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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3
    [audio]빅토르 위고 & 아프리카
    tnffo
  2. 2009/02/11
    다윈 탄생 200주년 (2월12일) [기사모음]
    tnffo

[audio]빅토르 위고 & 아프리카

우리의 대빵 만큼이나 부시와 친하고, 우리의 입 가벼운 지도자 만큼이나 방정맞은 사르코지가 또 말 실수를 한 모양이다. 얼마전에 사르코지가 아프리카의 세네갈엘 갔다가 "아프리카는 아직 역사의 장에 진입하지 못했다"('l'Homme africain n'est pas encore entré dans l'Histoire'")는 발언을 했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같은 곳을 방문한 -이번에는 사르코지와 지난 대선에서 경쟁했던 역시나 입도 생각도 별로 더 무겁지도 않은- 마담 로와얄(S.Royal)이 자기가 무슨 프랑스의 대표라도 되는 듯이 '프랑스의 이름으로' 사과를 한 모양이다("Pardon, pardon pour ces paroles humiliantes et qui n'auraient jamais dû être prononcées et - je vous le dis en confidence - qui n'engagent ni la France, ni les Français"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그 치욕의 발언을. 프랑스도, 그 어떤 프랑스인들도 감히 그렇게 내까리지는 전혀 말아야 했으며, -제가 신뢰로써 당신들에게 말하건데-  프랑스의 누구도 그 발언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좀스런 두 상황에 대하여, -이번에는 나 만큼이나 로와얄을 싫어하는- 모스코비시(Moscovici, 사진: 죠스팽 시절에 유럽담당장관을 지냈고 사회당의 핵심인물 중의 한 명)라는 사람이 어떤 방송 대담에서 로와얄을 비판 했다는데(*), 그의 일갈에 속이 다 시원하다: 사르코지가 싫든 좋든 지금 프랑스를 대표하고,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사르코지 한 명 뿐이다; 로와얄이 뭔데 감히 '프랑스의 이름으로' 사과를 하고 마고 하느냐; 비판을 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만, 뭔가가 잘못됐다; (그러자 사회자가 '그럼 로와얄이 자기가 도지사를 맡고있는 지방의 이름으로 사과를...'이라는 질문에) 뭘 구차하게 그럴 필요가 있느냐, 옛날에 대선후보면 후보고 지금 도지사면 도지사지,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간단하게 "개인의 이름으로 사과를 하고 강력한 비판을 하면 된다, 봐라, 얼마나 깔끔하냐!"(밑줄).

(*) Moscovici : Royal ne peut s'exprimer "au nom de la France" // Pierre Moscovici (PS) a critiqué, dimanche 12 avril, la façon dont Ségolène Royal a demandé pardon à Dakar pour les propos controversés sur l'Afrique tenus au même endroit en 2007 par Nicolas Sarkozy, estimant qu'elle ne pouvait pas le faire "au nom de la France". Ségolène Royal a "raison sur la critique du discours de Nicolas Sarkozy" mais "je suis plus réservé sur le fait de demander pardon au nom de la France", a déclaré le député et ancien ministre lors du "Grand rendez-vous" Europe1/Le Parisien/TV5Monde. "Il n'y a qu'une personne qui peut s'exprimer au nom de la France, c'est Nicolas Sarkozy, il n'y a qu'une personne qui peut demander pardon pour des propos maladroits - qui sont les siens d'ailleurs - c'est Nicolas Sarkozy. Il n'y a pas de contre-président en France", a poursuivi M. Moscovici. Comme on lui demandait si Mme Royal aurait dû demander pardon au nom "du Poitou-Charentes", sa région, il a répondu : "elle pouvait demander pardon en son nom personnel ou exprimer sa critique forte. Voilà. C'est déjà pas mal!". Le 6 avril à Dakar, s'exprimant au siège du PS sénégalais, Ségolène Royal avait déclaré : "quelqu'un est venu ici vous dire que 'l'Homme africain n'est pas encore entré dans l'Histoire'". "Pardon, pardon pour ces paroles humiliantes et qui n'auraient jamais dû être prononcées et - je vous le dis en confidence - qui n'engagent ni la France, ni les Français", avait ajouté l'ex-candidate PS à la présidentielle. (LEMONDE.FR avec AFP | 12.04.09 | 18h57)

 

Pierre Moscovici. AFP/JEAN-PIERRE MULLER / Pierre Moscovici.

 

뭐, 이건 단순 흥미기사로서 블로그의 포스트 감도 안 되겠지만, 이렇게 엮여서 빅토르 위고가 1879년에 아프리카와 관련해서 행한 연설문의 짤은 발췌문이 관련기사로 함께 있기에 그것을 퍼오려고 포스트를 만든다(**). 이 연설문이 우연히 관련기사가 된 것은 아니고, 여기서 빅토르 위고가 사르코지와 비슷한 내용의 발언을 이미 한 적이 있어서(Quelle terre que cette Afrique ! L'Asie a son histoire... ; l'Afrique n'a pas d'histoire ; une sorte de légende vaste et obscure l'enveloppe. 아 슬픈 아프리카여! 아시아도, 아메리카도, 호주도 모두가 인류의 기억 속에 기록된 역사를 갖건만, 아프리카는 역사가 없습니다, 단지 그 땅 만큼이나 광활한 일종의 전설만이 희미하게 아프리카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논쟁점이 된 모양임. 논쟁에 개입할 처지는 못 되고, 잠시 빅토르 위고의 연설 시점과 노예해방에 대한 역사를 간략히 살펴본다:

 

1776년, 디드로의 <백과사전> '니그로' 항목에서 벌써 "흑인 노예매매가 종교, 도덕, 자연법, 인권을 해친다"고 비판했다니,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이 노예해방을 촉발했다고 볼 수 있겠다. (en France, l'article « traite des nègres » de L’Encyclopédie rédigé par Louis de Jaucourt condamne l'esclavage et la traite : « Cet achat de nègres, pour les réduire en esclavage, est un négoce qui viole la religion, la morale, les lois naturelles, et tous les droits de la nature humaine. »)
1788년, 혁명 1년 전에 '브리소'라는 사람은 '흑인친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노예매매금지를 목표로 천명. (Brissot créa la Société des amis des Noirs dont l'objectif affirmé est l'interdiction de la traite négrière.)
1792년, 혁명의회는 피부색에 따른 차별없이 모두에게 완벽한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결의. (l'Assemblée nationale décide d'accorder la pleine citoyenneté à tous les libres de couleur.)
1802년, 쿠데타에 성공한 나폴레옹은 '제한적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역주행을 함. (par la loi du 20 mai 1802, Napoléon maintient l'esclavage dans les territoires restitués comme la Martinique à la suite du traité d’Amiens.)
1848년, 다시 2월혁명으로 열린 프랑스 제2공화국에서 노예제도폐지의 칙령이 공인되다. (le deuxième décret d'abolition de l'esclavage en France a été signé le 27 avril 1848 par Lamartine.)
1865년, 미국에서의 노예제도 폐지. (l'esclavage dans les États Unis d'Amérique est aboli suite à la guerre de sécession qui opposa les États du Nord aux États du Sud.)

1879년, 그러니까 1848년 칙령의 공인 후 31년이 지난 시점에서 아래의 빅토르 위고의 연설이 행해짐.

(**) Victor Hugo et l'Afrique, terre de "légende vaste et obscure"
Victor Hugo a-t-il inspiré Henri Guaino, la "plume" du discours de Dakar de Nicolas Sarkozy ? C'est ce que se demandait l'historien et écrivain congolais Elikia M'Bokolo dans la préface du Petit précis de remise à niveau sur l'histoire africaine à l'usage du président Sarkozy (La Découverte, 2008). Le souffle littéraire en moins, "les mêmes thèmes s'y retrouvent", écrit M. M'Bokolo. Sauf que, soulignait-il, les deux discours ont été prononcés en des temps qui n'ont pas grand-chose à voir l'un avec l'autre. Ainsi, le 18 mai 1879, Victor Hugo prenait la parole à un banquet commémoratif de l'abolition de l'esclavage, trente et un ans plus tôt :

"Quelle terre que cette Afrique ! L'Asie a son histoire, l'Amérique a son histoire, l'Australie elle-même a son histoire qui date de son commencement dans la mémoire humaine ; l'Afrique n'a pas d'histoire ; une sorte de légende vaste et obscure l'enveloppe. Rome l'a touchée pour la supprimer ; et quand elle s'est crue délivrée de l'Afrique, Rome a jeté sur cette morte immense une de ces épithètes qui ne se traduisent pas : Africa portentosa. (qui tient du prodige, merveilleuse). (...) Les hardis pionniers se sont risqués et, dès leurs premiers pas, ce sol étrange est apparu réel. (...) Cette Afrique farouche n'a que deux aspects : peuplée, c'est la barbarie, déserte, c'est la sauvagerie, mais elle ne se dérobe plus. (...)

Au dix-neuvième siècle, le Blanc a fait du Noir un homme ; au vingtième siècle l'Europe fera de l'Afrique un monde. Refaire une Afrique nouvelle, rendre la vieille Afrique maniable à la civilisation, tel est le problème. L'Europe le résoudra. Allez, Peuples ! Emparez-vous de cette terre. Prenez-la. A qui ? A personne. Prenez cette terre à Dieu. Dieu donne la terre aux hommes. Dieu donne l'Afrique à l'Europe. Prenez-la."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10.04.09. LE MONDE | 09.04.09 | 14h05)

 

더불어, 빅토르 위고가 익히 1849, 1867, 1876 년에 각각 평화, 미래, 세르비아 등의 문제에 대해 행한 연설문도 얼마 전에 본 기억이 있어서 잊어버리기 전에 미리 모셔다 둔다. 유감스럽게도 연설문을 읽어주는 사람이 아저씨였으면 좋았을텐데 아줌마가 읽는다. 그래도 무척이나 장엄한 투로 깊고 무겁게 읽는 마담의 목소리가 나쁘지는 않다.

 

HUGO, Victor - Discours humanistes (Compilation)
Livre audio gratuit posté le 20 juillet 2007.
http://www.litteratureaudio.com/livre-audio-gratuit-mp3/victor-hugo-discours-humanistes.html 

Donneuse de voix : Romy Riaud | Durée : 9min | Genre : Discours

Eugène Delacroix -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Victor Hugo était un homme particulièrement engagé, les yeux sans cesse tournés vers son idéal. Ici, quelques extraits de ses discours sur les États-Unis d’Europe.

 

Présentation de Victor Hu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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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grès de la paix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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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venir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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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ur la Serbie (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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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sulter la version texte de ce livre a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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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탄생 200주년 (2월12일) [기사모음]

1/5) 다윈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런던 AP=연합뉴스) 찰스 다윈의 200번째 생일인 12일을 전후해 영국에서만도 300개가 넘는 각종 축제와 전시 등 기념 행사가 열려 그의 생애를 조명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증언들을 내놓고 있다. 72명에 이르는 다윈의 고손자녀 가운데 하나인 루스 페이들은 진화론이 일반 기독교 신도들의 분노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신앙심 깊은 다윈의 아내 에마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다윈이 책을 빨리 출판하지 않은 것도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였다는 것이다. 페이들은 "에마는 남편이 신을 점점 멀리 밀어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이 문제에 관해 속속들이 대화를 나눴고 에마는 '내 마음을 상하지 않으려고 당신의 이론을 바꾸지 말라'고 격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특별사업 책임자인 봅 블룸필드는 다윈이 아내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던 것 뿐 아니라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자신의 이론이 어떤 논란을 빚을 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윈은 진화론을 단순한 가설로서가 아니라 많은 관찰과 사실로 뒷받침되는 설명으로 제시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는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무쇠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제시하기 원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저술 내용이 증거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진정한 과학자였다"고 말했다.

 

자연사 박물관에는 5년에 걸친 비글호 항해 기간 다윈이 수집한 수천 점의 표본과 함께 그의 일기장들도 전시돼 있는데 여기에도 그의 빈틈없고 분석적인 접근방법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심지어 결혼의 이점과 단점까지도 꼼꼼히 짚고 있다. 장점이라면 평생 동반자이자 노년에는 친구가 돼 줄 아내가 있다는 것, 집안에 음악과 여성 특유의 한담이 넘친다는 것. 그러나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밤 늦게까지 독서를 할 자유를 잃는다는 것, 번거롭게 찾아오는 일가친척들, 그리고 책이 아닌 아이들에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참 생각한 끝에 다윈은 결국 독신 생활은 할 것이 못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늙어 비틀거리는 몸으로 친구도, 자식도 없이 냉담한 인간이 돼 주름진 자기 얼굴을 들여다 보는 외톨이 생활은 할 수 없다"고.

 

페이들은 다윈의 일기에 그의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면서 "그는 극도로 호기심이 많아서 항상 `어떻게 이렇게 될까?'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다윈은 결혼한 뒤 가족 모두를 연구에 동원했다. 그는 피아노 뚜껑 위에 지렁이가 가득 담긴 병을 올려놓고 아내에게 피아노를 치게 해 지렁이가 음악에 반응하는 지를 관찰했다. 지렁이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손자인 스티븐 케인스(81)에 따르면 다윈은 꿀벌들이 가는 길을 알기 위해 자기 자녀들을 시켜 꿀벌들에게 밀가루를 던지게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벌에 쏘였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윈은 지극히 자상스러운 아버지여서 연구 작업 중에도 언제든 아이들이 서재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또 표본을 빨리 가져올 수 있도록 서재 의자에 바퀴를 달아 오늘날의 사무실 의자 같은 것을 만든 발명가이기도 했다.

 

다윈은 런던 동물원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 곳에서 제니라고 불리는 오랑우탄과 친한 사이가 됐다. 그는 제니에게 입으로 부는 오르간을 주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도록 했다. 제니는 사육사가 사과를 주지 않으면 어린애처럼 토라지기도 했는데 얼핏 보기에 사소한 것 같은 이런 관찰이 인류의 영장류로부터의 진화에 관한 그의 이론을 발달시킨 것이다. 런던 동물원의 베키 코 교육국장은 "다윈은 동물들, 특히 영장류의 표정이 사람과 얼마나 비슷한지에 큰 관심을 가졌다"면서 그가 자신의 이론의 모든 측면에 물질적 증거를 찾기 위해 동물원을 수없이 드나들었다고 밝혔다.

 

페이들에 따르면 다윈은 말년에 병석에 누웠을 때 창가의 식물이 햇빛을 향해 구부러진 것을 보고서도 `어떻게 저렇게 할까?'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항상 관계에 대해 생각했고 그 결과 자연선택을 이해하게 됐다. 그는 모든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과 경쟁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종들이 언제나 햇빛과 물과 먹이를 놓고 경쟁하기 때문에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페이들은 말했다. 그는 고조 할아버지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십중팔구 DNA와 면역체계를 연구하고 있을 것이며 인터넷에 매달려 엄청난 양의 e메일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c)연 합 뉴 스 2009-02-10 09:53 송고)

 


2/5) "다윈의 진화론 바탕은 노예제 혐오" 
 
(서울=연합뉴스) 진화와 종의 기원에 관한 찰스 다윈의 혁명적인 사고의 바탕에는 노예제도에 대한 강력한 혐오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 새로운 책이 출판됐다.    에이드리언 데즈먼드와 제임스 무어 등 두 작가가 공동 집필한 `다윈의 신성한 대의(Darwin's Sacred Cause)'는 흑인과 백인이 별개의 종이라는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에 다윈이 어떻게 이처럼 놀라운 이론을 내놓게 됐는지 그 과정을 찬찬히 보여주고 있다고 BBC뉴스 인터넷판이 보도했다.

 

저자들은 갈라파고스의 앵무새와 핀치새, 코끼리거북과 땅늘보가 다윈의 진화론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의 마음 밑바닥에서는 그가 목격한 야만적인 노예제도에 대한 혐오감이 떠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다윈 일가의 편지들과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의 기록 등 수많은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다윈이 직접 표현하진 않았지만 `노예제도 철폐'라는 신성한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했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5년동안 항해하면서 흑인 노예들이 채찍질과 고문을 당하는 광경을 생생하게 목격했으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예들에게 "자식들을 팔아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주인들의 얘기를 가장 끔찍하게 여겼다. 다윈은 이에 대해 "피를 끓게 만드는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윈은 1831부터 1836까지 비글호 여행을 끝내고 런던에 정착했으며 1838년 `자연선택' 이론을 발표한 뒤엔 켄트주의 다운 마을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는 1845년에 발표한 비글호 항해기에서 흑인 노예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항의 한마디 못하는 자신이 어린애처럼 무력하게 느껴졌다"고 표현했지만 귀국 후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뒤집는 이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다윈이 1858년까지 이렇다 할 저서나 논문을 발표하지 않은 것은 당시 다른 학자들로부터도 제기되기 시작한 진화론이 케임브리지 대학 학우들 사이에서 극도의 혐오감을 자아냈던 현실로 미뤄볼 때 이해가 가는 대목이라고 저자들은 지적했다. 당시 한 자연연구가는 진화론에 대해 "혁명가들이 토해 놓은 역겨운 쓰레기"라고 매도했고 실제로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교회 세력의 기반인 창조론 신화를 뒤집기 위해 독자적인 진화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다윈의 교수였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애덤 세지위크는 1844년 진화론에 관한 한 책을 "추잡한" 것이라면서 "경멸, 멸시, 조롱" 등의 표현을 쏟아붓을 정도였다.

 

저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다윈이 침묵을 지키면서도 서로 다른 여러 종의 `공동조상'이라는 반노예적 이론의 근거를 제시하게 된 동기를 그의 가정 배경에서 찾고 있다. 다윈의 외할아버지인 조시아 웨지우드는 유명한 도자기 업체 소유주로 웨지우드사의 대표적인 카메오(양각 세공품)에는 무릎 꿇은 흑인 노예가 "나는 사람이 아니고 형제가 아닌가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조시아는 장장 5만6천㎞의 항해를 통해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는 노예무역의 실태를 조사한 반노예 운동가 토머스 클라크슨에게 자금을 대기도 했다. 다윈의 외삼촌이자 장인인 조스 웨지우드는 런던의 전시장 매각대금을 반노예단체에 기부했으며 영국 깃발 아래 노예의 모습과 함께 "신은 하나의 피로 모든 민족을 만드셨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상표를 사용했다. 당시는 아메리카에서 아직도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1850년대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다윈은 에든버러 대학에 재학중이던 16살 해방된 노예와 들판을 누비면서 "친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이 무렵 영국을 방문한 미국인들은 백인과 흑인이 친구로 지내는 것을 "역겨운" 일로 간주했다. 저자들은 "다윈이 비글호 항해에서 돌아온지 몇 달 만에 공동자손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에 매달리기 시작했다"면서 과학 연구에 정치와 도덕이 개입하는 것을 `오염'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윈은 이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사례라고 강조했다. (youngnim@yna.co.kr (끝) (c)연 합 뉴 스 2009-01-30 10:21 송고)
 

 

3/5) 진화론의 본질은 자유다
 
찰스 다윈(1809~1882)은 매우 성공적인 개업의였던 아버지 로버트 다윈과 유명한 도자기 제조업자 웨지우드 가문의 어머니 수재너 사이에서 1809년 2월12일 태어났다. 다윈이 마을 학교에 입학하던 1817년 여름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슬픔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던 듯하다. 나이 차가 나는 세 명의 누나와 그 아래로 다섯 살 위의 총명한 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든버러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도 그의 곁에는 함께 공부하고 사냥을 다닐 형이나 사촌형이 있었으며, 아버지의 옛 동료들이나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이 있었다. 영국 군함 비글호로 남아메리카 연안을 누빈 경험과 그간의 연구 결과들을 출판하며 학계에 발을 내디딘 다윈은 외가 쪽 사촌 에마와 결혼해 런던에서 멀지 않은 시골인 다운에 정착했다.

 

그 뒤 다윈은 공식 행사를 멀리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끼던 열 살배기 딸이 죽었을 때도, 가장 가까웠던 동료인 라이엘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때도 그는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감정의 동요를 느끼면 심장의 박동이 불규칙해지는 것을 느꼈고 구토와 현기증이 이어지곤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 상태를 매일 기록하기 시작했고, 몇 군데 목욕치료 시설을 찾아다니며 장시간 찬물로 목욕하며 피부를 마사지하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치료에 집착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학계나 주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학자들은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편집해 출판하고 있는데, 그가 쓴 1만5천통 정도의 편지가 수집됐다. 경건한 종교인은 아니었지만 다윈은 또한 마을의 교구목사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공제조합을 설립했다. 그리고 매년 일정액을 기부하면서 죽는 해까지 들고 나는 소소한 금액을 꼼꼼히 기록하면서 조합 회계를 맡았다.

 

다윈이 쉰 살 되던 해에 출판된 <종의 기원>은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을 설파해 종교적 인간관을 깨뜨림으로써 당시 영국 사회에 충격을 준 혁명적 저술이라는 점이 강조돼 왔다. 하지만 다윈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은 이미 생물 종이 자연의 형성물로서 변해 왔음을 너무도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자유사상가였던 이래즈머스 다윈은 종교적 도그마를 비교적 자유롭게 해석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던 처가 웨지우드 가문 사람들의 종교관을 “추락하는 기독교를 떠받치는 솜털 이불”이라며 놀리기도 했다. 게다가 사실 <종의 기원>에 그려진 진화론으로 인해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연선택의 어두운 자연관으로 인해 삶의 궤도를 바꾸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19세기 영국인들이 다윈 진화론을 두고 논쟁을 벌였던 데는 영국교회 및 귀족층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사회와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는 중산층 및 전문인 집단 사이의 갈등이 그림자처럼 드러난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연구로부터 과학과 사회가 상호 작용하는 방식이 매우 다양하고 또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 다윈은 필연적인 자연의 진보를 부정했다. 하지만 그는 진화를 논하면서 자연과 사회가 진보해 온 과정을 되풀이 언급했다. 다윈은 노예제를 혐오했다. 하지만 그는 인종의 차이를 확신했고, 열등한 인종의 절멸을 당연한 자연법칙의 귀결로 보았다. 외가 및 친가의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아버지와 형을 통해 이어진 자유사상의 열망과 산업혁명기 영국 경쟁사회의 그림자가 다윈 자신의 삶과 그의 진화이론 속에 얽혀 있는 것이다. 지금도 다윈의 모습, 다윈의 과학이론이 너무도 다채로운 모습으로 그려지면서 과학의 이상과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도구가 돼 있다. 우리 자신은 지금 어떤 열망과 어떤 배경으로 다윈의 삶과 그의 과학을 바라보고 있는가? (김기윤/한양대 강사·전 한국과학사학회장/기사등록 : 2009-02-10 오후 06:15:19 ⓒ 한겨레)
 

 

4/5) 다윈 탄생 200주년..'新창조론' 부흥

 

(워싱턴 AFP=연합뉴스) 오는 12일 찰스 다윈의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미국에서는 과학자들과 종교 우파 간에 진화론을 둘러싼 해묵은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의 63%가 어떤 식으로든 창조론을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10년간 창조론자들은 교실에서 창조론은 빼놓은 채 진화론만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의 선택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이라며 창조론의 변종인 '지적 설계론'(Intelligence Design)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지적설계론은 '지적인 존재'가 자연을 창조했다는 이론으로 창조론의 변형된 형태지만, 기독교처럼 '하느님'을 직접 지칭하지는 않는다.

 

지난달 텍사스주 교육위원회 공청회에서는 진화론의 강점뿐 아니라 약점에 대해서도 과학교과서에 명시해야 한다는 법안을 놓고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이 열띤 논쟁을 벌인 끝에 교육위원회는 결국 진화론의 손을 들어줬다. 전미과학교육센터(NCSE)의 유진 스콧 소장은 "생물의 진화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화론에는 약점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2005년 캔자스주 교육위원회는 학교에서 진화론 외에 지적 설계론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한 바 있다. 반면, 1년 전 펜실베이니아에서는 학교에서 지적설계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해달라는 소송을 학부모가 제기해 승소하는 등 진화론 대 창조론을 둘러싼 논쟁은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하며 계속되고 있다.

 

미국 사법 역사에서 진화론 대 창조론의 논쟁 역사는 192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테네시주 데이튼에서 젊은 생물학 교사 존 스코프스가 창조론을 부정하고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져 벌금 100달러를 내야했다. 대법원은 1968년에 가서야 진화론 교육금지는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헌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이어 1987년에는 학교에서 창조론을 믿도록 강제하는 것도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위헌 판결을 내렸다. 사법체계를 통한 창조론의 확대가 난관에 부딪히자 이들은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즉 종교적 신념이 과학에 의해 탄압을 받고 있다며 아이들에게는 학교에서 지적설계론을 배울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

 

이후 각 주 교육위원회에서는 진화론 외에 창조론의 논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미국과학아카데미(AAS)는 최근 '신 창조론'(neo-creationism)의 부흥에 맞서 진화론을 옹호하는 웹사이트를 개설하기도 했다. 한편,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절반 이상이 어떤 식으로든 창조론을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퓨리서치센터 측은 미국인의 63%는 인간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 항상 존재해왔다고 믿거나, 절대자의 뜻에 따라 현재의 형태로 발전해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반면, 응답자의 26%만이 다윈이 밝힌 것처럼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해 인간이 현재의 형태로 진화해온 것으로 믿는다고 답했다. 이 센터의 데이미드 마스키 연구원은 "진화론을 가르치는 일은 이제 미국 '문화 전쟁'의 한 축이 됐다"고 말했다. (yonglae@yna.co.kr (c)연 합 뉴 스 2009-02-07 16:35)

 

 
5/5) 영국 영웅 다윈, 미국선 여전히 논란 / 다윈, 링컨과 같은날 탄생 200주년 맞아

 

(워싱턴=연합뉴스) 김재홍 특파원 =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16대 대통령과 진화론의 창시자인 영국의 과학자 찰스 다윈이 오는 12일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미국과 영국은 제각기 기념주화와 우표 발행 등 각종 기념행사로 추모 열기가 가득하다. 미국과 영국의 주요 언론 매체들은 앞다퉈 링컨과 다윈이 1809년 2월12일 같은 날 태어나 19세기에 누구보다도 세계의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거장이라고 평가하고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소개하며 이들의 발자취를 조명하고 있다. 일간 시카고 트리뷴은 8일 다윈과 링컨의 탄생 200주년이 다가오면서 이들의 영향력이 더욱더 커지고 있다면서 역사가들은 이들이 19세기 누구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많은 일을 했고 세계를 근대화로 이끈 인물들이라고 평가했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통해 진화론을 주장함으로써 종래의 과학과 종교, 사회적 사상들을 철저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링컨은 당시 불안전한 실험으로만 여겨졌던 미국의 민주주의 이념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 미국의 꿈에 생명과 가치를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 한 권으로 과학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다윈에 대한 미국에서의 평가는 아직도 논란이 가시지 않고 있다. 미 공영 라디오 방송인 NPR는 영국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지만, 창조론이 득세하는 미국에서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은 진화론은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며 존재의 이유에 물음에 대한 해답은 성격이 전혀 다를 수 있다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캔자스 대학은 종의 기원 초판본 1천250권 가운데 1권을 소장하고 있지만, 이번 다윈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고도 1쇄본을 전시하지 못하고 여전히 소장고에만 보관하고 있다. 영국이라면 다윈이 남긴 소장품 하나하나가 일반에 공개됐을 것이다. 고생물학자인 레오나드 크리시탈카 캔자스대 자연사박물관장은 이와 관련, "미국 34개주에 진화론에 반대하는 이런저런 종류의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며 이들 법안은 교과서에 스티커나 경고문 부착을 통해 이 책을 읽으면 정신건강에 해롤 수 있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창조론은 지적 설계론으로 변모해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 강력한 호응을 얻고 있다. NPR는 진화론을 둘러싼 "과학이 아닌 사회적 주도권을 놓고 이런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면서 "과학은 이미 다윈이 승자임을 선언했지만, 150년 전에 시작된 이런 주도권 논란은 줄어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미국의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R. 콘토스타는 작년에 링컨과 다윈을 비교한 최초의 역사서인 '반역의 거장'이라는 책을 통해 "링컨과 다윈 모두 혁명가들이었다"고 평가했다. 콘토스타는 "두 사람은 그들이 태어났던 세계를 지배했던 현실과 가치체계를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 뒤바꿔 놓았다. 그들이 남겨 놓고 떠난 세계에서 우리가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지금의 사람들처럼 느껴진다"고 밝혔다. 그러나 콘토스타는 다윈이 종의 기원을 오랫동안 세상에 내놓지 않고 있다가 자연과학자인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가 진화론을 자신보다 먼저 발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발표했다고 지적했다. 월리스는 당시 다윈과는 독자적으로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라는 동일한 개념에 착안한 자연과학자다. 콘토스타는 따라서 다윈의 진화론의 경우 (누가 하더라도 발표했을) 어떤 필연성이 있으므로 링컨이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역사는 링컨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jaehong@yna.co.kr (c)연 합 뉴 스 2009-02-09 10:09 송고)

 

 

* 다섯개의 기사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물론 "다윈 진화론의 바탕은 노예제 혐오"가 아닐까 싶다. 그 노예제가 또 링컨과 이렇게도 연결되는 것도 재미있고. 그러고보니 '그레고와르' (Abbe Gregoire, 1750~1831)라는 주교가 프랑스 대혁명기의 국회에서(아마도 1792~3년: 다윈이나 링컨이 태어나기 근 20년 전에) 벌써  '노예제 폐지'를 요청한 최초 주창자들 중의 1명이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 둘 만 하겠다. [Henri Grégoire, également appelé l'Abbé Grégoire est un prêtre français, l'une des principales figur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l'un des premiers à avoir demandé l'abolition de l'esclavage à l'Assemblée. -wiki-] 그리고, 참고: http://blog.jinbo.net/radix/?pid=37 친구들2) 다윈과 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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