전일 것이다. 따로 소쉬르나 언어학을 다시 공부할 여가(여력)가 내게 더는 없을 듯하니, 고종석의 '카페'를 가볍게(!) 따라가며 부족한 공부가 저절로(?) 되길 희망해 본다. [이 포스트에 링크는 계속 추가해 가겠지만 내용은 가능한한 더더 압축적 펌으로 이어갈듯... 사족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고종석이 '유럽통신'인가 어딘가에서 부드러운 글쓰기를 위하여 선택한 편짓글 문체가 나중에는 더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더라는 스스로의 술회를 어디선가 본 듯한데, 비슷하게 나도 이번 연재물의 싹싹한 서울식 대화체가 쫌 불편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내가 너무 촌놈이고 너무 오랫동안 삭막한 서술체에 익숙해진 탓이리라.]

 

연재, 고종석의 말들의 모험  

http://news.hankooki.com/hotissue/gi_sr_view.php?page=1&mode=sr&parent_id=414 

 

1. 호모 로쿠엔스… 오지랖 넓은 '말들의 수다'가 시작된다.
2. 말투·억양 달라도 소통 하는 건 머리 속 '개념 지도' 같기 때문
3. 번역 과정의 애씀이 그를 이해하는 과정
4. 어떤 번역어도 완벽할 수는 없어
5. 번역어는 보석상자 

 

 

<1> 연재를 시작하며

 
오늘부터 월요일 아침마다 독자를 찾을 '말들의 모험'은 말에 대한 수다입니다. 그 말은 한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같은, 인류가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쓰는 자연언어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로쿠엔스(말하는 인간)로 만든 언어, 사람을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만든 언어 말입니다. 에스페란토처럼 세계어를 지향해 특정한 개인이 만든 인공어나, 컴퓨터 언어처럼 의미를 정확히 연산하기 위해 수학자나 철학자들이 고안해낸 논리언어, 개미들의 화학적 언어나 벌들의 비행(飛行)언어처럼 인류 이외의 동물들이 의사를 주고받기 위해 쓰리라 짐작되는 유사언어는 우리 눈길을 받기 어려울 겁니다. 부제에 '언어학'이라는 말이 들어있으니, 일종의 언어학 에세이가 되겠지요. [...]

 

사람들이 언어에 지적 관심을 기울인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르지만, 언어학이 분과학문으로 자립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입니다. 그리고 이 학문은 20세기 들어 만개합니다. 특히 20세기 중엽에 구조주의라는 사조 또는 방법론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휩쓸면서, 언어학은 얼마동안 학문의 제왕으로까지 군림하게 됩니다. 구조주의의 발원지가 언어학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조주의'에서 '구조'(structure)는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라는 뜻입니다. 언어가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일반언어학강의>('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줄여서 CLGㆍ1916)라는 책이 출간되고부터입니다. CLG의 저자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라는 스위스 언어학자입니다. 꼼꼼한 독자라면, CLG의 발간년이 소쉬르의 몰년(沒年)보다 뒤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CLG는 소쉬르가 죽은 뒤에 나왔습니다. 소쉬르가 <일반언어학강의>라는 제목의 유고를 남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제네바대학에서 일반언어학을 가르쳤을 뿐입니다. 소쉬르는 이 대학에서 일반언어학 강의를 세 차례(세 학기)에 걸쳐 했습니다. 첫 번째 강의는 1907년 1월부터 그 해 7월까지, 두 번째 강의는 1908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세 번째 강의는 1910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진행됐습니다(일반언어학은 말 그대로 언어 일반에 대한 학문적 탐구를 가리킵니다. 이에 견주어 한국어학, 영어학, 일본어학처럼 특정 자연언어를 대상으로 삼는 학문은 개별언어학이라고 합니다. 소쉬르가 제네바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891년 겨울학기부터고 정교수가 된 것은 1896년입니다. 그는 제네바대학 초기에 산스크리트어학이나 프랑스어학 같은 개별언어학을 가르쳤습니다). CLG는 소쉬르의 이 세 차례 일반언어학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노트를 밑절미 삼아 샤를 발리와 알베르 세슈에라는 언어학자가 편집한 책입니다.

 

[...] 영향력을 기준으로 삼을 때, 19세기를 대표하는 언어학자가 소쉬르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언어학자가 노엄 촘스키(1928~)라는 데에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겁니다. 물론 20세기 사람 촘스키만이 아니라 19세기 사람 소쉬르 역시, 그 영향력이 행사된 시기는 20세기입니다. [...] 촘스키의 <통사구조론>('Syntactic Structures'ㆍ1957)에서 싹을 틔운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 줄여서 TG)은 20세기 언어이론에 말 그대로 혁명을 불러왔습니다. 이 혁명적 언어학을 촘스키는 같은 제목의 저서에서 '데카르트 언어학'(Cartesian linguistics)이라고 불렀습니다. 지식의 계보에서 촘스키가 과연 데카르트의 적통(嫡統)인지를 두고 지성사적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이 유대계 미국인이 합리주의와 심성주의(mentalism)의 실로 20세기 주류 언어학의 피륙을 짠 것은 확실합니다.

 

다시 소쉬르로 돌아가 봅시다. 소쉬르 언어학은 두 권의 책에 망라돼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CLG고, 다른 하나는 1922년 파리에서 간행된 <페르디낭 드 소쉬르 학술논문집>입니다. 이 논문집에는 21세의 소쉬르에게 학문적 명성을 안긴 '인도-유럽어 모음들의 원시체계에 관하여'(1878)를 포함해, 그 때까지 확인된 소쉬르의 글들이 모두 묶였습니다. 이 책은 소쉬르의 지적 조숙과 천재를 넉넉히 증명하지만, 그를 구조주의의 아버지로 만든 것은 제자들이 편집한 CLG입니다.언어가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라는 생각은 CLG에서 여러 차례 피력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구조'라는 말로 명시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체계'(systeme)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해 CLG에서 반복되는 '체계'라는 말은 20세기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조'와 거의 같은 뜻입니다. 조르주 무냉이라는 프랑스 언어학자가 소쉬르를 '자신이 구조주의자인 줄 몰랐던 구조주의자'라고 일컬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CLG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언어학의 유일하고 진정한 대상은, 그 자체로서 또 그 자체만을 위해 고찰되는 언어다." 언어학의 대상을 좁고 엄격하게 규정한 이 문장은 소쉬르 사상의 한 핵심으로 널리 인용돼 왔습니다. 그러나 CLG 독자들은 이 마지막 문장과 맞닥뜨리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CLG의 뒷부분은 지리언어학이나 언어인류학 같은, '그 자체로서 고찰되는 언어' 바깥에까지 눈길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뒷날 소쉬르 연구자들은 소쉬르 수강생들의 강의 노트에 이 구절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문장은 발리와 세슈에가 자의로 끼워 넣은 것입니다. 실상 이들은 소쉬르 만년에 이미 제네바대학 강사 노릇을 하고 있었던 터라, 스승의 일반언어학 강의 중 가장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라 할 세 번째 강의를 거의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쉬르의 생각은, 언어학이 언어와 관련된 모든 영역을 그 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로만 야콥슨(1896~1982)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소위 프라하학파를 이끈 이 러시아 출신 미국 언어학자는 1953년 인디애나대학에서 열린 언어학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언어학자다. 언어와 관련된 것 중 내게 무관한 것은 없다."(Linguista sum: linguistici nihil a me alienum puto.) '말들의 모험'도 야콥슨의 이 오지랖넓은 언어학과 친할 것 같습니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입력시간 : 2009/09/27 21:31:07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09/h2009092721310584330.htm

 

 

<2> 랑그의 언어학과 파롤의 언어학 (10/04일)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0421142986330.htm
[...] 소쉬르는 언어기호의 특징으로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첫째는 자의성(恣意性)이고 둘째는 선조성(線條性)입니다. 기호의 자의성이란 특정한 시니피앙과 특정한 시니피에의 결합에 아무런 내적 필연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牛'라는 시니피에가 한국어에서는 {s-o}(소)라는 시니피앙과 결합하지만, 독일어에서는 {o-k-s}(Ochs)라는 시니피앙과 결합합니다. 선조성은 기호 전체의 특성이 아니라 시니피앙의 특성입니다. 시니피앙은 그 청각적 본질 때문에 시간 속에서 전개되며 , 따라서 선(線)의 특성을 갖는다는 거지요.

 

<3> 번역이라는 고역(苦役) (上): 번역 과정의 애씀이 그를 이해하는 과정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1121405384330.htm

<4> 번역이라는 고역 <中>: 어떤 번역어도 완벽할 수는 없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1821382986330.htm

<5> 번역이라는 고역 <下>:  번역어는 보석상자 (10/25)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2521340086330.htm
새 번역어들이 주검 상태에서 생기를 얻는 과정을 야나부 아키라(柳父章)라는 일본인 번역학자는 '카세트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카세트'는 보석상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잠깐 들어볼까요? "새로 만든 말은 카세트를 닮았다. 그 말 자체가 매력이다. 그리고 속에 깊은 의미가 틀림없이 담겼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사람들을 끌어서 자꾸 그 말을 쓰도록 부추긴다. 빈약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 신조어는 그 반복 사용 과정을 통해 이윽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처음엔 단지 아름다움 때문에 보석상자를 찾던 사람들이 끝내 보석을 간수하는 데 그 상자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미나 역할이 아니라 말 자체에 매혹되는 첫 체험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결국 그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말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보석상자 같은 것이다."(<번역이란 무엇인가>)
[파롤(parole)의 번역어인] '화언'이 영원히 빈 카세트로 남게 된다 해도, 역자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번역의 역사에서 끝내 빈 카세트로 남게 된 말은 무수히 많으니까요. 오히려 그 번역의 시도를 상찬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습니다. 번역은 한 세상에 또 한 세상을 들여놓아 세상을 입체화하는 엄청난 일이니까요. [...]

 

# 이어짐: http://blog.jinbo.net/radix/?pid=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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