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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왜곡된 건국신화/최갑수 (+이스라엘 좌파?)

이스라엘의 왜곡된 건국신화 / 최갑수 (경향 2009-01-08)

 

새해를 맞이해 희망의 노래를 합창해야 하는데, 올해는 벽두부터 마음이 무겁다. 대공황에 준하는 경제위기가 주요인이지만, 연말연시에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무자비한 학살극이 스산함을 참담한 전율로 바꿔놓는다. 중동 사태의 근원을 캐다 보면 유럽의 모순을 엉뚱하게 해외로 수출한 제국주의와 유럽 중심주의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의 칙칙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을 증폭시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막는 것 가운데 하나가 편향된 역사인식이다. 우리 사회 역시 기독교, 미국, 서방 여론의 영향 아래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중동 사태에 대한 공정한 이해를 심각하게 방해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학교 교육을 통해 가르치는 ‘유대민족사’를 보면,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토라’(율법)를 받은 이후 줄곧 존재해 온 유대 민족의 유일한 직계 후예다. 유대인들은 ‘출애급’ 하고 ‘약속의 땅’에 정착해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왕국을 세우나, 이후 왕국의 분할과 함께 결국 두 차례(기원전 6세기와 기원후 70년)의 유배생활을 경험한다. 2000년에 걸친 방랑(‘이산’)으로 유대인들은 예멘, 모로코, 스페인, 독일, 폴란드, 러시아 등지로 퍼져갔는데, 하지만 언제나 혈연적 관계를 유지해 민족성을 결코 상실하지 않았다. 이 역사 해석에 따르면, 19세기 말이 되면서 옛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나치의 대학살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유대인들이 오랜 염원을 실현해 성서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땅’에 정착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무주공산이며, 애초의 주민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처녀지이다. 거기에 살고 있는 소수의 아랍인들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며, 독자적인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에 속한다. 유랑민족이 땅을 되찾기 위해 벌이는 전쟁은 정당하며,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이 역사관이 신화에 불과한 것임을 입증하는 책들이 이미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온 ‘신 역사가들’의 논지를 요약한다. 먼저 성경을 역사서로 볼 수 있느냐이다. 종교적 진리를 민족교육의 토대로 만든 것이 19세기 후반기의 시온주의 역사가들인데, 최근 ‘신 고고학’ 등의 연구는 출애급과 관련한 ‘모세 오경’의 사실적 근거를 의심하며, 솔로몬의 왕국도 ‘영화’를 운위하기에는 소왕국에 불과했음을 지적한다. 또한 ‘바빌론 유수’에 대해서는 소수의 지배층만이 유배당했고, 기원후 70년의 ‘제2차 성전 파괴’로 유다왕국의 주민들이 유랑생활을 겪기는커녕 그대로 살다가 일부는 4세기에 기독교로, 대부분은 7세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렇다면 고대 이래 지중해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놀라운 사실은 고대에서 중세 초에 걸쳐 유대교 역시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기독교에 못지않게 중동과 지중해 세계에서 개종자들을 다수 확보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오늘날 쿠르드족의 거주지에 기원후 1세기에 있었던 한 왕국이 유대교를 받아들여 유대왕국이 되었으며, 5세기에는 예멘에 유대왕국이 들어서 그 후예들이 오늘날까지 신앙을 지켜왔다. 또한 7세기에는 북아프리카의 일부 베르베르족이 유대교를 받아들이고 아랍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에 동참해 일종의 공동정권을 이루었다. 대규모 개종은 8세기에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던 하자르족에게서 일어났다. 여기서 유대교는 우크라이나로, 13세기 몽골 침입 이후에는 동유럽과 독일로 퍼져나가 ‘이디시 문화’의 토대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국사학계’는 건국신화에 어긋나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가관인 것은 과학을 동원해 유대민족성의 유전학적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런 것이 발견될 리 만무하지만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인구의 약 4분의 1이 비유대인으로 간주되어 법적으로 국가에서 배제당한 상태인 반면에,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의 정식 시민임에도 전 세계 유대인들의 고국으로 자처한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의 비서실장 내정자인 람 이매뉴얼은 미국 시민이면서 이스라엘 군에 입대해 아랍군과 싸운 바 있다. 이스라엘 군이 이런 건국신화를 내면화하고 있다면, 하마스에 대한 ‘최종적 해결’은 강력한 정신무장의 지원을 받는 셈이다. 참으로 상상조차 싫을 정도로 무서운 일이다. (최갑수, 서울대교수·역사학, 경향 입력 : 2009-01-08-18:28:35ㅣ수정 : 2009-01-08 18:28:38)

 

 


 

 

이스라엘에 ‘좌파’는 존재하는가? / 장석준 (레디앙 2009-01-09)

 

(...) 이스라엘의 의회인 크네셋의 정당 분포를 살펴보자. 이스라엘은 100%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실시한다. 그래서 그런지 수많은 정당이 난립하고 있다. 현재 집권 연정을 주도하는 카디마당조차 득표율이 20%를 겨우 넘는 수준이다.

(...)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그들의 출신지에 따라 경제사회적 처지가 전혀 다르다. 부유층이 주로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한 서유럽, 미국 출신 이스라엘인들인 반면, 동유럽이나 북아프리카, 중동 출신 이스라엘인들은 대부분 빈곤층이다. 역설적인 것은 바로 이들 상대적 빈곤층, 소외계층이 주로 극우 정당들을 지지한다는 점이다.

(...) 리쿠드당과 함께 오랫동안 이스라엘 정치를 반분해오던 노동당도 위기 상태인 것은 마찬가지다. 노동당의 지지율은 심지어 한 자리 수로까지 폭락했다. 노동당은 이스라엘 노총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도 가입한, 유럽 기준으로 보면,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하지만 현재 가자 침공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국방장관 에후드 바라크가 노동당 대표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노동당 역시 강경 시온주의 세력일 뿐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블레어 식 ‘제3의 길’을 주장하고 있어서, 도대체 리쿠드당이나 카디마당과 차이가 무엇이냐는 핀잔을 듣는 형편이다. 다가올 총선에서는 아마도 노동당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것으로 보인다.

(...) 그럼 전쟁에 반대하는 좌파는 정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가의 원죄와 전쟁 반대의 대의 사이에서 동요하거나 그 세력이 너무 미약하다. 크네셋 안에는 우선 지난 총선에서 3.77%를 얻은 ‘메레츠-야차드’(‘생명력-다함께’)가 있다. 이 당 역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속해 있으며(즉, 사회민주주의 정당), 시온주의 내에서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흐름(현재는 ‘지금 평화를’이라는 평화운동 단체가 이 흐름을 대표)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 뿌리가 결국 이스라엘 건국이념과 잇닿아 있다 보니 ‘방어전’이라는 알리바이와 ‘평화’라는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다.

(...) 그나마 원칙 있는 반전 정당은 크네셋 안에 ‘하다쉬’, ‘통합 아랍 리스트-타알’ 그리고 ‘발라드’뿐이다. 이들의 득표율을 모두 합쳐도 8%가 조금 넘는 정도다. 이 중 통합 아랍 리스트-타알과 발라드(‘민족민주회의’의 약칭)는 이스라엘 내 아랍 주민들을 대변하는 정당들이다. 이스라엘 선관위는 이들 아랍계 정당들이 하마스, 헤즈볼라 등과 연계한다고 해서 정당 해산을 요청했지만, 대법원에서 가까스로 해산 판결을 면했다.

한편 하다쉬(‘평화와 평등을 위한 민주전선’의 약칭)는 이스라엘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정파들의 연합이다. 하다쉬는 이스라엘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아랍인과 유대인(대부분 북아프리카 출신 유대인)이 함께 참여하는 정치조직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는 거의 게토처럼 유폐당한 신세다. 예를 들어 하다쉬와 입장이 비슷한 평화운동 단체 ‘거쉬 샬롬’(‘평화 블록’)은 이스라엘 평화운동 안에서도 왕따 취급을 당한다.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인정하자고, 가자 지구를 포기하자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이스라엘의 정치 현실이다. 우리는 민주공화국은 진보좌파의 필수적인 정치 무대이며, 모든 민주공화국에는 대중적인 좌파가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분명히 민주공화국의 외양을 띠고 있는 한 나라, 이스라엘은 이러한 상식에 들어맞지 않는다. 어떤 국가 구성은 애초부터 인류사의 대의와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을, 미래의 희망이 과거의 제약을 넘어설 가능성 자체를 봉쇄할 수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사례는 말해준다.(끝) 레디앙 2009년 01월 09일 (금) 11:54:47 장석준 / 진보신당 정책실장


cf.) 이스라엘 양심 세력들이 힘 못쓰는 이유 / 박노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2218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라울 힐베르크 지음·김학이 옮김, 개마고원 / 서평-이세영, 090116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연구서”로 꼽히는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의 원제는 ‘유럽 유대인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다. 500만명 넘게 희생된 인류사의 비극을 ‘파괴’라는 건조한 언어로 기술했으니, 피해자인 유대인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 책이 출간된 1961년, 미국과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들은 책과 저자를 향해 분노와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책을 쓴 라울 힐베르크 역시 유대인이다. 힐베르크가 ‘파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는 학살을 기획하고 실행한 주체보다, 그 과정의 철저한 기계성익명성에 주목했다. 히틀러나 나치당이 아니라, 기계적 합리성을 원리 삼아 작동하는 독일 관료제와 조직화된 독일 사회 전체에 비극의 책임을 묻고자 했던 것이다.

힐베르크에 따르면 반유대주의 정책과 행동은 나치가 집권한 1933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시작은 4세기 로마였다. 이후 개종·추방·학살이라는 세 종류의 반유대인 정책은 유럽 역사를 통해 반복됐다. 나치 역시 처음에는 추방과 배제를 택했다. 당초 계획은 유대인들을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벌인 전쟁 때문에 장거리 대량수송이 불가능해지자 ‘유대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돼야 했다. 학살이었다. 힐베르크는 유대인 파괴가 세 단계로 진행됐다고 본다. 먼저 유대인의 개념이 ‘정의’됐고, 다음엔 유대인들이 게토로 ‘집중’됐다. 마지막 단계는 유대인의 ‘절멸’이었다. 정의와 집중 사이에 ‘약탈’이 끼어들었고, 집중과 절멸 사이에는 ‘노동착취’가 개입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치밀한 마스터플랜에 의해 진행된 게 아니었다. “파괴과정은 한 단계 한 단계 실행된 작전이었고, 행정은 한 단계 앞 이상을 내다볼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파괴가 어느 한 기관의 주도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힐베르크가 볼 때, 그것은 ‘파괴기계’라는 ‘집합적 총체’에 의해 실행됐다. 이 기계는 행정기구와 군, 기업, 나치당이라는 독일의 주요 기관들로 구성됐는데, 평범한 독일인 누구라도 그 기관의 부속이 될 수 있었다.

나아가 힐베르크는 유대인 자치기구와 학살센터의 유대인 노동대, 저항 없이 가스실로 향한 유대인들까지도 파괴기계에 포함시킨다. 이들의 순응과 체념이야말로 학살을 지극히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준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많던 유대인의 이웃들은 다 어디에 있었나. 힐베르크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은 일상에 몰두하며 중립을 지켰다. 그것은 위험도, 도덕적 부담도 지지 않으려는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힐베르크는 말한다. “희생자에 대한 도움을 막은 것은 무엇보다 자아 몰두였다. 공포와 트라우마에 시달릴 때조차 사람들은 정상적인 삶의 외관에 매달렸다. 파블로 피카소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장 폴 사르트르는 극본을 썼다. 그들처럼 고상한 야망이 없는 사람들은 영화와 스포츠와 술로 향했다.” 말하자면 악은 일상의 도처에 있었다. 일상적인 관료행정과 일상적 생계활동, 그리고 일상적 자아실현에. 그 일상은 불타는 가자시티를 구경하며 환호하는 홀로코스트 유대인의 후손들과, ‘팔레스타인 잔혹극’이 방영중인 텔레비전 앞에 앉아 ‘모진 이웃’ 만나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위안받는 우리들의 삶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세영 기자, 한겨레 기사등록 : 2009-01-16 오후 06: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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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국가에 대한 사상가 (Kervegan 서평)

L’État selon Carl Schmitt / par Jean-François Kervégan (28-08-2008)
Sandrine Baume, Carl Schmitt penseur de l’État. Genèse d’une doctrine, Paris, Presses de la Fondation Nationale des Sciences politiques, 2008, 316 p., 24 euros.

서평: 슈미트가 말하는 국가 / 쟝-프랑수와 케르베강(*). 서평 대상: 산드린 봄므, <슈미트, 국가에 대한 사상가. 독트린의 연원>, 빠리, 2008. [*서평자는 헤겔 <법철학>의 불어판 최신 준거본을 1998년에 번역한 빠리 1대학 철학교수. 참고로 아래 서평에서는 년대가 좀 중요하니(나찌때문에!) 슈미트의 긴 생존기간(97세)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1888-1985.]

Carl Schmitt, penseur de l'Etat : Genèse d'une doctrine

 

Issu d’une thèse en sciences politiques soutenue à l’Université de Lausanne, ce livre, d’une lecture aisée et agréable, examine en son entier développement la théorie de l’État de Carl Schmitt, en accordant comme il se doit, puisque c’est durant cette période qu’elle s’est développée, toute leur importance aux écrits des années 1914-1945. C’est dire que les écrits postérieurs à la fin de la 2e guerre mondiale, où la question de l’État est moins centrale – puisque la conviction de Schmitt est que désormais « l’ère de l’État est à son déclin » (La notion de politique, Préface de 1963) – ne sont pas au centre de l’examen, qui se concentre plutôt sur les textes datant de la période de Weimar, que l’on s’accorde au demeurant à considérer comme la plus féconde de la très longue carrière intellectuelle de celui qui se définissait dans son Glossarium comme un « théologien de la science juridique ». De même, les écrits de la période nazie, à l’exception de l’ouvrage Le Léviathan dans la doctrine de l’État de Thomas Hobbes (1938, trad. Le Seuil, 2002) ne sont guère sollicités ; non pas que Sandrine Beaume veuille masquer les aspects les plus déplaisants de la production schmittienne – elle s’explique tranquillement, dans son Introduction, sur « les ruptures révélatrices » qui la traversent, celle de 1933 étant certainement la plus profonde – mais parce qu’elle estime, selon moi à juste titre, que les écrits de la période nazie sont tout simplement moins intéressants, du point de vue de la théorie politique, que ceux des années 1920. 

 

[대충번역] 이 책은 산드린 봄므(Sandrine Baume)의 정치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씌어진 것으로, 슈미트의 국가이론 발전 전반을 쉽고 친근한 언어로 점검해 낸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저자는 슈미트의 1914-1945년 사이의 글들에 방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 했는데, 그것은 슈미트의 국가이론이 바로 그 시기에 체계적 발전을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2차세계대전 이후에 이뤄진 슈미트의 저작에서는 국가문제가 덜 중심적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때 이래로 "국가의 세기는 침체국면으로 접어든다"는 슈미트의 믿음 때문이다(<'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 1932(1927-art.) 서문 참조). 마찬가지로 나찌 기간(1933~45)에 씌어진 슈미트의 저술도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는데, 이는 그것들이 1920년대의 저술보다 정치이론적 견지에서 덜 흥미롭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단, 슈미트의 1938년 저작인 <홉스의 국가이론 속에서의 레비아탄>(註1) 만은 예외적인 경우가 되겠다. (결국 이 논문의 저자가 슈미트의 국가이론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은 나찌 기간 이전인 주로 1920년대 라는 말씀.)
  

Il y a à cela, indépendamment de la répulsion que l’on éprouve face au caractère antisémite et platement flagorneur à l’endroit des nouveaux maîtres de Berlin de textes comme Staat, Bewegung, Volk (1933 ; trad. État, Mouvement, peuple, Kimé, 1997), une excellente raison que Sandrine Beaume expose fort clairement : pour comprendre la doctrine schmittienne de l’État, il convient de « ne pas considérer d’emblée la République de Weimar dans sa fin tragique, mais davantage dans ce qui la précède » (p. 15) : l’effondrement de l’Empire wilhelminien à l’issue de la première guerre mondiale et, ajouterai-je volontiers, l’expérience traumatique de la Révolution allemande, et en particulier de l’éphémère Räterrepublik de Munich. Traductrice de la thèse d’habilitation de Schmitt (Der Wert des Staates, 1914 ; trad. La valeur de l’État et la signification de l’individu, Droz, 2003), Sandrine Beaume sait d’ailleurs mieux que quiconque que la pensée de Schmitt s’enracine dans la culture intellectuelle de l’Empire, qu’elle s’est construite en réaction contre la doctrine dominante de cette période, le positivisme de Gerber, Laband et G. Jellinek. Un tel argument, fort bien étayé, est sans doute la meilleure réponse que l’on puisse apporter aux tenants de la reductio ad Hitlerum, selon le mot de Leo Strauss. Il n’est même pas besoin de minimiser la durée et l’intensité de l’engagement de Schmitt (tentation à laquelle S. Beaume succombe lorsqu’elle affirme, p. 17, que Schmitt a été à partir de 1938 « chassé des cercles d’obédience nazie », ou lorsqu’elle écrit à tort, p. 23, que Schmitt « est contraint de quitter ses fonctions de Conseiller d’État au début de 1937 », alors qu’il les conservera, comme son poste d’Ordinarius à l’Université de Berlin, jusqu’à la chute du régime) pour montrer que le centre de gravité de sa pensée est extérieur et antérieur à cet engagement.

 

그러므로 슈미트의 국가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언제-얼마나 나찌정권에 협조를 했고-거리를 뒀고 하는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무게 중심은 현실참여 밖에 그리고 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이 책의 저자는 역설한다. 저자의 이런한 지적은, 그녀(Sandrine Baume)가 벌써 2003년에 슈미트의 교수자격논문인 "국가의 가치와 개인의 의미'(1914)를 번역해 낸 역자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경청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La thèse de l’ouvrage, dont il ne faut pas oublier que l’auteur n’est ni juriste, ni philosophe, mais politiste de formation, est que « la théorie schmittienne de l’État doit être comprise dans un vaste projet de réaménagement des équilibres entre les organes de l’État » (p. 267). Il faut comprendre : un réaménagement au profit de l’exécutif, seul à même de lutter de manière efficace contre le « désordre public » qui menace l’État constitutionnel-démocratique. Cette thèse est exposée et justifiée au chapitre 3 du livre. Elle n’est évidemment pas fausse : il est certain que tous les efforts de Schmitt, durant l’histoire convulsive du régime de Weimar, vont dans le sens d’une redéfinition plébiscitaire de la démocratie, ainsi que le montrent clairement sa controverse de 1931 avec Kelsen sur l’identité du « gardien de la Constitution » et les considérations développées en 1932 dans Legalität und Legitimität. Mais elle paraît restreindre trop étroitement le propos de l’auteur de la Théorie de la Constitution à un programme de reconstruction autoritaire du « grand et puissant Léviathan ». Non que cet aspect soit absent des écrits schmittiens, et notamment de ceux qui accompagnent la crise finale de la République de Weimar. Mais parce qu’il n’est lui-même intelligible qu’à partir de positions théoriques et philosophiques indépendamment desquelles, comme Sandrine Beaume en fait l’épreuve au chapitre 6 de son livre (« L’État au miroir de l’Église : l’institution en ‘réflexion’ »), les options politiques de Schmitt risquent d’apparaître inintelligibles ou gratuites. Schmitt n’est peut-être pas un « théologien du politique », comme le soutient Heinrich Meier (voir Die Lehre Carl Schmitts, 2e éd., Metzler, 2004). Mais sa pensée de l’État, objet du livre de S. Beaume, ne peut être reconstruite et évaluée en mettant entre parenthèses les engagements philosophiques (et religieux) de l’auteur de la Théologie politique.

 

[그건 그렇고] 이 책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슈미트의 국가이론은 헌정-민주 국가를 위협하는 '공적 혼돈'(désordre public)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투쟁으로써의 국가 장치들을 재 조정하려는 광범한 계획에 있다. 슈미트가 민주주의에 대한 인민투표적 재 개념화 작업과 합법성과 정당성을 고려한 헌정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한 점을 고려할 때, 저자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슈미트가 리바이어든의 크고 강력한 권위를 재구성해 내려는 기획에서 꾸려낸 <헌정 이론>을 너무 지엽적으로 해석한 측면이 있다. 슈미트는 아마도 누구의 말마따나 "정치적인 것의 신학자"가 아닐지는 몰라도, 국가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철학적(그리고 종교적) 개입을 괄호친 상태에서는, 우리의 <정치 신학>(1922)의 작가, 슈미트 사상의 어떤 재구성도 재평가도 불가능하다.

 

par Jean-François Kervégan, 28-08-2008; Si vous souhaitez critiquer ou développer cet article, vous êtes invité à proposer un texte au comité de rédaction. Nous vous répondrons dans les meilleurs délais : redaction@laviedesidees.fr.

 

 Livre - Le Leviathan Dans La Doctrine De L'Etat De Thomas Hobbes ; Sens Et Echec D'Un Symbole PolitiqueLivre - Theorie De La Constitution

 

(註1) 칼 슈미트의 1938년 저작인 <홉스의 국가론 속에서의 리바이어던>(*)이 2002년 11월에 불어판으로 처음 번역이 되어 바디우(A.Badiou)와 마담 까쌩(B.Cassin)이 주관(collection)하는 문지방(Seuil) 출판사의 "철학적 질서"라는 시리즈를 통해 출판됐었다. 더구나 이 번역본에는 발리바르(E.Balibar)가 59쪽이나 되는 장문의 서문을 쓰고, 독일인 W.Palaver라는 사람의 52쪽의 후문을 달고 나온 귀한 책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홉스철학을 주도하는 쟈르카(Y.-Ch. Zarka) 라는 자가 '어떻게 철학전문출판 시리즈 물에 이런 나찌철학자(정확히는 '철학적 나찌')의 저작을 출판할 수 있느냐'는 류의 비판기사를 르몽드 지의 한 면 전체를 할애받아 발표했다. 그러자 바디우는 침묵했고(이유는 모름), 마담 까생이 즉각적인 반박문을 아마 일주일 후에 같은 신문에 올렸고, 그 다음 주에는 발리바르가 '참으로 가소롭고 웃기는 도전'이라는 류의 같은 신문 기고문을 통해 쟈르카를 걷어찬 적이 있다. 그러고도 아마 다른 많은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됐고(벤사이드도 아마 참전), 그 이전에도 벌써 우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있어왔던 '반 나찌-친 유대'적 분위기가 쟈르카 같은 사람에게 용감하게 나서도록 추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대체로 쥐프(juif-유태인)계열과 중도-우파 성향의 교수-학자들이 광기어린 막말로 칼 슈미트와 기타 나찌에 연관이 있는 학자들을 비하-조롱하며 이어지는 조금은 덜 학술적인 논쟁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알랭 드 버누와스트(A.de Benoist)가 총정리로 빠짐없이 요약한 것이 바로 주석을 102개나 달고 2003년에 나온 "슈미트 그리고 찌질이들" (Carl Schmitt et les sagouins, Alain de Benoist, Eléments, n° 110, septembre 2003, http://www.grece-fr.net/textes/_txtWeb.php?idArt=180#note102) 이라는 긴 논문인데, 아주 훌륭하고 흥미롭다. 참고로, Benoist가 칼 슈미트의 아주 중요한 논문들만 모아서 1990년에 (그의 제자들을 시켜) 불어로 번역-출판한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Du politique)에 쓴 25쪽짜리 훌륭한 서문도 기억할 만하다. 즉, 그는 슈미트 전문가 이고 이런 심판의 글을 쓸 자격이 충분한 대가라는 얘기 정도.

 

(*) 놀랍게도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은 벌써 1992년에 <로마 가톨릭주의와 정치형태 홉스 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라는 이름으로 출판이 됐었던 것으로 알라딘 검색에 나온다. 물론 다른 대분분의 슈미트 번역본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품절이다. 슈미트 책 중에서 품절이 아닌 책은 그나마 가장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파르티잔>이란 이름 하에 번역된 슈미트의 1963년 책 '당원 이론'(Theorie des partisanen)이 유일하다. 심지어는 <대지의 노모스>(Der Nomos der Erde im Völkerrecht des Jus Publicum Europaeum, 1950 ; 불어본: Le Nomos de la Terre, PUF, Paris, 2001) 라는 책도 -물론 품절이지만- 95년에 번역이 됐다는 것이 놀랍다. 중요한 책인데 번역이 안 된 듯한 것으로는, -서평에서도 언급된- <정치 신학>(Politische Theologie (1922) et Politische Theologie, II (1970)), 그리고 <헌정 이론>(Verfassungslehre (1928); 불어본: Théorie de la constitution, PUF, 1993) 정도로 보인다.

Le Nomos de la terreLe nomos de la terre dans le droit des gens du Jus publicum europaeum

 

[뱀발] 지나가는 길에 주제넘는 참견 한 마디만 스스로 허용한다: 돈 때문이지 번역의 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가 한 번 유행이다 싶으면(요즘의 들뢰즈나 랑시에르 경우처럼) 우 달려들어 잽싸게 번역을 하고는 10년도 안 돼 품절당해 버리는 이런 출판 풍토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품절이 돼도 물론 도서관에서 빌려 보거나 복사 뜨서 볼 수도 있겠지만, 고전을 홀대해서 아무나 번역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렇게나 품절시켜버리는 행위도 참 무책임해 보인다. 다른 동네에서는 번역본 초판은 가격을 세게 때렸다가(번역자의 권위에 따라) 도서관이나 전문가들에게 다 풀리고 나면, 품절이 아니라 일반인 대상의 문고판으로 다시 나온다는데... 예컨데, <대지의 노모스> 같은 경우는 불어 번역본 2001년 초판이 60유로였다가(그래서 나는 살 생각도 못 했었다), 이제 보니 어느새 문고판으로 15유로에 작년 10월에 나와있다(이제 사야겠지만 그놈의 환율때문에 이제는 15유로도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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